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바람을 맞으며 레이첼 카슨 전집 1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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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가장자리에 서서 넓은 염습지 위를 움직이는 안개의 숨결을 느끼며, 수백만 년 동안 조용히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 모래톱 위를 나는 새들의 비행을 지켜보는 것은 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존재하는 대상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것은 인간이 바닷가에 나타나 경이에 가득한 눈으로 대양을 바라보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7


 레이첼 카슨 (Rachel Carson, 1907~1964)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Under the Sea-Wind>를 통해 바다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생명을 말한다.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매 장면을 눈을 감고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에서 독자들은 영상에 제약되지 않은 바다 생명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겨울 동안 어린 거북은 남아 있는 노른자를 영양분 삼아 버텨냈을 것이다. 겨울이 길고 추위가 모래 속까지 스며들어 많은 새끼가 얼어 죽었다. 살아남은 새끼들은 약하고 무기력해서 태어날 때보다 줄어든 몸체를 알 속에서 잔뜩 웅크렸다. 그러다 알에서 깨어나면 부모 거북이 새로운 후손을 낳아 묻어놓은 모래 위를 힘없이 움직였다... 풀숲 끝자락에서 쥐가 거북의 보금자리를 노려보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왜가리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북쪽 해안으로 날아갔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41


 저자 레이첼 카슨은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바다라는 삶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상상하되, 인간이라는 척도의 기준을 버릴 것을.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관점 대신, 자연이 허락한 기준인 빛과 어둠, 밀물과 썰물, 거스를 수 없는 해류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수온 등. 우리에게 단어로 존재하는 조건들이 바다 생물들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상상력의 날개는 활짝 펴질 것이다.


 진짜 바다의 시작은 해안으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깊이로 판단한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107


 바다의 생명체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면 상상력을 적극 발휘해야 한다. 또 인간이 지닌 많은 특징과 인간 중심의 척도를 잠시라도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계나 달력으로 재는 시간과 세월은 해안의 새나 물고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바다에서의 삶이 지닌 특징을 알 수 없고, 우리 자신을 그 속에 투영할 수도 없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9


 그러면서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들을 의인화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안의 동물들은 열망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하는데 춥고 배고픈 것을 피하려는 생명의 본능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욕망이라는 요소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생명의 삶이 영위될 수 있다면, 인간의 욕망이란 불필요한 사족(蛇足)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숨쉬기 위한 고등어의 열망이 자신의 명예를 구하려는 아킬레우스의 열망보다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다른 한편 물기기와 새우, 해파리, 새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그들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생명체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행동에 대한 비유에서 지나치게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물고기는 물리적으로, 인간은 심리적으로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고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9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고등어 떼는 항구 입구의 바위를 지나 물살이 급하게 몰아치는 곳으로 향했다. 바닷물은 염분으로 인해 짜고 깨끗하고 차가웠다. 바위와 물고기가 뒤섞이다 보니 수면이 온통 여기저기 갈라져 산소를 구하는 움직임으로 들썩였다. 고등어는 주둥이로부터 꼬리지느러미까지 온몸을 흔들어대며 흥분에 겨워 돌진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며 또 강렬히 열망했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144


 바다 생명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담긴 <바닷바람을 맞으며>속에서 대부분 인간의 모습은 풍경화 속의 배경처럼 주변에 머무른다. 그렇지만, 이따금 미래 닥칠 재앙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다음 구절은 지나가듯 나타나지만, <침묵의 봄>에서와 같은 저자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모든 만과 강에서 몰려나온 물고기들이 대륙붕을 가로지르고 고깃배들은 남쪽으로 향했다. 온갖 낚싯줄과 그물을 매단 배들이 겨울 바다 곳곳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겨울 휴식처를 찾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북쪽 항구 곳곳에서 몰려온 저인망 트롤선이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송어와 넙치, 도미와 민어는 만과 해협을 벗어나면 어부의 그물로부터 안전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선박들이 오더니 긴 자루 같은 그물을 드리웠다가 끌어당겼다... 트롤망 어선은 매년 연안 어류의 겨울철 서식지에서 수백만 킬로그램의 물고기를 잡아들였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11


 <바닷 바람을 맞으며>는 제목 그대로 평안한 바닷가에서 보다 깊은 바다로 시선을 옮기며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바다지만 삶의 터전으로 그곳 또한 치열한 생명의 약동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결코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생동감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평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글의 마지막은 <바닷바람을 맞으며>를 잘 설명한 서문의 글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며 끝맺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의 구성은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 분투하는 각각의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격렬한 투쟁에 입각한 다윈주의적 결정론이 아니라 기회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생명체가 살아남는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 바다 생명체에 대한 카슨의 이야기는 고요한 느낌을 전해준다. 카슨의 글이 특별한 것은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 반응하는 자연의 냉철한 위력을 과학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것은 물론 물리적으로 관련있는 개별적인 생명체와 공감하는 동일시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문, p17

제비갈매기는 수면에 거의 붙은 채 강 상류로 1.5킬로미터 정도를 날아가 늪지 위를 크게 빙빙 돈 다음 다시 강어귀로 내려왔다. 아침 안개를 뚫고 물고기와 해초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어부들이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그물에 매달린 고기를 떼어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물을 배의 평평한 바닥에 쌓으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 P48

고래 사체는 몇 달 전 해안가로 떠밀려 왔는데, 겨울 내내 만 근처에 사는 까마귀와 그 친구들의 먹이가 되어주었다. 폭풍으로 인해 얼음 덩어리가 움직이며 고래의 사체를 밀어 보낸 것이다. 먹이를 보고 지른 툴루각의 환호성에 다른 세 마리 까마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툴루각의 뒤를 따라 순록 뼈에 붙어 있는 살점 몇 조각을 먹기 위해 툰드라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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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8-29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때, 레이철 카슨의 책을
사모았는데... 읽지는 못했네요.

그 때 사지 못한 책이라 더 애잔
하다는 느낌이...

바다를 오염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대멸종의 시대에 쉽지 않은 미션
입니다.

겨울호랑이 2023-08-29 21:21   좋아요 1 | URL
생명이 넘치는 바다에 독을 푸는 행위는 정말 인류에 씻지못할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고 폭주를 막아야겠지요...

베이글 2023-08-30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줄곧 내면의 바다에 침잠해 있었는데, 너른 자연의 바다로 시선을 돌려주는 책이네요.

서문의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생명체가 살아남는다‘가 특히 눈길을 끕니다.

제가 머물 적절한 곳은 어딘지 지금 이 시기에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3-08-30 12:35   좋아요 2 | URL
가끔은 확신에 차서 걸어가고 있는 길이 사실은 잘못가는 길이기도, 불확실하게 고민했던 길이 좋은 선택이었던 경험을 해봅니다. 아무래도 현실이라는 벽에서 넓게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다른 면에서 지금 어두운 현실에서 많이 힘이 들지만, 훗날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좋은 반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베이글님 말씀처럼 저도 바닷가에서 육지 쪽이 아닌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희망을 상상하게 됩니다. 베이글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3-09-02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십년 전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을 읽다가 치명적인 고발내용에 빨려들어 밤을 꼬박 지새웠던 기억이 소환되게 하네요.

겨울호랑이 2023-09-02 17:22   좋아요 0 | URL
저도 <침묵의 봄>을 읽은 후 바다 3부작을 접하는데, <침묵의 봄>과는 다른 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작가의 다른 면을 보게되었습니다 호시우행님 좋은 하루 되세요! ^^:)
 

한 인간이 살아온 기간을 가리키며 ‘지나간 시간’을 의미하는 ‘아이온’은 ‘크로노스chronos’, 즉 ‘측량된’ 시간, 예를 들어 날이나 계절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이었다. ‘아이온’은 생명력으로서의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계산된 시간이다. 시간에는 ‘아이온’과 ‘크로노스’ 외에도 ‘카이로스kairos’, 즉 순간이 있다. ‘카이로스’는 예기치 않은 순간, 놓치지 말아야 할 절호의 기회("카이로스는 모든 것의 으뜸이다." 헤시오도스, 『일과 날』, 694),

이러한 시계들의 사용을 뒷받침하는 고대인들의 ‘주기적인’ 시간 개념 옆에는 동시에 ‘직선적인’ 시간 개념이 존재했다. 이는 훨씬 방대한 시간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이른바 ‘기준시’를 정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시간 개념이다.

소리가 자연적 원리를 내포한다는 사실이 피타고라스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이를 토대로 산술학적, 기하학적, 화성학적 비율에 대한 수학적 탐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렇게 디오니소스 살해라는 오점을 등에 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디오니소스 의례는 여신 페르세포네에게 인류가 속죄를 구하고 이 오점으로부터 정화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르페우스 의례에서 정화 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주제는 ‘환생metempsicosi’, 즉 사망 후에 영혼이 새로운 육신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이었다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는 헤시오도스와 같은 선상에 위치시켜야 한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영감의 원천인 신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긴다는 점, 다름 아닌 지혜가 신들에게서 온다고 믿는다는 점, 그리고 ‘장르’의 차원에서 6행시를 선호한다는 점 등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르메니데스가 변화와 탄생과 죽음이라는 특징에서 벗어나 있는 단일한 실재(동시에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실재에 대한 탐구,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는 실재들, 예를 들어 수학적인 실재들에 대한 탐구를 제안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을 하나의 로고스, 즉 사람이 손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변화의 ‘규칙’이나 ‘이성’으로 상정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해력이 부족한’ 인간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axynetoi’가 신비주의 문헌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이해력이 부족한’ 독자는 바로 신비주의에 ‘입문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유동성이 안정성만큼이나 중요했고 상반된 것들의 대립이 이들의 통일성 못지않게 중요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극단적인 유동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영속성의 상징이기도 한 ‘불’에 사물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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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과학의 배경 한국의 과학과 문명 19
김영식 지음 / 들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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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것이 서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중국 그리고 나중에는 일본을 매개로 하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는데, 이 같은 간접성은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1910~1945)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도 정도는 약했지만 얼마동안 계속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이 서양 과학기술을 동화하는 정도와 수준을 크게 제약했다. _ 김영식,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 , p250


 김영식은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은 서구 과학 문명의 수용 과정에서 드러나는 조선 후기 간접성과 주변성 등을 지적한다.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주의와 유교적 신분 질서가 조선 시대 전반을 지배했기에 기준은 언제나 명(明)과 청(淸)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는 조선 전기 세종 대에 이루어진 세계적 수준의 과학적 성과도 중국의 시스템 내에서의 응용에 불과하고, 조선 후기 서양 과학 문명의 수용도 중국의 뒤를 이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 과학의 역사에서 중국의 지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나카야마가 지적했듯이, 중국은 중요한 발전들이 거의 언제나 먼저 일어나고 이후 '주변'으로 그 발전이 확산되는 '중심'이었다. '중국=중심'의 지위는 과학 분야에서 특히 철저했다. _ 김영식,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 , p183


 세종 대의 역법 관련 작업에 관해 살펴보면서 이 작업을 한양을 기준으로 조선의 독자적 역법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자주적' 노력으로 보아온 그간의 견해와 달리, 이를 중국 수준의 역산 능력을 갖추겠다는 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았다. 그런 면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정조(正祖) 시기인데 중국 역법의 틀 안에서 진행된 이 시기의 조선 역 확립과 역서 출판 과정은 조선의 과학이 지니는 독자성, 자주성의 성격과 한계를 보여준다. _ 김영식,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 , p190


 저자는 본문에서 조선시대 과학 전통의 한계와 오늘날 한국 과학계의 문제점을 연결짓는다. 실용에 치중하는 과학계 풍토, 근대 과학 도입 시기 일본에 대한 과다한 의존, 사안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등 여러 문제점을 언급한다. 저자가 본문을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은 이미 앞에서 여러 사례를 통해 뒷받침되기에 한편으로 수긍하면서 받아들이게 되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의문을 품게 된다.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이 과연 문제점만 있는 것인가? 또는 지적한 문제가 한국 과학계만의 문제인가? 하는 물음.


 한국 근현대과학기술의 초기 단계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과학기술이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특히 경제적인 효용과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추구되는 것이라는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과학 기술관이었다. 이 같은 과학기술관의 밑바탕에는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 '도(道)'와 '기(器)'의 이분법이 깔려있다(p251)... 이 같은 생각에 따라 과학기술은 '도'가 아니라 '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과학과 기술은 한국 문화와 학문의 다른 영역들로부터 대체로 유리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_ 김영식,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 , p251


 저자는 한국 과학사에서 공리주의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비판한다. '과학+기술'에서 '기술'이 강조되고 '과학'이 경시되어 보다 깊은 탐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동서양의 사상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신-인간-자연'을 각각 다른 존재로 보고 각각의 법칙을 규명하려 한 서양 문명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동양 문명의 차이. 이러한 차이가 이른바 기초과학에서 취약성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있는 그대로 '기술 중심의 한국 과학기술문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 첨단 과학기술이라는 반도체에서도 '설계-소재-조립'등 분야가 세계적으로 분업화되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면 우리가 잘 하는 분야인 기술에 더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다른 한 편으로, 과학자들이 정치적 사안에 무관심한 채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에서 사제집단으로 자리한 것을 우리나라만의 문제라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인계층 문제를 지적한 것은 다소 과도하게 다가온다.


 중인 계층 사람들이 나중에 한국이 서양 과학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자연스럽게 주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것이 중요한 결과를 빚어냈다. '중인의식(中人意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계층 사람들 특유의 태도인, 자신들은 단지 그 주변인에 불과한 전체 사회와 국가에 대한 관심은 결여한 채 자신들의 개인적, 집단적 이해관계에 치중하는 태도가 사라지지지 않고 현대 한국 과학기술계에서도 두드러진 특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_ 김영식,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 , p255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기계의 신화>를 통해 근대 서구 사회에서 기술과 과학의 결합이 가져온 인간 소외의 비극과 함께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와 과학자라는 새로운 사제 계급의 문제를 지적한다. 멈포드가 지적한 이런 문제점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주변적이고 간접적인 한국 전통에서 인간소외와 환경 파괴를 비롯한 현대 과학 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전통과학의 배경>에는 언급되지 않은 이러한 대안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인 듯하다...

무형의 것을 유형의 것보다 더 높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유가 사상의 중요한 한 흐름으로 지속되었다... 유가 사상의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자연현상은 대부분 지각(知覺) 가능한 규체적 성질들과 물리적 효과를 수반하며 따라서 ‘형이하(形而下)‘에 속하기 때문에 유학자들에 의해 빤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것들이 지각되는 형태대로 받아들여졌다. 겉으로 드러난 경험적인 데이터를 넘어서는 더 깊은 탐구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P28

유학자들은 격물을 표방하며 과학기술의 주제들을 공부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체적 사물들의 개별적 ‘리‘들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 결코 격물 작업의 진짜 목적은 아니었다. 격물의 궁극적 목적은 여러 개별 ‘리‘들을 통해 하나의 ‘리‘, 즉 ‘천리(天理)‘에 도달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 P78

전문직 중인들은 품계와 승진 등에서의 명시적인 차별에 더해서 지배 계층인 양반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사회 중대사의 결정에 아무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특히 양반사인들이 이들에 대해 지닌 편견이 뿌리 깊고 차별대우가 심했다. 전문직 중인들이 종사하는 전문 분야의 실무가 양반 지배계층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데다가, 서얼들의 잡과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서얼에 대한 차별 의식도 전문직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P147

조선 유학자들은 중국의 서적을 통해 서양 과학지식을 접했을 뿐 아니라, 실제 서양 과학에 대한 정보를 얻고 서적들을 구하는 데서도 중국 학자들을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이처럼 중국을 통한 ‘간접적‘ 도입에만 의존하는 상황에서 조선 유학자들이 서양 과학지식을 접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었음은 당연했고 그에 따라 그들의 서양 과학 이해의 수준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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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국의 지배 하에서 살게 된다. 그녀 자신이 왕의 딸이고 하이몬의 약혼자이므로 그녀는 영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크레온 자신도 아버지이자 남편이므로 혈연의 신성함을 존중해야 하며, 이 경건성에 대립되는 어떤 명령도 내려서는 안 된다. 이처럼 그들 두 사람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이 내재하면서 서로 대항하고 뒤바뀌며 강조되며, 그 개인들은 바로 자신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파멸한다... 고대와 근대 세계의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들 가운데 <안티고네 Antigone>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보인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소포클레스(Spphokles, BCE 497~406)의 <안티고네 Antigone>를 근대까지의 문학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안티고네>가 갖는 뛰어난 문학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쟁하는 개인과 그들이 저항해 싸우는 것과의 대립구조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약 파토스의 일면성이 충돌의 근거가 되면 다름 아니라 그 파토스는 생생하게 행위로 드러남으로써 어느 특정한 개인만이 파토스가 되었다는 것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만약에 그 일면성이 해소되어야 한다면, 그 파토스는 오직 하나의 파토스로만 행동해야 하므로 결국 제거되고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개인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오직 이 하나의 삶일 뿐이기 때문이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2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서 설명되는 직접적인 대립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다. 사자(死者)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은 신의 법칙과 인간 법칙이라는 인륜(人倫)의 대립, 여성의 원리와 남성의 원리,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으로 전환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는 <안티고네>에서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헤겔은 <안티고네>를 높게 평가한다.


 인륜적 위력들 서로 간의 운동과 인륜적 위력들을 생명과 행위 속에 정립하는 개체들의 운동은 양측이 다 똑같은 파멸을 경험하는 데에서 그 참된 결말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 위력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실체의 좀 더 본질적인 계기가 되는 데에 하등 앞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측의 동등한 본질성 그리고 그것들의 아무런들 상관없는 병존이 곧 그것들의 자기(自己)를 결여한 존재이다. 행실 속에서는 그것들이 자기 본질로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이한 것으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자기(自己)의 통일과 모순되고 또 그것들의 무법성과 필연적 파멸을 이루는 것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6


 크레온이 상징하는 인간적 법칙은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되는 정신적 본질이다. 이에 대항하는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신적 법칙은 자기 의식이다. 보편적인 정신적 본질과 개별적인 자기의식은 대립하지만, 사실 그들의 뿌리는 서로에게 두고있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기에 , 그들의 대립은 어느 일방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어느 한편에 의한 다른 편의 전복이 일어나는 그 지점에서 승리는 패배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자리 전환이 일어나면서 모두가 부정되며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적 본질은 우선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칙(법률)으로서 존재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성이 아닌 형식적 보편성이었던 검증의 보편성은 지양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정신적 본질은 또한 영원한 법칙인데, 그런 영원한 법칙은 바로 이 개인의 의지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히려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며, 직접적 존재의 형식을 가진 만인의 절대적인 순수 의지이다. 이 만인의 순수 의지는 또한 단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뿐인 계율이 아니며, 그것은 존재하고 또 유효하다. 정신적 본질은 직접적으로 현실인 범주의 보편적 자아이고, 또 세계는 오직 이 현실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존재하는 법칙이 단적으로 유효하다고 해서 자기의식의 복종이 결코 자의적으로 명령하고 그 안에서 자기의식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터인 그런 주인에 대한 봉사는 아니다. 오히려 법칙은 자기의식이 스스로 직접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자신의 절대적 의식의 사고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1> , p417


  <안티고네>에서 결말은 안티고네와 약혼자 하이몬, 크레온의 부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생존자는 크레온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모든 것을 잃었고, 패배자는 죽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정신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을까.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다음 상황에서 소외된 정신과 국가 권력과의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면서 정신의 고양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안티고네>에서는 이러한 고양이 표현되어 있을까?


 권력을 지니고서 백일하에 놓여 있는 법칙에 맞서 무의식적 정신은 현실적 수행을 위한 도움을 오직 핏기없는 그림자에서만 지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와 어둠의 법칙으로서 무의식적 정신은 처음에는 환한 대낮과 힘의 법칙에 굴복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권력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그 명예와 위력을 탈취한 현실적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먹어 치운 셈이다... 공개적인 정신의 완성은 그 반대로 전환되며, 그는 자신의 최고 권리가 최고의 불법이고 또 자신의 승리가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네이케스나 안티고네처럼) 자신의 권리를 훼손당한 사자(死者)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그를 침해한 위력과 동등한 현실성과 권력을 갖춘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위력들이 적대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힘인 가족 간의 공경심을 모독하고 부숴버린 공동체를 파괴한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60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헤겔의 미학강의>로 돌아가자. 헤겔은 본문에서 합창(코러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이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서정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는 최종 주제가 담긴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코러스에 의한 마무리는 휘브리스에 대한 경구로 끝맺음된다.


 합창은 사실은 행위 속으로 파고들어가 이와 관계하지도 않으며, 투쟁하는 주인공들에 대항해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심판을 내리고 경고하고 연민을 보이거나, 상상 속에 지배하는 신들의 영역으로 외화되는 신적인 권리와 내면적인 위력에 호소한다. 이렇게 표현될 때 이미 보았듯이 합창은 서정성을 띤다. 왜냐하면 합창은 행동을 하지 않으며, 또 어떤 사건도 서사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본질적이고 보편성을 띤 서사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24


코러스 : 양식(良識)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네. 신들에게 불경을 범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오. 뽐내며 허풍을 떨면 언제나 큰 매를 벌기 마련. 나이를 먹으며 지혜를 배우게 되는구나.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 p80/332


 개인적으로 <안티고네>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무리하게 해석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앞선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 사실은 그 이전에 있었던 오이디푸스 아들간의 대립의 연장 구도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공격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 안티고네와 크레온 이전에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있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공동체를 점유하지 못한 채 그 정상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그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폴리네이케스)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낱 개별자로 포착할 줄 알고 이런 무력함 속에서 추방하는 자(에테오클레스)는 권리를 자신의 편에 둔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8


  크레온은 테베를 지키려는 에테오클레스를 인정하는 대신, 공격해온 폴리네이케스를 부정하고 매장을 금지한다. 이때,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 것에 대해 헤겔은 신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소포클레스의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우리는 신의 저주를 아버지로부터 받는 폴뤼네이케스를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 너는 추방한 아우를 죽이고 아우의 손에 죽게 되리라. 그렇게 저주하노라. 너에게 새 집을 주라고 아버지 타르타로스의 가증스러운 어둠을 부르고 여기 복수의 여신들을 부르며, 너희들의 마음에 무서운 증오를 불어넣은 전쟁의 신 아레스도 부르노라. 자, 내 말은 다 들었으니 이제 가거라. 가서, 모든 카드모스인들과 그 믿음직한 동맹군들에게 말해라. 오이디푸스가 그런 저주를 두 아들에게 상으로 주었다고.


 코러스 : 폴뤼네이케스여, 당신의 과거 행적이 마음에 들지 않소. 이제 서둘러 돌아가시오. 


 폴뤼네이케스 : 아아, 내가 온 길이여, 내 임무는 실패로 끝났구나. 아아, 동료들이여. 아르고스에서 군대를 이끌었지만, 어떤 종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불행한 자로다.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39/332


 결국 폴뤼네이케스가 선택한 것은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나 반항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에 따라간 어쩔 수 없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티고네의 선택 또한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와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에서 드러나듯 신들에 대한 불경(휘브리스 hybris)의 대가를 치루는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공동체 윤리와 정신과 같은 냉정한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점에서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 감탄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폴뤼네이케스 :  그래, 날 잡지 마라. 이 길이 내 앞에 놓여 있구나. 아버지와, 아버지가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정한, 불행하고 사악한 길을 가야겠구나.  제우스 신께서 너희들에게 행운을 내리시길 빌겠다. 내가 죽어서 요구한 임무를 수행한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장례를 베풀 수 없으니까.〕 자, 이제 날 놓아 다오. 잘 있어라! 너희들이 살아 있는 나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안티고네  : 아, 불쌍한 내 신세!

폴뤼네이케스 : 울지 마라!


안티고네 : 오빠, 오빠가 예언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한탄하지 않겠어요?


폴뤼네이케스 :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겠지.


안티고네 : 그건 안 돼요. 내 말을 들어요.


폴뤼네이케스  : 설득해도 안 되니까 설득하려 들지 마라.


안티고네 : 나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오빠를 잃게 되면.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41/332


 헤겔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의 안티고네 해석 일부를 옮겨본다. 안티고네가 갖는 이중성에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이라는 매개로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의 해석과도 결을 달리한 버틀러의 해석도 흥미롭지만,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티고네는 친족의 경계에 드러난 인식 가능성의 한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순수하지 못한 방식으로, 누구든 낭만화하거나 사실 모범적 사례로 참고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친족의 인식 가능성을 상징한다. 결국 안티고네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의 위상이나 언어를 전유해서 크레온의 통치권을 가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오빠에게 운명지어진 영광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극 전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다. 즉 그녀는 살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낳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죽음은 살지 못했던 삶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크레온이 마련한 삶의 무덤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지금껏 내내 자신의 것이었던 어떤 운명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존속될 수 없는 욕망, 안티고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름 아닌 근친상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닌가? _ 주디스 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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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8-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들 사회책에서는 법단원에서 안티고네를 자연법 예비시아버지(?)를 실정법 이렇게 대립해 놓는 읽을 거리가 있었거든요? 헤겔의 인간적 법칙대 자기 의식을 그렇게 변용한 건지 다른 관점인지 궁금해지네요 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8-27 21:52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요즘 학생들 수준이 매우 높네요...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도는 <정신현상학>에 있는 여러 예시 중 하나로 보다 와닿는 내용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녔을 적에는 헤겔과 변증법 이름만 들어본 것 같은데, 학생들이 할 일이 참 많을 것 같네요... 일찍 학교가 가서 다행입니다.^^:)

비로그인 2023-08-27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의《안티고네》에서 주인공 안티고네는 이를 두고 신들에 의한, 글로 쓰이지 못한
틀림이 없는 법이며 정의롭다고 부른다.

˝어제, 오늘이 아닌 영원히 산다는 걸 법이라고 부르니,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느니라.˝

- 헤겔, 《정신현상학》, p.447

반유행열반인 2023-08-28 08:0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Andy님. 인용해주신 부분을 보면 자연법이라고 지칭할 만한 정의가 나오는 군요 ㅎㅎㅎ워낙 청소년용으로 풀어둔 토막글만 봐서 출처가 궁금했는데 원전이 헤겔이었다니ㄷㄷ

겨울호랑이 2023-08-28 12:19   좋아요 2 | URL
Andy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