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넨세보 불가 내추럴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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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넨세보는 산미와 묵직한 바디감이 잘 어울려 조화롭다. 진하게 남는 커피 향과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하다. 나뭇가지에 아직 남아 있는 단풍 위로 엄청난 눈이 내려 신박한 겨울을 맞이했다. 뜨겁게 마셔도 좋은 이 커피와 함께 겨울에게 인사한다. 약간 머뭇거리며, 겨울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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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12-03 1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은 커피의 계절이죠. 오늘 커피 두 잔을 마셔(정확히도 한 잔 반) 오늘은 그만 마셔야 하는 현실이 아쉽네요. 커피가 보약이면 좋겠습니다.

페넬로페 2024-12-03 15:36   좋아요 2 | URL
식사하고 나서나 디저트를 먹을 때 커피를 꼭 마시는 편인데~~
너무 늦게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와 저도 하루 두 잔 정도만 마시려고 해요.

2024-12-23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3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3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4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4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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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한 번씩 딸아이와 함께 가고, 자주 혼자 간다. 사는 곳이 흩어져있는, 1년에 서너 번씩 만나는 대학 동기들과는 중간 지점인 종로에서 만나 그들과도 가끔 궁에 들러 산책을 한다. 덕수궁 앞에서는 와플을 사 먹고, 경복궁에 갈 땐 인사동에 들리고, 창경궁이나 덕수궁에 갈 땐 대학로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에게 궁은 외롭고도 씁쓰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조선의 역사가 어디 한 번이라도 찬란할 때가 있었는가 말이다. 궁에 가면 그저 쇠락하거나 비굴했던, 제대로 된 개혁도 하지 못한 힘없고 우유부단한 왕조만 생각난다. 특히 덕수궁이 그렇다. 고종과 민비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고희를 즐겨 마셨으면 뭐하겠는가?

 

그래서 궁에 가면 되도록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냥 자연을 본다. 궁은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기 좋다. 인공적으로 수더분하고 아기자기하게 잘 가꾸어져 있어 그곳 벤치에 앉아 있으면 낭만적인 감상에 젖기 좋다. 창경궁은 가장 풍부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봄이나 여름은 푸름으로, 가을은 온갖 색깔로 물드는 낙엽으로 운치가 있고 종묘와 같이 있어 그것도 매력적이다.

 

창경궁은 한때 창경원이었다. 일본이 식민지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시키기 위해 궁을 식물원과 동물원으로 만들었다는 가장 많이 알려진 대로 나는 알고 있다. 역사의식이 있든 없든, 창경원은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봄에 벚꽃이 필 때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들었다. 케이블카까지 있었다.

 

내가 창경원에 처음으로 간 건 초등학생 때였다. 서울 누하동(지금의 서촌)에 살던 이종사촌언니와 단둘이 버스를 타고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잘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때는 초등학생이라서 지방 소도시에 살던 내가 분명 서울에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나 언니와 함께 갔을 텐데 창경원에는 대학생이었던 사촌언니가 왜 나만 데리고 갔는지 잘 모르겠다. 창경원 안에서 뭘 구경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언니와 버스를 타고 창경원 앞에서 내렸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강화의 석모도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가 본적이 있다. 차를 배에 싣고 갔다. 보문사에도 가고 바닷가도 갔다. 이 소설에서 석모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를 읽을 수 있었다. 강화도 쪽만의 사투리인지, 인천 사람들도 이런 말을 사용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며 자꾸 나와 연관된 생각만 했다. 좋은 소설은 소설의 알맹이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내가 있고 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고 공유할게 있으면 더 좋다. 소설과 어우러져 어느 곳에서 만나는 순간에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단지 한 순간, 한 지점 일지라도 나에게 그 소설은 좋은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지 못했다. 끝가지 기대에 못 미쳤다. 마지막에 뭔가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실망한 상태에서 책을 덮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이라서 나의 노스탤지어를 끌어오고 인물에 대한 연민도 가져보고 그들도 이해했지만 끝내 버무려지지 않았다. 내가 끌어온 것에 내 것만 남았다.

 

뷔페에 가면 오늘은 정말 많이 먹으리라 결심한다. 작정하고 음식에 달려든다. 이 코스 저 코스로 다니며 한 가지씩이라도 다 맛보자며 접시에 조금씩 담는다. 배가 불러와도 일어나 새로운 접시를 가지고 다른 음식을 담아 온다. 배가 터져도 맛있는 디저트를 포기할 수 없다. 커피를 계속 들이키며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먹고, 마지막에 꼭 아이스크림도 먹는다. 그렇게 많이 먹고도 뷔페를 나올 때,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맛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저 내가 낸 돈 만큼, 뷔페의 장점인 가성비를 달성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내 몸 속은 부조화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딱 이 소설이 그랬다. 많은 맛있는 것이 이 소설에 들어 있었다.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 담당자라는 좋은 소재가 있었다. 정독 도서관과 원서동, 낙원 하숙이라는 과거(나에겐 진한 노스탤지어다)와 거기에 얽힌 영두, 안문자 할머니, 리사, 산아 등 여러 인물이 있었다. 창경원 대온실을 설계한 일본인의 회고, 문화재를 관리하는 공무원의 행태, 일제 강점기, 육이오 전쟁, 대온실 지하의 미스터리 등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결국 이것들이 하나로 버무려지지 않고 끝까지 각자 겉돌아 아쉬웠다. 장편 소설이지만 여러 단편 소설을 읽는 듯했다.

 

오랜만에 수리라는 말을 들었다. ‘대온실 수리라는 눈에 보이는 변화 이면에 깔리고 쌓인 여러 모습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각자의 수리보고서에는 과거로부터 시작된 역사와 환경, 사람, 슬픔, 인내, 아픔, 상실, 수난이 들어 있다. 수리되어 더 웅장하고 멋지게 변한 창경궁 대온실 처럼 나와 우리들의 삶의 수리도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이 믿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내린 나는 주차해둔 차를 찾아 원서동으로 갔다. 낙원하숙도 대온실도 들어갈 수 없는 시각이지만 오늘은 그 공간 곁에 있고 싶었다. 창경궁으로 걷는 내 옆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고 발을 내밀면 잠시 아무것도 없는 공중인 것도 같았지만 허방을 짚는 듯한 실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팔짱을 끼듯 할머니의 스케이트를 옆구리에 끼고 고궁의 담장을 따라 걸었다.

-p.375]



-작년 6월에 갔을 때의 창경궁 대온실



이 소설을 다 읽고 창경궁에 다녀오자고 했다. 깡통만두 식당도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11월에 폭설이 내렸다. 아직 나무에 빨간 단풍이 매달려 있는데 그 위를 하얀 눈이 급습해버렸다. 아무래도 내년 봄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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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창경궁에 자주 소풍가고, 중학교때 사생대회도 여기서 자주해서, 커서는 잘 안가게 되요. 너무 황량했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은 잘 정비했겠지만,
전 창덕궁이 더 좋아요. 후원이 더 좋구요.^^
대온실이 여기를 말하는 건가봐요.

페넬로페 2024-11-27 23:47   좋아요 2 | URL
그쪽으로 소풍 많이 갔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잘 정비되어 있어요.
소설에서 말하는 창경궁 대온실이예요.
직접 보면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아요.
이 소설 읽고 런던의 큐가든에 가 보고 싶어졌어요^^

망고 2024-11-27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페넬로페님 뷔페에 비유하신 점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ㅠㅠ
눈 덮인 사진 참 예뻐요😍눈은 가만 보고 있기에는 예쁜데 말이죠

페넬로페 2024-11-27 23:51   좋아요 2 | URL
많이 아쉬웠어요.
장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별점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그렇다고 3별은 또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3.5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요^^

눈은 보기에는 예쁜데 밖에 나간 식구를 생각하면 그리 반가운 건 아니예요.
다들 눈길에 무탈했으면 좋겠어요^^

전야제 2024-11-28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뷔페에 관한 부분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내 몸 속이 부조화로 가득 차 있다니. 통찰이 너무 재밌습니다 완전 공감해요ㅎㅎ 저도 다음에 서울 여행갈 때 창덕궁이랑 창경궁 꼭 가봐야겠어요! 예전에 경복궁은 가봤는데 나머지는 못 가봤네요ㅠㅠ 겨울 지나서 봄 되면 어머니와 함께 궁궐 여행부터 가고 싶습니다ㅎㅎ 저도 눈이 그리 반갑지는 않네요. 폭설이라는데, 페넬로페님도 눈길 조심하세요!

페넬로페 2024-11-28 10:09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에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유를 한 건 아닌지 작가님께 조금 미안했어요.
부조화를 말하려고 했거든요.
저한테 이 소설의 느낌이 좀 그랬어요.
전야제님, 봄이나 가을에 어머니와 궁에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창덕궁, 창경궁도 좋은데
저는 종묘도 좋아하는 장소예요.
춘천에도 눈이 왔어요?
날씨가 춥지 않아 바로 눈이 녹아 완전 길거리가 질척 거려 걷기가 힘드네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4-11-28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제 바로 앞에 꽂혀 차례를 기다리는 책인데 한때 좋아하는 작가라 (아마도 아직도 이걸 읽고선 또 바뀔지도) 걱정되어서 아직도 못 펼치고 있습니다. 마침 며칠 전 뷔페가서 한 접시밖에 못 먹고 온 소갈머리 좁아진 인간이라 ㅠㅠ ㅋㅋㅋ

페넬로페 2024-11-28 10:13   좋아요 3 | URL
저도 김금희 작가 좋아해 더 기대가 컸는지도 모르겠어요.
열반인님 느낌은 다를수도 있고 다른 친구분들은 이 책을 선호했으니 한 번 읽어 보시길요.
˝어, 괜찮은데, 왜 그리 생각했지?˝라는 생각을 하며 읽을수도 있거든요.
뷔페가는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가면 그래도 여러 접시 먹고 오려고 해요 ㅎㅎ

달자 2024-11-28 17: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추천마법사가 오랫동안 추천해 주었지만 사서 읽지는 않았던...책인데그 이유는 뭔가 책 표지에서부터 이전의...김금희작가스러운 딱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비슷한 책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였어요 (논리 X) 제목이 살짝 SF라든지 판타지가 살짝 가미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보고서를 찾으러 과거로 떠난다든가... 암튼 그런 이유에서 읽지는 않았는데 페넬로페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창경궁에 대온실이 있는 지도 몰랐던 저...

페넬로페 2024-11-28 17:50   좋아요 2 | URL
책 뒤의 작가의 말에 저자가 20대때 창경궁과 창덕궁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참고 문헌도 엄청나게 많아요.
너무 많아 과유불급이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문화재를 수리하려면 그 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하는가 봐요.
이 소설은 그것을 쓰는 과정인데
여기에 많은 것이 가미되어 있어요.
보고서에 쓸 자료를 찾는 과정에 과거로도 가고 자신의 추억으로도 가더라고요^^

막시무스 2024-11-28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흐려져가는 단풍잎의 붉은색을 흰눈이 매워주니 분위기가 묘하네요!ㅎ 그래도 만두국은 겨울에 참맛이니 창경궁은 봄에 가시고 깡통만두는 겨울에 방문하시는게 어떠실까요?ㅎ

페넬로페 2024-11-28 22:11   좋아요 1 | URL
네, 안 그래도 뜨끈한게 넘 먹고 싶어요. 기회되면 가서 먹고 오겠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네요.
막시무스님,
감기 조심하시길 바래요^^

독서괭 2024-12-05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 작가가 욕심이 앞섰나봐요. 좀더 잘 가다듬어서 냈으면 좋았을 것을.
창경궁 사진이 멋지네요. 저는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ㅜㅜ
저는 창경궁, 하면 <토지>에서 창경원 산책 장면이 떠오릅니다. 인실이랑 오가타, 선혜랑 권오성이 만났던 것 같아요(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찾아봤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4-12-05 18:36   좋아요 1 | URL
작가가 조금 더 탈고의 시간을 가졌다면 더 좋지 않았나 생각 했어요.
창경궁은 고궁보다 유원지의 이미지가 많았는데,
15년쯤 전, 가을에 갔을 때 너무 좋아 요즘은 자주 가요.

토지도 읽어야 하는데ㅠㅠ
그러면서 매번 똑같은 구호를 오늘도 외쳐 보아요.
언젠가는 읽을거야!
 

















독서동아리(클래식)에서 2월부터 한 달에 한 권씩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있다. 한 작가의 전작읽기가 약간 지루하지만, 발자크의 소설이 워낙 방대하고 연결되는 부분이 많아 1년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어둠 속의 사건’, ‘골짜기의 백합’, ’사기꾼‘, ‘미지의 걸작’, 잃어버린 환상‘, ’루이 랑베르‘, ’나귀 가죽‘, ’사라진샤베르 대령‘ ’결혼 계약을 읽었다.

 

알려진 대로 발자크의 실제 삶은 자신이 쓴 소설의 내용보다 더 소설적이고 파란만장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유모의 손에 맡겨지고 오랜 기간 기숙학교에서 생활한 발자크는 부모의 정을 전혀 받지 못했다. 법과 대학에 다니면서 소송 대리인과 공증인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힌 발자크는 자신의 길이 글을 쓰는 것임을 깨닫고 칩거하며 희곡과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첫 작품인 희곡 크롬웰이 실패하자 부모는 다시 법조계 쪽으로 발자크가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가 그것을 거부하자 부모는 발자크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 그는 부모에게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돈이 충분해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필명으로 그 당시 유행하던 여러 소재의 대중소설을 엄청나게 써 댔다. 소설 공장처럼 찍어낸 그의 소설은 인기가 있었고, 발자크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발자크는 그 후 출판업, 인쇄업, 활자 주조업 등 사업에 손을 댔고, 손대는 족족 실패했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는 6만 프랑의 빚이 있었고, 발자크는 신이 그에게 주신 능력인 글을 써야만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만약 빚이 없었다면 발자크는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본명으로 출간한 첫 소설인 올빼미 당원결혼 생리학이 성공했고 죽을 때까지 빚과 함께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글을 썼다.

 

1799년에 태어나 1850년에 사망한 발자크 인생 전반에는 격변한 프랑스의 역사가 있다. 발자크는 자신의 소설에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인 것을 그대로 담아 <인간극>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90여 편의 소설이 들어 있고 등장인물이 25백 명 정도이다. 그 중 500명은 <인물재등장기법>에 의해 여러 다른 소설에 계속 나온다. 이 인물을 발견하는 것도 발자크 소설을 읽는 재미중 하나다.

 

[발자크가 활동하던 시기는 낭만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작가들은 아름다움, 숭고함, 열정을 노래했고, 이상적 사랑을 꿈꾸었다. 독자들은 빅토르 위고의 세계에서 사회악을 고발하고 맞서 싸우는 숭고한 영웅 장발장에 열광했다. 그러나 발자크의 세계에는 숭고함도 세상을 구원할 영웅도 없었다. 인간극은 모순덩어리인 진짜 인간들의 진열장이다. 그가 그린 세상은 명료하지 않다. 정답도 없고, 해결책도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종종 혼란스럽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발자크 문학의 정수다. 인간의 희망과 실제가 다르고 이상과 현실이 다르듯, 그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간단치 않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발자크의 위대함은 인간 본질에 대한 자각과 폭로에 있다. 그것이 바로 발자크의 현대성이기도 하다. 대놓고 돈을 숭배할 용기도 대놓고 경멸할 용기도 없는 현대인, 거짓과 위선과 기만을 감추고 사는 이들은 발자크가 묘사한 모순적인 인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목격할 것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서문에서]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며 계속 양가감정에 빠져있다. 그가 그려낸 세계와 입체적 인물, 문장의 표현이 대단해 소설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읽고 나서 여운이 별로 남지 않는 단점이 있다. 너무 사실적인 내용과 거의 모든 것이 설명 되어진 글이 소설적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그것이 소설로서의 더 깊은 의미를 얻는데 방해가 된다. 송기정 저자의 말대로 발자크는 현실의 자각과 폭로를 그대로 해주고 있고 독자 스스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로서의 역할이 조금 미미하다는 것에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다.

 

발자크는 그 시대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적나라하게 시대를 재연해주는 작가의 풍성한 글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다보면 200년도 지난 지금과 19세기 프랑스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물론 겉모양은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법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대를 정확히 읽어내고, 아니 앞서 나가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며 그것을 수많은 작품에 남겼다는 사실이 발자크의 위대함이다. 또한 그러한 면에서 발자크의 소설에서 지금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인식할 수 있다.

 

 

송기정의 오노레 드 발자크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둘 다 발자크에 관한 책이지만 성격은 다르다. 송기정의 책이 발자크 작품과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면, 츠바이크는 발자크라는 인물 자체에 더 집중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발자크 작품의 주요 무대인 파리에서 시작해 발자크의 역사관, 정치관, 과학, , , 철학 연구를 통해 발자크의 주요 작품을 소개하고 파헤친다. 오스카 와일드가 우리가 알다시피, 19세기는 대부분 발자크의 발명품이다라고 말했듯이 19세기 프랑스에 대해 모르고는 발자크를 읽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발자크 읽기를 위한 훌륭한 입문서이자 설명서이다.

 

인물 평전에 대해서라면, 츠바이크는 그 자체로 전설이다. 츠바이크는 발자크의 생애를 따라가며 발자크라는 인물을 흥미롭고 위대하게 만들면서 결국 자신의 글을 부각시킨다. 어느 순간 발자크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 속 인물로 착각하게 만든다. 츠바이크가 그려낸 발자크에 사실이 아닌 면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만큼 흥미진진하면서도 극적으로 발자크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을 드러낸다.

 

발자크 소설을 읽기 위해 이 두 책을 같이 읽기를 권한다.




내가 참여하는 <클래식 독서동아리>가 도서관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지원금을 받았다. 이때까지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올해 발자크를 읽고 있어 별 고민 없이 발자크 연구자이자 번역자인 송기정 선생을 모시고 발자크에 대한 강의를 듣기로 했다. 선생은 발자크의 여러 소설에 담긴 19세기 프랑스의 전반적인 배경에 대해, 특히 은행과 신용거래, 대혁명 이후의 돈의 흐름, 어음 사기와 채무의 사례, 돈과 결혼의 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근 번역작인 결혼 계약를 통해 그 당시 여성의 지참금 제도와 여성에게 불리한 여러 관습과 법에 대해서도 강의했다.

 

발자크 문학의 정수인 인간극은 모순 덩어리인 진짜 인간들의 진열장이다.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각과 폭로가 발자크의 위대함이다. ‘인간극의 인물들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에 국한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이것이 발자크의 현대성이다

 

이렇게 정리하며 선생은 강의를 끝맺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송기정 선생의 번역작 두 권에 사인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2017년 여름, 다른 도서관에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번역자인 안인희 선생의 강의를 6주간 들은 적이 있다.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내용으로 훌륭한 강의를 해주어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저기에 페넬로페가 앉아 있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송기정 선생과 독일어를 전공한 안인희 선생의 강의는 전문가답게 막힘이 없었고 열정적이어서 듣는 사람을 한 단계 더 지혜로운 인간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번역이란 단순히 다른 나라의 언어를 국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연구와 고민, 많은 배경 지식과 소양이 있어야만 잘 된 번역의 책을 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두 선생의 번역에 신뢰가 간다.

 

앞으로 계속 좋은 번역 해 주시기를 바란다.

특히 발자크와 츠바이크 책에 대한 번역을 많이 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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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1-25 0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츠바이크가 썼군요. 오래 전에 동생 책장에 꽂혀있던 책인데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이 담겼을까 상상만 했을뿐 읽지는 못했는데… 오래전부터 문학 강좌를 들어오셨군요. 번역자의 강의를 직접 들으셨다니, 알찬 강의였겠어요. 번역자는 아니시지만 전 로쟈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지요.

페넬로페 2024-11-25 09:31   좋아요 1 | URL
제 책장에도 광기와 우연의 역사 구판이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 않고 있어요.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뤄지네요.
번역자 두 분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이 저한테 좋은 기회였어요.
로쟈님의 강의도 좋았겠습니다^^

청아 2024-11-25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페님 혹시 검정색 셔츠?ㅎㅎㅎ 발자크를 비롯해 의외로 생전에 어려움을 많이 겪은 작가들을 접할때면 내가 뭐라고 글 쓰기를 힘들다 했나? 반성하게 되더군요.^^;
저는 페페님 독서모임 당연히 지원금 쭉 받고 계시는 줄 알았어요. 아무튼 기쁜 일이고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4-11-25 10:20   좋아요 1 | URL
놉, 반대로 흰색이예요 ㅎㅎ
그동안 지원금 받을 기회가 많았지만 회원들 모두 조용히 책만 읽기를 원해서 그저 책만 읽어 왔어요.
이번에는 리더이신 그레이스님과 다른 신입회원분께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셔서 저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편안히 강의 잘 들었어요.

네, 정말요.
발자크가 글을 쓰기 위해 5만잔 정도의 커피를 마셨다고 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도복 같은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의 인내심과 노력은 정말 따라갈 수가 없어요.
청아님, 감사합니다^^

stella.K 2024-11-25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흰색옷을 입으신 분이 몇분 계셔서 어느 분이신지..? ㅎ
이런 좋은 프로그램이 있었군요. 그레이스님이 리더로 섬기시고. 오래 전부터 그레이스님하고 페페님하고 어딘가 잘 어울리시는 거 같은데 이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ㅋ

페넬로페 2024-11-25 11:09   좋아요 1 | URL
앞쪽 입니다 ㅎㅎ
지금보니 사람의 뒷모습도 변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번에 찍은 사진의 뒷모습과 2017년의 뒷모습이 다르네요.
훨씬 건강하고 젊게 보여요.

그레이스님과는 같은 책을 오래 읽어오고 개인적으로도 자주 시간을 가져 맘이 통해요^^

coolcat329 2024-11-26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페넬로페님 부럽습니다.
저도 이런 독서모임 하고 싶네요. 정말 멋진 독서 동아리에요. 페넬로페님의 진지한 독서자세 볼때마다 배우고 갑니다.
저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제가 발자크를 좋아하게 만든 1등 공신입니다. 저도 츠바이크 책 개정판으로 새로 나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메리 스튜어트. 어제의 세계 이런 책들요.

페넬로페 2024-11-26 13:01   좋아요 1 | URL
쿨캣님!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츠바이크 평전이 정말 발자크를 읽고 싶게 만든 책이 확실합니다
메리 스튜어트, 어제의 세계도 찜 해 놓겠습니다^^
 














1. 지옥을 재독하다

 

2년 전(2022), 그 유명한 단테의 신곡을 처음 읽었을 때, 신곡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가는 단테처럼 겸손했고 공부하는 자세였다. 오랫동안 도서관 독서동아리에 참여하여 주로 클래식을 읽다보니 고전에 대한 경외심이 나에게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노트에 1곡부터 34곡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며, 1원부터 제9원까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각기 어떤 벌을 받는지 자세히 필사하며 읽었다.

 

2년 후(2024), 단테의 신곡을 재독하며 그때 필사한 노트를 꺼내보았다. ‘참 열심히도 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용을 많이 잊었지만, 읽다보니 다시 기억났고, 주석의 해설 역시 이해가 잘 되었다. 지옥을 재독하며 계속 든 생각은 단테가 설계한 지옥 구조물의 형태와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떤 죄가 어떤 단계에서 무슨 벌을 받는가가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이유이다. 신곡에서 내가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신곡이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 신곡 강의에서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클래식에서 배우는 것,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휴머니즘즉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체득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단테(클래식)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신에 의한 심판이지만, 내가 느낀 지옥은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지옥을 순례하는 단테역시 인간적인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고 있다.

 

각성, 새로운 출발, 또는 어떤 완성을 향해가는 길에서 인간은 인간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를 짊어지고 나아가야만 무엇이든 깨닫고 변화하게 된다. 그것이 지옥이다.

 

나는 죄를 짓고, 반성하고, 또 죄를 짓고, 반성한다. 단테가 상세히 묘사한 지옥을 생각하고 거기에 갈 생각을 하면 무섭지만 그래도 죄를 짓는다.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2. 고전의 유용성


작년, 딸아이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혼자서 일정을 짠 딸아이는 고전을 열심히 읽는, 신곡을 읽은 엄마를 위한 이벤트를 하나 준비해 주었다. 마침 우리가 파리 여행을 할 때, 영국 로열 발레단이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에서 단테의 신곡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딸아이는 발레 공연을 미리 예매했고, 우리는 영국 로열 발레단의 발레를 관람할 수 있었다. 엄마를 위한 딸아이의 마음은 좋았지만 최대한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 딸아이는 비교적 값이 싼 무대에 가까운 박스석을 예매했다.

 

박스석에는 우리 둘 말고 외국인 모자가 같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 되는 남학생은 발레 시작 전과 지옥, 연옥을 지나는 두 번의 인터미션동안 내내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니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남학생의 엄마는 그 책을 수없이 읽는다고 덧붙여 말해주었다. 반면 나의 딸아이는 발레를 보기 전 신곡이 어떤 내용이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단테,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라는 세 인물과 간단하게 신곡의 내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공연장 천장이 샤갈의 멋진 그림으로 되어있는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는 분위기가 정말 클래식했고, 평일 낮이었는데도 관람객이 꽉 차 있었다. 신곡을 읽었기에 발레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단테,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값이 싼 무대에 가까운 박스석에 앉아 무대 전체의 흐름을 잘 볼 수 없어 아쉬웠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얼굴과 발레는 바로 직관할 수 있어 좋았다.

 

신곡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딸아이와는 계속 신곡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지만, 신곡 책에 빠져있는 남학생의 엄마는 그저 무심하게 앉아있어야만 했다. 이럴 때 신곡을 읽은 나는 유용한 사람이었다. 고전 읽기는 한 번씩 사람을 유용하게, 쓸모 있게 만든다.



 












3. 베르길리우스


로마의 대표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로 새로운 로마 건국 신화를 창작한다.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트로이아 사람 아이네아스는 이탈리아에서 조국을 재건하고자 한다. 아이네아스가 트로이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로마를 세우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여정에 관한 시)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시의 첫머리에 호메로스와는 달리 무사여신에게 스스로 내가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한다.

 

[단테는 신의 노래를 그대로 번역한 호메로스가 아니라 베르길리우스의 입장, 즉 스스로 미토스(신화)를 창조하면서도 뮤즈의 여신에 의지해 노래한 위대한 시인을 모범으로 삼는다.

단테의 신곡은 유혹에 무릎을 끓을 것 같은 패배자의 신분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곡의 출발점은 호메로스보다 베르길리우스에 가깝다.

-p.69. p.84, ‘단테 신곡 강의’]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신분이다. 그에게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단테와 아이네아스의 공통점은 온갖 시련을 극복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완성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테가 길잡이로 베르길리우스를 내세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다.

 

단테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이름 앞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다. 지혜의 바다, 자애로운 아버지, 선한, 현자, 믿음직한 동반자, 모든 흐린 시선을 고쳐 주는 태양, 친절한 스승님, 어진 스승님.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데리고 지옥을 순례하며 힘들어하는 단테를 위로하고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갈 길이 바쁜데도 죄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단테를 혼내기도, 재촉하기도 한다.

 

 

 

같은 독서동아리 회원인 비아는 단테의 신곡을 읽고 나서 나에게 주는 생일 카드나 다른 축하카드에 꼭 나의 베르길리우스에게라는 문구를 써 준다. 말도 안 되고, 황송하며 감사하다. 어떤 동행에서든 길잡이는 결코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나이와 헤쳐 온 삶을 떠나 길잡이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결국 친구가 되는 것이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선하고 책임을 다하는 영혼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계속 남기를 바란다.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단테를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는 저승 세계로 안내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무사히 지옥을 빠져나와 연옥산을 평온하게 바라본다.

 

 

4.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지옥 제5곡의 둘째 원은 음란함과 애욕의 죄인들이 벌 받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벌을 받는다. 프란체스카는 라벤나의 귀족으로 리미니의 귀족 잔초토와 결혼한다. 잔초토는 불구의 몸이어서 결혼식장에 동생 파올로를 대신 내보낸다. 프란체스카는 파올로를 사랑하게 되고 잔초토에게 발각되어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단테는 비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단테는 그 영혼이 너무 가여워 정신을 잃고 죽은 시체가 넘어지듯이 쓰러진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지옥에서 계속 붙어 다닌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 지극하고 억울해서 지옥에서나마 같이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본문에서 받은 느낌은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도 고난을 겪으며 같이 다닌다면 계속 행복할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나 영혼이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별로 많지 않다. 운명적인 것에 훨씬 더 좌우된다. 이래저래 인간이나 영혼은 가련하다. 단테의 마음과 쓰러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5. 지옥의 이미지-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단테는 지옥을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선홍색 불길, 영원한 불, 불그스름하게 물들인다, 불비, 온통 불타고 있다, 불꽃, 불의 도시, 불의 강.

 

지옥을 읽으며 지난여름에 봤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계속 연상되었다. 마틴 에이미스 실화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지옥과 비슷하게 불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아우슈비츠의 소장인 루돌프 회스 중령의 사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장이 붙어있다. 이 영화는 수용소 안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회스의 사택과 그들의 가족의 편안함만 보여준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들리는 소리로, 굴뚝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만 그 안의 상황을 보여준다.

 

나치는 인종청소를 위해 수용소로 계속해서 유대인을 보내고 가스실에서 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루돌프 회스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하루에 최대치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을 불태울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더 그런 생각에 몰두한다. 어떻게든 많이 죽이고, 많이 태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히틀러가 원한 인종 청소를 원활히 진행할 수 있으니까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을 불태운다.

 

잔인하거나 직접적인 장면이 전혀 없었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지옥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는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고, 누군가는 왕과 같은 삶을 살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것을 인식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는 태도였다.

 

내가 단테의 지옥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인간의 죄 중 기만이었다. 이 단어의 뜻이 남을 속여 넘기는 것이라는 짧은 것이라 단순해 보이지만, 이 속에 내포된 의미는 수없이 많다. 타인에게 마음으로, 물리적으로 인간은 너무 많은 기만의 죄를 범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지는 그런 기만이 섬뜩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에는 평범한 폴란드 마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용소 밖으로 나가 노동을 했다. 영화에서는 밤에 한 폴란드 소녀가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이 노동을 하는 장소에 사과를 살짝 놓아두고 온다.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연옥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산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듯, 지옥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소녀처럼 작지만 용기 있는 온정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쉽게 보이지만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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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1-21 1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테신곡에 관해 쓰신 내용도 정말 좋구요, 더욱이 저는 오페라 가르니에의 샤갈 천장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것 같아요!ㅎ 눈 호강했습니다!

페넬로페 2024-11-21 19:00   좋아요 1 | URL
네, 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더라고요.
단테 신곡 지옥 읽었고
이제 연옥 시작했습니다 ㅎㅎ

전야제 2024-11-21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의 베르길리우스에게‘라고 불리우는 페넬로페님도, 그렇게 불러주시는 비아님도 정말 멋집니다. 단테의 신곡도 읽지 않은 고전인데, 이 서평을 읽고 저는 엄청난 숙제가 또 생겼습니다. 하지만 신곡을 읽을 생각에 설레기도 합니다ㅎㅎ 따님께서 어머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저에게도 생생히 느껴집니다. 여행 일정도 다 계획하시고, 신곡을 읽은 어머님을 위한 발레 공연까지 예매하시다니. 저도 따님께 배워야겠어요ㅎㅎ 마지막 지옥의 이미지를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함께 제시해주신 글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요. 특히 ‘기만‘이라는 것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조종하는 가스라이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경계해야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4-11-21 23:23   좋아요 1 | URL
자격도 되지 않는데 비아님이 그렇게 말해줘서 항상 고맙죠. 글로도 썼듯이 길잡이는 양방향인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신곡이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책의 주석을 참조하고 조금씩 따라가면 될 것 같아요.

여행에서 딸아이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취향대로 다니지 못했을 것 같아요. 지금도 엄청 고맙고, 계속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 완전 강추입니다.
메시지가 너무 좋았어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전야제님,
감기 조심하세요^^

꼬마요정 2024-11-21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따님 정말 멋집니다. 엄마를 위해 발레 공연을 예매하고... 샤갈의 그림이 천장화로군요. 뭔가 있어보입니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좋아보여요!! 근데 왠지 신곡을 공연할 땐 천지창조 이런 거 그림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ㅎㅎㅎ

아, 저도 읽을 때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이야기 너무 슬펐어요. 이런 것도 죄인가 했네요. 속인 게 누군데... 그나저나 ‘나의 베르길리우스‘라니... 이토록 장엄한 찬사가 있을까요. 정말 멋져요!! 불러주시는 분도 멋지고 말입니다. 아아 이 페이퍼는 온통 멋짐이 가득하군요!!!!

페넬로페 2024-11-21 23:27   좋아요 1 | URL
그림에 조예가 깊지 않았지만 천정화에 눈이 먼저 가고, 느낌으로 샤갈의 그림인 것 같더라고요. 멋졌어요.

저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불쌍했어요. ㅠㅠ

저는 자격이 되지 않은데 그렇게 불러 주는 분이 착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는 제가 ‘나의 베아트리체여‘ 라고 불러 주겠습니다^^

다락방 2024-11-22 0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님.
같이 읽기 하니까 지금 읽는 부분에 대해 다른 분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제가 이미 읽은 부분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읽었고 제가 아직 읽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기대하며 읽게 됩니다.
게다가 나의 베르길리우스 라니요. 이건 단테의 신곡을 읽은 자들만이 알 수 있는거잖아요. 정말 짜릿합니다!!

페넬로페 님, 연옥과 천국편에 대해서도 이렇게 양질의 글 적어주시길 기다려봅니다. 후훗.

페넬로페 2024-11-22 13:51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빙고, 빙고!
같이 신곡을 읽었다는 그 교감이예요. 그게 중요하죠~~
정말 짜릿한 것 맞아요.
저는 이제 연옥으로 갔어요.
부지런히 읽겠습니다^^

잠자냥 2024-11-22 14:53   좋아요 1 | URL
˝저는 이제 연옥으로 갔어요.˝에서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나도 11월 가기 전에 읽어야 하는데;;

그레이스 2024-11-23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좋아요
다시 리마인드 중입니다.
언제 읽어도 새롭게 읽히는 고전인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4-11-23 17:09   좋아요 1 | URL
재독하니 의미가 다르게 다가와요.
그리고 좀 더 쉽게 읽혀 좋아요.
그레이스님은 저의 베아트리체 이십니다♡♡♡

그레이스 2024-11-23 17:14   좋아요 1 | URL
에에엥~~?
반사! ^^
 
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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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상상하고 완성시킨 지옥이란 구조물은 문장과 그 의미가 깊이 어우러져 그것이 문학(literatura)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어쩌면 지옥은 사후세계가 아닌 지금 우리가 있는 세상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신을 향한 구원, 귀향, 나에게로의 길 등 끝은 달라도 시작은 여기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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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6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 신곡은 주석이 책 끝에 있어 읽기가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을 4개로~~
신곡만 고려했다면 당연히 5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