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역사를 말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역사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모멘트들을 발견하게 된다. 항시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또는 불변하는 정상(正常)이라 일컫는 것에서는 예외없이 반작용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발자크가 말했던가,  생리학은 병리학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발전한다고. 세계에 병리적 현실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할 때 역사는 새로 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바로 이러한 역사교체의 적절한 하나의 보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한 점의 회화, 1812년 프랑스 화가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권력층의 충동적 본능과 야망이 낳은 비이성적 욕망의 극단에 대한 폭로이자 비판이었다.

 

나는 여기서 역사 교체 분수령이 되는 세칭 말세(末世) 현상을 읽었는데, 아마 21세기 현재의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사회의 주소가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종말의 세계에 기술과학주의에 의해 가공된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를 축조하고 제한없는 분노와 증언으로 오직 파괴와 죽음만이 실존을 가능케 하는 세계, 모데란을 읽고 있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고, 생명의 참을 수 없는 충동적 표출이 가져온 파멸의 비극적 서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반복되는 순환인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선악의 논쟁 따윈 이미 무의미한 언설이 되고, 오직 실존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일관한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이러한 폭력적 잔인성에 의존해야 하는 세계가 지금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출처: 이광래 , 미술 철학사 1, 도판118,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제리코호의 뗏목은 모래톱에 좌초한 프리깃함의 선원을 모두 태울 구명보트가 부족해 선상에 있는 나뭇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보트에 밧줄로 연결하고, 그것에 149명을 태운 것이다. 뗏목으로 인해 보트가 나아가지 못하자 밧줄을 끊어 뗏목 위의 149명은 표류하게 되었고. 구조되기까지 단 7일 만에 악의에 찬 동료 선원의 살해와 식인의 야수성으로 단 15명만이 살아있었다는 충격적 사건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공포와 절망, 그리고 광기로 채워진 그림은 당대의 난파된 인간성의 적나라한 폭로였을 것이다. 이 파멸적 인간 군상의 얘기는 200년 전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 세계에 대한 자성과 비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으며, 또한 지역을 불문하고 동시적이기도 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 그 비이성적인 욕망과 광기의 폭로와 경고는 세기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오늘에도 무수히 읽히고 있는 고전(古典)이 그 실례일 것이다. 16세기 영국 헨리 8세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지적하는 당대 영국사회 상류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야만성의 비판이나 18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가 묘사한 것도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 욕망의 광기 아니겠는가. 20세기 조지 오웰의 1984도 사실 이러한 인간성 말살의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엽부터 홍수처럼 배설된 문학작품들은 거의 모두 인간 세계에 만연한, 아니 만연함이 넘쳐 현실을 벗어난 환상과 가공의 세계로 넘어가 이 던적스러운 인간성을 떨어내려 몸부림치고들 있음을 본다.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인간 본연에 대한 물음을 통한 자기 성찰의 사유를 촉구하는 문학과 미술 등 예술작품들이 그 영향력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어쩌면 괴팍한 취향 아니냐고 시비를 삼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末世라니 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속하여 말세를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경고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동질과 동일의 반복이고, 그것은 차이와 다름에 대한 갈라치기고 차별과 분리, 계급이라는 이원화된 불평등의 고착이요, 야만과 폭력의 안주이며 승인일 것이다. 같음의 반복은 정체이고, 타락이며, 부패이고, 착취이며, 탐욕이자 폭력이다.


1790~1794년에 잇달아 발표한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에서 이 세계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국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가 인간 타락의 근원을 대립을 강요해 온 이원론적 가치 체계임을 지적하였듯, 이 오래된 인간의 분리주의적 욕망은 환상적 세계에서나 그 개념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의 부식과 마비로 인해 일어나는 오늘 한국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극단적 상황은 아마 결코 새로운 인간세계의 현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의 창조적 모색을 위해 함께 머리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본질상 동일과 동질을 통한 기득적 권력의지의 항속화의 욕망을 위해 자기와 다른, 차이에 대해 억압과 구속을 정체성으로 하는 수구(守舊)주의자들에 대해 근원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자유와 해방을 삶의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태생적 본성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그 동일성을 반복만 하려는 나르시시즘의 욕망에 역겨움을 느낀다. 끊임없는 자기회귀, 그 극한의 자기애에 대한 욕망은 타자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본질이란 결핍이고 부족이다. 빼앗겨 상처받은 자들은 그 결핍으로부터 끊임없는 탈주를 시도하기 마련이고, 바로 그 시도의 역동적 동태성이 역사적 전환을 생산한다. 잃어버린 욕망의 억압과 구속에서 풀려나려는 자유와 해방의 추구가 거대한 새로운 흐름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탈주의 욕망, 문화적 불안정성과 영혼의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인간 세계를 간파한 흔치않은 철학적 사유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을 나는 사랑한다. 19세기 산업사회화 된 프랑스의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피폐와 야합하여 무관심과 몽매성에 빠져들었던 것은 21세기 오늘의 인류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부정(不淨)한 나르시시즘,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나를 사랑하기는 사실 탈출구가 막힌 부패한 영혼의 망상적 헛소리처럼 들린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라는 없는 것에서 대체 새로운 무엇이 발굴될 것이라는 것처럼 황당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출처: 이광래, 미술 철학사 1, 도판 321, 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1881


내가 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작품 우는 거미, 1881는 종()이나 생명의 일탈 같은 수구적 질서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은 그 낯섦만큼이나 강렬하게 인식된다. 마치 카프카의 오드라데크(가장의 근심)나 갑충(변신)처럼 말이다. 즉 생리학의 지식이 병리학이라는 일탈로부터 얻어지듯, 그 어떤 인식론적 장애도 넘어서려는 초월적 욕구의 의지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르동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미라보나 불편해했던 졸라와 같은 기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들의 비난이란, 역사라는 거대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보잘 것 없음이 보이듯, 우리는 역사의 조망 속에서 무엇이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나는 권력 담론을 휘두르던 에밀 졸라의 당대 예술인들을 향한 자의적 비난의 목소리들에서 권위와 동일성을 강요하려는 타자에 대한 억압을 본다. 자연주의자임을 자처하며, 당대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하고 참혹한 삶에 주목케 하려던 사실주의에 대한 잔혹한 말들이 얼마나 일방적 언어였는지, 그 자폐적 언어의 무자비한 사용에 반감을 지우지 못한다. 때문에 즉물주의(卽物主義)의 그 발가벗은 사실화들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쿠르베의 반()부르주아적 그림들을 좋아한다. 파리 코뮌의 적극적 선봉자로서 민중의 고통을, 지배층의 위선과 기만의 폭로에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로 나는 기억한다. 어쩌면 이렇듯 인류는 소수의 눈 밝은 이들의 말세에 대한 통각(痛覺), 그 경고의 메시지들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벗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지역적으로 고립된 시공이 아니다. 세계 어느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현상이나 사건도 곧 세계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누려왔던 친일 반민주적 일군의 소수집단은 변태적 극우화, 아니 사대주의적이고 극단적인 권력과 재화의 욕망 집단임을 수치심을 잊은 채 광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비단 동아시아의 귀퉁이 작은 반도 국가의 현상만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이러한 우경화된 탐욕의 정치 세계를 항해하고 있다. 일종의 말세(末世)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말세에 대한 자각, 소수의 민감한 통찰자들은 역사 교체시기에 여지없이 등장해왔다. 그것이 특정한 한 인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거대한 조류처럼 예술과 문학, 철학 등 인문적 흐름으로부터였다. 물론 자연과학도 인간 계몽의 한 축이었으나 그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힘(반영)에 실려 왔다,

 

세계의 병리적 현상이 폭넓게 인류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교체를 요구하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신권에 의한 1000년의 억압, 그리고 잠시의 소생시기인 르네상스, 다시 절대왕권에 의한 폭압, 인권과 평등의 시기, 또 다시 독재와 전체주의의 광기, 불안정한 평화, 오늘의 우경화된 광범위한 기술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우리들은 인간의 파멸적 본성을 무수히 보아왔다. 이것은 절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말세 현상을 직감할 때마다 선인들이 지적한 인간성의 본류가 변화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불과 10여년 만에 두 차례의 몽매한 선출권력을 탄핵하였으며, 다시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는 시간이 당도했다. 헛된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사로잡혀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려 나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낯설어 멀리하려 했지만 그 낯섦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향하는 시발점이 되기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말세의 예언이 결정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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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내게 책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고, 물어봐도 되겠냐고 한다. 하라고 했다. 도대체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이에요?’,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말하는 데,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시도)한다는 말인가요?’라고 묻는다. , 쉬운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수없이 이와 같거나 유사한 문장들을 접했었으니 말이다. 언뜻 칸트가 떠올랐지만, 그의 형이상학을 무턱대고 아이에게 들이민다면 더욱 난감하게 만들 공산이 컸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적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다보니 몇몇 생각이 더불어 엉켜 떠올랐기에 몇 글자 적어두기로 했다.

 

1.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

 

왜 말 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려는 것일까? 그저 할 수 없다면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말 할 수 없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존재하지만 자신의 정신(지성)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아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경우다. 아이가 질문 하듯 그 문자적 내용의 이해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심이 없어서거나, 회피하거나 배제해버려 알지 못해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도 다양하게 많아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은 것, 이를테면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혹은 지극한 도)이거나, 가톨릭 등 유일신 종교의 신의 존재에 대한 것과 같이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 경우에 따라 그 말 할 수 없음의 의미는 달리 표현 될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자기 앎, 자기 정신에 의한 해석으로서 지평(地平), 즉 자신의 정신적 시야가 작동하는 범주를 초과하는 낯설고 모르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철학이나 여타 종교적 언어에서 초월적(超越的, transcendent) 혹은 *내재적(內在的)이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나 성자, 부처를 접하는 경험과 같은 신성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감각에 나타난 성스러운 감각을 초월적 경험이라 말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감각이나 정신을 넘어 다가오는 경험이다.

 

이를 자기 지평 밖의 세계, 자신의 정신 너머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어서 초월적이라 말하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나 양태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결국 평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주함을 자신의 지평 안에 있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익숙한 지평 안에 끼워 맞춘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이라는 마치 지평 밖으로 자신의 정신 너머의 체험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아는 범주, 즉 자신을 둘러싼 시선이 가닿고 의지하는 생각으로 이해한 것 이상이 아니다. 이 말은 결국 내재적 인식의 범위, 근본적으로 자기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에 두 번째 말 할 수 없는 경우는 낯설고 전혀 알지 못하는 지평 밖의 마주함으로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 의문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물음만이 있는 경험이다. 이것이 초험적(超驗的, transcendental) 경험(인식)이다. 지평의 진정한 넘어섬, 자신을 넘어선 것을 넘어선 그 자체로 대면하는 인간 인식의 넘어섬(이진경 ,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이다. 그 낯설고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에 물음을 제기하며 자신이 지닌 지평 밖으로 나아가는 처절한 고투의 체험이다. 이 초험적(선험적) 경험으로서 넘어섬은 결코 쉽사리 가능한 접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자기 아집이라는 세계의 협소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 지평에서 배제된 이 세계의 수많은 존재자들과 양태들의 그 이질적이고 생경함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지평 밖의 세계를 자신들이 아는 범주, 지평 안의 의미로 해석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의 오류를 접하곤 한다. 자기 앎의 언어로 말하려보니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표현이 궁색하거나 편벽됨을 면치 못하게 되고, 지평 밖의 진정한 의미는 여전히 배제되고 만다. 이것이 내재성, 또는 소위 초월적 인식의 한계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이처럼 내재성(초월성)과 선험성(초험성)에 따라 그 시선은 극명하게 다르다. 아전인수격 이해와 모름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접근을 통한 참된 본질을 향한 길은 이 세계에 확연히 다른 질서와 체계, 삶의 질을 만들어낸다. 갈라치기, 양극화,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등등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존을 위협하는 내재성(초월성)의 인식은 지양(止揚)되어야 할, 진정 말 되지 말아야 할 말이 출현하는 데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여야 하는 것은 오히려 초험성(선험성)의 그 곤혹스런 표현 불가능한 지대의 무엇이다. 그것이 진정 말 할 수 없는 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

 

내재적 경험(인식)과 선험적 경험(인식)은 자기 앎의 인식 한계에 대한 문제이고, 지평(地平) 넘어서 출현하는 문제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를 그리스 두 철학자의 짧은 대화로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고질적인 사후세계의 물음, 인간의 참된 본질이 죽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담론이다그 핵심 물음과 답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트라시마코스내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고도 간단히 말해 보게.

  필라테스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무()가 되기도 한다네


트라시마코스는 필라테스의 대답을 낡은 계략이라고, 모순투성이의 뻔한 말이라고 비아냥대지만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이 이미 초험성(선험성)을 담고 있어, 내재성, 즉 인간 인식을 위해 창조된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하는 외에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대응한다. 그러고는 선험성과 내재성을 설명하는데, 선험적이란 경험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려 애쓰는 인식이고, 내재적이란 경험의 가능성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말 할 수 있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을 각기 선험적 인식과 내재적 인식에 따른 표현 가능한 말을 하려고 애쓴 것이고, 그 답변은 무한한 것과 무()라는 마치 극단의 표현처럼 여겨지는 말만이 가능했던 것일 게다. 우선 내재적 인식의 지평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육체라는 개체성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즉 무로 소멸한다. 반면에 선험적 인식으로 죽음을 이해하려하면 개체란 궁극의 본질이 아닌 질료의 임시적 형태이고, 본질의 시간적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이라는 전체로의 회귀다.

 

한 존재자의 죽음이 사실 무도 되고 무한도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순을 말하는 인식은 인간의 내재적 인식이라는 지평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그것을 초험성의 영역으로 데려가면 그저 말 할 수 없는 모든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형용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선험성의 표현 불가능한 양태를 어떻게든 말하려하면 그 말의 논리 속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들 말의 궁지(窮地) 탓이다.

 

대승불교의 사상체계를 정립한 인도의 고승(高僧) 나가르주나(龍樹,150~?)어떤 것에 대해서도 본성이 없이 공()하다.”고 궁극의 진리, 지극한 도를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했으니 이 문장 자체도 공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궁극의 진리를 말로 표현하다보니 궁지에 이른 것이다. 문장이 말한 바가 자신에게 돌아와 작용되는 것을 자기 언급이라고 한다. 자기 언급을 통해 스스로가 부정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서구의 철학에도 거짓말의 역설이라는 유사한 사유가 있다. 무언가 우리의 인식 너머를 말하려 할 때면 우리는 이러한 궁지에 이르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말 할 수 없는 것의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다. 여기에는 말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커다란 심연이 있다. 이 심연을 우리는 말하려 애쓰는 것이다. 자신을 무력화하는 피할 수 없는 역설이 우리들의 말에는 있다.

 

3. 맺는 말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차려야 할 것은 이 피할 수 역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어둠이다. 그 어둠의 지대에 있는 존재를 말해야 우리는 그나마 우리들의 지평 밖에 있는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비록 명료한 언어가 되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불명확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접근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지적하는 인류가 그 엄청난 지식의 축적을 으스대면서도 전혀 지혜는 축적시키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지평 안으로 지평 밖의 낯섦을 들여와 그 알량한 인식의 범주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익숙한 습성 때문이다.


아마 이 지평의 경계라는 분별심에 의해 나누고 구분해서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세계란 지평 안과 밖이라는 그 어떤 간극이나 위계란 것이 없다. 자기 안의 앎의 세계와 외부로 가르면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진장하게 늘어날 것이다. 이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좁아터진 자기의 언어로 말하다보면 그것은 거짓과 기만, 무지의 언어가 되고, 세계의 진실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어쩌면 작금의 한국 정치사회에서 펼쳐지는 이 혼돈의 상황도 이 지평의 문제요, 선험적 인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아이의 당연한 의문이 여기까지 왔다. 말 할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 그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말하려는 것은 아마 이러한 것이지 않을까. ()

 















*내재적 경험(인식): 이 표현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으로 그는 인식(경험)을 내재적, 선험적으로 분류하고 이 둘을 초월성의 두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 쇼펜하우어의 논문,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이론8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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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 교수의 선불교를 철학하는(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8세기 당대(唐代) 선승(禪僧) 마조와 그의 제자 남전의 일화가 있다. 마조도일(馬組道一; 709~788)은 부처와 동격으로 추앙받는 지엄한 선종(禪宗)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승이다. 그런 스승을 향해 거칠게 입을 막아버리는 일견 제자의 무례함으로 보이는 대화 장면이다. 남전(南泉普願: 748~835)이 대중에 죽을 돌리는 데 마조가 묻는다.

 

통 속은 무엇이냐?’

닥치거라 이 늙은이야! 무슨 말이냐?’

그러자 마조는 그만두었다.

 

이 짧은 대화의 장면에는 스승의 권위와 제자의 복종이라는 수직의 격차는 사라지고, 동등한 인간의 관계만이 넘실댄다. 아마 이 장면에 대해 권위자들을 대신해서 니체라면 고귀한 것을 알아보는 안목의 결여, 고귀한 것에 대한 경외심의 결여, 그리고 안목 없는 자의 불신과 무례만을 발견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태도를 눈과 손의 안일한 후안무치 선악의 저편, 263라 비난했던 그것이다. 그러나 고귀한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조가 제자의 욕설을 듣고 그만두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마조가 통 속에 든 죽을 물은 것이 아님을 남전이 모르지 않았으며, 통 속에 든 당체(當體), 즉 직접적 그 본체를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어 이전의 것이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욕설로 스승의 입을 거침없이 다물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조 또한 제자의 거친 말에 담긴 의미를 이미 헤아렸으며, 침묵으로 그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두 사람의 깨달음의 지혜가 오고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이 공안의 해석은 주제넘은 짓이기에 논외로 하기로 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오늘날 사상을 비롯한 학문과 문학, 예술의 세계에 넘쳐나는 담론지배 권력을 가진 이들의 행태에서 보이는 고형화(固形化)된 권위가 이 두 고승에게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분야에서 높은 곳에 이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권위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권위관계가 지속되는 속에서는 가르치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무비판의 세계를 낳는다. 지엄한 위계 관계의 틀을 넘어서는 그 어떤 말이나 행위도 니체의 말처럼 무례로, 안목 없음으로 불신으로 비칠까 염려되는 마음에서 몸을 도사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고와 행동의 여지를 열기위해서는 지고한 안목을 얻은 자, 경외 와 존경을 얻은 자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엎어버리는, 권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경계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망각하고 수직적 권위 속에서 자신의 의사를 밀고 나가면 그것이 바로 독재와 전제적 권력이 되고, 수많은 진실의 목소리가 억압되어 멸실되게 된다. 외곬의 독선으로는 결코 그 어떤 진리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게 됨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마조는 바로 그 권위를 허물어 욕설마저 주고받는 스승과 제자의 고식적인 위계가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럼으로써 제자, 배움에 있는 자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기틀을 펼치고 밀고 나갈 수 있으며. 스승과 제자는 진리에 보다 견고하게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와 달리 경외감으로 시작되는 존중의 태도에 올라타 고귀한 것을 보호하려는 관습과 제도를 만들어내고, 이에 복종과 경배를 요구하며, 급기야 권력을 장착한 권위로 고형화되는 담론지배자들의 행태가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횡행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하다보니 무수히 다양하고 창의적인 견해들이 권위의 그늘에 의해 지워지고, 폐기되어 사장되어버려 지식이 성장할 수 없는 불모지대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세계를 선도하는 학문의 출현이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앨프리드 레드클리프-브라운(Alfred R. Radcliffe-Brown 1881~1955)은 그의 대표저술인 원시 사회의 구조와 기능(Structure and Function in Primitive Society)에서 특정한 종류의 언행 회피(금지) 여부에 따른 인간관계를 농담관계회피관계로 두 분류하였다. 무례와 비격식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 관계를 농담관계로, 지위고저가 뚜렷하고 위계와 권위가 지배적이어서 특정한 언행이 금지된 관계를 회피관계로 구분한 것인데, 바로 이 회피관계의 태도가 한국의 학문과 문화계 전반을 잠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내게 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바로 이 같은 권위의 수직관계에서 이탈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문학 담론권력의 질서에 있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마조와 남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야기의 논의를 마쳐야겠다.

 

담론 권력들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회피관계가 만들어내는 특성을 모른 체 하기로 일관한다면, 자연발생적 경외감과 존경심은 차단되고, 고귀한 것을 알아볼 기회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제약되고, 정해진 규칙들, 관습화된 권위의 규칙들이 사고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그 어떤 진실과 진리도 출현하지 못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 진정한 존경이란 모든 비판을 견뎌낸 것에 대해서만 주어진다.”는 글은 바로 이러한 관습화된 제도적 권위관계, 담론지배 권력의 권력을 깰 때만 진리의 가능함의 역설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웃음관계의 회복이다. 심각한 권위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웃음에 거리를 두었던 권위적 담론가였다. 이 같은 진지함, 딱딱하게 굳어진 관념이나 가치를 가볍게 넘어서고 흔들어 버리는 힘, 권위를 타고 넘어가는 힘으로서 웃음의 관계가 관(貫流)류 할 수 있도록 회피관계가 열려야 한다. 웃음은 여유와 유연성에서 나오는 확고함에 거리를 둔 능력이다. 또한 내가 확신하는 가치와 믿음이 망가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웃음은 집요하게 나라고 주장하는 아상(我相)을 깨드리는 시도이고 권위에 반항하는 행위이다.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한 담론 권력 앞에서 주눅 들은 젊은 천재들의 목소리가 죽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정말 소름끼친다. 이진경 교수가 이 웃음의 능력을 위해 소환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가상의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불타죽으며, 쉽게 웃는 놈들을 그냥 두지 마라!”는 호르헤의 외침은 오늘의 담론 권력자들의 독불장군식 권위의 집요한 탐욕의 소리로 들린다. 작가는 그의 죽음으로 더 큰 진실의 목소리인 웃음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라!”만 들리도록 한다. 진정 세계적 사상을 주도하고자 하며, 과학적 진리의 새로운 형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회피관계 속 권위놀음이 아니라 농담관계, 그 동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마조와 남전, 스승과 제자의 그 허물없는 진리를 향한 대화의 장면이 우리 담론세계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진경 교수의 번뜩이는 혜안에 의존해서 짧은 의견을 끄적여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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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케임브리지종신 석학 교수인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 Ignorance: A global history2무지의 결과11장에서 13장에 이르는 정치와 재앙, 비밀과 거짓말에 대한 읽기에서 떠오른 상념의 記述입니.

 

1. 무지의 사회적 분배

 

비밀과 은폐, 공작 또는 음험한 기획에 열중하는 권력이 자신들의 관심사 이외에는 무관심과 함께 무지가 따르는 것은 불가피한 양상일 것이다. 해서 이들 권력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무지를 아주 폭넓게 공유한다. 그렇기에 만일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또는 불의한 사정이 드러나면 이들은 부인, 부정, 거짓말, 무책임으로 방어하곤 한다. 즉 관련된 인물들, 아래로는 지방부처의 수장에서부터 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공적 부인을 통해 거짓말로 상황을 돌파하려하며 그 거짓말의 취약부분이 들통 나면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다시 부인하면서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부인하는 거짓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거짓말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사회, 정치학자들의 일관된 견해이다. 즉 그 권력 집단의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전 정부에서는 총명한 관리였는데, 급작스레 아주 멍청한 각료가 되어 횡설수설하며 그 어떤 소신도 밝히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적잖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침묵으로 응답하고, 또는 모른다고 하는 양상이다.

 

국회 청문회에 소환된 각 기관 수장들이 예고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들어 버린 후, 하나같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없었으며, 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태연스레 드러내기까지 했다. 피터 버크 교수는 결함을 지닌 결정권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기술을 지휘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드는 사태는 불가피한 무지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무지준비 부족’”이라 단정한다. 지금 재난에 대한 권력의 무책임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행태에 내재된 무지의 속성을 살펴보고자 하기 위해 일례로 시작한 것일 뿐이다. 뜬금없이 누군가는 무지는 즐거움이라는 당치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지만 무지는 대부분 삶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구성한다.

 

2. 무지는 공적 부인(否認)이라는 거짓말 형태로 표출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는 오랜 학습을 통해 재난에 대한 대비책을 알고 있다. 결국 효율적이고 장기적 대비를 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재난은 거의 모두가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의 어느 책임자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불가피한 재난이었으며, 오히려 피해자들의 부주의 탓이고, 나아가 불의한 세력의 사건 날조라고 떠들며, 반국가세력의 음모라고 궤변(詭辯)을 주절거리기까지 한다. 공적 부정은 허위 정보의 한 형태이며, 사적 부정이나 침묵은 고의적 무지라 했다. 즉 알지 않으려 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에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59~1962년을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시기라 부른다. 이때 3,0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세계사의 어디에도 이만한 규모의 아사(餓死)를 기록한 기근은 없었다. 서구를 따라잡겠다고 자신의 천재성과 무오류라는 무지와 오만으로 파종과 수확을 해야 할 농민에게 철 생산을 독려 했다, 이것은 위신구라는 농촌 공간을 배경으로 황허유역 모래밭에서 흙철을 모아 철 생산에 내몰린 농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적나라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한소설가 옌롄커의 四書그것이다. 결과는 심각한 식량부족과 대기근이었다. 마오쩌뚱 정권은 자신의 실수는 은폐하고, 생산통계는 조작하고, 인민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마오는 물론 정권의 그 누구도 책임지질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농민 탓, 인민 탓이었다. 이 끔찍한 엉터리 운동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너무도 자명한 순리였다.

 

이 실패한 약진 운동에는 아주 흥미로운, 지금 한국 사회에 펼쳐지는 희극 장면으로 다시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와 인간 권력의 반복 유사성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무지의 양상을 발견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곡물 생산을 늘리라고 종용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는데 방문 이동 경로는 하나의 연극무대로 사전에 철저히 연출된 현장만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무지는 항상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이것은 전제주의나 독재권력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반복되는데, 농협의 대파 한단 가격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연출된 무대에서 벌어진 부득이한 연극일 게다. 바로 이 권력이 권위주의 독재 권력을 지향하고 있음의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지점이다.

 

사실 이처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서민 대중의 삶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는 독재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무의식적 무지이자 허용된 무지만이 발견되는 것이고, 그나마 무지의 단순성 때문에 비난의 대상을 명료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두에서 언급한 무지의 사회적 분배로 인해 권력 집단에게 광범위하게 무지가 작용할 때 그 무지는 대개 알고 싶지 않거나 알아서 무시하는 무지이기에 그 결과는 사회적으로 심대한 손상을 가져오기에 예사로운 무지가 아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특히 권위주의 권력이 구사하는 여러 형태의 무지를 보았는데, 그것은 무시, 은폐와 조작, 부인이라는 양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이 더 내재되어 있는데,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가 무능과 안일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오로지 시민의 고통으로 안겨지는 것이기에 아주 나쁜 무지다. 마오쩌뚱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어떤 사실이 발생했음에도 부인하면, 공식 대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결국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고, 무시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마오쩌뚱은 기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측근의 고위관리들 역시 무지를 가장한 채 책임을 회피했다. 어째 너무 닮지 않았는가?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고 진행 중인데,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거나 무시하면, 당연 무지로 인한 무능,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방치가 발생하고, 문제는 곪아 터져 국민의 삶을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국민을 볼모, 희생양으로 삼아 벌이는 권력의 행태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정치 퇴행은 물론이고 경제적 사회문화적 몰락으로 이어지기에 그렇게 일시적이거나 단순하게 취급될 사안이 아닌 것이다.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마당에 무지와 관련한 희생양 증후군(또는 집단 편집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난하는 저열한 수구적 무리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에 편승한 무지도 바로 하나의 집단 편집증 현상인데, 어떤 예상치 못한 재앙이 일어났을 때,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책임을 돌려 가해 당사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 책략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사태는 너무 비근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자 기득권 세력인 영국 국교 집단은 박해받던 가톨릭 신자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거짓 소문을 내서 자신들의 적을 쓸어버리는 발작을 했다. 이른바 희생양 증후군이다. 범죄행위의 가해자인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추악한 무지의 일면이다. 이들은 결코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코 깨어나지 않을 무지이다, 때문에 이에 기초한 지식은 항상 왜곡되고 조작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집단 편집증(희생양 증후군)은 곧 무지의 한 양상이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대학살(조선인을 포함 15만 명이 사망)도 조선인의 방화와 약탈, 그리고 우물 독극물 투입으로 일본인이 무고하게 죽어나가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희생양 증후군의 대표적 사례이다. 다시 말해 재난 대비 부족에 대해 응당 책임져야 할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희생양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는 대중의 무지를 토대로 한다. 정보가 부족해지면 그 진실의 빈 공간을 소문이 대체하는데, 이는 예외 없이 왜곡과 조작된 허위와 거짓 정보로 채워졌다는 것이 역사의 실증이다. 1980년 광주시민이 무참하게 학살된 민중항쟁 운동 또한 북한 특수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침투하여 벌인 정당한 군사행위라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떠드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한 의도된 고의적 무지의 한 형태일 것이다.

 

제주 4.3사건 또한 학살의 책임을 피해자로 돌리는 무도함과 무지함의 반복이라 할 수 있는데,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4.3사건은 금기어였다. 마치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발설하면 투옥되듯, 철저한 금기어로서 기억에서 지워야하는 어휘였다.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인식하는 알려진 무지였다. 이웃이 끌려가고 무수한 총소리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알지만 몰랐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군경에 의해 똑같이 죽을 수 있었기에 기억에서 어떻게든 지워버려야 하는 사실이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은 세계 도처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수히 벌어졌고, 그 진상을 밝히는 데 대부분 50여년의 끈질긴 추적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했다. 19404~5월 폴란드 장교 2만 명이 비밀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살되고 카틴 숲이라는 곳에 묻혀버린 역사가 있다. 폴란드 공산당 정권은 논의를 금기로 하고, 실종된 장교들의 날짜를 조작 날조했다. 그리고는 독일에 그 책임을 돌렸다.

 

1989년에야 진상이 규명되고, 러시아 보리스 옐친은 바르샤바 기념탑에 서서 사죄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던 이들이 모두 죽으면 영원히 그 사회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동일한 사태를 반복되어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 기억상실증은 국가가 후원하는 스포츠다!”고 말했단다. 고위 정치인들의 청문회에서 우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수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간들을 보게 된다. 선택적이고 고의적인 무지는 모두 거짓말임을 역설한다. 독재 권력에 편승해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나누어 가진 고위 정부 관료들은 소위 고의적 허위 정보,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더러운 속임수, 기만 게임에 동참하는 것인데, 자기들만의 폐쇄적 정보를 이용하여 조작, 날조, 은폐를 일삼으며 일반 대중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고자 한다. 독재 권력은 항상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대중의 무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제거하고 싶은 정적에게 조작된 범죄 사실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권력(檢警言)을 이용하여 상대의 평판을 훼손하며,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저열하고 악질적 행위를 하는 것도 결국 무지에 대한 의존이 배경이다. 때문에 그토록 언론기관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으려 안달하고, 언론에 대해 사전 검열을 자행하고, 금서 목록을 지정하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독재 권력에 반하는 사회문화 및 정치 인물을 공적 진입에서 배제하려는 것도 대중의 무지를 유지, 지속하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무지가 이 사회를 좌우하고 있기에 비밀주의와 은폐, 조작과 날조된 거짓으로 진실의 공간은 늘 빈자리가 되어 그 자리에 의심과 혼란이라는 소문이 꿰차는 것은 필연이다. 그만큼 사회는 분열과 극한적 적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사회의 각종 미디어가 온통 거짓말과 조작, 왜곡, 날조된 말들로 채워져 거짓이 활개 치는 것은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나 생성형 AI 탓만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무지의 형태가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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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생각이란 것은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나르시시즘, 즉 지극한 자기애, 자기만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한 좁은 시선이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생떼를 쓰고, 그것에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굴복시키려 한다. 이것이 성취되지 못하면 그 불쾌감을 사방에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 것인데, 린츠 철학교수인 로버트 팔러는 그의 주저 성인 언어, Erwachsenen sprache에서 이것은 자신인  “‘의 모든 기분과 심적 상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만 긍정하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정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한 말, 그것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고집하는, 극단적으로 편협한 목소리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각종 온라인 사회적 연결망에는 이러한 고집불통의, 게다가 감수성을 자극하는 말초적 언어만이 넘실대고 있다. 정치사회는 이보다 더욱 극성을 부리며, 모두 자기 이익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보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 부재에 빠져 타인을 기괴한 괴물, 적대적 범죄자화 하여 이 사회에서 그 어떤 공론도 형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극심한 갈등과 분열, 다시 말해 어떤 연대나 통합도 불가능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 Nexus에서 역설하는 주요 내용 중 하나인 정보의 독점을 통해 다수의 대중을 무지로 몰아넣어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것, 전체주의 독재에 대한 권력의 욕구 또한 이러한 어린아이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이런 것일 테다. 카프카의 소설 자칼과 아랍인은 이를 짧은 이야기에 멋지게 담아내고 있다. 고기를 먹기 위해 아랍인에 순응하면서도 아랍인이 휘두르는 채찍은 피하기를 바라는 자칼의 배반적 모습인데, 이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수용하기는 싫으면서도 그것에 존재하는 과실은 취하기를 바라는 모순적 욕구를 상징한다.

 

어린아이, 혹은 자칼이 이 세계와 주변부를 암흑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 치명적 단점은 다른 사람이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동일한 수준으로 고려할 수 있는 언어의 성숙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욕망과 무의식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라캉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곧잘 어린아이를 거울 단계의 이미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으로, 이때 발생하는 하나의 불완전성이 자기 육체 이미지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분열, 즉 공격성 및 공격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을 규제하는 타자성의 영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요인으로 무진장 발생한다. (흔한 사례: 거울을 처음 보는 동물들의 반응을 보라. 으르렁대거나 폭력을 행한다.)

 

그 결과, 사실 겉으로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지만 속, 내면은 욕망 규제 영역인 대타자의 담론(구조화된 법칙 등)이 들어서지 못한 여전히 어린아이 단계에 멈춰버린 사람들이 군중의 무리 속에서 활보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사회의 권력을 차지하게 될 때, 세계는 하나로 고정된 의미에 속박되고, 나르시시즘과 차이와 결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오직 쾌락원리에 종속된 오늘과 같은 끔찍한 세계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지난 23일 이 사회의 선출된 권력자의 대국민 담화의 요지는 이렇다.   좌고우면 하지 않고 일하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이 자기 의지의 표명은 국민의 뜻이나 잘못된 국정 운영에 대한 수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말이고, 나아가 누구의 의견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독재 선언이랄 수 있다.

 

민의에 선출된 권력이 선언한, 그 민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매우 심각한 발언임에도 이 사회의 정의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책임질 것이라 믿었던 민주주주의 사회의 자정(견제)장치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만을 전달할 뿐, 어린아이의 미성숙함, 나르시시즘, 폭력성에 대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린아이의 성장하지 못한 타자에 대한 몰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다수를 지배하는 권력이 된 어린아이에 굴복해야지만 사태가 끝날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욕구에 저해되는 그 어떤 의견이나 행동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로 독재자가 된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사회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면적 아이에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을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 단 번에 성숙시킬 도리는 없다.

 

어쩌면 어른으로의 성장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오랜 학습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도구가 독서다. 세계에서 가장 책 안 읽는 나라로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회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왔다는 사실은 순전히 번역어로서의 국외의 시선이지,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급작스레 인쇄가 몰려들어 책의 매진 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이 사회의 독서가 타자의 담론 세계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취약한 지대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일 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사람인지, 무지를 대표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이의 무례함과 무지한 욕망의 보기일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거대한 표본을 가진 사회적 실험 연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필요한 사회적 연구 과제여야 할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차원적인 인터넷 공간에서 무수한 타인의 말로 이루어진 정보와 지식을 얻고 있는데, 책 읽기가 무어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비아냥댄다.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 Proust and the squid에서 정보 문맹을 지적하면서,  '지속적 부분주의 문화', 다시 말해 임시적으로 이것저것 때마다 요구되는 정보를   순간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짜깁기식으로 보는 것은 그 어떤 심층 지식도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문해력, 읽고 해독하는 능력의 저하로 이어지는 데, 지적 능력의 편협성을 가져오는 위협 요인이라 지적하고 있다.

 

지금 온라인 의사소통 망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의 언어들은 어린아이의 나르시시즘과 낮은 문해력을 강요하는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이 만들어낸 필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교사들은  "독서하는 삶과 유년의 교착상태에 머무는 것, 둘 사이의 티핑 포인트가 감정적 연대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력을 요구하는 학습이 능사인 사회에서 특히 수십여 년간 이 땅의 교육 현실은 인간 성장에 중요한 감정을 느끼고 이입하는 것을 학습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결여는 예측, 추론, 공감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양산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글이 장황하게 여기까지 치달았는데, 요지는 이렇다. 권력에 대한 불쾌감을 지적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미성숙한 나르시시즘을 탓하려는 것도 아니며, 책 읽기를 권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의 거리를 둔 자아성찰, 여기서 시작되어야 이 세계의 소통과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야 사람을 연민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작은 길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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