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8시

 
혼자 사는 윗집 남자는
토요일 저녁에 늘
배달 음식을 시킨다

오토바이 배기음과
초인종 소리는
일란성 쌍둥이,
라고 쓰면
얼마나 진부한가

진부함은 언제나
경멸의 대상이 된다
남의 습작 시에다
재능 없음,
이라고 써놓은 손가락은
진부하게 싸가지가 없다
네가 뭔데, 그런데
재능이 대체 뭔데,

오토바이 배기음과
초인종 소리는
일란성 쌍둥이
유령이 복도를
배회하는
토요일 저녁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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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바람이 오지게도
부는 봄밤
부엌 창문을 닫으며
기억에 스며든
한기를 느낀다

먼저 눈을 감은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어그러진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쓰린 속에 생강차를
들이킨다 더 속이
쓰리게

안방의 벽을 타고
옆 라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죽을 듯
토하는 중이다
그의 병증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나는 그의 쾌유를
빌지 않는다 아마
그도 나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하릴없이 앉아서
시를 쓴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렇게 쓰려다가
그만둔다 이미
임자가 있다

봄을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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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안개를 부르던 엄마가 말했다
내가 정훈희와 같은 합창반이었거든
그래서 걔를 잘 알아
엄마, 엄마가 정훈희를
어찌 알아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마

네가 나를 미친 에미로
만드는구나
못된 년

못된 딸은
정훈희가 미워졌다
안개가 싫어졌다
서둘러 유튜브 창을
닫았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안개가 가득한 것이
분명해 딸은 엄마의
머릿속에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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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법


방안에 들어온 코끼리를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코끼리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그 살점들을 진열해 놓고
이것은 어느 부위인가를
토론했다 누구는 다리라고 했고
누구는 코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구는
코끼리의 꼬리라고 토론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동이 터오자 누군가
살점 하나를 자신의 얼굴에 문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는 말이야
결국 이렇게 몸으로 느끼는
거야 마침내 그걸 보던
구경꾼이 소리질렀다

이봐 정말 그렇다면
넌 놀이공원에나 가봐
거기 놀이기구에서
몸의 떨림을 느끼는 거지

내가 하나 알려주지
시를 읽는다는 건
네 머릿속 뇌수에
멋대로 돌아다니게
풀어두는 거야
네 몸뚱아리로 느끼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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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


파치(破치) 버섯은 품절이다
그래서 '하'품 버섯을 주문했다
'하'라는 푸른색 매직이 선명한
스티로폼 뚜껑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버섯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파치에
익숙해진 사람의 비극이란
이런 것이다 '하'품에
만족하는 사람은 '상'품을 보고
놀라 자빠질 것이다 '상'품은
'하'품 보다 8천 원이 비싸다
엄마, '하'품 버섯이 이렇게나
좋아요 엄마의 하품이 이어진다
얘야, 잠이 오지 않는구나
엄마, 시를 읽는 사람이 없어요
얘야, 그렇다고 사람들을 욕할 수는
없잖니 하품의 시 하품의 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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