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쓴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멋부리는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다. 옷도 잘 고를 줄 모르고, 화장도 이쁘게 할 줄 모르고 그런다. 눈썹 같은 것도 다듬을 줄 몰라서 그냥 다니고, 화장은 파우더에 입술만 바르는 수준. 옷은 내옷 비싸게 주고 사는 건 또 왜이리 아까운지, 화장품은 또 왜 그렇게 비싼 것들이 많은 것인지. 아이라인은 커녕 마스카라도 기술있게 바르지 못하니 그냥 생긴대로 살고 있는 중이다.

하여, 비슷한 논리로 미용실에도 비싼 돈을 주고 가는 걸 잘 못한다. 친구들 보면 몇십만원씩도 척척 주고 머리도 하고 하던데, 나는 덜덜덜덜, 잘 못한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회사동네에서 겨우겨우 찾은 만원짜리 미용실을 애용해주고 있다. 오히려 만원짜리 미용실에 사람이 없고, 몇만원은 줘야 머리 자를 수 있는 미용실에 더 사람이 많은 이상한 동네지만, 나는 꿋꿋이 만원짜리 미용실에 갔다. 오늘도 퇴근 후, 나는 만원짜리, 이름도 깜찍한 샴푸미용실에 갔다.

어머, 왜 양쪽 머리 길이가 살짝 달라요? / 이거 여기서 잘랐는데요? / 아, 그래요? -_-
/(아저씨가 자른 건 아니에요 - 속으로만)
어떻게 머리 해드릴까요? / 그냥 다듬어만 주세요

코트깃에 뻗치는 머리가 지겨워 파마를 할까 생각중인데, 다들 머리길이가 어중간하다며 말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다듬기만 한다. (언젠가 파마를 한다면 삼만오천원 균일가에 파마를 해주는 샴푸미용실을 또 이용할 예정이다.) 미용사 아저씨는 남자였는데 이래저래 말이 많으신 분이다. 뭐하는 사람인지, 일하는 건 힘들지 않는지, 집은 어디인지, 설에는 뭐하는지 이런 일상적인 것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묻고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본인의 일이 왜 보람있고, 무엇이 힘든지에 대한 애환까지도! 나눴다는 거. 뭐 이런 것도 대단한 실력이라면 실력이다.

사실 멋부릴 줄 모르는 것들이 다 그렇듯, 패션에 대한 주관도 별로 없거니와, 내 머리에 대한 소신도 별로 없다. 그래서 앞머리는 얼마나 잘라드릴까요? 라는 아저씨의 물음에 한 내 소신 없는 대답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웃기다. 남들은 다, 뭐- 눈썹 약간 위로, 라던가.... 아니면 이보다 좀 더 디테일한 답을 하겠지만, 나의 대답은?

한달 버틸 정도로만 잘라주세요

하하하, 어이없어하시는 아저씨, 앞머리를 조심스레 자르더니, 이정도면 한달은 버티실 수 있을 거에요,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커트를 마치고 드라이를 하려는 아저씨.

아, 드라이 안해주셔도 돼요, 어차피 감을 거니까- 그냥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로만 해주시면 돼요~ (만원짜리 미용실은 샴푸를 안해줘요, 그러고보니 샴푸미용실인데 -_-)

ㅋㅋㅋ 내가 생각해도 참 소탈한 손님이지 싶다. 한달 버틸 정도로만,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로만 이라니 ㅋㅋ


2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온 시간이 8시, 미용실에서 살짝 기다리다가 머리를 자르고 나온 시간이 8시 50분 약간 넘어, 그런데 집에 온 시간은? 무려 10시 40분 두둥- ㅜㅜ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저 긴 시간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버스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ㅜㅜ

나는 버스를 잘 타지 않는다. 일단 버스에서 책을 보면 멀미가 나고, 버스 정류장이 회사에서 더 멀고 지하철보다 시간이 조금 더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스도 미덕이 있으니 그것은 '앉아갈 수 있다'는 것. 회사에서 우리집까지 가는 노선은 좌석버스이고, 회사는 그 버스의 종점 다음 다음 정거장이기 때문에, 웬만큼 사람 많은 시간만 피하면 거의 앉아갈 수 있다. 오늘은 선물세트다 뭐다 양손이 묵직해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사람 많은 2호선을 타는 것도 끔찍했고, 서서 가는 것도 끔찍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양손은 짐이 많아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볼 여유도 없다. 날은 기절하게 춥다. 손이 시려워 꽁. 핸드폰은 못꺼내고 장갑은 꼈다. 발이 시려워 꽁. 나는 이미 보온이 최고로 잘되는 부츠를 신고 있다. 발에는 해법이 없고 몸은 오돌오돌 떨린다. 30분은 지난 느낌이다. 10분쯤 지났을 거야. 지금 이 시간이 지루해서 나한테 길게 느껴지는 걸거야, 그래, 시간은 상대적인 거니까.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둥, 정말 30분이 지났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버스정류장 맨 끝으로 간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많아지는 사람들이 다 내가 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집까지 40분 서서 가는 게 싫어서 버스를 타려고 한 건데, 이미 버스를 기다린지 40분이 지났다. 심지어 기다리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운 나쁘면 서서 가게 생겼다. 나는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의 맨 뒤쯕으로 가서 오는 버스들을 보고 그 버스가 설 위치를 계산해서 어떻게든 앉아야겠다.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버스를 타면 버스 아저씨에게, 아저씨 도대체 이거 배차 간격이 몇분이에요? 라며 짜증섞인 한마디를 남겨 줘야지. 아냐. 아냐. 책임을 아저씨에게 돌리는 건 옳지 않아. 아저씬 그냥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 아 이 억울함을 어디 풀어야 하나. C에게 문자라도 보내 호소하고 싶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장갑을 뺄 용기가 나지 않는다. 흑흑. 뭐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이렇게 버스가 안올 리가 없어.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동병상련과 묘한 경쟁 의식을 함께 느끼며 그렇게 계속 기다리고 그렇게 5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사람이란 참 우스운 존재라, 그 시간 50분이 그냥 아까운 게 아니라, 지하철을 타서 계속 서서 가는 시간, 그 시간이 주는 고통스러움의 대체제로 선택한 것이 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의 소모와 신체적 고통,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줬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너무 화가 났다. 나는 게속 씩씩거리며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어어어어.....!!!!!

잠깐 고개를 뒤로한 새, 내가 탈 버스가 중앙도로가 아니라 바깥 쪽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게 보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 짧은 순간. 아저씨가 혹시 분노한 시민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게 두려워 옆 정류장으로 피해서 가는 건가? 라는 생각까지 들고, 나는 일단 미친듯 뛰어가 버스를 겨우 탔다. 몇몇 사람은 그 버스가 온 지를 모르고 계속 기다리겠지만, 거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기에 9503이 왔어요~~ 라고 소리치면서 갈 수는 없는 거니까, 일단 버스를 탔다. 아, 그런데 버스 노선이 바뀐 거란다. 4일쯤 전에. 이제 더 이상 이 차는 중앙차로에 서지 않는단다.

억울해 억울해. 그러고보니 난 계속 앞만 보느라, 우리쪽으로 오는 버스 번호에 집착하느라 옆쪽으로 가는 버스는 몇번인지 보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동안 아마도 몇 대를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아마 거의 확실히 그랬을 거다. 잠깐 뒤를 돌아 그 버스를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거기에 있었을런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살면서 가끔 곁눈질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건데 말이다. 너무 한군데만 미친듯이 집착하면서 기다렸구나.

버스에 탔지만, 실은 누구 잘못도 아닌 분노 때문에 마음이 잘 진정이 안된다. 그치만 난 단순하니까, 일단 버스에 탔으니까, 화낼 데도 없는 화는 내지 말고, 그냥 이 시간을 잘 보내자, 일단 앉았으니까 ^-^ 라고 생각해버린다. 일단 버스 안이 따뜻하니 한 30% 쯤은 용서가 되고 시작한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음악을 듣는데, 진짜로 마음이 가라앉아버린다. 내릴 때쯤 됐을 땐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50분 그쯤이야 뭐, 하며 룰루거린다. 나는 이런게 음악의 힘인거지 뭐, 라며 흥얼흥얼 집으로 온다. 나는 내 방이 찜질방처럼 뜨끈뜨끈한게 늘 불만이었는데 (우리집은 열선이 내방을 통해 나간다 ㅜㅜ) 오늘은 이조차 너무 좋구나 흐흐흣!

3

실은 곧 휴일이어서 관대한 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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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2-0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며칠 전 2만원짜라 스트레이트 퍼머 했어요. 저두 파우더에 립글로스 바르는 것으로 땡이에요.(그 이상은 어케 하는 건지 몰라요.;;;) 저두 멀미 나서 지하철을 더 선호하지만 짐이 많으면 앉아 가기 위해서 버스를 오래 기다리죠. 우리 집은 거의 종점이라서 버스 타면 웬만하면 앉아 가거든요.
추운 날 고생했어요. 연휴라고 선물 받은 거야요? 푹 쉬고 내일은 더 기쁘게 보내요~ 연휴가 코앞이에요^^

웽스북스 2008-02-05 01:41   좋아요 0 | URL
헤헤 마노아님, 전 가끔 볼터치도 해요 (배신감 느끼죠? ㅋㅋㅋㅋ) 근데 볼터치를 하면 촌스러워져서 최대~~~~~한 흐린 놈으로다가 한답니다 ㅋㅋ 마노아님도 멀미하시는구나, 어쩐지 반가워요 촌스러운 동지! ㅋㅋ 선물세트는 안비싸고 무겁기만 한 것들이에요 ㅜㅜ

보석 2008-02-05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도 평소 화장을 거의 안 해서 큰마음 먹고 색조화장을 하면 남들이 어색하다고 하더군요. 상처 받았어요. 흑. 안 해서 잘 못하고, 잘 못하니까 더 안 하게 되고 이런 악순환인듯.^^;
2. 또 머리카락에 돈 들이는 것도 이상하게 아까워서 미용실엔 1년에 한두번 갈까 말까 해요. 저 같은 손님만 있으면 미용실 다 문 닫아야겠죠?ㅎㅎ 덕분에 항상 생머리인데 미용실 가기 싫으면 계속 길렀다가 기분 나면 짧게 잘라서 다시 기르고 그래요. 현재도 어깨 길이에서 슬금슬금 기르고 있는 중이에요.(미용실 가야 되는데 결심만 몇 개월째;) 그리고 앞머리는 집에서 대충 잘라요. 이거 익숙해지면 꽤 편하니까 한번 시도해보세요.^^
3. 추운 날씨에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뒤늦게나마 아셔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

웽스북스 2008-02-05 09:53   좋아요 0 | URL
1. 맞아요 안하던 사람이 색조 하면 어색하지요, 저도 그 악순환의 틈바구니에 있어요
2. 그죠 저는 머리 숱이 많고 항상 층을 내서 한달에 한번씩은 가서 다듬어줘야 되는 머리이긴 해요- 손재주가 메주라 앞머리를 자를 능력은 안되구요 ㅜㅜ
3. 그죠, 그 순간 그 차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마늘빵 2008-02-05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한테 투자해야할 땐 확실히 해줘요. 전에 파마를 몇번 했는데 다 싸지는 않았어요. 한 7만원쯤 했던거 같은데... 흐음. 출혈은 크지만 이쁘게 잘 되면 기분 좋잖아요. 몇달간은. :) 누군가가 저는 '유지비'가 많이 드는 **이라고.

웽스북스 2008-02-05 09:55   좋아요 0 | URL
**이 뭘까, 이것도 궁금한데요? 굳이 **로 표시한 이유는, 음...ㅋㅋㅋ

저는 대학교에 들어가서부터 딱 두번 파마를 했었는데, 대학교 3학년 마치고 했던 파마는 엄마 가는 동네 미용실에서 했었고, 작년에 했던 파마는 눈 질끈 감고 비싼 미용실에서 했는데 그나마 10만원 상품권이 있어서 내돈은 2만원인가 내고 했었어요- (근데 예쁘긴 예쁘더라고요 으흑 ㅜㅜ) 거기에 영양도 막 주라 그러구요, 코팅도 막 하라그러구요, 그런거 하면 진짜 돈 우습게 나가요, 전 꿋꿋이 안했지만 ㅋㅋ

무스탕 2008-02-0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제가 갖고 있는 '화장품' 이라는것은 스킨로션과 이것들을 살때 딸려오는 크림종류가 다입니다요.. 엄마가 불쌍해서(?) 준 립스틱이 가방안에 있기는 한데 1달에 1번도 햇볕 보기 힘들다지요.. 역시 엄마가 인심쓰고 준 콤펙트가 어디에 처박혀서 갈라지는 소리가 쩍- 하고 들립니다. (언젠가 보니까 콤펙트 오래된건 수분이 없어져서 그런지 조각조각 조각이 나 있더군요.. -_-;;)
2. 저도 미용실 잘 안가요. 머리가 긴 까닭이 여러가지 있지만 미용실 가는게 귀찮고 아까워서 이기도 하지요. (지금 꼬리뼈에 육박하도록 깁니다...) 울 동네 미용실이 앞머리를 1천원에 깍아주더니 2천원으로 올렸네요. 이제 이것도 집에서 해결해볼 심산..
3. 버스.. 창 밖 풍경을 보면서 갈수 있다는 끝내주는 장점이 있어서 사랑해 주려고 하는데 저도 가끔 컨디션 안좋을때 멀미를 해서요.. ㅡ.ㅜ 집에서 5분이면 표 내고 플렛홈까지 갈수있는 거리에 살다보니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네요.
4. 요 며칠 감기몸살이 장난아닌 이 몸뚱이도 뜨끈한 전기장판 끼고 살아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이제야 조금은 제 컨디션인 느낌..
5. 설 잘 쇠시구랴~ ^^*

웽스북스 2008-02-05 10:03   좋아요 0 | URL
1. 저는 립글로스들이 좀 공짜로 많이 생기는 편이어서, 지금 스무개도 넘는 것 같아요 가지고 있는 게. 맨날 쓰는 것만 쓰고 나머지는 묵혀두고 그래요- ㅜㅜ 2년인가 지나면 병균 많이 생겨서 안좋다고 하던데, 전 5년 된 것도 못버리고 있는 것도 있어요 (바르지는 않는거지만, 나름 그때는 큰맘먹고 산거라?)
2. 와우 꼬리뼈!!! 긴 생머리 미인이시군요 무스탕님 (아 궁금하다!) 앞에도 썼지만 전 앞머리 잘랐다가 인생 망친 적이 몇번 있어서 절대 내손으로 안잘라요
3. 맞아요, 그래서 저도 주말 낮시간 이럴 땐 버스를 타기도 해요- 저희 집에서 과천, 양재 거쳐서 나가는 버스들은 꽤 풍경이 괜찮은 편이거든요, 가끔 막 감동도 하면서 나는 앞으로 버스를 탈테야, 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죠 ㅜㅜ
4. 뜨끈한 전기장판 너무너무 좋지요, 몸에 전자파가 흐를까봐 좀 걱정이긴 하지만
5. 쇠시구랴, 라고 말씀하시니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라 좋아요, 무스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깐따삐야 2008-02-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나름 단장하고 나갔는데도 만나는 사람마다 "넌 왜 메이크업을 안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그냥 이젠 그러려니~ 한다는. ㅋㅋ
2. 아휴~ 정말 추웠겠어요. 어제 날씨 되게 쌀쌀했는데! -_-
3. 연휴 하루 앞둔 날. 일할 맛 나겠당.^^

웽스북스 2008-02-05 13:36   좋아요 0 | URL
1. 흐흐 투명 메이크업의 진수? 본인만 아는 차이라 해도 한것과 안한 건 그래도 분명 다르다는 거 ㅋㅋㅋㅋ (나도그래요ㅜ_ㅜ)
2. 흑 팔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무겁고 얼고 ㅜㅜ
3. 흐흐흐 회사에 있을 맛은 나지만 일할 맛은 안나요, 실제로도 안하고 있다는 (아, 근데 왜 아무도 퇴근을 안하지? ㅜ_ㅜ)

다락방 2008-02-0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저희 동네(집근처)미장원은 머리 자르는거 칠천원이구요, 파마하는건 이만오천원이예요. 더 싸지요? 게다가 저는 그 미장원에서 한 머리가 무척 맘에 들어요. 사실 뭐 비싼건 해보지도 않아서 비싼 머리를 할때 얼마만큼의 만족감이 얻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정도로도 전혀 불만이 없다는 거.
역시나 저도 화장을 잘 안하는데, 나이를 이렇게 먹도록 색조화장도 못하니 이건 뭔가 좀 거시기하지 않나, 싶어서 요즘은 거금을 들여 볼터치를 사가지구서는 매일매일 볼터치를 해주고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아이섀도나(이건 쌍커풀이 없어서 못해요)아이라인, 마스카라는 할줄을 몰라요. 으윽. 이건 좀 비극인것 같군요.

자자, 내일부터 연휴예요.
그 관대한 마음으로 푸욱 쉬도록 해요!

덧. 웬디양님은 그 미소만 있으면 색조화장따위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

웽스북스 2008-02-05 22:09   좋아요 0 | URL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이사갈까요? ㅋㅋ
사실 동네미용실 미용사 아주머니들 다 지금 헤어드자-이너들 하는 코스 마치고 나와서 개업한 거 아닌가? ㅋㅋ 괜찮은 동네미용실 발견하면 기쁠 것 같아요- 전 머리를 자를 때 계획하고 자르는 게 아니라, 아! 오늘은 못참겠어! 라고 생각되는 날 마침 시간도 있으면 잘라서요 회사 근처에서 자르게 되는 것 같아요 ㅎㅎ 저도 쌍커플이 없어서 아이라인은 꿈도 못꾸지요 흐흐 아이섀도도 해도 티가 안나구, 티가 나면 신경쓰이구 ㅋㅋ

Mephistopheles 2008-02-05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그래도 한두차례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변장의 수준만 아니면 말이죠..^^
2. 음...만약에 웬디양님이 정말로 절친한 후배나 동생...혹은 조카(이런비유는 정말 슬프군요..상대적으로 나이차이를 인식하는 단어이다보니ㅋㅋ)이였다면 전 분명 "우히히히 ㅂㅂ야!" 라고 했을 껍니다.
3. 음...전 어찌 쉬어도 쉬는 기분이 날 것 같진 않습니다.^^

웽스북스 2008-02-05 22:12   좋아요 0 | URL
1. 실은 일요일날 마스카라를 백만년만에 했었는데요, 제가 렌즈를 껴서 눈에 인공눈물을 종종 넣거든요- 그럼 눈에 습기가 생겨서 깜빡거릴 때마다 신경쓰이고, 어쩐지 안그래도 심각한 다크서클이 더 심해진 것 같고 그래요
2. 음, 어쩌죠? 메피님은 우리 삼촌들보다 나이가 많으신데 ^_^ (엄마의 사촌인 외삼촌들 ㅎㅎㅎ)
3. 결혼하신 분들 보니 명절을 꼭 반가워하지는 않으시더라구요, 특히 이제 막 결혼해서 시댁에서 보내야 하는 주변 분들을 보니 더더욱 그렇구요- 저는 명절 때 별로 하는 일이 없어서 정말 푹 쉴 작정입니다. 어쩐지 금방 지나가버릴 것 같아서 벌써부터 아쉽지만요 ㅎㅎ

세실 2008-02-06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머리숱이 많아서 퍼머는 거의 하지 않아요. 나름 롤스트레트 한것 같다고나 할까~~그래서 커트는 청주에서 좀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한답니다. 그래봐야 원장에게 하는 커트 12,000원. 서울이랑은 비교가 안되죠~ ㅎㅎ
버스 타본지 오래되었네요. 운전을 하다보니 조금만 기다려도 짜증이 납니다. 조급증이 점점 심해지는 듯 해요. 님 마음 다스리신거 참 잘하셨네요. 역시 긍정적인 생각이 최고.
행복한 설 명절 되세요~~~

웽스북스 2008-02-07 02:19   좋아요 0 | URL
와 퍼머하지 않고도 롤스트레이트 한 것 같은 머리라니. 부럽습니다 부럽습니다. 저도 머리숱은 디게 많아요. 근데 컨트롤이 어렵다는거 ㅜㅜ

세실님도 설 명절 잘 보내세요 ^_^
 



엄마의 훌라는 어느덧 딸의 스트레스 해소용에서 엄마의 협박및 회유용으로 전락했다

어제, 메피님이 보라고 하셨던 영화를 보러 간만에 TV를 켜는 나를 보더니 엄마 왈,
웬일로 TV를 다 보냐며, 한가하구나? 그럼 엄마랑 훌라나 하자 ㅜㅜ

나는 이내 TV를 끄고 도망 나와 방에 있다

엄마는 저녁을 먹고 들어왔는데, 누구와 먹었느냐는 나의 물음에 끝까지 답하지 않아
나의 궁금증을 자아내더니, 엄마와 훌라 10판을 해서 이기면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ㅜㅜ
결국 엄마와 훌라를 하고, 이기고, 비밀을 들었으나
너무 심하게 별거 아니었던 사건


오늘은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동생과 훌라를 한다고 기다리고 있다
동생과 훌라를 하는 걸 본 아빠는
애가 밤새 게임도 안하고 얌전히 있는데 왜 훌라를 하냐고 묻는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아빠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엄마가 동생을 협박했다고 한다

너, 앞으로 외박하면 엄마랑 훌라 100판 해야돼






아, 즐거운 게임 훌라가 너무 벌칙으로 전락해버렸다, 어째 좀 슬프기도 하다
내 동생은 그날 이후 한번도 외박을 하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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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4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이 요새 훌라의 재미에 폭 빠지신듯... 저거 좀 오래 갈텐데요. ㅎㅎ 하다 도저히 안되면 온라인 훌라도 재밌습니다. ^^

웽스북스 2008-02-04 11:54   좋아요 0 | URL
하하하, 온라인 훌라도 있군요-
그래도 게임은 얼굴 맞대고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게 제일 재밌긴 한데 말이죠 ^-^

Mephistopheles 2008-02-04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이 은근히 따짜신 겁니다....^^

웽스북스 2008-02-04 11:55   좋아요 0 | URL
흠,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타짜의 피가 흐르고 있었군요
그러기엔 실력이 너무 안늘긴 하구요 ㅋㅋ

순오기 2008-02-0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라가 그렇게 잼있나요? 난, 그런거 젬병이라......
동생을 확실히 제압한 훌라가 훌륭해요! ^^

웽스북스 2008-02-04 12:57   좋아요 0 | URL
음 엄마는 치매 방지용이라는 명분을 갖다 붙이시죠 ㅋㅋㅋ
니들이 엄마랑 이렇게 놀아주는게 미래를 위해 효도하는 거야, 라며

보석 2008-02-0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한줄에 웃었습니다.^^ 벌칙이라도 평화적이고 좋네요.ㅎㅎ

웽스북스 2008-02-04 12: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어제 나 막 이거 쓰고 있는데 엄마가 동생한테
"너 좀 즐거운 표정으로 승부욕에 불타서 하면 안되니???" 라고 얘기하시고
동생은 "재미가 없는데 어떻게 재미있는 척 해" 이랬다는 ㅋㅋ

깐따삐야 2008-02-0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되게 귀여우시당~ ㅎㅎㅎ

웽스북스 2008-02-04 12:58   좋아요 0 | URL
우리 엄마지만 쫌 귀엽긴 해요 ㅋㅋㅋ
거울 보면서, 사람들이 엄마한테 자꾸 이쁘다구 그러네? 막 이러고 -_-

전호인 2008-02-0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라의 효과를 보신게로군요.
꾸준해야 가능한 일일텐데 어머니의 인내가 대단하신가봐요. ㅎㅎ

웽스북스 2008-02-04 12:59   좋아요 0 | URL
인내라기보다는 집착? ㅋㅋ
암튼 동생 입장에서는 어차피 하는 훌라
외박하고 하나 안하고 하나 똑같을 것 같기도 하구요 ㅋㅋ

Jade 2008-02-0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저 "그날 거기 있었습니까?" 보고 왔어요 ㅎㅎ 칭찬해주세요! ㅋㅋ

"12시 8분 전에 아무도 없었다면, 우리 마을에선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군요"이말이 어찌나 웃기던지....ㅎㅎ

웽스북스 2008-02-04 16:15   좋아요 0 | URL
우와우, 잘했어요 제이드님 ^_^
재밌게 봤어요?

세실 2008-02-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멋지신데요~~ 훌라 훌라~~
저두 한동안 훌라의 재미에 푹 빠진적이 있었답니다.

웽스북스 2008-02-05 00:13   좋아요 0 | URL
어머 세실님도 훌라에요?
어쩐지 세실님은 우아하셔서 그런 거 안좋아할 것 같은데 말이죠 ^_^

세실 2008-02-05 14:47   좋아요 0 | URL
ㅎ 저는 무늬만 우아합니다.
저얼대 우아하지 않아요.
님 행복한 설날 되세요~~~

웽스북스 2008-02-05 22:13   좋아요 0 | URL
아아 무늬만 우아하다니, 더 멋져요! ^_^
세실님도 행복한 설날 되세요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바쁘고 각박하다보니, 책을 보고 영화를 봐도 리뷰 한편 남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를 보면 한마디쯤은 더하고 싶다는 마음이 뭉글뭉글 올라오는데 역시나 생각을 정리하려니 머리가 아파와 -_-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좋은 영화 몇편 정도는 간단하게라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몇몇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써보려 합니다. 실은 오늘 좀 한가해서 이런 게 가능했다죠. 매일매일 한가하면 참 좋으련만 말입니다 ^_^

올해 들어서 본 영화는 꼭 5편입니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 팀버튼 감독의 스위니토드,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코르넬리우포름보이우 감독의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리고 오늘 본 남선우 감독의 모두들 괜찮아요?. 영화는 전부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고 싶은 좋은 영화들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보니, 시간이 났을 때, 가능하면 좋은 영화들을 보려고 많이 고심하는 편이지요. 스위니토드와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을테고 여기저기서 많은 평들을 접했을테니 굳이 제 소개까지 더하지 않을 생각이구요, 나머지 3편의 영화에 작년 말 봤던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안경까지 4편의 영화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안경 (오기가와나오코, 2006)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전작 카모메 식당을 워낙 즐겁게 봤던 터라, 이 영화도 매우 큰 기대를 갖고 봤고, 또한 재밌게 봤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카모메 식당보다는 영화적 재미가 좀 덜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또 왜 저 역시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이나, 그래도 저는 이 영화도 꽤나 재밌게 봤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유머가 저와 코드가 맞는 것 같아요.
영화는 슬로우라이프에 대한 동경 내지는 더 나아가 예찬,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동경이나 예찬이 좀 많이 갔구나, 싶긴 하지만요 ^^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 찾아간 한 마을의 민박집에서 '관광'할 만한 곳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여주인공은 그만 당황하고 맙니다. 여기는 관광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죠. 그럼 여기에 여행온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요? 라는 여주인공의 물음에 민박집 주인은 다시 이렇게 말하지요. 음...사색?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 저도, 하던 일 때려치고 핀란드에서 식당을 하면서 살았음 좋겠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삶. 하지만 할 줄 아는 음식이라곤 계란후라이와 라면 밖에 없어서 참았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저 마을로 달려가 아침에는 함께 체조를 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팥빙수를 먹고, 신선한 음식들을 먹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답니다.
하지만 슬로우라이프에 대한 로망은 역시나 로망일 때 가장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니, 전 그 마을에 머무를 자격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감독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부분은 여지 없이 드러났습니다.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아, 우리 정말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니까요. 아무래도 감독은 관객의 이해도에 대한 신뢰가 좀 부족한가봐요. 그렇지만 전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다른 영화가 나와도 또 보러 가게 될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스폰지하우스에서 아직 상영중이랍니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길어지다니, 다음 것부터는 짧게)


오래된 정원 (임상수, 2007)

소설 오래된 정원을 워낙 좋아했던터라, 이 영화는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기대하며 기다렸었지요. 그런데 예고편을 보는 순간 저는 약간 실망을 했었답니다. 염정아가 연기하는 한윤희가 어쩐지 책에서 제가 만났던 느낌과 달랐거든요- 그래서 실은, 실망할까봐 보지 않았었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종종 애용하는 곰티비 무료영화로 우연히 보게 됐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참 뜨겁고도 촉촉해지는 자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원작의 내용과 감수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변형을 가미하는 임상수 감독의 센스 역시 나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염정아가 연기하던 한윤희의 모습 역시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음.. 저만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진희의 멋진 목소리도 영화의 감동을 더하지요 (편파적이다)
행복? 아닌 것 같아. 나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은 시대였거든. (대사는 확실치 않으나) 딸과 통화하던 장면에서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실은 그 전부터) 단언컨대, 지진희의 목소리가 한치만 울림이 덜했다면 주책맞게 울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각해보니 단언,까지는 어렵겠군요-)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2006)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는 루마니아 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1989년 12월 19일 12시 8분에 있었던 루마니아 혁명 (영화를 보면 제가 왜 이렇게 날짜와 시간을 욀 수 밖에 없는 지를 아실 겁니다)이 과연 우리 마을에서도 있었는가, 를 조망해 본다는 한 지역 방송국 사장의 야심(?)에서 영화는 출발합니다. 그 순간 거기 있었던(혹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불러 놓고 진행한 토크쇼는 이내 엉망이 되고, 당신이 12시 8분 이전에 거기 있었다면 우리 마을엔 혁명이 있었던 것이고, 없었다면 혁명이 없었던 것이다, 라는 이상한 논리로 치닫다가 결국엔 방송사고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그만 박장대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5명 밖에 없는 극장에서 친구와 깔깔대며 웃다가 이내 민망해지곤 했지요. 방송 중에 종이 찢는 소리가 북북 들리고 심지어 옆에서는 종이배를 접고 있다면 말 다했지요.
혁명에 대한 터치는 가볍지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혁명의 순간,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했겠지만, 혁명은 그야말로 순간이었고, 그들의 삶은 그다지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로등이 켜지면 하루가 시작되고, 가로등이 꺼지면 하루가 끝나는, 반복적 삶을 살고 있지요. 혁명, 그리고 변화라는 건 한 순간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뼈있는 이야기를 제법 잘 담아놓은 감독의 내공을 느끼게 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30대 중반의 젊은 루마니아 감독에게, 칸의 신인감독 상인 황금 촬영상을 안겨줬다고 합니다.
영화 마지막 즈음, 혁명을 통해 아들을 잃었다는 한 여자의 전화가 결국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나타냅니다. "저는 혁명으로 아들을 잃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고 전화를 건 건 아니구요, 밖에 눈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어요. 지금 나가서 즐기세요, 어차피 내일이면 진창이 될 테니" 
꼭 가서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지만 상영관은 아쉽게도 필름포럼 한군데입니다.


모두들 괜찮아요? (남선우, 2006)

김호정이라는 배우는 참 눈이 가는 배우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호정씨의 굵직하게 보이면서도 선이 고운, 강단 있는 외모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살짝 중성적이면서도 여성스러운 목소리까지요. (이게 도통 무슨 말인지 ㅋㅋ) 그래서 자꾸만 그녀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른 바 한량 남편 뒷바라지 하는 강한 여성 역할이죠.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서 보여줬던 생활력 강한, 차가워보이면서 따뜻한 이미지의 여성 역할에 저 역시 어느 덧 그녀보다 더 잘 어울릴만한 누군가를 선뜻 떠올려내기가 힘듭니다.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 에서도 역시 그녀는 7년째 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남편을 위해 무용을 그만두고 학원을 차려 뒷바라지를 하는 생활력 강한 여성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영화 한편 못찍은 영화 감독인 셈이지요. 영화 한편 못찍은 감독이 무슨 감독이냐는 반문에는 그의 아들이 대신 항변해 줍니다. "그럼 수박 장수가 수박 한통 못팔면 수박 장수가 아니냐?" 아들 하나는 정말 똑부러지게 키워놓았지요? ^^
남편 하나도 버거운데, 치매 걸린 친정 아버지는 막내딸이 제일 좋다며, 막내딸인 그녀 집에 얹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 사고뭉치들을 데리고 사는 그녀의 마음에는 바람 잘 날 없지요. 특별한 스토리도, 이렇다 할 에피소드도 없는 잔잔한 이 영화가 좋았던 건, 영화 내에서의 갈등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걸 없앰으로써 해결하는 방법이 아닌,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음으로써 해결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 결혼은 나의 문제로부터 도망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나의 문제들에 더해진 또 한사람의 문제들의 결합,이라는 이야기를 제게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일이긴 하지만, 저도 언젠가 그런 세상에 몸을 담그는 날이 오겠지요. 그 날이 오면 나 역시 끌어안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실은 자기 앞가림 잘하고 생활력 강한 사람보다는 영화 속 김유석 같은, 젊은 시절에 한껏 가오 잡았을 것 같은 저런 한량이 이상형에 더 가까운지라 앞으로의 저의 삶이 매우 걱정입니다, 하하) 2월 21일까지, 곰티비 무료 영화로 보실 수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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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02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녹차의 맛 이라는 영화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2. 그래도 미스코리아 출신 중 유일무일한 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3. 아무리 소극장이며 관객수가 적다 하더라도 지켜야 할 예의는 있는 법인디....
4. 2월 21일...음 아직 시간은 좀 남았군요..그동안 밀린 영화를 먼저 처치해야..으흑..

오늘밤 11시쯤 EBS에서 짐 자무쉬의 영화가 합니다. 다운 바이 로...
감독도 감독이지만 배우들이 참 좋습니다.^^

웽스북스 2008-02-02 22:55   좋아요 0 | URL
1. 아이쿠 녹차의 맛을 내가 못봐서 ;; ㅎㅎㅎ 녹차맛은 좀 아는데 말이죠 (죄송 꾸벅)
2. 그러게요, 뒤늦게 빛을 발하고 있죠 참.
3. 아 그니까 종이찢고 종이배 접던 건 상영중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 생방송 중에 일어난 상황 (다시 읽어보니 헷갈릴 수 있겠네요 ㅎㅎ)
4. 생각해보니 11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ㅎㅎ
5. 영화를 TV로 보는 걸 별로 안좋아라해요, 그래서 지금 고민 때리는 중 ㅋㅋ

웽스북스 2008-02-02 23:19   좋아요 0 | URL
영화보러 갔다가, 엄마가 너 시간 많구나, 엄마랑 훌라 하자- 라고 해서 도망왔어요 ㅠㅠ (우리집 TV는 안방에 있어요 흑흑)

Jade 2008-02-0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보러가야겠어요 시간도 많은데 ㅎㅎ

웽스북스 2008-02-03 00:39   좋아요 0 | URL
후후후 일단 소기의 목적 달성~ ^_^

바람돌이 2008-02-0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보고싶은데 너무 멀어요. 게다가 저거 dvd로 나올까요? 나와도 대여점에는 없을듯싶은데요. ㅠ.ㅠ

웽스북스 2008-02-03 01:04   좋아요 0 | URL
아마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DVD 대여점에는 잘 안가서 어느 정도의 작품들을 갖다놓는지 제가 잘 모르겠네요 ㅜㅜ

깐따삐야 2008-02-03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한 편도 못 봤어요! 그나저나 웬디양님의 이상형은 나도 참 걱정이 되긴 하네요. -_-

웽스북스 2008-02-03 02:14   좋아요 0 | URL
아 이건 많은 사람들이 못봤을 것 같은 것만 골라서 부러 리뷰가 아니라 소개를 한 거니까요 ㅎㅎ
이상형에 대해서는 사실 영화를 보면서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ㅋㅋ 초반 고생내가 하고 말년고생 남편이하고 이러면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까지 막 했다는거 -_- ㅋㅋ 암튼 어째 남일 같아보이지가 않더라구요 (그래서 더 감정이입이 잘됐는지도 ㅋ)

비로그인 2008-02-0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정원빼고는 다 첨보는 영화! 웬디양님의 수비범위에 고개를 절래절래합니다.
제가 일본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니 <안경>을 먼저 보고 싶어요

웽스북스 2008-02-03 13:51   좋아요 0 | URL
흐흐, 단테님, 제가 남들 한참 영화보던 시기에 영화를 안봐서 (집에 비디오가 고장이 났는데 그 상태로 오랫동안 안고쳤었거든요) 남들 다본 거 못본 것들이 굉장히 굉장히 많아요- 수비 범위는 매우 허술, 이지요 ^_^;;
 


1

지난 수요일 12층에서 11층으로 이전한 이후 120명의 인원이 한 공간에서 생활한 게 오늘로 이틀째다. 대략 공기는 화장실이 더 상쾌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놔도 더운 한겨울의 에너지낭비가 난무한 곳에서 앞으로 한달 가량을 더 살아야 하는 현실. 분명히 1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1년도 넘게 이 공간에서 근무했는데도 참 낯설고 어지럽다. 여기서 일하던 그 때, 일도 참 많고 야근도 많이 했었는데, 터가 안좋은지 내려오자마자 매우 심히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람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야 되는데, 불쾌지수도 짜증도 증가하는 날들, 오늘은 내가 다시 목티를 입고 오면 사람이 아냐! 라고 큰소리 뻥뻥 치고 -_-

2

어제 집에 들어가니 엄마와 동생이 또 훌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다가 가족 오락이 될까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아빠가 미동도 않으신다. 물론 꼬셔보지도 않았지만. 11시도 넘어서 집에 들어갔는데 훌라의 꼬임에 홀딱 넘어가 꽤 여러 게임을 했다. 아, 근데 슬픈 사실이... 엄마가 실력이 늘었다. 겨우겨우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나름 고스톱으로 몇십년 다져진 사람인데, 내가 너무 무시했구나 싶다. 그나저나 나의 테트리스는 이제 어디에 푼담. ㅜ_ㅜ

3

D대리가 포털사이트 지각도 조사를 수행하기 전 다차원척도분석을 하기 위해 우리 팀에 데모로 돌린 팀원지각도분석 결과를 놓고 같이 그래프를 만드는데, 오오오 이거 굉장히 재밌고 충격적인 결과. 제일 독특한 팀원이 내가 뽑힌 사건 -_- 제일 까칠한 팀원도 내가 뽑힌 사건 -_- 제일 접근하기 어려운 (광고실 입장에서) 팀원도 내가 뽑힌 사건 -_- 이봐이봐 내가 우리팀으로 온지 좀 얼마 안되긴 했지만 아니에요, 나 정말 안특이하고, 매우 부드럽고, 만만하고 비굴한 사람이라구요 ㅜㅜ

4

양쪽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가끔 온다. 대행사 A가 하는 조사를 개발자 B에게 웹페이지 작업을 부탁해 업체 C의 패널을 빌려서 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조사가 필요한 건 A고, 개발에서 트러블이 생긴 건 시스템의 문제이고, C에게 돈을 내는 주체는 나(의 이름으로 의뢰)인데 왜이렇게 나는 뭘 하든 을의 마인드인지, 또 그래야만 하는 건지.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중간자인 이유만으로 빌고 빌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한번만 더 체크해주세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는, 내 돈 내고 커피까지 사드려 가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초비굴 모드가 되야 하는. 다행히 뼛속까지 비굴한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의 말투가 심히 겸손하게 들리긴 하겠으나, 가끔 자문한다. 근데 도대체 뭐가 죄송한거지? 그래도 어쨌든 누군가는 계속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되는 상황이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건, 참 천성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다. 이것봐, 나 비굴하잖아! (3번에 대한 항변)

5

그래도 난 죄송한 상황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을 할 줄 아는 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 실수였다면, 실수였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멋지고 괜찮다는 얘기? 막이러고) 그게 사람이건 회사건. 이건 알라딘 고객 서비스센터에서의 오늘 공지를 보고나서 하는 말이다. 나는 분명 그 쪽의 실수로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고, 그 쪽의 커뮤니케이션 미스임이 판명됐다면, 나한테 굳이 따로 사과 메일을 챙겨보내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실은 내 성격이었으면 그렇게 따로 했을 거다) 공지글을 작성하면서 죄송했다거나 실수였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넣을 것 같은데, 그냥 재검토 후 다시 주는 방향으로 결정했단다. 이것도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다. (멋지고 괜찮긴, 뒤끝 백만년이야) 이런 상황엔 말 한마디가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적절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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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8-02-0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도도한 이미지이시군요! 전 그거 은근 즐기는데 '-'ㅋㅋ

웽스북스 2008-02-01 22:19   좋아요 0 | URL
아 도도한 이미지는 아니에요 ㅎㅎ 그러기엔 회사에서 너무 좀비같구요 -_- ㅋㅋㅋ 그냥 뭐랄까 4차원 -_- 이래요- 근데 아니에요 우리 팀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에요, 저는 비굴해요 ㅋㅋ

Mephistopheles 2008-02-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암튼 사람이 너무 높은데서 근무하면 여러가지로 악영향이 있다죠..땅에 다리를 붙이고 살아야 해요..^^
2.포커로 종목을 바꿔보심이..이건 실력보단 운이 중요하다보니까요.
3.왠지..전혀 낯설지 않은 이 미묘한 동질감은 대체 뭔지...
4.웬디양님도 엄밀히 말하면 3차산업(서비스업)쪽 아니신가요..사실 제가 하는 일도 업종상으로 3차산업에 분류되어 있다죠..그래서 외주 전화와도 큰소리 한 번 크게 못치죠..
5.죄송하다 미안하다란 말을 자주하는 건 결코 좋진 않지만 분명 무언가 잘못된 상황에서 솔직하게 죄송하다 란 말 한마디는 상대방의 날 선 감정을 누그러트리죠..그게 꼭 사회생활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웽스북스 2008-02-01 22:21   좋아요 0 | URL
1.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여러모로 참 ;;;
2. 아 그럴까봐요 정말 ㅜ_ㅜ
3. 흐흐흐 근데 메피님 전 진짜 평범해요 (메피님이랑은 달라요 ㅋㅋㅋ)
4. 그쵸 3차산업 쪽이죠- 다들 "나 이제 눈에 보이는 것좀 만지고 싶어" 라고 이야기하죠 ㅎㅎㅎ (그래도 건물은 눈에 보이잖아요 ㅋㅋ)
5. 네 자주하는 건 좋지 않지만,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고맙다는 말도 죄송하다는 말도 ^^

깐따삐야 2008-02-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많이 건조하고 갑갑해 보여요. 오가며 물 많이 드세요.
2. 저도 누구하고 겜만 하면 테트리스를 풀려다 도리어 받는 입장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지면서도 이기는 쪽보다 더 웃고 떠들고 흥분하고... 참 가관이라는. ㅋㅋ
3. 저런 결과가 나와도 방긋 웃을 수 있는 웬디양님이기 때문에 다들 표를 몰아줬는지도 몰라요. 저도 예전에 아이들 사이에서 이상한 설문만 하면 죄다 상위에 랭크됐었죠. 예를 들어, 학교 다닐적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졸았을 것 같다거나, 매점에 자주 들락거렸을 것 같은 선생님. (써놓고보니 웬디양님과는 다른 이미지구나. 오늘도 무덤을! -_-a)
4. 어쩌면 우리가 사회에 지대루 적응해 간다는 징표인 거죠. 자동인형처럼 반복하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5. 그냥 기대를 접으시와요. 그 사람들은 우리가 상대해야 할 고객이 당신 하나요? 이 정도로 생각할지도 몰라요. -_-

웽스북스 2008-02-01 23:57   좋아요 0 | URL
1. 네 정말 온몸이 증발되고 있는 느낌이에요=
2. 흐흐흐 심지어 테트리스도 잘 못한다는 거 ㅋㅋㅋㅋㅋ 전 지면 성격 나와요- 근데 자주 진다는 거 ㅜㅜ
3. 아 그러니까, 저 정말 안그런데 ㅜㅜ (끝까지!!)
4. 아 그죠? 뭐 나름의 법칙이라면, 정말 고마울 땐,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쓰려고 노력해요- 가끔 진짜로 감사하다,고 표현해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5. 그렇겠죠 난 이럴 때 내가 순진한 것 같아요 정말 ㅋㅋ

2008-02-02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2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2-02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다 깨서 또 알라딘 놀이를 하는 나는 뭔가? 잠시 생각케 하는 페이퍼... ^^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거얌!'하면서도 '너 자신을 알라'는 그 분 말씀이 생각나는군요.ㅎㅎ~ 요런 솔직한 페이퍼가 마음을 움직인다 공감하며 추천 한방 쿵!

웽스북스 2008-02-02 12:41   좋아요 0 | URL
자다 깨서 알라딘 놀이를 하는 순오기님은...
나의 동지이시지요 ^-^

무스탕 2008-02-0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여 12층으로 올라가시길 빌어드릴께요..
저도 고스톱경력 30년 이상인데 이상하게 트럼프 놀이엔 흥미가 안가요. 카드로 하는건 하나도 모른다지요.. 대신 화투로 하는 놀이는 제법 여러가지 안답니다 ^^;
D대리님 이하 여러분들이 아직 웬디양님을 잘 모르시는 게지요..
비굴 아니에요. 맘이 여리고 일을 잘해보자는 굳은 의지인거죠.

웽스북스 2008-02-02 15:31   좋아요 0 | URL
와 그렇군요
전 화투가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보여요
트럼프는 숫자만 세면 되는데 화투는 띠도 둘러져있고, 한문도 써있고 (광) 새도 날아다니고...아...머리아파요 흐~
 



오늘부터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하는 라캉 수업을 듣게 됐다. 신청은 두달 전쯤 해놨고 강의는 오늘에서야 시작. 한달 코스라고 해봐야 일주일에 한번 가는 거니 수업은 총 다섯번 듣는 셈이다.

실은 굳이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라캉의 세계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거니와, 라캉의 라자도 잘 모른다. 실은 난, 수업을 듣고 싶었던 거다. 아마 다른 수업을 듣자고 해도 난 다 오케이 했을 거다. 역사나 문화나 사회학이나 문학이나, 그게 뭐든 그냥 배울 수 있는 거라면. 그게 뭐든, 먹고 사는 일과 크게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계속 뭔가를 배우긴 했지만, 여기서의 배움이란 어떤 깨달음, 혹은 지적 충족이라기보다는 어떤 기술의 습득 혹은 체화의 단계였던 것 같다. 통계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던가, 사내 솔루션 이용법을 배운다던가, 여러 매체의 광고상품들에 대해 배운다던가, 보고서 쓰는 스킬이라던가, 파워포인트나 엑셀을 쓰는 법이라던가, 하다못해 메일을 공손하게 쓰는 예의라던가, 명함을 주고받는 법이라던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웠지만, 일주일에 세번, 아침교육 씩이나 들어가면서까지 뭔가를 계속 배워 왔지만 오히려 나는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다. 해가 지날 수록 바보가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난, 정말이지 수업을 듣고 싶은 욕망이 계속 생겨왔다. 어느 평일 조용히 휴가내고 학교로 내려가 맨 뒷자리에 앉아 몰래 수업을 듣고 오는 상상도 했다.

처음에 듣자고 하던 두달 전 이것저것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준비해야지, 라고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했다. 속성 코스로 라캉이라도 알자며 구매한 저 하룻밤의 지식여행 라캉 편(→)도 귀찮아서 다 안읽었다. M언니는 그나마 정신분석 쪽에 좀 관심이 있어 이것저것 많이 읽었지만 나의 목표는 그냥 라캉이 누군지 정도만 알자, 이다. ㅎㅎㅎ 그리고 작전은 바싹마른 스폰지 마인드다. 아무것도 없는 스폰지가 원래 물을 더 좍좍 빨아들이지.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나는 벌써 주변 친구들의 욕망을 분석해본다고 또 난리법석이다. 흐흐.

대신 내가 준비한 건 공책과 필통이었다. 학교때부터 좋아하던 하이테크펜 두자루를 필통에 넣고 (넣을 것도 없다 실은 ㅋㅋ) 회사에 들고다니는 가방에도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하지만 두껍지 않은 공책을 2권 준비해 M언니에게 한권을 선물하고 한권은 내가 적는다. 오늘 나 또 얼마나 모범생 모드로 필기를 열심히 했는지 두시간동안 네바닥이나 꽉꽉 채워 썼다. 우와~

시험도 없고, 학점도 없지만, 일단은 개근을 목표로 다섯번의 수업을 열심히 나가보련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꾸만 나를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신경증에 강박증 증상이 좀 있는 것 같다. 오늘 첫 시간에 이렇게 느껴지면, 다섯번을 다 듣고나면 나에게 어떤 증상을 더 진단할 수 있을지, 조금 두렵기도 하다는 거.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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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8-01-3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지막 학기에 현대비평론 듣는데
비평 관련 이론보다는 라캉이니 뭐니 정신분석 강의만 들었던 ㅎㅎㅎ
심지어는 레포트도 작품을 정신분석으로 분석해가는거였어요 ㅎㅎ
뭐 쓰면서도 잔뜩 끼워 맞춰서 겨우 냈지만요.
저도 민예총에서 듣고 싶은 강의들 몇 개 있는데
나중에 꼭 들어야겠어요.
라캉 관련 책 중에서는 how to read 라캉 어렵지 않고 괜찮았어요~

웽스북스 2008-01-31 00:20   좋아요 0 | URL
흐흐 비블리오테라피같은 것도 재밌어보이더라고요
봄학기 때도 또 다른 강좌 신청해서 들어볼까 생각중이에요
나는 1학년 때 현대사회와 심리학 듣고, 2학년 때 상담과 심리 듣고나서
심리학 비슷한 걸 강의로 듣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하우투리드 라깡은 사실 읽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일단 5주 수업 듣고나서 결정하려고요 ㅎㅎㅎ

Mephistopheles 2008-01-3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사악하게 사는 법" 명강사 메피스토

이런 강좌는 들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웽스북스 2008-01-31 01:06   좋아요 0 | URL
세상을 샤방하게 사는 법 명강사 웬디
이런 강좌는



없습니다 ㅋㅋ

Mephistopheles 2008-01-31 01:31   좋아요 0 | URL
샤방(x) 정의(O)

순오기 2008-01-3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학생놀이가 부러운 웬디님의 마음이 확~ 이해되는 순오기! ^^

웽스북스 2008-01-31 01:0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순오기님도 이런저런 수업 많이 들으러 다니시는 거죠? ^^

순오기 2008-01-31 13:59   좋아요 0 | URL
예~ 나는 기회만 된다면 어디든 달려가요! ㅎㅎ
학창시절에 이렇게 열심을 냈으면?ㅋㅋㅋ 배우자가 달라졌을거얌!!

웽스북스 2008-01-31 16: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1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달라진다, 뭐 이런거? ㅋㅋ

네꼬 2008-01-3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회사 다니면서 '에이 C 이게 뭐야!' 하면서 대학원 들어갔을 때요, 첫 수업 끝났는데 나오면서 목에서 이상한 소리 났어요. 끅끅, 하는 소리요. 아는 사람들한테 다 전화해서는 "나 행복해 죽을 것 같아. 세상 모두 사랑해" 맨정신에 술주정을 했더랬죠...... 두 학기 다니다 말았다능. -_-

웽스북스 2008-01-31 01:14   좋아요 0 | URL
아 네꼬님 그 심정 완전 알 것 같아요 흐흐흐
근데 두학기 다니다 말았다능, 그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도
또 이해되는 저는 뭐랍니까 ^_^

네꼬님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군요~ (생뚱맞지만 개연성있죠? ㅎㅎ)

깐따삐야 2008-01-3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재밌겠어요. 열심히 듣고 잘 배워서 나도 정신분석 좀 해주세요. 아마 웬디양님과 비슷할 것 같긴 해요. 신경증에 강박증...ㅠㅠ

웽스북스 2008-01-31 16:03   좋아요 0 | URL
흐흐 깐따님은 건강한 정신을 가진 건강한 아가씨로 보이는걸요 ^_^

프레이야 2008-01-3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노트를 공개해주세요.
학생놀이, 저도 늘 하고 있지요. 그거 나름 재미있답니다.
개근상 꼭 타실거죠? ㅎㅎ 상으로 뭘 주실까 궁금^^

웽스북스 2008-01-31 16:08   좋아요 0 | URL
아 그러게 상으로 뭘 줄까~ 고민해봐야겠어요 ^_^
혜경님은 어디서 학생놀이 하시는지 궁금해요 ㅋㅋ

2008-01-31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8-01-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깡이라닛. 나도 직장 생활하면서 그런 아카데미 다니고 싶다.

웽스북스 2008-01-31 16:09   좋아요 0 | URL
나는 김상봉/서경식 강의 가고 싶었었는데 말이죠 ㅜ_ㅜ

민예총강의는 아카데미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금액도 저렴하고, 커리큘럼도 짧아서 아카데미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서 좋지만 말이죠 ^^)

마노아 2008-02-0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학생이 되고 싶어서 지난 가을에 직장인을 위한 역사 수업을 들었어요. 생각보다 재미 없었고, 각오보다 많이 졸았지만, 그래도 수료증 받으니까 기분 좋았어요^^

웽스북스 2008-02-01 19:32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이 직장인을 위한 역사수업을 듣는다는 건
어째 좀 반칙 같아요 ㅎㅎ

개츠비 2008-02-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라깡으로 레포트 10장 썼던게 생각나네요... 뭐 거의 책을 베끼는 수준이었지만... 넘 어려워서 ...ㅋㅋ 근데 차분하게 강의 받는거라면 한번 도전해볼만 하겠네요... 뭐든, 배운다는건 좋은거죠.

웽스북스 2008-02-01 19:32   좋아요 0 | URL
네네 일단 시험도 없고 레포트도 없으니까 좋지요
그래도 숙제는 있답니다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