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미코는 쏟아지는 햇빛에 놀라 마치 암탉처럼 허둥지둥 반쯤 열린 문 뒤로 물러섰다. 지금 히미코는 이미 젊은 아가씨의 무방비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더구나 다음 연령의 충실감을 획득하기엔 이르지 못한, 어정쩡하기 이를 데 없는 빈약한 상태였다. -70쪽
버드에게 있어 아이의 이상은 그것을 둘러싸고 타인과 이야기를 하긴커녕 혼자서 다시 생각해보려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수치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올라오는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이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타인들과 공통의, 인류 모두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73쪽
나는 무서운 일을 만날 때마다, 만약 거꾸로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쪽이라면 훨씬 더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면서 심리적인 보상을 받아. 넌 자신이 받았던 가장 무서운 감정과 비슷한 정도의 공포를 타인의 머리에 심어 놓은 적이 있을 것 같아? -79쪽
개인적인 체험 중에서도 혼자서 그 체험의 동굴을 자꾸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인간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전망이 열리는 샛길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체험이 있지? 그런 경우, 어쨌든 고통스러운 개인에게는 고통 뒤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고. (중략) 그런데 지금 내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고역이란 놈은 다른 어떤 인간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는 자기 혼자만의 수혈을 절망적으로 깊숙이 파들어가는 것에 불과해. 같은 암흑 속 동굴에서 고통스레 땀을 흘리지만 나의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의미의 단 한 조각도 만들어지지 않지. 불모의, 수치스러울 따름인 지긋지긋한 웅덩이 파기야. -204쪽
아기를 둘러싼 가정사는 어떤 국제 문제보다도 구제적이고 무검고 절실하게 버드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있었다. 버드는 델체프씨가 그의 신변에 숨기고 있을 온갖 함정들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웠다. 아기 사건 발단 이후 처음으로 버드는 자신이 남들에 비해 확실히 폭넓게 소유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여유를 깨닫고 비틀린 우스꽝스러움을 느꼈다. -211쪽
"당신 여자 친구는 영어를 못 하죠?" "우린 언제나 말 없이 이해합니다"-217쪽
버드는 너무나 격렬하게 깊은 곳에서 그 제안에 동요되었기 때문에 한심하게도 당황하며 "그건 안 되죠, 그건 안 돼요" 하고 부질 없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째서?" 하고 대들 듯이 히미코가 물었다. "아기의 쇠약사를 야프리카에서 자연스레 잊어버린다. 라는 건 지나치게 그럴듯한 이야기니까! 난 그런 짓은 못해!"-223쪽
만일 히미코의 시아버지가 나에게, 자살한 남편의 환영으로부터 히미코를 구해 낸다고 하는 도덕적인 목적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받아들여주지 않겠어요? 하고 말을 꺼냈더라면 나는 펄펄 끓는 물을 부은 고형 수프처럼 녹아버릴 거야. 그리고 나는 이 달콤하고 맛있는 기만의 여행에 서둘러 자신을 풀어노흘 것이다. 버드는 시아버지의 그 말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열망하고 있는, 뻔뻔스럽고 욕심 많은 자신을 어두운 구덩이에라도 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223쪽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내갰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 -269쪽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그렇지 하지 않고 현실의 삶을 살 수도 있다네, 버드. 기만에서 기만으로 개구리 뜀 뛰듯이 죽을 때까지 가는 인간도 있지"-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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