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 책이 들어있는 책을 좋아한다. 책 속에 들어있는 책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작가가 걸어온 각각의 인생과 닮아 있어 내가 지적할 사항은 아니다. 다만 내용이 허술한 건 싫다. 다른 책 여기저기에서 문장만 잔뜩 빌려와 짜깁기를 해 놓은 것이나, 그 문장에 자신의 경험과 말을 살짝만 올려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이 생산했다고 착각하는 도둑 심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는 그런 내 기준에 맞는 책이다. 인용한 책의 내용과 선생 자신의 말과 생각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뭔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든다. 저자 소개란에 씌어진 끊임없이 읽고 쓰는 사람답게 본래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과 세계를 이해하는 통찰이 뛰어나다. 엄청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젊은 시절에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책을 재독하며, 그때의 느낌과 지금 다르게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오래된 지도를 다시 보다라는 문장이 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잘 설명해준다. 연배는 다르지만, 내가 겪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선생과 비슷해 이 책에 소개된 책이나 저자의 말에 많이 공감했다. 뜬금없이 옛 생각이 나기도했다.

 

[지금까지 내 삶에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이 책들은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들었던 것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독자도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p.7]

 

이 책에서 반가웠던 건 언제나 나에게 1순위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여기서도 첫 번째로 소개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의 책임이 가난한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을지 모른다는(p.17~18)’는 생각은 여전히 나도 가지고 있다.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선생의 생각도 같다. 선생은 재독하며 두냐가 다시 보였지만 나에게는 라주미힌이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지나간 시대의 지식인과 반골을 대변하는 고유명사였다. 최인훈의 광장은 필독서였다. 세미나를 이끄는 선배들이 광장에서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나에게 광장은 슬픈 사랑과 허무로 읽혔다.

 

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여겨지는 고전이 나에게 몇 권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맬서스의 인구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모두 읽다가 포기한 책들이다. 대학 교양 수업 시간에 무수히 언급된 책들이지만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언젠가 완독할 수 있을까?

 

사마천의 사기는 몇 년 전에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권력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휘의 이면에 인간의 참혹한 비극이 놓여 있음(p.157)’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사기열전과 세가에 나오는 인물은 거의 다 끝이 비극적이다. 온갖 영화를 누리던 사람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권력과 인생의 무상이 절절하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후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끝내 한신을 죽이고, 유방의 후궁인 척 부인의 손과 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병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살게 하며 척 부인의 아들이 그것을 목격하게 한다. 내가 사기를 읽었을 때도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는데 유시민 선생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도 이 부분을 인용해 놓았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름의 잃어버린 명예는 꼭 읽고 싶은 책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 부와 빈곤, 사회적 계급, 언론의 횡포는 여전히 인간의 보편적 삶과 행복을 침해하고 있다. 그것은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더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다. 오래전에 경고된 사회악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의기소침해지고 허무주의에 빠진 나에게 유시민은 이렇게 위로한다.

 

[헤드라인이 신문의 일상적 무기라면, 작가에게는 때로 소설이 무기가 될 수 있다.

p. 284]

 

내가 소설을 열심히 읽는 이유이다.



 


 














청춘의 독서에 소개된 책 중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있어 이번 기회에 읽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2012, 다른세상)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소련과 노르웨이(스웨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두 나라 사이에 포로 교환이 있었다. 소련 쪽에서 풀려난 노르웨이 포로들이 노르웨이 진영으로 넘어오자 동료들은 반갑게, 따뜻하게 그들을 안아 주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쪽에서 풀려난 소련 포로들이 자기 나라 진영으로 갔을 때, 그들은 바로 배반자로 낙인찍혀 비난받아야 했고 감금 상태에서 말도 안 되는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19422, 이틀 동안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네 사람의 동료와 함께 탈출한다. 그들은 숲과 늪을 헤매다가 우군 부대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즉석에서 사살되고, 한 사람은 부상이 깊어져 죽었으며, 슈호프와 나머지 한 명은 독일군 포로였다고 이실직고함으로써 괘씸죄에 걸려 강제노동수용소에 가게 된다. 8년째 복역 중인, 이빨이 반이나 빠진 슈호프는 40세가 되었고 아직 복역기간이 2년이 남아있다. 그가 갈 다음 행선지는 유형지다.

 

상식적으로 감옥과 수용소는 죄를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만 여기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슈호프와 그와 같이 수용된 수감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갇혀있다. 슈호프가 들어올 때는 무조건 10년 형을 언도받았지만, 1949년 이후로는 일단 걸려들기만 하면 25년 형을 언도 받는다. 그들은 진짜 죄인인가?

 

몹시 추운 날씨에 딱딱한 빵 한 덩이와 멀건 수프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자유를 잃은 채 그들은 살아간다. ‘밀림의 법칙만이 통하는 수용소에서 그저 하루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눈치와 비굴함을 가지고 혹독한 노동을 해야만 한다. 뭔가 재수 없게 걸려들어 영창이라도 가게 되면 평생을 두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은 악화되고 결핵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 슈호프에게는 하루를 무사히 지내야 하는 소명만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평범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상을 가졌거나 반역자가 아니다. 수용소의 하루를 통해 본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족들의 생활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절대 자신에게 편지와 보급품을 보내지 말라고 하는 양심 있는 가장이다. 그런 사람에게 가해진 이유 없는 국가의 폭력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험을 토대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소설은 분량이 길지 않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슈호프를 비롯한 여러 군상의 인간들의 하루에 스탈린 시대 소련의 실체가 압축되어 있다. 사실적이고 담담해 보이는 이 소설에 솔제니친은 엄청난 풍자와 고발,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슈호프가 모르타르가 금방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벽돌을 쌓는 장면을 인용한다. 그런 슈호프를 보며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강제 노역에 동원된 죄수가 노동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난 이 부분에서의 유시민의 해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좋은 쪽으로 아니면 확대 해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작업량을 채워야 하기에, 영창에 가지 않기 위해서, 빨리 작업하지 않으면 모르타르가 얼어버리므로, 벽돌 쌓기가 비뚤어지면 다시 쌓아야하기에 슈호프는 악을 쓰며, 열성적으로 몸을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잃고,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사람에게 존엄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극한 환경 속에서 정신이 육체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현상은 드물다. 설사 그렇더라도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복으로 마감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의 하루가 비극인 것이다. 행복은 슈호프의 허상이며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다.

 

[슈호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 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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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3-1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넬로페님의 해석에 완전 공감합니다.
노동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몰입한다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감상에 취해 타인을 또 한번 감옥에 가두는 일 같아요.
어떻게 타인의 행복을 함부로 가늠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잣대로 감히 타인의 처지를 평가내리는 일을 경계하는지라, 이 글이 너무 와 닿습니다.
페넬로페님의 감수성의 기원이 바로 소설에 있었군요!
소설에 관해 글을 쓰실 때 얼마나 열정적이신지 저에게도 느껴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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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월부터 20253월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불멸의 화가 반 고흐><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반 고흐전은 그동안 32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많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그의 작품을 제법 감상했기에 이번에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러갔다.

 

카라바조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는 화가였다. 그의 본명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이며 카라바조는 화가의 이름이 아니라 밀라노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베르가모 지역의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이름이 같아 그와 구별하기 위해 출신 지역인 카라바조로 불리게 된 것이다.

 

1571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카라바조는 성격이 별나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쳤다. 소아성애이자 술버릇이 나쁘고 다혈질인 그는 자주 폭행사건을 일으켰고, 1606년에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카라바조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 후에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곳을 전전했고 결국 로마 남쪽의 한 해변에서 객사하고 만다. 이런 이야기들이 정확하지 않거나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카라바조가 불한당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17세기에서 18세기 유럽의 미술, 건축, 음악, 문학 등을 아우르는 예술 양식인 바로크(포르투갈어로 비뚤어진 모양을 한 기묘한 진주라는 뜻)의 출발은 성소에서 그림과 조각을 몰아낸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에 맞선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종교개혁의 공표였다. 그들은 오히려 신심을 고양시키고 로마(가톨릭)의 우세를 위해 그림, 장식, 문양을 장려했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한다.(나무위키)’ 그러한 특징의 바로크 미술은 카라바조에 의해 시작되었고, 루벤스와 램브란트가 그 뒤를 이었다.

 

[카라바조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신비롭고 혁신적인 화가이다.

카라바조는 회화에서 뒷날 바로크 예술이라 이름 붙는 시기의 정점에 있었다.

그는 직설적인 언어와 극적 효과에 대한 탐구가 결합되어 빛과 어둠의 대조에서 오는 순간적인 긴박감을 그림에 부여했다.

- 카라바조 1571~1610, p.7, 47]



-“카라바조 그림에서 조명은, 위에 달린 단일 광원으로부터 반사광 없이 빛을 뿌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치 검정으로 도배된 방안으로 단 하나의 창문을 통해서 빛이 유입되는 것 같았다.”

-줄리오 만치니-

 

빛의 대가답게 카라바조의 그림은 대부분 배경을 어둡거나 검은색으로 처리하고 사람이나 사물만이 채색되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한 줄기의 빛이 포인트가 되어 강조하고 싶은 곳에 머물렀다. 배경이 어두운 탓에 시선이 분산되지 않아 엄청 집중이 잘 되었다. 한 그림을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종교화가 많아 가톨릭교도인 내가 생각할 것이 많았고, 경건하고 경외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미켈란젤로 메리시

 

곱슬머리 소년의 모습에서 카라바조의 얼굴이 보인다. 귀 뒤에 꽂은 꽃은 두 개의 잎사귀가 달린 흰 장미는 사랑의 열정을 상징한다. 소년의 오른쪽 눈꺼풀 아래 고통의 눈물이 보인다. 개인 소장인 이 작품 외에 다른 두 버전이 있다.

 

[도마뱀에게 손끝을 물린 순간, 소년의 놀란 표정은 영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과 결부된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처음 제시하였다....초록색과 갈색으로 칠해진 과일들은 오직 빛의 반사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바조, p.84]


-<성 토마스의 의심>-

 

예수는 스승이 부활한 사실을 믿지 못하는 제자 토마스에게 창에 찔린 자국에 직접 손을 넣어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체포>-

 

배신자 유다는 그리스도에게 입맞춤으로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린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 유다, 성 요한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리면서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을 표현했다. 옆모습을 보이며 도망가는 성 요한은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병사들의 검은색 갑옷을 번쩍거리게 하는 빛은 화면 전체에 역동성을 더해 주는 동시에, 인물이 왼쪽으로 치우친 구도에서 균형을 맞춰 준다.

- p.123]


-‘조토두초<유다의 입맞춤>, ‘난처한 미술 이야기 5, 양정무, p. 148

 

배신자 유다의 입맞춤은 워낙 유명해 같은 소재로 여러 화가가 작품을 남겼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살아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골리앗의 머리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윗이 들고 있는 칼날에 적힌 글씨는 겸손함은 오만함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p.150]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프란체스코 바사노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와 대화하는 이 장면에서 마르타는 삶의 기쁨에 전념하는 여인으로, 마리아는 관상하는 삶의 모범적인 예를 상징한다. 조르조네 화풍의 풍경에서 빛은 구름 낀 하늘을 환히 밝히며, 이 순간의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다.

-전시 설명 중에서]

 

성당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약간 울분을 토한 부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등장하는 구절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두 자매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르타는 하루 종일 힘들게 집안일을 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의 시중만 든다. 이에 마르타는 불만을 느끼지만 도리어 예수님은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는 느낌이라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같이 성경 공부했던 멤버들은 거의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들이라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물론 이 구절이 전하는 본래의 의미는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경청하라는 것인데, 다들 마르타에 빙의되어 마치 우리가 그런 일을 겪은 양 억울해하며 흥분했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마르타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생각하니 여전히 마리아가 얄미워 보였다.



바로크 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그림에 허무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러 정물 작품에 해골이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살면서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어차피 끝은 죽음이니 그냥 제멋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 후의 세계를 의식해야 하는지 언제나 확실하지 않다. 카라바조는 현재를 선택한 건 아닐까? 그러다 매번 눈물과 회한으로 구원을 기도하며 성 프란체스코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황홀경을 그린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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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04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술의 전당에 카라바조 그림 보러 갔다가 카라바조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을 쳤는데 사람들이 숨겨줬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아니 그건 그 전에 읽었던 책에서 알게된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게 참 의문이더라고요. 어떻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숨겨줄까? 그게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는 가능했던 것인가? 이래서 그림을 보면서도 내내 ‘살인자였는데‘ 하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숨겨주었다면 그 살인에 명분이 있었던걸까? 막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아 카라바조에 대한 평전을 읽어봐야겠다 생각을 했었는데요. 결국 책만 검색해보고 사지도 읽지도 않았지만. 그런데 소아성애라고요? 소아성애는 명분이 없으니 이해하기를 포기해야겠어요.

페넬로페 2025-03-04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 카라바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어요. 카라바조에 관련된 책은 그의 연대기에 따라 행적과 그림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어요.
이 화가에 대해서는 부풀려진 얘기도 많고 확실하게 검증된 것도 아니어서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요. 그 시대는 수업도 도제식이고 예술가가 후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살인을 해도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에 대한 도덕적 평가보다 지금은 거의 그림에 대한 평가만 있는 것 같아요^^

hnine 2025-03-04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카라바조에 대한 영화를 두편이나 상영하고 있어서 보러갈까 하고 있던 참이랍니다. 그중 한편은 말씀하신 살인사건에 대한 것이더군요.
양정무님의 미술이야기 5권에 카라바조 이야기도 나오나요? 저도 가지고 있는 책인데 못찾았어요.

페넬로페 2025-03-04 13:50   좋아요 0 | URL
카라바조 전시가 고흐전에 비해 엄청 한산해서 쾌적하고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어요.
저는 그림들이 대체로 마음에 들었어요.

양정무의 책에는 카라바조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저는 예수에게 입맞추는 유다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비교하기 위해 이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로크 예술에 끌리더라구요^^
처음 카라바조를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분노조절 장애가 아니었나 했습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게 인상깊었던 카라바조의 작품은 골리앗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작품이예요.
제가 갔을 때는 관람객이 많았었는데...

페넬로페 2025-03-04 14:51   좋아요 1 | URL
처음에는 카라바조라는 화가가 궁금해 갔었는데
저도 완전 바로크 미술에 빠져 버렸어요. 한 작품마다 오래 멈춰 서 있었어요.
카라바조의 작품 모두 좋더라고요.
느낌인진 몰라도 다른 화가보다 카라바조가 좀 더 낫다는 편견도 가졌습니다 ㅎㅎ
그림 보면서 같이 간 언니에게 성경에 대해 설명하는 재미도 쏠쏠하더라고요 ㅎㅎ
미술관 전시는 복불복인 것 같아요.
비엔나 1900도 제가 갔을땐 한산했거든요^^

바람돌이 2025-03-04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낙에 강렬한 그림을 그리고 재주가 출중해 교황이 그를 많이 아꼈어요. 그래서 온갖 사고를 쳐도 다 넘어갔다죠. 살인도 아마 제 기억에는 술먹고 싸우다가 그런걸로 들어던듯.... 결국 도망을 갔는데 그 후에도 계속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간절하게 보내고 하다가 결국 객사했다는 기억이 나네요. 그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츠바이크의 책에서 읽었던거 같은데 또 기억이 가물가물..... ㅠ.ㅠ

페넬로페 2025-03-04 23:15   좋아요 1 | URL
테니스를 치다가 상대방이 속임수를 썼다고 욱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고요. 그를 돕던 실력자들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몰타 섬의 감옥에서 탈출했어요.
츠바이크의 어느 소설인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림만 본다면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정말 좋더라고요.
확실히 눈에 띄어요^^

희선 2025-03-05 0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가 램브란트보다 먼저였군요 빛의 화가라는 말 램브란트 이름 앞에서 본 듯도 합니다 성격이 별났군요 카라바조는 예전에 이름만 조금 들어봤네요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은 별로 안 봐서... 본래 이름이 미켈란젤로였다니, 미켈란젤로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했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5-03-05 08:2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름 정도만 아는 화가였는데 전시회가 있어 다녀왔어요. 램브란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림이 좋았어요^^
 














딸아이가 어렸을 때(4살이나 5살 즈음) 구립 도서관에서 무료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참여해 종이로 뭔가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소란스런 분위기에서 작품이 하나씩 완성되어 강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강사는 우리들에게 탁자에 남아있는 자투리 종이를 찢어서 소리 지르며 위로 날리라고 했다. 강사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깜짝 이벤트를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지도 않던, 갑자기 들어온 강사의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은 기쁘게 소리 지르며 종이를 찢고 흩날렸지만 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감각을 느끼거나 즐겁지도 않았던 그 날의 내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딸아이는 아마 내 옆에서 종이를 날렸을 것이다. 난 딸아이가 종이를 찢고 날리는 것을 도와주며 막막하게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한강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는 내내 그 날이 생각났다. 이 소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껍데기와 그 속을 들여다보는 내용이라 그런 것 같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 날의 느낌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로 내가 왜 그랬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가 너무 억세고 굵어 그것을 제거하고 내 속을 볼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아 나에게 종이를 찢고 흩날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남들이 보기에 동정을 느낄만한 지독한 상처가 별로 없는, 그저 하루를 평범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이 세상은 만만치 않다. 나를 다독거리며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더 많은 껍데기를 쌓아 올리며 버티고 나를 구슬리며 괜찮다고 자족하며 산다. 이러다 우리는 영영 속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예술 작품으로 시작된다. 조각가인 장운형은 사람의 신체에 석고를 입혀 그것을 떼어내는(라이프캐스팅) 작업을 한다. 글을 읽으며 그가 하는 작업을 상상해본다. 석고를 개어, 뜨고 싶은 신체에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석고는 굳으면서 피부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으로 점점 뜨거워진다. 뜨겁게 느껴지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다. 석고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끌로 신체의 선을 따라 절개해 떼어낸다. 몸의 껍데기는 주름과 터럭의 자국까지 남길 정도로 정교하지만 속은 시커멓게비어있다.

 

[결국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空洞)이었는지도 모른다. -p12]

 

어떤 형식이든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장운형은 큰 상처가 있어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의 몸을 집요하게 석고로 라이프캐스팅하기 원한다. 속을 보고 드러내기 위해 먼저 자신의 껍데기를 직시하게 한다. 겹겹이 쌓아 단단해졌다고 여겨진 껍데기는 사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허울이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조용히 뒷모습을 보이는 순간(p.270)’ 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껍데기를 깨부수며 안을 보기를 원했던 장운형은 E에 의해 자신의 몸이 라이프캐스팅 될 때 견디기 힘들어 한다. 공포와 노여움을 느낀다. 끈질기게 타인의 몸을 뜨기를 원했던 그는 정작 자신의 껍데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사람의 것 같다(p.312)’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몸이 고스란히 프린팅된 것의 이물감과 난처함으로 LE, 장운형은 껍데기를 깨부순다. 여태껏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몸에 감싼 채 살아온 집착은 허탈함만을 남긴다. 동시에 뭔가로 부터 꺼내어진 그들은 자유를 얻는다.

 

장편인데도 이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치밀하다. 한강 작가가 지금도 계속 붙들고 있는 폭력과 상처,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으로 가는 여정이 여기에도 있다. 여러 에피소드로 연결된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좋았다. 읽는 재미도 있었다. 다만 마지막 E 부분이 약간 평범하고 신파적이기도 해서 아쉬웠다.

 

이 소설에는 채식주의자의 전편 정도로 여겨질 만큼 불편한 방식도 들어있다. 한강 작가 특유의 그 방식 말이다. 작가의 그 방식에 불편을 느끼는 독자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을 질책하거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에 반대한다. 예술에서의 소재와 방식은 예술가의 권한이자 독창성이기 때문이다. 작가마다의 고유한 방식을 존중하고 싶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2~313]



 

 











그대의 차가운 손L은 어릴 때의 상처로 인해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여성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먹기 시작한 음식으로 살이 찌고 그것으로 성폭력은 벗어났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갇히게 된다. L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살을 빼려고 한다. 강박은 L을 피폐하게 하고 그녀를 폭식증 환자로 만든다. 10분 동안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고 목구멍에 주먹을 넣어 토한다. 거기다 하제까지 사용한다.

 

언젠가 지인과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그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살집이 있는 어떤 여자가 단팥빵을 먹으며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인은 저렇게 뚱뚱하면서도 어떻게 단팥빵이 넘어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난 그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침묵은 아마 긍정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평소 계속해서 먹어대는 먹방을 싫어하고 살이 찌면 당연히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나도 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아니타 존스턴의 달빛 아래서의 만찬을 통해 중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배고파서,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음식은 들어온다. 몸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몸의 한 부분은 중독되어 있고 한 부분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대개는 이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한다. 상실은 너무 아프고 위로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이러한 말들이 L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 맥락들과 이어져 있는 것 같다.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공부와 나의 각성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인터미션을 포함해 230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굳이 이렇게도 긴 러닝 타임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의도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결국 라즐로 토스라는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려면 그가 거쳐 온 생의 여정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잘 설명하고 알려주기 위해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라즐로 토스>의 삶엔 여러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내는 개인이 존재한다. 유대인, 예술가, 건축가, 홀로코스트, 이민자, 미국 자본주의와 백인 권위주의에 의한 폭력, 시오니즘, 마약 중독자 등이다. 이 모든 것이 그를 형성한다. 두꺼운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라즐로 토스의 아이덴티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통째의 삶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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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점점 타인을 이해하는게 어려워져요. 타인을 이해한다는건 정말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알지 않으면 함부로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5-02-26 00:0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이건 관심이나 측은지심의 문제와는 좀 다른건데, 그냥 섣불리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5-02-25 2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한강 작가님 좋아하는데 노벨상 수상 이후 약간 멀어진 느낌입니다 ㅜㅜ 노벨상 타시기 전에 많이 읽었어야 하는데 ㅡㅡ <그대의 차가운 손> 줄거리가 흥미롭네요. 조각=껍데기 라는 소재라니~!!

제가 요즘 심리적 허기가 생겨서 뭔가를 많이 먹나 봅니다...

페넬로페 2025-02-26 00:08   좋아요 3 | URL
한강 작가님 노벨상 수상 기념으로 읽은 책은 재독하고, 읽지 않은 책은 읽어 보려고 해요. 내용을 떠나서 문장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모국어로 읽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 넘 좋아요.

저도 오늘 10시 넘어 라면을 먹었어요. 조금씩 먹는 것 같으면서도 모아보면 엄청 많은 것 같아 고민입니다^^

2025-02-2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6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2-28 0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편은 이 책 하나 남았어요^^

페넬로페 2025-02-28 10:36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저는 올해 천천히 하나씩 읽어 보려고 해요^^

서니데이 2025-02-28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230분이면 재미있다고 해도 길어서 부담될 것 같아요. 시간이 길면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내일은 삼일절이라 연휴가 되겠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3월에도 좋은 시간 되세요.^^

페넬로페 2025-02-28 18:42   좋아요 1 | URL
영화가 괜찮았고 재미도 있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너무 길어 힘들었어요.

내일부터 3월이네요.
오늘 하루종일 봄기운을 느꼈습니다.
3월도 열심히 살아 보겠습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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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하지만, 신랄하고도 세심한 저자의 통찰은 책을 잊게 만든다. 지나간 시대를 나타낸 말들이 지금도 뼈를 때리는 건, 아직도 세상이 온전하고 경건하게 정진하지 못한 탓이리라. 지속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회적 거대 담론의 필요성을 이 책이 말해준다. 내게 독서인의 자세를 각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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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3-01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감탄했어요. 사고 영역이 확대되는 느낌이 들었죠.^^

페넬로페 2025-03-01 17:29   좋아요 1 | URL
네, 독서에 대한 감상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저는 늘
겉핥기식이어서 많이 각성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