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 겸 요리 학원에서 요리를 가르치는 마츠오카는 요리 수업보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수강생을 접한다. 그 수강생은 필요이상으로 양파를 잘게 썰어버린다거나 검게 태운다거나, 전혀 요리에는 관심이 없고 마츠오카에게 차임벨 소리가 자꾸 들린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뇌는 반은 기계로 덮여 있고 반은 정상이라고 한다. 마츠오카는 알았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데 수강생은 증거를 보여준다며 칼을 들고 귀 밑 부분을 칼로 푹 찔러 넣는다. 그리고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그 뒤로 마츠오카 주위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아들은 밥을 먹다가 실없이 계속 웃는다. 아내는 밥을 먹다 말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서 캔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일 대 일 요리수업에서 생닭을 만지지 못하는 수강생이 시키는 대로 닭손질을 하지 않고 못하겠다고 한다.

마츠오카는 못 하겠지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자 수강생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며 닭을 던져 버리며 이상한 말을 한다. 그때 마츠오카는 칼을 들고 그 수강생의 등을 두 번 찌른다. 그리고 도망가는 수강생을 따라가서 계속 칼로 찌른다. 이 부분에서 기요시 감독의 특출한 연출이 드러난다.

부드럽고 잔인하면서도 무감정의 손놀림과 알 수 없는 통쾌함과 함께 공포를 느끼게 된다. 마츠오카는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서 누구도 없다는 것을 확신한 다음 시체를 끌어내고 태연하게 손에 난 상처에 대일밴드를 붙인다. 이후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40분짜리 중편 영화로 특유의 불편하고 음험한 분위기가 시종일관 이어진다. 큰 교집합에서 보자면 인간은 인간과 떨어져 살 수는 없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가 극에 달아있는 현대인들의 스트레스와 관음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에 누군가 침범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두운 공간과 음향 그리고 마츠오카의 표정만으로도 깊은 공포감을 주는 영화다. 현대인의 불안한 단면,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그 단면이 너무나 극단적이다. 인간이 최악이 되었을 때 주위에 널려 있는 날카롭고 뾰족한 것으로 누군가를 한 없이 찌르고 싶어 진다. 마지막 장면은 사쿠라 핀 집 앞을 보여주며 끝나는데 벚꽃이 이토록 절망적이고 무섭게 보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은유로 채워진 ‘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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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본 적 있어. 그 자리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데 한 동네가 철거촌이 되어서 한 2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지. 그래서 조깅을 하면서 오다가 흉가에 들어가 보고 싶은 거야.


코로나 전에 방학을 맞이해 삼촌에게 놀러 온 조카를 데리고 흉가체험이나 해줘야지 하며 데리고 갔어. 집이라는 게 사람의 손이 타지 않으면 녹색의 존재들이 점령을 해. 나는 전설이다,를 봐도 알겠지만 온 도시가 넝쿨화가 되는 거지. 게다가 동네에 사람들이 버린 음식을 먹고살던 길고양이들이 먹을 게 없어서 날카로워져서 낮에 가도 흉가가 아주 무서워.


그러나 정작 조카는 아이 재미있어하며 흉가를 둘러보았어. 안 무서워?라고 물으니 너무 재미있어,라고 하는 조카.


그렇게 어리바리 흉가체험이 영화 같지 않게 끝나고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그 옆집에 밤에 또 혼자 갔지.


그때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밤의 흉가는 스산해. 무엇보다 너무 컴컴하니까 그게 무서운 거지. 하지만 나는 귀신같은 건 그렇게 무섭지 않고 사람이 무서워서 여기에 누군가 나올까 봐 그게 무서웠는데 바람이 휘잉 부니까 나무에 하얀 사람이 저 나무로 쓱 움직이더라고.


그때 욕을 하며 뒤로 막 돌아서 바로 뛰어나왔어. 흉가는 한 집만 그런 게 아니라 동네 자체가 온통 흉가들이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어. 귀신을 처음 본 거야. 하얀 소복 그런 귀신. 진짜 등에서 털이 서는 느낌이 들었지.


그다음 날 해가 떠 있을 때 다시 한번 갔지. 내가 좀 짤막하게 얘기했지만 중간에 꿈, 악몽, 과로, 스트레스, 음주 이런 게 나오는데 생략했어. 그래서 낮에 다기 가 보니 나무에 큰 하얀 비닐이 걸려 있는 거야. 냉장고를 덮는 큰 하얀 비닐. 그게 바람이 세게 부니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갔는데 순간 그게 귀신으로 보였던 거지.


그래도 흉가에 가면 재미있어. 벌레도 많고 지렁이도 모여 있고, 냄새도 남다르고 무엇보다 평소에 볼 수 없는 풍경이니까. 날카로운 고양이들도 많으니까 폭염에 휴가 갈 곳 없으면 흉가에나 한 번 ㅋㅋ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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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 명이서 치킨을 먹으러 갔어. 근데 세 명 전부 닭다리를 뜯고 싶은데 닭다리는 두 개뿐이잖아. 그래서 두 마리를 시킬까 했는데 이미 1차를 한 상태라 맥주를 마시며 치킨을 먹을 요량이라 그냥 한 마리만 시켰어. 가위바위보로 닭다리를 결정했어. 그리고 치킨이 나왔어. 우리는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치킨을 먹었지. 그런데 우리 세 명은 전부 닭다리 하나씩 뜯고 있었어. 어때 무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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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고소공포가 있거든. 영화에서 주인공이 높은데 올라가도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고소공포가 있는데 예전에 남이섬 거기서 번지점프를 한 번 했었어. 일행이 번지점프 안 뛰면 죽어 버릴 테야! 는 거짓말이지만 하도 번지점프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뛰었는데 미치는 줄 알았지. 뛰는 건 잠깐인데 그전에 뭐 서명하고, 주머니에 있는 것들, 시계 뭐 그런 거 다 빼고 번지점프대에 올라가는 게 공포더라고. 근데 막상 뛰고 나면 금방 끝나. 두어 번 아래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찰나로 끝나지. 근데 다 뛰고 내려오니 나 오줌 쌌어. 어때 무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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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했던 어느 날 머리맡에 떠 놓은 물컵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잠들었어. 피곤해서 그런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잠들었지. 그런데 일어나 보니 물컵의 물이 좀 줄어든 것 같더라고. 나의 착각이려나 싶어서 다음 날에는 물 한 모금 마시고 그 눈금을 재어 놓고 잠들었지. 근데 아침에 물이 줄어들어 있는 거야. 집 안에는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고. 그래서 경찰에 신고해서 과학수사대까지 왔어. 막 이렇게 물컵을 조사하고 집안을 조사했지. 그리고 수사대가 그랬어. 괜찮습니다. 물컵에서는 아무런 지문도 채취되지 않았습니다. 뭐? 뭐라고? 어때 무섭지? 이 이야기는 유튜브에서 본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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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무서운 이야기야. 2024년도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는 얘기. 어때 무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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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뉴스를 접했을 때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체온이 측정이 되지 않을 저도로 온혈질환을 앓다가 사망을 했다. 에어컨을 설치하다가. 이건 분명히 뭔가 이상한 구조에서 탄생한 사고사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일을 하도로고 내버려 두었을까. 설령 아르바이트 청년이 손을 번쩍 들어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하더라도 일하는 곳에서 누구 하나 그 청년에게 조심 그리고 음료 같은 온열질환에 대응할 수 있는 당부를 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올해 이전의 여름보다 온열질환을 더 조심해야 한다. 온열질환에 걸리면 병원에 실려 가야 하는데 받아주는 병원이 예전 같지가 않아 졌다. 이상해졌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온열질환이 걸리지도 않겠지만 이들은 병원에서 바로바로 잘 받아 줄 것이다. 그러나 20대 에어컨 아르바이트 청년 같은 경우는 병원을 찾아서 가도 쉽지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대에 와 있다.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되었다. 하지만 잘못되었다고 쉽게 말을 할 수도 없다. 한 대표는 자리에 나와서 할 말을 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전에 할 말을 했다가 전부 입틀막을 당했다. 이럴 수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생계가 걸려 있어서 지금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 역사관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나서서 잘 못 되었다고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부는 한국은행에서 급전으로 90조를 당겨 썼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문제의 관심을 전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티브이에 출연한 김태효의 말도 안 되는 발언으로 모든 관심이 그곳으로 쏠리고 있다.


20대 청년은 푹푹 찌는 곳에서 에어컨 아르바이트를 하다 온열질환으로 쓰러졌다. 작업하는 곳의 온도가 얼마나 높은지 체온이 고온으로 측정불능상태였을까. 그저 어지러워 쓰러졌는데 3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기사들은 하나 같이 폭염에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결말로 끝을 맺었지만 아르바이트 청년이 온열질환으로 숨을 거둔 건 회사 내지는 사회의 구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재는 트럭기사들도 자신의 운행을 콘텐츠로 제작해서 유튜브로 올려 자본을 벌어들인다. 잘 생긴 사람과 예쁜 사람이 잘 놀기만 해도 그 영상을 유튜브로 올리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돈을 벌어들인다. 예전과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직업이 아니면 대체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도 ‘나’ 자체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돈을 모으는 능력이 된 시대다.


이론은 분명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풍족하게 생활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더 어려워졌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휴대폰을 들고 콘텐츠를 제작할 정도로 상상력을 밖으로 꺼낼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상상력이라는 게 너무나 협소하고 낮게 좁아서 결국 누군가가 했던 콘텐츠를 모방하게 되었다.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수는 없지만 20대 청년이 에어컨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폭염에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라가 자극적이고 흥한 것, 좋은 것들만 사람들이 보는 티브이나 유튜브로 보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호러블 하고 테러블한 이야기들이 널려 있다. 권력자들에 대해서 안 좋은 걸 안 좋다고 이야기를 하면 글이 사라지거나 불이익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무라카미 류의 [자살보다는 섹스]를 보면 일본은 8,90년대에 이미 이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깔렸다. 나라가 부추겼다. 그 결과 일본은 현재 혹독한 앓이를 하고 있다.


류가 뉴욕의 일본 음식점에서 아구찌개를 먹고 있는데 누군가 류를 알은 채 하면서 스포츠 신문 뭉치를 건네주었는데 신문 앞면 전체가 미야자와 리에와 스모 선수 다카하나다의 기사로 채워졌다. 일본의 모든 스포츠신문은 ‘전 국민이 축복’이라는 표제 기사가 실렸다.


과연 진짜 전 국민의 축복일까. 류는 생각했다. 당사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일이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가하고 평화롭다 보니(실은 한가하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뉴욕에 있다 보면 일본이 여러 면에서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들의 약혼을 과대 포장하며 무슨 행복의 전형인 양 만들어놓았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에 파견된 PKO 대원의 가족들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는 마음일 것이다. 막 실연 당한 여자도 내가 지금 그런 일에 눈을 돌릴 마음이냐 싶으리라.


그러나 밝은 내용의 기사에 굶주려 있는 일본에서는 어떤 종류의 전통적인 강제 행위가 존재한다. 슈퍼스타끼리의 결혼은 예전에도 없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한 것이 이미 80년대 말, 90년 대 초다.


행복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명해지는 것, 스타로 얼굴이 팔리는 것, 나름대로 돈이 들어오는 것, 유명인과 결혼하는 것, 결혼 그 자체, 이런 것들을 행복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고 했다.


지금은 더 그렇다. 현재 한국도 이혼 비중은 늘어났지만 결혼 비중은 줄어들었다. 결혼을 결코 행복의 목적에 집어넣지 않는다. 결혼을 했더라도 딩크 족으로 살아가는 부부가 많다. 사회는 복잡하고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것들이 인공지능을 앞세워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왔다. 인공지능이 무엇을 했다, 인공지능이 이런 기능이 생겼다 같은 기사는 앞다투어 내보낸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밝은 내용의 기준에 속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해 주리라 하는 레거시 미디어의 방향에 맞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청년들과 중년들은 점점 설 곳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문제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나 제작을 해서 방영을 할 뿐이다. 사람들은 외면한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즐기지만 마음에 두지는 않는다. 그들의 삶은 동떨어진 취급을 한다. 사람들이 클릭을 해서 보는 건 유튜브 쇼츠다. 짧고 강력한 자극이 있는 쇼츠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댓글도 열심히 단다. 나라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부추긴다.


그래야 나라가 잘못하는 일들에 대해서, 정부가 하는 못 미더운 프로그램에 대해서, 대통령 부부가 한 금품수수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한다. 도대체 어디에 쓰였는지? 부산엑스포에 들어간 그 천문학적인 돈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건 금기가 되었다. 누군가 자세하게 파헤쳐서 글을 올리면 대번에 제재가 들어올 것이다. 그러니 밝고 재미있는 쇼츠만 봐라. 하는 분위기가 전반에 깔렸다.


그러다 보니 소외된 사람들이 에어컨을 설치하다가 숨을 거두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직 태풍이 한두 개 더 올 텐데. 작년 힌남노에 불안했던 사람들은 또 그 불안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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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는 고통을 느낄까

예전에 낙지의 고통에 대해서 알아보니 낙지는 사람과 닮았다는 부분이 있고 척추동물과 연체동물은 약 5억 년 전에 같이 나타났는데 인간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해. 그래서 낙지 실험을 전 세계에서 많이 하거든. 유럽에서는 낙지를 실험할 때 꼭 마취를 하도록 연구 윤리 규정이 있다고 하지.

애니메이션 ‘파닥파닥’을 보다 보면 물고기의 고통에 대해서도 잘 나오는 거 같아. 고통이라는 건 우리 몸의 통감 세포가 고통을 인지하면 전기 신호가 발생하여 이것이 척추를 죽 따라 대뇌 신피질로 가서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이라고 해.

예전 한 신문의 칼럼을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 때문에 속이 타 들어가는데 생각 없는 시어머니는 싱싱한 회가 먹고 싶다고 채근한다. 동트지 않는 새벽 4시, 횟집에 들른 그녀 앞에 살점은 사라지고 뼈만 남은 채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어젯밤 주방장이 손님들 앞에서 솜씨를 부렸는데, 아직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 있으되 산 것이 아닌 삶. 그녀는 저 물고기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다]로 칼럼은 포문을 열어. 드라마에서 실제 장면으로 첫 장면을 그렇게 촬영을 했데. 며느리의 삶이 사실은 수족관에 갇혀 살이 발린 고통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 신세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지.

그런데 이런 장면은 독일에서는 절대 내보낼 수 없는 장면이라고 해, 독일에서는 물고기 역시 척추동물로 인정해서 비인간적인 학대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해서 물고기를 정당한 사유 없이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

낚시꾼들이 들고일어났다고 해. 물고기는 사람과 달리 대뇌 신피질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고 했지. 그걸 연구한 연구진은 진통제가 물고기에게 듣지 않는 것도 사람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어.

근데 독일 과학자들은 달랐어. 독일정부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물고기나 새우, 게, 바닷가재 등 사람들이 즐기는 해산물은 모두 구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를 잇따라 발표했어.

그해 초 영국 퀸스대 로버트 엘우드 교수 연구진은 ‘실험 생물학 저널(이런 잡지가 세상에 있다니)’에 [게와 새우 같은 갑각류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발표했지. 연구진은 게의 다리에 전선을 연결하고 두 동굴 중 한쪽에 들어갈 때만 전기 자극을 줬거든. 그러자 전기 자극을 받았던 동굴에 들어가는 횟수가 크게 줄었지. 심지어 전선이 달린 자기 다리를 잘라내고 도망가는 게도 있었지.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기억까지 한다는 말이야. 엘우드 교수는 갑각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통념 때문에 다른 동물이라면 결코 허용되지 못할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지.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는 과거 백인들은 흑인 노예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학대를 했다고 했어.

그 드라마의 뼈가 드러나서 수족관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장면은 그래픽으로 만든 영상이라고 해. 낙지의 고통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이 있는 것들은 대부분 고통을 감수하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인간도 마찬가지고.

낙지는 참 맛있지만 티브이 먹방 프로그램에서 살아있는 낙지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장면 정도는 빼버려도 상관없잖아. 그렇다고 산 낙지를 먹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산 낙지를 치킨이나 라면처럼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가끔 뉴스에서 길고양이 머리에 못을 박아서 죽였다거나, 친구집의 강아지를 죽으면서 그 모습을 즐긴 초등생들의 기사나, 동물을 학대해서 죽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정신이상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는 거야. 그런 모습은 어쩌면 권력이나 부를 거머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거나 생계를 위협해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 왜냐하면 인간만이 그러니까. 오직 인간이 나 아닌 생명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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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보다 더 재미있게 본 것 같다. 원작에서는 배우들의 정보를 모르니까 그냥저냥 재미있게 봤는데 한국 버전은 배우들을 아니까 오홋 하면서 보게 되었다.

공승연이 망가지니 웃음이 막 나온다. 공승연이 망가졌을 때 재미있었는데 망가짐이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다. 공승연이 핸섬가이즈 오퐈들을 보며 더 사납게 욕하고 난리 피웠어야 했는데 몹시 아쉽다.

클리셰 떡밥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았다. 신나 넣은 피티병이나, 기름이 줄줄 새는 걸 먼저 보여준다거나, 곡괭이가 떨어진다거나. 그러면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을 하면서도 그 무슨 일이 무시무시한데 코믹을 장착하고 있어서 재미있다.

고어적인 장면은 좀 더 고어적이게 넣었어도 좋았겠다 싶다. 하우스 오브 왁스에서 패리스 힐튼이 이 영화에서 정화가 죽는 것처럼 죽는데 지금 봐도 와우! 끔찍하면서 작살나게 죽는다. 정화는 가장 먼저 오컬트의 노예가 되었는데 친구에게 염소눈알 전염시킨 다음에 왜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이 웃음을 주는 게 아니라 두 주인공 외의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하게 한다. 아무래도 그렇게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이라 그게 가능했지 싶다. 박지환이 좀비로 깨어났을 때 그 기괴한 뒤틀림은 분명 웃음 포인트다. 나는 박지환의 좀비행동이 예전의 무한도전에서 일반인들이 나왔을 때 태권도하는 여성 대학생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팍 나왔다. 그때 무표정에 신데렐라 신데렐라 노래에 맞춰서 품새를 하는데 박지환이 좀비가 되어서 꼭 그러는 것 같았다 큭큭.

핸섬가이즈는 원작을 리메이크했지만 곡성과 범죄도시를 코믹하게 섞어 놓은 것 같은 영화다. 예전의 영화로 치면 총알탄 사나이와 무서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서 반가웠던 ‘핸섬가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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