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남자의 이름은 전부 잭이다. 여기에서 키아누의 이름은 잭.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도 잭. 스피드는 90년대 영화인데 지금 봐도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하게 되는 영화다. 90년대 영화라서 더 재미있다. 휴대폰이 없어서 마음에 들고, 그래픽 없이 시원시원한 액션과 가슴 졸이게 만드는 스릴이 있어서 너무 좋다. 요즘 영화보다 볼 맛이 더 난다.

요즘 영화는 대체로 재미가 없고 실망하게 된다. 자본을 수백억씩 들여 그래픽 무장을 하면 할수록 더 실망한다. 재미가 있더라도 그런 영화는 깊게 생각하고 고민에 빠지게 하는 영화들이다. 스피드처럼 화면 가득 스릴이 넘쳐흘러, 보는 이들을 쥐락펴락하는 영화가 요즘은 잘 없다.

잭은 너무나 멋지다. 외모도 멋지고, 거기에 정의감이 넘치는 경찰이라 사람들을 위해 몸을 불사른다. 버스 승객들을 위해 믿음을 계속 준다. 특히 끊어진 다리로 돌진할 때 애나의 눈빛은 [잭 당신 하나만 옆에 있으면 나는 그걸로 족해] 하는 눈빛이다. 산드라 블록의 카랑카랑 음색이 듣기 좋고, 말괄량이 같은 면모가 죽음과 직면한 승객들과 관객들의 마음에 안정을 준다.

큰 화면으로 보면 요즘이라도 푹 빠져 볼 수 있다. 잭은 잠시 버스에서 내려 폭탄 해체 준비를 하러 떠난다. 그때 승객들은 잭이 자신들을 버릴 것이라 생각하지만 애나는 특유의 카랑한 음색으로 우릴 잊지 말라고 한다.

잭이 버스 밑으로 기어 들어갈 때 스릴은 정말 죽인다. 스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출된다. 줄이 타이어 밑으로 들어가고 연료통에 칼을 꽂아서 버스 밑바닥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졸깃졸깃하다.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호퍼 집으로 갔던 동료 해리가 설치해 놓은 폭탄에 당하고 잭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소리를 지리며 좌절한다. 그때 애나가 잭을 위로한다. 무너지지 마라, 나 혼자서는 못 한다, 잭 도와줘요.

승객들을 전부 탈출시키고 잭과 애나는 버스 밑으로 끌어안고 탈출을 하는데 정말 멋진 장면이다. 스피드는 비행기도 폭파시키는 등 엄청난 장면이 많다. 마지막까지 호퍼의 인질이 되어 보는 이들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마지막 전철이 멈추지 못하고 지상으로 튀어 올라 옆으로 비스듬히 넘어져 도로에서 멈추었을 때 잭과 애나는 끌어안고 있고 지하철 밖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며 미소를 짓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이 영화에서 잭이 달리는 모습도 굉장히 스피드 하며 멋지고, 잭이 차고 있던 지샥 디다블유 5400의 초기버전도 멋지고, 무엇보다 짧은 머리의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이 멋졌던 영화 ‘스피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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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나무에 대하여’를 읽고 또 읽어 봤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스레드에서는 인기가 없지만 그래도 이성복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조깅을 하고 오면서 가장 많이 보는 게 나무야. 나무는 하찮잖아. 널려 있으니까. 하찮은 것들이 곳곳에서 히 살아내고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아. 나무는 고요 위에 고요를 덮고 또 그 위에 고요를 덮어서 인간처럼 말하지 않잖아. 이렇게 말없이 도로를 지키는 나무를 보면 이성복 시인의 ‘나무에 대하여’가 떠올라.


피와 색이 비슷한 쌉싸름한 와인을 홀짝이며 조금 소리를 내면서 시인의 시를 읽어. 시는 소리를 내서 읽는 게 좋아. 그러면서 홀딱 벗고 있는 나무를 생각하면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내가 나무라면 그랬을 거야.


만약 둘 다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면, 나무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부끄러운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나무는 그냥 남의 눈에 띄고 않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


왼종일 서 있는 나무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땅 밑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라 이성복 시인은 말했어. 그래서 그랬을까 정현종 시인은 나무는 공기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고 했어.


시인의 삶이란 무릇 공기와 땅 밑,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 이토록 안아 주고 싶어 하는 거 같아.


나무가 된다면, 시인의 말처럼 저 멀리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가 있을 거라 믿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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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키 이야기야 ㅋㅋ. 하루키팬들은 모여보자 ㅋㅋ 하루키 단편 중에 ‘패밀리 어페어’라고 있는데 읽어 봤어?


하루키의 단편 [패밀리 어페어]는 어쩌면 하루키의 유일하게 기분 좋은 가족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하루키의 소설에는 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잖아. 등장해도 그리 해피홈 분위기는 없었지. 가족의 종적인 유대관계나 횡적인 인간관계를 나타낼 뿐이었어.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오빠와 여동생의 애증 관계를 다루거든. 이상하지만 이 소설은 읽고 있으면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위로 슬쩍 올라가.


하루키의 소설인데 하루키의 소설 같지 않으면서도 하루키의 소설이야. 그러니까 처음 보는 과자를 한 봉지 샀는데 먹어보니 맛있지는 않지만 맛이 없지도 않아서 이게 뭐지? 하다 보니 다 먹어버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몰라.


이 소설은 오빠와 여동생의 이야기야. 성인이 되어버린 여동생과 오빠 사이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실제 오빠와 여동생 사이라면 읽으면서 맞아, 그래, 하게 되거든.


하루키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동생 캐릭터를 탄생시키면서 이를 계기로 후에 [노르웨이 숲]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미도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해. 미도리의 원형이라고 해도 되는 캐릭터지.


오빠 혼자 살고 있는 집에 여동생이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같이 살게 되는 이야기잖아. 그저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이 어느새 연애를 해서 약혼할 남자를 데리고 오고, 주인공 오빠는 썩 내키지 않아.


동생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사사건건 부딪혀서 안 보였으면 하지만 또 막상 결혼을 생각해서 남자를 데리고 온다고 하니 상대 저 녀석이 내심 미워 보이는 거지. 게다가 재미라고는 눈을 씻고 뜨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이야.


동생은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걸고넘어지고 나는 그것이 자유 함이라 말하고 싶고. 똑 부러지고 살림 잘하고 상냥하고 나긋한 여동생은 나와는 맞지 않지만 그 녀석과는 잘 맞는다는 게 못마땅하고. 하지만 그 녀석은 여동생을 아끼며 사랑해 줄 거라는 걸 알지.


[나는 딱 한 번 여동생이 눈물을 흘릴 때 손을 두 시간 정도 잡아준 일을 기억한다. 어린이로만 알았던 여동생의 손은 생각보다 조금 컸고 부드럽다는 것을 알았다 – 본문 중] 그리고 속으로 행복을 빌어준다는 그런 이야기야.


하루키씩 유머가 가득한 소설이라고 생각해. 동생이 오빠에게 휴지는 좀 제대로 처리하라느니 등등.


[샤워장으로 들어가 수염을 깎았다. 저것도 차츰 어머니를 닮아 가는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란 마치 연어와 같다. 뭐니 뭐니 해도 다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 패밀리 어페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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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집에 팔린 오츠야의 등에 거미여인의 문신을 강제로 당하면서 점점 색시가 흐르고 남자들을 후려가는 이야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66년에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원래 문신은 아주 짤막한 소설인데 영화의 내용은 준이치로의 여러 소설에서 가져 온 것 같다.

자막을 영어로 되어 있는 걸 봐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영어단어 뜨문뜨문, 뭐 그렇게 해서 봐도 아주 재미있게 봤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은 탐미소설의 절정을 보여준다. 소설들을 읽어보면 뭐랄까 애간장이 타들어가면서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주인공 여자들이 잔뜩 등장한다. 활자인데 마치 여자의 섹시미가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광수가 사라의 손톱에 집착했다면 다니자키는 여자의 발에 집착을 한다. 근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발에 집착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 게이샤 오츠야 역으로 당대 일본의 최고의 여배우 와카오 아야코가 나온다. 묘한 섹시함을 뿜어낸다. 돈 많은 상인의 딸 오츠야는 점원인 신키치를 사랑하지만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두 사람은 야반도주를 한다.

두 사람은 한 숙소에 묵는데, 숙소의 주인은 신키치 몰래 오츠야를 기생집에 팔아 버린다. 마취를 시키고 포박을 해서 가마에 실어 데리고 간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신키치를 만취시켜 죽여 버리게 한다.

오츠야가 실려간 곳에는 세이키치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림보다는 주로 문신을 새기고 있다. 그의 소원은 미녀의 몸에 혼을 담아 문신을 새기고 싶어 한다. 그런 오츠야를 보게 된 세이키치는 그녀의 등에 거미여인을 문신한다. 거미여인의 얼굴은 마치 오츠야를 닮았고, 거미는 꼭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다.

마취에서 깨어난 오츠야는 고통을 이겨낸 후 점점 색시미가 강하게 풍기는 마성의 여자로 바뀌어 게이샤로 이름을 떨친다. 점점 더 많은 남자들이 돈을 들고 오츠야를 찾아온다. 남자들은 오츠야를 서로 가지려 하고 오츠야는 남자들을 후린다.

죽음을 당할 뻔했던 신키치는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은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오츠야를 찾아간다. 오츠야를 만난 신키치는 같이 도망가서 살자고 하지만 오츠야는 이미 마성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팔아넘긴 남자를 후려서 그의 아내를 죽이게 만들고, 신키치에게 그를 죽이게 한다. 신키치는 점점 죄의식으로 고통받지만 오츠야는 신키치도 후린다.

게이샤로 돈을 엄청 벌어들이며 빚도 전부 갚은 오츠야는 점점 마성의 여인이 되어 가고, 신키치는 그런 그녀의 곁을 벗어나지 못하며 도망가자고 하지만 늘 오츠야의 후리기에 놀아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읽어 보면 대체로 이런 장면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주인공 여자들에게 점점 꼬여 들어가는 남자들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 답답하면서 그놈 참 잘 됐네,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기묘하다.

신키치는 오츠야의 후리기에 넘어가서 점점 더 오츠야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럴 때마다 오츠야는 자신의 몸을 안게 하며 후리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등에 있는 거미여인이 꼭 움직여서 신키치에게 독을 퍼트리는 것만 같다.

마지막에는 [그 당시로는] 충격적인 결말을 맺는다. 사무라이 영화가 아니라 칼부림이 요즘 보기에는 뭐야? 9세 아이들의 칼싸움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와카오 아야코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다. 하얀 살갗에 새겨진 거미여인의 문신과 오츠야의 색기에 넘어가는 남자들의 최후를 보시라.


https://www.youtube.com/watch?v=gb9DKq21r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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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얘기 해줄게. 예전 하루키 모교 기증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났었잖아. 하루키는 자신의 유산을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 몽땅 기증을 한다는 것이었는데. 먼저든 생각은 멋있다,였지.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서 공부만 바라보는 일본 사회와 배울 것이 없다는, 일본 축소판인 와세다 대학을 깎아내리면서도 실은 마음 깊은 곳에는 애정을 잔뜩 가지고 있었어. 필시 하루키는 자신처럼 범우주적이고 현실에서 약간 비켜가 있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채집보다는 감정의 터득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유보로 자신의 유산이 학생들에게 골고루 전달되리라는 생각을 했을 거야. 멋져 멋져 ㅋㅋ 멋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팬으로 이내 시무룩해졌어. 유산기증,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제 하루키도 소설을 고작 한 두편 정도 집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13년도에 몇 년 만에 장편소설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출판되었을 때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은 들썩였어. 다자키의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하루키는 없는데 하루키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었지.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같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패러디와 사람들은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하루키를 논하고 출판사에서는 하루키가 없는 하루키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의 소설을 이야기했지. 그 속에 나도 있었고 하루케스트인 스니들도 있었겠지.



다자키 이야기는 일본에서 1주일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발간된 4월 12일 도쿄 시부야 구에 있는 서점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는 그날 자정에 카운트다운 행사까지 열었지. 내용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 주문이 50만 부나 되었어. 소설 속에 흐르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 음반까지 덩달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국에 그럼 하루키만 한, 하루키만큼 좋아했던 소설가는 없었을까.

실은 무라카미 류도 있고,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도 한국이 좋아하는 작가들이었어. 하지만 왜 그런 지 13년, 그 즈음을 기점으로, 아니 조금 더 이전부터 신드롬의 주인공은 오직 하루키였지. 지금 현재 하루키를 제외한 신드롬을 일으키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어졌어. 

한국에는 하루키 이전의 신드롬을 밀란 쿤데라가 차지하고 있었어.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 테레자와 사랑은 그저 우연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토마시와 그 사이에 매력적인 사비나와 찌질한 남자 같은 프란츠는 지구에 있는 인간 유형을 전부 드러냈지. 사람들은 밀란 쿤데라의 3인칭 같은 1인칭적이며 작가의 화법이 등장하는 등, 소설의 작법을 이렇게 와그작 무너트린 그를 몹시 좋아했어. 그 자리를 조용히 비집고 하루키가 들어왔지.

사회운동의 시대가 저문 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하루키 붐이 불기 시작했어. 시대, 사회를 말하는 한국 소설보다 말보로와 싱글 몰트 위스키의 하루키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지. 


밀란 쿤데라를 읽으려면 니체의 영원회귀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알아야 했지만 하루키는 비틀즈, 레이먼드 카버 등 20세기의 것들로도 충분했지. 매력적일 수밖에.

야나첵과 베토벤, 리스트가 등장하지만 음악을 철학적으로 연결 짓는 어리석은 짓을 하루키는 하지 않았어. 그러면서 망가지지 않고 작가의 본분은 반복된 루틴이라는 명제하에 철저하게 정돈되고 질서를 유지한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했고 사람들에게 하루키는 매혹을 넘어 신드롬이었지.

그러나 신드롬이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야. 신형철은 하루키는 한국에서 문화적 현상에 한정해 하루키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효가 다 되었다고 말했는데.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데 요컨대 눈과 손이 가지 않음에도 이 신드롬 때문에, 모두가 읽으니까 할 수 없이 읽으며 감정을 소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어때? 스니들? 

그것은 영화 ‘조커’와도 비슷해. 조커처럼 우울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칭찬 일색인 그 영화를 봐야만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들과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거지.

중요한 건 하루키 팬들아 하루키 소설은 이제 고작 한 편? 두 편? 정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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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29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것도 하루키가 자식이 없으니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어쨌든 그 학교 특별히 문학부 다니는 사람은 자부심이 대단할 것 같습니다. 근데 하루키가 여전히 좋다면 아직 젊다는 거 아닌가 싶기도합니다. 하루키가 늙은 사람은 잘 등장시키지 않찮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도 나이들수록 하루키가 여간해서 잘 안 읽게 되더군요. 그래도 이 양반은 죽을 때까지 한 두권의 책이라도 계속 쓸거 같습니다. 그게 진짜 작가죠. 하루키가 진짜 난 사람은 난 사람이죠. 존경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교관 2024-08-29 11:38   좋아요 2 | URL
현재는 개관한 하루키 문학관을 보러 한국에서도 하루키스트들이 엄청 가고 있어요. 하루키의 소설, 세계관, 음악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아요. 하루키는 현재 도쿄 라디오에서 [무라카미 라디오] 디제이도 하고 있는데 청취률이 높고 사람들과 소통이 잘 되고 있어서 여전히 인기는 좋아요

stella.K 2024-08-29 11:42   좋아요 1 | URL
교관님도 조만간 가시겠네요. 하루키 문학관 찍은 사진 볼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