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뉴 샌드위치
시바타쇼텐 엮음, 조수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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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닌다.

액젓과 마늘이 많이 들어가는 한국음식은 냄새 때문에 노노.

그렇다면, 단연 샌드위치다.


빵만 있으면 된다.

식빵?


보드라운 한국 식빵.

미국에서는 사치다.


미국식빵은 퍽퍽하다. 보드라움은 일도 없다.

(보드라움을 억지로 입힌 브리오슈 같은 건 물론 있다)


미국식빵엔 어떤 내용물을 넣어도 맛이 없다.

한국에서 먹던 그맛이 안난다.


한국식빵을 파는 한국 베이커리가 있다.

멀다.

잘 못간다.


퍽퍽한 미국 식빵에 이런 멋진 샌드위치 레시피북은 가당치도 않다.


그래도 샌드위치 레시피북은 꼭 산다. 

그대로 해먹지는 않는다. 


나의 샌드위치는 언제나 BLT. 

혹은 냉장고에 굴러다니는데 빵에 끼울 수 있는 거 아무거나. 

그런데도 이런 책은 산다. 

언젠가는 이렇게 해 먹지 않을까, 하는 희망? 기대? 

부질없단 걸 알면서도. 내게는 참 부질없는 꿈 같은, 샌드위치.


결혼기념일 아침인데...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 건 뭐지.

아하, 남편도 만들 수 있으니까!


또또 이런다...


부질없는 희망, 기대.

샌드위치는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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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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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세상 태평한 한량이다. 

십 년 전, '나'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그 동네 민요 가락이나 수집하고 아낙들에게 농이나 음담패설을 일삼으며 소일하는 할 일 없는 부류였다.  

소설에서는 이런 부류가 '캔버스'인 셈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건 어떤 생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어쩌면 맥락이 통하는 말이니까.


그럼 그렇지.


나는 농민들이 즐겨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했다. 그들은 대개 차통을 밭둑의 나무 밑에 놔두곤 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따라 마셨고, 더불어 내 물병까지 가득 채웠다(15p)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무심한 '나'는 사실,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농민들이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할 이유가 무언가.

'나'는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도 따라마시고

물병도 가득 채운다.


씁쓰레한 찻물은 농민들의 삶이다. 농민들의 이야기다.

'나'는 이미 그것들로 물병을 가득 채웠다.


사실 모든 엉큼한 이야기, 구슬픈 노래는 다 그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나는 그네들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내 취미가 되었을 뿐이다.(16p)


이런 일은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만큼이나 많이 일어났다.(17p)


이야기를 들을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진짜 이야기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고 '나'에게 푸구이 노인이 도착한다.

한 마리 소를 푸구이, 유칭, 자전, 펑사, 얼시, 쿠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제끼는

수상한 노인이다. 


노인은 햇빛 쏟아지는 오후, '나'와 함께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 앉아 

다짜고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야기하기가 선언된 이야기는 식상하기 짝이 없다.

현대 소설은 '이야기하기'가 이런 식으로 작정하고 시작되는 경우가 없다.

그건 전근대, 아니, 근대에도 잘 안 쓰는 고루한 방식이다.


위화,란 거장은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고루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배경은 다른 작품인 '허삼관 매혈기'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같은 작가니 당연히 문투도 비슷하고 서사 패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쉽게 말해, 작가는 대놓고 '고루함'을 택했다.

고루하다 고루하다 못해 아예 인물을 죄다 사망시킨다. 


처음에 하나둘 가족이 죽어갈 때는 코끝이 시큰했다.

그러다 하도 죽어나가니 나중에는 죽음이 고루해졌다.


이 만연한 고루함 속에서 독자인 나는 뭘 찾아야 하고 

뭘 손에 넣어야 하나. 손해 보는 느낌이 밀려 들었다.


그러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좀 어려운 현상이 일어났다.

어디서 자주 봤고, 어디서 많이 들었던 죽음, 그것도 연쇄적인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게 있다. 


뭐가 다르다고 콕 집어 말한다면 그것도 고루할 지 모르겠다.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자전이 울면서 말했다네. 

"유칭은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어. (199p)


아들을 잃은 푸구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그리고 달빛이 처연하게...


푸구이(아버지)는 유칭(아들)이 죽어 길을 달려 올 수 없어서 처연한 게 아니었다.

아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아서 처연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달리는 소리를 어차피 들을 수 없었다.

아들은 늘 맨발로 달렸으므로.


아들이 늘 맨발인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신발이 닳는다고 한 잔소리 때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잔소리 때문에 늘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달렸다.


신발이 닳는다는 잔소리를 했던 아버지는 

어차피 맨발이라 소거될 수 밖에 없었던

아들의 달리는 소리를 이제야 영영 듣지 못함을 깨닫는다.


어차피 소거된 소리가 진실로 소거되는 순간이다.


위화라는 작가의 매력이 이런 것이다.

아주 대놓고 고루한 이야기 같은 걸 늘어놓는데 

고루한 이야기만이 그래도 해 낼 수 있는 걸 해낸다. 


고루하다는 것은 자주 들어 식상해진 이야기다.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귀 익은 이야기 속에서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슬픔이지만 

새롭게 슬퍼지게 하는 작가가 위화 같다.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흙길을 달려오는 한 아이(유칭)의 

그 식상한 모습이 어찌나 새롭게 슬프던지...


그렇다고 그 새로운 슬픔이 푸구이만 남기고 가족 모두가 죽어버릴 때 계속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건 작가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아마도 작가가 '인생'이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파테이아(apatheia)가 아니었을까.


모든 정념과 욕망을 끊어 버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


모두 죽어 혼자 남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미처 알지 못한 채 푸구이는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파테이아를 실현한 셈이다.


그 실현은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나'의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283p)


'나'는 이제 과거의 '나'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나'는 푸구이가 해내지 못한 의식적 경지의 아파테이아를 실현할 수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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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6-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인생. 입니다. 리뷰를 쓸 책으로 남겨 뒀었죠.(그러고 쓰지 못했다는..)
툭 던지듯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형식의 소설이지만 그 안에 우리의 인생이 다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파테이아,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 쉽지 않지요. 잘 배우고 갑니다.^^

젤소민아 2024-06-07 21:57   좋아요 1 | URL
서재의 달인이신 페크님께서 배울 게 있으시다는 말씀에 또 배웁니다~. ‘인생‘을 읽은 지인들이 뭐 이렇게 다 죽여야 되냐고 성토하기도 하지요 ㅎㅎ

그런데 이 소설은 다 죽여야했다고 봐요.
어떤 극단적인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연을 보여주려 했으니
극단적인 환경이 필수였지 않을까요.

위화는 어떤 작심을 했다면 촌스럽고, 유치하고, 노골적인 것도 마다않고
동원하는 것 같아요. 믿는 게 있어 보인달까요.
그 모든 게 ‘주제‘란 용광로에 녹여지면 그만의 의미를 또 나름 갖는다고 말이죠.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참 배울 게 많은 작가입니다.

문장 자체로 훌륭한 게 아니라 맥락으로 빚어낸 명문장이 놀라워요.

요즘 범람하는 명문장 만들기 집착세태에 참으로 귀감될 작가죠.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이제부터 띄엄띄엄 리뷰를 접고
죽죽 좀 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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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페르소나
박성준 지음 / 모던앤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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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몰래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체로 비기고 싶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다. 말이 되는 글은, 글 자체보다 오래 남더라. 적어도 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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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화학 공부 -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필수 화학 개념 그림으로 과학하기
알리 세제르 지음, 고호관 옮김 / 윌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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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에 관한 책은 절대로 읽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화학이 거의 빵점. 물리도 마찬가지. 내 머리는 과학적 머리가 아닌 것이다. 화학과 물리가 내 수능 점수 다 깎아 먹은 원흉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읽기로 했다. 샘플페이지 보고 읽고 싶어졌다. 드디어 내가 화학적 인간이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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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과 싫음 사이 - 서효인의 6월 시의적절 6
서효인 지음 / 난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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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하면 책을 읽으면서 잘 울지는 않는다.

티브이 보고도 잘 안 울기는 마찬가지다.

영화는 좀 운다. 

'파이란' 같은 거.


애국가 들으면 운다.


거참, 희한한 일이다.


아리랑,이라면 또 몰라도, 애국가라니.

(잘 들어보면 우리 애국가가 무지 구슬프거덩)


그런데 얼마 전에 읽으면서 운 적이 있다.

이 책이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딸을 키우는 시인 아빠가 쓴 책이다.

그때 시인 아빠의 이름을 기억했다.


서효인.


'잘 왔어 우리 딸'을 읽고 울었던 이유가 있다.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시인의 단어가 파고들었다.

문장이 파고들었다.


뭔가 비밀이 숨어있나 싶어 다시 읽고 또 읽었다.

특별한 단어가 아니다.


평범하달 수도 있는, 일상적인 단어다.

그런데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가 어우러져 또 다른 단어를 만들고

또다른 문장을 만들고 또다른 맥락을 만들더라...


그게 '단어'의 사명 아닐까.


어차피 세상에 태어난 단어.

그 사명을 다하고 가는 길은 이런 '쓰는 이'를 만났을 때 열린다.

그래서 단어들이 좋아할 사람,


서효인.


시는 어차피 읽어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읽긴 한다.

그의 시도, 어차피 잘 모르지만 읽었다.

어차피 잘 모르지만 시도 좋다.


그리고 산문집.


좋음과 싫음 사이.


각오부터 한다.


또 울면 어쩌나.

실은 울고 싶어 읽는 지도 모르겠다.


좋은 의미의 욺.


서효인 시인에게서 또 배운다.


이쯤에서 운명처럼 또 파고드는 또다른 시인의 산문집 제목.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니까...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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