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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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에토스와 존재의 방식, 생각하는 방식조차 달랐던 세계를 지나왔죠. 그 충격은 여전히 제 안에, 육체적으로도 남아 있어요. 어떤 상황들은....아니, 쑥쓰러움이나 불편함이 아니라, 자리,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요.” - 진정한 장소; le vrai lieu, 80쪽에서

 

아니 에르노가 미셸 포르투 감독과 진행한 인터뷰 모음집인 진정한 장소; le vrai lieu는 그녀가 제자리, 혹은 진정한 장소를 찾았다는 느낌에 이르는 내적 여정을 되짚어보는, 즉 자신의 존재 양상을 술회하는 글이다. 이 대담 속 한 문장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이 책, 남자의 자리 ; La Place는 어쩌면 그 여정의 주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바로 현재 감각하는 자신의 자리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지나온 자리와의 괴리, 긴장과 모순으로 얽혀 분열된 아비투스로 주체가 대립되는 두 얼굴의 화해를 위한 관계 회복의 글쓰기라는 생각에서이다.

 


이 작품의 읽기를 추동한 것은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 etre a sa place으로 촉발된 것이기도 하지만, 분명 지금의 내 자리가 잘못된 자리라는 굴레로 여겨짐에 따른 그 벗어남의 갈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당분간 이 자리에 대한 읽기는 계속될 것 같다. 온전히 자리의 감각에 대한 내밀한 체화를 통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물론 클레르 마랭은 계급 횡단, 다시 말해서 사회 하층의 삶에서 중산층의 삶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이 겪는 육신에 새겨진 아비투스와 새로 진입한 세계에서의 아비투스의 분열로 인한 은밀히 습격해오는 자기 위선의 감각에 대한 혼란스러움의 지적을 통해, 자리가 사회적 정체성의 한 측면을 의미함에 있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예시하고 있지만, 아니 에르노의 이 책은 그녀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자기 자리, 진정한 자리를 확신하기 위한 내적 관계회복의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농장 일꾼으로 밥벌이를 하여야 했으며, 공장 노동자와 밭 일꾼의 삶을 전전해야했던 아버지의 인생과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사이에 찾아온 거리, 계층 간의 거리이며, 이름 없는 그 특별한 거리에 대한 이별의 사랑별곡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라는 남자의 자리, 그것을 꾸밈없이 존중하고 배반없이 묘사하며 가족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부인(否認)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이 글쓰기를 통해 정화된 새로운 탄생을 시도한다.

 

본문 47쪽에서

 

자신의 열등감이 내면화된 한 인간의 자기 방어의 말일 것이다. 사회와 타자를 의식해 스스로 자기 목소리와 행동을 억제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도 모른 채 자기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태도는 딸인 아니 에르노에게도 내면화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표현되고 있지만 또다른 작품 《La honte; 부끄러움, 수치심》에서도 거듭 반복되고 있음에서 한 존재의 내면을 차지하게 된 빈곤과 계층의 열등감은 그녀가 지식인 중산계급에 진입하고서도 제자리에 대한 불안의 중대 요소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본문 35쪽에서

 

이렇게 지극히 당연하게 흘러가던 순간들을 세세하게 상기함으로써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발견한다. 바로 그러한 삶의 방식은 오롯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수치스러운 장벽들의 인식임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지난 그 자리가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이기도 했음을, 그 모순 사이에 흔들리는 존재들임을 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내밀한 진리에 대한 기나긴 픽션을 통해 불투명했던 것들에 빛을 비추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거리, 감정 조절, 말의 콘트롤, 수사학적 기교를 깡그리 제거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이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는 나만의 장소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자리한 모든 장소 중 유일하게 비물질적이며, (...) 어쨌든 그곳에 그 모든 장소가 담겨있다고 확신한다.“ 아버지와 자신의 정체에 의심을 갖게 하는 지나온 자리의 끊임없는 불편함은 자신도 모르게 힘 또는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 그녀의 아버지가 살던 환경이라는 잊고 있었던 현실을 되찾게 한다. 이렇게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마친다.

 

우리는 생애 내내 자리를 이동하는 존재들이다. 발목 잡는 지난 자리의 정체성, 그리고 현재의 또다른 굴레들, 삶이 지닌 복잡성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시도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 흡수되며, 그 지배력 속에서 오히려 순수한 활동성, 존재감의 강화, 가득 찬 현존을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내적 필연성의 장소, 있어야만 하는 장소라는 느낌, 내 주체의 역량의 증진과 창조능력의 긍정이라는 형식임을 느끼게 하는 자리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아마 눈을 감을 때까지 지속될 모양이다.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기 위해, 그 삶을 구하기 위한 이 글이 지금 이 순간의 나와의 화해를 위한 방편을 생각해보라 권유하는 듯하다.

 

(rame)가 우리를 뱅뱅 돌게하네 - 아버지가 부르곤 하던 노래,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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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있다는 것
클레르 마랭 지음, 황은주 옮김 / 에디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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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읽었으면 하는 책, 오직 나만이 소유한 책이었으면 하는 이기심을 작동케 하는 책이다. ‘자리가 함유하는 삶의 수많은 양태들에 대한 사유 그 어느 문장도 읽는 이의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기를 갈망하는, 제자리라고 여겼던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가 나를 한없이 줄어들게 하고, 내 안의 목소리를 잠재우게 하는 속박임을, 나를 한계에 속박해 제약하는 자리임을 직시하게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은폐된 것의 실체, 내 자리에 얽혀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배반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두려움의 주춤거림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탐사의 여정은 하나의 어휘, 문장, 페이지마다 간결하고 압축적인 의미들이 빠짐없이 그대로 공감의 전율로 내게 전해졌다. 하나의 의미도 놓치지 않으려고 밑줄과 텍스트의 여백에 감탄과 동의와 놀라움의 메시지들을 써놓는 일을 처음으로 집요하게 하도록 한 책이다.

 

자리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 또는 동식물과 사물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에서부터 일정한 조직체에서의 직위나 지위,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라는 십여 가지 뜻이 나열되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전적 의미 뿐 아니라 그 상징적이거나 각종 비유의 뜻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다의(多義)성을 지닌 어휘라 할 수 있다. 또한 제자리는 있어야 마땅한 또는 본래 있거나, 위치변화가 없는 위의 모든 의미를 품은 자리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리라.

 

따라서 책의 제목에 있는 '제자리에 있다(etre â sa place)'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거나, 마땅히 있어야(머물러야) 하거나, 고정되어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우른다. 이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란 정말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진정한 장소이자 공간일까? 그 자리는 변화없이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일까? 만일 누군가 내게 제자리를 지키라고 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제자리란 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 것일까? 만일 제자리라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할당된 자리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불편과 불쾌감으로 여겨질 때 나는 다른 자리로 이동하여 새로운 자리를 제자리로 삼을 수 있을까?

 

책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사유이며 응답이고, 그것은 제자리를 중심으로 우리들이 자리라고 부르는 것들이 삶의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의 통찰이다. 나아가서 우리들 개인 각자의 바른 자리로서의 제자리를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은 또한 어떠한 자리여야 함을 이해케 하는 삶의 주체자로서의 각성에 대한 찬란한 철학적 웅변이다. 저자 클래르 마랭은 이들 자리에 대한 성찰의 여정에 그녀의 깊고 총명한 사유들을 조르주 페렉, 앙리 미쇼,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니 에르노 등의 문학작품들,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샹탈 자케 등의 철학적 담론은 물론 영화작품까지 아우르며, 끊임없이 자리옮김을 지속하는 이동하는 존재로서의 삶인 우리 인간들의 불가피한 행위의 의미를 파헤친다.

 

우리는 결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으며, 때로는 이동하지 않고서도

내면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문장은 마치 우리네 삶의 형식이 정주(定住)민과 유목(遊牧)민으로 양분되어 있어 양자택일의 선택 가능성이 있는 듯 하는 말들에 대한 조르주 페렉의 비판에서 연유한, 저자 클래르 마랭의 언어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인 것을 어찌 정주와 유목이라 구분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문득 혹은 수시로 어떤 삶의 한 자리에 갇혀있음을 깨닫고, 그 자리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곤 하지 않나? 또한 이미 속해 있는 정서와 관계적 공간에 안주하고 있었음에 대한 피로가 습격해오기도 하고, 때론 분류하고 낙오시킴으로써 질서와 위계를 지닌 자리들은 제자리라고 여겼을 자리가 강제와 압제의 성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급기야 도저히 살 수 없는 자리도 있다. 숨 막히게 하는 자리가 야기하는, 내 태도와 행동을 규정하고 결정짓는 암묵적인 보이지 않는 강제들로 내 삶의 창의를 중단시키고 훼방하는 사회 또는 가족이 지닌 관성의 힘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이때 우리는 지금의 자리를 벗어나 다른 자리로의 이동을, 그 떠남을 고뇌하지 않는가?

 

이 제자리라는 말은 양면성을 지닌 단어다. 각자의 고유성이 사라진 촘촘하게 짜인 세계, 모든 것이 마치 계획되어 있어 갈림길조차 예측하는 게 가능해 보이는 삶이라고, 내 주변과 사회는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것, 기대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가해지는, 결코 상상하지 못하게끔 옥죄는 세계의 자리 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은 내게 맞지 않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향해, 마음껏 자유 넘치는 창의의 삶이 가능한 희망으로써의 제자리도 있다. 그래, 우리 인간은 고정된 질서로서의 제자리와 욕망을 실현할 새로운 삶의 지대로써 제자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표류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떠난다는 것이 그저 지금이라는 현실에 얽힌 것들을 툭툭 털어내고 도주하면 되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주체의 자리 자체를 옮기는 훨씬 내면적인 자기성찰의 과정을 수반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각종의 구조물과 논리와 신호의 벽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이동을 방해받는다. 오랫동안 나를 정의해 왔던 자리를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옥죄는 끈들이 발하는 무언의 관성적 요구들이 수시로 새로운 삶의 도전 길에 심리적 억압을 지속한다.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제자리로 불리는 이 자리에 염오(厭惡)와 근원적 불쾌감이 솟구친다. 물질적으로 저당잡히고, 족쇄가 채워진 이 제자리를 떠나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며 나를 정의해 왔던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려는 것을 주저케 한다. 그들이, 사회가 나를 배반자라고, 인간의 도리와 세상 삶의 관습을 저버렸다고, 아니 내 스스로가 이러한 족쇄들을 저버렸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어내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이미 머물러 익숙해진 장소, 이것에 나를 맞추고 순응했기에 가능했던 자리, 이것을 안정이라 믿으며 정체된 삶에 나는 정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음을 알아 버렸다. 내 실존은 얼붙었고, 이동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평온함과 친숙함에 웅크린 채 안주해왔던 삶을 이제 떨쳐버리려 한다. 동물은 자신의 환경 속에 갇힌 채 세계 빈곤속에 존재한다.이처럼 단순한 삶 속에서 제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은 축소된 세계의 제한된 실존에 만족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들은 이 제자리에서의 탈주를 상상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뿌리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동하는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사전에 결정된 세계에 사는 것을 끔찍이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래서 타자의 세계, 우리 자신의 환경 바깥으로 이동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하여 주는 곳, 세계로부터 나를 잘 지켜 보호해 주는 구역과 관계 맺기를 갈망한다. 정말 내 삶의 원기를 생생하게 회복시켜주는 곳,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갈 것을 제안하는 장소를 향한 자리옮김을 희구한다. 내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곳,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곳, 내 실존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을 향한 이동을. 물론 다른 자리로 떠나기 위해서는 그 다른 자리에 진입하기 위한 주문과 규칙과 비밀번호가 있을 것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언어와 여러 식별표지를 해독하는 배움을 지녀야 할게다. 설혹 실패할지라도 아마 그 소란과 잡음의 모험이 불러일으키는 해방의 환희와 흥분이 삶의 즐거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제부터 내 목소리를 잃었을까? 웃음, 고함, 직설적인 말들은

나의 음성 레퍼토리에서 사라졌다.”

 

책은 이와 같은 인간 보편의 자리옮김에 대한 존재적이고 실존적 욕망의 본질만을 탐사하는 것은 아니다. 자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고 억압하는 방법으로서 선택하는 힘을 포기케 하는 힘의 작동이기도 한다. 자리는 여성, 서민, 그 밖의 소외된 무수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리, 할당된 틀 안에 머물라고 욕망의 제한을 명령하기도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인용되고 있는데, 마치 과거가 라는 자신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 의무를 짊어지기라도 한 듯 숙명적 수치심의 자리, 자기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실패와 결말에서 도주할 수 없음을 내면화시킨 자리도 있다. 자신의 저주받은 정체성, 혈육의 자리, 그 실추를 피하기 위해, 딸에게 도망치기를 엄명하는 어머니를 마르그리트는 쓴다.

 

아마 이와 유사한 자리의 형태로 장애의 자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화시키는 사회의 여러 형상들이 사회 문턱을 암시하며 스스로 제자리에 있어야 함을,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책망하듯 장애를 확인시킨다. 모든 것이 너무 높거나 낮고, 넓거나 좁으며, 위험하거나 접근 불가능할 때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이 세계가 이러한 물질적 공간으로 장애를 생산하며, 공간과 자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밀히 강요한다.

 

이렇게 삶을 축소하고 사라지기를 내면화시키며, 내 자리의 투명화를 요구하는 세계는 우리에게서 제목소리를 앗아간다. 이것은 비단 사회라는 거대조직의 일반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사이에서, 가까운 지인들의 모임에서, 나를 비교적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 대신 말하며, 나에게 감히 삶을 설명하려는 상황을 빈번하게 마주할 때, 우리는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게 되고, 이 체계적으로 평가절하당하는 현상 속에서 스스로 목소리 내는 것을 금하기에 이른다. 내가 있는 자리가 맞지 않다는 듯 자리를 부정하는 시선과 행태들이 우리들을 점점 줄어들게 한다.

 

결국 밖으로 기어나오는 목소리는 다른 이들이 듣고 싶어 할만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축소를 위한 노력에 경주하는 왜소한 스스로에 지쳐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내 입을 막는 것은 누구 손인가?” 라고 물을 때 그 손이 바로 내 손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내면화된 자기 축소, 자기 부재를 형상화하려는 움츠러든 자아 말이다. 실존의 심장부에서 올라오는, 자기 검열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줄 테시투라(tessitura), 우리 고유의 목소리를 해방시켜줄 제자리를 향한 떠남, 주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줄 자리로의 탈주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아니 에르노는 인터뷰집인 진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계급 횡단으로 인한 제자리의 벗어남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뿌리였던 과거와 현재의 자리가 가져오는 이중의 거리로 인한 괴리, 지금 속해있는 자리가 마치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성취도 진짜 성취처럼 여겨지지 않는 신중함을 요구할 때 계급횡단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은 그 낯섦의 감각에 당혹스러워 한다.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진짜 그곳에 있지 않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하며, 두 계급 사이를 통과하는, 혹은 두 개의 영토가 교차하는 경험을 가진 자들의 견뎌야 할 지배적 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만이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음을 증언하기도 한다. 철학자 샹탈 자케가 말하는 동일자의 반복 또는 감금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능력이라고 특징지은 -재생산’, 아마 이것이 바로 삶의 영속적 재구축과 재배치를 만들어내는 역동력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실존 안에서 제자리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 부유(浮游)하는 존재, 모든 인간 존재가 유목민임을 자각할 때 자리에 대한 그 고정적이고 억압적이며 폭력성마저 띠고 있는 자리를 둘러싼 투쟁, 공간의 시련은 조금이라도 이완되지 않을까? 책은 많은 지면에서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변두리로 몰린다는 것, 즉 부적절한 자리에 놓여 삶이 위축되고 발목 잡히는 양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 우리의 행동과 욕망이 일치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래서 타이밍을 잃고 기차를 놓쳐버리게 되는 자리들을 생각게 한다. 어떤 자리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점유해야만 하는 자리가 있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부재증명의 역설적 자리도 있다.

 

여기 있지만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자리, 제자리에 있으라고 요구받은 자리는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자리란 이렇게 다양한 실존의 혼란이 초래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제자리를 찾는 여정을 멈출 수 없다. 진정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제자리라는 감각을 찾기 위해 자신의 생의 사실을 쓰는 순간만큼 살아있음을 느꼈던 아니 에르노처럼 우리들은 영원히 자리옮김의 표류를 하는 존재일 것이다. 다른 장소를 향한 꿈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 정체성의 양분을 공급받는 것일 게다. 내가 열망하는 이 자리,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는 현실적이면서 내면적인 장소, 내 실존이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를 향한 그 지고한 공간배치에 대한 인간의 염원을 풍부하게 향유할 문학적 문법의 아름다운 철학담론서다. 진정한 내 자리를 고뇌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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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미하엘 페리에의 바다저편의 회고록의 한 문장에 나의 느낌을 이입하여 변용한 글이다. 아마 이것이 이 책에 대한 진정한 감응의 소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이 통렬한 잔인함에서 고통과 희열이 교차하는 착잡한 해방감을 느낀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언급에서 순간 얼어붙지만, 죽음의 시계추같은 생동감 없이 작동하는 삶의 복종에서 탈주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는 어렴풋한 내 육체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심한다. 나는 떠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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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6-10 0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느낌이 들 때도 있겠습니다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 느끼거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기도 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곳은 마음 편하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불안이 아주 가시지는 않을 듯합니다 제가 말한 건 사람 속이기도 하네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사람은 어딘가에 들어가기도 하는군요 그게 편하기도 하지만 조금 자유가 없을지도...


희선

필리아 2025-06-10 07:56   좋아요 0 | URL
‘자리‘는 ‘소속‘과는 다른 것입니다. 외적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내적 활기의 장소거든요. 어디, 누구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지요. 글에서 업급했듯 자리는 끊임없이 진동하며 부유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것은 결코 정주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전 지금의 자리를 떠나고 있어요. 뿌리를 뽑아내고 새로운 뿌리내림을 향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답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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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kapitalismus und Todestrieb; 자본주의와 죽음충동의 메시지들을 나는 자기파멸적 세계로 향하는 우울한 현상에 은폐된 실체들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분명 저자가 지적하는 자유의 착각, 투명사회와 긍정과잉 사회가 지니는 의미들, 만물의 상품화로 인한 인간의 자기 전시화(展示化), 자발적 통제사회로의 이행의 괴멸적 현상들은 많은 부분 현실의 통찰일 것이지만, 이로 인해 인간 운명의 미래를 어둠의 지옥, 종말의 귀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필연적 결과라면 구태여 이러한 비평적 글들은 공허한, 의미 없는 말잔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문제에 도사린 근본적 문제들을 개선하거나 제거하는 실천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의 우리들은 행동하고 있을까?

 

신자유질서가 지배하는 오늘의 지구화된 세계가 노정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냉소적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불가피한 것이잖아.’, ‘나는 그 문제를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인간 삶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거예요.’와 같은 이 모순적 인식에는 징그러운 흉측스러움이 있다. 비판적 지식을 마치 수용한 것처럼 말하면서 그 비판의 효율성을 무력화하는 비논리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작동하기에 저항의 목소리는 동력을 잃고 만다.

 

현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이 근본적 망상은 그래서 문제에 대한 아무런 행동을 실행하지 않는다. 기후온난화, 디지털 기업들의 개인정보 수집의 위험성, 다름과 타자에 대한 부정성의 낙인찍기, 성과(成果)주의 윤리의 괴멸성 등 인간의 자유와 존엄, 생명성에 위협을 가하는 요인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해결을 위해 실행되지 않는다. 이 책 15편의 비평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현상 내재적 속성을 규명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가 개방성과 소통을 강조함에도 심리화에 치우친 주관주의 담론은 객관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정신 건강으로 전환시켰다.” - 한병철, 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

 

이 문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좀처럼 공동체라는 우리라는 감정주체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를 지적하는 말이다. 객관적인 구조의 문제들을 한낱 개인들의 심리적이고 위생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사적 문제로 개별화, 국소화(局所化)하는 현 세계의 체제를. 이 앞선 저술(심리정치)에서의 관점은 이 책에서 자유로 옮겨가는데, 이 자유는 자신에 예속된 것조차 알지 못하는 착각된 자유’, 이를테면 발가벗은 자유이다. 국역된 제목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바로 이 착각된 자유로 인해 인간 삶의 근본인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유가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 부존재한 자유의 시스템 내에 있게 됨으로써 마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져있는 오늘의 인간들은 저항의 의지 자체가 생성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배기술은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타자 억압과 착취라는 폭력의 형태를 전혀 띠지 않으며, 우호적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그 착취를 개개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공격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떤 저항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데, 바로 자유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를 다치게 하지 않은 듯 행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 강제를 자유로 느끼는 사회

 

산업사회의 체제유지 권력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 실체가 확연한 저항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에 저항하면 실체적 폭력이 작동하고, 사람들은 빼앗기는 자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규율과 억압의 질서를 보다 효율적인 영리한 지배기술을 발휘한다. 그것은 순응(복종)이 아니라 사람들을 독립적인 체계로 인식토록 함으로써 개체 외부인 사회문제가 아니라 개체 내인 자신의 문제로 인식케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지배 맥락에 예속하게 한 것이다. 이 기막힌 체제는 오늘날 노동자들을 스스로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인식케 하고, 모든 각자가 모든 각자를 상대로 경쟁하는 절대적 경쟁의 상태로 만들었다. 자기 노동의 경영자가 된 노동자는 자신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희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착취에서는 이러한 자발적인 자기 착취로 이행된 현실을 설명함으로써 어떤 강제도, 어떤 명령도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발가벗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왜곡과 부조리로 인한 형상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봉사하는 서점의 선반을 가득 메운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자기 노력과 능력의 탓이고, 자기 선택의 과실이 된다. 모든 인간을 자기 경영자로 명명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결코 노출하지 않고 자발적 노예들에 의해 매우 효율적으로 생산성의 과실을 독차지한다. 각자도생을 부르짖은 저 내란우두머리를 비롯한 극우집단이 시종 일관한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적 불온함이다.

 

사회적 소통망을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모두가 스스로 산출한 욕구를 배설하는 사진, 동영상과 짧은 글들로 가득하다.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행적은 고스란히 데이터가 되어 수집된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채우고, 자기 정보를 기꺼이 제공한다. 심지어 건강 기록에서 시시콜콜한 내밀한 영역의 이야기까지 부끄럼없이 내보이려는 욕구들로 가득 차 있다. 사회적소통망의 영주는 이들 개인들을 감시, 통제하며, 그들이 스스로 생산한 산물들의 과실을 차지하고 자본 축적의 쾌락을 향유한다. 개인들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들의 노동력 착취를 결코 강제된 착취라고 느끼지 않으며, 통제 불능 또한 억압이라 생각지 않는다. 즉 성과 주체인 개인들은 자유의 느낌을 동반한 이 자기착취라는 스스로 산출한 자유로운 강제에 예속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의 의미다. 신자유는 곧 강제를 자유로 느끼게 하는 기괴하게 의미를 역전시킨 억압의 다른 얼굴이며, 보이지 않는 통제의 욕망이다. 이 신자유세계라는 시스템 안에 살기에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이 다급한 자기 통제의 외침은 자기착취로 소진되는 현 인류에 대한 연민의 목소리다. 모든 일이 자유라는 허울아래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자유를 착취하는 세계다. 타자 없는, 즉 지배없는 착취인 자기 착취는 외견상 자유의 영역에서 일어나기에 대단히 효과적일뿐더러 저항할 대상은 물론 맞설 우리라는 것도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배의 부재와 우리의 부재가 세계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

 

2. 긍정성 과잉, 투명성 사회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에 봉착하는 타자착취와 달리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자기착취는 자신을 붕괴시킬 때까지 한계가 없다. 그러다 실패하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고난이나 파산을 겪으면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라 스스로를 책망한다. 이것은 자기 안으로 침몰하여 익사하는 우울증과 몹시 흡사하다. 자기 자신에 의하여 완전히 소진되고 마모되는 오늘날 증가하는 정신질환들(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소진 증후군 등)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성과(成果)윤리의 교활한 속성의 병리적 증상이다.

 

모든 문제를 를 의문케 하는 신자유주의의 음흉한 윤리는 그래서 사람들을 나르시시스적 내면성에 침잠해 온통 나를 쓰다듬어라, 나를 돌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항의하는 대항하는 타자가 없는 존재가 되어, 타자의 다름을 보지 못하게 하고, 곧 예의를 상실한 인간들은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존중하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요즘 이 세계에 부쩍 나르시시스트가 늘어난 것은 자기 동일성을 반복하며, 다름과 타자를 무조건 부정성으로 제거함으로써 귀결된 긍정성 과잉의 현상일 것이다. 이렇게 부정성이 말끔히 제거된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같음만이 출몰하는 매끈한 세계다. 그래서 탈()면역시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매체의 구별 없이 모든 미디어들의 프로그램이 건강의학 정보로 가득 채워진다. 부정성을 걷어내고 긍정성, 같음으로 매끄럽게 획일화된 것들을 숭배한다. 반죽음, 혹은 설죽은 인간들이 성형과 온갖 약물과 보정으로 매끄러운 신체를 과시한다. 불멸을 향한, 죽음을 거부하는 이 행위들에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속성을 본다. 죽음이라는 부정성을 회피하기위해 죽음충동이라는 또 다른 반()명제를 세움으로써 자신을 은폐하는 속성 말이다. 이 긍정성 과잉의 균질 사회는 다른 말로 투명사회다. 투명성이라 말하니 마치 부패와 부정의 드러남이라는 긍정성을 떠올리는 것은 심한 오해다. 이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투명성이다. 비밀이 완전히 사라진 포르노적 속성, 세상 모든 것을 전시, 상품화하고, 시간을 두고 인내하지 못하는 즉시성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우려스러운 현상을 본다. 투명성은 언급했듯 부패와 부정이 깨끗이 척결된 청결, 청렴으로 비치고, 즉시성이라는 신속한 화답을 하는 실용성의 정치 행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세상의 일, 특히 국가 정책으로서의 정치에는 시간을 두고 숙성되어야 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어떤 하나의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지체라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투명사회를, 실용정치를 외치는 것은 비전 없는 정치라는 속빈 실체의 다른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포퓰리즘이라는 대중선호정치에는 미래 없는 사회, 다시 말해 예측 가능성을 꿈꾸는 미래로의 행위가 실종된 오직 계산의 합리만이 존재할 것 같아 근심이 앞서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결코 투명성, 실용성, 긍정성이 모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정보사회가 야기하는 병리적 증상들, 151쪽에서】


투명사회란 기다리는(인내) 능력의 상실이라고 말했다. 즉 미래로 이어지는 약속에 대한 불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래가 사라진 즉시성에 몰두하는 사회는 책임 맡기, 약속, 사랑 등의 본래의 함의가 위축되거나 훼손된다. 신자유의 체제의 이 대표적 속성인 투명사회는 그래서 국가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현저하게 목격하게 한다. 시민들의 무고한 죽음들, 각종 인적 재난들에 대해 고위관료들을 비롯한 권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며 무능력을 여실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요즘 사람들의 사랑에서 이상한 징후들을 보게 된다. 사랑에서조차 상처를 받지 않으려하고, 다친 상태가 되는 것을 지극히 꺼려한다. 사랑이 그런 것인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 부상이고, 실제 많은 걸 쏟아 부어야 하는 상처의 위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부정성을, 거친 표면을 거부하는 이러한 태도에서 매끄러움에 대한 숭배를 본다. 저자는 뛰어 오르는 사람들 ; Menschen springen(People jumping)에서 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쩍 펄쩍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은가하고 묻는다. 갑자기 신자유체제가 사람들의 생명력을 증가시켜서? 아니면 나르시시스적 병적 경련인 건가? 사진의 전통적 가치는 순간을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식(禮式)가치였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인 초상이 사진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진에서 인간의 얼굴은 물러나고 도발적으로 눈에 띄는 전시(展示)가치에 압도되고 있다.

 

즉 상표처럼 두드러지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기억과 역사가 없는, 그저 뛰어오르며 현재 가치를 증명하는 사진, 한 순간에 소진되는 사진, 쇼윈도 같은 사진을 전시하려는 것이다. 주목 받기 위해 뛰어오르는 상품인 인간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인 통찰과 지혜의 미덕은 자취를 감춘 호모 살리엔스(Homo saliens; 뛰어오르는 인간)’, 스스로 상품이 된 발가벗은 자기 착취의 욕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투명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까? 스스로 산출한 이 욕구가 수치심을 넘어설 때 인류는 스스로 들어선 통제사회, 강제된 예속사회 깊숙한 곳에서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3. 맺는 말


지금 우리는 자유의 위기에 처해있다. 자유는 강제의 맞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른 체 강제에 굴복하면서 그 강제를 자유라고 인식하게 한다. 자유 종말의 뚜렷한 징후다. 이 지배 없는 강제, 강제하는 상대가 없으니 저항이 애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더욱 이 보이지 않는 상위의 지배질서는 저항 없이 매끄럽게 인간을 노예화한다.

 

긍정성 과잉이나 투명성이란 다름 아닌 획일화다. 다름과 부정성을 회피하고, 죽음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는 이제 디지털 질서로 이행되면서 그 실체를 인지하는데 더욱 곤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속성들은 이 세계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 그 존재의 이유를 풍성하게 하는 사랑과 앎에 대한 욕구와, 분석 비판의 지성 능력 등은 물론 존재의 근본인 자유의 지각조차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무책임, 무관심, 극한의 이기적 욕구, 타자의 부정과 배척을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 발터 벤야민의 인류의 자기소외는 어쩌면 인류가 자기파괴를 미적 향유로 체험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는 예견적 문장이 실재하는 현실사회로 여실하게 도래한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한 대담자가 그가 음모론자처럼 느껴진다며, 세상을 험담하고, 사람들을 절망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저나 저의 분석이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자비하고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어떻게 이 잘못된 세상에 즐겁게 있을 수 있죠?”라고 반문한다. 다만 자신은 이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 놓여있는 세계를 더 많이 보려고, 또한 보기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소음과 지식 없는 정보만이 난무하고,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이 만연하는 이 불온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늘 지배구조 안에 내장된 권능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이 숙고의 능력마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정말 인간을 상실하고 기계화된 노예들의 모습만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 이해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는 문제적 저술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착취의 질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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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사실을 자신의 앎으로 인지하고 그로인한 반응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것은 정말 인간만이 지닌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 여타 동물은 자신에게 위협될 만한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예외 없이 그에 따른 행동(반작용)을 취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 특히 자신이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수록 명백하고도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정도는 권력의 정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예외적 태도를 눈여겨 본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이러한 실태는 우리들의 일상적 언행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에 대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라며, 마치 복잡하고 미묘한 무엇이 있어 그것들을 샅샅이 검증해야 그 명백한 사실이 확정된다는 듯 주장하며, 당면한 사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고 선관위 등 사법기구를 점탈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TV화면으로 송출되었는데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라고, 문제의 본질을 모호한 상대적 사실로 전락시키고는 폭력행위를 방어행위로 둔갑시켜버린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왔다. 문학, 철학, 역사 등등에서 후각이 발달한 소설가, 철학자, 사가()들은 이 자명한 것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온하고 구린내 나는 범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출현했다.

 

우리는 명백한 것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서의 행동(조치)에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만연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무감각, 무반응, 무저항, ()행동, 나아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옹호하거나, 둔갑한, 즉 왜곡된 사실에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자명한 사실, 혹은 범죄의 사실은 오리무중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방향을 상실하며 사회적 혼돈을 낳는다. 물론 이렇게 사실을 상대화하는 자들이 노리는 사태가 바로 이러한 혼란으로서의 사회적 무능력의 생산임을 말해 무엇 할까.


영화돈 룩업! Don't Look Up!에서 비지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출처 Netflix

 

아담 맥케이 감독의 2021년 블랙코미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영화 돈 룩업! Don't Look Up!은 이렇게 명백한 것을 자신들만은 회피할 수 있다고, 그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다. 이것을 조금 현학적인 개념어로 비지식(non-knowledge)’이라고 부른다.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타자의 앎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은 혜성의 궤도가 지구와 충돌하는 것임을 알았는데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 슈퍼볼 경기는 안 열리겠네?” 라고 지구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가히 어처구니없으며,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한다. 자신의 질문이 종말적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방송 앵커들 또한 혜성의 지구 충돌이 자신들의 세계와는 무관한 듯 웃고 떠들어댄다. 자명한 사실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그 명백한 위험 앞에 누가 온전하겠는가? 영화는 허구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게다. 그렇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지구촌을 온통 휩쓴 코로나19의 방역에 모든 인류가 참여해야 했음에도, 당시 영국의 총리 보리스 존슨은 그 위험이 자신에는 해당하지 않는 다고 여겼다. 결국 그는 위중한 상태에 빠져 요단강 근처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간단히 치부하면 인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안다고 가정(假定)된 주체로 이해하지만, 단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와 얘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3년 남짓한 검찰 독재 정권에서 각종 재해가 줄줄이 발생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그 명백한 사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서 예측 가능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재난을 고스란히 재앙으로 만드는 꼴을 보았다. 재앙이 임박하고 있음에도 시장, 도지사가 현장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리곤 재난은 으레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이기에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대통령부터 책임 주무처 장관인 행자부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그리고 관련 기관의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했으며, 남의 탓이고, 오히려 문제를 상대화시키고는, 야당과 비판적 언론을 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한다며 매도하기까지 했다.

 

알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반사회적 인간들이거나, 그 사실에 대한 의미를 정작 알지 못한 인간들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순진하게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인 것이, 이러한 태도들에 상대화라는 속임 술책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개, 돼지인 시민의 안위에 관심을 갖기 싫은 것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재앙의 도래를 알고 있었으며, 다만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는 전술로써 알지만 믿지 않는 척하는 술수를 사용 한 것이다. 지금 이 사회의 상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인 법관, 검사, 각 부처의 고위관료들의 행태가 이러한 실상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들은 자명함에다 빈번하게 모호하고 복잡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고 상대화하고는, 이어서 그 자명함을 뒤엎어 버린다. 이 자들에게는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앎이 실효적이기 때문이다. 비지식이 기득권의 책임 회피이자, 진실의 무력화 전술인 것은 그리 새로운 인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알지만,...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해 지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다시금 기억의 상부에 떠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불법 계엄인 것은 알지만, 그것을 위헌적이고 불법행위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이 돈 룩업! Don't Look Up!을 관람하며 낄낄거리는 희극 장면은 과연 가관일 것이다.

 

관점을 조금 변경하여, 이 명백한 것을 보고는 우리들은 간혹 그 명백함으로 인해 소홀히 취급하곤 한다. 설마 저렇게 자명한데 거기에 무슨 사건적 진실이나 위험, 범죄가 있겠어? 라고 의심을 차단해버린다.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는 부정한 짓을 하고는 그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명료하게 만들어 마치 그 사실의 명백성으로 인해 범죄적 요소가 없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속임수요, 범죄의 단서이기 일쑤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어떤 사태를 포장하여 마치 은밀히 숨겨진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쓰지만, 정작 그 이면에서는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짓거리가 무수히 벌어진다. 이 두 종류의 속임수를 이중적 신비화 전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이중적 신비화는 비지식의 행동과 그 본질이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할로 저택의 비극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바로 단서 그 자체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실제 행동을 감추는 이중적 신비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 교활한 술책이 지난 3년의 검찰 독재 권력이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 추악한 방법이다. 검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호로 외칠 때, 대규모 마약사범은 유유히 세관을 통과했으며, 페이퍼 컴퍼니에 국가 석유자원 시추 사업권을 불하하는 행위들이 모두 이러한 이중적 신비화의 속임수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명약관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가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 내란 세력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이것들을 비호함으로써 기득권을 향유하는 세력들이 무도함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자명한 불의에 특정 지역의 군상들은 결단코 움직이지 않거나, 그 명료한 사실을 상대화, 무력화한 집단에 붙어 요지부동이다. 왜 그럴까? 그 은폐된, 속임수로 가려진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강제된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지배하는 강제, 저항의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강제하는 상대가 없다고 여기기에 애초에 그들은 저항의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름, 타자들은 부정한 것이고, 그래서 타자는 말끔히 배제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기에 그들에게는 무조건의 긍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흠뻑 젖어있다. 긍정성과잉은 곧 폭력의 산실이라고 슬라보예 지젝은 Freedom; A Disease Without Cure에서 역설한다. 지금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비지식을 과시하는 저열한 것들의 행태나 반도 동남지역 군상들의 행태가 폭력성과 혼돈의 양태를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 비지식의 행태와 이의 유사양식인 이중 신비화의 위선이 이 사회의 정의와 도덕성, 그리고 진실을 방해하거나 후퇴시키고 있다. 이제 대선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새로운 정상국가의 과정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철저한 대개혁, 대수술을 통해 이 사회의 단물을 70여 년 간 독식하며 건강한 시민들을 병들게 했던 암세포를 확실히 도려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손상된 마음과 신체가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선거가 끝나고 환희의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다른 마음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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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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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법 오래된 추리소설은 그 시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착각, 소위 라캉의 말을 빌면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갖는다.”라는, 허구는 실재와 접속하여 우리를 기만한다는 영원한 진실을 상기케 하는 작품이다. 국역(國譯)된 소설의 제목이 마술 살인인 것은 아마도 추리문학이 지니는 구체적 단서가 될 수 있는 원제목 ‘They do it with mirrors'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거울을 사용한다는 문장만으로 소설 속 사건의 실마리로 바로 직결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에 해박한 독자들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출판편집자의 노파심 과잉의 산물이 아닐까.

 

이 소설은 가장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 다운 작품이라는 해석이 따라붙는다. 지적이고, 세련된, 그러면서 인간 세계에 대한 깊숙한 통찰의 시선이 배어있는, 읽는 이에게 지성의 즐거움을 한껏 풍요롭게 하는 작품이다. They do it with mirrors는 백발의 노부인 제인 마플이 활약하는 목사관 살인사건, 잠자는 살인마플 시리즈중 최고작이라 할 수 있다. 원제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살인을 한결같이 국역본 제목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 발상이 시대의 정서를 따라가지 못한 유치함 같다. 새로운 한글 번역판본이 출간 된다면 재고해야 될 것 같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정말 의미심장한 작가의 꾀바른 장치라 할 수 있다. 반 라이독 부인은 거울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한숨을 쉬었다.” , 사실 이 문장처럼 소설의 사건을 바라보라고 작가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암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그 해법이 보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거울의 사용이란 이미지가 뒤집혀 보이는, 즉 실제 삶을 잘못 인식케 하는, 마술이나 연극무대에서의 착각의 장치라는 의미를 지닌 영국의 속어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저서 자유; 치유되지 않는 질병에서, 이 치명적 모호성, 자기 매개가 자기 재생산을 추론적으로 신비화하는 자본의 거울효과를 설명하면서 이 소설 제목의 기원을 짧게 소개하기도 한다.

 

제인 마플은 여학교 시절 단짝처럼 지냈던 오랜 친구 반 라이독 부인(루스)의 제안으로 그녀의 여동생 캐리 루이스의 저택으로 입주한다. 캐리 루이스는 이상을 지향하는, 그녀는 악이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선의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루이스의 주변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관한 언니가 친구 마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캐리 루이스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박애주의자 대부호 걸브레드센과 혼인하여 입양한 딸과 친딸을 두었다. 그 후 걸브레드센의 죽음과 함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회계사인 이상주의 공동체를 꿈꾸는 루이스 세러콜드와 혼인하여 대저택 스토니게이츠에 소년범죄자들의 감화원을 건립하여 박애주의적 삶을 꾸려가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한 부류를 장식하는 많은 배역들이 마치 한 무대에 모여 연극을 상연하는 듯한 전개처럼, 이 작품 또한 캐리 루이스를 중심으로 혈연 및 복잡한 가족관계와 감화원의 정신의학자, 소년 범죄자, 정신병자까지 동원되어 인간 군상들의 다면성, 그럼에도 그 엇비슷한 본성들을 전시한다. 걸브레드센과의 결혼생활에서 아이가 들어서지 않자 입양한 딸 피파, 그리고 뒤늦게 가진 딸 밀드레드,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한 후 죽은 딸 피파가 낳은 지나, 걸브레드센의 죽음 이후 두 번째 결혼의 실패 후 부양하게 되었던 피 한 방울 섞이자 않은 의붓자식들, 손녀 지나가 결혼한 무일푼 미국청년 월터, 캐리의 시녀이자 비서인 빌레버양과 남편 루이스 세러콜드의 비서를 자처하는 에드거라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초상(肖像)이 아마 소설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어쩌면 이러한 다채로운 인간들의 면모가 발산하는 그 독특함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인간은 기발하게 다른 것인지. 그러면서도 그 본성이라 할 탐욕, 질투, 혐오, 충동 등은 그처럼 동일한 양태를 띠고 있는 것인지. 막대한 재산을 가졌으나 검약하고, 그러나 결코 인색하지 않은 캐리 루이스의 저택 스토니게이츠에는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기생하고 있다. 이제 사건이 벌어진다. 사실 서사의 진행에 따라 이미 무슨 일이든 촉발 될 수 있음을 독자는 기다리게 되는데, 이상주의적 박애주의자인 루이스 세러콜드가 에드거에게 끌려 서재에서 위협받는 일이 발생하고, 자신이 루이스의 아들이라며 권총을 들이대며 다투는 소리가 캐리를 비롯한 가족군상들의 시선을 모은다.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모호한 총소리 한 발, 그리곤 잠시 후 서재에서 들려 온 연속된 두 발의 총소리, 다급하게 잠긴 서재문의 열쇠를 돌리고 군상들은 세러콜드가 무사함을 확인한다. 그런데, 예고없이 스토니게이츠를 방문했던 걸브레드센의 전처 아들인 크리스찬 걸브레드센이 총상을 입은 채 죽은 것이 발견되고, 수사는 본격화된다.

 

이 소설 또한 등장인물 모두가 의심스러운 용의자로서 손색이 없지만, 작가가 마플의 입을 통해서나, 등장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드러내는 무수한 암시와 혼선의 장치들을 독자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암시가 의미하는 바를 인식하는 것은 결코 수월하지 않은 것이 묘미라면 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감화원 원장인 정신의학자 메버릭 박사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랍니다. 그게 바로 존재비밀이지요.”, 라고 스토니게이츠의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며, 사건을 더욱 오리무중에 잠기게 한다. 아마 마플이 수사관인 커플 경감에게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술사들은 그걸 사람들의 착각 현상이라고 한다지요라고 말하면서도, 그런데 마술사들이 어떻게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라는 것이 이 소설의 진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영국 BBC 방송 드라마They do it with mirrors중에서


크리스찬 걸브레센드는 일 년에 두 번 스토니게이츠를 방문하여 이사회의 중요 안건을 논의한다. 그 회합이 불과 한 달 전에 있었음에도 그가 다시 방문한 이유를 군상들은 추상적으로 짐작한다. 아마 감화원 운영과 관련한 긴급한 사업용무였으리라고,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복선이 추가되는데, 캐리 루이스의 신변에 위협이 발생했다는, 누군가 그녀에게 독극물인 소량의 비소를 포함한 약물을 복용케 하여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있음을 알아차린 크리스찬의 발설을 막았다는 것이다. 사건을 안개 속으로 몰고 가는 인간의 내심은 부정의 부정, 이중부정이 지니는 그 교활한 암막(暗幕)장치와 연극무대의 착각 장치는 쌍을 이루면서 사건의 진실을 더욱 혼돈의 상태로 이끈다.

 

세러콜드는 에드거가 정말 날 쏠 생각이 없었습니다라고 수사 경감에게 그것은 단지 연극이었다고 말한다. 사건의 진실은 바로 이 연극무대처럼 펼쳐지는 사건 당시의 군상들의 시선에 놓여있다. 환각은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 다시 소설의 첫 문장을 새겨 읽어야 한다. 거울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볼 필요가 있다. 착각, 왜곡을 불러 온 무대에서 물러나 관객의 위치가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세상의 실제 현실, 그 실상의 진실이. 막대한 재산을 지닌 캐리 루이스를 중심으로 그녀의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될 인물들, 그러나 그 재산이 군상들 개체마다 그 재산의 필요는 시간의 속도를 달리한다.

 

그래 모든 것이 돈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중심인물, 언제나 이상주의적 선만을 지향하는 온화한 인물처럼 묘사되는 캐리 루이스의 강고한 자기 내면의 믿음은 그녀가 악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 악의 행위조차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시선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지적 총명성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그녀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시간에 지배를 받지 않는 궁극의 진실을 오늘의 독자에게도 선사한다. 이 소설은 추리문학으로서의 품격 있는 서사적 재미도 대단하지만, 내겐 하나의 중대한 발견 때문에 더욱 이 작품에 애착이 간다.

 

칸트가 말했다던가? 모든 자발적 행위는 병리적 원인에 의해 촉발된다.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써 작동시키는 사건도 예기치 않은 인물의 방문, 우연성이 야기하는 필연성이다. 사건의 조건 자체인 수동적 결정은 언제나 내 안에서 구조적으로 벌어지는 나를 분열시키는 타자의 결정이다. 즉 내 안에서 나를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타자인 근본의 환상이란 것이다. 이상향 건설이라는 꿈의 지향이라는 환상은 인간 교화에 대한 긍정의 꿈과 함께, 이를 실행하는 모든 것을 그 환상에 굴복시킨다. 이 환상을 연극이라는 또 하나의 왜곡된 환상으로서의 무대라는 장치를 배치하여 그 벗어날 수 없는 환상에 의해 조작된 인물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 존재일까? 어쩌면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환상에 대한 거대한 실험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무대에서 연극배우인 우리들은 좀처럼 관객이 되어 바라보기가 어려운 숙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지도. 이 영리한 추리문학에 도전하는 읽기는 가히 책 읽는 재미를 만끽케 하는 즐거움을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제공하리라.  "진실은 인위적 모양새를 가장하고, 거짓은 바로 단서 그 자체다.(슬라보예 지젝, 자유 240쪽에서)" 사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란 마치 증상처럼 보이도록 하지만 실상은 페티시처럼 작동한다는 말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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