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책 사랑의 완성에 대한 두 번째 감상으로 무질의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한 것이다. 번역본은 북인더갭 출간 본으로 이 중 단편소설 지빠귀 (Die Amsel)를 별개로 첫 번째 수록하고, 나머지 산문 중 15편을 생전의 유고로 분류하고 있다.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은 앞서 남겼다.

 

 

문학은 삶의 개념을 파악하고자하는 학문과 달리 삶을 무한한 미지의

 현상 자체로서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로베르트 무질

 

 

1.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에 대해서

 


유고는 작가의 사후에 미()출간된 글들에 대해 붙이는 개념어다. 그런데 작가 생존에 유고(遺稿)’는 모순된 사용이라 할 수 있다. 무질은 이런 까닭으로 변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사후 유고의 출판을 못하게 하기 위해 결심했으며, 이를 지키는 방법은 스스로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반의 증언은 특성 없는 남자2권의 집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예견되는 출판의 공백을 메우기위한 방책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무질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스위스로 도피하여 생활고를 겪으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미국에 도피 중이었던 토마스 만에게 후원금 5달러 지급 연장을 부탁하는 가슴 아픈 편지가 전해져 온다.

 

생전의 유고1934년에 출판한 무질 생전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30편의 짧은 산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아주 짧은 5쪽 미만의 글들이고, 단 하나 지빠귀만이 15쪽 분량의 단편 소설이다. 무질은 이 작품들을 네 개의 성격으로 분류하여 각기 (), Bilder14,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4, 마지막으로 지빠귀로 배치하고 있다. 국역본 사랑의 완성은 이들 중 지빠귀를 별도로 구분하였으며, 나머지 29편 중 15편이 생전의 유고라는 항목에 편집되어 있다. 수록작 중에서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11편 모두가 빠져 있으며, 각 분류 항목에서 1,2편씩이 추가로 빠져있다.

 

2. 지빠귀 (Die Amsel)에 대해서

 


단편 지빠귀는 무질의 작품에 있어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쓴 마지막 단편소설이라는 의미보다도 이야기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소설론(小說論)적 성찰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3인칭 화자가 시작하여 1인칭 인물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건네지만 다시 3인칭 화자로 복귀하지 않는, 즉 틀이 닫히지 않고 열린 상태로 끝을 맺는다. 형식이 마무리 되지 않음으로써 소설의 종료는 독자의 창의적 해석으로 넘겨진다. 소위 무질 문학의 전형적 특성이다. 이를 평론가들은 표현과 침묵 사이의 허공을 부유하며 확정과 완결을 거부하는 문체라며, 바로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이 곧 무질의 문학 의도라 말하고 있다.

 

소설은 딱히 줄거리랄 것이 없지만 아츠바이(Azwei)라는 인물이 친구 아아인스(Aeins)에게 들려주는 어떤 연관성이나 인과성도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전부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창밖의 지빠뀌 노래 소리로 인해 순간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 아주 다른 감각의 세계로 옮겨간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었던 이야기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전쟁 참전 중 적의 헬기로부터 화살이 날아와 생사의 갈래에 섰을 때의 신비로운 체험담이다, 마지막은 사업 실패로 어려움 겪던 중 어머니와 아버지의 잇단 죽음과 고향 집에서 자신의 옛 시절, 자신이 가장 선하고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마다 독자 나름의 공감이나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뚜렷하게 해석할 테마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첫 일화에서는  수직의 공간 체험을 충분히 이용해 동일성의 공간을 탈출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어.” 라는 문장처럼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기를 읽을 수 있으며, 다음 일화에서는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야.”와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고. 마지막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닌 고정된 상()의 현실과의 불일치, 즉 살아있는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증명의 변()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아아인스는 묻는다. 이 세 이야기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 아니었어?”라고. 그러나 아츠바이는 부인하면서 만약 내가 그 의미를 알았다면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을 거야.”라며 소설은 종료된다. 세계의 모든 질서는 확고한 것보다 확고하지 않은 것 속에 보다 많은 미래가 있다는 무질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무한한 가능성만을 남겨두고 독자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넘긴다. 인과법칙도 논리적 연관성도 벗어난 이 소설은 이렇게 읽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는 독자 개별의 몫이 될 터이다.

 

3. 생전의 유고15편의 산문에 대해서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 대부분이 무질이 (), Bilder이라고 분류한 항목에 속한 작품들이고, 성격 없는 사람이란 제목 한 편만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에 속한 작품이다. 무질은 ()’ 정확한 관찰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순간 무심코 표현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다분히 문학의 근본으로서 역사 구조에 대한 정밀한 관찰의 신념을 읽을 수 있으며, 사실 수록된 산문들도 이러한 설명에 일치한다.

 

파리잡이 끈끈이는 문자 그대로 한 여름철 동네 뒷길에 있는 허름한 식당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리달려 있는 파리 잡는 끈끈이 그것이다. 세밀한 관찰기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도로서의 무질의 시선이 느껴진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이내 포기하고 죽어가는 파리들을 묘사하는데, 20세기 초 독일 사회 인민들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극도로 애쓰는 이들의 표정에는 라오콘 보다 더한 절절함이 배어있다.” 라든가, 기이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현재의 순간적 욕망이 계속 살고 싶다는 강력한 감정을 모두 누르는, 비장한 무의식의 순간에 대한 관찰은 실로 만만치 않은 생각의 타래를 풀게 한다.

 

원숭이 섬은 다소 신랄하고 비판적인, 무질의 문학에서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묘사되는 대상이 원숭이일 뿐이지, 인간으로 대체해도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은유라 할 수 있다. 나무와 대지를 지배하는 계급, 그리고 여기에 오를 수 없어 대지 아래 도랑에 머무는 원숭이들의 배치나 이들 지배 원숭이들, 박해자가 난간을 따라 걸어가자 경악의 파도도 그를 따라 멈춘다.”, 권력 계급이 보이는 폭력성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비굴함과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박해자 원숭이의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천박한 오늘의 권력을 떠오르게 한다. ()도 웃을 수 있을까?, 재단사의 동화등 몇 몇 작품들이 비교적 시선을 끌지만 단연 특이성 없는 남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격 없는 사람은 무질을 읽는 독자라면 한 번은 읽어 볼 이유가 있는 작품일 것 같다.

 

이 녀석아 넌 쓸 만한 성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어린 시절 성격이란 이 인용 문장처럼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이 성격에는 분명 올바르지 않는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린이에게는 당연한 발상일 것이다. 부모들에게 이 성격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성격이란 형편없는 성적, 장난치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것, 야비한 행위...등과 개념상 정 반대 되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반대, 즉 쓸 만한 성격은 처벌의 두려움, 들 킬 것에 대한 두려움, 나쁜 짓에 대한 후회, 양심의 가책이 되고만다. 사실 이 추론은 아이들에게 비굴함과 복종, 노예근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성격 없는 사람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성격 없음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읽기에 제법 도움을 주는 선행 독서가 되어 줄 것 같다.

 

무질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모든 질서는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다.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 되어진 것, 현상된 것에 대한 유보를 통해 부단한 서술과 서술의 해체를 거듭하며 가능성을 타진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불완전성의 틈을 미흡하지만 메울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결합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일 것이다. 매혹된 차에 무질의 작품 세계를 당분간 지속하여 거닐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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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3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 담아둡니다~~^^
무질의 <특성없는남자>를 사놨거든요 ^^

필리아 2024-02-08 14:57   좋아요 1 | URL
국내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번역판본 중, 원작 1권의 충실한 완역본은 문학동네와 나남출판 두 종류가 있는 것 같구요, 북인더갭의 미완으로 머물렀던 통합본의 나머지 부분이 2권으로 드디어 출간, 완간되었네요.(2014.2.8 댓글 수정)
 
사랑의 완성
로베르트 무질 지음, 최성욱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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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 대한 리뷰는 두 차례에 나눠 기술하기로 했다. 그 까닭은 무질이 생전 의도하여 출간했던 의지에 따름이기도 하고, 감상자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을, 그리고 두 번째에 생전의 유고에 실렸던 지빠귀를 비롯한 15편의 단편들에 대한 리뷰로 분할하여 남긴다.

 


사랑의 완성』 ❶ 사랑의 완성과 세 여인에 대해


 Robert Musil (Klagenfurt, 1880 - Ginebra, 1942)


무질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의 이야기, 즉 사실주의적 이야기로는 삶의 심연에 이를 수 없다는 그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의 선()지식이 요구되는 것 같다. 무질에게 문학은 경험적 현실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포착 노력이며, 개념을 벗어난 사고의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독자들이 무질의 작품을 회피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특히 인간 이성이라는 합리적 논리에 길들여진 오늘의 사람들에게 인과적 논리에 대한 혐오나 비논리적 감성, 비현실성, 불가능의 경계를 향해 돌진하는 무질의 문학은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작품으로 쓸 필요는 없다.”는 그의 선언처럼 어떤 확정적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단지 시도된 표현들의 여정에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독자 각자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기도 한데, 이야기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어떤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의 표제를 사랑의 완성으로 한 것은 무질을 대표하는 문학론적 의미를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질은 학문적 개념체계, 즉 이성의 논리 강요를 폭력으로 비유하며, 문학의 논리를 사랑에 비유하듯, 그의 소설들은 다분히 비논리적 감성, 어떤 비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표방하는 학문의 현학적 정확성은 오히려 객관성이라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환상적 정확성을 표방하는 문학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그의 생각처럼 문학이야말로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완전한 모습임에 공감할 수 있다.

 

1. 사랑의 완성


 


무질의 작품 선집인 이 책은 그가 당초 발표했던 작품집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편 지빠귀가 생뚱맞게 별개로 제일 앞에 수록되어 있고, 각기 별도로 발표되었다가 후일 세 여인이라는 단편집에 묶여 출간된 작품이 두 번째이고, 사랑의 완성합일이라는 단편집을 위해 무질이 의도하여 개작하고 집필한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과 함께 구성된 작품으로 독립하여 세 번째에 수록되어 있으며, 끝으로 생전의 유고는 무질이 분류하여 수록한 30편의 작품 중 그 절반만이 무질서하게 구성되어 있다.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의도는 사건이나 행위 대신 회상과 상상에 의해 진행되는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의 선형적 시간 순서를 파괴하는 전개가 독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배제한 듯하다. 또한 생전의 유고중 부분만을 선택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편집은 어떤 의미에서 오만함이고 부주의함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무질의 작품에 대한 출판시장의 척박함은 사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완성 장편 특이성 없는 남자를 제외한 그의 작품집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출판독서시장의 현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수록 순서를 바꿔 표제작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청탁에 의해 2년에 걸쳐 집필된 두 편의 단편으로 출간된 모음집 합일(Vereinigungen)중 한 편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에 대한 혐오에서 썼다.”고 할 만큼 실험적 시도가 지나치게 압도한 나머지 소설적 긴장이 결여되어있음을 작가도 고백할 만큼 독자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당대의 문제일 뿐이지, 무수한 실험적 시도의 작품에 익숙해진 오늘의 독자에겐 그리 낯선 것도 아니며, 독해 불능에 빠질만큼 어떤 난해성을 지닌 작품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설은 이쯤에서 멈추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몇 안 되는 대화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기억의 회상과 몽상, 독백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극히 예외적 장면이다. 정말 함께 갈 수 없어요?”, “안되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급히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딸 아이 릴리의 기숙학교 방문의 동행에 대한 남편과 주인공 클라우디네의 지극히 평범한 대화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부부의 어떤 균열을 읽는다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이 될까? 딸 리아는 지금 남편의 소생이 아닌 결혼 전 치통으로 찾아간 미국인 치과의사의 자식이다. 여자는 홀로 기차 여행을 떠난다. 이 기억은 당시 열정과 과격하게 사로잡혀 저지른 평범한 충동일 뿐으로서, 본질상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여자의 회상과 몽상과 독백은 하나의 원 주위를 뱅뱅 돌 듯 은밀하게 숨겨둔 욕망, 과거의 문란했던 충동적 해방의 시절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남편과 이룬 안정되었지만 억제된 삶으로부터의 도주라는 경계를 선회한다. 그런데 이 순환 반복되는 상념이 가져오는 낯설고 이질적 세계, 다름의 상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마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비이성이 반복되는 오고 감의 반복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조화? 혹은 통일?, 이 점진적이며 눈에 뛰지 않을만큼 미세하게 이동하는 진행에서 클라우디네는 어떤 합일(合一)의 체험에 이른다. 소설의 모티프라야 정말 보잘 것 없다. 흔해빠진 유부녀의 관능적 욕망과 간통이라는 진부한 통속적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모티프는 하나의 소설적 구실에 불과한 듯 여겨진다. 즉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윤리적 탐구가 아니란 점이다.

 

무질의 작품들 전반에 자리잡은 독특성인데 주인공을 현실로부터 격리하여 고립시키는 것이다. 클라우디네는 폭설로 인해 소도시에 한동안 고립되는데,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온갖 제약, 그 제한성을 이탈함으로써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감정의 세계라는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은 이러한 다름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 도처에서 표현되고 있다. 길을 떠난 사람만이 느끼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낯섦의 행복, 자욱한 안개 속을 달리다보면 모든 것이 실제보다 크고 어렴풋한 제 2의 윤곽을 띠는 것처럼...등등 인습적 틀의 사고를 벗어나 진실의 또 다른 면을 직시하게 하려는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은 무질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을 말하려는 것이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사랑의 완성이란, 이성과 비이성(감성 등)의 합일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완전성을 말 하려한 것이 아닐까?

 

2. 세 여인


 

사실 연작처럼 묶여있지만 세 연인을 구성하는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1924년에 단편집으로 엮어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3부작으로 계획 집필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록된 세 작품에는 분명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여자들은 실제 거의 말하는 인물들이 아니며, 남자의 상대역으로만 존재를 알릴뿐이다. 그런데 세 여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무질은 자신이 추구하는 비현실성과 비이성의 진실을 말하는 자기문학의 지향점으로서 여자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능동적 이야기의 주체가 아닌 침묵의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는 바로 그 여자들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2-1. 그리지아(Grigia)

 

이 소설은 무질의 문학 정신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살다보면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틀 것이냐를 망설일 때처럼 인생이 눈에 띄게 느리게 흘러 갈 때가 있다.(40)” 소설은 이 시작 문장을 구체화한 기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작품도 예외없이 주인공인 호모는 오래된 금광 개발에 초빙되어 가족을 떠난다. 다시 말해 일상적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며, 그곳은 곧 외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을 뜻하고, 이로서 낯선 경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낯섦의 공간은 소설 초입부에서 해당 지역에 있었던 일화로 설명되고 있는데, 미국에 돈 벌러 갔다 돌아 온 남편과의 동침을 했던 농부 아내의 기억에 관한 것인데, 남자는 남편을 흉내 낸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 기억과 남자의 말을 비교해 보곤 듣자마자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어느 누구도 자기의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48~49)”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에 대한 전복이다. 갑자기 세상사의 모든 것이 불안에 빠진 듯한 이런 상황이 지배하는 곳, 왠지 꽤 오래 현실 세계와 격리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호모는 그리지아라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그것은 동화같은 숲이 있으며, 자기 몸을 생전 처음 만져보는 것 같은”, “자기 삶의 생명력을 다 소진해버린 것 같은 그래서 그의 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해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는 것 같다. 이성으로 무장된 엔지니어인 호모가 마주한 여인과 장소가 허공에 떠있는 유희처럼 느끼게 하는 순수 자연의 세계, 문명이 스며들지 않은 비이성의 인간 세계라는 점이다.

 

일상적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호모는 어느 날 버려진 갱에서 그리지아와 함께 쾌락을 나눈 후 잠시의 몽상 후에 여인은 없고, 갱 출구는 한 줄기 빛이 비치지만 큰 바위로 막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황당한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동화같은 소설은 독자에게 잔뜩 수수께끼를 남기고 종료된 것이다. 호모는 탈출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탈출의 가능성이 부재한다고 단언 할 수 없음에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중지한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남겨진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를 20세기 초 유럽이 처한 출구 부재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일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이성이라는 현학적 환상에 대한 혐오, 즉 신비와 비이성적 각성의 세계인 이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진다. 물론 호모의 내적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따라서 호모의 죽음 수용은 삶의 의지의 포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열정적 추구처럼 보인다.

 

2-2. 포르투갈 여인(Die Portugiesin)

 


이 소설의 배경은 중세의 외딴 수직 암벽 위의 성이다. 자 또 고립이다. 오백 걸음 밑에는 작지만 물살이 센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소리가 워낙 거세 ...교회 종소리가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77)”의 공간이다. 이 고립이 의미하는 바는 일상적 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질은 단지 외적 현실의 영향을 배제한 표본적 공간으로서, 일종의 실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박사 출신의 무질은 외적 영향 요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 공간에서 인간들의 행동과 정신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케텐의 영주 또는 케텐이라 불린다. 외부에서 결혼 할 여자를 취해야 하고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트리엔트 주교와의 싸움을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존재다. 케텐은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사람이며, 그의 아내 포르투갈 여인은 마법과 같은 행위를 보이는 사람이다. 이성과 비이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몽환적 이야기는 주교와 마침내 종전에 합의함으로써 추구할 과제를 상실한 케텐의 상황으로 나아간다. 주인공 케텐은 케텐종족의 삶의 목표와 자아를 동일시한 인물이기에 종전의 결과는 자아 상실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케텐은 병들어 수척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가속화하는 존재가 출현한다. 언젠가부터 성에 와 있는 이방인 청년이다. 아내의 곁을 맴도는 인간에 대한 질투와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케텐은 사경을 벗어나지만 점차 기력이 쇠잔해 간다. 소설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늑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일종의 암시로 작동하는 것 같다. 자아의 상실로 쇠잔해가는 케텐은 무언가 행해야만 살아 있는 존재다.

 

케텐 사람들이 고양이를 죽이는 사건은 이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이고, 이방인 청년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마치 행동의 실천, 의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듯, 다 죽어가던 케텐은 오르기 힘든 성벽을 기적처럼 올라간다. 청년의 방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는 떠나고 없다. 아내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침실로 가 확인하지만 아내는 잠에 빠져 부드럽게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케텐은 불안감을 떨쳐버린 기쁨에 거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에 빠진다. 그리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정말 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체 무얼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 도전을 요구하는 이 활짝 열린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 지는 두고두고 음미해보아야 할 숙제이다.

 

2-3. 통카 (Tonka)

 

이 소설의 테마는 정말 얄궂은 데가 있다.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 불분명한 지대를 거닐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은 이름 없이 다만 인 화학을 전공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그는 빈민 출신의 통카를 대도시로 데려와 동거한다. 어느 날 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사진찰 결과 통카의 임신과 성병이 발견된 것인데, 과거를 거슬러 잉태의 시점을 재구성하였을 때 그는 오랜 출장 중이었다. 결국 통카의 임신과 성병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랄 수 있다. 그는 통카에게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지속하여 요구하지만 통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과학도인 그에게 이 침묵은 의학의 진실을 부정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통카의 특징으로 별로 말하지 않는 소녀라는 말 할 수 없음이 곧 통카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무질의 유머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다. 그는 한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 ‘마리아의 잉태만큼이나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기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확률과 기적’, 이성과 비이성의 갈등에 빠져 허우적대고, 믿고자 하는 소망은 의학의 높은 확률의 가능성에 휘청댈 뿐이다. 여기 다시 역사적 진술에 관한 무질의 멋진 신념이 드러난다. 잉태의 시점, 즉 역사의 재구성이란 사건 현장의 확인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현실이 사고 속에서의 현실보다 적어도 100년은 뒤져있다는 무질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역사란 창안되는 것이지 수집된 자료들을 꿰맞추어 객관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란 인간 삶의 해석을 과제로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작가에 의해 자유로이 창작되는 세계야말로 완전한 세계라는 역사의식이 지닌 통념을 전도시키는 이 믿음의 수행이 무질의 문학이라는 것을 아마 가장 생생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통카의 침묵은 단지 해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주인공 화학도는 이성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고 통카의 침묵을 이해하려 한다.

 

무질은 이를 통해 그의 문학 논리인 사랑의 차원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통카가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믿어요.”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평론가들은 통카의 침묵을 부정한 사실에 대한 시인이나 은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침묵은 침묵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질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무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무질의 냉철한 이성과 비논리적 대담성의 통합, 즉 이성과 비이성의 합일 추구는 그의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문학의 환상적 정확성에 대한 독특함일 것이다. 아마 그의 대표작인 특성없는 남자에서 울리히의 목소리를 빌어 주장하는 그 어떤 사물도, 그 어떤 자아도,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원칙도 확고한 것은 없다.”며 무한한 가능성의 감각을 열어놓으려는 의도의 실천을 체험하는 사뭇 새롭고 흥미진진한 문학이라 하겠다.



*두 번째 리뷰 참조- <지빠귀> 및 <생전 유고>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62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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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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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작가의 말> 에서


 


성급한 더위가 여름을 재촉하는 조금은 못된 계절이다. 폭설 내리는 겨울의 시간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이러한 성급함과 못됨을 중화시켜주고, 아니 이 기운을 지그시 눌러주는 듯하다. 열이 잔뜩 오른 화를 다스리는데   창밖의 풍성하게 흩날리는 눈발은 아마 마음 평정에 제격일 듯싶다. 이 작품은 평온함, 따뜻해짐, 누군가와 같이함의 유대와 위로를 느끼게 해준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은 이러한 느낌, 아니 믿음의 반영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무수한 갈등과 충돌을 헤치며 입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고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은 죽음과 삶, 떠남과 떠나지 못함의 이 대조적 현상을 아주 소소한 마음들이 연결되어, 추운데도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거짓말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체험토록 이끄는 듯하다.

 

소설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수평선도 지평선도 점차 희미해지다 결국에 사라지듯그렇게 영혼의 상처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함의 나눔에 섞여 희미해지고 어느 샌가 평온함이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이야기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해변 전체가 마치 거대한 고물상처럼 퇴락한 바닷가 동네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다섯 서사가 서로 물려들고 그 경계가 희미해지며 결코 뒤섞일 듯하지 않은 세상 모든 인간들의 고독과 상처가 바로 그 볼품없는 인간들에 의해 위로받고 평온을 되찾으며 삶을 지속할 동력임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핑을 하면 (Ding)’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

 

산다는 것은 세상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살아있음, 무언가f를 하고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손상은 부정(否定)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긍정의 표시일 것이다. 떠남도, 떠나지 못해 떠남을 상상하는 것도. 소설은 이렇듯   퍽 다정한 침묵”,  “배고프지 않음”,  “폭설을 견딜 힘의 정체를 통해 위로와 평온을 선사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의 남루함, 타인의 죽음을 일종의 가십거리로 삼는 기만과 위선의 천박함을 통해 이 사회의 몰지각과 부도덕성의 일상성을 넌지시 풀어 놓기도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벌금 몇 백 만원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컨테이너 숙소 때문이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림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네 일회성 연민은 사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귤 한 알의 건넴, 따뜻한 한 그릇 홍합 국물, 단지 함께 해 줄 수 있음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생에서 아주 잠시라도 닻을 내린 기분, 믿음의 안식이 된다. 이 소설의 따뜻함을 상징적으로 순환하는 귤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다시금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며 세상의 온기를 퍼뜨린다.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인간들이 있는 세계, 누군가 내민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의 평온함이 전편을 나지막하게 흐르며 순백의 눈송이가 되어 찬란하게 흩날리는 존재됨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라면 이 소설의 제목을 상황적 표현인 딩 보다는 고유한 결정체인 '눈송이들'로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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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월의 책은 그저 우연의 연속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아마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에 대한 울화 때문이었던 싶다. 이러한 심상이 만연한 진화이론의 남용에 의한 편협과 왜곡, 의도적인 선전물들의 난무를 분별하는 책을 찾게 했던 모양이다.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센스 앤 넌센스를 읽게 되었다. 그러다 신간 안내 도서에서 와일드 후드라는 세상의 모든 생물체의 청년기와 인간의 행동,심리를 비교하여 성장기의 지난한 진화론적 역사 이야기를 재빨리 구매했다"직관을 거스르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경험으로 진입하는 성장기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두 책은 전혀 계획된 독서의 목록이 아니었음에도 삶에 끼어들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영역본 Capital은 순전히 대조 읽기와 참조용으로 구입했다. 의미가 모호할 때 이 영역본은 유용하게 활용될 터이다. ‘파울 첼란의 시집은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에 영향을 받은 읽기이다. 독일어를 말하며 성장했지만 독일인들로부터 배제된 유대인의 그 철저한 소외와 넘어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의 부당함을 일생 고뇌했던 시인의 글쓰기인 신비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아마 이와 유사한 맥락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은데, ‘로베르트 무질 사랑의 역사에 수록된 생전의 유고를 구성하는 작품들 때문이다. 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독자적 논리인 비이성적 영역과 비논리적 대담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공명하려 애쓰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고 1차 대전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음에도 나치에 의해 금서작가로 몰리고 스위스에 도피하여 곤궁한 삶을 살다간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들끓는다.

 

한국 문학들은 사실 완전한 임의적 선택이랄 수 있다. 요즘 국내 문학의 획일화된 분위기에서 조금은 멀어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만 외면 할 수 없는 몇몇 작품들에 독자의 작은 성원을 보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전혜진 작가의 바늘 끝에 사람이는 주류 사회가 은폐하거나 외면한 한국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이 빼곡한 소설집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다시 자성하는 읽기가 될 것 같다. 박문영 작가의 허니비는 버려진 지구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인 미래 사회를 축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게 하는 작품일 것 같다. 내 의지가 가닿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이다. 여행자,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유행과 광고의 현혹으로 내 수중에 들어 온 책들이다. 아마 무더위가 찾아오면 읽게 될 줄 모르겠다.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은 내게 어떤 의도를 남겼는데, 놀이를 사회학으로 연결 짓는 이 위대한 저작은 놀이와 정치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연구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사회와 문화 비판의 중요한 논거로서 높은 가치가 느껴진다. 요한 하우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완결 짓는 역사적 걸작일 것이다. 이 두 저술 이후에 이렇다 할 후속 연구가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지식 엘리트라 자처하는 이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까지 한다.

 

기득권의 그 집요한 보전 욕구가 학문에는 순수성이란 애초 없음을 확신케 한다. 무질이 학문을 경멸하고 문학에 천착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사를 구입하게 된 동기는 막연하게 18~19세기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그네들 인식을 조망하기 위한 대강의 또 다른 판본에 대한 기대였다. 사실 이러한 의도는 충족되지 못했다. 책의 선택이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실패로 인해 읽게 될 일 없는 책들을 읽게 된다. 우연, 즉 인간이 논리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우연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사인 모양이다. 이제 6월의 도서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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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5-2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문학을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파울 첼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늘 감탄하며 리뷰 읽고 있습니다. 유월의 우연도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3-05-24 10:3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요즘 파울첼란,카프카,무질에 꽂혀있어요. 이들의 열린결말, 비의적 글쓰기에 매료되어 있어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초원님~
 
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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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가 일상과 뒤섞일 때 그 사회는 부패한다!

- 주술과 홀림의 정치, 문명 퇴행의 표상에 대해서

 

 

이 책은 놀이를 출발점으로 하는 사회학의 기초를 놓고자 하는 작업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시간 동안 놀이를 단순하고 무의미한 어린이 같은 기본 놀이로 간주해왔고, 고작 심리학이나 생물학적 기반에 의한 교육 또는 훈련 역할정도의 연구가 고작이었으며, 지금의 현실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지배 엘리트의 은폐된 어떤 의지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놀이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장을 전면적으로 열어놓은 요한 하우징거1938년 발표된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로제 카이와의 이 저술은 아마도 놀이에 은닉된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드러낸 지금까지의 가장 완결된 연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을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놀이의 사회문화적 가치, 즉 현실 세계의 각종 제도와 규칙이 어떻게 놀이와 상호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며, 나아가 놀이는 한 문화의 도덕적, 지적 가치를 나타내는(58)” 중대한 표상이라는 점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의 지배적 놀이는 그 사회 실체의 얼굴이며, 야만과 문명 사이의 위치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저술은 바로 2023년 한국 사회의 문명적 위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수없이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놀이가 무엇인지부터 아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로제 카이와 놀이를 규정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한정된 분리, 격리된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결과나 놀이의 전개가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하고, 재화나 부 같은 어떠한 새로운 요소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활동이며, 규칙(약속)이 있는 활동이거나 허구적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놀이란 즐거움 그 자체인 것이라는 점에서 언제든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자유로운 것이며, 일상생활과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놀이를 위한 별도의 장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개념 자체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다.

 

특히 비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놀이가 생산에 참여하게 되면 실생활의 경계가 무너져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 되며, 놀이라는 순수한 즐거움을 파괴하게 된다. 아마 놀이의 가장 중요한 활동 요소일 텐데 필수적으로 해당 놀이의 절대적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과 이에 대한 준수가 없다면 놀이는 놀이로 수행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는 모두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 없는 놀이도 있다. 자유로운 즉흥적 발상을 전제로 하는 인형놀이, 병정놀이, 기차놀이처럼 역을 맡는 즐거움으로 인해 노는 놀이가 있다. 이것은 감정이 규칙을 대신하는 놀이로서 이 감정(허구)이 곧 규칙인 놀이이다. 여기서 어떤 놀이든 오직 규칙을 지니든가 허구를 지니든가 둘 중 하나를 지닌다는 점이다. 둘 모두를 지닌 놀이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특징들, 특히 규칙과 허구의 놀이를 장황하게 서술한 이유는 이것이 곧 특정 사회의 문명의 위치를 가늠하는 중대한 분류 개념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놀이가 한 사회에 만연하는 경우 그 사회의 현실은 공정성이나 평등성, 민주주의적 의식의 쇠퇴, 사회적 불안정성의 증대를 예측케 하는 지표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놀이의 역할에 따른 분류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카이와는 모든 놀이를 경쟁, 우연, 모의(模擬), 현기증’, 네 개의 역할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각기 아곤(Agon; 시합,경기), 알레아(Alea; 요행,우연), 미미크리(Mimicry; 흉내,연기,모의), 일링크스(Ilinx; 현기증,홀림,소용돌이)로 명명한다.

 

사실 오늘의 세계와 같은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세습계급을 불식시키며 주술적이고 열광적 제의(祭儀) 사회를 벗어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물론 서구 사회의 경우 계몽주의가 태동한 17세기를 전후한 4세기 남짓 되겠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30년 전까지 암흑 사회였다고 할 수 있으니 최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허구적인 환상에 의존하는 혹세무민의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네 역할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놀이(Jeu, Play)의 네 역할(아곤에서 일링크스까지)

 

아곤(Agon) 적절한 연습, 부단한 노력, 승리에의 의지, 지속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놀이다. 스피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와 같은 개인의 능력이 경쟁하는 놀이로서 체스, 당구, 축구 등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쟁, 시합 놀이는 우선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불공평성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규칙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이들의 여러 참을성 놀이는 아곤의 초기 놀이 양식일 것이다. 숨 오래 참기, 눈 깜빡거리지 않기 등 상대방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순수한 개인 능력 드러내기 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알레아(Alea) 상대방을 이기기보다는 운명을 이기는 것이 문제인 놀이다.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에 몸을 맡기고 숙명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기다리는 놀이. 이 놀이의 본질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오만불손한 경멸이 자리잡고 있는데, 가혹한 현실 세계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도달 할 수 없는 성취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놀이의 중요한 점은 참여자가 무릅쓴 부담과 위험에 엄밀하게 비례한 보상처럼 위험과 이익의 균형을 위한 주의가 기울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현실에 없는 순수하게 평등한 조건의 인위적 조성이다. 우연만큼 평등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에서 절대적 평등의 실현 규칙은 불가능하다. 아곤의 경우 먼저 시작하거나 나중에 하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며 육상이나 빙상 트랙경기에서 안과 바깥쪽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이를 상쇄하기위해 교대로 차지토록 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며 평등을 확립하려 한다. 복권같은 출생의 우연에 의한 환경적 우열, 체급별 경기의 체중의 불가피한 차이 등 완전한 절대 평등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알레아는 우연이라는 평등성으로 이를 보완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허구적 닫힌 세계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 놀이다. 가공의 환경 속에서 가공의 인물이나 사물이 되어 그것에 어울리게 행동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놀이다. 집에 있는 의자를 죽 늘어놓고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는 자신이 기관사인 척 하며 논다. 또는 엄마, 요리사, 군인, , 비행기, 자동차를 흉내 내거나 연기하며 논다. 어른은 가면을 쓰거나 변장을 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숨기고 실제의 인격을 해방시켜 방종의 분위기를 이용하며 논다. 미미크리는 곧잘 아곤과 결합하여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즐긴다. 운동선수, 영화배우, 아이돌스타 등은 능력 경쟁을 통해 관객과 청중에 과시함으로서 즐거워한다,

 

끝으로 일링크스(Ilinx) 일시적 지각의 안정을 파괴함으로써 기분 좋은 패닉을 즐기려는 목적의 놀이다. 몸을 빙빙 돌려 쓰러지거나 비틀거림을 즐기는 것, 높이 올라가는 그네, 광란적 회전을 즐기는 놀이를 들 수 있겠다. 혼란과 패닉을 즐기는 이 놀이는 고대 주술사의 광란적 환상의 몸놀림을 연상시킨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이들 놀이의 역할과 그 수행을 앎으로서 이들과 현실 세계의 제도와 규칙, 사회의 특성을 대응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 놀이가 인간의 강력한 본능들의 형식이며, 관념적이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일상생활과 떨어져 놀이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곤은 페어플레이의 규칙 존중과 타고난 탐욕의 억제를 습관화 시킨다. 또한 알레아는 현대사회의 생존 경쟁이 요구하는 부단한 긴장과 경쟁의 열위의 체념을 보상하며 개인과 사회적 긴장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미미크리는 자신의 인격에 잠시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서 공상과 환상을 즐기며 병적 일탈을 막으며, 일링크스는 기억의 부담, 책임의 고통,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일시적 도피 수단이 된다. 이렇게 이들의 역할에 따른 기능을 해석하다보면 놀이라는 것이 사회적 순화, 배출, 훈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일링크스에 분류되는 놀이가 만일 오염되거나 타락해서 더 이상 놀이의 범주를 벗어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지 생각해본다면 이 착란과 혼란의 추구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 상습화되는 것이다. 아마 취함과 현기증 속에 있는 인간은 개인 자신은 물론 주변을 황폐화 시킬 것이 다. 다시 말해 놀이는 본능을 억제하며 제도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며, 이들 놀이를 부패, 타락케 하는 요인, 또는 사람, 권력의 침범은 질서와 규칙의 파괴를 낳게 될 것이다.

 

놀이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회적 표상으로서의 놀이

 

놀이는 인간에게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 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순기능의 역할로서 작동한다. 격리된 놀이에 따른 장소, 시간적 한계, 그리고 규칙성과 생산의 부담 없는 비생산성의 해방감과 자유로운 진퇴, 실현 불능의 허구를 통한 감정의 우회와 일시적 분출의 창구로서 현실 사회의 가혹한 환경을 차단하고 휴식과 즐거움이라는 삶의 가능성을 조성하며 제도와 정치사회의 불충분성을 보완하는 균형추가 된다.

 

그런데 놀이가 일상으로 오염되기 시작하면 놀이의 성질 자체가 손상되고 놀이는 놀이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즉 놀이가 현실 세계와 뒤섞이면 부패가 일어난다.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 관념이 되고, 도피였던 것이 의무가 되며, 기분 전환이었던 것이 집착, 강박 불안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놀이는 현실에 감염되어 부패가 일어난다. 이 부패에 주목하게 되는데, 바로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 정신에 의해서 더 이상 누그러지지 않는 대립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부패가 나타난다. ‘놀이 정신을 다시 반복 서술한다면 바로 정정당당한 규칙의 존중을 비롯한 모두에서 언급한 놀이의 여섯 특성과 같다. 놀이 정신은 곧 사회 제도가 반영하고 있는 원천이다. 작금의 한국정치사회는 이 놀이 정신이 훼손, 파괴됨으로써 도덕적, 사회적, 법률적 구속의 틈이 벌어졌다. 이 균열로 인해 경쟁의 선천적 난폭성, 즉 '자신의 반대자는 철저히 도륙한다'가  사회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규칙이 존중되지 않음으로서 폭력과 잔악성이 사회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탐욕과 폭력의 억제 습관을 붙이는 교화적 역할을 수행하던 놀이의 정신이 파괴되었음은 하나의 현실 사건만으로 입증이 충분하다. 아곤(경쟁, 규칙존중)의 타락은 심판과 판정이 모두 무시되는 곳에서 시작된다.(81)”고 한다. 검경 수사권 분리와 일제 징용공 보상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 무시하며 권력 자신만의 독단을 내세우는 현 정권의 타락상은 적확한 판박이 사례라 하겠다.

 

인류 사회는 미미크리와 일링크스가 인간사회를 지배해온 끈덕진 야만의 역사시대를 벗어나는 데 거의 모든 인류의 시간을 보냈다. 주술과 미신, 환상과 공상의 허구 세계, 이를 벗어나 아곤과 알레아의 세계, 다시 말해 규칙과 기회의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문명사회로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를 표상하는 재능과 노력의 산물을 겨루는 놀이들과 평등 실현을 보충하려는 제비뽑기, 공공 복권, 슬롯머신 등 우연 놀이가 현대 놀이의 중심을 이룬다. 사회가 제아무리 평등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소질이나 악착같은 노력, 끈기있는 근면에도 획득할 수 없는 보상의 사회임을 부정 할 수 없다. 출생의 우연은 끈질기게 능력 경쟁을 방해하며, 차지한 기득권은 장벽을 세우고 사다리를 걷어차 기어오를 수단이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오래된 비극적 실상이다. 우연 놀이는 이러한 현실을 보상한다.

 

이처럼 문명으로의 이행은 일링크스와 미미크리의 우위를 점차적으로 없애며 대신 아곤과 알레아, 경쟁과 우연의 쌍을 사회관계의 우위에 놓는 것이다. 이 세계는 능력과 운 사이의 불안정하며 무한히 변하기 쉬운 균형 위에 근거를 둔 불안정한 곳이다. 때문에 출생의 우연을, 계급 특권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의 투영이 아곤과 알레아다. 아곤의 시합에서 이길 수 없는 공정 실현 불능의 인간 사회에 무차별적 은혜인 우연놀이를 통해 마침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다시 재용출(再湧出)되고 있다.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충격의 즐거움, 홀림과 취함의 세계로 회귀하려 한다. 일링크스가 놀이려면 한정된 시간의 추구여야 한다. 이것이 한정되지 않고 지속되면 혼란과 광기로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한편 미미크리, 흉내와 가면 놀이가 놀이기를 멈추고 주술과 미신으로 실생활과 섞이기 시작하는 사회적 부패가 정치의 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놀이의 이러한 병적 일탈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권력은 홀림과 취함을 지속하려고 매양 알코올 타령이고 왠 주술사가 국가 행정, 외교, 국방, 경제를 훈수하고 있다. 놀이는 풍부한 문화적 창조성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그 사회의 얼굴, 스타일, 가치를 보여주고 이해하게 해준다.(107)”고 했다.


이러한 표상들은 2023년의 한국 사회가 대략 30년 전의 망상적 주술사회,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성적으로 날뛰는 야만적 세계로 퇴행하고 있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우중(愚衆)은 대중음악 스타와 스포츠 챔피언 등, 이들 필연적으로 단명(短命)하는 신()들을 숭배하는 일링크스 놀이에 심취해 화장법, 식사요법, 옷 입는 방식...까지 모방, 흉내 내며 동일시하려는 일반적 욕구로 대리 만족에 방목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문명과 정치적 퇴행에 일조한다,

 

출생과 실력(재능)의 싸움은 엉뚱한 교체가 일어나지 있는 이상 대다수의 군중은 결코 최상의 지위를 차지 할 수 없다. 여기서 일링크스 놀이, 즉 벗어나야 하는 환상의 대리라는 속임수가 생겨난다. 상상체험, 이는 알코올과 함께 타락한 사회, 부패한 기득권의 불안을 위한 평형추로 쓰인다. 제한된 장소의 한시적 체험이 아닌 일상과 뒤섞인 놀이는 놀이의 부패와 타락으로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에서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나쁜 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카이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규칙을 조롱하거나 규칙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서 거부하거나 경멸하는 자이다.(262)”라는 것이다. 법 위에서 행위하려는 불손한 인간들.

 

우중과 함께 이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자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무수한 희생과 노고 끝에 축적한 귀중한 사회적 제도와 윤리적 역량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다. 이 몽매한 권력은 왜 낮은 소득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회의 균형성과 안전성을 확립하는 것임을, 보다 문명적인 공정의 지향인 것을, 공정과 자유를 추한 입으로 뱉어내지만 놀이의 정신인 자유와 공정, 규칙의 엄수,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알지 못한다.

 

패자를 위로해주고 규칙있는 경쟁이 상대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능력의 발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며 단지 주술과 홀림의 정치를 하는 권력의 퇴행성이 이 오래된 책을 다시 읽게 했다. 이 책의 부제는 가면과 현기증이다. 가면 뒤에 숨겨진 본래의 얼굴을 내밀고 민중과 마주하여 진실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 사회에 아곤과 알레아는 위축되거나 사라지고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횡행한다는 것은 곧 문명 퇴행의 지표이다. 놀이를 사회학의 중요 주제로 연결한 이 역작에 이은 정치학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면 어쩌면 놀라운 저작이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영감을 지펴내는 위대한 걸작이다.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같이 읽는다면 더욱 알찬 지식 여행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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