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언제나 덩그라니, 40년 된 아파트에 매일 매일 갇혀 있다. 벌써 1년이 넘었다. 그 집에 사는, 그 집의 주인, 아니 세입자를 제외한,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 (바퀴벌레가 없는 게 확실하다면 - 아 진드기가 있댔지) 로봇 청소기 - 룸바, 아니 멍청이다.
녀석은 나름 로봇이라고 최첨단이다. 낭떠러지 같은 곳에는 가상벽을 두어 그 곳으로 가지 않게도 할 수 있고, 청소가 다 끝난 뒤에는 알아서 충전기로 찾아갈 수 있도록 모든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게으른 주인은, 가상벽을 꺼낸 적이 없다. 자동 충전 홈도 설치해주지 않았다. 녀석은 주인이 없는 동안 그 집의 청소를 제대로 무사히 마친 적이 거의 없다. 신발장 낭떠러지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에러가 나기 일쑤다. 청소하려고 보니 충전하는 것을 깜빡 잊어 작동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다 제 팔자다. 로봇이라고 왜 팔자가 없겠는가. 인간도 부모 잘못 만나서, 배우자 잘못 만나서, 자식 잘못 키워서, 상사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것처럼, 로봇도 주인 잘못 만나면 고생길이 훤한 거다. 녀석은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한번도 발휘하지 못한 불운한 아이들의 운명을 닮았다. 자신에게 가상벽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낭떠러지 앞에서 녀석이 느꼈을 공포를 생각하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한 번도 툭 떨어져주지 않고, 거기서 멈춰준 녀석의 소심함에 경의를 표한다. 자신에게 자동 충전 기능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빨간불 켜대며 굶주리던 녀석에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한번도 반항하지 않고 충전기를 꽂아주면 꿀꺽 꿀꺽 맛있게 먹고 다시 쌩쌩 일한다.
그래도 녀석의 팔자가 그렇게 사납지만은 않은 것 역시 주인의 게으름에서 기인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청소기를 돌려대기엔 녀석의 주인은 너무 게으르다. 일단 녀석이 종횡무진하기 위해서는 바닥이 깨끗해야 하는데, 바닥엔 늘 책이 늘어져있고, 가끔은 옷가지도 늘어져있고, 커피마신 컵도 늘어져있다. 마트에서 사온 비닐봉지가 그대로 있기도 하다. 주중에는 그것들을 치우는 게 귀찮아 녀석도 함께 방치해둔다. 주말엔 모처럼 쉬는데 녀석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며 또 방치한다.그러니 녀석은 또래 다른 녀석들과 같은 급여를 일시불로 받았음에도 훨씬 일을 덜하고 있는 셈이다. 사악한 자본가라면 못견딜 일이겠지만 녀석의 주인은 다행히 사악하지는 않다. 게으르고,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해 대저택에 취직한 녀석들에 비하면 1회 업무량도 매우 적은 편이다. 알고 보면 신의 직장에 취업한 것이지.
가끔 주인이 있는 날 일을 할 때는 죽을 맛이다. 놔두면 알아서 할텐데 성격 급한 주인은 녀석이 다른 방향으로 갈 때마다 발로 툭툭 치면서 "멍청아, 거기 말고, 멍청아, 거기 말고'를 외쳐댄다. 가끔은 축구를 하자는 건가, 싶기도 하다. 좁은 방에 가둬 놓고 자기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모른 척 하기도 한다. 휴. 이제 여긴 깨끗한데 문을 열어줄 생각을 안한다. 이놈의 주인은 빨래도 몰아서 하는 인간이라, 부엌으로 진입하기 위해 종종 빨래 건조대를 통과해야되는데 여긴 난코스다. 가끔은 건조대의 다리하나를 붙잡고 빙빙 돌다가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한다.
주인은 활용 숙련도 100점 만점에 30점 수준으로 녀석을 활용하면서도 그 만족도가 높단다. 그 역시 주인이 게으르기 때문이다. 이 주인은 대부분의 시간은 쓸데없이 보내기 일쑤이면서도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해 시간을 절약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설거지를 하면서 청소기를 돌린다던가, 외출하는 길에 버튼만 눌러놓고 나갈 때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 뭔가 첨단 돋는 상황이야. 문명의 이기가 나의 시간을 절약해 주고 있어... 하는...! 기계 문명의 맛을 본 주인은 로봇 청소기에 이어 식기세척기까지 사고 싶다며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지만 가난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녀석을 구입한 것은 집을 나오면 이렇게 가난해질 줄은 미처 몰랐던 주인의 마지막 사치였다. 식기세척기가 들어오면 녀석에게도 나름 주인 뒷담화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기는 건데, 안타까울 뿐이다.
듣자하니 주인은 전세값이 많이 올랐다던데, 식기세척기가 들어오기는 커녕 자신도 어디로 팔아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디 넓은 집 가서 부지런한 주인을 만나 죽어라 고생하며 사는 건 아닌지, 이미 이 게으른 주인과의 삶에 너무 익숙해졌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보니 저 주인도 녀석과의 삶이 익숙해져 쉬이 팔아버릴 수 있는 인간으로는 안보이는데, 그럼 이렇게 된 거 더 좁은 집으로 이사가서 편안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해봐? 흠, 그러기엔 또 주인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좀 미안해진다. 그냥 게으른 주인이랑 이 40년 된 아파트에서 오래 오래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