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들


H는 시인의 아들이었다 나는 H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
나는 H의 아버지가 쓴 시들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었다

H야, 그 시에 나오는 아이는 너를 뜻하는 게 맞아?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 거겠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H는 대답했다

H의 아버지는 H와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나는 H 아버지의 수업을 들으러 갔었다
그런데 시인은 수업 시간에 담배를 너무나 많이 피웠다
나는 30분만 듣다가 가방을 챙겨서 조용히 강의실을 나왔다

H의 아버지는 내가 졸업할 때 축사를 했었다

예술을 하려는 여러분!
절벽에서 뛰어내리십시오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만 살아남습니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절벽 앞에 서 있다
천 길 낭떠러지 밑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밤은 깊어가는데
돌아갈 길이 없다

오늘은 문득 H 생각이 났다
H가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다
H의 아버지는 아직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 시간에 담배 피우는 것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때와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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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可能)


5월, 봄밤은 아직 춥다
나는 보일러를 틀고, 전기장판의 코드를 연결한다
전원부의 다이얼 숫자는 1
약하게, 이 늦은 봄밤의 가능한 온기,
나는 가능(可能)한 역들을 이미 지나왔다
누런 이빨을 드러낸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환자들이 말입니다 치아에 수명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요 치아를 죽을 때까지 쓴다고 생각해요
단정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치과 의사
그렇군요 치아도 언젠가 죽을 날이 있다는 걸
나는 내가 죽는 날에 남아있을
가능한 치아의 개수를 헤아려 본다

건너편 아파트의 커다란 개는
이 밤에도 짖는다
두려움에 떠는 불쌍한 개와
개의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하는 몹쓸 주인에게
가능한 예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33년 된 목백합 나무는 밤바람에 우는 소리를 낸다
그 나무는 한 달 전에 베어졌다
나는 오가며 살펴보곤 한다
그루터기에 무엇이 생기는지를
불가능한 무언가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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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하얀 팝콘이 가득 찬 종이봉투를 받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개들을 싫어한다 짜증을
내면서 잠에서 깼다 새벽에 회사 직원이 죽었어
이제 마흔 좀 넘겼는데, 심정지래 나는 심정지와
심장마비가 어떻게 다른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한다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면 심정지가 온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 첫날, 엄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원망과 두려움으로 바라보았죠
그러다가 결국 그날 저녁에 엄마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어요 못할 짓이더군요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냥 자다가 새벽에
조용히 죽으면 좋겠어요 고통 없이요 여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쓴 글을 읽는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는 쓰디쓴 모래가 묻어난다 끈적거리는 검은 모래
상갓집에 잘 다녀와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가 퍼붓는다
나는 하얀 팝콘의 꿈이 무슨 뜻인지 Chat GPT에게
물어본다 팝콘은 부풀면서 터지니까 뭔가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몰라요 흰색은 희망의 색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검은색의 죽음이 파근파근하게 걸어오면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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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일 서정(春日抒情)


재잘거리는 철쭉이 핀 산책로
두 개의 등산 스틱으로 걸아가는 노인
나에게는 두 개의 안경이 있다
근거리용과 원거리용
늙음에는 돈이 필요하다 아주 간절하게

이미 라일락이 진 자리
아파트 잔디밭의 개똥 금지 표지판을
좌절 금지로 매번 읽는다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난 가지 않겠어, 어떻게,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라고, 그냥 여기에서
두 다리를 땅바닥에 꽉 붙이고
오래된 흉터를 어루만지면서
쉼표는 왜 그리 많은지
마침표를 찍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며칠 전 꿈에서 사라진 새끼 고양이의 행방을
오늘 새벽의 꿈에서 확인한다
작은 방 창문 건너편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는
봄볕 아래 자꾸만 헤살거리며

곧 겨울이 오겠구나
엄마, 이제 여름이 올 거야
아직은 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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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그들은 여행 중이었다 200자 원고지에다 글을 쓰던 시절의 사람들,
신춘문예 당선 소감의 그들은 무작정 길을 떠났고 그렇게 길 위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들의 여행을 상상했다
기차에는 홍익회의 카트가 시시때때로 오가며 구운 계란과 오징어,
그리고 밀감을 팔았을 것이다 12월이었으니까, 성탄절 즈음이겠지
지난주에는 유리막대가 주르륵 세워져 있는데, 하나가 깨지는 꿈을
꿨다 재수없는 꿈이군 오늘 하루는 조심해야겠어 다행히 하루 종일
별일이 없었다 시시하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는 식기 건조기에
차곡차곡 포개어 놓는다 이걸로 끝이야 아무 일도 없는 하루
삐익삐익, 건조기의 20분은 눈썹이 되어 떨어지고 뚜껑을 여는 순간,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싸구려 머그컵이 바닥에 조각조각 삼켜지고
아, 그랬군, 그런 거였어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깨어진 유리 막대의
꿈이 완벽히 실행되었으니까 부엌 바닥은 진창이 되어 내 발은 한없이
가라앉고 나의 여행은 안온하게 실패한다 이제 홍익회의 카트는
더이상 운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세월이
원고지가 아닌 컴퓨터의 키보드 자판으로 환원될 때, 나는 응답하지
않는 자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쓰지도 않은 200자 원고지는
아직도 책꽂이에 한 무더기가 있다 베란다에 들어온 도둑 고양이가
새끼를 두 마리 낳고는 사라졌다 나는 새끼 고양이들이 부담스럽다
베란다에서 내어던지면 고양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꿈에서 깼다 고양이의 척추는 매우 유연하므로 살아날 것이다
내가 무자비하게 세상에 내던지는 나의 글들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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