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평짜리 숲 트리플 30
이소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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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소설은 또 하나의 사고(思考) 실험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적 사회와 삶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문학작품들이 수많이 등장했음에도 우리들은 여전히 그것들에서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곤 한다. 평등이 주어지면 자유가 실종되고, 자유가 주어지면 계급과 불평등, 착취의 구조가 은연히 드러나기 일쑤다. 문학평론가 조대한이 해설에서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말한 사회적 적대들(antagonisms)'을 인용하여, 사회 체제 속 내재된 모순과 균열, 틈이 바로 사회의 원동력을 지속케 하는 조건 그 자체임을 말하듯, 우리들이 희구하는 이 세계의 무수한 균열들과 모순을 깨끗이 없애는 것이 과연 정말의 이상적 사회일까 하는 물음이다.

 


소설집은 3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궁극에는 이 같은 하나의 물음으로 모아지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열두 개의 틈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미 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틈이란 지구가 자전축을 잃고, 이로 인해 해수면 상승과 공기층이 무너져 난파된 구조선 같은 열두 개의 에어포켓에 난민처럼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임시 거주지를 의미할 것이다. 이 단편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이처럼 더는 살 곳이 못 된 지구에서의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상황을 선명하게 인식한 사람들,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신이란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거나 앎의 의지가 없기에 자신들의 믿음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추앙하며 자신들 몫의 앎을 떠넘기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알량한 생을 이어간다. 만일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천문학자라는 아감마는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과학을 그들을 기만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신적 존재로 군림한다. 이 맹목성은 눈먼 재물을 빼앗는 더없이 좋은 방편이다. 소설은 궁극적 물음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아진이린이라는 열일곱 소녀들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에어포켓이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되기에 두 곳의 장소, 데저트랜드와 아이스랜드로의 이주라는 최후의 선택이 주어진다. 낮만 지속되는, 가끔 비가 오고, 몸 뉘일 공간이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지만, 돈이나 다른 재산을 내면 보다 넓은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데저트랜드와, 식사와 직업도 제공되고 시설은 아주 좋지만, 극야로서 밤만 계속되는 영하 58도의 아이스랜드에서 택일하여야 한다. 가족 간의 논의 끝에 아진네는 데저트랜드로, 이린네는 아이스랜드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아진이 헤어지기 전에 이린에게 건네는 책이 바로 이 소설 세 평짜리 숲이다. 이 책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만 남기기로 한다.

 

단편 세 평짜리 숲은 데저트랜드로 이주한 아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진 모녀가 할당받은 공간은 각자 한 평의 마굴이다. 몸을 뒤척일 수도, 화장실도 없는 공간, 일자리도 구하기가 어려워 생계도 곤란해지는 그야말로 철저한 각자도생의 세계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반타 빌리지라는 철저히 경계가 세워진 궁전 같은 주택들이 있는 부유층의 거주지가 있다. 돈을 벌지 않으면 한 평의 공간마저도 잃고 죽음의 길만이 열려있는 이주자들의 삶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진은 아감마가 에어포켓에서의 대중들을 기만하고 착취한 재화로 반타 빌리지에서 고고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믿음조차 연명할 수 없는 곳임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아진은 생존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을 하는 데드샌드에 가입한다. 광케이블을 훔치는 일의 망보는 일부터 시작하지만, 이내 공기가 희박한 에어포켓에서의 삶에 익숙한 신체를 이용하여 심해에서 케이블을 찾아 훔쳐내는 일을 맡고, 목숨을 건 행위의 대가로 방 한 평, 두 평을 모은다. 그곳은 오직 자본에서만 비롯되는 삶의 영위만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진과 데드샌드의 보스와 주고받는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돈으로 못사는 자유가 있다고 그랬어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를 사, 바보 아니야?

자유를 주지, 돈이 있어야 자유를 살 수 있을 거잖아. 난 돈을 줄게. 넌 그걸 착실히 모아서 자유를 사는 거야.“ -66


아진은 보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충성을 다한다. 반타 빌리지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대가로 받은 부동산을 절약하며, 악착같이 모아 스물 네 평짜리 집을 가졌을 때, 아진은 보스가 나누던 대화를 엿듣게 되고, 돈을 다 모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상층과 하층을 연결하는 브릿지 노릇을 하며 부를 모아 반타빌리지에서 살며, 자유와 부의 여가를 누리는 삶을 위해서 주인과 하인의 그 시원적 원칙인 춘권과 엘리스의 이야기를 실천에 옮긴다. 이렇게 이야기를 서술하고 보니, 아진이라는 인물이 뚜렷하게 그려진다


철두철미한 자본지상의 세계, 자유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세계, 아진은 그 체제가 지닌 모순에 직면해 주저앉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런데 그 부딪침이란 모순과 부조리를 전복하여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그저 자신만의 돈이자 곧 자유의 권리를 위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돌파한다. 결국 내재적 한계를 지닌, 즉 모순과 균열을 그대로 유지하는 체제내적 홍길동식 출세주의로 보인다. 모든 것이 봉쇄된 삶의 조건을 가진 자로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싶지만, 그런 세계는 결국 다수의 노예화와 약자의 착취와 희생을 거름으로 한 악취가 맴돈다. 지극히 경쟁과 이기주의를 기초로 한 체제내적 보수적 선택.

 

세 번째 단편인 창백한 푸른 점은 아이스랜드로 이주한 이린네 가족의 생활기이며, 소설의 대단원이자 세 편 소설의 주제를 하나로 결집한 장이기도 하다. 이린은 아홉시부터 다섯시까지 컨베이어벨트를 오가며 단순노동을 한다. 엄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밥공장에서 밥순이를 한다. 가족 모두 동일한 일을 단순반복하며 살지만, 아주 깜깜한 밤만 지속되고, 일렬로 무한한 듯 길게 열 지어져 지속되는 컨테이너 밖은 별을 보러 나가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다른 꿈도 허가되지 않으며, 오직 아이슬랜드 설비사인 YK건기라는 기업의 규칙뿐이다. 이 규칙에 도전하는 자는 맨 몸으로 밖으로 나가 얼어 죽는 형벌이 기다린다. 얼어붙어 부서져 존재조차 찾을 수 없는 형벌.

 


어느 날 아버지는 딸 이린에게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인데, 어째서 여기는 전부 하나처럼 보일까? 넌 이상하지 않니?”, 이 체제 저항적인 말은 쥐가 듣고, 재판에 부쳐진다. 재판관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 시간이란 내가 원하는 때에 가지는 것이고 진정한 상상이란 내가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꿈에 가까워야 한다.” 그리고 다 같이 가난한 것이 다 같이 잘 사는 것인가요?”라고 항변한다. 재판관은 답한다. 그럼 버는 만큼 부자가 된다는 데저트랜드로 가지, 왜 이곳에 왔나? 최소한의 인권보장을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나?” 이 대화만을 보면 분명 딜레마다.

 

그러나 그 보장된 인권이란 것이 오직 샌드위치와 하룻밤 자는 것이고 꿈꿀 자유의 박탈과, 평생 단순노동이며, 오직 밤만 존재하는 삶의 지속이라면 과연 그것이 정말 보장된 인간의 권리라 할 수 있는가라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의 것을 훔쳐 자기 배만을 불리는 것이 버는 만큼 부자라는 그릇된 정의에 기초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순이고 부정의다. 부정의를 전제로 한 자유의 박탈에 기초해 오직 생존의 가능성만 주어진 평등을 평등이라 부르는 것도 이율배반이고 모순일 것이다. 아무튼 아진의 아버지는 밖으로 내쳐져 이내 바닥에 얼어붙어 다리조각만 남긴 채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삼일간의 가족 애도기간인 휴가가 주어지고 이린은 특수복을 입은 채 컨테이너가 늘어선 길을 걸어본다. 그때 아진은 인공 햇빛을 구현한 가짜 창문도 달려있는 컨테이너를 발견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던 이곳에도 결국에는 계층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끼게 된다. 이린은 아진이 주었던 책과 샌드위치를 한 덩이 특수복 안에 넣은 채 컨테이너의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무엇이 있는지, 그가 발견할 앎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발길을 걷는다. 그녀가 향하는 미지의 미래를 향한 걸음은 아진과 같이 주어진 시스템에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 맞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여리고 작은 걸음의 행보에 더 마음이 간다. 설혹 그녀가 미래를 향한 걸음 중 얼어붙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작가도 나의 믿음에 기울었다고 믿는다. 두 번째 단편인 아진의 시스템 내 단순한 자리바꿈을 향한 투쟁이 아니라 이린의 미지를 향한 걸음을 마지막이자 서사의 총체를, 그 최종적 이야기로 삼은 것은 끊임없이 희망을 향해 걸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운명이며, 후대를 위한 책임의 행보라고 말이다. 샹탈의 체재 내 균열과 모순이 사회의 항구적 존속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말은 일견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그 모순과 이율배반에 저항함으로써 인간 사회는 조금씩 윤리적으로 진전해 나가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오직 시적 정취로서 푸르고 창백한 지구를 우아하게 표현했던 칼 세이건은 아마도 상처로 시퍼렇게 멍든 상흔, 오직 어둠의 그림자와 극한의 추위로 얼어붙어 시퍼래진 손상된 지구, 해수면 상승으로 온통 바닷물만 넘실대는 지구를 상상하지 못했다. 소설은 두 개의 커다란 축을 지닌 물음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그 한계에 이른 생태계 파괴로 인한 근미래에 닥칠 위기라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와 평등, 즉 자본이라는 물질 만능과 이의 공평 분배라는 그 끝없는 조화와 갈등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일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아마 자유와 평등, 생태계 파괴의 물음은 동일한 근원에 대한 다른 관점의 의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모든 것, 인간도, 자유도, 평등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의 근저에는 방임되는 생태계, 즉 자연 자원의 화폐화라는 동인이 있으니 말이다. 일종의 사고실험인 이 소설을 읽으며 오늘의 우리네 삶의 태도와 세계의 정의와 자유, 평등,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막론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젊고 발랄한 기운이 넘치는 문장들이 주제의 무거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경쾌하다. 그리고 호흡이 짧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어느새 작품을 내쳐 읽는 자신을 발견케 하는 작품이다. 트리플 시리즈는 일상에 바쁜 사람들도 출퇴근시간, 짧게 주어지는 짬에 읽을 수 있는 책형과 분량으로, 부담 없는 한국문학의 접근 통로이기도 하다. 시인이 쓴 첫 소설이 아닌가 한다. 건강한 r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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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기록 STORAGE BOOK & FILM 5
안윤 지음 / 저스트스토리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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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물은 대지의 시선이 되고, 시간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 폴 크로델, 해 뜨는 나라의 검은 새, p229에서

 

예순 편의 글로 엮인 이 산문집은 작가의 못다 한 말들킬 수밖에 없는 저의 일부분이라서 당장 숨을 곳을 찾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라 하듯, 한 사람으로서의 원초적 반영의 산물들 일 것이다. 작가의 소설집 모린을 읽으면서 나는 안윤 이라는 존재자를 구축해 온 세계들을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원인일 수도 있는 엄마가 늦잠 자는 딸을 깨우기 위해 옆에 누워 즉흥으로 불러주던 우엉 반찬 노래의 기억이기도 하고(그 노래), 시간보다 뒤늦고 여전히 익숙해질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계절의 흐름 사이에 겪는 환절통이며, 네 살 이후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도시 유목민의 습성을 갖게 한 근거없는 불안과 불쾌가 들끓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고향을 말하게 하는 안윤이란 사적 개인이다.


한편으로는 시간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작가의 여러 소설 속 서사 축으로서 흐르는 시간과 적절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조망자의 시선에 대한 어떤 성향 혹은 심리적 배경에 대한 이해다. 이 이해에 대한 요구는 좋아하게 된 작가의 작품들에 보다 감응의 깊이를 더 갖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산문집 물의 기록()’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가리키듯 이미 시간의 흐름, 시차, , 간극과 같은 어떤 식별의 시선을 획득하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산문들의 제목인 강을 건너다, 문턱을 넘다, 얼룩, 얼굴 퇴적층, 간극에 닿다처럼 이미 시간의 차이로 인해 거리를 확보한 관찰자의 시선이나 명상으로서의 관념화된 반성적 사념들이 흐른다.

 

산문 환절통에서 작가는 계절이 변화할 때 몸살을 앓는 자신은 미련하고 뒤늦은 통각으로부터 나는, 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현재를, 계절을 본다.”, 생의 감정주기에 견주어 볼 때 시차가 있다는 가설에 설득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나무의 칠이 벗겨지고 마모되어 거친 속을 드러낸 문지방을 짚어보며 거기 시간의 속살, 시간의 주름이 있다(문턱을 넘다)”고 말하듯 지나간 시간에 대한 비로소의 애도와 그 기록을 통해 해석하고 유추하며 자기 삶의 현재를 감각한다.

 

이 시간과 거리의 필요는 그 풍경의 마지막 기억과 현재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내가 미처 겪지 못한 시간과 공간이 그 틈으로 들어서기 때문이고, 나의 부재에도 풍경이 제 나름의 기억들을 축적하며 변화해 왔다는 사실(간극에 닿다)”에 연유한다. 즉 생의 연속되는 간극에서 충실하게 서성이는 것만이 가능한 존재로서 자신의 부재에 대한 미련에 어떤 결벽성이 작동하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작가는 섣부를 수밖에 없지만 그 섣부름을 지연하기 위해, 그 틈을 충실히 서성이기 위해 애쓰는 시간 낭비자임을 무릅쓴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가진 시력을 초월한 어떤 시선이 한꺼번에 세계의 깊이를 조망(비존재 느낌)”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산문들을 통해 독자들은 독특한 조망자의 시선을 가진 작가 안윤의 작품 세계에 보다 친근하고 밀착된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산문들에서 소설의 어느 한 문장과 유사한 문장을 발견하고 그 맥락과 분위기에서 연상되는 감정에 다가가는 간접적 통로가 되어 주기도 하고, 어떤 특정 소재나 작품의 배경에 대한 단서에 기초해 보다 심층의 함의(含意)로 접근 하는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집 모린에 수록된 단편 에는 계약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의 잔여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틋한 소리를 듣는 수진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작가를 도시 유목민으로 살도록 만든 사연이 흐르는 산문 이사 에서도 곧 있으면 계약 기간이 일 년 남게 된다.”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불안과 불쾌를 상시적으로 강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이러한 소재나 부분적 배경들에 얽힌 사연들의 발견은 눈 밝은 독자들에게 아마 몹시 반가운 발견이 될 것이다. 산문 나무를 심다에는 친구 G와 노을 공원까지 걸어 꾸지닥나무 두 그루를 심는 이야기가 있다. 단편 하지 夏至에 등장하는 지언과 함께하는 노을공원 이별 캠핑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독자로서 당연한 연결일 것이다. , 혹시 소설 속 지언이 바로 G와의 기억과 관련된 것일까? 하는 상상 말이다. 흙과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스스로 살아 주었다는 한 토막의 에피소드는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봄으로써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소설을 보다 깊게 읽을 수 있는 어쩌면 상상의 확장에 기여할 지도 모른다.

 

아마 이 산문집의 글을 또 하나의 산문으로 정리한다면 어쩌면 하려는 말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전 생애를 거치며 구축한 고유의 언어 체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희망, 아니 차라리 탐욕인지도 모른다. (...) 흩어지고 깨지기 쉬운 이 말들이 당신 앞에 가닿아 미끄러지기를, 아름답게 미끄러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당신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고 밑바닥만 내려다보게 되는 어떤 날에, (...) 도달하지 못했던 나의 말들 중 하나를 발치에서 집어 올려 들여다봐 주길 기다린다. 뻔뻔한 이 탐욕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시간과 거리의 적절한 확보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성찰의 대상이 되어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생의 아픔이나 더러움, 부정하고 싶었던 것들이 문득 아름다움으로 변이한다는 사실도 발견하고, 때론 그 아름답지 않은 아름다운 생이 비로소 생을 아름답게 이룩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작가의 시간은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물들기를, 피할 수 없이 기다리기 위한 사유의 지체인 듯하다. 안윤 작가의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면 정말 좋겠다. 천천히 말없이 차를 마시지만 오랫동안 무수한 대화를 나눈 기분이다. 산문집 물의 기록은 작가 안윤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그 세계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글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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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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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자주

바라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갑니다.

수필집 수기 手記를 썼습니다.“

-안윤, 물의 기록에서

 

이 작품집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이겠지만, 수록작 단편 의 한 구절이 아마 어느 만큼은 대표하리라 생각되어 옮겨본다.

 

일기를 쓰듯, 때로는 수행을 하듯 성실하게 셔터를 눌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을,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 단편 , 240쪽에서

 

그래, 소설집은 철저한 관찰자, 인생을 조망하는 시선들, 다시 말해 자기 인생의 궤적과 곡절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시야와 거리를 가짐으로써, 의 사희 말처럼, 인생에서 열기 두려웠던, 여전히 열지 못한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정과 대화를 나누도록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이끄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쩌면 한 번도 상상해 본적 없는 자기 내면의 그 변덕스러운 실체를 마치 다른 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 마음이나 행동 또는 그 주체라고 여기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불변하는 무엇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는존재임을 망각하곤 한다.

 

표제작인 단편 모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과 장애인 영은의 반걸음 만큼 떨어진 사랑의 이야기가 흐른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요제프 코발스키라는 무명의 작가가 쓴 보이지 않은 것들 Invisible things이라는 수필집의 문장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서술자인 미란 혹은 영은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인생 조망자의 시선이기도 한 듯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라는 문장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강렬한 아픔 때문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들이란 주의깊고 세밀하게 총동원된 감각의 종합이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기 위해 영은으로부터 배우는 팔꿈치를 내어주는 반걸음 앞선 자연스러운 동작, 왼쪽 빗장뼈 손바닥만큼 내려오면 깨알 같은 두 개의 점을 스쳐가도록 자신의 몸을 하나의 텍스트로 내어주는 마음, 어느 일방적인 보호와 의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유일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는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남으로써 비로소 해독되는 소설이다.

 

작가 안윤은 이 세계에 펼쳐진 야만적 문제들을 배경으로 삼아 그것에 내재된 현재의 실상을 노출하면서도 그보다는 그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 내면화된 인간성을 관찰하게 한다. 단편 핀홀 Pinhole은 단란한 가정과 무관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보라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훼손 된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기 일 것이다. 그녀는 동거하는 승원의 가족과 자신을 위한 결혼선물로 천에 수를 놓지만 자신의 얼굴만은 빈 공간으로 남겨놓고 주저한다. 누군가를 아는 일에 그 대상을 두고 앎의 정도를 따져보는 일에 사실 나도 서툴다.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물음은 참으로 심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물음이다.

 

소설은 어느 중증장애인이 자신의 온 몸을 투쟁하듯 더디게 완성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떨리는 집게손가락 끝을 문자판 글자에 가리키고 그리고 비로소 원하는 글자에 멈춰 톡, 한 번 건드리며 완성하는 문장, ‘하 여 행 복 을 산 다 오 로 지. 이것은 승원이 싱크대 밑, 소파 밑처럼 아무 곳에나 처박아놓아 집쥐처럼 보이는 양말뭉치의 무신경처럼, 삼십일 년을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에 갇혀 있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한 승원의 형, 정원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보라와 승원은 결코 이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내 앞에 나타난 이 구멍들은 무엇으로 이어야 해, 할머니?” 보라가 죽은 정원이 갇혀 지내던 폐쇄된 시설을 찾아들고, 정원이 남긴 쉴 새 없이 떨리며 남긴 불운의 증명, 행복의 위치 이동을 쫓는 글과의 대면은 자신과의 만남과 다름 아니었을 것만 같다.

 


담담은 양성애자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혜재의 자신 안에 도사린 의심과 불안의 실체 마주하기라 해야 할까? 스스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안달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멀리서 보기, 철저히 관찰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결혼과 출산 생각은 없다고 못 박은 자신에게 묻는다. 결혼은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일까, 나는 약속이 싫은 건가, 조금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사랑은 믿지도 않으면서 욕망만 채우는 것뿐일까에 대한 이 모호한 자기 불일치에 대한 응답을 향한 여정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첫 만남에서 저는 바이예요라는 무심한 발설에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라는 예상치 못한 응답으로 둘은 가까워진다. 이 두 문장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깨달음이 모두 있다. 대체 정체성이라는 것, 뭔가 고정된 불변의 근본이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 대한 몰이해도 없을 것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만남, 동행을 통해 잔잔하게 흘러들어오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둘이 마주한 설렁탕의 맛을 은석이 담담한 맛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삶의 형식이며, 내용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작은 눈덩이 하나는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 이내 돌아서는 사람의 서글픈 허기, 울적한 공허감을 상상하게 했다. 지난 시절 한 때의 아련하게 남은 기억, 그래서 쓸쓸하지만 아름다웠던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자기위로를 삼는 씁쓸한 기억. 첫 장편으로 해외 영화제 수상을 한 영화감독이 된 친구 세진, 전문대를 졸업해 세진보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의선이 함께 살았던 대학시절의 시간이 흐른다. 사년 제 대학을 다니는 세진의 영화동아리 일원들은 세진으로 인해 의선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어울린다.

 

의선은 영화 앞에서 울고 웃는 날것의 활기를 뿜어내는 그들의 열기와 함께하면서도 은근한 소외감을 떨어내지 못한다. 표현하기 어렵고 정량화가 불가능한 내면화된 계급의 주관적인 정신적 상처는 실로 복잡하면서 더러운 사회적 감정이다. 세진의 동아리 선배인 준수는 단편 영화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해 질 때 여기 빛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의선의 자취방을 찾아오고,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몇 차례 만남을 갖는다. 준수의 궁핍을 발견한 의선은 이백만원을 꾸어주고 그가 단편을 마무리하도록 성원한다. 그러나 준수는 단편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둔 채 소식이 끊기고 만다. 의선에게 갚지 않은 돈, 훗날 세진의 수상 축하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준수를 보지만, 둘은 그저 조심스러운 몇 마디만을 주고받은 채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서울숲 근처에 카페를 냈다는 소문을 듣고 의선은 찾아가지만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의선은 스스로의 행동을 미학적 영상미를 흉내 내듯, 몇 발짝 뒤로 물러난 닫힌 카페 문과 유리창 너머에 고인 짙은 어둠을. 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을본다. 즉 관찰자의 시선으로 의선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첫눈을 봉하여 지인의 집 앞에 갖다놓는 약이(藥餌)’의 옛 이야기를 따라한다. 묶인 듯 사로잡힌 정신을 풀어놓는 일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관찰자의 시선을 얻기까지.

 

거듭, 반복의 의미를 지닌 부사가 제목인 단편 는 유효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도수진에게만 들리는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듯한 소리다. 수진은 연인이었던 치완과의 이별에 일말의 미련도 죄책감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삼년 반이 지난 시간, 아마 소리가 들리고부터인가? 혹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휴가계를 내던 직장 동료 강주임이 겪는 전세 사기의 고통을 알고 나면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비로소 유사한 불안에 맞닥뜨려야 감응의 심장이 작동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도 작은 눈덩이 하나에서 내면화된 계급사회의 언어가 스치듯 준수에 의해 발설되어 배경이 되듯, 에서도 인간에 대한 무심코 저지르는 모멸의 장면이 배경처럼 반복되어 출현한다. 도수진 대리는 대리로, 강주임은 주임으로 부르는 직장 상사인 과장이 있다. 직원의 성을 된소리로 발음함으로써 상대방을 은근히 멸시하는 기만적이고 흉측스런 괴물같은 계급권위를 으스대는 행위 말이다. 물론 소설은 이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작가는 이러한 던적스러움을 배경에 삽입하며 이 사회에 만연한 민낯을 풍경처럼 풀어놓는 듯하다. 전세사기로 인한 대출금을 갚기 위해 퇴직금이 필요해 나타난 강주임이 자신의 짐을 정리할 때 그 순간 들려오는 라는 소리는 와 함께 삶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그들 내면의 소리인 것만 같다. 두 사람이 동시에 , 라는 서로의 소리를 듣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하지 夏至는 어느 순간 자신이 운영하던 일인(一人)빵가게를 접고, 타향인 서울과 삼십대와 이별하는 수림이 오랜 벗 지언과 함께하는 이별 캠핑에서의 나지막하지만 삶에 대한 강렬한 깨달음의 목소리들이 깊은 여운을 지닌 작품이다. 자기 성찰이란 상상력이라는 저 밑바닥에 연원을 지닌 무의식과의 만남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한 자기로부터의 거리가 주는 시차는 타인의 행위가 의미하는 투영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상상력, 진실에 가까이갈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네” “인간은 모순 그 자체 내라며, 허상인 이유를 쫓으며 자신을 보호하는 인간의 조금은 서글프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수림이 고향 부안의 바닷가에 낮춰 앉을 수밖에 없는 캠핑용 의자에 앉음으로써 더 높은 하늘을 보며 흩날리는 하얀 가루 입자의 반죽과, 컨벡션 오븐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을 상상하며 그 모든 게 전생처럼 아득하다.”고 말 할 때, 그 이미지의 힘들이 발산하는 부드러운 걸음과 평온함의 강렬한 물성이 수림의 마음 깊숙이에서 스며든 것을 불현 듯 본다.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치유와 세상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킨츠기 공예와 사진 작업이 어우러져 조각조작 깨진 마음의 상처와 충동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채 자신을 속여 왔던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마주함으로써 그 깨어짐의 실체를 말하는 은 아마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을 모린과 함께 대표하는 시대의 작품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나만의 기억으로 삼기 위해 내 너절한 감상은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느 한 작품도 소홀히 읽을 수 없는 정화되고 고귀한 느낌이다. 작가의 책()으로는 네 번째이다. 책을 사놓고는 몇 개월의 뜸을 들였다. 냉큼 읽어버리기에 아까워서였다. 이 작품집 또한 내게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고이거나 흐르거나 때로는 나를 넘어 범람하던 말들,

당신에게 무자비하게 뱉거나 묵묵히 삼가던 말들,

내게로 쏟아지거나 증발하던 말들,

나의 언어는 형태를 갖기에 희미하거나 무르다.“

- 안윤, 물의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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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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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자신의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렸거나, 적어도 그것에 그대로 사로잡힌 한 존재의 증오가 차가운 바람처럼, 모든 것을 불사르는 화염처럼, 인간의 모든 시도와 포부를 녹여 없애는 독액을 질질 흘리는 산성 물질의 구체처럼 이야기 속을 휘감아 돈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불신, 그들이 자초한 조잡하고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가 기어코 초래한 종말적 실체에 대한 이가 빠드득 갈리는 증오와 분노, 무한한 살육과 파괴가 지면을 흥건히 적시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선혈이 낭자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모데란(Moderan)1960년대 발표된 40편 남짓한 장,단편(,短篇)으로 하나의 서사적 연결을 하고 있는 작품들이 엮인 일종의 우화적 사변(思辨)소설이다.

 

이 작품의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 데이비드 R.번치1965에메이징 스토리즈6월호에 남긴 유명한 선언은 그가 쓰고자 한 이야기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좌표가 되기에 짧게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저는 뭔가를 서술하거나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고 이 업계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여기에 섰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버린 대가로. (...) 제가 원하는 독자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커다란 흑십자에 올라갈 독자입니다....”

 

, 그가 묘사한 끔찍하다는 지옥같은 세계는 소설의 주인공인 신금속으로 교체된 강철인간 10번 성채에게는 기쁨이요, 삶의 이유이자, 쾌락이니 오히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운 세계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계는 지독한 오염과 잔혹하고 무참한 전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신세계 모데란은 독성 물질로 오염되고 파괴된 폐허를 로봇들이 단단하게 평탄 작업을 하고, 그 위에 무균 플라스틱 층으로 매끈하게 덮어버리고, 오염된 공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대기층을 파괴하고는 증기 방어막을 월별로 쏘아올리는 인공의 세계다. 사실 소설의 배경인 모데란의 세계는 오늘 우리들이 망가뜨리고 있는 이 지구 생태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양과 대륙 어디에든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매일 대기오염도가 발표되어야 할 지경에 이른 대기의 악화는 어쩌면 이들과 같은 무한한 과학기술의 낙관성, 그 임기웅변과 매우 닮아있다.

 

이야기는 이미 또 다른 종말에 이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임을 증명하겠다고 울부짖었던 존재,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남긴 테이프를 발견한 그네들의 후손이랄 수 있는 일종의 빛줄기인 미래 종족이 그 테이프를 해독해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존재 역시 인간이란, ‘체제를 무너뜨릴방법을 찾아 헤매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듯, 인간이라는 꾸러미는 자기 파괴성이 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소설과 병행하여 읽던 책이 계급의 숨은 상처였는데, 나와 너로 위계의 등급을 만들어내기 위해 능력이란 해괴한 가치체계를 사회화하고 다수에게 상처를 주며 권력을 독차지하는 끈질긴 인간 세계의 파국적 현상을 규명하는 저술이다. 그 책에는 손상된 자기 존엄과 억압된 자유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의 세계가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경쟁의 심리는 곧 모데란 최고의 전사인 10번 성채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 읊조리는 매일이 경쟁으로 구성, 서로에게 고약하게 구는 일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인의 일과라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은 양심의 경향성, 도덕관념을 정신적 장애물이라 일컫기까지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채를 부수거나 이웃의 머리를 망치를 내리치는 것이야말로 쾌락이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작가가 부여한 ‘10번 성채라는 존재는 바로 오늘의 인간들과 이 세계의 소수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능력주의, 경쟁주의, 과학중심주의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교양인의 가늠자이며 파괴는 곧 창조의 다른 이름이라고 외친다.

 


소설은 작가의 선언처럼,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완전히 배반할 만큼 서사적이고 블랙유머로 무장된 재미가 넘쳐흐른다. 10번 성채가 되어 모데란 최고 전쟁의 신이 되는 존재의 외관도 주목할 필요가 상당한데, 그가 아홉 달에 걸친 신체 훼손수술을 통해 92.5%의 신금속과 결합한 7.5%의 살점을 너덜거리며, 그 살점이 바로 인간성, 인간으로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존재론적 의미임을 말하는 것은 정말 괴기스럽고도 우스꽝스럽다. 여기에는 과학은 인간을 만들었다! 신금속 인간을!”하며 과학에 대한 무한한 찬양의 의미에 못지않게 일말의 완전성인 7.5%로 의미되는 인간성이란 것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다. 외전의 한 작품인 언제나 조금씩에서 내구성은 강철보다 견고해졌지만, 그럼에도 증오하고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서는 그대로 인간이었다.”는 금속인간의 자긍심 어린 선언은 역설적으로 과학실증주의의 낙관성에 대한 은밀한 의심과 조롱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이 소설 40여 편의 작품들 면면을 관류하는 사유의 제안들은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을 만들어낼 위험들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에서의 이해에, 삶의 경쟁에 매몰된 우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지, 마치 내일도 오늘처럼 삶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각성(覺醒)케 하려는 물음들의 연결인 듯하다. 그 첫째는 충동조절에 실패하기 일쑤고, 각종 질병과 부상에 취약하며, 제한된 환경 조건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늘 죽음이 따라다니는 조잡한 내재적 조건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의 욕망’, 이에 편승한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대한 선견적인 소름끼치는 인간 욕망의 현주소를 일깨우는 것일 게다.

 

한때 붉은 양탄자가에서 과학은 지저분한 흙덩이 구체에 플라스틱을 입혀 매끈하게 만들어 신금속 인간이 딛고 설 자리를 마련했노라.”라고 외치는 것이나, 신금속에서 궁극의 물질, 신금속, 플라스틱...시간을 뒷전으로 몰아내 우리의 꿈이 살아 움직이는 물질이었다.”라거나, 마음 약하고 망설임이 심하며, 감상적이고 불안하며, 죽기 직전까지 모든 시간을 겁에 질려 보내며 쉽사리 감상에 빠지는....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꿈틀거리는 공포를, 불안을, 위험을, 죽음을! ....”이라고, 살점 인간에서 금속 인간으로 거듭남을 긍정하는 과거에의 일별등이 그러한 과학기술 실증주의에 대한 역설, 혹은 반어적 조크일 것이다.

 

둘째는 모두에서 잠깐 언급했던 경쟁과 계급을 만들어내는 능력주의 신화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신념의 반도덕적 무양심적 사회적 무의식의 관성에 대한 자성일 것이다. 모데란의 일상이란 끊임없는 전쟁이다. 영원을 마주하며에는 이웃 사람을 찍어 누르고 우리의 주도권을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 불멸의 존재가 된 금속 인간은 영원을 마주하기에 실패하지 않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고 보상이 되는 일거리는 단연 계속되는 전면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특히 반구형 거품 주택이라는 수백만의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단독 거주공간을 설명하는 단편에서는 이들 연약한 존재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모두 낭비일 뿐이며, “이 얼마나 한심한 낭비인가! 라고, ! 번쩍! 하고 검은 얼룩으로 변할 것이다, 강철 관리인이 한번 쓸어버리면 간단히 사라질 것이다.”라며, 고작 신체 교체술로 최강의 능력을 지녔을 뿐인 자신을 망각하고, 다수의 존재들을 일거에 쓸어버려도 될 사회적 잉여로 취급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인간, 생물학적 신체를 지닌 인간에 대한 지독한 염오(厭惡)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는 올데란, 즉 구세계의 살점 인간인 구도자가 삶의 의미를”, 소문난 위대한 불멸의 전사로서 그 의미를 현현하는 10번 성채의 초상화로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들지만, 10번 성채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좌절하고 이내 왔던 길로 돌아간다. 그런데 더욱 악취미인 것은 그가 폭탄에 맞아 사망하자 개들에게 구도자에 보내는 선물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뼈다귀를 물게하여 조롱하기까지 한다. 아마 양심에서 해방되고 도덕을 말끔히 씻어낸, 현대의 내면화된 계급주의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인간성을 환기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셋째는 과학실증주의자들의 그 낙관적 실체가 실현되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의 실존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낡은 살점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영구히 지속되는 매일 매일의 삶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재회라는 200년이란 시간이 흐른 강철인간이 옛날 살점인간이던 시절의 신앙과 자립심을 키우고 약속을 신뢰했던 옛 친구의 방문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대지를 폄하하는 논리에 반박하려면, 그리고, 자기 신체를 버리고 강철로 교체된 존재에 대한 의심에 답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인데, 그를 폭사시키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억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이 모데란이라는 신공정 땅 전체는 기억에 의존해 세워진 곳이다. 그렇다! 신공정은 과거로부터, 기억하는 온갖 것들로부터의 도주 과정이고, 그 안에는 기억자체로부터의 도망이라는 뜻이 내포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러,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 비교를 견딜 수 있을까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둘은 서로 만나 눈물만을 주고받고는 바로 이별의 걸음을 걷는다. 돌아서는 친구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200년 강철의 시대가 흘러간 지금, 그의 길이든, 나의 길이든 전부 슬픔과 의심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말하려던 것일까?“라고. 어쩌면 그의 삶은 고작 희망찬 죽음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反問)인 것만 같다. 의심이나 유령이나 공포가 들어앉을 자리를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벌이는 극한의 살육과 전쟁. 종말에는 전조(前兆)가 있다. 사랑과 자기 의심의 상실, 무한 폭력, 금속에도 내려앉는 금속세균의 점진적 침투, 그리고 아주 작은 우연의 돌발성이 그 어떤 불멸도, 쾌락도, 의미도 확신해주지 못한다. 이 강렬하고 독특한 이야기 속 지성의 웅변에 집중하다보면 작가의 말처럼 저 높은 흑십자의 고지에서 인간 세계의 그 흉물스러움을, 그 던적스러움을 옴팍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나오는 기분이 든다.

 

이 세계는 이대로는 괜찮지 않은 것인데, 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일까? 뒤틀린 계급의식과 감정을 내면화시켜 합리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세계,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기초한 인공지능과 탈신체화의 욕망으로 치닫는 과학실증주의의 세계, 보편적 심원한 사색에 매진한다는 지식인들의 편협성 등 파국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내모는 소설이다. SF계의 혁명적 작품으로 불리는 이 소설은 경험의 지대를 벗어나 우리의 선험적 이성, 그 도덕의 근원을 헤쳐 보게 한다. 이대로 우리들의 인간성은 손 댈 필요가 없는 것인지, 이 사회에 내재된 가치들은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자성해보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6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정말 문제작이다. 이제라도 읽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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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 記:

이 작품을 왜 이처럼 증오로 가득한 전쟁놀이에 광분한 세계로 창조해야만 했을까하는 대목에 대한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말세의 징후(오늘의 전지구적 극우정치화, 전쟁과 민족주의의 부활, 자기이익 우선주의 등 극단적 탐욕과 같은)가 보일 때,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심판 증후군이나 데카당스, 어떤 극단적 형태의 돌발적인 사건을 성찰케 하는 시선들이 있어왔다는 점이다.

 

철학자 이광래 교수가 미술철학사에서 지적하였듯, 아마 16세기 60세의 노구를 끌고 6년여 천장화에 매달려 최후의 심판을 그렸던 미켈란젤로가 성스러운 제단에 굳이 벌거벗은 인물들의 저승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현실세계에 광란하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욕망을 심판하려했듯  '가학적피학애(sadomasochism)'를 숨기지 않은 것은 적절한 예가 될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데이비드 R.번치가 창조한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읊조리는 극단적 폭력성이나 그의 신체는 바로 인류와 인류사회에 대한 하나의 강박적 치유과정의 역설적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마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는 성큼 인류 종말의 시간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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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 (양장) - 필사로부터의 질문, 나를 알아가는 시간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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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그의 소품 중 스스로 사고하기라는 글에서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을 모두 빼앗아 간다.”라고 시인 알렉산더 포프를 인용하며, 쉴 새 없는 다독(多讀)이 사고를 못하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책 읽기의 태도를 되돌아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산더미 같은 책이 담겨 있어

끊임없이 읽고 있지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 愚人列傳3.194, Alexander Pope

 

진리나 통찰이 어떤 책에 그대로 쓰인 것을 편리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저 남의 생각을 읽기만 하면 독자적 사고와 자발적 사고의 샘이 막혀 자신의 원초적 사유의 힘을 잃어버리게 됨을 경고하는 말이다. 이 책 백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의 취지도 이처럼 그저 한 줄의 문장을 읽는 순간에 공감하고 머리로 이해한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공감과 이해의 글 앞에 멈춰 질문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생의 현실과 미지의 미래를 성찰할 것을,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춰면밀히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책은 총 14(Part), 112개의 문장 또는 한 절의 글귀들로 엮여, 인생의 안목과 센스, 인간관계, 시간의 주재자(主宰者)가 되는 법,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는 위무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현재 직면한 불안이나 살아오며 고민해 본 주제들은 독자들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자신의 현재와 공명하는 Part에 수록된, 오랜 성찰을 통해 견인된 문장들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기대치 않은 생각의 흐름을 만들고, 어쩌면 어떤 방법적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전체의 문장들을 모두 읽으며, 내 마음에 다가온 12개의 글귀를 필사했다.

 

그리고는 해당 필사의 문장으로 돌아가 내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기 위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아마 이들 물음에 대해서 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홀로만의 고독한 사색의 흐름을 쫓아보아야 할 것 같다. 책의 14번째 글귀는 컨셔스에서 발췌된 문장인데, 바로 고독하게 사유할 시간의 엄중함을 제안한다. 고독해야 사유할 수 있다. (...) 고요히 생각할 마음이 주어진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내 몸을 일으키고 나의 주체성을 되찾고 내가 해야 할이 무엇인지 계획할 수 있게 된다.”.

 

종일 관계의 소요 속에 휘말려 지내다 지친 몸을 눕히기에 급급한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보니,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58번째 글귀에 이르면 Change Way 변화, 그 아름다운 선택에서 발췌된 시간 전망(tome perspective)’, 즉 현재의 행동과 의사결정이 미래에 끼칠 영향력을 얼마나 길게 내다보는가의 헤아림 역량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라는 오프라 윈프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대하게 된다. 내 인생을 위한 시간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무책임한 말일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요즘 나는 부모님들의 노환을 옆에서 바라보며 더없이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해인 수녀의 꽃이 지고나면 앞이 보이듯이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에 치밀어 들어온다. 보물같은 부모님, 이 생()에 함께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는지 이 필사집을 통해 새롭게 읽어본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비록 내 마음이 그려낸 사랑이 환상일지언정, 나는 현실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반백년 넘어 살았음에도 사랑의 환상에 현실을 걸 수 있는 나는 아마도 아이의 마음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변화를 도모해야할 만큼 진부함의 깊은 골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데 마침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속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 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심리학자 토니 로빈스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 공명한다. 아무래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그 여정에서 내 삶의 행로에 놓인 물음들의 응답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권유로 들린다.

 

책의 72번째 글귀는 아네테 블라이가 쓴 날아라 펭귄의 한 구절이 있다. 어린 펭귄 브루노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내가 갈매기처럼 날 수 있을까요? 너는 너만의 방법으로 날개 될 거야, 브루노.“ 그래, 우리는 우리만의 비행법이 있다. 남과 다른 고유한 나만의 비행술이 있음을, 아마 이 비행술이 무엇인지 나를 더듬어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 걷다보면 내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낸 무의식으로 변해버린 어떤 고집스러운 상태를 발견하게 될 터이다. 변화를 위해 그것을 끊어내는 시간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내 삶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과 상황들, 이 모두에 겸손해지는 시간이 된다. 겸허함으로 이 책의 문장들의 울림에 귀 기울이고, 천천히 그 글귀들을 필사하며 작은 위로도 받고, 조금은 더 삶에 관대해지는 그런 시간이 된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책의 문장들을 통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보다 더욱 스스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느낌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의 프롤로그 글처럼 백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고독하고 고귀한 시간이 되어 주는 길잡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모든 선견을 잠시 묻어두고 겸양의 시선으로 다가가면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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