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2
김현아 지음, 박영숙 사진 / 호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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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그녀들이 세상의 시선들과 장애에 마주하며 지쳐온 자취를 따라 부여에서, 고창, 남원, 밀양, 통영, 원주에 이르는 문화여행 이랄까? 우리 범인(凡人)들이 주목하기에는 낯 선 곳에 내밀하게 깃든 이유 있는 사색의 여정이라 할까? 역사는 항시 강자와 지배자, 승자의 시각과 논리를 따르지 않던가. 그래서 그 배제된 이면의 역사와 사고(思考)에 있는 약자와 피지배자, 패자의 울분과 아물지 않은 상처, 그리고 그네들의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내기란 작자의 말처럼 “풀밭에서 녹색 실을 찾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여정은 여성, 지금에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과 같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리매김했던 그네들의 발자취를, 숨겨지고 왜곡된 주머니에서 하나씩 그 진정성을 꺼 집어내 조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작업에서 작자는 강자가 만들어 낸 조악한 역사와 거짓을 조롱하고, 조소를 보내며, 의심하고, 연민하기도 하며, 그녀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산과 고장들의 전경과 함께 가벼운 인문학적 담론을 펼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제의 패망하면 늘 패키지처럼 묶여 다니는 의자왕, 삼천궁녀, 그리고 계백이 작자의 시선을 피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낙화암(洛花巖)은 언제부터 꽃들이 떨어진 벼랑으로 불렸을까? 그리고 그 꽃들이라 칭하는 무려 삼천 명의 궁녀가 된 것은 어느 시기부터였을까? 정말 의자왕이 죽자 함께 떨어진 것일까? 이 저작의 표제처럼 새빨간 거짓임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왜 만들어 냈을까? 여자의 몸에 나라의 패망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가 맞는 멋진 그림이 아니던가. 왕의 방탕에 일조한 궁녀는 탕녀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들이 강물로 뛰어 들었으니 절개와 순국의 모습을 덧 씌워 형상화하니 그 아니 자연스러운가 말이다. 이와 더불어 선화공주, 계백의 아내, 소서노 조차 역사는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니, ‘새로운 눈’,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는 눈을 가질 것을 피력한다.

우리나라 3대 명루인 밀양 영남루와 아랑전설에 이르면 작자의 재기 넘치는 관점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우리나라 귀신의 전형인 긴 머리와 하얀 소복 패션이‘아랑’에게 비롯되었단다. 그러니 ‘언니귀신’의 원조격이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원혼이 되어 나타나 거듭 새로 부임하는 사또들을 황천길로 보내는 아랑은 왜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신관 사또에게 간접적인 복수를 부탁하는 것일까?

하~아, 순결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강간당한‘더러운’몸으로 당시 정상성의 심벌이었던 ‘남성’양반에게 나타나는 것은 “귀신의 이름으로 성폭행 당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공적 담론의 장으로 부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라 하면 ‘아랑전설’에서 이쯤의 절묘한 해석은 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듯하다.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지역사회의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다. 근자에는 아랑각 앞에 ‘정순문(貞純門)’하고 현판을 걸어두었단다. 사실 남성들의 우매함은 알아줘야한다. 죽은 이의 넋을 달래면 되는 것이지, 왠 느닷없는 정절이데올로기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인지, 이 사회의 문화적 자질, 그 수준에 대한 조소와 질책이 통쾌하다.

이러한 남성중심의 실소를 금치 못 할 예는, 죽은 지 일백사십 년이 되어서야 민족정신의 수호자로서 죽음이 공식 인정된‘논개’의 일화에서도 발견된다. 터무니없게도 친고가 전혀 없던 논개에게 400년이 다되어서 ‘주논개’라 하며 관련도 없는 성을 갖다 붙이고 끊임없이 남성과 연관하여 설명하려는 오늘의 인식까지 더해지면 보이지 않는 왜곡된 습속의 권력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편향된 것인지 각성케 된다.

이처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더구나 사회의 한 정점에 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세상의 시선과 맞서 싸우고 버티어내는 엄청난 인내와 고통,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남성만의 영역이었던 판소리 연창에 최초의 여성 연창자로서, 이후 판소리에 여성 입문의 길을 열어준 고창의 ‘진채선’, “분노하지만 항거하지 못하고 또한 그런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리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대중”과 교감하고 소통한 남원 문치마을 ‘이화중선’, 운봉마을의 ‘박초월’은 정말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던 여성이었으리라.

이 여정에서 특히 매력적인 도시로 나의 시선을 집중시킨 곳은‘목포’였다. “우리의 근대 유산이 유달리 많이 남아있는 곳”, “시간 여행의 정거장 역할”을 하는 곳, 천만 다행스럽게도 “개발의 회오리에서 ‘소외’된 덕분”에 20세기 초엽의 모습을 간직한 우리민족 수탈의 산증거인 동양척식회사, 구 일본영사관, 이훈동 정원 등을 지금에도 찾아 볼 수 있다니 말이다.

때려 부수고, 갈아엎고, 그리곤 눈앞의 경제이익에 어두워 상자곽 건물을 개발이란 명목으로 획일적으로 나열하는 우리 현실은 아마 아프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습관인 모양이다.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비정상적 사고의 다중인격을 양산할 뿐이다. 더 이상은 신뢰할 수 없는 사회로. 혹, 사라질지도 모를 근대의 유산들을 보러 목포에 조만간 다녀와야 할 모양이다.

끝으로 우리 문학에 대하소설이란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여성 작가, ‘최명희’와 ‘박경리’의 근원에 대한 성찰, 무한한 생명의 비밀에 대한 깨달음에 정진하였던 그네들의 삶의 자취인 남원과 전주, 통영과 하동, 그리고 원주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지역사회의 애정, 일화 등이 시절의 통한을 담고 애정과 존경심 그득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이 사회가 불편해하고 은폐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세련된 식견과 온기 가득한 연민으로 멋 떨어지게 기술된 매력적인 인문학적 담론이자 여성여행기다. 시종 유쾌함과 진지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혜로운 이 저작에 작은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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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를 리뷰해주세요.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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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자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자유의지’와 ‘대안적 삶의 상식’이라는 관점을 읽어내고 있는 듯하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분류되어 읽히지 못하다가 출간되니, 대중의 호기심은 그칠 줄 모르고, 수없이 다양한 해독(解讀)을 출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청년실업자가 양산되고, 88만원 세대라는 자학적이고 절망적인 호칭이 한 세대를 부르는 명칭에 갈음되며, 현대사회가 조성해 내는 극한 경쟁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거두어버린 황폐해진 인간의 삶으로 인해 체제와 제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것은 어쩜 지극히 당연한 성찰 이랄 수 있으며, 이러한 시선이 당해 소설의 읽기를 지배하는 배경이 될 수밖에 없었음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문학이란 것이 의례 그렇듯이 부분이 작품전체를 대변하지도 않으며,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총합이 전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또한 읽는 이들의 판이한 지식구조와 감성은 무수히 다양한 읽기를 존재케 하며, 구태여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넌센스가 될 수 있다. 

꺽정이 등 칠 두령의 싸움과 친교라는, 만남의 일화들을 통해 “아예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몸으로 소통하는 기술을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도출은 볼셰비키를 연상시키며, 육체노동의 가치가 존중돼야 하나, 정신노동자가 경시되어도 무관하다는 듯 하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낡은 교조적 발상처럼 보인다. 게다가 정규직이라는 조직에 매여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온전히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만으로 매도하는 극한적 상대주의는 또 다른 파벌과 분리를 야기 시키고, 불필요한 대결주의를 조성하는 신중치 못함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작자는 ‘청석골’이라는 도적 집단체를 하나의 이상적 경제, 사회공동체로서의 컴뮌(Commune)으로 보고 있는듯하다. 더구나 여기서 “조선조 부락공동체의 경제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고 있으나, 선뜻 공감하기가 수월치 않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하버마스’式 ‘부르주아 공론장’으로서의 ‘마을 공동체’, ‘생태 공동체’등 대안 모색이 시민사회에서 거론되고 있으나, 소설 속 청석골을 이러한 대안적 삶의 모델로 보기에는 많은 결여가 존재하고 있음에서이다. 특히나 우정과 의지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지하여 수평적 윤리를 논의하는 것은 너무도 낭만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작자가 주장하듯이 “이 윤리를 능동적으로 표현 할 수 있다면 어디서건 새로운 관계와 활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세포 조직을 떠 올리게 하고, 대항조직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효과적일는지 모르겠다.

다만, 소설 속 칠 두령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공부가, 학벌이라는 입신양명의 목적 지향적 공부가 아닌 배워서 남 줄 수 있는 , 타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기꺼워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이어야 한다는 시선은, 삶의 새로운 형식의 창안을 위한 신선한 통찰이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마이너로서의 새로운 관점, 즉 주류라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가치를 추구하라는 자존감의 설득은 편협한 물질적 성공주의의 사고를 전환하고 안목을 확장시켜주는 귀한 조언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한편, 이야기의 힘, 우정과 의리, 길에서 터득하는 ‘대자유의 경지’등 시민으로서의 깨어남에 대한 계도적 감상에 더해, “통념을 뒤엎는 반전이 수반”되어 “익숙한 질서를 자유자재로 교란하는 반어와 역설!”, “그 속에서 웃음의 퍼레이드가 펼쳐진다.”는 작품의 소개 글이나, 소설 속 역사적 일화의 한 토막을 빌어 세상을 조롱하는 작가(홍명희)의 시선, 매혹적인 소설의 한 장면을 통한 이해 돕기는 『임꺽정』읽기의 멋진 길라잡이 역할을 하기도 한다. 10冊의 방대한 소설의 개괄을 흥미롭게 읽어 볼 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 소설 임꺽정을 자신의 주체적 시선으로 감상하려는 독자는 전권(全卷)을 직접 완독하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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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수집가 - 어느 살인자의 아리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정창 옮김 / 예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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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 지존의 쾌락이여!”

에로스와 타나토스(Thanatos)를 한꺼번에 소유하고 있는 자, 절대적이고 완벽한 쾌락을 소유한 존재, 축복인가, 저주인가?

아일랜드의 전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차용한 이 낭만적 작품은 잔혹한 죽음이 즐비함에도 관능적 설렘이 전체를 지배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아이, 소리의 형태, 소리의 정수, 소리의 본질, 그리고 소리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 더 이상은 해체할 수 없는 소리를 구별하는 천부적 능력의 소년, ‘루트비히’의 경이롭고 절망적이며, 치명적인 지고한 사랑의 이야기다.
소리에 대한 무한한 영역을 갖춘 소년은 소리를 받아들이는 대상에서 새로운 소리를 창조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독일연방 최고의 성악가로.

모든 이들이 탄성을 내뱉는 천상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루트비히 자신만은 속이 텅 빈,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을 채우지 못한다. “간절하고, 경이롭고, 영원한 소리, 완벽한 천상의 소리, 지각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감흥 같은 그 소리”는 바로 자기 내면에 숨겨진 소리이고, 곧 이의 자각은 완벽함, 신으로서의 자신의 발견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 불멸의 사랑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한다는 ‘영원한 사랑’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여인들을 사랑의 정염에 휩싸이게 하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쾌락에 몸을 던지게 한다. 사랑의 묘약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데려간 곳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듯이, 루트비히의 ‘사랑의 음향’을 품고 있는 정액은 여성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절정, 엑스터시(ecstasy)는 숙명적 절망을 확신시킬 뿐이다. 모든 여인을 마음껏 유혹할 수 있는 힘, 그 완벽한 선율은 곧 저주의 다른 이름일 뿐.
루트비히의 이 원죄적 절망은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그루누이’처럼 향(香)으로 모든 인간을 조종하지만, 자신만은 그 향기에 취할 수 없는 그 절대적 부조리와 닮아있다. “음악적 관능성이라는 보호벽 아래 치명적인 잔혹함을 감추고”, 여성들의 생명을 빼앗아 영혼을 섭취하는 도구가 된 육체는 온통 고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사랑과 죽음의 불가분성이란 이야기 구조 속에 삶 최고의 숭고한 명제로서 자기희생의 고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만, 최고의 선(善)으로서의 지고한 사랑, 절대적이고 완벽한 쾌락이란 뛰어넘을 수 없는 모순, 절망이란 고통과 함께 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한편, 소설 내내 흐르는 관능의 미학 또한 이 작품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온 몸이 팽팽하게 조여오는 느낌”, “나는 더 세게, 점점 더 세게 몰아붙였고 급기야 ‘인 크레센도(점점 더 세게)’의 한계를 넘어, 정점으로 치달아 버렸다.” 육체의 전율과 갈망, 충동, 도발, 황홀경이 장식하고 있다.
더구나 이성(理性)보다 더 상위에, 욕망보다 더 강한, 운명 보다 더 강한, 영혼을 파괴시키는 어떤 힘이, 존재와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 같았다는 두 번째 사랑의 결합인‘루도비카’와의 극한적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정사의 묘사는 가히 압권이랄 수 있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서신이 수시로 차용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조는 클라이맥스를 치닫는 작품의 긴장감과 흡입력을 더더욱 고조시키고,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의 “쾌락에 대한 극단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결사적 희구가 동반되는 총체성”의 표현과 같이 상상력과 그 격정적 떨림을 공명시킨다.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것보다 더 지고(至高)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숨 가쁘게 흐르는 작품이다. 오페라와 전설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마치 예술지상주의적 낭만주의가 부활한 듯 한 불멸의 사랑을 담은, 삶의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는 소설이다. 치명적 죽음을 머금고 우리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사랑의 선율이 어디선가 들여오는 듯하다. 『향수』를 넘어설 걸작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느니!
오감이 기쁨에 전율하느니!
갈망하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꽃의 자태.
느긋한 사랑이 빚어낸 완벽한 설레임이니!
향락의 충동이여, 나의 가슴을 진정시킬지니!
이졸데! 트리스탄!
세상 먼 곳에서 내 그대를 소유하느니!
도발적인 그대의 지고한 사랑이여.
나, 오로지 그대를 위해 살아 있느니!”         - 본문 P284 트리스탄의 노래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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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먹으면 왜 안되는가?>를 리뷰해주세요.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 일상을 전복하는 33개의 철학 퍼즐
피터 케이브 지음, 김한영 옮김 / 마젤란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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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술은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전복시킨다. 우리들이 당연한 귀결이나 응당 그러해야 한다고 여겼던 도덕적 판단에 대한 본원적 사유를 요구한다. 엄청난 역설이 등장하고 우리들의 결론이 명백히 틀렸음을 입증한다. 삶에서 언제든지 마주할 수 있는 딜레마에 봉착했을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나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외면하는 행위는 도덕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제시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반성적이고 사회적인 호기심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이 저술이 함께 사색하고 토론하기를 요구하는 주제들은 충분히 흥미롭다.
나와 친구, 둘이 있는 곳에 곰이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친구보다 훨씬 빨리 달린다. 내가 도망가면 친구는 사나운 곰에게 잡힐 것이고 그 사이에 나는 완전히 달아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친구를 희생시키고 내가 달아나는 행위는 과연 비난 받을 행위인가? 이는 합리성의 문제로 비친다. 물론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합리성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한다.

한편, 생태계 보호와 관련하여 멸종의 위기에 있는 ‘긴귀날쥐’라는 동물이 있다고 하자. 긴귀날쥐를 우리는 왜 보호하고 구해야 하는가? 일종의 말장난으로 비칠 수 있는 언어의 정의와 사용에 관한 모호한 우리들의 습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종(種)’을 지칭하는 것인지, 특정상황의 ‘개체’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따라 분명 판단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해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저술의 논의 대상은 어느 하나 쉽게 판단 할 수 있는 문제가 없다. 그렇다고 항상 옳은 결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 문제들이 즐비하다. 다만 다양한 사유의 창을 통해 명백한 오류나 그릇된 판단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사회적 논의의 단골 주제인 남녀평등이나 범죄자 인권문제에서, 삶의 가치, 시간, 미적 세계와 현실세계 욕망의 간극에 이르는 철학적 사유의 길을 위트 넘치는 화술로 안내한다.

여자와 남자는 과연 평등할까? “양성 평등에 대한 요구는 이미 양성 모두에게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역할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요구”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본성적인 것, 관심사의 차별은 물론이고 불평등한 대우가 오히려 정당화될 수 있는 요인들이 존재함을 인정케 하고, 근절할 필요가 없는 불평등까지 평등케 하려 하거나, 수적인 평등이 올바르다고 가정해야 하는 이유의 불합리성 등을 예시하여 남녀평등이란 사회적 문제의 의미를 철학적 사색이나 방법을 통해 깊이 있게 성찰하는 기회로 제공한다.

이외에도 잘 알려진 베짱이와 개미의 행동양식을 통해, 겨울에 음식을 구걸하는 베짱이를 도와야 하는가 하는 개미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퍼즐 뿐 아니라 여가와 노동, 무위도식과 생산적 활동이라는 삶의 가치에 대한 사색은 또 다른 의미심장한 생각의 타래를 풀어나가게 한다. 그러나 이 저작의 표제인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의 논리로서 자발적 주체자인 인간의 존중심과 자신의 권익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기에 그렇다는 결론은 도덕적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왠지 미흡하며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처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충돌하는 가치들과 미덕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예는 무진장하다. 서로 다른 가치들 - 자유, 권리, 공평함, 복지, 미덕... - 을 동일한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저울이 우리에겐 없다. 우린 최선의 판단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가? 툭하면 내세우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수가 다수결로 내리는 결정은 동전던지기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의 특정 주장이 오히려 왜곡과 편향을 개입시킬 뿐이다. 그리곤 고작 도덕성이란 잣대를 들이대지만 이 역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저술은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추론과 논리를 통해 주체적으로 사색하는 법, 세상을 성찰하는 양식을 가르쳐준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딜레마들을 저자와 함께 따라가는 여정이 내내 즐겁고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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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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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에서 뉴욕대 미디어학 교수‘마크 크리스핀 밀러’는 이 저술을 “버네이스의 교활한‘프로파간다(propaganda)'"라 하고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정부가 두려움과 반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견해와 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목적의 은밀한 제휴를 비난하는 현대 정치용어”가 된 '선전(Propaganda)'에 대한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진 저작이다.

1928년 출간된‘에드워드 버네이스’의 ‘Propaganda’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로서의 권력, 국민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파악하고 있을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을 오늘의 진전된 홍보 및 광고의 전략적 식견으로서 읽는 것은 이 저술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버네이스의 저작의도에는 당시 사회각계각층으로서 기업, 정치, 사회사업, 교육, 예술과 과학부문 등에 자신의 PR(Public Relation)역량을 입증하고자 하는 전략이 숨겨져 있어, 지금의 광고홍보부문의 기본적 원리와 방법론의 학습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오늘에도 의미를 지니고 다가오는 것은 이미“소수가 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선전’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중심리학, 정신분석학, 행동심리학 등 심리학을 적용한 과학으로서의 홍보이론을 정립, 발전시켰다는 측면에서 현대 홍보분야의 초석을 다진 저작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하겠다.
특히,‘노엄 촘스키’의 추천사와 버네이스의 본 저술의 비평으로 ‘마크 크리스핀 밀러’의 탁월한 머리말을 포함하고 있는 이 번역판은 <PROPAGANDA>의 고전적 지위를 만끽하게 해준다.
 

‘특정한 원칙이나 행위를 전파하기 위한 제휴나 체계화된 계획 또는 일치된 운동’이라 정의 되는 ‘선전’이 오늘의 현대사회에서는 “기업이나 사상 또는 집단과 대중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건을 새로 만들거나 일정한 방향으로 끼워 맞추려는 일관된 노력이다.”라고 그 속성을 진솔하게 적시하고 있는 저자의 성찰은 마치 21세기 미디어 사회를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민주주의의 현실적 참여가 어찌되었든 오늘의 대중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이들이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서로 다른 사상과 경험, 주장을 가진 이들을 지배할 수 있을까? 즉 대중의 동의 없이는 권력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선전은 대중의 마음을 단단히 틀어쥐고, 여론을 의도하는 방향으로 거의 정확하게 돌려놓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버네이스는 이러한 통찰에서 사람들을 통치하고 그들의 생각을 주조하고 취향을 형성하는 도구로서의 선전이 가지는 무한한 권력으로서 의미를 포착하고 있다. 그리곤 이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다수인 대중을 지배하는 선전방법론, 사회심리적 기제와 동인을 통한 여론 경로의 장악 등에 대해 탁월한 역량을 드러낸다.

‘월터 리프먼’의 “‘합의의 조작(manufacture of consent)’은 공적인 영역 어디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는 믿음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지적처럼 대중의 의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진실을 왜곡 조작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선전’에 대한 악명을 더욱 강조 한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는 행동심리학이나 , 스스로 하는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판단은 부지중에 우리를 지배하는 외부영향이 각인해 놓은 인상의 복합물이라는 집단심리학의 발견은 선전방법의 중대한 수단으로서의 틀을 제공한다. 버네이스의 이러한 이해는 당시 대중을 향한 실질적인 선전 전략의 실행으로 입증되고 있다.‘체이스 필드’의 담배판매전략, 쿨리지의 대통령 재선전략, 미국전력협회의 선전전략, 섬유업체의 패션전략 등 “점진적이고 개별적이면서 분산되고 반(反)의식적인 대중의 반응을 목표로 삼는” 대중 관행에 변화를 가져올 환경을 조성하는 은밀한 수단으로서 위력을 발휘한다.

버네이스의 선전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정부의 여론 장악을 위한 탐욕스런 발버둥, 거대기업들의 미디어를 통해 전개하는 대중의 관행에 변화를 가져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대중은 시장권력, 정치권력이 획책하는 사실을 모른 채 어느덧 선전가의 의도대로 따르고 있게 된다. 선전가(정치권력, 시장권력)는 자신이 야기하는 소동에 초연해야 한다는 마치 '조지 오웰'의‘이중사고(doublethink)'같은 모호한 정신상태의 외면으로 가장하는 권력을 보는 이유가 설명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선전인지도 모르는 선전에 노출되어 소수의 지배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권력이 보여주는 현상을 진실로 믿어버리고 만다. 뉴욕타임스 1면에는 매일 여덟 건 중요 기사가 게재되며, 이 중 네 건, 즉 절반은 선전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뉴스기사라는 외피에 숨어있는 선전의 보이지 않는 힘은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고 권력의 의지에 동의하게 하는 왜곡을 정당화한다. 탈법적인 강행처리로 대중의 의사를 거스르면서까지 입법화하려고 하는 현 정권이 고수하는 미디어법은 “선전을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들조차 선전에 쉽게 넘어간다.”는 선전의 속성에 대한 버네이스의 확신에 찬 주장을 뒷받침 한다. 언론을 장악한 시장권력이나 정치권력은 대중을 무한히 기만할 수 있기에 지울 수 없는 욕망이 된다.

“뉴스를 근원에서부터 오염시키는”이 보이지 않는 권력, ‘선전’은 그래서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유용한 시사를 던진다. 탐욕스런 권력에 조종당하지 않으려면 이 조정의 전략은 필독서가 될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역시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당연히 갈수록‘선전’을 불신했지만 선전의 지지자들은 그 놀라운 성과에 혀를 내둘렀고, 그런 가운데 선전은 갈수록 세를 불려 나갔다.」본문 P50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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