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인간이란 커다란 계통 속에 서로 다른 종(種)이 있다는 듯한 이 분류의 언어는 전혀 생물학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구별하여 차별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어떤 권력에 의한 악의에 찬 근거없는 엉터리 범주화라는 것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한국 사회도 국가적 지위의 향상으로 인한 호감, 분쟁 국가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수용, 국제 결혼 등 더욱 개방화 된  인적교류 등에 따라  점진적으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 뒤에는 해당 당사자는 물론 그네들의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이 케케묵은 인종주의적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며 갈등과 반목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은닉된 인간 심리와 윤리적 문제는 이미 저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나 인류학자  '김현경'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 낙인(烙印 stigma)찍기, 신분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한 상호작용의 비대칭성을 통한 불평등의 심화, 모멸과 굴종을 정상화하는 양상은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우리네 인식은 여전히 20세기 초, 우생학과 서부 유럽 백인 종의 우월성을 주장한 사회진화론의 그 사이비 과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의 발단은 피부색과 얼굴의 이목구비가 한국의 전형적 외형과 다른 아이들이 겪는 시선의 고통, 자신들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그 이질적인 시선, 바로 타자성이라는 배타적 의식이라 하겠다. 이 시선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는 외지인 뿐 아니라, 타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과 그들의 자녀에게도 동일한 형태로 존재한다.  자신의 이해와 주변 사회의 자신에 대한 표상과 기대가 불일치하면서 발생하는 위기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은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그 생각과 역사, 습관이 온 몸에 배어있어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만, 주변 사회의 시선은 그 아이를 혼혈아, 혹은 흑인, 백인 등으로 자신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바라보며, 전혀 낯선 편견을 씌운다.


이 구별과 분류의 시선은 왜곡된 인종적 범주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엄격하게 작동되고 있는 신분주의는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하고 있다. 때문에 경비원 폭행, 백화점 판매 사원을 향한 욕설과 손찌검이 매양 뉴스를 장식하는 이유이다. 수구정당의 국회의원이 국회사무처 여성 직원을 향해 하대하며 큰 소리로 다그치는 영상은 한국사회의 신분제 질서를 여실히 보여준다. 


권력이 감추고 사회가 왜곡 은폐하는 것을 꾸준히 문학작품으로 드러내는 작가 '옌롄커'의 장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에는 중국 최고의 대학 베이징대(大) 대학원생인 '리징'이라는 엘리트 여성과 공사장에서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파는 농민공 '리좡'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아상, 타자상, 사회의 표상들이 서로 얽히면서 사회적으로 각인된 집단적 구성물로서의 개인의 몸', 즉 외부 세계에 독립된 주체로 마주 선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타자들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좡은 단지 허름한 농민공의 복장을 하고 세련된 대도시의 엘리트 여성에게 다가갔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두들겨 맞는 것인데, 농민공을 표상하는 리좡의 행색은 곧 그의 인격을 비인격화시키고, 그가 사는 공동체 일원에서 즉시 배제된다는 의미이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리좡의 잘못일까? 그는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몸, 그를 주변 사회에 소속시키지 않고 배제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좌절하고 그런 사회에 대해 적대감만이 자라지 않을까?  결국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남는다.  이러한 21세기 오늘의 물음을 100년 전에 거의 동일하게 한 작가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오늘날 체코로 불리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유대인이다. 1000년 이상을 유대인을 격리시킨 '게토'로부터 풀려나 주류 시민사회에 자유롭게 편입될 수 있었지만, 20세기 전후의 유럽사회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이 창궐하며 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렬하게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유대인에게 씌운 이미지의 전형, 1890년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유대인이 주류 시민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인의 태도와 몸짓, 언어 등 문화적 관습을 모방해서 그들처럼 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산업 사회의 발흥과 함께 중산층으로 성장한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의 시선은 이들 낯선 인간들에 대한  구분 불가능성이라는 두려움에 혐오와 모멸을 내재한 왜곡된 이미지를 씌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낯선 이웃에 대한 불안과 불쾌감, 그 거부감은 유대인의 혈통과 몸에 특정한 전형적 이미지를 덧씌운다. 허약한 신체, 교활한 안색, 흉칙하게 휘어진 메부리 코..., 유대인은 이 왜곡된 맹목적이고 완고하며 말없는 증오에 직면하여야 했는데, 제아무리 유럽 시민사회에 동화하려 할수록 내부의 표상인 자아상과 외부가 바라보는 타자성의 불일치, 그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했다.


급기야  "유대인들은 동종교배와 퇴화 때문에...게토에서 천 년을 살면서 몸이 너무 많이 변형된 채로 유전되어 허약하다"는 퇴화론이 주장되고,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담론으로 이어져 교활한, 음흉한과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특징이 고착화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각성한 유대인에게는 일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좌절이었으며, 카프카의 소설은 이에 대한 자기직시, 내외부의 불일치에 대한 자기 모멸과 유대인의 정체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죽음에 이르기까지하는 참담한 고통의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반복된 실패의 이야기들, 동화될 수 없는 타자성의 실체의 이야기들이며, 주인공들은 '어느 날'  낯선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카프카가 처해있던 당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전통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독일어를 쓰며,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동부 유럽 유대인을 멀리하라는 압박, 마치 주류 시민 사회의 중산층 계급에 어울리는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갈 것과 문인으로서의 글쓰기 사이의 갈등은 결국 당시 유대인들이 겪는 유럽인으로의 동화(同化)의 실패와 그들로부터의 거부에 도사린 통렬한 물음이며, 꽉막힌 출구를 찾는 고난의 여정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같은 시각은 1900년 전후의 서유럽 유대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체험적 이해였기에 오늘날 한국의 독자나 비유대의 서구인의 시선에서 그의 작품들이 낯설고 난해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이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재칼과 아랍인」등등을 읽을 때 당대 서유럽 유대인들은 작품의 함의를 너무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비평적 성찰로 수용했다고 한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Samsa)는  Kafka의 K를 S로, f를 m으로 치환하면 Samsa가 되듯이 당시 카프카의 현실과 일치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만은 없다. 다시 말해 유대인을 풍뎅이, 딱정벌레 등 때려잡을 갑충으로 이미지화한 부정적 언어가 횡행하고 있었기에 유대인 자신에게 부여된 그 타자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잠자는 자신이 변했음을 느낀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몸의 변화를 단지 본 것이다. 그리고는 어떠한 불평이나 경악이 아니라 일상화된 삶을 살려는 기계적인 반응만이 보인다. 이것은 유대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함의로서 개인적 열등감과 무력감을 응축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그리 잘못된 해석은 아닐 것이다.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잠자의 행위는 바로 유대인이 겪는 당대 주류사회에서 체감하는 현실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는 성실하고 안정된 외판원으로 주류사회에 편입된 존재로 여기지만 사실 주류사회의 시선은 그가 생각하는 자신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자아상과 타자상의 현격한 간극, 불일치다.


즉, 주류 유럽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동화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체성의 상실과 자기확신과 자존감의 결여일 뿐이다. 잠자를 찾아온 그의 직장 지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는 최근 판매 실적도 별로 신통치 못하고", "자네의 지위는 절대로 안전한 것이 아니라네."라며,  5년 간 한 차례의 지각이나 결근도 없이 성실함과 능력을 발휘한 직원을 향해 비유대인 직원들과는 다른 차별의 언어를 쏟아 놓는다.  


그리고 갑충으로 변한 잠자는 그의 방 문지방을 넘어서는 것이 금지되어 갇히게 된다. 이것이 대상화된 타자성의 존재가 겪는 출구없는 고립의 실체이다. 이렇게 변신, 몸의 퇴화라는 상징어에 시대성 - 퇴화론, 인종주의,사회진화론, 상호의례 질서의 비대칭성 등  타자성 - 을 대입하면 카프카가 말하려했던  '변신'의 의미는 자신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소통 주체인 몸에 씌워진 끈질긴 인간들의 왜곡을 볼 수 있게 된다.  소설 변신」의 해석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나는 100퍼센트 한국인인지 알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은 0퍼센트 한국인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받았을 때 그 혼란과 좌절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일 게다.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져버린 자아상은 곧 비인격화되어 버리고, 모욕받는 존재가 되어 존엄이 무너지고, 자기 이미지를 포기하게 된다. 사회는 굴종을 정상화하고 마치 없는 존재처럼 하나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우리들의 사회는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지만, 정작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린다.  마치 유럽인이 유대인 카프카에게 하듯이. 21세기 오늘 한국의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과 왜곡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우리들의 세계가 여전히 100년 전의 그 어리석고 악의적인 차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자를 배제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역겨움과 공포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이 세계에는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하는 것인 양 이미지화시켜 타자를 배격하는 권력화된 만연한 비대칭의 윤리와 불평등이 산재해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모든 인간에게 '절대 환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인종이란 없다. 더구나 신분이란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종(種)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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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시선 461
김선우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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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은 시인이구나. 한 점 티끌에서 바스락 소리내는 새싹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 그리고 금잔화 심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아니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닌 기운에서조차 따스함,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을 품고 있다.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 詩 「작은 신이 되는 날」 中에서


그런데 우주먼지인 '나'들을 인정치 못하는 무수한 아무개들은 마치 특별한 존재나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존재는 끝없이 아무를 쫓는다. 영속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환영을 실재라 믿는 우매함이란..., 시인은 그래서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곁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에 관하여

- 詩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3 ;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中에서


사랑을 아는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티끌인걸 알게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긴다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은 그 알아챔의 근사한 사건을 축복한다. 이 티끌들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은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천문의 즐거움」中에서)"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던 원자의 무한히 작은 편의에 의한 마주침의 유발, 즉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란 구절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시야에서 증발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리라. 대체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오늘은 없는 날'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오늘은 없는 날」中에서)"이라고 부른다.


150년전 1871년은 프랑스 내전이 있었던 해이다. 60일간의 시민들의 완전한 자치가 이루어졌던 짧은 파리코뮌의 시대가 있었다. "일체의 억압과 지배가 종결된 자유로운 공동체 (「철학 VS 실천」, 강신주 著, 31쪽, 오월의 봄 刊)"였다. 시인은 시(詩), 「지구 평의회가 만들어진다면」에서 "만약 그럴 수 있다면"이라며 포문을 열고,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라고 회의적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자본교에 장악당한지 불과 이백 년 만에 멸망의 시간을 카운트 중"인 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 깊은 사람,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이들의 실천에 기댈 수 밖에.


아주 신랄한 시도 있다. 민주주의 꽃이 선거? 정말 그런가? 투표 후 인증 숏을 찍는 것이 교양이라면 시인은 사절한다. 이것이 민주시민의 교양이라면 거부한다. 차악과 최악의 사이를 되풀이하는 결국 최악의 놀이, 정당 만들어 국고 보조금 챙겨가는 꽃패놀이, 시인은 "들판의 정치가 시작될 때" 꽃에게 투표할 거라고. 그럼에도 시인은 서로 얼싸 안자고 제안한다. 서로의 얼룩을 껴안음으로서,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 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詩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中에서


나의 로도스는 여기도 거기도 아니고 '저기'있다고 말한다. 삶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 곳, 그런 곳을 향한 실천, 사랑의 울림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인의 맹렬한 사랑이 세상을 뒤덮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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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분의 1은 비밀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금성준 지음 / &(앤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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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만들 때에는 누구에게나 전략이란 있는 법이다. 어디선가 비집고 나타나는 쥐새끼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 퇴근시간만 되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소설은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듯 그 익살과 해학이 궁박한 인간들의 몸과 마음을 헤집어대며 휩쓸고 지나가는 해프닝, 아니 그렇기에는 조금은 아프다. 가진 자들의 교활함과 후안무치가 버젓이 활개치는 이 세계에서는.

 

소설 속 루저들이 발설하는 그 유치찬란하고 몽매한 말들과 행위에 웃고, 이기적 욕망이 발산하는 그 인간적 비열함과 탐욕스러움에 수긍하며, 책장을 휘리릭 넘기게 하는 생생한 교도소의 풍경과 그네들의 일상이 빚어내는 코믹함을 통과하고,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느덧 어지럽게 뒤섞인 소시민적 욕망의 민낯을 통해 돈에 영혼을 빼앗긴 우리네 초상을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소설은 수용자의 영치품을 담당하는 교도관의 미실현 독직(瀆職)범죄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일사천리로 달려 나간다. 어느 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대식이라 알려진 노인이 사망했다. 그가 입소 할 때부터 애착을 보이던 캐리어에는 5만 원 권이 100장씩 묶여진 돈다발 9억 원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제 이 돈의 임자가 사라진 것이다. 김대식에게는 피붙이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돈에 대해서 아는 자가 없는 듯하다. 영치품 창고 관리 담당자인 교도소 하급관리인 8급 교사 기봉규와 허태구는 매일 조금씩 밖으로 빼내 절반 씩 나누어 가지기로 둘 만의 비밀 약속을 한다. 소설은 이 궁박한 인간들을 통해 자기 삶의 주체자로서 거듭 나는 도덕적 성장의 여정을 담아내고 있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오독(誤讀)을 시작해야겠다.

 

내게 떠오른 생각은 임자 없다고 여겨진 땅을 발견한 미국인들이 이것은 내 땅이라고 선언하던 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말에 대한 것이다. 즉 최초의 소유권 주장의 논리이다. 그런데 이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논리에는 무수한 원칙이 있다. 우스개 소리로 아주 어린 아이들, 유아들이 외치는 소유권 주장 원칙들인데, ‘내가 먼저 봤으면 내 것이다.’부터, ‘내 맘에 들면 내 것이다’, ‘내 손에 있으면 내 것이다.’, ‘내가 빼앗았으면 내 것이다.’, ‘좀 전 까지 나한테 있었으면 내 것이다.’, ‘내 것이면 누가 뭐래도 남게 아니다.’ 등등이다. 사실 유아들의 이러한 자기 소유권 주장의 행동은 어른이 된다고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기와 허가 나눠 갖기로 했던 이 비밀스런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데, 이 돈을 두고 무수한 자기 소유 주장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죽은 김대식의 감방 동료인 범죄 조직 우두머리 출신의 수감자 어금니부터, 이들의 말을 엿들은 교도소 교위 오용수’, 기봉규와 그의 아내 말을 엿들은 처남과 그 애인, 이들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벌인 굿 무당과 북채잡이에 이르기까지 유아들이 외치는 원시적 욕망의 논리를 내세우며 자기 몫을, 또는 온통 자기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공유지의 재난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결국 돈의 소유에 대한 권리자가 늘어나는 것, 즉 비밀의 공유자가 늘어나면서 이를 지킬 의무는 사라지고 말며, 그것은 곧 비밀의 붕괴, 다시 말해 애초의 전략은 날아가 버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것, 이미 도착지가 보이는 쓸 데 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기와 허, 삶의 궁지에 몰려 일상이 늪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는 두 사람에게 이 돈은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삶의 질곡(桎梏)을 떨쳐내고 새로운 인생설계가 가능한 매혹적인 신의 선물처럼 여겨졌을 터이다. 이러한 삶의 배경은 이들에게 비밀이 유지되리라는 믿음, 망자의 캐리어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기만적이기까지 한 무지를 보이지 않게 하며, 따라서 소유권리의 그 원시성, 공유지의 무책임이 지닌 태생적 실패의 논리성을 그대로 따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임자 없는 돈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이 원시적 욕망이 인간들의 본성을 깨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급 교도관, 수감된 조폭 두목, 빈둥거리며 처남부부에 기생하는 룸펜, 이들을 기만, 위협하며 몫을 주장하는 무당 무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하부 계층 사람들의 천박한 탐욕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네 현실은 이들의 욕망은 고작 N분의 1로 나뉘는, 교도관 기봉규의 혼잣말처럼 이런 식으로 몇 달만 지나면 수두룩한 인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씩 나눠줘야 할지 모르는(118)” 하찮은 욕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이란 소설 속 사람들에게 생활을 영위해야 할 시급성의 문제이며, 오늘날 인간 생의 주체가 되어버린 돈에 대한 욕망의 문제 측면에서 권력과 부를 차지한 계층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악취와는 사뭇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발업자로부터 50억 원을 받아내곤 그 어떤 죄책감은 물론 오히려 정당한 것이라 악을 써내는 것이나, 주가 조작으로 천문학적 돈을 사취하곤 권력의 비호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허태구는 비밀 약속 이후 지속하여 교도소 내 조사계에 사실을 말하려 하거나, 실제로 돈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기봉규 또한 끊임없는 죄의식과 번민으로 혼란을 겪는다.

 

실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의식 혹은 무의식은 이미 돈이라는 물신에 사로잡혀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없으면 불편한 것이라는 짐짓 의연함을 가장하곤 하지만 단지 불편함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은 우리가 도덕적 부패의 극한에 이른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쩌면 두 주인공이 다시금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교도소 윤리책임자에게 자신들의 과실을 고백하고, 삶의 태도를 일신(一新)하는 것이 비록 애초의 계획이 공유자 증가와 비밀 누설의 위험으로 야기된 실현 불능이라는 깨달음에 의한 것일지언정, 이것은 분명 여전히 우리네에게 잔존하는 도덕적 존엄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한바탕 해프닝!

 

다시 소유권의 문제로 가보자. 소유권의 핵심 논리에는 선착순, 점유, 노동, 귀속, 상속, 자기신체소유가 있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이것은 내 것!’이라는 논리에는 이것들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 소유 논리는 모두 강탈, 착취, 사기라는 폭력성을 지닌다. 지금 한국의 현실 세계는 지배 권력의 이러한 폭력적 소유 주장이 공개적이고 죄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이렇듯 소유 권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 주인공들이 파렴치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 권력 계층으로 바뀌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비록 허구이지만 소설의 제재는 한국의 사회적 구조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설혹 실행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치 하부 계층은 범죄의 유혹에 항상 노출된 존재라는 왜곡된 시선을 의심케 한다. 만일 이러한 돈이 지배 계급에게 발생했다면 아마 어떠한 흔적도 없이 갈취되고 말았을 것이다. 소설이 삶의 예측 불가능성과 신산한 소시민적 삶을 가로지르며 그 욕망의 원시성과 우상화된 돈 신에 굴종된 오늘을 재치 넘치는 해학과 풍자로 슬기롭게 성찰케 하고 있지만, 그 재미만큼 만끽 할 수 없었던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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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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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 133

 

 

상징과 은유와 대유(代喩)가 더욱 짙게 바로 지금 현실의 삶에 덧 씌워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위의 인용 문장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의 실체적 대면의 감정에 대한 것이지만, 오늘 SNS상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이 하는 행위, 실체를 은폐한 익명의 존재들이 가상공간에서 벌이는 위조된 감각과 표면적으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착각한다. 소통과 연대감, 공감의 세계가 만개했다고.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쪽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이 만개했다는 사회연결망은 그 위조된 형태만큼이나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감정, 공허함만이 휘몰아친다. 혐오, 갈등, 고립의 세계, 감정이 증발한 무관심과 공감 없는 세계만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현실 세계의 대유일까? 소설의 배경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간 존재들의 막이 내리는 시대, 자신들의 탐욕에 삼켜져 버려 미생물조차 드물어진 황폐한 사막의 행성이 된 49세기의 지구다. 여기에 29세기, 전쟁의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모래사막에 파묻힌 채 2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열한 살짜리 인간 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깨어난 로봇 고고가 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얄궂기 그지없다. 랑의 엔진이 꺼졌다. 아니, 심장이다. 인간은 엔진을 심장이라 부른다.” 고고에게 세상을 알려준 보호자이자 스승이며 친구, 즉 유일한 목적이었던 인간의 죽음, 그 상실로부터 출발한다. 랑을 사막의 구덩이에 묻는 의식(儀式)을 행하고, 더 이상 목적을 지닐 수 없게 된 존재의 새로운 목적, 존재의 의미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엔진과 심장, 이 분별이 지닌 의미의 경계는 분명한 것인가? 아니 감정이라곤 스며들 여지없어 보이는 존재에게도 그리움, 사랑, 공감의 존재로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 변화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고고는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장면을 통해 랑의 얼굴과 표정, 그와 나눈 대화들과 그 것에 어우러진 몸짓, 행위들을 만나곤 한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얼마나 가까이 응시하고 있을까? 랑의 화난 얼굴. 만지고 싶다.(13)”, 일찌감치 로봇 고고의 이 감각적 표현에서 그리움을 읽게 된다. 그런데,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화난얼굴조차 만지고 싶은 감정, ‘사랑을 전제로 하는 느낌이다. 느닷없이 기억 장치가 멋대로 과거를 재생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고고는 로봇인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오류로 이해하려하지만 그것이 마치 그리움 같아서 흉내 내고 싶어 한다.

 

아마 고고의 사막을 걷는 여정은 이 불현듯 재생되는 랑과 함께 했던 장면들이 그에게 전해진 의미의 해석이며,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 사건들과의 마주침에서 깨우치게 되는 새로운 이해, 변화의 시간이자 의미 획득의 공간일 것이다. 로봇은 랑과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감정에는 효율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또한 거치지 않은 감정은 지나가는 게 아니라 몸에 쌓인다.”. 그러나 로봇은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의도이자 해석의 대상이 아닌 마음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것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런 자신에 의문을 지닌다.


 


이들 대화 중에서 사막에 대한 그림과 사진의 정의는 아마 이 서사의 궁극적 언어일 것이다. 감정인 그림과 의도인 사진, 불가능의 가능으로의 변화에 대한 어떤 기대, 희망, 구원을 향한 발걸음이 될 것을. 랑을 함께 묻었던 지카가 들려준 과거로 가는 땅’, 멈추지 않는 돌풍의 시작점이 있는 드카르가 언덕 너머를 향한 걸음, 인간들이 만들어낸 헛된 희망 같은 곳, 인간을 이끄는 알 수 없는 희망의 길, 마음의 목적지를 향해서.

 

이 여정은 상실한 이들이 밟는 애도의 통과 의례를 닮아있다. 고고는 한 걸음 씩 사막의 존재자들, 그리고 사태를 만나면서 그 어떤 호소력도 무력화시키는 인간의 믿음을 지켜보고,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행위라며 자신의 조물주를 기다리는 존재에게 절망의 실체를 은닉하며, 낭설의 땅, 인간의 헛된 희망으로 만들어졌을 확률이 더 높은 땅, 랑이 기다리고 있을 과거의 땅으로 향한 걸음을 지속한다. 어쩌면 합리성을 거부하며 0.01퍼센트의 확률을 따르는 고고의 이 여정에서 이미 그가 자신의 판단 오류라 여기는 그것이 마음이고 감정임을, 자신이 바로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가 죽은 이후 평온하던 랑을 갑자기 펑펑 울게 만드는 버튼이 내게도 있을까 봐 ...내가 무서웠고 두려웠다.(105)”는 문장에서부터 기다려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이 이상함을 계속 이상한 채로 품어야 한다는 것까지 전부 끈적하게 등에 달라붙는다. 낯선 감각이 든다.... 형용할 수 없는 응어리가 오색 빛깔로 내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다.(111)”는 문장처럼 고고는 이 감정을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 주춤거린다.

 

이윽고 한 팔이 없어 거대한 폭풍이 머금은 물기가 스며들어 자신이 파괴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드카르가의 검은 벽’, 커다란 절벽처럼 서있는 폭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눈을 감고 걸어봐. 고고, 나처럼. ... 춤추면서 간다고 생각하자.”는 랑과의 대화를 되새기는 장면은 이어질 최후의 장면과 함께 메마른 내 마음에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고고가 밟는 통과의례의 마지막 시공(時空)인 사막에 있을 수 없는 흔들리는 잎사귀가 있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곳, 수천 년간 인간의 행위를 지켜봐 온 외계행성으로부터 온 살리와의 만남으로부터, 부정하던 자신의 오류, 그것은 감정 중 가장 시효가 긴 그리움이란 것을, 느끼고 공감하는 자연스러운 그것이 바로 감정임을 받아들인다. 고고는 살리의 도움으로 망가지는 자신의 몸을 지니고 그 망가짐이 끝내는 시간이 붙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갈 것임을 알면서도 랑을 만나기 위해, 그에게 자신이 걸어 온 사막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과거로 가는 홀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속울음이 터져 나오는 감동으로 새겨진다.

 

한 존재의 떨쳐지지 않는 상실에 대한 애도의 지난한 통과의례이자, 자기감정에 대한 진솔한 승인에 이르는 성장의 이야기이도 하며,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오늘의 삭막하게 메마른 인간 감정에 대한 환기의 각성이기도 하다. 또한 로봇을 비롯한 타자에 대한 구별, 그 범주화의 경계란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자의적인 것인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이처럼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시각에서 읽도록 하는 소설이다.

 

작가의 말처럼 삶의 목적을 잃었을 때 우리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실행케 하는 일견 무모해 보이는 행위일 수도 있으며, 고집스런 믿음이기도 할 것이고, 고고의 여정처럼 사랑과 그리움, 공감이라는 감정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어둠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과거로 가는 홀에 발을 딛을 때 고고, 너는 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네 마음은 진짜야!”라는 살리의 목소리는 아마 그가 선택한 소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를 향한 최고의 찬미였을 것이다. 거센 사막 폭풍조차 적막한 소리로, 그리고 잔잔하게 들려지는 랑과의 추억 속의 대화들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전해져오는 그리움의 간절함은 작품 속으로 독자를 깊고 한없이 빨려 들어가게 한다. 잠시 이 사랑의 이야기에 멈추어 있으련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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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흄세 에세이 1
알베르 카뮈 지음, 박해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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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으로부터 마음이 달아나려 할 때면, 그 어떤 의미도 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휘몰아칠 때면, 나는 스물네 살 청년 카뮈가 발견한 태양의 빛과 폐허 위에 피어나는 꽃들의 향취와 오색의 향연, 바다를 헤엄치는 구릿빛 싱그런 육체가 있는 생()의 찬미를 다시 꺼내든다. 카뮈의 감각과 정신이 팔딱팔딱 용솟음치는 그 젊음의 에너지를 내 안의 시들어버린 그것에 자극을 주고자하는 무의식적 요구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역자를 달리하여 결혼(Noces)을 읽는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김화영 번역, 책세상 出刊 카뮈전집에서)” 는 정적(靜的)이고 건조하다. 반면 박해현의 새로운 번역은 봄이 오면 티파사(Tipasa)에는 신()들이 강림해서 수런거린다.” 며 어떤 왁자지껄함과 함께 동적 활력이 느껴진다. 내가 느끼고자하는 감각에 조응한다. 단지 새 번역본을 선택한 이유는 그뿐이다. 독자 저마다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네 편의 에세이는 알제리 북부와 북서부 지중해 연안 도시인 티파사, 제밀라, 알제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삶과 육체에 대한 철저한 응시,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그득한 충만을 노래한다. 그래, 그 일회성이 지닌 그냥 떠내버릴 수 없는 간절함이 응축된 시선이 대지와 하늘 사이의 지상을 가득 채워 홀린 듯 상상의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는 티파사의 고대 로마 유적지, 폐허와 봄의 결혼(13)”, 폐허의 잔해를 지워버리며 자연으로 회귀하는 장밋빛 부겐빌레아와 붉은 빛 히비스커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살, ‘치열(齒列)이 찬란한 파도의 미소는 폐허를 사물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야생의 향내, 하늘의 참을 수 없는 장엄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젊음을 보며 나는 그 화사한 생명의 에너지에 도취된다. 카뮈는 마음껏 삶을 사랑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자긍심을 외친다.

 

온몸으로 살아가고, 온 마음으로 증언한다면 나는 더 바랄 나위가 없다.

티파사를 살고 증언하라.... 거기에 자유가 있다.” - 20

 

하늘의 찬란한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지는 종족’, 이 종족에 합류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조화와 침묵, 만끽한 기쁨과 고독...

 

해발 900미터 바위투성이 고지, 바람에 닦여 영혼까지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삭막한 찬란함이 부는 제밀라의 바람에 이르면 죽음을 껴안고 되찾는 젊음(34)”,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줄 알았던 고대인의 순수와 진실을 직시케 된다. 문명의 참되고 유일한 진보란 스스로 의식하는 죽음의 창조, 우리네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는 간격을 줄임으로써 어떤 완전체로 틈입하게 되는 쓰디쓴 가르침을 새삼스레 받아들여야 함을 확인한다. 죽음의 자명성, 그 절망의 참된 낯빛을 앎으로써 집착의 노쇠함을 벗어던지고 젊음의 생에 전념하는 기쁨을 나는 어설프게나마 되찾는다.

 

나는 알제의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순수한 관능과 극빈의 삶, 유치한 허영이 뛰노는 곳, 청춘을 잃고 난 뒤 찾아오는 멜랑콜리를 치유할 길 없는 장소여서 열정을 불태우는 젊음이 마구 방출되는 도시이기에, 내 정신의 감각은 이 에세이를 즐겨 찾도록 이끈다. 자긍심과 삶을 위해 태어난 알제의 사람들, 하늘과 바다를 겹으로 두른 조가비같은 파도바니의 해변 댄스홀’, 꽃과 살이 뒤섞인 잔향을 남긴 채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웃는 어느 아가씨가 있고, 흰색 집 벽에 내리 꽂는 강렬한 햇살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진 황금빛 육체를 한 갈색 야수들에 동지애를 느낀다.

 

일생은 쌓아가는 게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

지옥의 개념은 이곳에서 앙증맞은 농담일 뿐이다.” - -51

 

뻔 한 문장이 있는 영화관 박하사탕의 교환으로 평생의 인연이 맺어지는 그 서투름과 순수가 있는 곳, 단순 명쾌한 기본 계율 몇 줄이면 더 이상의 도덕이 필요치 않는 곳, 죽음의 민낯을 드러내는 묘지의 담장 밑에서 밀회를 즐기고 입맞춤과 애무가 있는 곳, 태양의 숨찬 맥박과 영혼의 고향을 재발견하는 곳, 삶의 부조리를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음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지 않는 충만한 삶의 향기가 있는 이 글은 음울한 구석을 맴돌던 마음에 찬란한 생의 기운을 마구 퍼부어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여행기이기도 한 사막은 카뮈의 인생 내내 진행되었던 반항하는 인간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산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로렌초가 비록 장미꽃 나무를 곁에 두고 있더라도 땅에 묻힌 

로미오보다 낫다.” -74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의 연인 로렌초가 연인 줄리엣을 두고 죽은 로미오보다 낫다는 이 말처럼 카뮈의 신념을 대변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망자들의 덕행을 기리는 수도원 무덤 평석위에서 개구리뜀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죽음의 표식들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해와 함께 떠올라 함께 지는 것일 뿐이다.

 

종교와 시학, 삶의 열정에 덧씌워진 우스꽝스런 탈바가지라는 관념적 추상의 공허함을 깨부수고, 지금 여기, 살아있는 현재에 대한 유일한 진실성, 그 구체적 감각, 실존성을 외친다. 그래서 카뮈는 말한다. 신들이 비우고 떠나버린 그 거대한 사원에서 모든 우상, 겉만 번지르르한 관념과 형이상학의 세계는 허물어지리라고. 사막? 갈증을 달래지 않은 채 살 수 있는 인간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불멸, 영원, 내세... , 나는 애초 이런 희망이란 지녀 본적도 없다. 진리란 제 안에 쓴 맛을 지니기 마련이라고 한다. 희망의 부재, 이 부정이야말로 긍정의 꽃 피어남, 삶의 기쁨을 내포하고 있음을, 정신은 육체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고 있는 옛 동지를 이렇게 함께한다.

 

분열과 혐오가 횡행하는 이 불온한 세상과 더불어 어느 사이엔가 차가워진 쓸쓸한 기운이 새삼 회색빛 음울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이 쌀쌀맞은 고독을 차버리고 싶을 때, 향기로운 생명으로 가득 찬 카뮈의 충만한 고독, 외롭지 않은 고독, 오렌지 꽃향기 속 정오의 침묵, 알제의 여름으로 들어간다. 끓어오르는 티파사의 햇살과 알제의 지중해 바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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