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The Hours)>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비디오대여점에서 DVD로 빌려본 영화이다. 아이가 잠들면 남은 집안일을 하고 피곤하니까 내일을 위해 일찍 자야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아이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디 아워스>는 1999년 퓰리처상과 펜 포크너상을 동시에 받은 마이클 커닝햄 작가의 소설이다. 작가는 열다섯 살에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감동받아 그 작품의 오마주격인 이 소설을 집필했다. ‘댈러웨이 부인’이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에 대한 것이라면 ‘디 아워스’는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1949년의 로라 브라운, 현재의 클러리서 본이라는 세 여자의 삶 또는 상태가 교차되어 서술되고 있다.
그땐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읽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단한 여배우가 한꺼번에 출연하는 영화라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단숨에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자의 상황과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서 마음이 무거웠고, 감정이 축 쳐진 상태로 며칠 동안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주변의 도움 없이 거의 혼자 아이를 키워야했던 나는 ‘로라 브라운’에 가장 눈이 갔다. 당시의 내 상황이 로라와 조금 비슷해서일 것이다. 매일이 지루하고 반복적으로 흘러 힘들었지만 내 의지로 낳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강했다. 투철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로라 브라운은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이다. 로라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고 지금 임신 중이다. 남편은 다정하다. 남들이 보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로라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다. 어느 날 로라는 두 아이를 남겨 놓고 집을 나가버린다. 그 당시 나는 로라 보다는 로라가 남겨둔 아이들의 감정을 더 헤아렸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로 그들이 받을 상처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라의 아들 리처드 브라운은 결국 나중에 자살한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는 결혼생활 과정에서 여자의 심리 변화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리스 레싱 작가 너무 대단하다. ‘이것은 지성의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는 소설의 첫 문장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결혼생활은 지성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쉽고, 지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이가 좋고 현실적인 분별력이 있으며, 겸손과 유머를 갖춘 매슈와 수전은 잘 어울렸고 그들의 결혼에는 아무 장애가 없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남들이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간다. 수전은 임신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네 명을 낳고, 그들은 리치먼드에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다.
수전은 남편과 아이, 정원, 집을 위해 일하고 매슈는 그들의 안정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다. ‘두 사람의 삶은 자기 꼬리를 문 뱀 같은’ 단조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매슈는 간간이 바람을 피우지만 두 사람은 최대한 지성을 바탕으로 한 결혼생활을 해야 하기에 수전은 그를 이해해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 참고 희생하며 산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웬만하면 그렇게 살아야한다.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별나다’, ‘세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돈을 벌던 여자의 분노와 박탈감’을 잘 알지만 가정이 잘 굴러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빈정 상하는 위로만이 있다.
결혼생활이 안정되고, ‘아이가 엄마의 손을 떠나는 시기’가 올 때까지만 참으라고 매슈는 수전에게 말하지만 수전에게 그런 자유가 과연 오기는 하는 것일까?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는 자식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바쳐야하는 가족 환타지를 보여준다. 어부의 심장인 배를 팔고, 집을 팔고, 금싸라기 같던 양배추 밭을 팔고.....거기다 자식이 꼬박꼬박 부쳐준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알토란같은 통장을 죽으면서 남겨놓아야 한다. 빠꾸를 해도 언제라도 환영할 것이며, 사고를 쳐도 내 자식이기에 감싸 안아야 한다.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자식이 부모의 손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폭풍과 모래 구덩이’에 허우적대고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는’ 공허한 수전은 자기만의 19호실을 원한다. 호텔방과 다르게 그곳이 설사 더럽고 불결한 곳이라도 수전은 온전히 그곳에서 자신속의 광기와 악마를 달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수전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그런 고독한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이 필요했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영화 ‘디 아워스’를 봤을 때의 나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는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19호실로 가다’를 읽으며 계속 수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전을 통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한 로라 브라운도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과 아이를 버려두고,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오해마저도 감당한 채,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려고 한 여자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 책임감은 많이 희석되었고 나는 거의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허용적이다. 남아있는자의 상처와 고통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현재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된 자의 깊은 공허는 살아갈 이유보다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
『헤다 가블레르』는 1890년 헨리크 입센이 발표한 희곡이다. 입센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한 작품을 많이 집필했다. 헤다는 부유한 장군의 딸로 29세이다. 헤다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남자 중, 그 누구도 온전히 헤다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없다. 헤다는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무난한 남자인 테스만을 선택한다. 헤다는 6개월 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저택에서 살지만 권태와 불안을 느끼고 결국 자살한다.
헤다와 수전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삶과 내적인 사랑의 괴리, 순수한 존재론적 욕망의 실현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공허, 그것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가 자신을 잃게 만든다. 자신만의 19호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난 그들이 꼭 여자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약간만이라도 기울어진 생각의 시계추로 충분하다.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를 먼저 보고 온 딸아이에게 연극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평소에 말을 잘하는 아이인데 계속 버벅대며, 재미없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딸아이에게 “이 연극을 보면서 이해가 잘 안됐구나?”라고 하니 딸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내가 본 ‘헤다 가블러’ 역시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헤다의 감정이 복잡했고, 그녀의 행동 모두를 다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딸아이보다는 헤다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었고, 연극 무대의 어느 자리쯤에 나를 갖다 둘 수 있었다.
‘헤다 가블러’역의 이혜영 배우는 정말 잘 어울렸다. 얼마 전 영화 ‘파과’를 봤기에 더 반가웠다. 다만 원래 목소리의 톤이 부드럽고 약해 연극 무대에서 조금 잠기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