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찬바람이 분다


아침부터 비가 흩뿌리더니 바람이 분다 부는 모양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춥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 포근해진 날씨에 이제 롱패딩 따위, 얼른 옷장에
넣어버려야지, 그래서 세탁을 해놓았는데 갑자기 쌀쌀한 바람이 뺨을
때린다 중학생 아들이 춥다는데 패딩을 다시 입혀야 할까요? 인터넷 게시판에
어떤 여자가 글을 썼다 아이가 춥다고 하면 입혀야죠 아니, 추운 아들 옷
입히는 것도 사람들한테 물어보냐 우문현답이네 참 갑갑한 사람도 많지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게시판을 떠난다 새 대표는 칼질하러 온 사람이야
사람들 자르러 왔다고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매서운 감원의 바람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 물가가 너무 올랐다 최저가
검색에 최적화된 삶이지만 요새는 더욱 버겁게 느껴진다 엊그제는
집에서 생두를 볶다가 연기와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 집안의 창문을 죄다 열어놓고 볶았는데도
그랬다 벽지와 옷과 가구는 사흘 내내 커피 냄새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정말이지 토할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는데
수건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내게는 그 커피 냄새가 궁상스러운 냄새처럼
느껴졌다 원두 가격은 미친듯이 오르고 있다 인스턴트커피도 올랐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문득 2차 세계대전 때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 사람들이 커피 대신 마셨다는 대체 커피가 떠오른다
치커리 뿌리를 볶아서 마셨다던가 황금광 시대의 찰리 채플린이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신발 밑창을 요리해서 먹는 장면도 있지
물가가 너무 오르고 있는데, 그걸 말하는 사람들은 어째 찾아보기가
힘들다 과일값은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사과를 먹고 싶은데 너무
비싸다 찾아보니 주스용 사과라는 것이 있다 멍들고 흠 있는, 그런 부분을
대충 도려내고 믹서기에다 갈아먹는 사과, 의외로 값이 싸서 주스용
사과를 사보았다 생각보다 사과 상태가 괜찮았다 사과를 깎는데, 손이
덜덜 떨린다 비싼 사과를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다니 하지만 왜 이딴
사과를 보냈냐고 길길이 날뛰는 구매자도 있다 이봐, 당신이 산 건
주스용이라고 그런 걸 먹고 싶지 않으면 돈을 더 내면 되잖아 참으로
자본주의는 명쾌하기 짝이 없다 나는 주스용 사과의 흠있는 부분을
크게 도려낸다 상한 부분을 먹고 배탈이 날까 봐서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더 많은 부분이 상할 수 있거든요 무슨 화학자는
유튜브에서 그렇게 떠들어댄다 그렇군 도려내고 도려내어 조막만 해진
사과를 감사히 먹는다 부엌의 조그만 창문으로 보이는 집 앞의 벚나무는
휘어지고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올해는 더디게 오는 봄, 찬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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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타인의 삶


지난 석 달 동안 썼던 블로그 글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내가
블로그 설정 메뉴에서 뭔가를 잘못 눌러서 그리된 모양이다
그래서 삭제된 글을 다시 올릴까 생각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꼭 찾아서 올릴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내 일상의 작은 편린들인 셈인데, 그걸 읽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삶,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별 의미도 없는 짧은 글일 뿐이다
나는 새삼 내가 하루 종일 그렇게 무심코 듣고 잊어버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배경 소음처럼 틀어놓는 라디오에서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꾸역꾸역 나온다 어제는 장애아를 20년 동안
키웠다는 여자가 사연을 보내왔다 도망치고 싶었을 때도 많았지만,
여자가 쓴 그 문구에서 목이 콱, 메이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얼마나 간절히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을까?
그래도 버텨내고 살아낸 여자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담당하는 야쿠르트 여자에게는 자폐아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은 덩치가 크지만 그저 해맑게 엄마만 따라다닌다
언젠가 여자와 그 남편, 그리고 아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어떠어떠한 것이 있어야지만, 또는 없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그래도 힘든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베란다 앞의 벚꽃은
이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까치 한 마리가 소리를 내길래
들여다보았더니 둥지를 지을 나뭇가지를 있는 힘을 내어 부러뜨리는
중이었다 그 까치가 날아간 곳은 얼마 안 있어 베어지게 될 나무이다
그 나무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둥지를 까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치고
있다 소용없는 짓이지 까지의 둥지는 삭제된다 내가 무심코 듣게 된,
알게 된 타인의 삶도 내 머릿속에서 삭제된다 그래도 그들의 삶은 이어진다
까치는 새집을 어딘가에 지을 것이며, 타인의 삶에도 봄이 깃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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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역성(非可逆性)


불행 중 다행이야 얼굴뼈에 금이 가지도 않았고
이가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 동생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어째 그게 쉽지가 않다 찢어져서
꿰맨 입술에는 봉합사가 너덜거리고 있고, 얼굴에는
듀오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철사로 이어 붙여놓은
치아는 계속 욱신거린다 그냥 가만히 정류장에서
버스나 기다릴 것이지, 뭐하러 좀 걸어간다고 길바닥에
넘어져서는 이렇게 고생을 하나, 그 생각부터 해서
땅바닥에 찰떡같이 들러붙는 운동화 때문이다, 하는 생각,
아니다, 거지 같은 SUV 차량을 피하려다 넘어졌으니
그걸 운전한 놈이 웬수다, 까지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돌아가고 싶다, 그 재수 없는 사고 이전의 시간으로,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군, 인생의 많은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어
흰머리를 아무리 뽑아도 검은 머리는 나지 않고,
눈꺼풀은 시간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하지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하자 아스팔트 바닥에
되게 넘어지고도 얼굴이 부서지지 않은 것을,
아직까지 앞니가 붙어있는 것을, 마침 큰 병원이
가까이 있어서 응급실에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을,
젠장,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냥 혼자
잘근잘근 화를 씹게 된다 인생의 그 빌어먹을
비가역성(非可逆性) 따위, 그렇게 회한과 분노와 안도가
뒤엉킨 침울한 성탄 전야에 캐럴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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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雪上加霜)


올해 내가 응모한 마지막 공모전의 결과를 확인했다
떨어졌다 기분이 더럽게 나쁘다, 아니 나쁘다 못해
허무함을 느낀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집에 들어가는데,
아파트 동호수가 적힌 문패가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아파트가 거의 폐가 직전의 흉한 모습이었다 집에서는
어느 이상한 여자가 무어라 지껄이며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꿈이었다 조심해야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오늘은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진료
다 보고 약도 짓고, 이제 버스 타고 집에 가면 되었다
그런데 버스를 17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냥 운동 삼아서
좀 걷자, 그러고 좀 걷는데 식당의 주차장이 나왔다
마침 차가 나오던 참이었다 급하게 종종걸음을 하는데,
그냥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엎어졌다 안경이 깨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일으켜 세워주며, 괜찮냐고 연신 물었다 얼른 치료받아야
겠어요,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빨리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10분 동안 정류장에
서있다가, 이대로 집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의외로 한가했다
의사가 보더니 입술도 찢어졌고,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모른다고 CT를 찍자고 한다 CT를 찍었다 그런데 아무도
상처를 소독해주거나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구강외과 의사가
내려와서 봐야 한단다 1시간을 기다렸다 레지던트가 와서
흔들리는 이를 그냥 놔두면 치아가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치과로 올라가서 철사로 이를 동여맸다 찢어진 입술도
꼬맸다 휘어진 안경테를 바로잡아서 겨우 얼굴에 걸쳤다
화장실에 들러서 얼굴을 본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 영화 속 총알에 안경이 부서진 아줌마
설상가상(雪上加霜), 참으로 더러운 꿈땜이다 치아는
겨우 붙여놓기는 했는데, 1달 후에나 이게 멀쩡한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왜 이렇게 기분 나쁜 꿈은
잘 꾸는지, 또 그런 건 왜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맞는지
생각해 본다 문패도 없는 폐가 같은 집, 꿈에서 본 그 집이
꼭 지금의 내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마구 얻어터진
복싱 선수처럼 부어올랐다 이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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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님이 알려주신대


재수생 시절의 일이다 학원 선생 가운데 전직이
박수무당이었던 선생이 있었다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선생은 갑자기 신내림이 와서 무당이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당 노릇을
그리 오래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본업인
학원 선생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학원생들에게
무당에게 점 볼 때 속아넘어가지 않는 법에 대해
간결하게 알려주었다 무당이 잘 맞추나 보려면
아주 최소한의 정보만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은 대개의 무당이 앞일에 대해서는 열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것조차도 신령님에게 기도를 많이 해야 겨우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우리나라에서
제일 영험한 산은 계룡산, 이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가끔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 했다 정말 무당이 앞날을
맞추기는 맞추나? 예전에 수원의 점집 골목을 찍은
TV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늙은 무당의
일화가 재미있었다 그 무당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다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다방 마담에게 그날의 자기 수입을 은행에다
입금하는 일을 맡겼다 그렇게 마담을 믿고 통장을
맡겼는데, 그 마담이 나중에 통장을 털어서 도망가 버렸다
할머니 무당은 다방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이 사기당한
일을 담담히 말했다 그러고는 커피 배달을 온 새로운
마담에게 통장을 내어주며 입금을 하라고 시켰다
이분은 믿으세요? 다큐를 찍던 PD가 무당에게 물었다
응, 얘는 나한테 사기 칠 애는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무당은 호호호, 웃었다 신령님도 모든 걸 다 알려주는 건
아니군, 나는 점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늙은 무당의 느슨한 웃음 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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