*이 글에는 '성혜의 나라(202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9살, 아직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성혜의 삶은 무척 고달픕니다. 신문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죠. 성혜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드리는 착한 딸이 성혜입니다. 성혜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 승환도 있습니다. 승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죠. 남자 친구가 좀 의지할만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승환이 가난한 부모 탓이나 하는 말을 들으면 좀 철딱서니가 없어요. 자, 어떤가요? 이 두 연인의 앞날이 그려지나요?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2020)'는 소위 가진 것 없는 흙수저 MZ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줍니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성혜의 일상은 숨돌릴 틈도 없이 팍팍합니다. 신문 배달을 하러 나가서는, 원치 않는 신문을 넣었다고 주민의 항의를 받습니다. 신문 보급소에서 준 스쿠터는 고장 나기 일쑤죠. 편의점에서는 어떤가요? 매번 라면 먹고 그릇을 치우지도 않고 나가는 고등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성혜의 끼니는 삼각김밥입니다. 편의점에서 폐기해야 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죠. 성혜는 남자친구와 모텔에 가서도, 무료로 제공되는 세면도구를 알뜰하게 챙겨서 남자친구에게 줍니다. 그런 성혜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가끔 지나치는 애견 가게의 진열장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것입니다. 성혜는 휴대전화로 강아지가 노는 것을 찍습니다.

  성혜의 삶이 이렇게 고달파진 건 과거의 그 사건에서부터였습니다. 성혜는 틈틈이 입사 원서를 넣으며 취직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전의 직장에서 인턴을 하다 그만 둔 이력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면접관은 성혜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죠. 성혜는 인턴 때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 일을 고발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일 이후로 성혜의 삶은 말 그대로 꼬여버립니다. 취직은 쉽지 않고, 힘겨운 서울살이에다, 부모님의 어려운 처지도 모른 척할 수 없죠.

  대학은 나왔지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삶.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옵니다. 성혜의 친구는 빈곤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한국 청년 세대의 높은 자살률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관객은 성혜 친구의 죽음에서, 그것이 성혜가 겨우 버텨내고 있는 이 삶의 어그러진 결말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런 와중에 성혜가 살고 있는 월세방의 집주인은 보증금을 올리겠다고 말합니다. 집값이 높은 서울에서 성혜가 구할 수 있는 괜찮은 단칸방이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런 성혜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

  성혜가 느끼는 삶에 대한 막막함은 '미래가 없다'는 침울한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성혜는 승환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승환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어려운 집안 형편의 승환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성혜는 승환과 결혼해서 낳을 아이의 미래를 생각했을 거예요. 그 아이에게 자신보다 못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겠죠. 현재 우리나라의 저조한 출산율은 성혜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젊은 세대가 많기 때문입니다.

  참 우울한 영화입니다. 정형석 감독은 젊은 여성 성혜의 삶을 통해 한국 청년 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다큐처럼 담아냅니다. 출구가 없어요, 성혜에게는. 꽉 막혀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런 성혜에게 갑자기 5억이 생깁니다.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성혜라면 그 5억을 가지고 무얼 할 생각인가요? 5억, 크다면 큰돈인데, 어찌 보면 좀 애매한 액수 같기도 하고요. 서울에서 괜찮은 월세방 보증금으로 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넣어둘까요? 아니면 그동안 못 해봤던 여행도 하고, 사고 싶은 걸 맘껏 사볼까요? 그런데 정기적인 소득이 없다면, 그 돈은 언젠가 바닥이 날 게 뻔하잖아요. 성혜도 고민합니다.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나는 내가 감독이라면 성혜에게 어떤 삶을 선물해 주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잘 떠오르지 않더군요. '성혜의 나라'에서 성혜는 5억을 신탁 연금으로 넣고, 매달 140만 원씩 받기로 결정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삶. 그것이 성혜가 꿈꾸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혜에게 5억이 생긴 것은 과연 행운이기만 할까요? 그 무해하고도 안온한 삶은 변화도 없고, 꿈도 없는 삶이에요. 그런 면에서 '성혜의 나라'는 젊은 청년들이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해 강렬한 펀치를 날려버리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래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혜만큼이나 힘든 세대는 빈곤한 노년 세대입니다. 청년 자살만큼이나 노인의 자살률도 높습니다. 그 원인은 당연히 '가난'이고요. 그런데 왜 힘들고 가난한 노인에 대한 영화나 이야기는 보기가 어려운 걸까요? 쪽방촌에 살면서 폐지 줍는 70대 독거노인 춘삼 씨가 있다고 합시다. '춘삼의 나라'라는 영화를 찍는다면, '성혜의 나라'를 보고 공감했던 젊은 관객이 공감해 줄 수 있을까요?

  영화 '성혜의 나라'는 기묘하게도 MZ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그것은 성혜가 아무 것도 꿈꾸지 않는, 어쨌든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5억이란 돈이 성혜의 부모가 사고로 죽음으로써 주어지는 돈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 영화가 명백한 '부친살해(Patricide)'의 코드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공 성혜에게 있어 부모는 부담스러운 짐짝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거든요. 돈에 쪼들리는 성혜의 엄마는 딸이 조금이나마 돈을 보내주기를 바라죠. 인터넷에서 젊은 세대에게 통용되는 밈(meme) 가운데에는 '틀딱(노인)들이 빨리 죽어야 젊은 사람이 산다'는 말도 있죠. '틀딱'으로 대변되는 노년 세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화의 마지막, 성혜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려 나갑니다. 성혜의 앞에는 느리고, 안온한, 하지만 가슴 뛰게 만드는 희망과 새로움은 없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성혜는 나름 괜찮은 월세방을 구합니다. 월세가 저렴한 성혜의 집은 경사가 심하고, 높은 지대에 있습니다. 다닥다닥 모여있는 다세대 주택의 방 한 칸, 거기에서 성혜는 예쁜 강아지를 키우게 됩니다. 나는 왜 성혜가 서울을 떠나지 않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모두가 알다시피, 지방은 서울에 비해 집값이 싸잖아요. 그런데 성혜는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거든요. 성혜에게는 서울에서의 버거운 삶이 주는 긴장감이 지방에서의 따분한 삶보다 나은 것일지도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지방 소멸'이라는 개발 불균형의 사회 문제도 갖고 있지요. 여러모로 영화 '성혜의 나라'는 현재의 우리나라가 처한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나름의 시의성(時宜性)을 지닌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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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地圖)


서걱거리는 지도를
씹으며 부러뜨린 손가락
너의 푸르스름한 입매
번득이는 면도날이
될 수 있다면

길을 잃었어
왔던 길을 더듬어
처음으로 가야 하겠지
그 절벽에는 동굴이
너무 많아 하지만
너의 발자국이 있는
단 하나의 동굴

질기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
입에서 뱉어내었어
읽을 수 없는
잃어버린 지도의
붉은 선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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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기원


진공청소기의 먼지통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이롭다 매일 청소를
하는 데도 어디서 그
먼지들이 나오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흰 머리카락과 회색의
솜뭉치들이 몽글몽글
며칠 전에 깎은
손톱도 하나
모래알이 자잘자잘
오리털 이불에서
나온 깃털도 있군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속의 철이 그렇게
내게 왔듯이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부드러운 살과
눈물과 노래를 생각한다
한 처음에 있었던
어떤 손짓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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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것들


세탁기 아래의 끈끈이
커다란 바퀴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다 해마다
늦봄이면 야생 바퀴가
그렇게 들어온다 걔들은
진짜 엄청나게 크다
그 시커먼 덩어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다
우리집까지 왔을 텐데
그대로 저승길을 밟아

5월의 비가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사흘째 내리는
저녁에 작은 방 방충망에
어리는 비닐 조각 그림자
불을 켜고 보니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난 네가 싫어,
손가락으로 방충망을
튕기며 기어코 녀석을
쫓아내었다 우리집이
아니더라도 다른집에서
잘 쉬겠지 그냥 놔둘 걸
날 밝으면 가버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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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너에게는
귀여운 아이가 있고
괜찮은 남편이 있으며
그럭저럭 돈이 벌리는
번지르르한 직업도 있어
지금은 1년째 해외여행 중
너의 인스타 맘껏
행복을 전시(展示)하지

어디서 들으니 세상은
행복 총량(總量)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누군가 8만큼 행복하면
어느 구석탱이의 누군가는
8만큼 불행해지는

너의 행복은
지상의 한 켠
추레하게 흐르는
불행 덕분이지

뭐, 적당히 불행한 것도
나쁘지 않아
귀신도 불행한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더군

귀신의 푸른 이마를
본 적이 있어
차가운 무언가가
툭 치고 지나갔지

그 후로 오랫동안
푸른 이마의 귀신을
본 적이 없어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아

타인의 불행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
그렇게 적당히 불행한
삶을 꿈 꿔

전자레인지에 너무
달구어진 유리그릇은
터질 수도 있어
누가 알아?
너의 자부심도 언젠가
팡, 하고 터져버릴지
인생은 짧아 너의 글은
더 짧아 모자라 그러니
오늘의 행복을 즐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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