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작가의 작픔을 읽고 있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를 읽었고 그의 산문과 강연, 편지글들을 모아 정리한 <인생의 이야기>도 읽었다. 일본 소설들에서 많이 보이는 지나친 유미주의적 경향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다시 읽으면 나의 느낌이 조금 바뀌어 질 수도 있겠지만) 나쓰메의 소설은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과 함께 현실을 직시한 내용도 많이 들어있어 지금까지는 좋은 느낌으로 읽고 있다. 10월까지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읽을 예정이다.
‘도련님’과 ‘산시로’는 서로 대조되는 인물이다. 도쿄 출신인 도련님이 시골에 있는 학교로 부임해 겪는 에피소드가 다소 과장되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권위와 격식을 싫어하는 도련님이 어쩌면 지금 현대의 인물과 통하는 듯하다. 반대로 산시로는 시골인 구마모토에서 메이지시대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도쿄로 와서 신문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고 거기에서 주눅 들고 자신감 없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급격히 변하는 요즘 시대에 우리가 느끼는 소외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문학을 접하거나,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그리스비극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을 때, 매번 드는 느낌은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모습이나 생각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사는 방법이나 공유하는 물리적인 것들은 다를지 몰라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것‘ 들은 비슷하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의 소설들은 그 모습이나 정서가 우리와 훨씬 더 가까운 것 같다. 나쓰메의 소설에서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많이 발견했다. 그래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고양이를 통해 인간 세계가 적나라하게 비춰진다. 인간에 대한 평가가 신랄하고 거침이 없다. 고양이가 펼치는 나름의 주관과 논리에 납득이 가고, 고양이의 눈에 비친 바보스럽고 허황되며 욕심 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고양이가 사는 집의 주인은 학교 선생님인데 그에게는 작가 본인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규샤미 선생은 ’산시로‘의 히로타 선생을 닮아있다.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책도 많이 읽고,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여 잡다하게 아는 것은 많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굴속에서 안주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 세 작품 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1905년에 연재되기 시작하고 ‘도련님’은 1906년에 발표된다. 그때는 러일전쟁이 1904년에 발발해 1905년 9월에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 시기이다. 소세키 작가가 국비로 영국에 다녀오라는 문부성의 명령을 받고 2년 동안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이다. 그는 영국에서 영일동맹이 체결되는 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다. 서양열강의 개항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본에 대한 비판을 하며 급진적이고 무조건적인, 서양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진 개혁보다는 서서히 진행되는 일본이 주도하는 변화를 바란다. 또한 그렇게 되기 위한 지식인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미 열려지기 시작한 나라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고 거기에 많은 지식인들은 실망하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히로타 선생이나 규샤미, 메이테이 선생처럼 자신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나약한 지식인이 되어버린다. 소세키 작가가 그런 그들에게 원한 건 단지 그것뿐이다. 조용하고 천천히 진행되는 일본의 변화를 위해 ‘자기본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때 나는 비로소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개념을 나 자신의 힘으로 근본적으로 세우는 수밖에 달리 나를 구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타인본위’로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되는 대로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모든 게 허사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타인본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술을 남에게 마시게 한 다음에 그 품평을 듣고 거기에 무조건 따르는 것으로, 이른바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한마디로 말하면 바보 같은 소리처럼 들리고, 아무도 그렇게 남을 흉내 내지는 않는다며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p184, <나쓰메 소세키_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황족과 화족을 위한 교육 기관인 ‘가쿠슈인’학교에서 소세키 작가가 1914년에 강연한 내용이다. 나라의 지도자가 될 젊은 후학들에게 소세키 작가가 원하는 건 단지 이것뿐이다. 타인본위가 아닌 자기본위의 삶을 살아내라는 주문이다. 일본의 세계패권을 향한 군비증강.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착취하는 무자비한 과정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도련님’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러일전쟁의 대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 뒤에 집필한 ‘산시로’에서도 그 맥은 이어진다.
[소세키 문학의 출발점은 일본 근대와 겹친다......
한편으로 소세키는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일본의 전근대적 정치체제, 즉 천황제 가족국가주의 체제의 모순을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소세키는 메이지 시대의 당대인들이 개인주의를 취하면서 도의와 윤리를 저버린 채 오로지 이기적인 자기 본위만을 따르는 현실을 차갑게 바라본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해설에서] - p619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가한 그 폭력적이고 무자비하며 말살적인 행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거기서 자유로워져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일본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는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예민해지고 칼날을 세우는 편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장르가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와 그 시대를 산 작가의 글은 그들의 경험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편협할지 모르지만 단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나의 기대에 많이 미흡하다. 소설을 단지 소설로서만 받아들여서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님 내가 작가에게 원한 것이 잘 나타나있지 않는 소설은 좋지 않다고 평가해야 할지 무척 어렵다. 내가 읽은 작가의 세 소설은 전자의 관점에서라면 별점이 다섯 개인데, 후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별점이 한 개가 될 뿐이다. 이래저래 책을 읽으며 이렇게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단지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읽지 않고 건너뛰는 것도 나쁜 책읽기이다. 어떤 형식이라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것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잊혀 지기 쉬운 것들은 언제나 반복해서 각성시켜주어야만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의 작가들도 더 많이 우리의 식민역사에 대해 글을 써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에 우리가 눈을 돌리지 않아야, 그 침울한 역사는 계속 상기될 것이고 복기 될 것이다.
‘인생의 이야기’는 소세키 작가가 쓴 신문 기고문, 산문, 강연, 편지에 대한 글들을 선별해서 한 책에 실은 것이다. 작가가 글을 쓴 시기는 12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 책에는 작가의 인생관이나 작품세계에 대한 것도 있고, 자신의 삶에 대해 소소히 쓴 글들도 있어 그의 소설을 읽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교육에 대한 비판,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신랄하고 솔직하게 썼다. 약간 고지식할 정도로 성품이 깐깐하고 융통성이 없는 경향도 있다. 작가의 경험을 쓴 부분이 있는 자신의 소설도 설명해주고, 세상에 굽히기 싫어서인지, 태평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점도 있다. 소세키 작가는 평생 위궤양으로 고생했고 작가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49세에 죽는다. 이 책에는 자신의 병에 대한 소회도 있다. 피를 토하며 죽음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가족을 떠나 요양생활을 하기도 한다.
소세키 작가의 병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나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어릴 때-사실 난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면 난 막내이니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런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지 나의 무심함이 참 이기적이다. 아버지는 결핵에 걸려 오랫동안 결핵전문 요양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병이 완쾌되어 병원에서 나오고 나서도 아버지는 평생 병약한 생활을 하셨다. 폐가 나빠 감기를 달고 사셨고, 찬바람만 불면 폐렴에 걸려 병원에 며칠 입원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병약하셨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은 완벽하게 지신 분이다. 다만 좀 더 발전하고, 더 나은 세계로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병마가 아버지의 발목을 잡아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소세키 작가가 병마와 싸우는 글을 읽을 때, 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심정들이 난 너무 이해가 되었다.
[아내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죽음이란 이토록 덧없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머리 위로 느닷없이 번쩍이는 삶과 죽음이라는 양면의 대조가 너무나 급격하면서도 무관계하다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일한 내가 이 동떨어진 두 개의 현상에 지배당했다고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설령 동일한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개의 세계를 건너뛰었다고 해도, 그 두 세계 사이에 대해 어떤 관계가 있기에 갑자기 내가 갑에서 을로 풀쩍 뛰어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생각하니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76~77
그런 아버지의 뒤에는 언제나 남편의 병수발을 해야 하는 지난한 삶을 사신 나의 엄마가 있다. 매일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하고, 몸에 좋다는 보양식을 만들어 아버지를 먹였다. 우리 집에는 봄마다 자루에 뱀을 잔뜩 넣어 어깨에 메고 다니는 땅꾼이 방문했다. 쇠고기 곰탕은 항상 준비되었고, 심지어 나는 우리집에서 자라를 잡는 광경도 목격했다. 매번 독한 항생제를 복용해야하는 아버지를 위해 엄마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엄마는 그런 일을 하면서 한 번도 푸념을 한 적이 없다. 아니 분명 했을 것인데 우리들에게 표를 내지 않았다. 당신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남편에 대한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문상을 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아버지가 오래 살았고, 아버지가 덤으로 얻은 수명은 다 엄마가 만들어 주었다고 엄마를 칭송했다. 그때 그런 소리들을 들으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래도 그동안 지겹지도 않았는지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을 우리보다 훨씬 더 슬퍼하셨고,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도 추운 산 속에 혼자 묻혀있을 남편을 잊지 못하고 내내 많이 우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는데 난 그동안 아버지를 너무 많이 잊고 산 것 같다. 한 번씩 꿈속에서, 이렇게 작가들이 쓴 글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그럴 때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을 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아버지는 나에게 속삭인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고 있고, 그 다음에 읽을 책으로 ‘엔도 슈사쿠’의 ‘사무라이’가 준비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일본 작가가 쓴 책이라 이 기회에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두 권인데, 이 책은 너무 어려웠다. <새로 쓴 일본사>는 편년체의 형식으로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가 담겨있는 전반적인 역사 개론서이다. 현역 연구자 17명이 각각의 섹션별로 집필을 했다. 이 책은 전문적이며 전공자들도 보기에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렵게 꾸역꾸역 이 책을 다 읽었지만, 아마 내가 소화한 부분은 이 책의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할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알라딘 서재의 ‘겨울호랑이’님은 이 책의 별점을 5점을 주신 것으로 안다. 역사에 대한 조예가 깊고, 끝없이 탐구하시는 ‘겨울호랑이’님이나 ‘김민우’님 정도의 수준에서 이 책은 소화될 수 있을 것 같다. 난 그냥 죽 읽어 나갔고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조금의 흐름은 잡았다는 것에 만족한다.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는 제목 그대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에서 일본사를 가르치는 ‘가와이 아쓰시’ 선생님이 쓴 책이다. 현역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역사가 재미없고 단지 대학 입시를 위한 ‘암기 과목’에 불과한 현실을 아쉬워하며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주입되는 역사지식의 나열보다는 위대한 인물이나 극적인 사건에 일화를 곁들여 살아 있는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이 책으로 나온 것이다. 이 책 역시 편년체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각 시대별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짧게 섹션별로 서술했다. 일본 역사의 흐름에 대해 이해하기 쉬웠고, 내 수준에 딱 맞는 책이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새로 쓴 일본사>를 읽고 나서 읽어서인지 그 이해가 좀 더 쉬웠던 것 같다. 공부하면 뭐라도 도움은 된다. 그런데 학창시절에 역사는 엄연히 ‘암기과목’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끝난다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읽었던 일본 역사에 대해 깡그리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암기해야 한다. 다는 아니더라도 내 머리에 웬만한 것은 기억하고 시대별로 잘 정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 역사는 ‘암기과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