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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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선택한 좋은 시(詩), 그가 기꺼이 필사(筆寫)해서 마음에 남겨두고 싶었던 48편의 시를 담고 있는 시선집(詩選集)이다. 특정 시인의 시집을 선택하지 않고 48인의 시모음인 이 시집을 선택하여 읽게 된 것은 우리의 시인들을 가까이 하지 못해 우리시의 이해가 천박하여 시집의 선택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자각과 우리말의 활용능력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듯하여, 좋아하는 시인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요령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욕심은 성취되었으며, 당분간은 막연함이 아닌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시인이나 시집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조언을 충분히 구한 상황이 되었다. 모아놓은 48인의 저마다 개성 넘치는 시들을 읽으면서 새삼 우리말의 음성학적 아름다움을 느끼고, 각각의 작품들이 내재하고 있는 내적질서와 언어적 표현형식에 감탄을 연발하였으니 이보다 큰 수확이 어디 있겠는가.
한 문학평론가가 시는 “의미론적 훈련”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시인 안도현의 짤막한 촌철살인의 시평(詩評)은 미처 알지 못하고 넘어가던 이들 시의 이해를 결정적으로 높여준다. 아니 한 뼘만큼 시의 이해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정당하겠다.

그의 표현처럼 맛깔스러운 시, 유쾌한 스냅사진 같은 시, 주관이 배제된 채 객관적 묘사만으로 아름다움을 펼쳐낸 시, 내성의 절창(絶唱)이라고까지 부추기는 시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들 명편 중에서도 내 감수성과 얄팍한 지성을 자극한 몇 편의 시들은 필사와 암송을 위해 준비 될 터이고, 이 과정이 내심 흐뭇하기까지 하다.

김명인 시인의 시집인 『따뜻한 적막』에 수록된 <너와집 한 채>라는 시구 중 한 구절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시인 김사인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는 콧잔등이 시큰하고 가슴이 메는 공감으로 몇 번이고 읽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난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 할 수 없다.”는 안도현 시인의 촌평이 붙은 시인 정끝별의 <밀물>은 명치끝이 뭉클하여 암송하기까지 하였으니 진정 무엇에 대한 느낌을 공유한다는 발견은 기쁘기조차 한 것인 모양이다.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 두 척의 배가 /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 

벗은 두 배가 / 나란히 누워 /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정끝별 作 <밀물>


그리고 김선우의 <봄날 오후>, 문태준의 <가재미>, 오규원의 <들찔레와 향기>, 남진우의 <가시>는 한동안 시선을 멈춘 채 오랫동안 되새기며, 그 삶의 풍경들을,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시의 내성을 음미하기도 하였다. 내겐 감성을 순화시키고 여유롭고 세밀한 세상 보기를 하게하는 시의 본성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 특별한 시집으로 기억될 것 같다. 특히 작고한 사진작가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 30년>의 사진들이 시편 곳곳에 게재되어 시집의 품격을 한층 제고시켜주기도 한다.
소설, 시의 창작을 준비하는, 시집의 선택을 고민하는, 아름다운 진정 좋은 시를 기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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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사랑 이야기 - 깨달음의 나라 인도가 전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선물
하리쉬 딜론 지음, 류시화 옮김 / 내서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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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표현이지만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라 할 밖에 없는 네 편의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있다. 신분, 계급, 귀천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 제약들을 모두 넘어서는 사랑의 고결함과 불멸성을 담고 있는‘하리쉬 딜론’의 사랑의 기록은 아름다운 시가 되어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성을 깨운다.
한편의 이야기마다 사랑의 애절함과 경외가 숙연함으로 우리들의 심성을 촉촉이 젖어들게 한다. 엄격한 관습적 제약, 그 제도적 신뢰를 저버릴 수 없지만, “온 우주가 한 사람으로 좁혀지는 기적”과 마주하면 그 사랑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있겠는가!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중년의 남자‘마히왈’의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연모(戀慕)와 그 사랑의 진정을 어루만져 주는 도공(陶工)의 딸‘소흐니’의 사랑을 지상의 어떤 언어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애타게 기다릴 사랑하는 이를 위해 폭풍우가 몰아치는 불어난 강을 건너는 연약한 여인의 죽음을 초월한 간절함에서 사랑의 위대한 본성을 보게 된다.

사랑까지도 각박하고 천박한 잣대로 측정하려는 오늘의 현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아마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손을 휘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랑이란 이미 현대인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감각적 쾌락에 휩싸이는 열정, 그래서 그 열정의 성분이 식어버리면 또 다른 열정을 찾아 헤매는 자극만을 사랑이라 하는지도.

어쩜 이런 사랑을 하기에는 이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버거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은 나를 버리는 것, 나보다 사랑하는 이가 우선이 되는 것,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바로 그것이기에 온 세상이, 우주가, 그리고 진실과 진리가 있다.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연인을 위한 세탁부의 삶을 사랑의 축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 하면, 가족의 명예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뛰어넘는 사랑의 절대성, 오직 죽음만이 갈라놓을 사랑의 신비로움을 보여준 불멸의 사랑들에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진실이 아니던가.

삶의 고독함과 슬픔이 저미어있는 피리소리, 그 피리 부는 목동의 질곡(桎梏)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여인의 향기가 책 전체에서 피어나고, 부러진 화살을 움켜쥐고 회오(悔悟)와 사랑으로 몸부림치는 연인을 위해 관용과 배려와 주는 마음이란 사랑의 진정이 가슴을 적신다.
사랑을 잃어버린 이, 사랑을 찾는 이, 사랑을 알 수 없는 이, 그리고 사랑에 빠져있는 이들 모두에게 이 불멸의 사랑의 이야기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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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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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책이 되어버리고, 책이 된 사람이 편집자를 강간하고, 책 수집가, 비평가를 살인하는 기괴한 이야기다. 바로 '그 책(Das Buch)'은 책이 된 사람이며, 그 책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을 보여준다. 소설은 벼룩시장에 나온 임자 없는 기이한 책을 손에 쥔 한 남자, 수많은 책을 사 모으고 책 세계에 빠져들어 고립되어버린 사람의 환상적 여정이기도 하다.

책은 사람에게 무엇인가?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책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되고 있는가? 왜 책을 읽고 있는가?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 이러한 질문들을 만들어내는 책의 세계에 대한 잔인한 항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책을 손에 넣기 위해 골동품상과 목사를 살해하기도 한‘돈 빈센트’란 사람이나, 계단, 마당, 헛간에 이르기까지 집전체가 온통 책으로 채워진 피렌체의 유명한 사서 ‘마글리아베치’, 사후에 무덤주위를 책으로 에워싸 장식했던 출판업자‘알더스 마누티우스’의 일화가 소개되기도 하며,  ‘프란츠 카프카’에서 ‘얀그레스호프’,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에 이르는 작가들의 책에 대한 멋진 담론과 인용문들이 즐비하게 배열되기도 한다.

책이 삶의 한 축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라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비블리’의 변신이 엄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독서라는 세균이 요 몇 년 사이에 그의 피와 살 속에 침투해, 이제는 꼼짝없이 감염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라는 구절은 사실 책벌레, 독서광, 간서치(看書癡)들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인식인 것처럼, 소설 속에서‘그 책’의 여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무지하고 편협한 독자로부터 내동댕이쳐지는‘그 책’,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오려대는 도서관장의 몰염치함(볼테르의 사후 이렇게 책을 오려내 만든 자료가 6천여 장이나 발견되었단다), 경제적 편익에 경도된 출판사 편집자의 외곬, 음침한 서고에 가치물로서 책을 수장시키는 수집광, 그리고 편견과 독선으로 책의 운명을 마구 떠들어대는 무책임한 비평가에 이르기까지, ‘그 책’이 벌이는 잔인한 복수극은 책의 본성을 방해하고 훼손하는 편협한 세상을 향한 자성의 촉구이기도 하다.

새 책을 구입해 펼쳐들 때 종이와 제본, 인쇄 잉크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그 고유한 냄새가 얼마나 뇌를 흐뭇하게 자극해대는지, 그리고 벽들을 따라 죽 늘어선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이 주는 위안,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순간만큼의 평온과 세상으로부터의 안전한 격리가 주는 행복감은 책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느낌을 확인시켜 준다. “판타지의 왕국으로 통하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 그것이 바로 책이다!”하는 문장은 바로 이 소설인 ‘그 책(Das Buch)’을 표현하는 한 마디가 될 것이다.

‘카프카’의 말처럼“집 밖으로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의 책 예찬은 아닐지라도, 책은 우리의 정신을 담는 유형의 그릇이며, 위대한 세계의 기적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의인화 된‘그 책’의 재치 있는 적절한 행위가 상상력 넘치는 발상, 양념처럼 처진 약간의 인문학적 지식과 결합하여 책세상의 모두를 기막히게 표현 내고 있는 이 작품은 현명한 독서가 무엇인지, 책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새삼 환기시켜준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 혹은 책을 잊고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저마다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설 환상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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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6
오타비오 카펠라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들녘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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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B급영화를 보는듯한, 아니 노골적으로 그렇게 한 인상이 짙다. 마피아들의 수식 없는 냉혹한 살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왠지 어설픈 코미디 분위기가 맴 돈다. 일부 평론에서 “무자비함과 시시껄렁함”이라 했던가. 딱 그렇다. 작품의 분위기, 얼개, 성향 등이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 ’로 잘 알려진 감독‘쿠엔틴 타란티노’와 판박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타란티노 스타일(tarantino style)'이라고 불리는 복고적 분위기와 폭력, 그리고 수다스럽고 재미있으며, 통속적이고 각기 따로 놀던 인물들이 정교하게 얽히고 짜여지는 특성이 그대로 식재되어있다. 한편 내용은 ‘마리오 푸조’의 ‘대부(the godfather)’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말론 브란도’가 마피아 조직 최고 보스로 열연한 ‘돈 꼴레오네’역과 ‘알 파치노’를 일약 대스타로 만들어준 후계자 ‘마이클 꼴레오네’의 권력 장악을 위해 벌이는 냉정한 폭력의 무표정이 연상된다.

이 작품의 원제목은 “Chi é Lou Sciortino ?(루 쉬오르티노는 누구인가?)”이다. 번역 제목인 “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는 마피아 세계의 변화를 이야기하려 한 것 같은데,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기만 한다. 단순하지만 원제목이 외려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할 수 있다. 소설은 이태리계 미국인‘쉬오르티노 패밀리’의 보스인 ‘돈 루 쉬오르티노’의 손자인‘루 쉬오르티노’의 마피아 세계의 체험 성장기록이자 작가의 추후 발표되는 일련의 마피아 코미디 작품에 대한 연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패밀리의 보스인 할아버지‘돈 루’는 돈 세탁의 방편으로 운영하는‘스타쉽 영화사’의 사장으로 마피아 보스로서의 훈련을 위해 손자 ‘루 쉬오르티노’를 로스엔젤레스로 보내지만 영화사는 불의의 폭탄테러 습격을 받게 되고, 고향 시칠리아의 카타니아로 안전을 위해 도피시킨다. 소설의 배경은 그래서 미국이 아니라 이태리의 시칠리아가 되고, 패밀리들 간의 암투가 전개된다. 여기에는 세력 장악을 위해서는 살인을 일상처럼 벌이는 사람들과 이기적인 가족애, 과시적 허영의 세계만 존재한다. 자신들의 구역에서 경찰관이 살해되지만 카타니아의 마피아 중간보스인 야심가‘살 스칼라(일명 살 삼촌)’는 살인자가, 사랑하는 조카가 좋아하는 이웃의 청년이란 이유만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이 엉뚱한 사건의 구성에‘루 쉬오르티노’를 하수인으로 개입시키면서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얽힌다.

한편, 소설 속 영화인 『플라스틱 러브』처럼 무심한 폭력과 저급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은, 다분히 세상을 향해 엿 먹으라고 하는 의도된 수작으로 보이는데, 지극히 통속적인 자극에 열광하는 현대인들의 상실된 감각, 사라진 정신세계를 조롱하는 한 방편이다. 이러한 키치(kitsch)적 요소들은‘살 삼촌’의 조카인 ‘토니’의 미장원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허영심, 그리고‘바비큐 파티’는 물론 20세기 초‘알 카포네’부류의 갱(gang)을 연상시키는 복고적인 분위기, 소설 전반을 흐르는 욕설과 적나라하고 천박한 언어들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는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비꼬는 장치로서 이 소설이 지향하는 핵심주제가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재미도 뛰어나지만 무수한 등장인물들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인물들을 바라보는 즐거움 또한 대단하다 할 수 있다. 보스에 대한 충성과 묵묵히 방해세력을 처단하는‘핍피노’, 루와 사랑의 도피를 벌이는‘민디’, 그리고 토니, 닉, 레오나르 트렌트, 그레타 등 개성이 톡톡 튀는 인물들은 신구(新舊)의 의식세계를 극명하게 분리해주고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구절인 ‘돈 루’의 “옛날은 없다고 말이야.~지금도 처음과 똑 같다고...”하는 과거와 다른 마피아의 현실에 대한 회한의 표현은 ‘돈 꼴레오네’가 말년에 직감하는 인생의 한계와 닮아 있어, 왠지 모를 서글픔과 비장함이 전달되기도 한다.

소설 한 편을 읽었다기보다는 장면 장면이 짜깁기된 듯 구성된 타란티노식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심한 듯 저질러지는 살인과 솝 오페라(soap opera)식 스토리의 시시껍절함, 바로 그 자체가 매력적인 유별나게 특이함을 지닌 소설이다. 아마 이 작품으로‘카펠라니’도 국내에 꽤나 매니아 층을 형성시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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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1 아서 왕 연대기 1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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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하게 각색된 신화를 역사적 구체성과 사실성으로 재윤색한 기원후 5세기경 부족연맹 형태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헐리웃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유럽의 작은 섬나라 역사라는 인식 없이 아서왕, 랜슬럿, 귀니비어, 원탁의 기사와 같은 인물들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할거된 군벌(warlord:軍閥)들의 지배력 확장을 위한 연합과 배반,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시대상을 사실적 접근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이 인물들의 알려진 특성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잣대 앞에 여지없이 전복되고 재해석되고 있어 완벽하게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제공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고대민족인 켈트족 중 주류인‘브리튼’족이 형성하고 있는 부족연맹의 맹주인‘둠노니아(일명 캐멀롯)’왕국의 후계자‘모드레드’의 출생인 서력 480년 음산한 겨울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럽대륙의 이민족인 색슨족의 침입이 반복되는 가운데, 둠노니아의 유서왕이 서거하자, 새로운 맹주로서의 지배권력을 확보하려는 동족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연맹은 이해관계에 따라 결속과 분열을 반복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부분은 이 같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도기인 5~6세기의 영국 역사를 비교적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며, 낯익은 역사적 인물들이 역사에서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가졌던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작품은 이러한 권력의 암중모색과 그치지 않는 군벌간의 전쟁에서 한때, 둠노니아 왕국의 후견자인 군주‘아서’의 장군이었던, 수도원의 수사‘데르벨’이 통일군주인‘브로흐바일’의 왕비‘이그레인’에게 들려주는 회고로서의 기록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당사자로서, 그리고 군벌들이 벌이는 탐욕과 질시, 사랑과 배신의 목격자로서의 증언이라는 수단은 사실성에 대한 신뢰를 제고키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소설 속의 인물들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기에 역사소설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설득하는 듯하다.

실제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도시와 건축의 규모나 형태, 보통 2~300명이 치루는 전쟁의 묘사와 무기형태, 복식(服飾)과 부족들의 역사적 지배영역, 색슨과 프랑크족 등 이민족과의 혈전 등이 과장되지 않는 고증적 리얼리티를 가지고 기술되고 있어, 신화에 머물러있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화하려는 작가의 일관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의 매혹적인 요소로서 주술적 신앙으로서의‘드루이드’들이 등장하는데, 고대사회의 미신이 사람들의 정신사를 얼마나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었는지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다. 화자인 ‘데르벨 카다른’과 드루이드 중 최고의 주술사인‘멀린’의 제자‘니무에’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생의 굴레로 작용하는 드루이드와의 악연, 부족의 의사결정이나 전쟁의 부적으로서의 동행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아서’의 사랑스런 여인으로만 기억되는‘귀니비에’가 벌이는 도발적으로‘아서’를 유혹하는 장면이나, 잔혹한 기운, 속물적 근성 등은 통속적 환영들을 깨부순다. 또한 “충동과 열정의 사나이”, “권력과 도덕을 혼동하는” 불완전한 신념의 인물로 ‘아서’를 묘사하고 있거나, 프랑코족에 패망한 왕국‘아르모리카’의 왕자인 ‘란슬롯’을 비열하고 간교한 자로 그리고 있는 것 등은 그 전복적 내용으로 독서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원제목이 <<warlord chronicles>>, 즉 군벌의 이야기(연대기)이듯이 패권을 위해 벌이는‘포위스’의 ‘고르버디드’왕, ‘실루리아’의 ‘군들레우스’, ‘궨트’의 ‘테우드릭’왕, 그리고 기타 부족과 ‘아서’의 ‘둠노니아’와의 연횡과 반목이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다양한 술책들과 행동들 역시 이 작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3부작 중 그 1部인 본 작품의 대미로서 어떠한 지원세력도 없이 고립된 200명의 아서 군이 수천의 군들레우스 대군과 벌이는 일전은 가히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분노와 이기심, 사랑과 복수, 전쟁과 평화, 구 신앙과 신 종교의 충돌이 큰 물줄기를 이루며 인간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영원히 쉴 수 없을 것처럼 달려가는 한 때의 위대한 인물들과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암흑과 혼란의 시대, 부족연맹에서 부족국가로 형성되어가는 영국사의 한 페이지가‘버나드 콘웰’의 집요한 노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으로 멋진 역사소설로 탄생하였다 할 수 있다. 2부작, 3부작의 출간이 조속히 기대되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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