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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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탈리아로 이르는 길목을 통과하던 격변의 시대, 자유주의를 부르짖던 부르주아 등 신흥 계급으로 계급의 권위가 이전되던 1860년대 시칠리아 왕국의 대 귀족인 영주 돈 파브리초를 중심으로 자신의 계급이 추락하는 시대를 묵묵히, 아니 주의 깊은 시선으로 천천히 품위있게 관조하는 삶을 연민 그득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한 인간에 던져진 모순 가득한 세계의 질서변환이라는 파문이 번지며 그것으로 유발되는 긴장 속에서 몰락해가는 귀족가문의 쇠퇴를 선명하고 예리하게 지펴낸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다.

 


아마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이렇듯 소멸을 향해 나아가야했던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마지막 인물이었기에,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에 진실과 자연스러움이 더욱 묻어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화려하거나 호사스러움을 과시하지 않으며, 그것들로 인한 자극의 격랑이 격렬하게 출렁이지 않음에도 세련미와 귀족적 우아함이 문장 도처에서 품격을 느끼게 한다. 통속적 대중성과 현학적 지성의 경계를 오가지만 결코 저속하거나 현란한 사변으로 흐르지 않는 적절한 균형의 언어로 써내려간 서사이기에 이탈리아 국민소설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시칠리아 왕국 살리나의 영주 돈 파브리초는 통일 이탈리아를 내걸고 혁명의 불길에 모여드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염려스럽게 바라보지만, 시대 변화의 물결을 충분하고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체제 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계급이 침몰하는 시절임을 직시하고 있지만, 자네들은 우리를, ‘아버지들을 파멸시킬 생각은 없어. 그저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거지.”라는 말처럼, 단지 한 계급에서 그에 상응하는 달리 불려 질 계급으로 이전되는 새로운 형식으로의 변경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많은 일이 있겠지만 모두 희극이 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옷에 핏방울 몇 개 묻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낭만적인 희극.”이라고 정의한다.

 

돈 파브리초의 인식은 그릇되지 않은 것 같다. 귀족 계급의 옹호나 계급의 변호가 아니라, 민주정을 펼친다는 오늘의 세계에 제복을 바꿔 입은자들이 귀족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돈 파브리초로 대변되는 귀족들의 다름은 그들 개인의 인간성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그들의 계급이 구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귀족이라는 계급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진정 민초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인가? 자유, 평등, 기회, 참여,..., 이러한 것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 세계의 문제들이다. 인간은 어쩌면 형식 외에는 변할 수 없는 인지도 모르겠다.

 

주여, 제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제 마음과 몸을 혐오감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seigneur, donnez-moi la force et le courage de regarder

mon coeur et mon corps sans dégout!)”

 

소설의 중요 배경의 한곳인 돈 파브리초의 영지인 돈나푸가타는 시절의 변화, 살리나 가문의 쇠락의 시작을 선명하게 알리는 장소인데, 다리 부러진 표범은 가문의 영화가 급속하게 침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게 된다. 이미 영락(零落)한 누이의 아들인 고아가 된 조카의 총명함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아낀 영주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욱 사랑을 가지고 후견자 역할을 한다. 한편 변화하는 세계는 자유주의에 편승한 영악한 자들이 이미 놀라운 속도로 막대한 재산을 쌓아 올린다. 사회의 혼란과 기근을 틈타 사악한 이익을 남기며 돈과 함께 상승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돈나푸가타의 시장인 돈 칼로제로가 그러한 부류인데, 보잘 것 없는 농부의 자손이 자유주의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엄청난 재산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주의 조카 탄크레디는 그의 부모가 남긴 재산이 없다. 다만 대귀족의 신분, 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현실적 동기를 만들어낼 만큼 영리한 인물이다. 영주는 조카의 이러한 성향이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몰락하는 가문의 미래를 그나마 책임질 수 있는 통찰임을 이해한다. 탄크레디에게는 이러한 배경을 현실화할 돈이 필요하다. 돈 파브리초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 콘체타가 탄크레디에 관심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수혈을 위해 한미(寒微)하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와의 결혼 중매에 나선다.

 

어쩌면 이 소설의 영화화를 촉진한 한 요소이기도 할 압도적인 관능적 매력으로 표현되는 안젤리카의 등장과 탄크레디와의 결합, 소외된 콘체타의 상실은 시대변화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안젤리카가 자신의 육체를 공략하지 않는 탄크레디에게 요염하게 던지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수련 수녀예요.” 이 선명한 유혹의 언어는 소설의 통속성, 대중을 이 작품으로 유인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을 것 같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1963년 영화화한 The Leopard;표범포스터


안젤리카가 영주 가문의 사람들 앞에 최초로 등장할 때 묘사는 그 흥미로운 관능적 표현들로 시선을 끌었는데, 몇 문장 인용해 본다. 사람들이 숨죽이고 바라볼 정도의 눈부신 아름다움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신하는 당당한 분위기이며, 교양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흔적들의 불쾌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자태라고 하는 것이다. 영주는 자신의 결정을 이렇게 칭찬한다. 오래된 가문에 새 피를 수혈하고 계급 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장려할 만하다.”. 새로운 변화 속에서 가문의 영속을 지키면서, 그 변화 거부의 계급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막아내는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혼란을 개인적 이득 챙기기에 불길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장사꾼들의 세계, 그러한 자들이 흥성하는 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 파브리초는 새로이 수립된 정부의 사절이 제안하는 상원의원과 주요 정치적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누천 년 간 새겨진 시칠리아인의 정신과 한 계급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깊은 진실의 마음으로 전해진다. 외부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들어온 이질적 문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지가 2,500이라고, 시칠리아인 자신들로부터 싹트지 않았고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문명을 안고 살아온 고통에 이제 지쳤고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시칠리아인은 새로운 것들이 죽었다고 느낄 때 만, 삶의 흐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만 매료된다고. 섬이라는 대륙과 외따로 떨어진 시칠리안의 보수적 기질이 이보다 명료하게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구체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던 마지막 귀족의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혐오를 무릅썼지만, 공적 대상으로서 신체제에 적극적으로 행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이 소설에서 결코 소홀히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돈 파브리초와 돈 칼로제로의 양가 결합의 계약 이후 갖게 된 빈번한 만남이 귀족계급과 신흥부르주아 계급의 상호 변화를 만들어내는 장면들이다. 영주는 시민대중에 대한 이해를 쌓는 시간이자 새로운 계급의 관점이며, 세다라인 돈 칼로제로는 귀족의 성품, 그들의 품위를 구성하는 소소한 몸치장과 예절, 무용해 보이는 심미안 등에 대한 필요와 가치에 눈이 뜨이는 것이다. 결국 작가 람페두사는 돈 파브리초의 입을 통해 처음부터 예견했듯, 신흥계급이란 기존의 귀족계급을 모방한 자리 탈취, 계급 자리의 교체에 불과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이러한 양상의 한 면모로써 돈 파브리초가 가문의 새로운 피, 즉 돈 칼로제로와 안젤리카를 귀족 상층계급의 일원에 알리기 위해 귀족사회에 모멸적인 부탁을 통해 그들을 무도회에 초청케 하여 부르주아계급이 상류사회에 편입되는 상징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흥 계급은 귀족의 품위를 모방하고 새로운 상류 계급으로 전환된다. 이때 돈 파브리초가 조카며느리가 될 안젤리카의 제안으로 왈츠를 추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알파치노가 젊은 여성 도나와 탱고를 추는 영화 여인의 향기, 1993를 떠오르게 하는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 순간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어께에서 세월이 1년씩 떨어져 나갔고, 이윽고 그는 바로 이 방에서 스텔라(아내)와 춤을 추던 스무 살의 자신을 발견했다. 실망도 지루함도 남은 시간도 아직 모르던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그의 눈에 다시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고 설명한다.

 

아무튼 소설 속 이 무도회의 장면은 이 작품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쇠락하는 한 귀족이 격변기에 느끼는 무수한 감정들과 사회적 의미들이 흐른다. , 그리고 그의 운명의 시간이 닥친 일흔세 살의 어느 날의 묘사는 한 시대가 저무는, 또는 시대의 거인이 사라짐에 대한 애틋함, 아니 동류 인간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연민이자, 한 가문에 대한 송사(頌辭)일 것이다. 이미 쇠락한 귀족인 작가 람페두사가 자신의 증조부와 시칠리아에 대한 애도인 것만 같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꼴이 아주 엉망이 된 표범이었다. 사람은 죽을 때 가면을 쓴다. (...) 제 모습을 잃도록 변장을 강요하는 이 불합리한 규칙을 힘닿는 데까지 어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힘을 낼 수 없음을 느꼈다.” 존재하려는 힘, 인생 자체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느낌, 시간의 입자들은 이렇게 우리네 삶에서 벗어나 영원으로의 길을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매우 다양한 감성과 지성을 즐겁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아름다움과 쇠락, 관능과 지성, 삶과 죽음, 전통과 변화, 계급질서가 교차하는 모습 등 풍요로운 서사가 시칠리아의 매력적 이미지로 그득한 지면으로 유혹한다. 한 귀족의 비애가 면면히 흐름에도 온통 아름다운 자연을 거닌 듯한 매혹적 소설이다. 내겐 더위에 지친 정신을 위무하고 돌파하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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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잊혀 진 삶을 살기위해 매진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자취에 공감하듯 사로잡힌 읽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아니요를 발하는 필경사 바틀비와 바틀비 증후군의 연합체들, 절필의 작가들인 글쓰기를 멈춘 사람들에 이르렀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은둔의 인물이 문학적 도피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지만, 나는 전혀 예견치 못했다. 글쓰기를 포기하는 행태가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과 동행하는 것은 일견 상통하는 것이겠지만, 그 부정적 충동, ()에 대한 이끌림이 문학적 고뇌와 다르지 않음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 작가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창작의 요구 앞에 무기력해진 작가들과 작품들의 파편들을 모아놓은 특이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 이르게 된 것인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으며. 찾아 헤매던 주베르는 책 한 권도 쓰지 않고 살기에 아주 좋은 장소 하나를 발견해버렸다. 자신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은 것이다. 그가 모색했던 것은 바로 모든 글쓰기의 원칙,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비춰줄 빛이었다.”

- 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 마따스, 소담출판사, 2011.11 초판, P89

 

평생 책 한 권을 쓸 준비를 하며, 그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아 헤매던 조셉 주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이 이야기는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대변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장소)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지금에도 꿈꾸는 그 이상적 장소와 같이 글쓰기는 바로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때문에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다는 절필은 이처럼 부정성속에 치열한 생의 긍정, 열정을 내포하고 있음이다.

 

아니요를 과격하게 외치는 필경사 바틀비들,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아니요작가들의 선조는 단연 허먼 멜빌일 것이다. 글쓰기를 어느 날 홀연히 멈추거나, 그네들의 작품 속에 아니요, 혹은 중단과 끝을 맺지 않는 세계인 그 부정의 충동 속에서 삶을 거닐고, 퇴장하는 삶의 그 어떤 진실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뇌들을 본다. 문학을 그만두거나 글쓰기를 중단하는 이유는 작가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하물며, 생의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방편이야 그 수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떤 단일한 생과 사의 진실을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좇음의 여정은 실패가 뻔한 예정된 불가능함일 것이다. 미련하게도 나는 아주 좋은 자리를 발견하는 것과 우주적 진실을 찾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일 게다. 마치 지금까지 쓰인 책을 제거해버리는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참으로 신선한 아먕처럼 말이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리스 블랑쇼의 과도한 훈계라는 비아냥과는 다른 그 어떤 말도, 어떤 책도 세계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련다.

 

사실 우리네 삶에 그 어떤 중심이 있기나 하겠는가? 내 삶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도, 노선도 없다.”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절필했던 스페인 작가 페핀 베요(pepin bello)의 작품 없는 대표적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와 삶의 의미는 도저히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아니요의 작가를 말하면서 로베르트 발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글의 발단을 제공한 이에게 무례가 될 것 같다. 나는 낮은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듯 그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가장 평온한 상태일 수 있는 기억의 총체인 자신의 승인, 혹은 확인의 물음이 새삼 필요치 않는 그런 영역으로서 산책(遊牧)하는 삶이 필요했을 것이다.

 

재봉틀공장 노동자, 서점 직원, 은행원, 성의 집사, 실직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밤이면 바틀비가 되어 낡은 걸상에 앉아 희미한 석유 등불 밑에서 필경사일을 하는 발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타인들로부터 잊히는 것 외에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었던, 헤어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힘으로써 문학을 포기한 작가, 나는 야망과는 무관한 미세하고 덧없는 것을 과시하는 그의 허영에 매료된다. 그는 정신병원(요양원)에 스스로 찾아 들어가 28년을 보내다 눈 쌓인 산책길에서 죽었다. 그는 삶이란 것, 글쓰기란 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길 잃음에서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것들과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길 잃음의 예술, 광기의 예술이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내 생각! 내 생각이 살게 될 집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렵도다.”

 

사무엘 베케트도, 발저도 스스로 찾아들어간 정신요양원. 자신의 살집을 마련했기에 더는 글을 쓸 필요가 사라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횔덜린의 36년간의 칩거생활도, 휘페리온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살 집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광기였지 않았을까? ‘아니요라고 선포한, 혹은 그저 절필하고 세상으로부터 도주했던 작가들과 그리 멀지 않은 인물로 카프카는 아마도 바틀비의 적통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에 조차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해 금식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음식을 거부하는 인물과 닮았다. 글쓰기의 불가능성 또는 가능성은 고독과 닮아있는 듯하다. 세상이 발하는 신호들에 반항하는 그 목소리들, 고독은, 삶은 그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절단은 현대 작가들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일관성과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추구는 언어의 표현 한계가 내재한 불가능성으로 침묵으로 추락과 위기의식을 강제한다. 호프만 스탈의 잘 알려진 단편 찬도스 경의 편지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표현이 언어에 의해 지칭 될 수도 통제당할 수도 없음으로 인한 존재적 조난에 대한 공포 섞인 선포였을 것이다. 이 문학적 표현의 위기는 삶의 자리에 대한 불안의 다른 형상인 것만 같다. 카프카가 주정꾼과의 대화에서 말()이 더 이상 사물을 제대로 지칭하지 않음으로 은유하듯, 우리는 삶이란 것의 본질에 대한 믿음의 위기에도 처한 것만 같다. 삶은 비밀스럽고 도피적이며, 그것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삶이고, 그렇기에 어쩌면 더욱 내 삶인 것처럼, 절필, 글쓰기의 마비상태인 침묵은 가장 치열한 혈투이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는 가장 도덕적인 비()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것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애쓰는 작가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존재를 발견케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마치 고독한 산책자가 찾아 헤매는 최후의 안식처, 그 평온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길처럼 보인다. 이 말이 맞춤으로 떠오른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것 속에서 죽음을 반복한다.”, 하나의 형용사를 찾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시인처럼 절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구차해 보이는 이유가 감동적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만들어내지 않는 작가들이 얼마나 지천인가. 삶을 숙고하려는 반성적 인간이 날로 줄어가는 느낌이다. 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무심히 지나가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망각으로부터 되찾으려는 문학의 이 치열한 모습(문학적 도피를 포함해서 말이다)들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절필, 무기력과 체념은 그저 상상력이 고갈되어서, 게을러서, 성취할 야망이 보이지 않아서 쓰지 않는 것과는 다른 저항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결코 체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얼마나 다양하게, 혹은 기만적으로 시간에, 자연의 흐름에 반항하는가. 글쓰기는 그 균형의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요를 추구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 이야기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작가는 모든 소설을 온전히 끝내지 않은,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미완성 이야기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삶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결말을 내지 않음으로써 질식당하는 이 세계의 목소리들을 만들어 냈다는 허구의 이야기다. ‘아니요라는 이 저항의 한 마디는 발명, 창조의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글쓰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책꽂이를 창밖으로 내던진 테스트 씨는 그 덕분에 생각을 많이 한다. 많이 쓸수록 생각은 적게 할 수밖에 없음의 증언이기도 할 것이다. 비움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덕지덕지 눌러 붙은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야 충만해질 여유와 자유가 생긴다.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바틀비의 이 부정의 아니요는 순리에 대한 긍정이고, 곧 채움의 가능성일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 멋진 무()존재들의 선조인 바틀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을 대차게 실행한다. 바틀비는 멜빌이 1843년 자신이 실패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을 때,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그가 실패했다고 규정했을 때, 그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바틀비가 자신을 거부했던 세상을 거부하려는 듯한 명백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한 세계를 마주한 무기력의 반항이었다. 나는 발저가 선택한 은둔의 삶, 절필의 삶을 동경하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체념과 반항을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언젠가는 결국 체념에 굴복하겠지만.

 

세상에 내놓고 아니요를 외친 작가로 오스카 와일드는 또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비평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지적인 것이다.”라며, 생애 마지막 2년을 실제로 자신을 폐기시키듯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랜 열망을 실현했다. 근면성은 모든 허위의 씨앗이라고까지 독설을 뱉어낸 그에게 완전한 무위(無爲)는 가장 고상한 형태였다. 그가 죽자 파리의 신문은 그의 말 몇 마디를 인용하는 부고 기사를 썼다. 나는 삶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글을 썼다.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금은 더 이상 쓸 게 없다.”, 그가 알았다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부재로서의 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태어났으니 살아지는 것이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저 그것일 뿐 아닌가? 종이가 희미하게 구기적거리는 소리를 상기시키는 웃음이었다고 카프카와 대담을 나누었던 구스타프 야누흐의 증언처럼, 그 영원한 침묵을 선고 받은 존재가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글쓰기처럼 삶이란 것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나 삶이나 그 어떤 의미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증거가 없다. 그 누군가 문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고, 항상 새롭게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듯, 삶의 의미란 것도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문학이론 교수이자 소설가인 다니엘레 델 주디체(Daniele Del Giudice)는 글쓰기의 위험성을 말하며, 글로 쓰인 작품은 위에 세워진 것이고, 하나의 텍스트는 만약, 그 텍스트가 효과적이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며,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학적 도피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이 가져오는 마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는 것 이상은 다루지 않으려고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찌 그 언어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설 윔블던 스타디움이 신화적인 실서증(失書症) 환자인 옛 친구들을 탐문한 것, 즉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글쓰기의 도덕성에 대한 웅변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세상을 향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뇌한 것이리라,

 

또 하나 글쓰기의 마비상태에 빠진 주인공을 등장시켜 문학이라는 미명하에 심미적, 정신주의적 언어에 묶여있던 지신에 대한 고별사를 썼던 앙드레 지드로 맺어야겠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팔뤼드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정작 팔뤼드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문학적 도피 또는 마비나 절필의 상태는 침체이거나 엉성한 침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이나 도약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작가의 이상을 찬양했던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 문학(한국문학)에도 과작(寡作)의 작가들, 또는 절필인가 했을 때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새로운 작품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문학의 소재와 언어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곧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부정적 충동에는 체념과 저항의 균형에 대한 내재적 본성을 장착하고 있는 것일 게다.

 

모든 텍스트의 본질은 바로 텍스트 자체의 본질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것을 피하고, 텍스트 자체를 확정하거나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단언을 피하는 데 있다.” 는 말처럼 삶에 그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우리는 단언, 확정할 수 없다. 세계에, 우주 자연에 대해 아니요를 말함으로써 엄청나게 견고한 장벽과 마주하여 주춤거리고 당혹감에 혼란스러울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글쓰기의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글쓰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했던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Hart Crane)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삶의 내 자리를 찾아 헤매는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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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 - 무너지지 않는 마음 공부
홍자성 지음, 최영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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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 채근담(菜根談)에 대해 제법 오래된 편협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처세(處世)’라는 단어에 대한 그릇된 개념으로 시작된 것인데, 욕망의 성취, 즉 성공이라는 신화에 이르기 위한 무분별하고 헛된 기교, 술책, 전략적 방법론과 같은 천박한 기술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 어설픈 앎의 교만이 가져온 무지의 소치였다. ‘풀뿌리를 씹는다는 제목의 의미를 새겨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가히 어리석음이라 누군가 힐난하여도 할 말이 없다. 사람이 풀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못하겠는가. 극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이야기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이 책에는 원제목 채근담(菜根談) 앞에 고요하고 단단하게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어쩌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그러해야하는 마음의 형용이라 하겠다. 책은 명대 후기에 간행된 초기 간행본과 청대에 간행된 청간본으로 크게 나뉘는 모양이다. 이 책은 전자인 초기 간행본을 저본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집과 후()집으로 시기를 달리하여 편찬되었으며, 대략 전집을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를 거닐어야 하는 사람들, 즉 청장년을 위하여 쓰여진 섭세(涉世) 또는 처세(處世)라고 하며, 출세(出世), 즉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노년의 삶에 대한 글이 후집을 이룬다.

 

때문에 전집과 후집을 찬찬히 새기며 읽게 되면, 험난하고 모순 많은 세상, 혼돈과 생존경쟁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말이 후집에서는 냉담과 평온의 언어로 새롭게 전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세상사에 관여하여야만 하는 자와 세상에서 물러난 자의 시선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일 것이다. 그렇다고 전집이 오직 치열한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만은 아니다. 그 삶 속에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고요와 평온, 진실을 향한 도의는 모든 행간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채근담은 시중에 난무하는 상투적이고 뻔한 처세술 따위가 아니다. 세상을 헤쳐 나가고 세상에서 나오는, 그리고 비정하고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내고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내적(內的) 지혜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집의 특성을 드러내는 한 예로 전집-191편에는 好名者, 入於道義之中, 基害隱而深.”이라 하여, 명예욕이 그릇된 이익보다 더 은밀하고, 더 깊은 해악을 남긴다고 명예추구의 마음에 은폐된 해악을 경계토록 한다. 이익을 좇는 마음은 외형으로 드러나 그 위험을 비교적 쉽게 인식하여 방어나 경계할 수 있지만, 명예의 욕망은 도의와 정의하는 외양 속에 교묘히 숨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 속을 거니는 사람들이 대면해야 하는 현실은 이같이 복잡다단하다. 주의하는 신중함을 알려주는 애정 어린 선배의 충언일 것이다.

 

반면 후집의 한 편인 후집-36편을 예로 들면, “山林是勝地, 一營戀便成市朝. 書畵是雅事, 一貪癡便成商買. 心有係戀, 落境成苦海矣.”, 산과 숲은 본디 빼어난 장소지만, 한 번 마음을 붙이면 시장터처럼 시끄러워진다. 서화는 고상한 일이지만, 욕심이 끼면 장삿속이 된다마음에 집착이 생기면 즐거운 경지도 고통의 바다로 바뀐다.“는 문장처럼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자연으로의 귀화와 같은 외재적 출세가 아니라 내적 마음에 있음을 말하듯, 전집과 후집의 지향하는 가르침은 그 결을 달리한다. 채근담이 고요와 적요, 자연을 말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벅적이는 세계에서 산림이 있는 자연으로의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을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시중에는 여러 번역 판본이 있다. 시인 조지훈 선생의 시정 넘치는 번역 판본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현토와 진지한 번역문이 있는 판본도 있다. 그런데 이 책 최영환의 판본은 원문과 직역이 충실하게 있는가하면, 엮은이의 세심하고 오랜 새김의 마음이 묻어나는 충실한 설명의 글로 써진 해석(解釋)이 오늘의, 현 시대의 언어를 반영한 생생한 문장으로 간명하고도 쉽게 이해를 돕고 있다. 아마 마음에 착 감기는 문장들로 음미하고 체화하는 데 진정한 텍스트가 되어준다고 말해도 지나친 칭찬은 아닐 것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인간다움이 마치 멸시되듯 삭막한 세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극단적 혐오와 증오의 표현들이 난무하고, 자신 이외의 인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몽매한 오만이 들끓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간인 것일까라는 사람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전집-61편에는 단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삶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것의 증거는 남을 향한 따뜻한 한 마디와 작지만 선한 행동 속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雖是在世百年, 恰似未生一日.” 비록 세상에 백년을 살아도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들이 과연 이 마음을 알까 모르겠다.

 

아무려나 나는 이미 출세의 길에 놓여있는 늙어가는 자이다. 해서 자연과 고독과 적요의 자리를 탐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환경을 그리워하며, 그 고요의 즐거움에 기꺼이 내 몸의 시간이 놓여 지기를 희구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후집의 각 편들에는 유연, 균형을 말하는 문장들이 부쩍 많이 드러난다. 늙어가는 자들의 아집과 그 견고함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까닭일 것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육신이 부드러움을 잃고 경직되기 일쑤이다. 해서 평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곧잘 마음의 소란스러움에 부대끼기까지 한다. 집착을 깨뜨리기란 얼마나 어려우며, 나아가 자연과 하나 되는 그 고요한 자유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가. 후집-60편의 知物我之兩忘 사물과 나 그 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짐, 나를 벗어난 우주자연과의 일체를 꿈꾸는 죽음연습의 길쯤으로 알아두고 간다.

 

그렇다고 원저자 홍자성이 말하는 고요와 내려놓음의 철학이 세상과 등지라거나 체념과 포기인 것은 아니다. 역시 균형이요, 유연함이다. 움직임과 정적을 함께 받아들이는 평안의 마음, 마음의 자유에 대한 삶의 지혜이다. 눈앞의 풍경과 입에 담는 말이 곧 시()임을, 진리는 평범한 삶 속에 깃들어 있음을, 있는 그대로의 삶 속에 진리가 있음을 언제쯤이나 깨닫게 될려나. 어쩌면 여전히 세계의 출구에서 미적대며 세계를 거니는 마음의 미련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휘리릭 읽어서야 그 참맛을 새길 도리가 없음에도 이렇게 몇 자 감상으로 남겨두고, 아주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그 행간 속 의미를 알아가야 할 것 같다. 趣味要沖澹, 而不可偏枯, 操守要嚴明, 而不可激烈. (취미요충담, 이불가편고, 조수요엄명, 이불가격렬)전-82, 이 균형의 감각을 우선 마음에 다져 넣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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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19 2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채근담, 고유명사처럼 너무 익숙하다보니 그 뜻을 모르고 있었네요.
‘풀뿌리를 씹는다‘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더 뜻 깊은 독서가 될 것 같군요.

비의식 2025-08-19 22:07   좋아요 1 | URL
네, 마음에 끈끈하게 들러붙은 먼지를 씻어내는 읽기랄까요?
지금 조지훈 시인의 번역본으로 다시 읽고 있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평온한 밤 되시기를. ^^

마힐 2025-08-21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趣味要沖澹, 而不可偏枯, 操守要嚴明, 而不可激烈
취미는 담박하되, 메마르지 말며, 원칙은 분명하되, 과격하지 말라>
필리아님의 이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남네요.
저도 늙어가는 자(ㅎㅎ) 로서 이 구절의 의미 곱앂어 보겠습니다.
필리아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비의식 2025-08-21 19:05   좋아요 1 | URL
오, 마힐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적하신 마음의 균형을 찾으려 하지만, 그 중심이란 것이 미로만 같아 여전히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 늙어가는 자의 고질적인 침묵을 헤아리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죽음의 준비란 것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준비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불가능한 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평온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외 루소전집 4
장 자크 루소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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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는 단편 노동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좋았고 기뻤다.”. 발저는 실제로 이렇게 살았다. 그를 아는 작가들 모두 한결같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고, 또한 결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기억되지 않고 잊히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인물로 증언되고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책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발저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산책자의 몽상을 읽게 된 기원을 밝히는 것이 이후 감상글의 변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나는 발저의 산문들을 읽고 거슬러 횔덜린을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루소의 몽상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삶의 무수한 형태들이 자극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즐거움, 온전히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감미로운 도취와 함께 존재 그 자체만을 향유하는 평온의 드라마에 대한 계보를 따라 올라가 본 것이다. 물론 이 여정을 이렇게 단선적으로 직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 흐름이 약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진정한 즐거움일랑 찾지 말자. 이 땅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 장 자크 루소, 몽상의 초안17절에서, 197

 

시인 횔덜린은 임종 무렵 쓴 시에서 거주하는 삶이 인간의 길이라고 말한다. 삶의 토대인 세계를 점령 소유하려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삶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그것이 악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때문에 그는 미친 척이라도 해서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망할 때까지 36년간을 네카 강변 목수의 집 옥탑 방에 은둔한 광인으로 지낸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때의 횔덜린의 일과를 엿볼 수 있는 집주인 목수 치머의 편지가 있다.


횔덜린이 36년간 머물렀던 네카 강변의 목수 치머의 탑이 있는 집,

출처: 횔덜린의 광기2025.7 현대문학 , 26쪽 사진

 

그는 이제 60세쯤 되었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습니다아주 가끔 불만을 드러내는데, 그 또한 그의 상상 속에서 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때 뿐입니다.”

- 1829.7.18. 치머가 횔덜린의 후견인 하인리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횔덜린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오직 이 세계에 대해 아는 체 하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네들의 권력과 평판과 명예를 향한 집요한 욕구들이 발하는 부질없고 의미 없는 헛소리들이 삶의 온전한 평온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목수 치머에게는 횔덜린의 고독한 삶이 “‘철학적 평화속에서 살만큼 운 좋은것으로 비추어졌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렇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세계의 고통에서 멀리하기 위한 불가피한 최후의 방편이었으니, 결코 행운이라 할 것은 아닐 것이다.

 

출처: 세상의 끝, 2018.3 문학판 , 1966.12.25. 눈길 위에서 殞命한 발저

 

삶은 이 세계를 잠시 거쳐 가는 여정이라는 횔덜린의 이해는 발저에게 현실적 삶의 전체를 이룬다. 발저는 고정된 직업도 거주지도 없는 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실업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의 필경사로 일하기도 하며 평생을 일자리를 구하는데 소모했으며, 말년 28년을 스스로 걸어 들어간 정신병원 요양소에서 산책하며 살다가 그가 꿈꾸던 하얀 눈 길 위에서 세계를 모두 품은 세상의 끝에 감싸여 운명했다. 이제 묻는다. 루소는 세 번째 산책의 글에서 죽어야 하는 순간에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지를 배우는 것이 과연 시기적절할까?”라며 늙어가는 자가 너무 늦게 운명의 지혜를 얻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자문한다. 그리고는 자조석인 목소리로 늙은이의 공부는, 아직도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다면, 오직 죽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라고.

 

진실성의 추구란 무엇인지, 세계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진 은신처에서의 고독과 몽상을 통한 지극한 행복의 발견, 선함의 동기에 대한 윤리적 성찰, 자애심과 이기심 등의 명상이 책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찾은 이유는 冒頭의 기원처럼, 늙어가는 자가 그 순간에도 해야 할 공부로써 고독과 몽상에 가닿아 있었기에, 생피에르 섬 호숫가 은신처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이 전() 존재를 집중할 수 있는 상태, 영혼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상태에 젖어든 채 지고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의 문장을 추적하는 읽기가 중심이 되었다.

 

물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하 산책이라 표기함)의 글들인 열 번의 산책은 예순 살이 넘어 쓴 루소의 생애 말년의 글들이지만, 늙어가는 자만의 고유한 특수한 지혜라고 협소하게 이해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 숨겨진, 아마도 보편성의 진실이라 할 수 있기에 인간들과 인간구성사회가 지닌 여실(如實)한 속성들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기 삶, 즉 나의 삶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지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산책은 프랑스 사회 기득권의 저변을 이루는 사제들과 이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의 음해와 박해로 인한 세상에 대한 환멸이 집필 동기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아비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에 맡긴 것과 같은 그의 사생활의 설명되지 않은 지점들을 찾아 한 천재의 업적을 모두 부인하고,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매도하는 상황은 그를 처참한 고통에 빠뜨렸다. 더구나 집에 돌을 던지고 폭력을 행사하도록 마을 주민들을 부추기기까지 한 1765년 몽믈랭 목사가 주제한 루소를 겨냥한 음모사건은 이후 세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더욱 짙게 만들었을 것이다. 횔덜린이나 발저의 유폐와 다름없는 생활의 기저(基底)가 이 세상에서 타인이나 자신을 위해 더 이상 유익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을 내면화한 불행한 사람들의 자발적 격리라면, 루소는 반()만큼의 타의에 의한 수동적 격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모든 인간적 행복에 대한 보상으로써 관조와 몽상의 자유를 발견한 지점에서는 동일한 깨달음이 있다.

 

흥분과 열정의 짧은 순간들의 강렬함은 아주 빨리 지나가 버렸음을 느낀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보면 그 순간들은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점에 불과할 뿐 아니라 너무도 드물고 빨리 지나가버리므로 하나의 온전한 상태를 구성할 수조차 없다. 때문에 삶의 행복이란 것은 이러한 덧없는 강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영구적인 어떤 평온의 상태가 지속되어 증가하는 지고의 안락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소는 지속적으로 마음을 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 세상에 지속적 행복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언제까지나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한 순간, 그 몽상의 순간이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여섯 번째 산책에는 많은 후세의 철학, 문학가들이 즐겨 인용하듯 잘 알려진 절름발이 소년의 동냥 이야기가 있다. 루소가 익숙하게 다니던 길에는 다리를 저는 어린 소년이 있었으며, 루소는 그와의 소박한 대화를 즐기며 소년에게 동냥을 주곤 했다. 마음에서 우러난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것이 습관이 되자 의무로 변질되고 그 의무가 불현 듯 부담스러워져 마침내 장애물로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늘 다니던 그 길을 우회하여 걷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선한 동기가 결국 그가 함정에 빠지는 미끼가 되었음을 자각한 것인데, 대부분의 행동에서 최초의 참된 동기는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행 뒤에 이어지는 의무의 사슬이 선행에 대해 중압감으로 작용하고, 참을 수 없는 거북함이 되면 곧 세상의 비난거리로, 음해의 재료로 이용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향마저도 해로워지게 하곤 한다.

 

그런데 루소가 내리는 결론은 내가 생각하는 도덕과 매우 다르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하려면 아무 구속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의무로 변하면 선행의 달콤함이 달아나버린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적 선이 개인의 즐거움과 취향에 터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도덕이란 하기 싫을지라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것이지 않은가? 즉 도덕적 선의 행함은 의무에 기초하는 것일 텐데, 루소는 이를 개인의 덕성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산책속 루소의 많은 명상의 글들에는 지나치게 자애심(자존심; amour de soi)’이라는 감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 자애심이야말로 모든 동물이 자신을 보존하고자 애쓰도록 만드는 자연적 감정으로, 이것이 이성의 인도를 받고 동정심에 의해 변모되어 인간미와 덕을 낳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는 이의 대척개념으로 이기심(amour-propre)’을 상대적이고 인위적 감정으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중시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모든 악행의 근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개념어의 경계를 칼같이 절단할 수가 없다. 둘 모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이를 마치 명확하게 분리할 수 있는 감정처럼 말하는 것은 한낱 자의적 정의처럼 느껴진다. 그가 말하는 도덕의 토대가 의무라기보다는 순전히 개인의 양심이나 덕성과 같은 감정에 기초하기에 자기 합리화를 위한 다분히 위선적 언어로 여겨진 것이다.

 

이에 따라 내 의무와 마음이 대립하면 의무가 승리하는 일은 드물었다.(89)”, 명령하는 것이 사람이든 의무든 필연이든, 마음이 침묵하면 의지가 귀머거리가 되어 나는 복종할 수가 없다. (...)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 않는 일은 이내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루소의 도덕은 다분히 개인의 성향에 따른 자의성으로 채워진 불완전한 도덕이다. 자기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는 얘기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즐거움이 없는 것도 역시 제아무리 선행일지언정 결코 하지 않을 것이 된다. 이것은 그의 자유에 대한 개념에까지 이어지는 데, 자유란 (...) 원하지 않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기 싫으면 절대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집이요, 독단이지 않은가? 사실 이러한 극히 주관적 진술들이 마치 진실의 목소리인 양 기술되는 내용들이 이 책에는 즐비하다. 거짓말에 대한 불완전한 정의들을 계속하며 진실성의 정의에 이른 네 번째 산책의 글도 이러한 주관적 편향의 증거가 될 것이다.

 


사실 루소에 이른, 세계의 총체성을 오롯이 포용하고자 하는 불가능에 매달렸던, 세계의 불모성과 그의 교정 불가능성이란 체념에서 비롯된 유목민처럼, 거주하는 자의 삶을 살았던 발저와 횔덜린의 생의 각성의 계보로서 루소를 찾은 것은 어쩌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루소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생의 온전한 즐거움인 존재로 가득 채워진 무위(無爲)의 행복을 선사하는 몽상의 환경을 벗어나 사람들, 특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는 파리를 말년의 터전으로 삼은 것도 모순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원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계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면서도 그 한가운데서의 삶을 고집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는 심각한 이중성은 그가 실은 기득권의 세계에서 수동적으로 격리된, 즉 추방되었기에, 다시 그 세계로 진입하기를 소망했음의 반증일 것이다.

 

때문에 발저와 횔덜린의 세계의 끝에 이르려는 자발적 고독과 루소의 고독은 현저하게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소의 몽상은 향수어린, 과거의 행복에 대한 추억의 몽상이다. 그에게는 진정한 존재적 체감의 지향, 불가능성의 끝에 이르기 위한 우주자연과와의 합일을 향한 고독, 생에 대한 지고한 체득이 아닌 것이다.

 

루소는 여전히 육체를 정신에 종속된 한낱 껍데기로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도처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늙어가는 자의 깨달음 혹은 지혜란 몸의 시간성 자체, 그 실존성을 체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게는 그러한 이해가 없다. 그는 고독과 몽상을 말했을지언정 실존이 무엇인지, 고독이 무엇인지 영원히 모른 채 죽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마지막 열 번째 산책인 바랑 부인에 대한 사랑의 추억의 기술을 마치지 못하고 죽은 것을 보면 말이다.

 

더구나 고백하건대,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한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아홉 번째 산책,141).”고 쓰듯, 루소에게 고독과 몽상은 단지 삶의 주변부로 밀려남이 주는 고통을 잠시 유예해주는 도취의 순간일 뿐이었다. 물론 그의 진실에 대한 정의의 한 문장처럼 산책의 글들은 사실에 인위적 장식을 덧붙이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발저의 고독한 산책과 거의 대척에 있는 점에서 내가 의도한 계보(系譜)적 읽기의 실패 사례로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고독한 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발견했을 뿐이다. 아마도 브렌타노나 클라이스트 혹은 멜빌로 발길을 돌려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초상이라는 산문 24절의 문장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고독의 성격에 대한 진실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그 문장으로 감상을 맺어야겠다. 나는 그저 아프고 게으르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니까, 만일 건강하고 활동적이라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나의 초상-24, 159)그는 선인(善人)에게 있어 홀로 자신과 사는 것은 천국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의 의식보다 더 유쾌한 장관(壯觀)은 없다고 설레발치지만, 그에게 선이란 곧 그의 취향이므로 우리는 그의 글에서 사실 아무것도 받아들일 것이 없어진다. 스스로 만족 할 수밖에 없기에 고독으로 내몰린 사람의 삶을 견뎌내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서 루소의 명상 또는 몽상은 의미를 지닐 수도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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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는 나날
안윤 지음 / 시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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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6쪽에서]


이 산문집의 글들인 나날의 기록에는 제목이 없. 책의 마지막 글 속 단 한번뿐인 미지의 삶을/ 어떤 말로 대표할 수 있나/ 대표될 수나 있나라는 반문이 곧 제목 없음의 응답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나날의 기록들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으려고 오래도록 찬찬히 들여다보는시선이 있다. 장식 또는 수식과 같은 작위가 혹여 끼어들었을까 하는 주의 깊은, 아니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노라면>이라는 글에서 자기 폭로의 압박에 저항하듯,

 

잊지마.

가진 것 모두를 제하고 남은

모든 수식어를 지운

텅 비어 있는

고요한

진짜

 

나를.” (144)

 

이라는 구절처럼 더는 뺄 것이 없는, 내려놓겠다는 꿈을 꾸는 것조차 욕심만 같아 낯부끄러워하는 사람(35)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책자의 몽상을 썼던 루소의 표현을 빌면 어떠한 허구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고, 어떤 정황도 윤색하지 않고,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으려고 애를 다 쓰는것이 곧 진실성이라는 말처럼. 우리들은 그러한 글들에서 진실을 느끼며, 평온한 공감으로 마음이 활짝 열린다.

 

외할머니의 장례와 화장, 그리고 수목장을 마치고 돌아가며 엄마와 마주하고 받아놓은 큼직한 고기가 든 갈비탕에 뒤늦게 입맛이 당겨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고, 후루룩 삼키는 엄마 얼굴을 바라보며 엄마 잘 가라며 목 놓아 울던, 엄마를 떠나보낸 엄마를 건너보는 작가를 나는 또한 본다. 어느 날의 이러한 순간들, 시간의 겹이라고 불러도 되나? 이 순간으로 겹겹이 쌓인 시간, 기억은 우리들 삶의 실존인 몸의 감각으로 되살아나, 새로운 시선과 이해가 되어 또다른 시간의 겹이 되고 몸의 기억이 되는가보다. 어쩌면 이 산문집 전체를 관류하는 제목 없는 나날의 기록들은 이처럼 시간이고 몸이며, 생의 실존에 대한 감각이고, 그래서 더욱 안쓰럽고 쓸쓸한 사랑과 그리움, 타인을 향한 헌정의 마음일 것이다.

 

세 번의 부고 소식이라는 글에는 장례식에 나서기 전 검은색 단화의 구두코를 닦으면 매끄러운 어둠이 반짝반짝 윤이 난다는 문장이 있다. 그것이 찰나 같은 / 생 같은것이듯, 죽음은 어쩌면 준비되는 것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장만해야지 하면서 마냥 미루는 검은 색 정장 한 벌처럼. 나는 본가를 다녀오는 길이라는 산문에 조금 긴 감정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명절을 본가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 온 날, 작가는 남겨두고 오면 안 되는 무언가를 남겨두고 와버린 것 같은 감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인다.

 

나는 거의 매주 노부모가 사시는 1시간 30분 남짓한 곳을 감시병처럼 오가고 있다. 그때마다 두 분을 남겨두고 돌아올 때면 마음 한 구석이 편치 못하다. 작가를 매번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며 다섯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고 손을 잡는 엄마의 손길을 언젠가는 놓아야만 한다는, 아니 놓치고 말거라는 선명한 예감그것과 유사한 것일 게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하듯,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음을 알기에 그 안타까움은 슬그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안다고 마음이 준비되는 것은 아닐 게다. 그저 다가오는 운명, 생의 순환을 그대로 수긍할 뿐이다. 생에 대한 뭐 별난 겸허함이 아니다. 다만 나눌 수 없는 고통이지만 누군가 곁에 있다는 생각을 그분들이 마지막까지 지니기만을, 결코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를 그저 바랄 따름이다.

 


<눈 쓰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을 비롯, <소설 쓰며 배운 것>,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노라면>, <소설 쓰기의 두 가지 곤란한 점>이라는 글들에는 작가의 글쓰기 지향이나, 다짐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원칙들, 소명을 엿볼 수 있다. 눈을 쓰는 일은 자신의 움직임과 온기, 시간을 바쳐 길을 지나다닐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헌정의 마음임을 작가는 읽어낸다. 눈을 쓰는 마음이 글을 쓰는 몸과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 그리고 글을 쓰며 살게 된 나는/ 잠시 가지게 된 / 아주 잠깐 맡아 둔/ 누군가를 대신하는 목소리, 쓰임일 뿐.”임을 잊지 않으려는 애씀은 그 때문에 겨우겨우 (글쓰기를) 밀고 나갈 때 떠오르는 누군가들, 독자들에 닿아보려는 작가 고유의 의지를 확인하게도 된다.

 

책의 후반부에 있는 <쑥 뜯는 엄마>에는 공원이나 산길에서 쑥을 뜯는 엄마가 창피해서 이제 가자, 그만 뜯어, ?”하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있다.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딸이 엄마에 가지는 내면화된 수치심일지도 모른다. 그때면 못 먹고 자라 그래라는 엄마의 답변은 작가를 매번 주눅들게 하였다고 쓴다. 아마 시간의 새로운 겹에 새로운 해석, 자기화해의 다름아닌 연민과 사랑의 시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닮은 듯한 빛바랜 어느 시골 소녀의 사진을 통해 엄마의 소녀 시절, 그 시간 속 자그마한 아이의 등을 가려주고 싶은 마음, 맘 놓고 뜯으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발견한다. 우리들은 그러면서 생의 사랑을 배우게 되고, 삶의 그러해야 함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리, 자기 확인이라는 생을 버텨낼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소설 쓰기의 두 가지 곤란한 점> 중 한 가지로 소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전까지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로, 쓰는 사람만이 간직한 비밀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임을 말하듯, 소설 뿐 아니라 모든 글쓰기는 <쑥 뜯는 엄마>의 이야기처럼 써짐으로써 비로소 누군가에게 닿아 공감과 감정과 생각의 미세한 변화를 은연히 촉발한다. 이 산문집은 모든 무제의 날들에”, “그 평범 앞에 내내 겸허한 단 한번 뿐인 말할 수 있는 생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더는 뺄 것이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러한 나날의 기록들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이 기다려진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충만한 그 어떤 이야기를, 작가의 온기와 몸의 움직임이 온통 바쳐진 삶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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