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아카풀코 해변에 있던 남자는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여동생 엘리스는 그를 만나고 가는 길에 갱단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그는 여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다. 교도소 샤워장에서 남자는 거대한 돼지가 바닥에 드러누운 것을 본다. 그의 변호사는 곧 그를 교도소에서 빼내어 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현지에서 사귄 젊은 애인과 재회한다. 여자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피범벅이 된 돼지 사체가 현관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다. 그걸 본 남자는 놀란 나머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교도소 샤워장의 살아있는 돼지라니,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같다. 그런데 그건 그 남자 닐에게만 보인 환시였다. 닐에게 돼지가 전혀 뜬금없는 대상은 아니다. 그는 대형 육가공업체를 소유한 사업가이다. 애인의 집에서 본 죽은 돼지는 그에게 닥칠 불운을 암시한다. 병원의 의사는 닐의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에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Sundown(2021)'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영화이다. 러닝타임 83분,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제대로 된 대사도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관객은 닐의 삶에 대한 아주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카풀코의 특급 호텔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년의 남녀와 두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닐과 엘리스는 남매, 젊은 남녀는 엘리스의 자녀이다. 여동생 가족이 휴양지에서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과는 달리 닐은 무료해 보인다. 그런데 엘리스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평화로운 휴가는 끝이 난다. 엘리스는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일행은 공항에서 급하게 귀국 비행기편을 알아보는데, 닐은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카풀코로 돌아온 그는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고 무작정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귀국을 독촉하는 엘리스의 전화도 차단해 버린다.

  닐은 현지 여인 베레니스와 연애도 시작한다. 둘은 따뜻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맥주를 들이킨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태양을 바라본다. 휴양지 해변의 평화가 마냥 이어지지는 않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갱단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 닐은 그것을 보고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죽은 이의 피는 바닷물에 물감처럼 퍼진다. 그 장면의 불길한 기운은 닐의 피부 반점을 극도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기이한 쇼트에서도 감지된다.

  미셸 프랑코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닐이 보여주는 극도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관객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가 매우 부유한 사람이며, 생에 대한 그 어떤 열망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닐이 쌓은 부는 무수한 가축의 핏빛 죽음에서 나왔다. 닐과 엘리스, 두 명의 조카 콜린과 알렉사. 휴양지에서 그들의 모습은 그곳 대다수 가난한 주민들의 삶과 대비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종과 계층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도시의 삶과 사업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가? 마침내 닐을 찾아낸 엘리스는 분을 터뜨린다. 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닐은 내내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닐의 패륜적 행태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이 혼란스러워할 무렵에 닐에게 급박한 시한부 질병이 통고된다. 이제 이 불행한 남자의 마지막을 따라가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 테라스의 비어있는 의자에 그의 옷과 소지품만이 덩그라니 남아있다.

  "아니, 이게 정말 다인가?" 그렇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 주저할 것이다.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분명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Sundown'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오랫동안 곱씹게 만든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러티브의 간극을 메꾸는 일등공신은 주연 배우 팀 로스(Tim Roth)이다. 그가 연기한 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생에 대한 깊은 절망과 허무가 감지된다. 그 삶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며, 우리는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 미셸 프랑코의 이 소품같은 영화에는 서늘한 매혹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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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적 공포 영화에 구현된 미국의 인종 문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흑인 남자 배우는 백인 여자 배우의 뺨을 때리라는 감독의 연출 지시에 무척 당황했다. 그는 감독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 장면을 넣은 영화가 개봉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에 출연했던 여배우 Judith O’Dea는 당시의 일을 그렇게 회고했다(출처: atlantamagazine.com과의 인터뷰). 감독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는 자신의 첫 장편 영화에 신인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배우의 이름은 Duane Jones. 그는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로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전에 잠시 연기 생활을 했다(후에 그는 영문학과 교수가 된다). 로메로가 존스를 캐스팅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존스는 오디션했던 배우들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듀웨인 존스는 기념비적인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영화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대본도 없었다. 영화는 최소한의 예산으로 매우 경제적으로 제작되었다. 감독의 지인들이 스태프로, 촬영 장소 지역 주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비싼 컬러 필름 대신에 흑백으로 찍은 것도 다행이었다. 허술한 분장과 현장 세트의 결점을 무난하게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인 감독의 패기 넘치는 첫 장편은 좀비 영화(zombie movie)의 기원이 되었다. 잔혹하고 폭력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제작비의 무려 25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을 냈다.

  부모의 묘를 참배하러 왔다가 좀비에게 오빠를 잃은 바바라(주디스 오디아 분)는 인근 농가로 황급히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를 피해 벤(듀웨인 존스 분)이 집으로 들어온다. 벤은 매우 차분하고 침착하게 좀비 무리와 맞설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 집에는 벤과 바바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하실에는 아픈 딸과 그 부모, 두 명의 남녀가 숨어있었다. 시골 농가에 갇힌 사람들은 습격해 오는 좀비들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어떻게 좀비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TV와 라디오에서는 그저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라고만 전할 뿐이다. 정부도 속수무책이다. 각자도생. 그런 가운데 흑인 벤은 좀비와 적극적으로 맞서려 하고, 백인 가장 해리는 구조될 때까지 지하실에 있을 것을 주장한다. 과연 이들은 좀비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이 영화에서 단연코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좀비와 용감히 맞서는 흑인 캐릭터 벤이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용의주도하게 좀비의 습격에 대비한다. 침입을 막기 위해 집안 곳곳을 나무로 덧대며, 무기로 쓸 총기를 찾아내어 손질한다. 패닉 상태에 빠진 바바라를 진정시키는 것도 그의 몫이다. 벤은 해리와 헬렌 부부의 딸이 아픈 것을 보고 의약품을 구해올 계획을 짠다. 하지만 해리는 벤의 그 모든 것이 못마땅하다. 그는 외부의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하실에 숨어있으려고만 할 뿐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배우 시드니 포이티에(Sidney Poitier)가 보여주었던 캐릭터는 선하고 정의로운 흑인이었다. 포이티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에서의 흑인 엘리트 청년,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1967)'의 열혈 형사,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1967)'의 인간적인 교사를 연기했다. 그는 기존 사회 질서에 결코 위협이 되지 않는 순응적 흑인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그와는 달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듀웨인 존스가 연기한 '벤'은 매우 전복적인 캐릭터이다. 벤은 공포에 질려서 이성을 잃은 백인 여자 바바라의 뺨을 후려친다. 그는 또한 자신과 대립하는 백인 가장 해리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비합리적이고 독단적인 해리와는 달리, 벤은 매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벤이 농가에 갇힌 사람들 중에 최후의 1인이 된다는 점은 그가 가진 탁월한 생존력을 입증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벤은 정부 구조대의 백인이 쏜 총알에 맞아 죽는다. 이러한 결말은 1960년대 미국내 인종적 갈등에 대한 영화적 반영이다. 백인에게 도전하는 흑인 캐릭터는 결코 영웅으로 남아있어서는 안되며, 안전하게 제거되어야만 했다. 이 영화 속 벤에게 닥친 비극은 현실과 분명히 닮아있었다. 듀웨인 존스는 당시 영화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겪었던 일을 회상한다. 차에 탄 백인 십 대 청소년들은 존스의 차를 위협적으로 추격했다. 존스는 영화 속 좀비와의 끔찍한 사투보다 흑인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인종차별의 현실에 몸서리를 쳤다(출처: thetwingeeks.com).

  조지 로메로의 선구자적 위치는 '좀비'라는 가상의 존재를 영화로 끌어들였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는 비판적 관찰자로서 공포 영화 장르에 현실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구현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인종 문제의 정치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로메로는 자신의 또 다른 대표작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 1978)'에서는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한다. 무차별적인 좀비의 습격은 현대인의 내면을 잠식하는 과도한 물질적 욕망과 등치된다. 로메로 영화의 분장과 특수효과는 오늘날 관객의 시각에서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독창성은 공포 영화 장르에 동시대 사회 문제를 성공적으로 이식했다는 점에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보는 관객들은 비좁은 시골 농가가 당시 미국 사회의 축소판임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영화 속 벤에게 닥친 비극은 임계점에 이른 인종 문제의 선명한 예시로 각인된다.   


*사진 출처: vox.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 로메로의 The Amusement Park(1975)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amusement-park19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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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루세 미키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좋지만, 거기엔 남자들이 없어요." 미조구치 겐지에게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만 주구장창 찍은 감독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권적운(鰯雲, Iwashigumo, 1958)'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의 사회 변화와 세대 갈등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물론 나루세 미키오의 주된 관심사인 '여성의 삶'은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전쟁 미망인인 야에는 농사를 지으며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신문기자 오카와는 농촌 기사를 쓰기 위해 야에를 인터뷰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야에는 인색한 시어머니와 고된 농사일에 지쳐있다. 모처럼의 연애 감정은 야에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야에에게는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오빠 와스케가 있다. 와스케는 자신의 세 아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길 바란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삶을 거부한다. 오빠네 집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운데, 야에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오카와는 도쿄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로 되어 있다. 야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권적운'에서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에가 아니라, 오빠 와스케의 집안에 있다. 이 영화에서 농촌의 현실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오카와가 야에와 만나게 된 계기는 농지개혁법 취재 때문이었다.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강도 높은 개혁으로 일본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농지개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농지법이 통과된다. 비로소 일본 농촌은 봉건적 농지 소유 제도가 철폐되고 자작농 중심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대지주들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부에 의해 강제로 헐값에 토지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지주의 집안이었던 와스케는 이전보다 쪼그라든 땅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고 있다.

  전형적인 구세대 농부로서 와스케의 사고방식은 자식들의 가치관과 여지없이 충돌한다. 그는 빚을 내서라도 아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루고 싶어한다. 장남 하츠지는 그런 것을 허례허식으로 여긴다. 하츠지는 결혼 예식을 생략하고 도시에서 소박한 신혼 살림을 시작한다. 와스케의 막내 아들 준은 농부가 아닌 기술자가 되려고 한다. 기술학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준은 아버지에게 논을 팔 것을 요구한다. 땅을 목숨처럼 여기는 와스케는 막내 아들의 청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토지를 팔게 된다.  

  러닝타임 129분의,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영화 '권적운'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팬들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영화가 농지법 도입 이후의 일본 농촌의 현실과 함께 신구 세대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야에와 오카와의 사랑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곁다리처럼 비춰진다. 그럼에도 나루세 미키오는 이 영화에 자신의 각인을 분명히 새겨넣는다. 전쟁미망인 야에는 농사로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오빠 와스케가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때, 야에는 경운기를 직접 운전하며 땅을 일군다. 오카와와의 관계에서 야에가 보여주는 주도적인 모습은 꽤 의미심장하다. 여관에서 야에는 오카와가 열어둔 창문을 닫아버리며, 그렇게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야에는 유부남인 오카와와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마냥 억누르지는 않는다.

  야에를 바닷가에 데려간 오카와는 더 넓고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따라가서,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함께 할 것인가? 여전히 죽은 남편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전쟁미망인은 곧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다. 야에에게는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과 삶의 터전인 땅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오카와가 도쿄로 떠나는 날에 야에는 힘겹게 농사일을 하고 있다. 이 독립적인 여성의 삶은 외로울 수는 있지만, 비참하거나 서글프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권적운'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전후 일본 농촌의 변화를 면밀하게 담아낸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초상도 포개어져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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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 브로카의 거침없는 사회 고발: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nila in the Claws of Light, 1975)
 


  필리핀 감독 리노 브로카(Lino Brocka)의 영화 '카인과 아벨(Cain and Abel, 1982)'은 구약 성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형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창세기의 끔찍한 형제 살해는 필리핀의 시골 마을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가모장(家母長)이며 대지주인 돈나 피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 로렌조와 차남 엘리스. 돈나 피나는 엘리스만을 지독히 편애한다. 실질적으로 농장을 관리하는 로렌조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만 소용이 없다. 엘리스가 형이 받기로 한 땅을 달라고 하면서 이 집안의 비극이 시작된다. 사소한 다툼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부르고, 폭력 조직들 사이의 총격전으로 확장된다.

  결국 형제 모두 죽음에 이르는 이 막장 가족극은 빈곤한 내러티브와 극단적인 폭력이 기이하게 엉켜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통속적인 가족 멜로 드라마가 끊임없이 필리핀 사회의 실상을 소환한다는 데에 있다. 권위적이며 독단적인 돈나 피나는 중세 시대 영주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의 장남 로렌조는 지역의 범죄 조직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은 돈과 권력, 폭력과 범죄가 뒤얽힌 거대한 복마전과도 같다. '카인과 아벨'에서 리노 브로카는 필리핀 사회에 스며든 증오와 폭력의 그림자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인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nila in the Claws of Light, 1975)'는 이 감독의 관심사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는 흑백의 화면 속 중국인 거리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거리의 한 구석에서 노숙자 같은 행색의 청년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화면은 이제 컬러로 변한다. 그는 중국어 간판이 걸린 2층 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화면은 곧바로 거친 건설 현장으로 바뀐다. 청년의 이름은 훌리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훌리오는 이제 막노동을 하려고 한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배고픔으로 쓰러진다. 훌리오는 동료들의 도움과 배려로 조금씩 도시 생활에 안착한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일터가 사기와 협잡, 죽음의 위험이 도사린 곳임을 알아차린다.

  포악한 공사장의 십장(什長)은 인부들을 혹사시킨다. 그는 훌리오를 비롯한 다른 인부들의 돈을 착복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훌리오가 받는 임금은 겨우 하루 끼니를 때우고 조금 남는 돈이다. 그렇게 힘겹게 번 돈을 동료 인부들은 창녀들에게 써버리기도 한다. 더러는 공사장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리노 브로카는 착취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노동자를 빈곤의 악순환 속에 가두는지 고발한다. 훌리오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아통의 집을 방문할 때, 카메라는 마닐라 빈민가의 처절한 실상을 포착한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싸운다. 쓰레기와 오물은 곳곳에 널려있다. 창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은 오후 늦게 나가서 아침에 돌아온다.

  부조리가 만연한 고층 빌딩의 건설현장과 최하층의 열악한 주거지. 그 다음으로 브로카가 보여주는 곳은 도시의 홍등가이다. 일을 못한다고 해고당한 훌리오는 게이 클럽에까지 흘러들어간다. 훌리오는 밤의 도시를 비추는 네온 불빛 속에 은밀히 성을 사고 파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마닐라로 떠나 소식이 끊긴 그의 여자 친구도 어쩌면 그런 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훌리오는 생각한다. 그가 고향 마을의 리가야를 유인해 데려간 크루즈 부인을 발견한 곳이 바로 중국인 거리이다. 그곳에서 훌리오는 하염없이 리가야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리가야를 찾는 훌리오의 필사적인 여정은 거대 도시 마닐라의 숨겨진 이면을 드러낸다. 훌리오는 임금을 부당하게 떼이고, 사기꾼에게 돈을 빼앗기는 일을 당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의지했던 아통이 공사장 십장과 맞서다 결국 감옥에서 비명횡사했음을 알게 된다. 아통의 착한 여동생은 창녀가 되었다. 순박한 어촌 총각 훌리오에게 이 도시의 모든 것은 썩은 내가 나며 견디기 힘든 역겨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마음은 점차 거칠어진다. 훌리오의 내면에 응축된 분노는 여자 친구 리가야의 비극적 죽음에 마침내 폭발한다.

  리노 브로카는 마닐라에서 결국 살인자가 되어버린 어촌 총각 훌리오를 통해 마르코스 시대의 필리핀을 고발한다. 추악한 사업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며, 권력은 그러한 자본과 긴밀히 결탁한다. 아통의 비극적 죽음은 그것을 입증한다. 부패한 사회 구조는 리가야 같은 순박한 시골 처녀가 성 착취 산업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방치한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결국 리노 브로카의 치열한 현실 탐구의 산물이며, 영화를 통한 사회적 발언인 셈이다.

  이 영화의 사회참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결함도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중국인은 탐욕스럽고 착취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사는 거리는 비리와 범죄의 온상처럼 비춰진다. 이는 중국인에 대한 일방적 편견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다. 그럼에도 리노 브로카의 카메라는 직설적이다.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던 그가 영화 속에서 동성 매춘을 묘사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이 감독은 거침없는 투지와 솔직함을 지녔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에서 그는 거대 도시 마닐라의 저류를 탐색하며, 동시대 고통받는 하층민의 삶을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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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고층 아파트의 이사에 거대 사다리차가 사용되지만, 아주 예전에는 아파트 옥상의 곤돌라(gondola)가 쓰였다. 거기에 이삿짐을 싣고 몇 번을 오르내리면 이사가 끝났다. 이토 치쇼(伊藤智生) 감독의 영화 '곤돌라(Gondola, 1987)'에서 남자 주인공은 곤돌라에 타서 빌딩의 외벽을 청소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아찔한 부감 쇼트로 청소부 료가 곤돌라에서 고층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뜨거운 여름 날, 고공에서 빌딩 창문을 닦아내고 있는 료는 창문 너머 사무실 풍경을 들여다 보게 된다. 잘 정돈된 사무실에서 직원들은 저마다 바삐 일하고 있다. 부러움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감정을 느낀 료는 곤돌라에서 발밑의 도시 풍경을 응시한다. 료의 눈에 비친 마천루의 협곡에는 푸른 바닷물이 일렁인다.

  도시의 최하층 노동자로서 료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의 외벽 창문을 청소할 때, 료를 보게 된 외국인 손님은 웨이터를 불러 항의한다. 료는 그의 눈앞에서 당장 치워져야 할 물건과 같은 존재가 된다. 웨이터는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한다. 료가 청소하는 고층 빌딩과 고급 주거지와는 달리, 그의 단칸 자취방은 누추하기 짝이 없다. 료가 고향에서 보내온 택배 상자를 열어 어머니의 음식을 맛볼 때,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뀐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된 료의 과거는 바닷가 어촌 마을의 청년이다. 그렇다. 료가 빌딩숲에서 바다를 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홀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 알콜 중독자 아버지, 가난한 살림. 료는 그곳을 떠나 도시의 빌딩 청소부가 되었다.

  삶이 외롭고 힘든 것으로 치자면,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소녀 카가리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불화로 헤어졌고, 함께 살고 있는 엄마는 카가리에게 무관심하다. 카가리의 집 곳곳은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다. 엄마는 자신의 침실에서 보이는 카가리의 방을 블라인드로 가려버린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는 대상은 흰색 카나리아 새 치토. 그런데 이 새가 다친다. 피범벅이 된 새를 손에 들고 서있던 카가리를 마침 창문 청소를 하고 있던 료가 보게 된다. 새의 치료를 도운 료에게 카가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얼핏 보기에 '곤돌라'는 영화과 졸업생이 만든 졸업작품 같다는 인상을 준다. 가난하고 외로운 청년과 상처받은 소녀. 둘의 우정은 료의 고향 마을 여행으로 더 깊어지고 풍부해진다. 카가리가 치토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자, 료는 관까지 만들어서 정성스럽게 새의 장례식까지 치뤄준다. 도무지 현실이라면 있을 법하지 않은 동화같은 이야기. 약간은 어설퍼 보이는 이 영화를 반짝거리게 만드는 것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빼어난 풍광과 서정성이다. 감독 이토 치쇼의 이 첫 영화에는 열정과 순수함이 존재한다.

  빚까지 내서 어렵게 영화를 찍었지만, '곤돌라'는 일본 국내에서 개봉관조차 잡기 어려웠다. 정작 영화가 호평을 받은 곳은 해외였다. '곤돌라'는 해외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어 관심을 받았다. 이토 치쇼는 1987년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감독은 더이상 독립 예술 영화를 찍지 않았다. 반전(反轉)의 삶. 이 감독의 영화 여정에서 '곤돌라'는 분명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었다. 그는 '곤돌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AV(Adult Video)를 찍다가 아예 그 길로 들어섰다. 이름도 바꾸어 버렸다. 본명을 버리고 'TOHJIRO'라는 이름으로 무려 1000여 편에 이르는 AV를 찍었다. 이토 치쇼, 아니 토지로는 일본 성인 영화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영화에 대한 초심을 버린 변절자인가? '곤돌라'에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 감독의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 있기는 하다. 엄마가 죽은 새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가리는 샤워중인 엄마에게 분을 터뜨린다. 벌거벗은 엄마는 딸을 거칠게 밀쳐낸다. 그 장면 말고도 영화에는 목욕 장면이 또 있다. 나중에 카가리가 료의 고향 마을에 갔을 때, 료의 모친은 카가리와 함께 목욕을 한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늙은 여성의 나신은 삶의 고통을 견뎌낸 몸이다. 료의 모친은 카가리가 엄마에게 상처받은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도록 만든다. 그렇게 료의 모친의 몸은 카가리 엄마의 젊은 육신과 대비된다.

  '곤돌라'의 원판 네거티브 필름이 손상되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토 치쇼는 자기 돈으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했다. 그렇게 복원한 영화로 2017년, 무려 30년만에 영화를 재개봉한다.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 반응이 좋아서였을까? 그가 '곤돌라'를 잇는 두 번째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출처 ja.wikipedia.org). 자신의 영화 인생 대부분을 AV에 헌신한 이 노년의 감독이 어떤 영화를 내놓을지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어떤 면에서 영화 '곤돌라'는 이토 치쇼에게 평생을 두고 넘어야할 산 같은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 청년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 세상을 향한 순수의 외침, 그 모든 것이 '곤돌라'에 봉인되어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세월의 힘을 견뎌낸 영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ameblo.jp
영화 도입부의 부감 쇼트. 료가 작업하는 곤돌라가 보인다



당시 신인배우였던 료 역의 Kai Kenta와 카가리 역의 Uemura Keiko는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두 배우의 연기 작업은 이 작품 이후로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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