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산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  H의 집에 느즈막히 놀러가 와인을 마시며 놀았다. 나는 거의 1년 반만의 만남이었는데, 그러니까 H의 결혼식 이후로 애들을 못봤었나보다. 아직까지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는 6명쯤 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결혼한 친구가 H. (라고 말하면 다들 놀란다. 니들 나이가 몇인데? 로 시작해 결국 '끼리끼리 논다'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녀들과 거의 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ㅋ) 


오랜만에 만나면 하는 일은 거의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일.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각자 다른 길을 걸었고, 현재는 삶의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등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관부터 정치관까지, 아마도...) 공통된 과거를 이야기하는 쪽이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공통된 주제가 어제는 하나 더 생겼는데, 무려 '건강 염려'였다. 오. 마이. 갓. 우리가 늙긴 늙었나봐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과거로 점철됐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하다가, 공부를 참 열심히 했던 H가 중3때 다른 방 불이 다 꺼진 걸 확인하고 잠들면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비평준화라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 ;) 컨디션 난조로 수능을 망쳤던 K의 대학 보내기 프로젝트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나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수능을 망쳐서 당시 성적만으로는 서울에 있는 어지간한 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었던 K를 위해 H가 입시자료집을 뒤져 모학교의 학교장 추천 전형을 찾아내고 (우리 때는 흔치 않았다) 그래도 개중 글쓰는 게 좀 낫던 내가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 같은 걸 써주고, 했던... 그러다 잠자코 듣던 H의 남편이, "근데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는데, 아, 이거 생각해보니 정말 큰일날 짓이긴 했다 -_-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다니...! 19세엔 그게 우정인 줄 알았다. 나도 참 바보같았구나. 암튼, K가 대학에 들어간 건 H는 본인이 그 전형을 찾아냈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나는 내가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를 너무 잘썼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정작 K는 본인이 면접을 잘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ㅋㅋㅋ


누구는 어떻게 공부했고, 누구는 얼마나 놀았고, 뭐 이런 얘기들을 하다가, 문득 내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수능을 제일 잘 봤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에 후배들과 찬양집회를 준비하던 예비고3과 그렇지 않은 예비고3이 있었다. 나는 전자였고, 우리 학년의 수능 결과가 나오자마자 우리 후배 학년에서는 동아리 선배 중 내가 수능을 제일 잘본 것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찬양 집회에 참여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나보다' 라는 풍조가 만연해서 -_- 집회에 참석하는 게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고보니 그들이 내 실력이라고 생각을 안해준 게 참 괘씸하네. 이놈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집회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좀 더 같이 놀고 싶었을 뿐이고) 그렇다고 그들의 그런 신앙을 바로잡아줄 정도로 내가 엄청나게 깨인 의식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굳이 참여한다는 애들을 말릴 필요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함께 겨울을 보냈었고, 후배 학년 아이들이 수능 결과는 미안하게도 참 정직했다. 


암튼, 그런 건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다, 라고 어른들이 말하면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곰곰히 따져보니 어제 만난 친구들 중에서 현재 받고 있는 급여는 내가 제일 낮을 듯 ㅋㅋ (까보지는 않았다) H는 몇 번의 파란만장한 이직 끝에 삼성경제연구소의 기획자로 들어갔고, P는 유학을 다녀와 코엑스 해외 전시팀에서 벌써 과장이고, K는 AI CPA 통과 후 전세계여성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화장품 회사라는(H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방문 판매 브랜드라 나는 정작 몰랐고 -지금도 기억이 안나고 - 당연히 가고 싶었던 적도 없던 브랜드) 곳의 재무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암튼, 그 때는 그 결과가 정말,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고, 그 서열이 마치 인생의 서열이라도 될 것처럼 여겨졌던,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한 문제였으나, 결국은, 그 때는 듣고 나면 거세게 항의라도 하고 싶었던 어른들의 말처럼 '지나고 나니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굳이 지금 그 시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게 다 부질없단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 때의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고, 결국은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리 부질없다고 말한들,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지금의 나도 내 나이를 겪은 어른들이 '나도 너같은 시절이 다 있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여전히 귓등으로도 안듣는 것처럼.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성적의 순서보다 더 절묘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꿨던 건 순간의 선택들이고 그 선택지 앞에 놓여졌을 때에는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그에 근거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등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친구 중 연봉서열 4위지만, 내가 4위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하지도, 극단적이지도 않은 사고 구조를 갖게 됐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주 만나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왔지만, 그래봐야 우리는 아마도 일년에 두 번 정도 만나면 많이 만나는 것일 게다. 추억을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곱씹기엔 한계가 있고, 현재의 삶이나 생각들을 나누기엔 묘하게 달라진 삶의 좌표들이 서로 맞물리지 못해 서걱거리고 있고, (다르다고 대화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의 간극과 함께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실은 그 생각의 좌표가 제일 많이 변한 게 나이기 때문에 스스로 더 피곤하게 느끼는 것인지도.) 미래를 논한다는 건, 아, 너무나 아득한 일이니까. 함께 곱씹던 추억이 바래질 때 쯤, 또 만나 추억을 나누고,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때로는 함께 서러워하고, 함께 웃고 하게 되겠지. 그 또한 나쁜 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p/s

 

고등학교 때 친구들 만난 이야기를 굳이 남겨본 건, 하필 어제 H의 집으로 가면서 읽었던 책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였기 때문. 불충분한 문서(여기서는 아마도 각자의 진술)와 기억이 만났을 때, 그리고 나의 입장이 만났을 때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 역시 나한테 유리한 것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나고, 그것 위주로 쓰게 되는군. ㅎㅎㅎㅎㅎ 나중에 알고 보면 후에 K에게 써줬던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가 사실은 정말 엉망이라는 걸 알고, 충격과 회한까지는 아니지만..... 매우 오그라들어할지도. ㅎ (열아홉에 어줍잖게 썼던 글이 눈에 찰 리 없지 않은가.) 암튼, 인간이란 참 재밌고, 처량한 존재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ㅎ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

 

 

 






잠이 안오니, 밑줄 투척.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인생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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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4-0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25 끝에 첫 댓글의 영광을! :)

웬디양님, 글 정말 잘 읽었어요. 연봉 서열 4위를 시인하면서도 'ㅋ'을 쿨하게 칠줄 아는 웬디양님은 역시 멋져요! 저는 고교동창을 만나면 꼭 이상하게 꼬임에 빠지게 되더라구요. 어디 교회에 끌려가거나 무슨 잠적설에 대한 해명을 듣거나. 가끔 추억을 이야기하고 만나서 회포를 푸는 관계는 퍽 좋은 것 같아요. 그걸로 과거가 일시적으로나마 살아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기를 들춰보는 것도 재밌겠지만요. 10년 뒤의 나와 내 친구들은 어떤 모습일지 실로 궁금해지는 따뜻한 오후네요~

웽스북스 2012-04-09 20:41   좋아요 0 | URL
우힝. 감사요 수다쟁이님. 까딱하면 무플 될뻔했어요. ㅋㅋㅋ

나이가 들면서 관계도 변하고, 관계에 대한 기대도 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 좋지만, 역시나 한계가 있다는 느낌도 받고요. 암튼, 옛 친구들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고 나니, 오만가지 생각이. ㅎㅎ

하지만, 따뜻한 오후를 선사했다니 기쁩니다 :)

개인주의 2012-04-1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염려가 추가되는 거 심하게 공감되네요.ㅋㅋ
얼굴이 마비되니까 얼마나 애매한지.
- -

웽스북스 2012-04-13 01:28   좋아요 0 | URL
앗 스누피님. 갑자기 이 무슨 일입니까 ㅠㅠ 지금은 좀 어떠신지...

굿바이 2012-04-1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까지 연락이 되거나 혹은 끝까지 가끔이라도 연락을 하는 친구들 중에서 나는 연봉 꼴찌를 달리고 있는데, 그 사실에 나보다 그들이 더 놀라는 것을 보면, 타인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그저 밥벌이라도 할 수 있는 내가 참으로 대견한데 말이야^^

오늘은 목련이 핀 걸 보았는데 생전 처음으로 목련을 보는 사람처럼 나는 놀라고 또 탄식하고 꽃나무 아래 한참을 서있었어. 그러면서 생각했는데 앞으로 나는 지금 살아왔던 것 이상으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겠구나 싶더라. 잘 지내지?^^

웽스북스 2012-04-13 01:30   좋아요 0 | URL
언니, 그러니까, 저도 지지난 토요일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합정에서 목련을 보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려 다시 되돌아갔어요. 목련은 그런 꽃인가봐요.

그리고 언니의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근사할 거라 믿어요. 물론 근사하다, 의 기준이 남들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언니와 저는 비슷한 기준을 가지고 있을테니까.

그러니까, 언니는 무조건 짱. 저는 목련보다 언니가 훨씬 훨씬 좋아요! 훨씬 훨씬 예뻐요!!

카스피 2012-04-10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봉과 상관없이 만날수 있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 넘 부럽네용^^

웽스북스 2012-04-13 01:3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이제 많지는 않아요. ㅎㅎ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누구도 이 책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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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4-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별을 아낌없이 남기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다른 책 별들을 좀 아껴서 줄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하필 오늘 이 책과 함께 100자평이 올라오게 된 테러의 시에겐 좀 미안한 마음이 드네.

에잇, 내 별따위가 다 뭐라고. ㅋㅋㅋㅋㅋ
 
테러의 시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네. 저는 김애란보다 김사과가 훨씬 좋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는 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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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4-0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비교해서 좀 죄송하긴 합니다 ; ㅎ
그리고, 원래 제목이 '모래의 시'라고 들었는데, 그 편이 훨씬 어울리는 듯.
 

 

하이킥이 끝났다. 아. 지난 몇개월간, 나는 거의 하이킥 '당일보기' 원칙을 매일 매일 지킬만큼, 하루의 끝을 하이킥과 함께했었다. 오늘의 하이킥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어제 하이킥이 막방인지도 모르고, 나는 금요일 하이킥 본방사수를 어찌해야하나, 집에 얼른 들어가서 IMBC로 봐야하나, 10.1인치 갤럭시탭을 빌릴까, 암튼 약속은 없어야하고, 요가는 목요일에 미리 가야한다며 나름 원칙을 정해두고 목요일에 야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트위터에 하이킥 막방이 오늘이라며 ㅠ 부랴부랴 아이폰 앱을 켜고,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다. 결말을 다른 누구로부터 들을 수는 없다는 강렬한 의지.

(여기부터는 스포스포-뭐 세상에 널리고 깔린게 하이킥 스포이지만)

여기까지가 소설 짧은 다리의 역습의 끝이다.
소설이라기보단 전부 실화죠. 마지막 에필로그만 뺴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그저 저의 상상입니다.

 

하이킥은 내레이터였던 이적의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처음에는 당연히 '여기까지'가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에필로그'가 승윤 부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이킥의 결말이 줄 충격을 기대하고 두려워했는가. 그런데, 아무것도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 밋밋한 결말. 어떻게 보면 결말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거고, 사실은 그것이 현실에 가깝겠지, 라고 생각을. 삶을 흐르게 두는 일이 쉬운가. 하지만 삶은 흐르는 것이지. 오히려, 명확한 종지부를 찍는 일은 쉽지.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는 영혼. 그러면서도, 지원이 학교를 나가는 부분이나 하선과 지석의 이별과 재회 장면이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졌으면 어떨까 라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었다. (한국과 미국이 그렇게 멀었던가. 2개월이 그렇게 길었던가) 주변에 오늘 마지막회 자체가 에필로그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여지가 별로 없다고 봤었다.

암튼, 허전한 마음으로 디씨인사이드 하이킥3 갤을 들어가서 이런저런 글들을 살펴보다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누군가의 글에 이렇게 써있는 것을 봤다.

"하이킥 결말을 보니, 영화 <어톤먼트>가 생각났어요"

 

이 글을 보는 순간, 쨍, 하는 느낌이 든 거다. 아. 어톤먼트. 그 순간 마지막회가 다시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확인을 위해 다시 한 번 마지막회를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하선이 공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고 지석이 말한다. 사실은 거기가 실화의 끝, 이고 오늘 에피소드 전체가 에필로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문이 닫히는 장면으로, 마지막화는 시작되었고, 그래서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랐고, 조명은 한 톤 다운 되어 있었던 거였던 걸까.

 

사실 나는 영화 어톤먼트를 보지 못했다. dvd는 사놨는데 노트북이 고장나고 맥북을 사는 바람에. 대신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소설 <속죄>는 매우 인상적으로 봤었다. 사실 볼 때보다, 보고 나서가 계속 기억나는 작품인데, 그건 다 마지막 부분, 브리오니의 독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기부터는 <속죄> 스포스포 ㅠ)

'속죄'에서의 해피엔딩은 결국 주인공이 자신이 젊은 시절 그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하나의 속죄의 의식이었다. 의지적으로, 그렇게라도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남겨두고 싶었던 것. 그들의 사랑은 실제로는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행복을, 독자들에게는 만족감을 주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 그러니까 <속죄>라는 소설로서의 이 결론은 결국 앞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게 되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삶을 긍정해주는 듯한, 그러면서도 매우 냉정하고, 바늘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게 서늘한, 그러니까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던 그 마지막 부분을 읽었을 때의 감흥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나는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로비 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런던을 가로지르는 나의 도보여행은 클래펌 커몬의 그 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겁쟁이 브리오니는 그 둘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 모두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결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들에서 독자가 희망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이 가져올 장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들에게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너무 겁을 먹었고, ...... (중략)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이언매큐언, 속죄)

 

하이킥과 어톤먼트가 연결이 되는 순간, 퍼즐이 풀리듯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스토리텔러이자 내레이터로 소설가인 이적이 등장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처음부터 이런 마무리를 하기 위한 거였구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적이 그의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들은 역습을 하기엔 다리가 너무 짧았지만, 그래서 어쩌면 안내상의 사업은 안쓰럽게 끝났을지도 모르고, 지원은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결국 르완다로 떠나지도 못한 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선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지석은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선물함으로써, 최소한 불꽃을 터뜨리게 함으로써, 최소한 학교를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최소한 둘을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그들의 삶을 감싸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젯밤에는 이 결론에 확신을 갖고, 내가 마지막회를 오독했다고 생각했고, 확신을 갖기 위해 김병욱이 이언매큐언을 좋아한다는 증거를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ㅜㅜ 아침에 일어나니, 이 해석이 좀 과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심지어 저녁에 본 기사에는, 제작진이 상상한 부분은 '승윤 대통령 에피소드'였다고 콕 찝어줌) 그래도 나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이렇게 기억하는 편이 훨씬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한편으로는 그런 의도가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세번의 하이킥을 통해 김병욱 월드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석하는 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김병욱은 지독한 사실주의자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갖는 꿈들은 어쩌면 그 샴페인처럼 그냥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는 별 것도 아니거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내게 김지원도 명인대도 그런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환상이 있어, 사람들은, 달린다. (하이킥 마지막회, 종석의 대사)

 

어쨌든 변함없는 건, 하이킥은 다리가 길던 짧던, 알고보면 별 것도 아니거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일지라도, 달려보는 것 그 자체를 응원하고, 그게 삶의 과정이고,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사실 끝까지 달려도 결론이 나지 않는 삶이 대부분이니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니까. 이런 결말을 수긍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어떤 결말이건 간에, 결국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의 삶처럼.

 

어찌됐건, 나는, 이번에도 하이킥의 결말이 반갑고 고맙다. 실은 어떤 결말도, 그렇게 반갑고 고맙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고, 또 기대한다 :)

 

 

 

 
그리고, 덕분에 이 작품도 다시 기억했고 :) 또 다시 만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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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3-3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웬디양님, 좋아요.
아직 하이킥 마지막회를 못봤지만 하이킥을 이렇게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걸 보니까 마지막회를 안 봐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텐아시아 기사는 와닿지 않았는데 웬디양님 글이 더 설득력 있어요. 제작자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웽스북스 2012-04-01 17:32   좋아요 0 | URL
우와. 아치님. 진짜진짜 고마워요!!!! 쓰면서도 사실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같아서 자기 만족으로라도 두고 싶어서 쓴 거였는데, 좋아해주시니 감격 감격 ㅠㅠ

마태우스 2012-03-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읽다보니 스포가 있어서 잽싸게 스크롤 내렸습니다. 저랑 아내는 하이킥 매니아로, 본방사수를 못할 때가 많았지만 못본 건 죄다 쿡으로 봤답니다. 이번주 건 하나도 못봐서 언제 몰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따가 보기로 했어요. 그러니 진짜 댓글은 이따가 남길게요. 지하킥이 비극으로 끝나서 이건 안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태우스 2012-03-31 21:0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기고 나서 제가 못본 월~목을 쿡으로 봤습니다. 제가 사실 백진희랑 김지원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요 그 두명이 굉장히 많이 나와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결말도 그랬구요. 허무한 결말에 그간 이 드라마에 제가 쏟아부은 본전이 생각나려 했지만 님의 페이퍼는 저로 하여금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는 생각을 하게 해줬습니다. 심층분석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글고보니 하이킥 때문에 하루가 즐거웠던 적도 꽤 많았네요. 특히 하선이 무서워지려고 노력했던 그 회가 제일 대박이었어요.

* 요즘같은 시대에 미국간 연인이 안돌아온다고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갔답니다.

웽스북스 2012-04-01 17:34   좋아요 0 | URL
히히. 스포 경고 쓴 보람 있네요. 마태우스님이 덕분에 스포를 피해갔네요.

저도 그 부분이 참.....이해가 ㅠㅠ 정작 하선은 미국을 제집처럼 왔다갔다 드나드는데 지석이한테는 그렇게 먼건가. 무슨 과일 사준다고 외국도 가려고 했으면서..... 그점만 무슨 70년대 같았어요. ㅠ

저도 하이킥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마지막도 잘 기억해주고 싶어요 :)

jongheuk 2012-03-3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어톤먼트! 저도 하이킥 마지막회를 보고 한참동안 골똘히 어떻게 이 결말을 받아 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엄청 큰 힌트를 공짜로 선물받은 것 같아 기쁩니다. 감사해요! 하이킥은 제게 하루 하루 스트레스를 풀 기회를 제공해 주는 선물과도 같은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래서 잔잔한 결말도 나쁘지 않게 받아 들였고, 끝났다는 사실에 더 크게 아쉬워했던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12-04-01 17:3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랬어요. 저는 지붕킥할 때 막 회사를 옮겼는데, 그 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집에 돌아가면 쓰러져서 아무것도 안하고 하이킥을 봤었어요. 그 때 그게 얼마나 힘이됐는지. 그래서 이번 하이킥도 매일매일 노히지 않고 보려고 애썼거든요.

그나저나, 자의적으로 쓴 글인데 좋게 해석해주시니 기쁜데요. :) 종혁님도 어톤먼트 좋아하셨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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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3-24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 오는데 동면 준비하시는 거 같아요 ㅋㅋ
갑자기 떙기네요 저거... 아 안돼, 사면 안돼 ㅠㅠ

웽스북스 2012-03-31 02:12   좋아요 0 | URL
쌍큼하죠. 헤헷 :)
봄이 참 더디게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