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리고 9시가 조금 못된 시간에 이제 해산하자고, 집에 가라고 주최측에서 이야기하고 우리는 모두 발걸음을 돌렸다. 패딩에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까지 썼는데도 날은 추웠고 바닥은 차가워 엉덩이가 시려웠다. 광화문까지 걸어갈까? 그래도 일찍 끝내줘서 좋다. 라고 이야기하며 친구와 광화문쪽으로 건너가는 보도 쪽으로 갔다. 뒤에서도, 일찍 끝났으니 근처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근처 커피가게에서 따끈한 커피로 몸을 녹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도가 막혀 있다. 이상하네. 라고 말하며 대한문 쪽으로 건너가려고 하니, 경찰들이 길을 막고 서있다.

왜 못가게 하는 거에요?

난감한 듯 말을 무시하는 경찰도 있고, 교통이 혼잡해서 잠시 기다려 달라는 경찰도 있었다. 교통이 혼잡한데 왜 당신들은 길을 막는 거죠?

집에 가게 해주세요.
이제 파란불이잖아요. 보내주세요.
화장실 가야되요. 열어주세요.
그냥 집에 갈 거에요
지하철 타러 가는 거에요
교통법규 잘 지켜서 갈거에요. 열어주세요.

라고 시민들이 외쳤고, 경찰은 묵묵부답이었다. 함께 간 친구가 차를 따라가보자고 했다. 차는 나갈 거 아니야. 플라자호텔 쪽으로 돌아서 가는데 그 쪽도 경찰이 막고 있다. 버스도 돌아가고 차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친구가 틈새를 발견해 그 쪽으로 나가자고 해 겨우 빠져나갔다. 경찰들도 그 때까지는 대놓고 잡지 못했고, 우리도 얼른 빠져나왔다. 그녀가 아니었담 나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청앞 던킨에서 커피로 몸을 녹이며 트위터를 보는데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평화롭게 모여서 평화롭게 해산하고 집에 가려는 사람들을 왜 가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물대포를 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 곳이 얼마나 추웠는지 알고 있기에, 물을 맞은 사람들이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사람들의 옷이 얼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 상태로 사람들이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는 겨울이 아니었다. 그래도 추웠다고 들었다. 지금은 겨울이고,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무엇을 위한 물대포인지. 도대체 왜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였을 뿐이고, 끝나고 집에 가려고 했을 뿐이다. 내가 그 중 하나였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경험했다. 운이 좋아 빠져나왔을 뿐이다. 나오지 못했다면 나도 그 곳에서 덜덜 떨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도 그만큼의 미안함으로 속상한 밤을 보낸다. 자꾸만 현장 소식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이 폭력 시위는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폭력이 난무한 밤이 되어버렸다. 이 폭력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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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1-11-2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부산도 추운데 서울은 얼마나 더 추울까... 권력이 없으니 이제 폭력으로 버티는겁니다.

웽스북스 2011-11-24 00:20   좋아요 0 | URL
제가 한 게 없어서 수고했다는 말을 듣기도 송구합니다. 이 밤에 물대포 맞으신 분들 부디 감기에 걸리시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머큐리 2011-11-2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도 계셨었군요...알았음 얼굴이나 함 뵐걸..^^

웽스북스 2011-11-24 00:37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도 계셨군요.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요. 해산하는 사람들 가둬놓고 집에가라고 물대포 쏘면서 불법 폭력 시위로 변질됐다는 말까지 하네요. ㅜ_ㅜ

Ritournelle 2011-11-2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먼발치에서 물대포를 맞는 시위대의 용맹함과 이 추운 날씨에 물대포를 쏘아대는 견찰의 무자비함이 모순적으로 교차하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 자신이 참 비참해지더라고요...

웽스북스 2011-11-25 01:48   좋아요 0 | URL
무화과나무님도 계셨군요. 저는 견찰이라는 말로는 성에 차질 않아요. 개자식들. 나쁜놈들. 어제 올해 한 욕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욕을 했어요. 그래도 오늘은 물대포가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비로그인 2011-11-24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대포... 몇 년 전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네요. 추운 날 고생 많으셨어요. 저는 그 날 집에서 따뜻하게 몸 녹이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운수대통이었네요. 다친 분들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웽스북스 2011-11-25 02: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근데 수다쟁이님. 물대포가 그 몇년 전보다 훨신 세진 것 같아요. 제가 물대포를 너무 우습게 봤나봐요. 흑.

마늘빵 2011-11-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다음 정권에서 자기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을 거에요. 정권 바뀌면 언제그랬냐는듯이 거기에 또 맞출 테니까. 이명박은 그들의 모가지를 쳐도, 바뀐 정권은 민주적으로 하리라 예상할 테니까요.

웽스북스 2011-11-25 02:24   좋아요 0 | URL
나쁜 놈들. 개쓰레기들. 엉엉.

2011-11-2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1-11-25 02:24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ㅜ_ㅜ

2011-11-24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1-11-25 02:2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제가 어리석었네요. ㅜ_ㅜ 거기서 도대체 왜 그러시냐고 묻다니. 흑. 생각해보니 진짜 바보.

jongheuk 2011-11-2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생하셨어요!

저는 광화문 근처에서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그 장소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큰데요, 언제부턴가 광화문 주변의 골목 골목을 닭장차와 경찰들이 막아 서고 있더라구요. 대단히 슬펐어요. 어느 날은 저희 누나가 물대포를 맞고 돌아와 씩씩거리며 경찰 욕을 하더라구요. 정말 우울한 밤이었어요.

웽스북스 2011-11-25 02:26   좋아요 0 | URL
종혁님. 저는 이 와중에요. 광화문 근처에서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이 말이 너무 너무 부러워요. 저는 강북으로 넘어와 비로소 서울이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유년시절과 어린시절을 보냈고, 거기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니. 세월은 돌릴 수도 없고, 광화문 근처에 사는 집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아. 저도 우울한 밤이에요.

물대포는 최루액 들어있다고 들었는데, 누나 많이 힘드셨겠어요.
 
후손들에게 - 베르톨트브레히트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

- 베르톨트 브레히트

1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모든 독일 집을 온통 새로 칠했다네

2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구멍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 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 버렸다네

3

오 칠장이 히틀러여
왜 자네는 벽돌장이가 되지 못했나? 자네의 집은
회칠이 비를 맞으면
그 속의 더러운 것들이 다시 드러난다네
그 똥뒷간 전체가 다시 드러난다네.

4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독일 전체를 온통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1933년)

아니, 2011년 어느 비통과 분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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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한강 / 희랍어 시간 121~122p




















이 책의 표지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는, 
그리고 주말 내 비가 올 예정이라는
 제주에 간다.

이 책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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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여행가세요 웬디양님?

제가 도서관에 신청한 책, 더군다나 한강의 신작.
제주도는 그래도 여기보단 따뜻하겠죠? 슬슬 쌀쌀해지는 요즘이에요.

웽스북스 2011-11-18 13:20   좋아요 0 | URL
그럴 거라 믿고. 옷을 좀 얇게 챙겨서 걱정이에요.
이제 2시에 공항으로 갑니다. 꺄.

수다쟁이님. 저 책은 참 좋아요. 저는 그래요 :)
도서관에 도착하면 얼른 뛰어가서 1착으로 집으세요. ㅎㅎㅎ

다락방 2011-11-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집에 가면 이 책이 도착해있을 거에요! 꺅 >.<

웽스북스 2011-11-18 13:28   좋아요 0 | URL
오왓. 다락방님도 한강을 좋아하셨나요?

다락방 2011-11-18 13:34   좋아요 0 | URL
아기부처 좋아했어요. 몽고반점도 좋아했구요. 아기부처가 더 짱이지만. 채식주의자도 읽었구요. 눈물상자도 읽었는데 이건 별로였어요. 그런데 바람이 분다, 가라 이 책은 아직 안읽어봤어요. 읽어보고 싶은데 희랍어시간 먼저 읽어보려구요.

웽스북스 2011-11-18 13:39   좋아요 0 | URL
희희 우리도 뭔가 겹치는게 적지는 않네요 그래도 :) 흐흐흣

웽스북스 2011-11-18 13:41   좋아요 0 | URL
참, 이번에 영화로 나오는 게 아기부처이죠?

다락방 2011-11-18 13:43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웬디양님과 저는요 좋아하는 이유도, 마음과 생각이 움직여지는 부분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겹치는 책이나 영화들이 있더라구요. 아유 좋아 ㅋㅋㅋㅋㅋ 웬디양님과 겹치면 저는 막 똑똑한 여자가 된 것 같고 그래요. 희희.

다락방 2011-11-18 13:43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소식은 저는 전혀 몰라요. 아기 부처 영화로 나온대요? 오! 영화가 그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기부처는 단편이 딱인데.

웽스북스 2011-11-18 13:4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아기부처가 이미 나왔다가 들어갔네요.
<흉터> 라고.. 아. 어쩐지 슬프다.

저도 다락방님이랑 겹치면 좋아요. :)

다락방 2011-11-18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댓글보고 흉터 찾아봤는데, 정말 그랬네요. 아..뭔가 속상해..orz

비로그인 2011-11-1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댓글의 향연~~ 저는 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을 제일 좋아해요. 고등학생 때 야자 시간에 몰래 읽었는데 정말 마음에 금이 가는 것 같았어요. 한강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밋밋하거나 혹은 막장드라마처럼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요 ( '')... 그래도 신간이 나와주었으니, 냉큼 읽어야지요.

ps. 웬디양님, 저 책 제가 1착 맞아요. 구입신청하고 정리중 표시 뜨자마자 예약했어요 ^^ㅋ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1-11-26 01:49   좋아요 0 | URL
지금쯤 읽고 있나요? 흐흐.

... 2011-11-1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 바람이 분다>도 사두고 아직도 안 읽어서 <희랍어 시간> 살까말까 했는데.... 음, 구매해야 겠군요.

웽스북스 2011-11-26 01:4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바람이 분다, 가라! 도 좋아요!! 얼른 읽어요!

이진 2011-11-1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해할수는 없지만 이해하지 않고 읽어도 충분히멋진 말이에요 ㅋㅋㅋ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라고 말하는것이 멋지게 들리는 걸요 ㅋㅋ

우왕 지금 제주도 시겠는걸요 ! 여행 잘다녀오십시오:)

웽스북스 2011-11-26 01:50   좋아요 0 | URL
일주일도 더 지나서 댓글 다는 저를 용서하세요 소이진님.
덕분에 여행은 잘 다녀왔습니다.
 
생년월일 창비시선 334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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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도 좋아했지만, 앞으로는 그의 시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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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시인의 <생년월일>을 꺼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고, 기억하고 싶은 시가 많아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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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행인 1이 지나가자
클라이맥스가 시작되었다.
의미심장하게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처음 보는 주인공.
이장욱씨 맞으시죠? 여기 싸인하세요.
나는 엑스트라 2로서
핀 조명을 향해 걸어갔네

세계의 가로수들을 이해할 것 같아. 
선풍기가 돌아갈 때 선풍기의 배경이 하는 일을
허공이 음악에게 하는 일을.
누군가 결정적으로 희박해지는 순간에
우연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을

엑스트라 3에게는 그것이 전세계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같은 것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 것
핀 조명이 꺼질 때까지 널 사랑했는데
그것은 행인 4의 사랑.

먼 후일
택배기사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극적인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밤길을 걷다가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캄캄해지다가,
캄캄해지다가,
캄캄한 곳을 향해 돌아설 수도 없을 때,
너는 괴물같은 얼굴로, 십자가와 비슷한 자세로, 천둥 번개가 치는 밤하늘 아래,
자꾸 거대해졌다. 

등뒤의 세계는 어디에나 있구나. 매일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는데도 다시 밤. 흩날리느누 빗방울들을 기준으로 나는 중얼거리네. 궁금한 목소리로.
의심하는 목소리로.
돌이 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인가.
모든 사람인가.

뒤라는 곳은 무한해. 내내 타오르고 있구나. 나는 자꾸 무너지면서 또
발생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팔이 세 개였다가 다리가 열 개였다가 무수한 팔과 다리를 모아 못 박힌 채로
무한이 되는 사람.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어 있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처음 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규모 인생 계획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토르소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의 밤이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동행

누군가의 위치에서 나는 매일 경험을 했다.
나이와 습관을 외운 뒤 처음으로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화가 난 목소리로.
좋아하는 목소리로.

일용품들의 위치를 묻지 않고도 생활을 했다.
처음 보는 면도칼을 목에 대고 움직였다.
작은 개에 대해서 상상해보지 못한 애정을 느끼고
딱딱한 치아가 조금씩 어긋나고
바지가 몸에 안 맞고
그래도

정기적으로 근무를 했다.
낯선 동작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거울을 보았다.
왼쪽 귀는 오른쪽 귀
뒷모습은 어디로 갔나?
손톱이 길어요.

저녁에는 애완견이 자꾸 죽어서 묻어주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운동장을 달렸다.
전속력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느려졌다.
틀니를 뺐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나는 잠이 들었다.
목에서 피가 흘렀다.
이 모든 것을 동행이라 부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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