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제


종로에는 영양제의 성지가 있다
비싼 영양제를 싸게 파는
약국

사람들은 바구니가 미어터지도록
약을 담는다
나는 1년 치 영양제를 산다
건강해지려고
오래 살려고

그게 아니라
여기저기 쑤셔대는
푸석거리는
무너져 내리는

막아낼 수 있다는
믿음의
방파제
철벽

루테인
비타민 B, C, D, E
비오틴
콜라겐
프로폴리스
오메가3

브라질너트에는 셀레늄이 많아요
하루에 꼭 세 알씩
맥주효모도 추가하세요
탈모 예방에 좋거든요

그런 거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죽을 때
힘이 많이 든다는군

숨이 끊어질 때 끊어져야 하는데
내가 평생 먹은 영양제들이
그 숨을 질기게 끌고 가면

그래도 아침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움큼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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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과연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영화 속 승모는 어떤 면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승모는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가 뭔지 모른다. 승모의 모습은 창작자가 늘 맞닥뜨리는 괴로움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지? 물론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답을 찾는 것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에게 있어 영화를 만드는 행위도 그러하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서 영화의 소재를 찾아낸다. 영화 속 승모도 그냥 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다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여자와 나눈 짧은 대화를 가지고 승모는 마침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

  더듬더듬, 마치 어둠 속에서 헤매듯 작가는 그렇게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것은 포커스가 나간 화면의 비가시적인 불투명성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마침내 승모는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에서 연기하면서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화면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다 깊이 들어갔을 때, 승모가 마주하게 되는 물속의 알지 못하는 세계는 창작자의 내면 그 자체가 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 승모는 우연히 쓰레기를 줍는 섬 주민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우연(偶然)과 영감(靈感). 그것이야말로 승모에게, 감독 홍상수에게 영화를 만드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우연과 영감의 기이한 태피스트리(tapestry)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왜 배우로 연기만 하던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한 걸까? 상국이 그 이유를 묻자, 승모는 대답한다. 영화를 찍어서 돈을 벌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은 결국 '명예'라고. 그것에 대한 열망이 승모를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승모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그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모한 열정이고 용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삼백만 원을 섬 주민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영화적 세계로 치환한다.

  승모라는 캐릭터를 통해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적 작업 과정을 반추한다. 그런데 그것은 홍상수 개인만의 특화된 방식이 아니다. 뿌연 물속에 있는듯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연과 영감에 기대어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 창작자, 예술가가 성취해 내는 예술 작업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숙명이고 명예가 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아, 홍상수!'하고 탄성이 나왔다. 홍상수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가 작가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질리지 않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이국의 악기를 두드리던 중년의 남자는 2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일상성과 영화적 세계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물안에서'는 홍상수가 사생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가적 명예를 지켜내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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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탕


기분 나쁜 찬 기운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닐 때
쌍화탕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30초

40초는 혀가 아리고
20초는 미지근하다

아버지는
쌍화탕을 좋아하셨다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군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가난한 고학생은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 되었다

의사들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약사들의 아쉬운 소리를 받아주고
30년 동안
양약을 열심히 팔아야만 했던
아버지에게 특효약은
쌍화탕이었다

1월
부서진 꿈길
흐린 눈이
타박타박

시커먼 설탕물
손끝 혈관에 이르러
미끌거리는
자판에
타닥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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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옷이 필요한가


평생 비싼 옷은 사본 적이 없다
그래서 비싼 옷을 걸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나는 모른다

Max Mara 코트는 더럽게도 비싸다던데
언젠가 그 코트를 한번 입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은 한다

얼마 전에는 3700원짜리 청바지를
인터넷에서 사보았다
놀랍게도 배송비도 없다

Made in China
2020년도 생산
4년 전에 만든 옷이다
2,500원 배송비를 빼고
판매자는 1,200원을 손에 쥔다
그래도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저 멀리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
거기엔 Fast fashion이 남긴
거대한 옷 무덤이 있다

지구 밖 위성에서도
알록달록한 사막이
보인다고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옷이 필요한가

파홈은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심장이 터져서 죽었다

얼마만큼의 옷을 사면
더 이상 옷을 사지 않을 수 있을까

3700원짜리 바지는
마음에 들지 않아
옷장에 처박아 두었다

아, 진짜 비싼 옷을 입으면 어떤가 하면요
뭐, 좋기야 좋죠

누군가
비싼 옷을 입으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비싼 옷을 사 입을 수 없으니
싸구려 옷만 사다 모으는 것인지도

Fast
Feast
Famine
Fool



*파홈: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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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권혁웅 시인의 수업이었다. 극작과에서 개설한 수업이었는데, 다른원 학생도 수강 신청이 가능해서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수강생은 한 열 명 남짓 되었나. 서사창작과와 극작과 학생에다 연극학과 학생도 있었다. 영상원 학생은 나하고 같은 과 동기, 이렇게 2명이었다. 수강생들은 수업시간마다 시를 한 편씩 써내야 했다. 그리고 각자 써온 시를 낭독한 후에, 무지막지한 합평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좀 긴장되고, 기분 잡치고, 그렇지만 재미도 있던 그런 수업이었다.

  나는 남의 시에다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좀 독특하네요, 그 정도로 말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쪽 애들은 달랐다. 내가 생각하기엔 좀 심하다 싶은 비난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곤 했다. 내 동기는 아마도 시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합평'을 가장한 인신공격(특히 김사과가 그랬다)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지나친 서정성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확실히 그건 내가 쓴 시의 약점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 시를 써내는 것 보다, 거기에 있는 수강생들을 관찰하는 일이 나름 재미있었다.

  극작과의 유희경은 자신이 써내는 시에 대한 도저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 시들은 내가 보기에 별로였지만, 권혁웅 선생의 평가는 달랐다. 선생은 유희경이 1, 2년 이내에 등단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써내라고 당부했다. 유희경에 대한 선생의 호평과는 달리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던 학생은 서사창작과의 김사과였다. 김사과의 경우는 출석부에는 '방실'이라고 쓰여 있어서, 출석을 부를 때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시를 써낼 때의 이름은 김사과였다. 아무튼 김사과가 써내는 시들은 진짜 이해 불가에다 기괴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주로 죽음의 이미지가 많았다. 권혁웅 선생은 웬만해서는 수강생의 시에 혹평하지는 않았는데, 학기의 중간쯤 가니 김사과의 시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이런 시를 뭐라고 하냐면, 요설(妖說)이라고 해. 요설. 별 의미도 없고, 해악이나 끼칠 뿐이지."

나는 선생이 그 말을 할 때의 냉랭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사과는 자신의 시 창작 스타일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모두들 자신이 써낸 시를 낭독하는데, 극작과 학생 가운데 한 명은 읽을 수 없다고 하고는 한 학기 내내 자신의 시를 읽지 않았다. 목소리가 이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유희경과 신나게 잡담하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 학생의 시도 참 특이하기는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시어가 있기는 하다. 에콰도르의 초석. 무슨 행성에 대한 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시가 참 재미있어서 그날은 좋은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유희경은 권혁웅 선생의 예언대로 2년 뒤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사과의 경우는 좀 의외였다. 나는 김사과가 소설로 등단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설이라며 내팽개쳐짐을 당하던 그 언어들이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글이라고 해도, 시대나 사람들의 요구가 있으면 그렇게 작가가 된다.

  올해 들어서 나는 다시 시를 쓰고 있다. 무슨 시를 써서 등단할 것도 아니다. 그냥 다시 시를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써내면서, 이게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작업이 힘들고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는 면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의 예술 치료에는 문학 치료도 있다. 이렇게 긴 글로 써내는 것보다, 내면의 심상을 짧게 압축해서 시로 만들어내고 나면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삼 그 시 창작 수업을 떠올려 본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시를 즐겁게 써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시인이다. 문학이 가진 치유의 힘을, 나는 이 늦은 나이에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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