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홋카이도의 어느 농촌 마을. 밭일을 하던 농부들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어귀에서는 바퀴가 빠진 트럭을 보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과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화면 위로 흐르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마을의 과거로 떠나는 신호탄이 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은 종전 직전에 벌어진 농촌 마을의 비극을 보여준다. 가톨릭의 미사 전례곡 첫 부분인 '주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소서(慈悲頌, Kyrie)'가 비감하게 흐르는 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는 음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영화 전편에 걸쳐 불길하고 음울하게 들리는 배경 음악은 '무쿠리(ムックリ, Mukkuri, 아이누족의 전통 악기)'가 쓰였다. 그 음악과 함께 영화는 컬러 화면의 현재에서 흑백의 과거로 곧바로 진입한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젊은 군인이 귀향한다. 4년만에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인의 이름은 히데유키. 그는 소노베 집안의 장남이다. 히데유키는 마을 입구에서 말을 탄 상이군인과 마주친다. 전쟁에서 왼손을 잃은 그 남자 코이치는 히데유키의 여동생 키에코에게 청혼을 한 터였다. 히데유키는 코이치를 한눈에 알아본다. 코이치는 중국에서 복무했던 히데유키의 부대 상관이었다. 히데유키는 코이치가 아녀자를 강간하고 살해했던 만행을 떠올린다. 그런 잔학한 남자와 여동생을 결혼시킬 수는 없다. 코이치가 싫은 것은 키에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소노베 가족에게 그 청혼의 거절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도쿄의 공습을 피해 홋카이도로 온 소노베 일가는 이장 타카모리의 도움을 받았다. 코이치는 바로 그 타카모리의 아들이다. 이제 자존감에 상처받은 코이치는 비열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동시대의 오즈 야스지로가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대극으로, 나루세 미키오가 여성과 가족의 일상을 세밀하게 파고들 때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비판적 사회극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Twenty-Four Eyes, 1954)'는 소학교의 여선생과 제자들에게 닥친 전쟁의 여파를 통렬하게 그려낸다.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1963)'은 어떤 면에서 그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종전을 앞둔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폭력과 광기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말을 타고 마을 곳곳을 순찰하듯 돌아다니는 코이치는 군국주의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노베 일가가 마을의 농작물을 훔치고 다른 농부들의 밭을 망치는 원흉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렇게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갈등은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의 전황과 겹치며 예기치 못한 파국을 불러온다.

  키에코를 덮치려는 코이치가 우발적으로 죽게 되면서 이 마을의 끔찍한 핏빛 전설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들의 죽음에 광분한 이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소노베 일가의 막내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마을 주민들이 보여주는 분노와 살기는 기실 제국주의 일본에게 향해야하는 것이 맞다. 내레이터는 그 마을에서 11명의 남자가 전장에서 죽었다고 일러준다.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실성한 주민은 총을 들고 폭도의 무리에 합류한다.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무지와 뒤엉키며 '소노베 일가'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가난하고 힘없는 외지인 소노베 일가는 이제 공공의 적으로 척살의 대상이 된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 "

  어머니는 자신과 딸을 죽이겠다고 몰려오는 광란의 무리를 응시한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산골의 비좁은 길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펼쳐보이는 이 지옥도는 전쟁의 광기로 마비된 일본인들의 내적 폐허에 대한 은유이다.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학살은 침묵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패배한 전쟁은 일본인들에게 입에 올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금기였다.

  흑백 화면 속의 끔찍했던 마을의 과거는 이제 컬러로 바뀐다. 힘을 합쳐 바퀴 빠진 트럭을 끌어낸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헤어진다. 그들은 광란의 기억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했고, 망각이라는 선물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일본의 진정한 패배가 반성없는 망각에 있음을 지적한다. 무고한 피가 스며든 홋카이도의 산천은 핏빛 전설을 품고 있다. 그 전설을 잊지 않고 들려주는 일. 영화의 사회적 책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아이누 원주민의 전통 악기 무쿠리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리뷰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attered-wings-1955.html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anger-stalks-near-1957.html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rewell-to-spring-1959.html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thus-another-day-19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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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 태종대는 해안 절벽의 비경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태종대에서 극적인 결투 장면을 찍은 홍콩 무협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는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으로 잘 알려진 정소동(程小東) 감독의 데뷔작 '생사결(生死決, Duel to the Death, 1983)'이 그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소림사 서고에 침입하는 일단의 닌자 무리가 보인다. 그들은 무술 비서를 찾아내어 재빠르게 사라진다. 홍콩 무협 영화에 일본의 닌자들이라니, 뭔가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때는 명나라 말기, 무림은 10년마다 열리는 중국과 일본 무사의 결투를 앞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소림사의 보청운이, 일본에서는 신음파(新阴派) 무사 미야모토가 낙점된다. 소림사 문파는 무술 종주국의 위엄을 보이고 싶어한다. 한편 일본 신음파도 자신들의 무공이 중국에 뒤지지 않음을 입증할 계획이다. 각자 자신의 나라와 문파의 명예를 짊어진 청운과 미야모토, 과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닌자와 소림사 승려들의 화끈한 대결을 보여준다. 쇼브라더스(Shaw Brothers)의 무협 영화에서 무술 지도를 담당했던 정소동은 자질구레한 부연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검은 옷의 닌자들은 칼싸움에서 밀리자 폭약으로 자폭 공격을 감행한다. 그런 다음에 뜨는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 정소동의 이름과 함께 '생사결(生死決)'의 타이틀이 박힌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투. 소림사의 보청운은 이 결투에 나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청운에게 무술이란 자기 수련의 방식이지, 승부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청운의 주변인들은 그런 그에게 결투의 의지를 불어넣으려 애쓴다. 숲에서 사는 청운의 스승은 별다른 욕심도 없어보이는 걸인의 행색이다. 그런 그조차 청운에게 반드시 이기라고 말한다.

  한편 일본의 무사 미야모토도 대결을 앞두고 결의를 다진다. 그의 스승은 변장을 하고 제자를 습격해 그 무술 실력을 점검한다. 스승은 제자의 칼에 죽어가면서 문파의 계명을 외우게 한다. 무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겨야 한다, 하시모토는 스승의 주검 앞에 승리를 맹세한다. 이렇게 두 명의 무사가 대결을 준비하는 동안, 무림과 막부에서는 비밀스런 공모가 진행된다. 막부의 쇼군은 중국의 선진 무술을 탈취해 일본 무술을 부흥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중국 무림의 하후파 수장은 소림파의 청운이 무림 대표로 나간 것에 불만을 품는다. 청운을 없애야 자신의 딸 승남을 결투에 내보낼 수 있다. 그는 막부에 협력한 댓가로 결투의 승리를 보장받아 하후파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

  청운과 미야모토의 대결은 이제 순수한 무술 승부가 아니며, 국가와 권모술수가 얽히는 장이 된다. 두 무사는 자신들을 둘러싼 음모에 저항한다. 미야모토는 결투의 진정성을 훼손하려는 닌자들을 처단한다. 그에게는 쇼군의 명령 보다 문파의 승리가 중요하다. 납치된 소림사의 사형(師兄)을 구해내 돌아가려는 청운을 붙잡는 미야모토. 그는 청운의 사형을 죽이고 청운을 마지막 결투에 불러낸다. 마침내 둘은 해안가 절벽에서 맞붙는다. 애국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이 홍콩 무협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 장면은 한국의 태종대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두 무인의 대결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무예의 승부를 겨룬다는 점에서 태종대는 오롯이 무국적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생사결'에서 정소동은 현란한 와이어 액션과 정교하게 짜여진 무술의 합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눈속임이 없다. '생사결'은 무협 영화가 슬로 모션과 CGI로 뒤범벅이 되기 이전의 진정성을 대표한다. 폭약을 비롯해 거대한 연, 분신술을 이용한 닌자들의 싸움 장면에서는 정소동표 무협의 기발한 착상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갖추고 있는 미덕은 절묘한 균형 감각이다. 소림 무사와 일본 사무라이의 대결은 협소한 애국주의의 틀을 벗어난다. 두 주인공은 경계가 없는 '무(武)'에 속해있다. 그 세계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극한의 무자비함이 존재한다. 죽음을 앞둔 미야모토는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발등에 칼을 꽂고 몸을 지탱한다. 청운은 죽음에서 벗어났으나 왼손가락 둘과 오른팔을 잃었다. 이 처절한 결투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비감함을 남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강호(江湖, Jianghu)에 대한 지아장커의 현대적 해석 영화, 강호아녀(江湖儿女, 2018)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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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 주연의 무협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magic-blade-1976.html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사무라이 시대극,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0/sword-of-doom-1966.html

시대극의 장인 미스미 켄지 감독의 영화, 무숙자(無宿者, 1963)와 검(劍, 196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on-road-forever-1964-ken-1964.html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영화, 닌자(忍びの者, Shinobi no Mono,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shinobi-no-mono-1962-8.html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2-shinobi-no-mono-2-vengeance-196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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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모킹 재킷(Smoking Jacket)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담배 피울 때 입는 옷이다. 서구 영화 속에서 대저택의 주인이 서재에서 입는 편안한 실내복을 생각하면 된다. 벨벳과 실크 소재로 만든 이 옷은 매우 고급스럽다.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 1930-2008)희곡 '관리인(The Caretaker)'에서 노숙자 데이비스는 공짜로 스모킹 재킷을 얻는다. 거리에서 떠돌던 노숙자가 상류 계층이 입는 스모킹 재킷을 걸친 모양새는 영 어색하기만 하다. 데이비스에게 그 재킷을 가져다준 사람은 애스턴이다. 그는 건달에게 흠씬 얻어맞을 뻔한 데이비스를 구해주었다. 애스턴은 오갈 데 없는 데이비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재워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호의인데, 데이비스는 신발이 닳았으니 괜찮은 구두 하나 내놓으란다. 끊임없이 욕설과 상스런 말을 내뱉는 데이비스. 그런 노숙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는 애스턴. 그리고 애스턴의 동생 믹. 해롤드 핀터는 비좁은 방에서 이 세 명의 인물이 나누는 이야기로 3막의 희곡을 만들어 냈다.

  클라이브 도너(Clive Donner) 감독 '관리인(The Caretaker, 1963)'은 해롤드 핀터의 동명 희곡 'The Caretaker(1960)'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러닝타임 1시간 45분. 좁은 방에서 도대체 세 명의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로 어떻게 시간을 채워가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재적인 극작가 핀터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애스턴의 호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데이비스의 행태는 뻔뻔함 그 자체이다. 애스턴이 구해온 신발에 끈이 없다며 불평하고, 끈을 찾아서 주니까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한다. 애스턴이 데이비스의 잠꼬대 때문에 잠을 못잤다고 하자, 옆방에 사는 외국인들이 내는 소리라며 억지를 쓴다.

  왜 애스턴은 무례한 노숙자 데이비스를 인내하는가? 아마도 그 단서는 애스턴의 방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이 떨어지는 천장에는 양동이가 매달려 있다. 방에는 오래된 신문과 폐지 뭉텅이가 높다랗게 쌓여있다. 오만 잡동사니로 채워진 그 방은 겨우 몸을 움직이고 침대에서 잠만 잘 수 있다. 애스턴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애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들려준다.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갔던 그는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 치료에 동의한 사람은 애스턴의 모친, 그 일 이후 애스턴은 사회와 담을 쌓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동생 믹은 형과 같이 살지는 않지만, 가끔 들러서 형을 챙긴다. 믹은 형의 방에 낯선 손님, 아니 침입자가 왔음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애스턴의 비좁고 어지러운 방은 1950년대 영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데이비스가 쏟아내는 인종차별적 언사는 전후 영국으로 유입된 외국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사회의 최하층 극빈자 데이비스는 잠깐 함께 살던 아내가 도망간 이후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저속하고 야만적으로 행동하는 이 노숙자는 자신의 불만을 모두 외부의 탓으로 돌린다. 말끝마다 늘어놓는 Sidcup은 그가 만들어낸 견고한 망상의 체계를 입증한다. 데이비스는 Sidcup에 자신의 신원을 증명해줄 모든 서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남자는 '맥 데이비스'라는 이름 말고도 '버나드 젠킨스'라는 이름도 쓰고 있다.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남자 데이비스는 애스턴의 영역을 점차로 침범해가며 애스턴을 착취하려고 든다.

  데이비스가 꼭 가겠다고 말하지만 결코 가지 않을 'Sidcup'처럼, 애스턴의 환상은 언젠가 지을 '창고'로 표현된다. 동생 믹은 형이 살고 있는 건물을 멋지게 리모델링할 꿈을 가지고 있다. 같이 살지도, 거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 이 형제는 데이비스의 존재를 매개로 소통한다. 애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건물 관리를, 믹은 데이비스에게 건물 인테리어 공사를 제안한다. 데이비스는 애스턴을 배제하고, 자신보다 권력의 우위에 선 믹에게 기댈 궁리를 한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데이비스가 믹에게 애스턴을 '정신이상'으로 폄하하는 발언을 한 이후로 무너진다.

  믹은 데이비스를 사기꾼으로 부르며 떠나라고 말한다. 애스턴 또한 자신의 공간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드는 데이비스를 거부한다. 애스턴은 데이비스가 풍기는 썩은 내와 잠꼬대를 견디지 못한다. 데이비스는 자신에게서 구린내가 난다는 것을 끝까지 부인한다. '냄새'로 표현되는 계층간의 근원적 이질감은 결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냄새와 계층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를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Parasite, 2019)'에서도 볼 수 있다.

  니콜라스 뢰그(Nicolas Roeg)의 효율적이고 정교한 촬영, 물 떨어지는 소리를 비롯해 끊임없이 신경을 긁는 Ron Grainer의 독특한 사운드, 믹 역의 Alan Bates를 비롯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이 모든 것이 영화 '관리인'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관리인'에는 1950년대 영국 사회의 정체된 분위기,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 과거의 환상에 매몰되어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병리적 인간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사무엘 베케트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3)'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데이비스가 가려는 'Sidcup', 애스턴이 지으려는 '창고', 믹이 꿈꾸는 '멋진 건물', 그 세 명의 인물들이 원하는 것들은 디디와 고고가 기다리는 '고도'와도 같다. 해롤드 핀터는 방향성을 상실한 전후 세대의 내면적 공허를 부조리극 '관리인'에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Nicolas Roeg 감독의 영화 'Walkabout(197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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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뉴스 화면이 보인다. 싱글맘 레슬리는 이제 막 복권에 당첨되었다. 상금 액수가 무려 19만 달러. 기쁨과 흥분에 휩싸인 레슬리는 당첨금으로 집을 사고 13살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외친다. 그로부터 6년 후, 레슬리는 장기 투숙 중인 모텔의 숙박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다. 잡동사니 짐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은 이 여자의 몰골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퀭한 눈빛, 비쩍 말라버린 몸, 너저분한 옷차림. 레슬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곳은 죽기보다 더 가기 싫은 곳이다. 고향 사람들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경멸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To Leslie(2022)'는 알콜 중독자 여성의 지난한 재활의 여정을 그린다. 영화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밑바닥으로 전락한 하층 계급 여성의 삶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 2시간에 가까운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며 내내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어떻게 해서 레슬리가 복권 당첨금을 날려 버렸는지, 어린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19살이 된 아들 제임스는 막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엄마에 대한 연민을 지닌 아들은 엄마를 내치지는 못한다. 제임스는 자신의 집에서는 술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엄마에게 일러둔다. 하지만 그것이 레슬리에게 불가능한 일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레슬리는 아들의 집에서도 쫓겨난다. 유일한 짐인 작고 지저분한 분홍색 여행 가방과 함께.

  중독의 나락에 떨어진 이 여성이 범죄와 착취의 그물에 얽히는 건 시간 문제다. 굶주리고 잘 곳도 없으며 술을 갈망하는 레슬리에게 불순한 의도를 지닌 남자들이 다가온다. 술 한 잔, 햄버거 하나, 레슬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절실하다. 추행 당할 위기에서 용케 벗어난 레슬리가 다다른 곳은 허름한 모텔. 그곳 주인 스위니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람 좋은 이 남자는 레슬리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술과 멀어지도록 돕는다. 하지만 술에 절은 삶의 관성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영향력 아래의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는 정서적 취약성을 지닌 하층 계급 여성이 알콜 중독의 악순환에 갇히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난한 싱글맘 레슬리에게 다가온 행운은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곧 사라진다. 여자는 집도 사지 못했고,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다.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레슬리는 이제는 다 커버린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공허한 울림과도 같다. 아들은 알콜 중독자 엄마를 거칠게 밀어낸다. 이 여자는 이제 사회의 제일 밑바닥으로 급전직하한다.

  그런 레슬리를 고향 친구와 지인들은 거리낌없이 조롱하고 모욕을 퍼붓는다. 영화는 알콜 중독의 수렁에 빠진 하층 계급 여성의 현실을 담담히 따라간다. 좌절된 꿈과 추락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 구부러진 삶의 길목에서 중독의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레슬리는 그 잘못된 여정을 돌이키려고 애를 쓴다. 겨우 술로부터 멀어진 레슬리는 우연히 보게 된 위스키병을 품에 꼭 끌어안는다. 레슬리가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어 그 향을 맡을 때, 우리는 중독자에게 재활이란 그렇게 위태롭게 이어지는 과정임을 직관한다.

  감독 Michael Morris는 중독으로 삶이 망가진 레슬리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레슬리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내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부서진 꿈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원치 않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야할 때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 것. 레슬리가 힘겹게 스스로의 삶을 재건해내는 과정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생동감있게 만드는 일등공신은 레슬리 역의 배우 Andrea Riseborough이다. 이 여배우는 알콜 중독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알콜 중독자의 삶을 살아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 핏기 없는 얼굴,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앤드리아 라이즈버러는 불안과 절망이 체화된 중독자 레슬리의 캐릭터를 온전히 구현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삶의 불안정성과 중독을 다룬 영화들

13, 000 피트의 앤(Anne at 13,000 Ft, 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anne-at-13000-ft2019.html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long-days-journey-into-night-1962.html

Come Back, Little Sheba(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come-back-little-sheba1952.html


***Ken Burns의 3부작 다큐 금주법(Prohibition, 2011)


1편
'A Nation of Drunkard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1.html
2편
'A Nation of Scofflaw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2.html
3편 '
A Nation of Hypocrites'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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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Rat Fink'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4살 청년 Schuyler Hayden은 영화에 출연해서 유명한 스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초짜 배우에게 주연을 맡길 영화사는 없었다. 그래서 헤이든은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는 대로 돈을 그러모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Rat Fink(1965)'의 주인공 로니가 될 수 있었다. 스카일러 헤이든이 연기한 로니는 스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청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기타를 가지고 화물 열차에 무임승차한 젊은 남자가 보인다. 잠시 정차한 역에서 단속반에 들킨 그는 달아나다가 기타마저 잃어버린다. 이제 그가 가진 것은 말 그대로 맨몸뚱이 뿐이다. 과연 이 무일푼의 무모한 가수지망생은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중년 여자를 유혹해서 훔친 돈으로 로니는 멋진 양복을 사입는다. 그리고 잘 나가는 클럽에 간다. 거기에는 이제 막 뜨고 있는 록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다. 로니는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가수를 쳐다본다. 공연을 끝낸 가수가 마침내 차에 탔을 때, 로니는 차 안으로 담뱃불을 던진다. 미리 휘발유가 부어진 차는 폭발한다. 끔찍한 화상을 입은 가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로니에게서 정신병적인 징후가 감지된다. 이 사이코패스 가수 지망생은 그렇게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했다.

  로니는 그 가수의 소속사 사장 폴을 찾아간다. 데모 음반 작업으로 로니의 재능을 확인한 폴은 기꺼이 계약한다. 돈과 명성이 로니를 따라오지만, 비뚤어진 내면을 지닌 록스타의 행로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로니는 무분별한 연애와 향락에 몸을 던진다. 팬으로 만난 어린 여학생 베티를 농락하고 차버린다.

  흑백 필름 속의 스카일러 헤이든은 눈부시게 빛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반드시 스타가 되겠다는 24살 헤이든의 꿈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영화 속 로니는 헤이든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잘 생긴 외모와 음악적 재능, 거기에 집요한 열망까지 더해져 로니는 록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Rat Fink'는 음반 산업과 스타 시스템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폴은 화상을 입어서 더이상 쓸모없어진 신예 스타의 자리를 재빠르게 로니로 대체한다. 가수는 하나의 상품이며, 그 가치는 얼마만큼의 많은 돈을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가로 결정된다. 폴은 자신의 상품인 로니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로니는 그런 폴의 권위와 영향력을 무시하려 든다. 로니는 폴에게 자신의 수익금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폴의 아내를 유혹하기까지 한다.

  갑작스럽게 얻은 명성은 파괴적 성향의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로니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결국 로니는 낙태를 거부한 베티를 죽인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로니는 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폴이 떠난 빈 녹음실, 천장에서 내려다 본 부감 쇼트는 바닥에서 울부짖는 로니를 작고 불쌍한 생명체처럼 보이게 만든다. 마침내 로니의 자동차가 기차와 부딪히는 순간, 근처 가게의 주크박스에서는 로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욕망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한 하층 계급 출신 록가수의 꿈은 그렇게 스러진다.

  그렇다면 로니를 연기한 스카일러 헤이든의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졌을까? 영화는 폭망했고, 이 영화는 원본 필름의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헤이든은 37살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떴다. 2017년, 기적적으로 발견된 필름으로 Blue-ray가 복원판을 발매했다. 그렇게 'Rat Fink'에는 재능있는 젊은 배우의 꿈과 비운의 인생이 겹쳐져 있다. 이 영화는 또한 흑백 필름이 가진 명징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빌모시 지그몬드(Vilmos Zsigmond)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한 촬영 감독이었다. 그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McCabe & Mrs. Miller, 1971), '허수아비(Scarecrow, 1973)', '디어 헌터(The Deer Hunter, 1978)'를 촬영했다. 'Rat Fink'는 그의 초기작으로 위대한 촬영 감독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빌모시 지그몬드가 촬영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리뷰

The Sugarland Express(1974),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는 27살이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1970-sugarland-express-1974.html

Winter Kills(1979), 이 망해버린 영화는 촬영만 좋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winter-kills-1979.html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영화들 리뷰: 오랜 세월 필름이 유실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발견된 경우

Joseph L. Anderson 감독, Spring Night, Summer Night(196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1960-spring-night-summer-night1967.html

Barney Platts-Mills 감독, Bronco Bullfrog(196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bronco-bullfrog1969-private-road1971.html

Frank Perry 감독, Last Summer(196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last-summer1969.html

George Romero 감독, The Amusement Park(197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amusement-park1975.html


*****Rat Fink는 속어로 너저분한, 혐오스러운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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