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 수기
크리스티네 라반트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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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동 수기, 마귀들린 아이. 중등 교육과정도 받지 못한 작가. 이미 작고했다. 삶과 죽음의 사이. 정상과 광기의 사이. 평균과 곤궁의 차이. 평범과 특별의 차이. 그는 사이에 서 있었을까, 한편에 치우쳤을까. 어디든 그가 서 있던 자리가 궁금해졌다. 적어도 틀에 박힌 소설은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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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법 - 화가와 미학자의 맛있는 그림이야기
야자키 요시모리.나카무라 겐이치 지음, 이수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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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판된 책이다.

특별히 좋은 책들이 자주 그렇듯.


몇백, 몇천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 가운데 일생일대의 진짜 선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죠.

그림을 보며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형태의 세계를 선으로 보는 버릇을 들이면-그 선의 진위를 알 수 있다면-데생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39p)


문장은...


이 문장의 서술어를 찾기가 힘들다.


훌륭하다, 위대하다...같은 상투어를 갖다대기가 싫다.


문장은...


이 문장의 서술어는 이 문장을 읽은 모두가 제각각 채워주기를.

그게 또, 문장이 부리는 마술 아니겠는가.


문장은 이것을 말하는데 읽는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미술을 말하는데, 소설을 생각했다.


소설을 쓰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공모전에서 떨어져 보기도 했다.

내 소설은 뭐가 부족해서 떨어질까, 생각했다.


힘들게 탈고하고, 내 마음에 안 들기도 한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마음에 안 든다.


이것도 소설이라고 썼냐???

스스로 호통치거나 머리를 쥐뜯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는 감히, 소설을 쓰지는 말자.


그래놓고 또 쓴다. 

다른 글을 쓰다가도 퍼뜩 한 장면이나 이미지가 떠오르면 

소설의 첫문장이나 결말을 쓰고부터 본다. 


이 책에 의하면, 혹시 '일생일대의 진짜 선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정수리가 따끔했다.


정수리를 따끔하게 하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 문장은 외우려고 애쓴다. 물론, 잘 안 된다.

그래서 여기에 써서 남기려 한다.

많이들 읽고 정수리가 따끔거렸으면 좋겠다.


그림을 보며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형태의 세계를 선으로 보는 버릇을 들이면-


그림을 세상으로 치환해 보자.

인간관계로 치환해 보자.


관계에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관계란 형태의 세계를 '선'으로 보자.


흠...선...이라...


여기서 '선'을 해석하고 치환하는데 필요한 게 내공이다.

인생의 내공, 사유의 내공, 경험의 내공, 지식의 내공 등등.


내 수준이 딱 나올 것 같아 섣불리 말하기가 힘들다..끙.


그런데 뭔가 감이 잡히는 것도 같다.


삶을, 인생을, 고통을, 통증을, 고독을, 문제를, 관계를 대함에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

'선'으로 보자...선으로 보자...선으로 보자...


어디쯤에서 선이 비뚤어졌나.

이 선은 왜 여러 가닥인가.


나와 너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진짜 선 하나는 어떤 가닥인가.


이 선을 비뚤게 할 내 얄팍한 감정들을 관찰한다.

내가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일생일대의 진짜 선 하나.


그럼, 데생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 다음 문장도 정수리가 후끈거린다.


중요한 것은 윤곽이 아니라 골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의 여부예요. (40p)


크하.


미술서가 아니라, 아니, 미술서면서 자기계발서. 아주 훌륭한.

숨은 장르 찾기.


아, 밑줄긋기 채워넣다가 29쪽에서 발견한 이 문장!

정수리의 찌릿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게 하는.


선을 하나 긋는 것은 아이도 어른도 아마추어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선을 파악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진 않아요. 우리는 수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두 개의 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죠. 


아무리 선이 많아도, 모든 선이 다 좋은 건 아니에요. 좋은 선을 하나밖에 없죠. 어떤 방향에서든 하나의 선이 잡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선은 달라집니다. 또 한 번 움직이면 다시 무수한 선이 생기죠. 그런 가운데 유일한 좋은 선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데생입니다. 그 선은 대단한 결정력을 갖고 있어서, 결코 흐릿하게 그릴 수 없죠. 화가는 이것을 '진짜' 선이라고 합니다. 


화가의 가장 큰 고민은 무수히 교차하는 선 중 이 진짜 선을 결정하는 것인데,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죠.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29p)

읽으면서 후설의 '현상학'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후설을 다시 찾아 읽어야 할 듯. 

이분이 뭔가 '선'과 이어질 만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본질'과 연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그런 책이 좋은 책이다.

꼬리를 아낌없이 내주는 책.


더 읽어나가면서 소설 쓰기도 그렇고, 인생의 제반 문제에 관해 치환 가능한 '정수리 후끈한' 문장들을 밑줄긋기에 계속 업데이트할 생각이다.

훌륭한 그림은 조합된 요소의 어느 한 부분도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구도가 긴밀하죠. 한치의 오차로도 그림은 흐트러지고 맙니다. - P14

라파엘로의 위대함은 단지 귀여운 성모 마리아를 그렸다는 데 있지 않아요. 면과 형태의 문제를 해결한 뛰어난 능력 때문이죠. - P15

데생은 단순히 윤곽을 만드는 것 이상의 작업으로 입체, 운동, 감정까지도 담고 있죠. - P16

그림을 감상할 때는 역사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그림을 평가하면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요. - P17

종교의 제약을 받아 그린 것이라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조화를 이룬 화가의 재능을 엿볼 수 있어요. - P18

그러나 그림 그 자체로 말하면 제약 같은 것은 없습니다. - P19

여하튼 감명이라고 해야 할지, 인상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나누는 구분 선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들라크루아나 루벤스도 그림을 그리려면 종이에 형태와 색을 사용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표현의 문제가 중요한 겁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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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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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뭔지....하는 고민을 한방에 날려줄 책. 처음엔 이해가 잘 안 갔다. 뭐, 이렇게까지. 두 번 읽고 느꼈고, 세 번 읽고 울었다. 네 번째 읽으면 아마도 난 드디어 사랑이란 걸 할 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이렇게 하는 거라곤 못하겠다. 그러나 이런 사랑도 있다는 걸 아는 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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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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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재미있어 보이는 걸 보면 사유가 깊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그저 나이가 들어감 때문일 지도. 나이가 들어간다고 사유가 깊어진다고 저절로 믿는 이들이 보아야 할 책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면 솔선수범해서 내가 먼저. 앞서 사유한 이들의 빛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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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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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존 밴빌의 '바다'를 읽고 빠졌다.

그의 바다에 풍덩. 

그의 문장은 길다. 정신 잘 차리고 읽어야 한다. 

호흡도 길고, 사유도 길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시를 닮았다.

시처럼 짧거나 운율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처럼, 그의 소설은 '보여준다'.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지 않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런 단순한 문장이 그에게로 가면 이렇게 된다.


그가 의자에서 앞으로 몸을 너무 기울이는 바람에 

나는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된, 이중으로 반사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까.


보기에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쓰는 사람들은 안다.

이런 '보여주는' 문장은 바로 그것을, 그것도 수백 번 보지 않고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써 내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상상력에 의지해 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없는 것'을 그럴듯하게 적어내는 게 아니다. 


분명히 겪은 것이니 그렇게 해내는 것이다.

똑같은 그것은 아닐지라도, 똑같은 그것처럼 가까운, 

다른 밀착된 경험을 했고, 작가는 그 경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문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우주 어느 공간의 밀키웨이를 생생하게 

문자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은 한 번 쯤은 가 보았을, 

다른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은 다락방 한 구석을 체험해보았기 때문인 것처럼.


<오래된 빛>은 <바다>와 유사한 설정이 뚜렷하다.

의도적일 것이다.


'바다'에서도 친구의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었더랬다.

오래 가지 못하고 이내 친구의 누이에게로 시선이 돌려졌지만.


'오래된 빛'에서는 친구의 어머니와 꽤 장기적인 밀애를 한다.


도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는 눈살 찌푸려지는 설정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롤리타'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듯,

그래서 '롤리타'의 도덕적 거스름보다 문학적 가치가 우위에서듯,

이 소설 또한 그렇다.


친구의 어머니와 즐기는 밀회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게 없으면 이 소설은 전개도, 절정도, 결말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오래된 빛, 이기 때문이다.


그 밀회에서 출발한 빛이 오십 년이 지난 '나'에게 와 닿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별빛이 이미 몇 년, 아니, 몇 천년, 아니, 몇 백만년 전에 출발했듯.


우리가 보는 별빛은 모두 오래된 빛이듯. 


나는 '과거'를 이다지도 철학적이지 않은 듯 철학적으로 풀어낸 소설을 본 적 없다.


그에 따르면 우주에는 우리가 보거나 느끼거나 측정할 수 없는 사라진 질량이 있다. 그게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훨씬 많으며 눈에 보이는 우주,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그에 비하면 성기고 보잘 것 없다. 나는 그것을, 무게 없고 투명한 물질이 들어 있는 눈에 부이지 않는 바다를 생각했다. 이 물질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탐지할 수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그 속에서 움직이고

그것도 우리를 통과해 움직인다.


소리 없고 은밀한 본질.


이제 그는 백만-십억-일조 마일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은하의 오래된 빛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 이 테이블에서도 내 눈의 이미지라는 빛이 선생님 눈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 아주 작은 시간,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어디를 보든, 어디에서나,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254p)


자꾸 읽게 된다.

이 대목을 자꾸 되뇌게 된다.


그러면 소중했으나 내가 잊어버리고 만 과거의 오래된 빛이

내 눈에 와 닿을 것 같아서.


그러면 그 시간 속의 비어 있던 내가 지금의 질량으로 채워질 것 같아서.


사라진 질량을 회수할 수 있을 지도 몰라서.


오래된 빛을 찾는 이야기.

슬펐거나 아팠거나 고통스러웠거나 관계없이

지금은 모두 그립기만 한, 


아, 오래된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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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6-06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자축!

초록비 2025-06-06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합니다!

젤소민아 2025-06-11 21:10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록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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