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은 1887년 벨라루스(백러시아)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거의 100년을 생존해 현대 역사의 중요한 고비를 넘어야 했던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왕성한 활동으로 남겨진 다양한 작품이 많고 살아생전 명성도 얻은 화가이다. 샤갈이 소년기를 보낸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마을은 러시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차별받는 가난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청어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9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샤갈은 유대인은 갈 수 없는 공립학교를 어머니의 뇌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샤갈은 이 학교에서 또래의 유대인 소년과 달리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러시아어로 말하며 일반적 러시아인의 삶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샤갈은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 공동체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추억, 유대 정통, 종교에 대한 영성이 들어있다.

 

샤갈은 20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 즈반체바학교에 입학한다. 가난했던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1910년 드디어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동시대에 활동한 피카소의 입체파와 인상파의 기법을 받아들이지만 점차 독자적인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작업을 시도한다.



-‘아폴리네르 예찬

 

파리에서 만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그림 세계를 초자연적이라고 했고 뒤에 그것은 초현실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하나의 사조가 된다. 아폴리네르는 물심양면으로 샤갈을 도왔고 샤갈은 그런 아폴리네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준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샤갈의 거의 모든 그림에는 시적(詩的)인 의미가 들어 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 샤갈은 러시아에서 활동했고,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한다. 벨라는 샤갈의 뮤즈였고 그녀 역시 글을 쓰는 작가였다. 샤갈은 여러 형태와 푸른 색깔의 그림 등에 벨라를 그려 넣어 그의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샤갈은 벨라와 35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샤갈은 혁명 시기의 러시아에서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활동하지는 못했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샤갈의 시적 은유와 이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 온 샤갈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1931년에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한다.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샤갈은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극적으로 탈출해 뉴욕에 정착했다. 1944년 병으로 벨라가 죽고, 샤갈은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재혼한다. 샤갈은 남프랑스의 생폴 드 방스에서 여생을 보낸다.

 

 

미술 전시회 관람을 갈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책이 마로니에 북스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 연대기 순으로 작가의 삶을 정리하며 거기에 따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잘 해놓았다. 설명이 들어 있는 문장이 결코 쉽지는 않다. 전문가적 수준이라 한 번으로는 기억하기 힘들고,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으면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한 작가에 대해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전반적 작품 활동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만든 책은 드물다.

 

샤갈은 1922년 자서전 나의 삶을 완성한다. 마로니에 북스의 마르크 샤갈에는 샤갈의 자서전인 나의 삶중 여러 문장을 인용해 놓았다. 인용된 문장들이 좋았다.


[아버지의 눈은 파란색이었다하지만 손은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늘 일을 하고 기도를 했고말이 없었다아버지와 마찬가지로나 역시 말이 적었다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한 것일까나도 벽에 기대앉아서일생을 그렇게 살 운명이었을까혹은 물건이 담긴 통을 운반하며 살아야 했을까나는 내 손을 보았다내 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그래그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그러나 집에서는 절대 예술이나 예술가같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

 

 

집에서는 예술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아버지가 샤갈에게 예술가의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 없었던 아버지의 선택은 샤갈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바이올린 연주자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바이올린은 유대 공동체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악기이다. 바이올린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세상과 신의 신비를 연결하는 통로를 상징한다.





-생일

-라일락 속의 연인들

-파리 위의 신부

 

생일은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다. ‘라일락 속의 연인들과 '파리 위의 신부' 역시 파리에서 벨라와의 사랑과 행복에 대한 묘사이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백색의 예수 수난도

 

1938년 작품인 백색의 예수 수난도는 유대적인 요소를 지향하면서도 당시의 고뇌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 시대 러시아와 유대인 마을의 복잡한 상황을 담고 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르크 샤갈 특별전-BEYOND TIME>에 다녀왔다. 샤갈은 워낙 유명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처음 만난 샤갈의 작품은 모두 너무 좋았다. 전시 작품 중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없었고, 오디오 가이드와 전시실에서 설명된 것을 참조해서 작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샤갈의 작품에는 유대 정통의 영성, 공동체의 기억, 인간의 감정과 정체성이 들어있고 그것을 시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 담겨있는 샤갈의 의도를 모르더라도 관람객 스스로가 해석해내고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아련하고, 구조적이기도 한 샤갈의 그림에 완전 빠져버렸다. 다른 전시회에 비해 작품 사진 찍기가 허용되지 않아 아쉬웠다.

전시는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파 위의 어린 소녀(마리아스카)

 

전시회에서 만난 샤갈의 초기 작품이다. 1907년 고향에 와서 여동생 마리아스카를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가족들의 샤갈 그림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바꿔놓았다.



[샤갈의 꽃들은 혹시 작가 자신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샤갈 작품에 등장하는 꽃다발은 단지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과 상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작가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식입니다. 작가의 작업실처럼 고요한 공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꽃들은 강렬한 존재감으로 일상의 덧없음과 삶의 연약한 본질을 상기시킵니다.

-출처: 예술의 전당]

 

이번 전시에서 내에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샤갈의 꽃다발과 화병에 꽂힌 꽃 그림이었다. 여지껏 본 꽃에 대한 그림들 중 가장 좋았다. 샤갈은 언제나 꽃을 가까이 했던 화가였다. 샤갈은 이 꽃들에 여러 감정을 넣어 캔버스로 옮겼다. 꽃다발 그림 속에 샤갈의 마음이 담긴 듯 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충만 되었고 아름다웠다. 니스 홍보 포스터도 멋졌다. 샤갈의 그림은 샤갈만의 개성이 듬뿍 담겨있다. 예술 작품에서는 그것이 최고다.



-샤갈과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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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5-07-10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전당에서 샤갈 특별전이 있군요. 너무 덥지만 않으면 가보고 싶은데, 요즘 너무 더워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페넬로페님, 며칠째 폭염이 계속되고 있어요.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5-07-10 12:20   좋아요 2 | URL
정말 너무 더워요 ㅠㅠ
서니데이님 사시는 곳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이 더위를 뚫고 오기에는 정말 먼 것 같아요.
조금 시원해지면 오시면 좋겠어요.
서니데이님께서도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래요

바람돌이 2025-07-10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전당에서 샤걀전을 하는군요. 근데 궁금한거 있어요. 국내에서 샤걀전시는 여러번 한걸로 아는데 왜 할 때마다 포스터가 안 바뀌는거 같죠? 색감이 비슷해서 다른 그림을 제가 착각하는건가 싶기도 하구요. ㅎㅎ
샤갈 전시회를 여러번 봤는데 딱히 좋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작년 빈 미술관에서 하는 샤갈전 보고 완전히 감동했어요. 샤걀의 거의 모든 시기의 대표작들을 망라한 전시였는데 샤갈의 생각이나 그림풍이 바뀌는 과정, 그의 감정의 변화 이런게 모두 다가오면서 그림과 화가가 하나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그림도 훨씬 마음에 와 닿더군요. 그 감동을 잊기 싫어서 이번 전시는 가볼까 말까 고민이 좀 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5-07-10 12:30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전시 기획을 주관한 회사가 국내에서 계속 돌려막기를 하는 것 같아요.
샤갈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의 작품도 마찬가지이고요.
특히 요즘 하는 전시는 유명 작가의 이름을 전시 제목에 내놓지만 막상 가서 보면 그 작가의 작품이 한 점 또는 두 점밖에 없어 실망을 하곤 합니다. 이번 전시에도 판화작품이 많았거든요. 판화는 계속 찍어도 되니까요.
한가람 미술관의 전시는 많이 부족했어요. 샤갈의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작품이 턱없이 부족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유럽으로 가야만 샤갈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서 조금이나마 샤갈이라는 작가가 표현하는 세계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전시 작품 모두가 샤갈이었다는 것도요.
바람돌이님께서는 여행 많이 다녀셨기 때문에 이번 전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마 감동이 줄어 들거예요
ㅎㅎ

서곡 2025-07-10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자화상 바로 위의 마지막 꽃병 그림 정말 좋네요! 아름다울 뿐더러 청량해보여 지금 이 더위에 딱입니다 ㅋㅋ ˝이번 전시에서 내에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샤갈의 꽃다발과 화병에 꽂힌 꽃 그림이었다. 여지껏 본 꽃에 대한 그림들 중 가장 좋았다. 샤갈은 언제나 꽃을 가까이 했던 화가였다. 샤갈은 이 꽃들에 여러 감정을 넣어 캔버스로 옮겼다. 꽃다발 그림 속에 샤갈의 마음이 담긴 듯 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충만 되었고 아름다웠다.˝ 끄덕이게 되는 그림입니다

페넬로페 2025-07-10 16:28   좋아요 1 | URL
화병에 꽂힌 꽃그림뿐만 아니라 꽃다발 그림도 있었는데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사진을 못 찍게 해 아쉬웠어요. 꽃 그림들이 너무 좋더라고요. 샤갈의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도 좋지만 저는 항상 이런 그림을 더 좋아합니다 ㅎㅎ

희선 2025-07-11 0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샤갈은 구남매에서 첫째였군요 마르크는 잘 생각하지 않고 샤갈만 생각해서 프랑스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샤갈 하면 프랑스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데,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유대인이었군요 샤갈 아는 거 별로 없군요 아내를 그림에 그렸다는 것 정도밖에... 전시회 하는군요 맨 처음 그림은 피카소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갈수록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5-07-11 07:38   좋아요 0 | URL
샤갈이 러시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 유대식 이름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활동하기 위해 이름을 개명했다고 합니다. 샤갈은 동시대의 화가 피카소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램브란트의 그림에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새파랑 2025-07-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갈 그림들은 뭔가 신비롭네요~! 책 표지로 자주 본 작품도 보입니다 ㅋ 예술의 전당 가보고 싶네요~!!
댓글저장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The Hours)>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비디오대여점에서 DVD로 빌려본 영화이다. 아이가 잠들면 남은 집안일을 하고 피곤하니까 내일을 위해 일찍 자야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아이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디 아워스>1999년 퓰리처상과 펜 포크너상을 동시에 받은 마이클 커닝햄 작가의 소설이다. 작가는 열다섯 살에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감동받아 그 작품의 오마주격인 이 소설을 집필했다. ‘댈러웨이 부인이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에 대한 것이라면 디 아워스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1949년의 로라 브라운, 현재의 클러리서 본이라는 세 여자의 삶 또는 상태가 교차되어 서술되고 있다.

 

그땐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읽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단한 여배우가 한꺼번에 출연하는 영화라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단숨에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자의 상황과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서 마음이 무거웠고, 감정이 축 쳐진 상태로 며칠 동안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주변의 도움 없이 거의 혼자 아이를 키워야했던 나는 로라 브라운에 가장 눈이 갔다. 당시의 내 상황이 로라와 조금 비슷해서일 것이다. 매일이 지루하고 반복적으로 흘러 힘들었지만 내 의지로 낳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강했다. 투철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로라 브라운은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이다. 로라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고 지금 임신 중이다. 남편은 다정하다. 남들이 보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로라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다. 어느 날 로라는 두 아이를 남겨 놓고 집을 나가버린다. 그 당시 나는 로라 보다는 로라가 남겨둔 아이들의 감정을 더 헤아렸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로 그들이 받을 상처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라의 아들 리처드 브라운은 결국 나중에 자살한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는 결혼생활 과정에서 여자의 심리 변화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리스 레싱 작가 너무 대단하다. 이것은 지성의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는 소설의 첫 문장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결혼생활은 지성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쉽고, 지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이가 좋고 현실적인 분별력이 있으며, 겸손과 유머를 갖춘 매슈와 수전은 잘 어울렸고 그들의 결혼에는 아무 장애가 없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남들이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간다. 수전은 임신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네 명을 낳고, 그들은 리치먼드에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다.

 

수전은 남편과 아이, 정원, 집을 위해 일하고 매슈는 그들의 안정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다.두 사람의 삶은 자기 꼬리를 문 뱀 같은 단조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매슈는 간간이 바람을 피우지만 두 사람은 최대한 지성을 바탕으로 한 결혼생활을 해야 하기에 수전은 그를 이해해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 참고 희생하며 산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웬만하면 그렇게 살아야한다.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별나다’, ‘세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돈을 벌던 여자의 분노와 박탈감을 잘 알지만 가정이 잘 굴러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빈정 상하는 위로만이 있다.

 

결혼생활이 안정되고, ‘아이가 엄마의 손을 떠나는 시기가 올 때까지만 참으라고 매슈는 수전에게 말하지만 수전에게 그런 자유가 과연 오기는 하는 것일까?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는 자식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바쳐야하는 가족 환타지를 보여준다. 어부의 심장인 배를 팔고, 집을 팔고, 금싸라기 같던 양배추 밭을 팔고.....거기다 자식이 꼬박꼬박 부쳐준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알토란같은 통장을 죽으면서 남겨놓아야 한다. 빠꾸를 해도 언제라도 환영할 것이며, 사고를 쳐도 내 자식이기에 감싸 안아야 한다.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자식이 부모의 손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폭풍과 모래 구덩이에 허우적대고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는 공허한 수전은 자기만의 19호실을 원한다. 호텔방과 다르게 그곳이 설사 더럽고 불결한 곳이라도 수전은 온전히 그곳에서 자신속의 광기와 악마를 달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수전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그런 고독한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이 필요했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영화 디 아워스를 봤을 때의 나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는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19호실로 가다를 읽으며 계속 수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전을 통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한 로라 브라운도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과 아이를 버려두고,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오해마저도 감당한 채,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려고 한 여자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 책임감은 많이 희석되었고 나는 거의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허용적이다. 남아있는자의 상처와 고통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현재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된 자의 깊은 공허는 살아갈 이유보다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




 

 

 









헤다 가블레르1890년 헨리크 입센이 발표한 희곡이다. 입센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한 작품을 많이 집필했다. 헤다는 부유한 장군의 딸로 29세이다. 헤다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남자 중, 그 누구도 온전히 헤다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없다. 헤다는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무난한 남자인 테스만을 선택한다. 헤다는 6개월 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저택에서 살지만 권태와 불안을 느끼고 결국 자살한다.

 

헤다와 수전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삶과 내적인 사랑의 괴리, 순수한 존재론적 욕망의 실현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공허, 그것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가 자신을 잃게 만든다. 자신만의 19호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난 그들이 꼭 여자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약간만이라도 기울어진 생각의 시계추로 충분하다.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를 먼저 보고 온 딸아이에게 연극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평소에 말을 잘하는 아이인데 계속 버벅대며, 재미없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딸아이에게 이 연극을 보면서 이해가 잘 안됐구나?”라고 하니 딸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내가 본 헤다 가블러역시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헤다의 감정이 복잡했고, 그녀의 행동 모두를 다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딸아이보다는 헤다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었고, 연극 무대의 어느 자리쯤에 나를 갖다 둘 수 있었다.

 

헤다 가블러역의 이혜영 배우는 정말 잘 어울렸다. 얼마 전 영화 파과를 봤기에 더 반가웠다. 다만 원래 목소리의 톤이 부드럽고 약해 연극 무대에서 조금 잠기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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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2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혜영 배우님이시군요?
전 어느 외국 배우이거나 외국 작가님이신가 싶었네요.
전 이혜영 배우의 목소리나 그 톤을 참 좋아하는데 연극 무대에선 잠긴다는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네요.
그리고 따님이 이 연극을 보고 와서 감상을 재미없게 브리핑했다는 장면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19호실을 찾아갈 나이가 아니니 그 느낌이 뭔지 모두 공감하긴 좀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이런 연극을 보면서 페넬로페 님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페넬로페 2025-06-12 15:05   좋아요 1 | URL
생각보다 배우님이 체구가 작으시던데 어떻게 파과에서 액션 장면을 소화했는지 모르겠어요.~~물론 대역배우가 있었다 하더라고요.
헤다 역할은 잘 어울렸어요.
19호실이 필요하고 이해할 나이는 제 나이쯤 되어야 될 것 같아요 ㅎㅎ
저는 엄청 공감하며 봤거든요^^

새파랑 2025-06-12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아워스 표지는 버지니아 울프인데 다른 작가네요~! 델러웨이부인 문학동네에서 새로 나와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19호실로 가다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06-12 15:08   좋아요 1 | URL
디 아워스에 세 여자가 등장하는데 모두 댈러웨이 부인과 관련이 있어요.
도리스 레싱의 이 단편집은 다른 작품은 호불호가 있는데
일단 ‘19호실로 가다‘는 넘넘 좋게 읽었어요.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 공감할 내용이었어요^^
댓글저장
 

올해 신년계획으로 꼭 헬스장에 등록한다고 결심했지만, 당연히 아직이다. 그 대신 많이 걷고, 산책길 여러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 공원 기구 운동도 한 번씩 한다. 어차피 헬스장에 가도 이용하는 기구가 한정되어 있다. PT를 받지 않는 한, 헬스 중독자인 근육맨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에 선뜻 끼어들 수가 없다. 깨작깨작 기구 몇 개 들어 올리고, 러닝 머신이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면서 미리 지불한 1년 치 돈이 빠져나가는 안타까움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정신적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요즘은 집 근처 새로 조성되고 있는 호수 공원에 설치된 중량을 조절할 수 있는 운동 기구를 이용한다. 무게를 높일 수 있어 훨씬 운동하는 맛이 난다.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공원 기구 운동은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데, 저녁 늦게 가면 학원 수업이 끝난 학생들도 많이 와서 운동을 한다. 저번에는 어떤 학생들이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이 놓고 운동을 하길래 소리를 좀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전에는 태권도 도복을 입은 3명의 남학생과 1명의 여학생이 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쯤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10시쯤 태권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들린 듯 했다. 그들은 운동은 하지 않고 기구 옆의 벤치에 앉아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거의 3명의 남학생이 1명의 여학생을 놀리는 것이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그 여학생을 놀렸는데, 여학생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여학생이 고통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재미있게 친구들과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20분 정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가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왔지만 계속 그 광경이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여학생이 약간의 장애를 가진 친구는 아닐까? 아님 요즘 청소년의 행태나 우정을 내가 몰라서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학생 3명과 여학생 1명의 조합은 어딘지 조금 공평하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설사 그들이 친한 친구라 해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놀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지금은 괜찮아도 그것이 쌓이면 나중에 그 여학생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다음날까지 고민하다가 학생들이 입은 도복에 인쇄된 상호의 태권도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듣고 본 것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관장님이 전화를 받아 어제의 일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내가 오해를 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아이들을 혼내라고 전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도가 조금 심한 것 같았으니 정확한 상황은 알아보시라고 했다. 관장님은 잘 알겠다고 하며 아이들과 얘기 나눠보겠다고 했다.

 

태권도 관장님은 그 다음날 나에게 전화를 해주셨다. 아이들과 얘기를 해보았지만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고, 서로 장난친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로 여학생에게 남학생들이 한 행동에 대해 어떤 기분이 들었냐고 물어봤지만, 아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고 했다. 관장님은 계속 아이들을 지켜볼 것이고,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도록 지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라며,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우정을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의 호기심으로,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심심해서 부당한 것을 참거나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 금세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가족소설이면서 성장소설이다. 지우, 소리, 채운은 각자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고민이라는 표현은 가볍고 사실 불행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가족의 죽음과 폭력으로 야기된 것들로 인해 현재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는, 불행에 빠진 세 청소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불행은 뭔가 거창한 것을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큰 사건 없이, 존재해야 할 누군가와 살 수 있다는 바람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불행인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병이 찾아오고, 재수 없는 사고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하나라도 찾아오면 그냥 힘들어지는 것이다. 힘들기 시작하면 지우의 엄마인 지연처럼 피로와 허무에 젖어 살게된다. 그냥저냥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바라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지우, 소리, 채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그 연결을 거부하지 않는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안주하거나 그것으로 타인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지금 아이들이 의지할 엄마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어른이 그들을 보호해주려고 노력한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글로리악연은 청소년 시기를 정말 나쁘게 보낸 어른들의 이야기다. 김애란 작가의 착한 이 소설과는 정반대다. 전자에 비해 이 소설이 말하는 것이 너무 따뜻해 식상하고 재미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김애란의 소설에는 진심이 있다. 가족이 아니어도 마음 놓고 안길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아이들은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다. 그냥 이것이 진리다.


이 소설속 아이들과 산책길에서 만난 태권 소년 소녀가 무탈하게 어른으로 잘 성장했으면 좋겠다. 

바라는 건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집에서 한 과제라 채운은 '미끄럼틀'이나 '추락' 같은 단어를 미리 찾아볼 수 있었다. 채운은 저 때가 자기 삶에서 최고의 날까지는 아니어도 꽤 좋은 날이었음을 인정했다. 작은 몸에서 기쁨과 신뢰가 분수처럼 터져나오던 때, 저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마음놓고 내려와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어 그 사람에게 정말 마음껏 안겼던 그날이

그런데 어쩌다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데 와 있을까?’ 

채운은 접속사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여러 선택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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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5-05-24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리 지불한 1년 치 돈이 빠져나가는 안타까움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정신적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 ㄷㄷㄷ 아 바로 제가 작년에 겪은 일입니다! 몇 번 나가지도 않고 만료되었어요 막판에는 어서 빨리 끝나버려라 라는 자포자기적 심정이었지요 에휴 태권도장에 연락해보신 일은 정말 잘 하신 것 같아요 그냥 넘기고 묻어 버렸다면 엄청 찜찜하셨을 거에요

페넬로페 2025-05-24 19:55   좋아요 1 | URL
네, 등록해 놓고 안 가는 날이 많고 어느 순간 거의 가지 않는거죠 ㅎㅎ
이런 경우가 많아 운동을 많이 쉬었는데 할인 이벤트 전단지가 와서 고민중입니다 ㅋㅋ

태권 도장에 전화할지 고민이었는데 잘 한 것 같아요.
관장님이 성의 있게 경청해 주셨어요. 그 친구들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고요.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들도 조금 조심하지 않을까 합니다.

5월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래요^^

책읽는나무 2025-05-24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장님 조금 당황하셨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고 또 페넬로페 님께 경과를 보고하려고 따로 전화를 주신 것을 봐선 좋은 어른이신 것 같아요.
정말 김애란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 중 한 분 같단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도 소설 속 아이들과 겹쳐보이기도 하구요.
요즘 김애란 작가의 예전 소설을 펼쳐 들고 다시 읽어보고 있어요.
<이중 하나는 거짓말> 소설이 나쁘진 않았는데 예전 소설과 결이 비슷한 듯 다른 듯한 이 분위기가 왜 바뀐 것일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페넬로페 님의 글을 읽으면서 김애란 작가님이 의도한 게 진심 이것!!! 오호!! 맞아, 이것일 수도 있겠구나!
해답을 찾은 느낌입니다.
역시 페넬로페 님^^

페넬로페 2025-05-25 00:05   좋아요 1 | URL
성장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거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나쁜 길로 가지 않고 보통 어른으로 무탈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요. 청소년 시기에는 아차하는 순간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럴 때 좋은 어른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아이를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최근에 뒤늦게 정주행한 드라마 ‘조립식 가족‘의 내용이 그렇더라고요.꼭 엄마나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잘 먹이고, 잘 케어만 해준다면 각자, 나름 잘 성장할 수 있는 걸 보여줘서 너무 감동깊게 봤어요^^
요즘은 작가들이 힘들듯요. 매운 맛이 아니면 사람들이 잘 안 보고, 잘 안 읽으니
ㅠㅠ

책읽는나무 2025-05-25 00:28   좋아요 1 | URL
조립식 가족.
저도 재미나게 봤습니다.
팟캐스트 듣고 있는데 김혜리 기자님이 재미나게 봤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한 번 봤다가 재밌어서 정주행 했었어요. 이런 드라마가 좀 더 많았음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우리들의 블루스>편에서도 학생 커플 이야기도 인상 깊었는데 줄곧 떠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몇 달 전부터 넷플릭스를 잠깐 끊었어요. 드라마나 영화 들여다 본다고 헤어나오질 못하여 이용료가 오른 이후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었는데 그 폭싹 속았쑤다를 보고 싶어서 다시 넷플 결제를 할까 말까 엄청 망설이고 있네요. 다시 접속한다면 또 폐인이 될 것 같아ㅋㅋ 근데 넷플 안 보는 대신 요즘 유튜브 세계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어 큰일입니다.ㅜ.ㅜ
이러나 저러나 폐인 안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그중 가장 좋은 폐인은 책덕후 폐인인 듯 합니다만.^^
한국 소설 작가들 특히 여성작가들 책을 두루 읽어볼 계획을 세웠거든요. 확실히 젊은 작가일 수록 좀 자극적인 듯도 하구요. 특히나 안 읽던 호러쪽을 읽으면서 헐…이러면서도 차츰 중독되어 읽곤 있어요.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치부해야 할지 알 순 없지만 일단 읽어보자! 이러면서 읽습니다.
그래도 역시 저는 어둡지만 착한? 소설이 좋은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5-05-25 09:32   좋아요 1 | URL
조립식 가족 너무 좋죠?
이 드라마보고 황인엽 배우 팬도 됐고, 지인들에게도 좋은 내용이라고 소개했어요.
저는 요즘 넷플릭스 많이 보고 있어요 ㅠㅠ

책나무님, 한국 여성 작가 소설 읽으시고 리뷰 많이 부탁드려요.

잉크냄새 2025-05-25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학생들과 대화해보고 그 결과를 전화로 피드백해주는 걸 보니 해당 도장은 그래도 믿음이 가네요.

페넬로페 2025-05-25 10:47   좋아요 0 | URL
네, 전화상이지만 제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 주셨고, 피드백까지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댓글저장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진지함때문이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는 연극사 2‘ 강의를 같이 듣는 미도리를 대신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간병한다. 처음 만난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와타나베는 부담감과 서먹함을 없애려고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날씨 얘기로 시작해 연극사 2‘에서 배우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설명해준다.

 

[에우리피데스 아세요?

그 사람 연극의 특징은 이것저것 마구 뒤엉켜 꼼짝도 못 하게 돼 버린다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탓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요.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 말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정말 간단합니다.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죠.배후 조정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돼요. 이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합니다.

-p.323,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길지만 이 문장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이렇게 쉬우면서도 간결하게,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이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 소설의 어떤 다른 부분보다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구절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보통사람 같으면 처음 만난 사람, 그것도 친구의 아버지에게 지금 배우고 있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대해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 와타나베를 멍하니 쳐다보는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그는 피스라고 말하며 어색함을 모면한다.

 

둘은 오이도 나눠먹는다. 오이를 먹으며 와타나베는 생명의 향기를 운운하며 엉뚱하게 오이예찬도 한다. 결국 미도리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인정한다. 와타나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진지한 의미를 두어 지금 생을 찬란하고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5일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세상은 신의 개입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오이의 아삭거림으로 삶은 가볍고 경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와타나베 덕분에.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하루키에 의해 진하게 각인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이제서야 읽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19편이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에서는 이온’, ‘오레스테스의 결말에 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사용된다. 여러 가지 갈등이 연속되다가 거의 마지막에 신이 등장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이 장치가 단지 연극적 기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인간의 삶에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인력(人力)으로 할 수 없어,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일들도 허다하다. 어쩌면 신이라도 나타나 뭔가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이 이 속에 들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비극의 상당 부분에 신이 등장한다. 절대자인 신에 복종하고 신탁에 따르는 행위는 그만큼 고대인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험난하고 위험했다는 의미이다. 한편으로 인간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실현시킬 도구로 무수히 신의 이름을 도용하기도 한다. 여러 신전의 사제들이 정확하지 않은, 우물거리는 말로 신탁을 전하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적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방향으로 그것을 해석했다.

 

에우리피데스는 헬레네를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게 서술한다.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으로 파리스는 헬레네를 트로이아를 데려갔고 그리스 연합군은 헬레네를 데려오기 위해 트로이아로 출정한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아로 간 헬레네는 환영이고 실제 헬레네는 이집트로 갔고, 헬레네의 기지로 남편 메넬라오스와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온다는 다른 버전을 가져온다.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인 아가멤논 가()의 비극과 복수는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복수 3부작'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에우리피데스 역시 이 소재로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아가멤논 가의 비극은 사실 선조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결정적 원인은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가 그리스 연합군의 출정을 위해 아르테미스 신전에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설정이다.

 

아가멤논은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결국 딸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캇산드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죽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부부의 아들과 딸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엄마인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죽이는 복수가 되풀이된다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오레스테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등이 아가멤논 가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이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것이어서 결국 이 소재와 연결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비극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의 여러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는 것도 많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그런 의도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을 것이다. 이 기법이 현대의 막장 드라마 결론처럼 황당하거나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비극적 고리와 인간의 광기를 끊는 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장치가 없다면 인간들은 끊임없이 연결된 악연에 의한 폭력에 시달릴 것이다. 과감하게 끊고 매듭지어 새롭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당위성은 지금 현재에도 절실하다.

 

[아폴론이 헬레네와 함께 기계장치를 타고 무대 뒤편의 높은 곳에 나타난다.

 

아폴론; 메넬라오스여, 그대는 날이 선 분노를 무디게 하라.그리고 손에 칼을 빼 들고 여기 이 소녀를 위협하고 있는 오레스테스도 내가 전하러 온 말을 명심해 들어라.

 

오레스테스; 오오, 예언의 신 록시아스이시여,

하지만 결론이 좋으니, 그대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오레스테스’, 1625~1670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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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에 태어나 1850년에 사망한 발자크 인생 전반에는 격변하는 프랑스 역사가 들어있다. 발자크는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회를 그대로 담아 <인간극>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땐 처음에 힘이 든다. 발자크는 매번 소설 첫 부분에서 세부적이고도 자세히 배경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지루하기도 하고, 어떨 땐 내가 굳이 19세기 프랑스에 대해 이렇게까지 알아야 되는가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하지만 조금만 참고 읽어나가면 촘촘하게 짜여 진 발자크 소설의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된다.

 

사라진은 비슷하게 전개되는 인간극의 시작과는 다르다. 엘리제 부르봉궁의 화려한 연회에 참석한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저녁나절 창밖 나무의 모습에서 죽은 자들의 춤(죽음의 무도)’의 이미지를 본다. 죽음을 망각한 채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출신이 의심스러운 랑티 씨의 저택에서 벌이는 바쿠스 축제와는 대조적인 느낌을 갖는다. 화자는 이질적인 두 그림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 예술과 사랑에 대한 허무를 본다.

 

50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인 사라진에서 발자크는 압축적이고도 깊이 있게 인간에 대해 말한다. 권력, 탐욕, 화려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예술에게도 칼을 댄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 위해 어린이에게 물리적 거세를 가해 남성 성악가인 카스트라토를 만들어낸다. 조각가 사라진과 카스트라토인 잠비넬라의 스토리는 예술과 사랑조차도 인간 내면의 순수성이 아닌 조작되고 왜곡된 이미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비평서 S/Z에서 사라진을 분석한다. 바르트의 해석이 어려워 그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만약 읽더라도 그의 비평에 모두 공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소설 사라진은 짧지만 여러 번 읽어도 발자크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내기 쉽지 않다. 어떤 결론을 내기 모호하게 뭉뚱그려져 있지만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현실에 묻혀 버둥거린 발자크 스스로 소설가로 사는 자신에 대한 무수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샤베르 대령은 전형적인 인간극 소설이다. 인간극의 주요 소재는 돈과 법이다. 작가가 되기 전 발자크는 3년간 법학 공부를 했고 소송대리인과 공증인 사무실에서 2년 동안 서기생활을 했다. 이때의 경험이 이후 발자크 소설을 거의 형성한다.

 

샤베르 대령은 나폴레옹제국의 전쟁 영웅이다.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샤베르 대령은 실종자로 처리되어 법적으로 부재자가 된다. 부재자는 그의 배우자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돌아온 샤베르는 신원을 회복하려 하지만 이미 재혼해 새 남편과 아이까지 낳고 페로 백작부인이 된 그의 부인은 샤베르 대령을 부정한다.

 

여기에는 복잡한 법적인 문제들이 얽혀있다. 발자크의 인간극에 자주 등장하는 소송대리인 데르빌은 샤베르 대령 편에서 도와주려 했지만 결국 인내심에 한계를 드러낸 샤베르의 분노로 합의에 실패하고 샤베르는 비참하게 노년을 보낸다.

 

발자크의 인간극이 현실을 대변해 읽는 내내 뒷목이 뻣뻣할 정도로 추잡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이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잔인하고 경쟁적 세상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어디엔가 꼭 있기 때문이다. 샤베르 대령도 자신의 하마르티아로 다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만, 그의 이면에는 전 부인을 지켜주려는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샤베르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좋은 심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의와 측은지심도 느껴진다.




1891년 프랑스문인협회는 로댕에게 발자크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다. 7년 동안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로댕의 발자크는 사람들이 기대한 모습이 아니었다. 발자크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섬세한 표현이 없는, 그저 망토 자락으로 둘러싸인 3m 정도 높이의 거대한 덩어리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했고 문인단체는 인수를 거부했다. 로댕은 석고 모형을 집에 보관했고 그가 죽고 22년이 지나서야 청동상으로 다시 주조했다. “로댕의 조각은 근대와 현대의 경계를 형성한다. 로댕은 발자크의 내면성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모란미술관의 발자크 상은 몰드로 뜬 석회상 10점 가운데 하나이다. 루브르미술관 아틀리에에서 제작한 마지막 에디션이다.

 

작년 한 해 동안 클래식 독서동아리에서 발자크 소설을 읽던 중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에 있는 모란미술관에 로댕의 발자크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막연히 그곳이 멀다고 생각해 언젠가 가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워 초록이 싱싱하고 여러 색의 철쭉과 연산홍이 만발한 봄날에 그레이스 님, 카리나 님과 함께 모란미술관에 다녀왔다.

 

잠실역 환승센터 6번 게이트에서 8002번을 타고 모란공원에 하차하면 바로 모란미술관이 있다. 2층 버스가 있어 버스 2층에 탑승했는데 색다른 재미가 있어 좋았다. 올림픽 대로를 지나 모란미술관까지는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2010년 반청자 여사가 기증한 발자크 조각상이 모란미술관의 모란탑 내부에 전시되어 있었다. 모란탑은 자연 채광이 되는 아주 높은 탑인데 그곳에 발자크가 우뚝 서 있었다. 두근두근 기대하며 직접 본 발자크 상은 그야말로 위엄이 넘쳤다. 100년도 전에 살았던 프랑스 작가가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찾아 온 이 세 여자에게 어떤 감정이 드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왜 그리 발자크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가?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발자크의 삶을 안다면 로댕이 만들어낸 발자크 조각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샤베르 대령>처럼 정반대의 소설을 만들어 낸 작가, 평생 돈을 좇으며 살았지만 돈의 감옥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인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청소년 시기를 보낸 사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남자, 뒤늦게 결혼했지만 곧 병으로 죽어버린 발자크....

 

어떻게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로댕은 그의 삶 전체를 한 덩어리 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오른편으로는 어둡고 소리 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내 왼편으로는 삶의 격조 높은 바쿠스 축제가 펼쳐졌다. 이편에는 차갑고 음침하고 애도에 잠긴 자연이, 저편에는 흥에 취한 사람들이 있었다. 별의별 방식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며 파리를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철학적인 도시로 만드는 두 이질적인 그림의 경계에서 나는 반은 경쾌하고 반은 을씨년스러운 정신의 혼합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왼발은 장단을 맞추는데 다른 한 발은 관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의 절반을 얼어붙게 만드는 외풍에 내 한쪽 다리는 얼음장 같고 반대쪽 다리는 무도회가 열릴 때면 흔히 그렇듯 살롱의 끈적끈적한 열기를 맛보았다.

-p.12~13]

 

발자크가 쓴 사라진의 이 문장이 발자크 조각상을 바라볼 때의 내 느낌과 똑같았다.




 




날씨가 화창한 봄날의 모란미술관 야외조각장은 너무 좋았다. 대부분 1990년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약간 시대에 뒤쳐졌지만 레트로한 분위기가 정감 있었다. 정원의 수목 관리가 잘 되어 있어 그곳의 조각들은 나무와 싸워야 할 정도였다. 가을에 가도 좋을 것 같았다. 미술관 내부에는 사물로부터라는 제목의 기획전이 열렸다. 관람객이 별로 없어 도슨트 님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전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작품 하나마다 작가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의미를 두는지에 대해 새삼스레 느낄 정도로 도슨트 님의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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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4-25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마니아 페넬로페님~! 발자크 조각상까지 보러 가셨군요 ㅋ 발자크랑 에밀 졸라의 작품세계가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발자크가 귀족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에밀 졸라는 서민적인 이야기? ㅋ

페넬로페 2025-04-25 17:19   좋아요 2 | URL
이 조각상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다녀왔어요. 발자크와 에밀 졸라가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요. 요즘 졸라의 ‘루공가의 행운‘을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stella.K 2025-04-25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을 책은 많고 점점 읽어지진 않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ㅠ 그래도 모란 미술관은 좋네요. 근데 반청자 여사님이 기증을 하셨다니 대단하신 분이신가 봅니다. 전 그냥 프랑스에서 공수해 한정 전시하나 했더니...

페넬로페 2025-04-25 20:26   좋아요 2 | URL
반청자 여사님의 아들이 사업가인데 컬렉터라고 합니다. 이 두 분이 기증했다고 보면 되는데 아마 어머니의 이름으로 기증된 듯 합니다.
미술관에 가서 힐링하고 왔습니다. 앉아 있을곳도 많아 커피 들고 가서 산책해도 좋을 듯 한데 입장료가 만원이더라고요^^

희선 2025-04-26 0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사라진’을 사라지다인가 했는데, 읽다 보니 이름이었군요 이건 한국말이 아닌 프랑스말 Sarrasine사라진이군요 찾아보니 조각가라고 나오네요 한국 미술관에 발자크 조각상이 있다니, 발자크 소설을 많이 보셔서 그걸 본 느낌이 남달랐겠습니다 로댕이 조각한 거였군요 그때 사람들은 안 좋아했다니... 그래도 남아 있었네요

숲속에 조각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겠습니다 나무가 좋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5-04-26 09:54   좋아요 1 | URL
네, 사라진은 사람 이름입니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다보니 아무래도 이 조각상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정원을 산책하면서 작품을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또한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희선님,
주말 잘 보내십시요^^

책읽는나무 2025-04-26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란 미술관이 모란역 근처에 있나 보군요?
모란역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 모란이란 명칭이 눈에 들어옵니다.
암튼 그 유명한 발자크 동상이 한국 미술관에 있었다니 놀랍네요. 어디선가 로댕의 발자크 동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너무 추한 얼굴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외면 당했었다는 그 말에 얼마나 못생기게 조각했으면? 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진을 직접 보니 음…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로댕이 생각하는 발자크의 이미지가 섬세하게 잘 드러난 듯도 합니다.
좀 엄숙하네요.
여성 혐오 작가라고 알고 있었는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어린 시절,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이런 구절을 읽으니 그래서 작가가 그랬었나? 싶은 마음도 들구요.
암튼 그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느끼려면 소설을 읽어봐야 하는데 제대로 완독한 책이 없는 것 같아요. 이 소설부터 읽어봐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페넬로페 2025-04-26 09:53   좋아요 2 | URL
이름은 모란인데 위치는 마석에 있어 마석역과 가까워요.
책나무님 모란역에 대한 추억이 뭔지 엄청 궁금합니다.

로댕의 발자크상은 생각보다 키가 커서 얼굴쪽을 자세히 보지 못해 아쉬웠어요.
아래에서 위로 쳐다봐야했어요.

남성 작가의 여성 혐오가 뭐 발자크뿐이겠습니까? ㅎㅎ

날씨가 너무 좋네요.
책나무님, 잘 지내시지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요^^

그레이스 2025-05-04 1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랑 카리나님도 등장하네요 ^^
잠깐동안의 외출이었는데,,, 굉장히 오래전 일인듯요^^
한강변 풍경도,, 미술관 뜰의 야외조각도,,, 너무 좋았어요.
가을에 다시 가봐요.^^~♡

페넬로페 2025-05-05 09:03   좋아요 2 | URL
당연히 두 분 등장하셔야합니다.
네, 모든것이 좋았어요.
가을에도 좋을듯 해요.
그때 꼭 다시 가요♡♡♡

독서괭 2025-05-08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로댕이 발자크 조각상을 만들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남양주에 이런 미술관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구요. 페넬로페님 덕에 공부하고 가네요. 발자크 작품은 서재글 읽을 때마다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는 게 몇년째지만..ㅎㅎㅎ

페넬로페 2025-05-08 19:41   좋아요 1 | URL
네, 로댕의 발자크상이 있어요.
모란 미술관은 야외에 조각상이 많아 날씨 좋을 때 아이들 데리고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정원도 좋더라고요.

저도 읽어야지 하면서도 입문도 못한 작가가 수두룩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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