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기억 속의 노래


흘러간 가요를 듣는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비가 귓바퀴에
얇은 생채기를 만들고
그곳으로 시간의 통로가
생기는데 순간,
1990년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느 가수의 얼굴
그 눈부신 웃음은
시간을 눈멀게 만들어

슬그머니 사그라든 청춘
흰머리와 얼굴에
덧입혀진 검버섯
아, 수치스러워라

지글거리는 동영상 속
그들은 뛰쳐나와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건물주가 되고
사장이 되고 더러는
파산한 낙오자
돌아올 수 없는
낡은 소문으로

좋았던 한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흐린 기억 속의 그대, 를
마지막으로 클릭,

2024년 5월의 어느 새벽,
이 노래를 듣는 사람
있으면 손!

가만히 손을 들고는
가렵고 눅눅한 눈가
스며든 형광등 불빛
쓱, 하고 훔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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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향수(香水)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는
비가 온 뒤의 흙으로
향수(香水)를 추출한다

비가 온 뒤에 걸쭉해진
땅의 진흙을 수백 개의
항아리에 담아서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고
흙을 버리고
증류수만 남긴다

그 증류수가 비 온 뒤
흙의 향수가 된다
그 향수는 너무 비싸서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없다
전 세계의 갑부들이나
쓰는 향수라고 그걸
만드는 사람이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비의 향수가 어떤 것인지
늘 마음으로만 상상했다

5월의 누런 비는
눅진거리며 하수구를
졸졸 내려간다
송홧가루는 안녕히
너의 후세(後世)는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땅에 스며든
비의 향수로
누군가의 뇌수를
타고 흐르며 쓰라린
노래를 만들어 낼 지도


**비의 향수(Mitti Attar)는 인도의 Uttar Pradesh주에서 극소량이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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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회(上映會)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지
변두리 허름한 극장 5층
솔기가 살짝 닳아버린
연녹색의 의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관객들은
반쯤 졸았던 것 같아
진짜로 그랬어 나도
졸 것 같았거든 겨우 고작
저런 걸 찍으려고 4년을
그 고생을 해가며 아,
비탄의 하품에 눈물이
고이며 웃음이 터졌지
단편 영화들의 배경은
하나같이 여름이야
졸업작품은 여름에
찍거든 아르바이트로
하는 것 같은 어설픈
배우 지망생들의 연기
진정성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했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너의 졸업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어
그걸 대신 쓸 수도 없고
다만 가끔, 이렇게 맑은
5월의 아침에 그저 그런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며
너와 네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생각하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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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冒瀆)


작은 포트메리온 잔에
반쯤 남은 멀건 아메리카노
미지근한 생강차를 섞는다
진중하면서도 우스운 맛

한국 땅에서 백 년의 시간이
지나면 가장 많이 나올
흔한 그릇 포트메리온
쉽게 잊혀질 그런 시

참새처럼 쪼아먹고 마시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지
그건 시에 대한 모독이야

대붕(大鵬)의 날개를 갖고
있어도 날갯짓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거야
날아야지 날아 봐야지
흙바닥에 고꾸라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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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公園)


가끔 인생이 B급 영화
같다고 생각해 공장에서
찍어낸 인디언 인형 같지
특색이 없어 다 비슷해
넌 좀 다르다고 느꼈지
처음부터 그래, 그랬어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공원을 지나야만 했어
가슴이 뛰며 웃음이
터져 나왔지 눈부신
흰색 개가 아마도
시베리아허스키겠지
하품을 하며 쳐다봤어

이제, 잘려진 나무를
흔들던 바람은 너에게
닿을 수가 없어 공원은
폐가처럼 잠들어 있고
털이 빠진 크고 흰 개는
어디 길바닥을 헤매고
있겠지 마른 혀에 침을
겨우 적시며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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