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번 그렇지만 봄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온다. 절기와 숫자만으로 봄이 왔다고 짐작하여 얇은 옷이라도 입는 날이면 칼바람과 동행하는 꽃샘추위를 만나 고생한다. 그야말로 역습이다. 봄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독서동아리 모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필독서를 읽어야 하는데 넷플릭스의 ‘소년심판’만 계속 보고 있다. 휴일이지만 식구들은 다 나가고 집에 혼자 있어,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커피를 여러 잔 마시며 보고 있다.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져 힘들지만, 끊기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김혜수 배우(심은석)의 연기와 명대사로 매회 눈물이 난다.
‘소년심판’은 청소년 범죄를 다루고 있고, 그것을 심판하는 연화 지방법원 소년부의 판사, 재판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건은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드라마를 보면 보통 선악의 경계가 명확한 것이 많다. 그 중 어느 것이 이기든 우리는 ‘선(善)’의 편을 들며, 선이 이기기를 응원한다. ‘소년심판’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소년범죄를 다루는 이 드라마는 여느 드라마와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양가감정이 많이 생긴다. 어른들은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른 형량으로 감옥에 가지만, 소년들은 갱생의 기회를 우선 준다. 그것이 당연한데도 어떤 면에서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똑같은 환경이라도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것이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환경을 떠나 본래부터 나쁜 사람, 소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은 법을 악용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소년범죄의 거의 대부분은 환경문제로부터 나온다.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의 부모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모에게 아이를 정성껏 돌보지 못한 책임을 묻는다. 부모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시급하기에, 무지하기에, 그들도 어릴 때 많은 학대를 받았지만 한 번도 치유될 기회를 얻지 못해서.......이유는 많고 많다. 그리고 돌고 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섞여 결국 원위치로 돌아온다. 결국 이것은 가정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교육의 문제가 된다.
[어떻게든 다 잘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가? 나 하나만큼은 평범하고 은은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세상에 혼자 그냥 잘되는 일은 없다. 잘되고 있다면, 누군가 정념과 에너지와 인생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위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갈아 넣을까 고민하는 데 정치가 있다. -p18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김영민, 어크로스]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학부모 독서동아리를 개설했다. 시간은 한 달에 한 번, 오전 10시였다. 그 시간에 참여할 수 있는 아빠는 거의 없을 것이고, 엄마라도 직장인이면 곤란하다. 구성원은 1학년, 2학년, 엄마들이었고, 대다수는 전업주부이며, 나처럼 오후에 일을 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학교에서 주도하는 것이고, 약간의 성과도 보여줘야 했기에 처음 1년은 주로 청소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사실 그때, 우리에게는 사춘기의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토론을 하면서 눈물을 쏟아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 시간은 힘듦에 대한 토로가 있었고,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공감이 있는 자리였다. 여학생보다는 남학생을 가진 엄마들이 더 힘들어했고, 그들 대부분 한 번씩은 학교폭력위원회에 참가한 경험들이 있었다.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래도 학교 독서동아리에 참가할 정도면 책도 읽고, 아이에게 관심도 많은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웬만큼 살 만한 사람들이다. 힘들다고 얘기하고 울기도 했지만 그 모임에 참석한 엄마들의 아이들은 거의 다 대학에 갔다.
아이들은 한 순간에 변한다. 마땅한 기승전결이 없이 사춘기가 오고, 순식간에 나쁜 것들에 휩쓸린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부모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부모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야만 한다. 힘들다고 귀찮다고, 먹고 살아야 하기에, 아이를 방치하는 순간 그 아이는 망가지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낸다. 망가진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그들의 뻔뻔함과 노골적인 인면수심에 좌절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들을 보는 나의 양가감정들을 어떻게 풀어내어야 하는지도 암담하다.
학교 독서동아리에 참가할 때 읽었던 책들을 노트에 필사해두었다. 오랜만에 노트를 꺼내 읽으며 아이를 참 열심히 키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나에게 불만도 많지만, 우리도 그땐 딱 그만큼의 인성과 생각이 있었을 뿐이었고,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아이도 힘들지만, 부모도 똑같이 힘들었고 위로받고 싶기는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신의 마음을 희생한다는 것은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마음을 희생할 줄 아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이전에 제대로 된 어른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부모’, 이승욱, 신희경, 김은산, 문학동네]
[사회를 탓하고 학교를 탓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아이는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할, 부모 인생에서 가장 우선권을 갖는 존재다. 그런데 그런 우선권을 가진 부모가 왜 가정 밖에서, 부모 밖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가?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는 늘 부모 손에 있다. 아이의 말을 들어라! 문제의 80%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
-‘사춘기로 성장하는 아이, 사춘기로 어긋나는 아이’, 강금주, 루미너스]
[순간순간 내 자신과 아이의 욕구를 명료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저 아이가 저렇게 차가운 뒤통수를 보이며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나의 욕구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욕구와 연결될 때 우리는 서로 만족할 수 있게 되고, 서로 만족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면서 즐거워진다.
-‘아이는 사춘기 엄마는 성장기’, 이윤정, 김도형, 한겨레에듀]
고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녀는 가출여자청소년 쉼터를 만들어 그곳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녀가 인생의 방향을 그렇게 바꾼 것에 대해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그 길이 분명 힘들 것임을 알기에, 그동안 곱게 자란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다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딸아이를 낳고, 육아에 허덕일 때, 그녀는 가끔씩 나를 찾아와 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쉼터를 운영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건강이 안 좋아진 시기도 있었다. 그런 많은 어려움에도 친구는 지금까지 쉼터를 잘 운영해오고 있다. ‘소년심판’을 시청하면서 내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친구야, 그동안 고생 많았고, 너 정말 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