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외 11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
윌리엄 포크너 지음, 하창수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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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장편 소설인 '소리와 분노' 를 너무나 힘들게 읽어 걱정스레 단편집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읽혔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쓰여진 '소리와 분노' 와는 달리 단편집은 간결한 문체의 직설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소설집에는 12편의 글이 실려있고, 그 편 수 만큼 다양한 에피소드가 서술되어 있다. 잘 알려진 '곰'은 중편 소설에 가까운 데, 문학동네판에서는  한 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다. 단편집을 읽어 가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미국 남부인의 삶을 자세히 알게 되었고, 먼저 읽었던 '소리와 분노' 에 나오는 콤슨 일가와 그 당시 흑인 노예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노예해방이 시행되고 북부의 자본이 서서히 침투해 들어오는 남부에는 예전의 명성과는 달리 서서히 몰락해가는 귀족들과 지주들이 많아진다. 하지만 그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남부인 특유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꼿꼿하고 강하게 견딘다.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여왕이 있었네),(브로치)의 에밀리와 버지니아같은 여인들은 평생 권위와 인습에 갇혀 살며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젊은 여인들에게 강요한다. 사랑을 거부당하고 남자의 시체와 함께 평생 갇혀사는 삶을 선택한 에밀리는 측은하지만, 사람들은 쓰러진 기념비에 대한 존경 가득한 애정을 품고서 그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  흑인 노예-소설에서는 '깜뚱이'라고 표현된다- 가 없으면 그들은 생활을 영위할 수도 없다.

 

막상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흑인 노예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다. 그들은 마을의 빈민촌에 모여 살며 노동을 하거나 백인의 집으로 출퇴근 하며 허드렛 일을 해주며 살아간다. 오죽하면 '소리와 분노'에서 제이슨이 내가 저 깜둥이들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고 푸념할 정도로 그들은 지긋지긋한 백인의 곁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또한 극심한 인종 차별로 인해 항상 두려움에 싸여 있고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다. (메마른 9월)에서 흑인은 백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지목받고 그를 도우려는 백인은 공동체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국 도움을 포기한다.  (붉은 나뭇잎)에서는 인디언 족장의 노예였다는 이유로 그들의 풍습에 의해 그 족장이 죽은 후 같이 순장되어져야만 한다. 말이 안되지만 그들은 힘이 없어 어쩔수 없이 그렇게 죽어 간다.

 

살기가 어려운 쪽은 백인 하층민들도 마찬가지이다. 계속해서 내몰리는 그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불을 지른다. (헛간 타오르다),(신전의 지붕널)이 그렇다. (와시)에서의 서트펜은 자기 집에 불을 질러 놓고 자신을 멸시한 사람들에게 돌진한다. 성경이 신의 저주로 태어난 짐승이자 노예라고 가르쳤던 깜둥이들이 자신보다 더 좋은 집에 살며 더 좋은 옷을 입고 있는 현실 또한 그들을 분노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든다. 그 어떤 종류라도 폭력이라는 것은 두렵지만 뭔가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고 섬뜩하다. 그냥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흑인과 다르게 백인들은 그래도 분노는 표출한다.

 

그 드넓은 광활한 대지에,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그 땅에 어느 날 부터 말뚝이 박히기 시작하고 주인이 생긴다. 인가받지 못했지만 서류가 생기고 그 곳은 팔고 팔리고 대대로 상속된다. 본래 살던 인디언들과 팔려 온 노예들은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동을 제공한다. 알다시피 그 노동의 댓가는 너무나 열악했다. 상속자인 소년은 인디언인 샘 파더스에게 사냥을 배우고 오래된 크고 울창한 숲에는 난공불락의 커다란 곰 올드벤이 살고 있다. 해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소년을 데리고 곰사냥을 나서지만 계속 실패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드디어 많이 늙은 올드벤의 사냥에 성공한다. 황야와 숲을 사랑하고 자연의 이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소년과 샘 파더스는 올드벤의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눌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용감한 사냥개 라이언에게 맡긴다. 여기까지가 (곰)의 1부에 해당되는 얘기라면 그 다음 이야기는 21살이 된 소년의 상속 거부에 대한 것이다. 먼 옛날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부터도 그 누군가의 것이 아니었던 땅에 대해 소년은 상속을 포기한다.

 

난 이 땅을 거부하는 게 아니야. 내 것이 아닌데 거부하고 말고가 어딨어.-p227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권리는, 땅을 쪼개서 각자 대대손손 영원히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라는 소유권이 아니야. 형제애로 땅을 공동으로 가지고 보존하라는 권리야. 그 대가로 하느님이 요구하신건 연민과 겸손, 관용과 인내, 그리고 빵을 얻기 위해 흘리는 땀이 전부였어.-p228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 땅의 불우하고 미천한 사람들은 성경을 가슴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 하느님을 위해 성경을 쓴 사람들은 진리만을 썼을 뿐이고,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가슴을 울리는 것이야-p231

 

연민과 겸손과 용서와 인내를 실천하라고....

이 말들은 숭고하다. 그 어떤 설명도 필요없이 숙연해진다.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집엔 너무나 많은 내용과 의미가 담겨 있어 내가 이 책에 대한 글을 쓴다는게 역부족이다. 링컨에 의한 노예 해방과 그에 대한 남부인들의 반대, 흑인 노예에 대해 가해진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단지 그러한 사실로만 남부를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포크너의 소설로 깨달았다. 남부인에 처해진 환경과 그들의 기질, 경제 활동의 영역등 다채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아야 할 것 같다. 직접적인 수치와 사실적인 사건으로 읽는 책보다 소설로 읽는 미국 남부인들의 삶이 흥미롭고 격정적이고 재미있었다. 내가 자세히 모르던 세계를 다녀와 기쁘다.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는 표지가 예쁘다. 이 전집의 수집에 욕심이 나는 이유이다.

 

저는 인간은 인내하는 존재이기에 불멸의 존재라고, 주저 없이 말합니다. 최후의 격전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붉게 물든 마지막 저녁, 쓸모없는 최후의 바윗덩어리가 내던져진 바다 위로 썰물이 빠져나갈 때, 그때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하나의 음향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작가의 목소리, 여전히 뭔가를 끊임없이 읊조리고 있는, 왜소하지만 지칠줄 모르는 목소리입니다.-노벨문학상 수락 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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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05-16 14: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좋은 주말이예요. 즐거운 토요일 오후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페넬로페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0-05-16 16:51   좋아요 2 | URL
네 한적한 주말을 편하게 보내고 있어요^^
서니데이님!
안부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셔요**
 

 

 

 

 

 

 

 

 

 

 

 

 

 

 

 

 

민음사판의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고 '홀든 콜필드' 를 잘 이해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읽을 책이 많음에도 항상 청소년을 접해야하는 나이기에 이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이번에 문예출판사판으로 다시 읽었다. 매번 그렇듯이 같은 내용의 책을 한 번 더 읽으면 첫째번의 나의 독서가 많이 빈약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내용이 있었나싶게 새롭고 생소한 장면들이 나와서 저번에 읽었던 책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그 얘기가 나와 있었다.

 

민음사판의 번역이 약간 정제된 느낌이어서 홀든의 내면을 좇아가기 좋았다면, 문예출판사는 민음사판보다는 거친 느낌이어서 다른 결과를 기대했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결국은 주인공에 대해 민음사판과 비슷한 결론을 얻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 홀든은 학교에서 계속 퇴학을 당하고, 줄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모든 것에 불만을 가지는 소년이다. 어찌보면 그의 행동이 탈선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말을 하나하나 듣고 있으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위와 위선을 싫어하며, 오히려 행동과는 다르게 생각은 도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이 소설가에서 헐리우드의 시나리오작가가 된 것을 변절이라고 생각하고, 동생 앨리와 피비를 너무나도 사랑하며, 소박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두 수녀를 가식적이고 화려한 상류층의 여자들과 비교하며 수녀들을 따뜻하게 대한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반듯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홀든처럼 인간적이며 엉뚱하기는 쉽지 않다.

 

홀든은 지극히 꼰대를 싫어한다. 꼰대란 무엇일까? 딸아이는 나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방법이자 방어막으로 '그래서 엄마는 꼰대야' 하고 못박는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그런 말에 반박해야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어느 순간 꼰대가 된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럼에도 내가 꼰대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난 적어도 앤톨리니 선생 정도는 되고 싶다. 퇴학을 당하고 부모에게 말조차 못하는 갈 곳 없는 제자에게 비록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에게 질문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구두 표현 수업에서 즉흥 연설을 할 때, 어떤 학생이 조금이라도 주제에서 벗어나면 다른 친구들이 '탈선' 이라고 외치는데 홀든은 처음부터 끝까지 본론에만 충실하는 친구의 연설보다는 본론을 이탈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에 앤톨리니 선생은 본론에서 벗어나는게 꼭 나쁜건 아니지만 일단 본론에 대한 것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네가 뛰어들고 있는 타락은 일종의 특수한 타락인데, 그건 무서운 거다. 타락해가는 인간에게는 감촉할 수 있다든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바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본인은 자꾸 타락해가기만 할 뿐이야. 이 세상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걸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단념해버리는 거야. 실제로는 찾으려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단념해버리는 거야. 내 말 알겠니?'-p276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p277'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만 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냐. 내가 말하려는 것은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밑바탕에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_이런 경우는 불행히도 드문데_ 단지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가 쉽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더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점이야, 알겠니? 내 말을?-p280

 

사람들이 생각하는, 특히 젋은이들이 생각하는 꼰대라는 말의 의미를  대충은 알고, 나도 동의하지만 그래도 내가 홀든을 만난다면 앤톨리니 선생과 비슷한 말을 해 줄 것 같다. 꼰대하는 말을 들어도 어쩔수 없다.

나중에 앤톨리니 선생의 행동에 실망했지만 그저 갈 곳 없는 제자의 앞날을 걱정하는 선생님의 태도로 받아들이고 싶다.

 

문예출판사판은 민음사판보다 책의 너비가 넓고 글자가 커서 읽기가 편했다.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의 홀든에 대한 해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홀든은 그냥 단순한 반항아가 아니다. 책의 앞부분에서 홀든이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민음사판에서는 '아프리카 탈출' 이라고 번역되었고, 문예출판사에서는 원어 그대로 'Out of Africa' 로 번역되어 있다. '아프리카 탈출'이라고 해서 검색해보니 내가 그토록 감명깊게 보았던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의 원작이었다.

영화로만 본다면 그 영화는 분명 '사랑'에 관한 것인데 직접 책을 읽어보면 어떤 내용일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남편에 의해 성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 내 기억이 맞다면 농장 경영도 실패해 아프리카를  탈출하고 싶은 여자의 얘기일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탈출'이란 단어는 거북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확실히 모르니 판단할 수가 없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p313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면 호밀밭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귀찮게 말을 시킬 것이다. 계속 질문할 것이다. 아무것에도 관심갖지 않고, 하고 싶은게 뭔지도 모르는 그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하나라도, 뭔가를 물어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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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5-04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을 꼰대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꼰대처럼 행동하고 있는지, 또는 이미 꼰대가 돼버린 사실을 잘 몰라요. ^^;;

페넬로페 2020-05-04 09:5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런것 같아요~~
그 어떤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냥 어른으로 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0-05-04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민음사 버전의 번역이 쫌 그래서
다시 읽어볼 엄두를 못내고 있네요.

다양한 번역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
니다.

페넬로페 2020-05-04 10:01   좋아요 0 | URL
항상 책을 읽으며 번역의 문제를 느끼는것 같아요~~
실력 좋으신 번역가분들이 많이 나와주시면 좋겠어요^^

mongsil 2020-05-04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완전 새롭더라구요~ 하아~ 다시 새 책을 읽은것 같은 이 느낌은 뇌의 문제인지 그간 쌓인 감정의 스펙타클 때문인지..ㅎ

페넬로페 2020-05-04 17:37   좋아요 0 | URL
둘 다 맞는것 같아요 ㅎㅎ~~
그래도 한 번보다는 두 번째 읽을 때 더 깊이가 느껴지더라구요^^
 
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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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랑시에 죽은 쥐가 발견되기 시작하고 그 후 사람들에게 이상한 징후가 생기며 죽어간다. 전문가들이 페스트라고 짐작하고, 나중엔 확신하지만 그것을 공표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 따른 모든 것을 책임져야만 하고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복잡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더 많이 죽어나가고서야 페스트라고 인정하고, 그때부터 오랑시는 폐쇄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락조차 힘든 상황이 되고 죽음에 대한 애도조차 하지 못하며  단지 살아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행정이 이루어진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p55

 

작년 겨울 중국 우한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감염과 죽음의 소식이 순식간에 전세계적인 불행으로 연결되고 있다. 불안과 공포와 함께 일상이 파괴되고 경제적으로 힘들며 미국의 로버트 라이시교수의 '코로나 시대의 4 계급' 이라는 말도 나온다. 매일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를 언론으로 접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주변 사람들이 감염되지 않았기에 사실 나는 '추상의 상태'에 더 많이 머무르고 있다. 단절되고 막혀진 상태에서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이 사태의 무거움과 벗어남을 알 수 있기에 오히려 추상적이다.

 

잠시 후,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신문기자의 행복에 대한 조바심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리유에 대한 그의 비난은 정당했던가? '선생님은 추상적입니다.' 페스트가 더욱 성해져서 일주일에 사망 환자 수가 평균 오백 명에 달하고 있는 병원에서 보낸 그날들이 정말로 추상적이었을까? 그렇다. 불행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p120

 

그런 추상의 상황에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의 연대기는 나를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인도한다. 페스트의 시작부터 길고도 힘든 투쟁과 함께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 자세하게 담겨있다. 작가의 위대함은 단지 이 감염병을 연대적으로 서술하는 것만이 아닌 각 인물의 상황과 고뇌를 나타내고 인간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다. 리유, 타루, 랑베르, 그랑, 코타르,리샤르등 각자의 인물들이 대처하는 페스트는 지금 우리와 다를바 없다. 파눌루 신부의 두차례의 강론이 이해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가 신부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감염의 징후로부터 그것을 인정하고 대처하기까지 194X년 오랑시와  2020년, 이 세계는 큰 차이가 없다.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당연히 많은 변화가 있어야함에도 오히려 그때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더 들며 부조리한 인간의 삶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는 걸 절실하게 알 수 있다. 부조리함에 놓여져 있는 인간의 삶을 얘기하면서도 결국 인간들의 고뇌와 희생, 견딤으로 페스트를 이겨냄을 이 연대기에는 나타내고 있다.

 

페스트가 물러간 오랑시는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이지만 코로나19가 끝나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것은 분명 축제가 아닐거라는 것은 확실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지고 가을이나 겨울에 다시 이 감염병이 확산될거라는 우려만이 남는다. 실존의 댓가는 날로 커지며 죽음까지 가는 여정이 더 힘들어지는 이 부조리함에 몸서리치지만 살아간다는 것에 조그만 희망을 가지고 우리 모두 축제의 장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그날을 기대해본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지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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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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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소설을 이제서야 읽었다. 왠지 선뜻 다가서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잘 읽혔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가게 된 이 소설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그 전 며칠 동안 자신의 행적을 얘기해주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명문 고등학교 펜시에서 퇴학당한 홀든은 반항아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홀든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운 아이이다. 영어나 글쓰기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여겨지고 엉뚱한 생각과 질문으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그게 서러워 펑펑 우는 순수한 아이이다. 담배를 많이 피우고 허세를 부리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거짓말을 늘어놓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솔직함이 드러나 미움을 받는다.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익명의 삶을 살고자 서부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홀든은 마지막으로 동생 피비를 찾아간다. 그런 그에게 피비는 묻는다. 앞으로 뭐가 되고 싶냐고?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 이 되고 싶다고 한다.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원작엔 욕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마음이 아퍘다. 홀든이 너무 안되보였기 때문이다. 홀든이 공부를 못하고 좀 엉뚱한건 맞지만 아무도 홀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어주지 않기에 많이 안타까웠다. 홀든은 센트럴 파크의 연못이 얼면 거기에 살던 오리들이 어디로 갈까를 궁금해한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대답을 못해도 '글쎄, 어디로 갈까요?' 라고 같이 고민이라도 했으면 그 아이가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엉뚱하고 순수하며 나와 생각이 다른것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쁘다는 판단을 많이 한다. 그런 것을 인정해버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내 삶이 불편하고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편해지고 고통받지 않기 위해 애써 그런 것을 외면하고 보편타당성이 있는 규범을 내세우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홀든을 이해하지 않으려하고 그를 반항아로만 치부하는지도 모른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주기 보다  허구의 얘기로 더 진실되고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소설이기에-J.D.샐린저의 - 난 소설을 좋아한다. 내가 더 넓은 곳으로 독서의 지평을 넓히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홀든은 동생 피비를 통해 아마 일상으로 돌아올 것 같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 홀든이 지키려는 호밀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호밀밭을 지키며 어른이 되고 더 단단해 질거라 믿는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책' 읽기 2

 

 

 

 

때때로 이런 것들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처음 말했을 때 인정했는데도 똑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것 말이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선생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했다.-p22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p32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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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4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지인이 참 좋아하는 소설
이라고 해서 읽게 되지 않았나 싶네요.

언제고 다시 읽어야지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0-04-04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되새기며 다시한번 읽고 싶어서 다른 출판사책을 구입했습니다^^
호밀밭이 의미하는게 무엇인지 더 생각해보고 싶기도 하구요^^

후애(厚愛) 2020-04-10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주말되시길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0-04-10 20: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후애님!
후애님께서도 건강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일상이 흐트러진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그 게을러진 일상이 진짜의 일상이 되고 있다. 나는 본래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라 그러한 세상의 단절에 영향을 덜 받을줄 알았다. 그러나 오리려 재택근무를 하기에 밖에서 받는 에너지가 나에게 무척 중요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일은 계속 하지만 무기력해지고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책은 계속 읽는데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서도 어떻게 이 책을 글로 표현할 지 막막하다. 일상의 무기력은 생각의 무기력으로 옮겨진 것 같다. 2주 전에 독서 동아리 모임을 했었는데 아직까지 후기를 올리지 못하고 있고, 알라딘에서도 '좋아요' 만 누르고 있다. 아예 글을 시작할 첫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를 전공하는 딸아이는 영화도 많이 보지만 뮤지컬덕후이기도 하다. 그런 딸아이에게 코로나는 중요하지 않다. 마스크를 쓰고서 공연을 보러 다닌다. 딸아이는 혼자서도 많이 다니는데 한번씩 나와 같이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모처럼 주말을 맞이해서 둘이서 대학로에 갔다. 마로니에공원은 목련꽃으로 가득했고 여전히 연인들이 많았고 또한 여전히 벤치에서 싸우고 있는, 여자가 울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봄이 완연한 길을 걷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많이 났고 즐거웠다.

 

딸아이와 대학로의 번화가쪽이 아닌 주택가에 있는 카페거리에 갔다. 그곳에는 프렌차이즈가 아닌 조그만 카페가 많은데 그중에서 북카페가 있길래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둘이서 얘기를 나눴다. 대학들이 이제 싸강을 시작했기에 딸아이는 교양과목으로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이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하루동안의 의식의 흐름에 대한 글을 써보는 과제를 냈다고 했고,  나는 마침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소리와 분노'인데 그 책이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쓰여졌다고 얘기했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쓰여진 책이 읽기는 어렵지만 몰입을 하다보면 그 책에 더 흠뻑빠질 수 있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딸아이는 아무도 엄마글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고 그냥 부담감을 갖지 말라고 했다. 딸아이는 요즘 세대답게 나에게 나대로 살라고 계속 말해준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카페에 있는 책도 읽었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틈에 우리는 집에 가려고 카페에서 나왔다.

 

카페에서 나오는데 카페 사장님이 우리를 따라 나오셨다. 조그마한 카페라서 우리가 하는 얘기가 들렸나보다. 책을 읽고 책얘기를 나누는 모녀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고 자기는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고 다음에 꼭 다시 찾아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때, 카페 사장님의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글이 써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는 그 말이 나를 향한 격려의 말처럼 들렸고 이상하게 나를 받아주는 넉넉한 마음 같았다.

일상을 다시 찾고 게으름을 물리치고, 그리고 글을 쓰자

 

봄빛이 완연하고 예쁘니 산책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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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3-22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어려울 때일수록 주위의 작은 관심과 사랑이 큰 힘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번 사태에서 얻은 작은 교훈이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바라봅니다.

페넬로페 2020-03-22 15:54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런것 같아요^^
저도 작게나마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어야겠어요~~

클로드 2020-03-22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이 보고 듣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특히 공연장에서는 같은 공간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해지곤 하더라고요.

페넬로페 2020-03-22 17:06   좋아요 0 | URL
네, 같이 공감할 수 있다는게 행복하고 소중한 것 같아요~~
클로드님, 감사합니다^^

모모 2020-08-05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어요, 따님이 한 말을 보고 살짝 웃음이 나오네요^^

페넬로페 2020-08-05 22:32   좋아요 1 | URL
딸아이 말에 용기내어 다시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