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질주 안전가옥 쇼-트 17
강민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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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분명 재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재난을 마주한 사람의 다급함이나 위기의식이 흔한 호들갑스러움이나 산만한 목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지극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나지막하게 진정된 음성을 듣는 것 같아 내 마음상태에 맞춘 독서가 될 수 있었다. 내분비선 교란으로 인해 수술과 입원 등 한 달간에 걸친 치료로 연말과 새 해를  병원에서 비몽사몽 보낸 후 퇴원한 지 며칠 만의 첫 독서로 선택한 작품이었기에 아마 교감이 더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배경은 기후온난화의 영향으로 장기간 지속되는 호우로 사람들의 옥외 활동이 중단된 음울한 시절이 계속되는 세계다. 바다 수영에서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 허 진이란 인물은 비()로 인해 불가능하게 된 수영의 욕구를 위해 해수를 끌어들여 만든 옥내 최대 규모의 스포츠 센터인 송도 트라이센터를 찾는다. 한편 달리기 분야의 아마추어 스타인 김 설또한 거대한 육상 트랙을 갖춘 트라이센터에서 호우로 중단된 욕구를 해소한다.

 

두 사람은 저마다 성장기에 마주했던 아픈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바닷가의 삶이 싫어 바다를 등지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달리던 소녀는 SNS에서 유명 아마추어 스포츠 인이 되고, 병약한 체질과 달리기에 재능이 없던 한 소녀는 수영을 배우며 바다 수영 분야의 독보적인 스포츠 인이 된다. ‘은 달리기 유명인사인 의 화려한 삶의 면모에 까닭없는 불신과 시기심을 거두지 못한다.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가 그네들의 발길을 동일한 장소로 이끈다.

 

국제 규모의 50미터 레인을 방해없이 유영하던 은 지하 5층 수영장의 모든 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흙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수영장 아래로 고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이상을 감지한 진은 지하 4층으로 올라가는 이미 작동이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하고 이를 오른다. 지하4층 육상 트랙을 달리던 은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는 듯한 엄청난 소리를 듣고 사위를 살피다 에스컬레이터를 경황없이 맨 발로 오르는 진을 발견한다.

 

마주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의 만남이 주는 경계와 몰이해의 기운이 맴돈다. 그러나 감지된 위기의식은 두 사람의 동행을 불가피하게 한다. 지하 5층에 고이던 흙탕물이 지하 4층 트랙에도 고이기 시작한다. 차오르는 물을 본 설은 주저앉아 꼼짝하지 못한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물의 두려움이 덮친 것이다. 점점 차오르는 물, 다급한 상황을 일깨우며 진은 설을 채근하고 이윽고 설은 자신의 걸음을 내딛는다. 지하 3층으로 오른 이들은 널브러진 자전거들과 집기로 온통 흐트러진 장애물로 가득한 공간에 맞닥뜨린다.

 



달리기에 젬병인 진은 쓰러진 자전거를 피해 달리다 그만 넘어지고 만다. 설은 진이 비상계단 입구에 도달하기 쉽게 하기위해 자전거들을 치우며 진의 이동을 돕는다. 작은 순간들로 이루어진 사람에 대한 이해, 이 순간들의 경험이 쌓이며 두 사람은 재난을 돌파하는 연대(連帶)자가 된다. 그것은 그네들이 마주하는 사태에서 보이는 가치관의 차이들이며, 이것들과 갈등하는 가운데 그 이해의 관용이 확장된다.

 

동물이 긁는 소리, 혼란의 와중에 그 소리를 찾아 긴박한 탈출의 순간에 사라져 버린 설, 핸드폰을 지니고 있지 않아 모든 전기불이 사라진 어둠의 공간으로 향한 설에 대한 걱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 잔량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불빛을 비추며 설을 돕는 진은 한 마리의 개를 구출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위기의 순간에, 개를 데리고 가겠다는 설의 주장에 진은 당혹감을 느낀다.

 

소설은 이처럼 거대한 스포츠센터의 지하층에 차오르는 흙탕물과 붕괴의 위험을 피해 지상층으로 탈출하는 두 사람의 연대의 순간들을 축으로 하고 있지만, 이들이 각자 달리기와 수영의 아마추어 유명인이 되도록 한 성장기의 일화와 위기에 봉착한 인간들의 모습을 오가며 인간들의 이기심과 무례함, 그 몰이해를 엿보게도 한다.

 

목 줄 풀린 개의 자유로운 뛰어 놈과 자신의 발걸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 개를 피하다 넘어져 다친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은커녕 심드렁한 눈빛을 보내는 개 보호자의 그 무례함과 무관심의 무지, 매번 시민을 볼모로 하는 반복되는 공공시설의 하수시설 부재, 부실공사 및 필수 설비 미비라는 그치지 않는 권력의 무책임과 오만방자함 등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의 지대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그 몰지각을 인간 세상의 배경처럼 들춰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개인들은 그나마 서로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 갈 줄 안다. 지상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일상에 돌아 온 두 사람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자기 말을 한다. 전달하기 힘든 기억들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서로뿐임을 깨달았다.”. 아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해가 가능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순간을 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 그것일 것이다.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인재(人災)가 빚어내는 현장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따뜻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해의 순간순간들을 지켜보는 즐거움, 그 이해하려는 관용의 앎을 알아가는 기쁨이 주는 마법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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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계절 암실문고
페르난다 멜초르 지음, 엄지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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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추천 글이 아닌 비판이 된 점 너그러이 해량 바랍니다.

#도서제공 #암실문고 #라틴아메리카 #태풍의계절 #페르난다멜초르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 부르는 것에 주저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로 묘사될 수 없는 것을 극단적으로 미세화 된 사실의 이미지들을 그 어떤 여과도 없이, 마치 끔찍한 어둠과 혈흔만이 낭자한 참혹의 살해 장면을 찍는 스너프 필름, 이것을 초과하는 역겨움으로부터 도주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난다의 글을 나는 결코 문학이라 칭하지 않을 것이며, 서사 또한 초라하기 짝이 없다. 멕시코의 변방 지역에 유전이 개발되고 정유공장이 들어서자, 인간 파리 떼가 몰려든다. 남색꾼, 매춘부, 강도, 살인자들이 자신의 쾌락과 이익 이외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수단과 도구에 불과했던 지역이었으니 그야말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원시 야만의 무질서가 정상이 된 곳이 된다.

 

돈을 빼앗기 위해 무자비하게 대상을 살해한다. 경찰서장은 살인자의 동기나 공범들의 연루에 관심이 없다. 피살된 마녀(여장 남자)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금화()의 행방을 찾는 데 혈안일 뿐이다. 참담한 무질서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곳. 자유를 의미없이 떠드는 인간들, 국가의 각종 제약과 규제에 반대하며 오직 개인 자유의 지상을 주절거리는 인간들 세계의 전형적 모습일 것이다.

 

작금의 한국 정부는 사망한 청년들에 대해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국가의 권력이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지니며, 모든 국가적 책무를 개인 자유의 책임이라 회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세계의 종국은 결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불과 40년 전까지의 한국 사회의 현실이었다. 이 퇴행에 열광하는 인간들, 아마 곧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두고 볼 일이다. 자유의 의미조차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외친다.


 


마리화나를 비롯한 각종 마약과 알코올은 모든 인간들의 일용할 양식이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다. 매번 애초에 책임감이란 존재치도 않는 남자를 거듭하며 싸지른 수많은 자식들을 가장 먼저 낳은 아이에게 양육을 뒤집어씌우며 학대하는 여자들 외에는 존재치 않는 까닭이다. 여장 남자인 지역의 외딴 곳에 있는 마녀의 집은 이러한 인간들의 탐욕이 방출되는 장소이다. 돈이 필요하면 갈취하거나 살해하면 되며, 성욕을 채우려면 폭력으로 제압하여 도구화하면 그만이다. 오직 욕구만이 넘실대는 곳, 인간의 문명이 사라진 지옥도도 이 지경일 수 없을 것만 같다.

 

대체 작가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스너프 필름식 포르노와 살해의 묘사로 가득채운 이 페미니스트 작가의 서술의도에 공감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 어떠한 역설적 윤리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기이하고 뒤틀린 비인간화된 존재들로 꽉 들어차 틈입할 그 어떤 공간도 없다. 출판사는 책에 대해 지나치게 문학적으로 미화된 언어들을 사용하며 균형적 시선을 취하지 않았다. 문학의 가장 어두운 성취라니! 이것이 어찌 문학일 수 있다는 말인가!

 

많은 독자들이 상처 받을까 두렵기조차 하다. 고작 인간의 동물성, 그 혼돈의 원시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따위 이미지로 빼곡하게 채우는 것만이 방법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인간 사회의 무질서와 폭력의 적나라한 고발들은 항상 있어왔던 고발이다. 글자 아닌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저널리즘의 선정성과 외설성만 있다. 난 의도를 발견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나쁜 글을 빨리 내 영혼에서 떨쳐내고 싶은 생각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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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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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기근, 혁명?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모두가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폭탄의 굉음으로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 327

 

19377월에 쓰기 시작해서 1938년에 출간되었으니 이 책이 기록하고 있는 스페인 내전(1936~1939)이 종료되기 전이다. 따라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발표되었다는 것은 이 전쟁에 어떤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도 이 책은 정치적 책이라 발언하기도 했으며, 본문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정치적 상황에 관심이 없으면몇 장은 읽지 말고 건너뛰라고 쓰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기록을 읽으며 폭넓게 자리하고 있는 인민들의 무관심,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가들의 명분에 불과할 만큼 부패한 이념 뒤에 숨은 그네들의 추악한 이기심을 분별 하려는 앎의 의지 없음에 주목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 역사의 행방을 결정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안주하려는 게으름의 속성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冒頭)의 인용문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 진 것, 우아하고 세련된 표면 속에 은폐된 것, 이것에 눈을 가리고 잠든 의식이야말로 가장 경계하여야 할 공포임을 전하고 있다. 전체주의, 파시즘은 무관심, 무지를 먹고 자라남의 경고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오웰은 이러한 실제를 적나라한 이미지로 클로즈업 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중무장한 경찰 집단이 노동자들이 운영하고 있던 전환교환소를 급습하여 체포, 점령함으로써 촉발된 바르셀로나 시가전(市街戰)이 이뤄지고 있던, 람블라스 거리를 유유하게 걸어가는 여인의 묘사이다. 그는 소총을 든 채 내려다 본 거리에서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하얀 푸들을 끌고가는 이 민간인의 모습에서 그 무관심과 의미없음을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주변 노동자들의 감금과 살해가 만연하는 것에 대한 불감증, 공감 능력의 부재임을 보여주는 대중의 끈질긴 무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

 

영국인 조지 오웰은 왜 남의 나라인 스페인 전쟁에 참여했냐는 물음에 답변한다.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 “문명을 방어하기 위해서, 인류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 히틀러와 프랑코 군대가 일으킨 광적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당파적인 정치적 측면에서 결코 참전한 것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그는 전선 뒤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당간의 권력 투쟁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며, 당시 자신의 순진함을 되돌아보고 있기도 하다. 그가 스페인 통일 노동자당(P.O.U.M)’ 의용군으로 입대한 것은 지인이 있는 영국 독립노동자당의 신분증의 인연에 의한 것이었을 뿐, 그는 스페인의 통일 사회당(P.S.U.C)’이나 노동자-무정부주의 연맹등의 정치적, 이념적 차이를 알지 못했다. 참전 동료와 나눈 대담에서 그가 놀라는 장면은 당시 그의 열정에 비해 스페인 정국에 대한 이해에 얼마나 순진할 정도로 무지했는가를 보여준다.

 

참전 동료 : 저쪽(통일 사회당)은 사회주의자들이야!

조지 오웰 :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들 아니야?

 

193612월에 시작된 내전은 온건한 좌익정부를 전복하기위해 귀족과 교회 지원을 받아 파시스트인 프랑코가 군사적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민중이 일어선 전쟁이다. 당시 집권의 주축 세력인 통일 사회당은 정당의 의용군에 무기 지급을 미적대다가 민중의 거친 요구가 있자 마지못해 40년 전에 사용하던 독일제 모제르 소총을 소량 지급하는 것으로 눈가림을 했다.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 존속에 관심이 있었지 노동자 혁명이나 민주주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책은 전선에 배치된 오웰의 개인적인 경험의 이야기들과 당시 정치 권력의 흉측스럽고 비열한 양상들에 대한 비평이 교차하며 파시스트 군과 대치하는 의용군의 정치적 고립, 즉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병사로 노동자를 이용하여 전선에 앞세우고는 후방에서는 자신들의 정략적 이익을 계산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공작정치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선에서는 정치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았다....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00

 

이러한 믿음에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된 혁명적 측면과, 거짓과 기만에 의해 오도된 언론의 역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력의 확대, 권력의 존속에만 관심 있었던 공산주의자들(통일 사회당)은 반()혁명적 정책을 선포하며, 노동계급의 계급철폐 등 평등과 자유의 구호에 놀란 대중을 규합하여 부르주아들을 자기 세력화 하고, 나아가 파시스트들과 손잡기까지 한다.


책의 많은 지면이 공산주의자 정권이 첫 번째 목표로 통일 노동당을 추출하기 위해 벌인 선전 공작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기록들이다. 신문, 팸플릿, 포스터, 책 등 모든 곳에서 극악무도한 정당간 분쟁을 진행함으로써 진지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여, 통일 노동자당의 반대를 무자비하게 사냥하는 것이다. 날조된 비방으로 정적을 살해, 제거하는 전술로서 혁명 세력을 모두 파시스트로 매도하는 것이다. 인용되는 매체인 신문데일리 워커는 악의적 거짓과 날조, 인신공격으로 권력에 봉사함으로써, 무지한 대중을 의식적으로 겨냥, 편견을 심어주어 자신들의 몰상식한 마녀 사냥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대중의 시선을 왜곡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무차별 살해하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중적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 묘사한 푸들을 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프레임 씌우기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퇴행적 수구 권력에서 즐겨 활용하는 전술이며, 또한 바로 지금에도 세차게 진행되는 것이 현실이다. 극우 매체와 검찰 권력의 결탁을 활용하여 반대 세력을 망령처럼 소환한 빨갱이타령이 그것이다.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적화(敵化)하여 절멸의 상대,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반대세력 없는 전체주의적 독재 권력을 휘두르려는 것이 그것이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권(통일 사회당 주축)은 통일노동당을 히틀러와 프랑코에 매수된 파시스트 무리이며 사이비 혁명으로 파시스트를 돕는 프랑코의 제 5열이라고 스페인 전역에 퍼뜨린다. 이에 비판적인 언론은 검열을 통해 폐간되거나 해당 기사는 삭제를 강요한다. 저항하면 비밀감옥에 갇히고 어느 날 살해되어 사라진다. 오웰은 당시 신문기사와 포스터, 자신의 실제 체험의 증언으로 악다구니와 거짓 날조의 실상을 증거하고 있다. 전선에서는 이러한 후방의 왜곡을 모른 채 파시스트 군대와 싸우고 있는 통일노동당 의용군을 이용하면서, 그들을 감금 살해하는 권력의 기만은 진정한 반동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

 

아마 오늘의 한국인들은 권력 자본가 계급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다고 공언하는 극우화된 공산주의자들 생각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극우화된 공산주의의 실체를 이렇게 보여준다. 결국 이념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허위의 개념을 뒤집어 쓴 부패한 개념인가 를 다시금 환기토록 한다. 오웰은 책에서 예언을 하는데, 다시한번 내 의견을 밝혀둔다고 하면서, 나는 전후戰後 (스페인)정부의 경향은 파시스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259)”고 확인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말이 들어맞을지 두고 볼일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실제 1939년 혁명이 되지 못하고 내전으로 기록된 이 전쟁이 종료되면서, 스페인에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대지주와 연결된 케케묵은 교권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반동의 표본인 프랑코의 독재정부가 들어섰음은 오늘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웰의 예견이 옳았음을 역사는 입증해준다.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하기까지 무려 36년간 일인 독재 정치로 인민을 신음하게 하였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스페인 인민, 자신들의 지적 게으름이 만들어낸 괴물이었으니 대가치고는 혹독한 것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옛 흘러간 역사적 사건의 이야기도 아니요, 남의 나라 인민의 얘기도 아니다. 바로 한국 사회에세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의 유사 판본이기도 할 것이다.

 

오웰은 목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동맥을 살짝 빗겨간 총알 덕택에 살아 스페인을 아내와 함께 탈출한다. 통일노동당 신분의 의용군이었던 오웰은 체포 살해 대상이었으니, 그 아슬아슬한 위험의 장면들도 당시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이 자행하던 쉼없는 무차별 체포, 급습, 감금, 살해의 잔혹한 현실을 전해준다. 우리 인간의 정신 습관이나 언론의 기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 신뢰를 지닌 그 게으름과 어리석음은 쉽사리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당시 영국의 부르주아지의 대변격인 데일리 메일은 프랑코를 악마같은 빨갱이 무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자로 묘사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두려워하던 당대 유럽 자본주의 사회는 파시즘을 옹호하는 데 전력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 무솔리니의 파시즘, 프랑코의 전체주의 독재는 모두 이렇게 터무니없이 날조된 거짓 언어, 왜곡하여 의미를 퇴색시킨 개념어에 의해 출현했다. 아마 오웰은 이 책을 쓰면서 1984에 등장하는 이중어와 약어, 세뇌된 인간들이 무엇인지 이미 계획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기록은 후속 독서를 현혹한다. 이 내전에 대한 어떤 감응이 갈증을 더하기 때문이다.

 

오웰과는 다른 관점에서 쓰여지긴 했으나 여운 많고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어니스트 헤밍웨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종군기자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인상이 깊게 배어있는 반파시스트적 장대한 소설이다. 한편 물론 당대의 경험이 없는 후대의 작가이긴 하지만, 당사자인 스페인 작가로서 하비에르 세르카스가 쓴 살라미나의 병사들도 후속 독서 작품으로 꼽아놓는다. 내전을 실패케 한 역사적 책임이라는 험난하고 불가능하기도 한 물음을 하는 작가의 노력을 따라가다 보면 오웰이나 헤밍웨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로부터 시작된 꼬리잡기 독서는 당분간 계속되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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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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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상상력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해의 무지가 도처에서 날뛴다. 오직 자기중심주의의 오만이 설쳐댄다. 타인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의 빈곤, 무관심과 철저한 무지. 아니 혐오와 위협과 배제, 절멸을 외쳐대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수치심과 굴욕의 삶을 강요당했던 한 인간의 분노와 이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내적 자유의 권리를 향한 자기 성찰의 분투기인 이 작품을 읽게 된 동기라 하겠다.

 

직접적 계기는 리베카 솔닛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를 쓴 제인 오스틴의 시선에 대한 무감각, 혹은 무지에 대한 비판이라 하겠다. 그것은 소설 속 영국인들의 풍요롭고 안락한 삶과 식민지에서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노동과 그 피맺힌 산물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몽매함과 무관심에 대한 지적이다. 백인 사회가 칭송하는 19세기 제국주의 영국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의 그 무심한 아름다움의 관조가   실제로 보지도 못할 꽃을 노래한 긴 시를 열 살의 나이에 암기해야했다는 피정복민의 비통함과 왜 연결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앎의 일깨움이다.

 

열아홉 살 여자아이 루시는 수치와 굴욕으로 점철된 지긋지긋한 경멸의 세계인 고향을 떠나 자기 안을 점령한 타자의 관점이라는 위협을 떨쳐내려 대양을 건넌다. 부유한 상류 집안의 입주 보모가 되어 그들의 관찰자이면서 자기 내면의 변화, 즉 열린 미래를 찾기 위해 고정된 기대를 벗어나 내면의 확장을 위한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른다.

 

집의 안주인 머라이어가 아름다움을 보는 곳에서 루시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 그녀는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를 내 마음에서 그 시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하나 남김없이 모두 지워버리겠다고 맹세했었던 기억을 들려준다. 지배자의 여유와 관조의 시선 뒤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소설의 축을 이루는 제재는 이처럼 사람들이 당연시하고 있는 안락과 풍요의 이면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과 울분이 있음을 줄 곧 현시(顯示)한다. 그리고 또 다른 축은 엄마로 상징되는 내적 검열관으로서의 비존엄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온전한 주체로 성장하려는 여자 아이의 새로운 정체성을 향한 걸음일 것이다.


 


머라이어와 루이스라는 가족에게서 발견되는 일견 견고하고 진실해 보이는 것의 위선, 그것에 내재된 폐허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성찰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머라이어의 관대함, 자신의 양면성에 대한 자각들,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열리는 자기 몸과 정신의 반응들이 지면을 채워나간다.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제한했던 선택지들을 확장해 나간다. 그것은 나의 필요가 상대의 바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기도하며,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의 발견이고, 박물관에서 보게 된 프랑스 남자가 그린 그림으로부터 세계의 규칙을 자의적으로 조종하는 남자들의 권력의 편향성이며, 자기 삶에서 쫓아내 버릴 수 있으리라는 경멸의 편재(遍在)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멸해 마지않았을 그럴 여자들이 낼 법한 즐거운 척 꾸며대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한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이 동일한 웃음을 짓는 것처럼 성적 성숙에 대한 각성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엄마같은 보호의 손길을 주었던 머라이어에 대한 고마움의 발견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은   누구는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듯이, 자신에겐 분노와 절망, 기억이라는 직감, 화가의 방식으로 자신을 새로 만들고 있음의 이해에 이른다. 루시퍼를 줄여 루시라고 지어진 이름, 신의 자식인 악마,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음식이나 생명이 꺼져버린 여러 존재의 사진을 찍어 잡지사에 파는스튜디오의 허드레 작업자로 취직한다.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실재를 찍는 사진. 자기만의 시선이 응축된 사진을 찍는 한 인간의 목소리가 책의 전편을 눈물의 얼룩이 되어 가득 번진다.

 

그녀는 머라이어가 준 공책에 루시 조지프 포터라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적을 수 있게 된다. 그녀가 적어 넣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서 죽을 수 있을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문장에 수치스러움으로 하염없이 우는 장면은 어쩌면 그 굴욕의 얼굴을 보았음, 즉 자아성찰을 끝냈음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대부분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정확한 방식을 안다고 자처하는 우리들은 정작 그 책임에 눈감고 모른 체 하거나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인식 자체가 없기도 하다


빈곤해진 상상력, 그것이 지시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있기를 외치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흐르는 이 소설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 시간을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이 지닌 선함과 상냥함, 안락한 환경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것들과 관계가 있음을, 그 연결됨의 상상력을 깨워내야 할 시간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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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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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탸의 몸,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카탸의 육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해묵은 슬픔은 거기에서부터 온다, 희망이 기댈 곳 없는 아름다움....” -46

 

발표되고 조금은 늦게 책으로 출간된 안윤 작가의 이 소설에 앞서 세 편의 단편을 모아 펴낸 방어가 제철을 읽고, 나는 애틋한 그리움의 언어, 왠지 정화된 느낌을 준다고 썼었다. 그리고 가을 잎이 쓸쓸히 나뒹구는 어느 고적한 길을 홀로 거닐 다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념이라고 감상을 맺었었다. 이 소설을 2021년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심사평에 담긴 웅대한 고독 속에서 우주와 내통하는 듯한 내밀한 결기”, 그것에서 연원하는 내성 깊은 묵묵한 성찰 그것과 유사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자기 삶의 익숙한 거추장스러운 일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로 유학했던 의 짧은 기억으로 시작한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의 문학을 사랑하는 할머니 라리사 니칼라예브나의 집에 하숙하며 그의 도움과 배려의 추억들이 흐르고, 2년간의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라리사의 영면 소식과 함께 그에 앞서 세상을 떠난 딸의 공책 세 권과 공책에 써진 이야기에 무언가를 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가 배달된다. 소설은 그 공책에 써진 글의 형식을 가진다.

 

윤은 낯선 이의 공책에 매달려 한국어로 옮기려 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반드시 이야기되어야만 하고, 끝내 그것을 둘러싼 비밀을 깨뜨려야만 이야기가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계속된다면 언젠가, 어딘가에, 누군가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그리고 윤은 모든 결핍은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고 쓴다. 소설은 바로 이 결핍의 아름다움, 살아있는 시간을 성실하게 지워나간 한 인간, ‘나지마 하미롭나 유수포바의 내밀한 심연의 기록이지만, 나는 이 나지마의 자기 응시의 쓰기를 윤의 한국어로의 처절한 옮김, 감응의 기록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는다.

 

이야기는 자동차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채 오직 눈만 깜빡거릴 수 있는 카탸라는 여성의 입주 간병인으로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쿠르만의 관계를 한 축으로 하면서 나지마자신의 그리움과 고통, 사랑, 그리고 추억, 살아있음을 증명해 줄 절실한 무엇, 온전한 나에 가 닿기 위한 치열한 자기 물음들과 내적 응시로 이루어져 있다.

 

스스로 말 할 수 없으며, 움직일 수 없는 카탸의 몸에 대해 모두에 인용한  희망이 기댈 곳 없는 아름다움은 카탸라는 한 인간에 대한 순수한 감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지마 자신에게 하는 언어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육체, 그래서 삶의 신비는 우리가 결코 엄밀하고 어긋남 없는 수준의 객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라 그녀는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지마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그리움, 그 고통의 근원을 찾는다. 이름도 없이 알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버려진 빈칸, 이것은 아이의 유산이 남긴 상실의 고통과 같이하는   끝내 손잡을 수 없을 나의 바깥이며, 내 살아 있음의 유일하고 불온한 증인으로서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일부로서의 그리움이다. 존재의 의미와 맥락을 파악치 못하게 하는 채워 넣고 싶은 빈칸, 양성 종양 같은 생명의 지장을 초래하지도 못하는 딱히 쓸모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몸의 일부이다.

 

우리는 참 교묘한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맴도는 결코 의식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임을 문득 깨닫곤 한다.  카탸와 그녀의 살아있음에 헌신적인 보살핌을 쏟는 남편 쿠르만을 지키는 나지마는 어쩌면 삶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나누는, 아니 그들은 하나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카탸의 죽음을 보내는 쿠르만의 장례식 준비에 대해 나지마가 쓴 문장에서 조금 오래 시선을 멈추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된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은 생의 편에서,

숨소리라는 배음 위에서 5월의 햇빛을 받으며 한층 더 빛났다.” -158

 

200쪽 남짓을 가득 채운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살아있음의 자각에 이르는 이 증언들은 나지마가 만드는   슬퍼질 정도로 완벽한 사과파이의 냄새처럼, 공기라는 행간과 기억이라는 운율이 만나는 살아감, 그것에서 한 편의 시를 맡듯, 시적 향기가 그득하다. 내 어수룩한 언어로 섬세하고 밀도 높은 이 생의 기록들을 더 이상 쓴다는 것은 아마 어쭙잖은 일이 되기 십상일 것만 같다. 나지마는 체념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희망,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이라고 쓴다.

 

현재야말로 지난날의 암시라는 것을, 바로 지금의 내가 삶의 증거임을 깨닫는 나지마의 내적 외침은 그야말로 인간 생에 대한 지극한 헌사일 것이다.   나는 나를 다시 체험하고 싶다. 나를 줍고 싶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삶의 흐름을 앗아가 버리는, 수시로 내습하는 시간의 단절을 느끼는 고독의 세계로 내던져질 때 아마 떠올려질 신비의 문장이 될 것만 같다.  작가 안윤은 은둔해있는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어 그 자체의 빛을 가리킨다. 슬프지만, 원망스럽지만, 사과파이 냄새처럼 현재하는 생의 의미에 대해서


여기에 사족을 덧붙인다면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 첫 문장을 인용하련다.  이 소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여러 경험의 결함과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해 가능한 빛을 비추려는 시도, 즉 인간 삶에 관한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물음에 대한 한 인간의 치열한 답변의 시도라 해도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닐 것이다. 오랜 만에 접하는 한국 문학의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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