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1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뭔가를 하려다 까먹고 가만히 서있곤 한다. 내가 뭘 하려고 했지? 그렇게 잠깐 있으면, 다시 생각이 난다.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실버타운 입주자들이 늙어감에 대해 성찰하고, 짧은 시를 써냈다. 읽다 보면 웃음이 피식, 눈물이 찔끔, 가슴이 뜨끔해진다.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내복약에 절어산다'

  뭐가 건강에 좋다고 하면, 한번은 귀가 솔깃해진다. 몸이 안 좋아 먹는 약들에다 영양제가 더해진다. 알약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이거 먹으면 정말 나아질까 싶다.

 '남은 날 있다며 줄 서는 복권 가게 앞'

  이제는 살아온 날들 보다,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집착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싶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자꾸만 사서 그러모으려고 한다. 다 쓰지도 입지도 못할 옷들과 신발. 그런 것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

  나이가 드니,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괴롭다. 노년에 접어드는 일은 아픔과 느려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저리고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노안이 오고 나니,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여서 자꾸만 안경을 벗었다 쓰곤 한다. 바느질하려고 바늘귀 찾는 일이 때론 고역이다. 늙어서 그래. 그냥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날들.

  몇 줄 되지 않는 시의 행간에는 인생의 진실이 켜켜이 숨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에 대해 노래하는 모든 이들은 시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tronychia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발톱이 겨우내 자라지 않았다
피부과 의사를 찾아갔다

그냥 놔두면 됩니다
는 개뿔,
더 붓고 아파서 두 달 만에
다시 갔더니
어머니,
정 답답하면 대학병원
가시던가요

이봐, 난 당신 엄마가 아냐
돈벌이에 환장한 건 알겠는데
그럴 거면 돈 안되는 환자를
받지 말든지, 응?
돌, 팔, 이.

Retronychia
뿌리 쪽으로 자라는 발톱은
발가락을 먹어치운다
발가락을 자를 수 없으므로
발톱을 뽑아야한다
그 대신에 나는
3겹의 발톱을 갈아내고서
이제 1년이 지났다

그냥 뽑아버릴 걸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선택을 생각한다
시간의 지층이 꾸덕꾸덕하게 쌓이고
나는 그걸 걷어낼 수 없다
불가능한 Retro

부서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살아있다
작고 이상한
나의 왼쪽 엄지발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평론가


자네는 꿈이 뭔가
평론가요

교수는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평론가가
평생 직업으로 딱
이라고 생각했다
너 늙어
요양원에 가서도
자판을 두들길 수 있다면

언제고 견고할 것만 같았던
언어의 집은 무너져 내리고
너의 몸과 정신은
시간의 풍화에 바스러지고
평생 백수의 기이한 자긍심은
심해의 열수구에서
아직도 보글거리며 끓고 있다

청춘의 글들이 너덜거리며
거리를 행진할 때
비웃거나 침을 뱉지 말지어다
그래도 한때는
눈부신 미래를 품고 있었으니

작은 심해 상어는
자신의 동족만 알아볼 수 있는
형광 무늬를 반짝거린다

언젠가
평론가의 무덤 앞에서
너의 동족을 향해
푸른 신호를 보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항히스타민제


등을 피가 나도록 긁다가
의사를 찾아갔다

잘 듣는 약이 있어요
항히스타민제
부작용이라면 좀 졸립죠

약을 먹은 지 사흘째
와,
우,

하나도 가렵지 않다
이것은 분명
기적의 약이로구나

곁다리로
알레르기성 결막염
만성 편도염까지
해결해 준다

편,
안,
하,
다.

하지만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 기적의 약을 어떻게 끊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은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약을 안 먹기로 결심한다

다시 등에는 딱쟁이가
눈은 벌겋게
목은 염증으로 미어진다

잠이 오지 않아
약병의 항히스타민제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흰색의 작은 다이아몬드
너의 이름은
씨잘(Xyzal)

살이 에이는 그리움으로
나지막이 불러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당선(未當選)


거지 같은 옷을 입은 계집애 하나가
죽어버리겠다고 질질 짜고 있더군
아이고 그럼 못써 어떻게든 살아야지
나는 아이를 잘 달래어 밥을 먹였다
그래그래 잘 살거라

오늘 받은 편지함에 꽂힌 메일 하나
평론상 응모 결과입니다
미당선(未當選)

심사위원 이름을 보니
아, 언제 적 고인 물이야
고이고 고이다 못해 썩은물
이 인간들 아직도 평론 쓰고 있어
그래 당신들 눈에 안 차니까 안 뽑았겠지
동종교배 열심히들 하셔

죽어가는 계집애를 겨우 살려놨더니
미당선이라는군
개꿈도 유분수지
다음에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거든
강물에 밀어 넣을 참이다

알아먹지도 못할 허섭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는 공터
바보들의 이어달리기
관중석에서 뛰쳐나온
나의 객기를 반성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