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면은 수위가 있어 삭제했음요

 

 

 

 

 

시리즈 카니발 로우는 아마존의 판타지 드라마인데 주연은 올랜드 블룸과 카라 델레바인이다. 이 영화도 영국의 4개 대륙을 7개인가로 나뉘어 서로 잡아먹으려는 권력과 야망에 관한 이야기였던 왕좌의 게임처럼, 영국의 산업혁명 시대를 요정과 인간 외의 종족들의 모습이 판타지로 결함되면서 인간의 세계에 같이 살아가는 요정인 페이 종족과 늑대인간 같은 종족들이 서로 얽히면서 공화국과 연합의 전쟁이 치러지고 그 사이에서 주인공인 라이크로프트 필로스트레이드트(에이 이름 씨앙)과 비녯(짧은 이름인데도 씨앙)의 판타지 사랑이 섞인 이야기다

 

볼거리가 많고 요정이 나오고 늑대인간이 출몰하고 현대의 배경에서 완전히 벗어난 판타지라 아이들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몹시 잔인하고 몹시 야하고 몹시 난잡한 인간 세계를 보여준다. 캡처는 첫 사진 이후 몽땅 미성년불가사진이다. 비녯은 인간과 섹스를 할 때에는 날개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크로프트와 섹스를 할 때 날개가 빛난다. 그 이유는 보면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도 뭔가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아주 신비로웠다. 그간 많은 영화에서 날개를 단 여자들이 섹스를 해왔지만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이는 장면은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델레바인이 날개를 달고 공중을 날아가는 장면은 매 회 봐도 환상적이다. 슈퍼맨처럼 공중부유를 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신에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면 아마도 비녯처럼 날아가지 싶다. 슈퍼맨처럼 비행을 하기가 인간의 신체 상 좀 무리다. 델레바인은 영국의 모델이라 길죽길죽하다. 2017년 지미추 광고를 할 당시 델레바인은 사람들에게 쌍욕을 들어 먹었다

 

그 광고를 보면 지미추의 주 무기인 힐을 광고하는 것인데 남자들이 캣콜링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해서 델레바인은 욕을 들어 먹었다. 델레바인은 당시 누구더라? 하? 하? 거물 프로듀서인 하 머시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을 했는데 광고에서 캣콜링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델레바인은 영국인처럼 생겼다. 눈매가 푹 꺼져 들어가고 깡마르고 키는 길죽길죽한 것이 라라 플린보일이나 앰버하드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카라 델레바인의 언니도 배우이자 모델인데 키도 더 크고 더 길죽길죽한데, 킹스맨 골드서클에서 가장 늘씬하고 제일 섹시하게 나온 여자를 떠올리면 알게 된다. 델레바인 이 집안이 참 금수저 집안으로 유명하다. 언니인 포피 델레바인은 이미 유명백화점(라고 하니 좀 재밌네)의 퍼스널 쇼퍼 디렉터이고 아버지가 부동산 개발업자로 돈이 많데. 증조부는 정치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기레기들처럼 이들의 가장 최근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이 인스타그램이기에 외국도 이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진 하나가 올라오기를 늘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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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공부를 포기해버린 것이 이른 시기인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수학처럼 계산을 해야 하는 과목은 꽝이었다. 그렇다고 국어나 영어가 점수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미술처럼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것만 점수가 잘 나왔다. 하지만 미술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로 구색 맞추기 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도 술렁술렁 대충대충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군대에서 겨울 동안 훈련에서 열외하여 크리스마스카드 병으로 차출되어 죽어라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팔았다.

 

 

화학이나 자연과학 시간에는 줄곧 음악을 들었다.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고 왼팔로 귀를 괸 채 열렬하게 귓구멍으로 음악을 흡수했다. 가요보다는 팝을 주로 들었는데 가요를 들으면 가사에 심취해서 멍하게 창밖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걸릴 염려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팝을 늘 들었다. 닥치는 대로 팝을 들었다. 가난할 대로 가난한 집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듣고 싶은 음반은 나무라지 않고 사주었다.

 

 

손을 놓아버린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음악을 듣고 나면 찝찝한데 후련했다. 체기는 빠졌지만 잔존하는 미미한 이물감이 느껴지는 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왔다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인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역시 그 덕분인지 허구로 점철된 소설도 가끔 영차영차 하며 적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를 접하게 된 건 어쩌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무슨 책을 어디서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지처럼 보내던 나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매일 먹는 밥처럼 야금야금 들어왔다.

 

 

며칠 전 하루키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났다. 하루키는 자신의 유산을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 몽땅 기증을 한다는 것이다. 먼저든 생각은 멋있다,였다. 에세이를 통해서 공부만 바라보는 일본 사회와 배울 것이 없다는, 일본 축소판인 와세다 대학을 깎아내리면서도 실은 마음 깊은 곳에는 애정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필시 하루키는 자신처럼 범우주적이고 현실에서 약간 비켜가 있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채집보다는 감정의 터득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유보로 자신의 유산이 학생들에게 골고루 전달되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멋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유산기증,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제 하루키도 소설을 고작 한 두편 정도 집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년도에 몇 년 만에 장편소설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출판되었을 때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은 들썩였다. 다자키의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하루키는 없는데 하루키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었다.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같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패러디와 사람들은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하루키를 논하고 출판사에서는 하루키가 없는 하루키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의 소설을 이야기했다.

 

 

다자키 이야기는 일본에서 1주일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발간된 4월 12일 도쿄 시부야 구에 있는 서점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는 그날 자정에 카운트다운 행사까지 열었다. 내용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 주문이 50만 부나 되었다. 소설 속에 흐르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 음반까지 덩달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 그럼 하루키만 한, 하루키만큼 좋아했던 소설가는 없었을까.

 

 

실은 무라카미 류도 있고,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도 한국이 좋아하는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지 13년, 그 즈음을 기점으로, 아니 조금 더 이전부터 신드롬의 주인공은 오직 하루키였다. 지금 현재 하루키를 제외한 신드롬을 일으키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한국에는 하루키 이전의 신드롬을 밀란 쿤데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 테레자와 사랑은 그저 우연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토마시와 그 사이에 매력적인 사비나와 찌질한 남자 같은 프란츠는 지구에 있는 인간 유형을 전부 드러냈다. 사람들은 밀란 쿤데라의 3인칭 같은 1인칭적이며 작가의 화법이 등장하는 등, 소설의 작법을 이렇게 와그작 무너트린 그를 몹시 좋아했다. 그 자리를 조용히 비집고 하루키가 들어왔다.

 

 

사회운동의 시대가 저문 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하루키 붐이 불기 시작했다. 시대, 사회를 말하는 한국 소설보다 말보로와 싱글 몰트 위스키의 하루키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밀란 쿤데라를 읽으려면 니체의 영원회귀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알아야 했지만 하루키는 비틀즈, 레이먼드 카버 등 20세기의 것들로도 충분했다. 야나첵과 베토벤, 리스트가 등장하지만 음악을 철학적으로 연결 짓는 어리석은 짓을 하루키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망가지지 않고 작가의 본분은 반복된 루틴이라는 명제하에 철저하게 정돈되고 질서를 유지한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했고 사람들에게 하루키는 매혹을 넘어 신드롬이었다.

 

 

신드롬이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신형철은 하루키는 한국에서 문화적 현상에 한정해 하루키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효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데 요컨대 눈과 손이 가지 않음에도 이 신드롬 때문에, 모두가 읽으니까 할 수 없이 읽으며 감정을 소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영화 ‘조커’와도 비슷하다. 조커처럼 우울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칭찬 일색인 이 영화를 봐야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들과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하나레이 베이 속 사치는 아들을 잃고 그곳에서 텅 비어버린 공백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루키의 대부분 소설에서 주인공은 누군가를 잃는다. 나오코를 잃고, 키키를 잃고, 쥐를 잃고, 연상의 그녀를 잃고, 다자키는 친구들을 잃고, 엄마와 누나를 잃은 다무라 카프카 녀석, 멘시키는 아내를 잃고, 에이코를 잃은 토니타키는 생각한다, 들어온 만큼 뺐는데 원래의 구멍은 이전보다 더 커져 있다고. 그간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은 왜 그런지 읽고 있는 독자의 이야기 같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우리가 보통 느끼는 상실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이야기해 놓음으로써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텅 비어버린 이상한 공백과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돈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밝지만 우울한 미도리, 묘한 매력의 오시마와 사에키, 다자키의 사라, 스미레, 아오마메와 덴고, 아키가와 마리에 등 사람으로 인해 생겨버린 공백은 사람이로 메꿔야 한다고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소설 속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림 없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리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정작 하고 싶었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이야기는 못 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주인공 사치처럼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화면 속 사치를 따라서 가다보면 사치의 결락을 느끼게 되어서 울컥하다가 동시에 위로를 받는다. 슬픔이란 파도 같은 것이다. 준비되지 않는 모성으로 아들을 키우다 결국 아들을 잃어버린 상실을 깨달았을 때의 사치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한 번 보는 것도 좋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가 몇 편 안 된 줄 알았는데, 2004년 토니 타키타니를 시작으로 2007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로버트 로게발’, 2008년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해-톰 플린트’, 2010년에는 ‘빵가게 재습격-카를로스 쿠아론’이 영화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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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


일하는 건물에 뷰가 좋은 카페가 들어서서 오전에는 이 곳에서 흐르는 강을 보며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비현실적이며 논리에서 조금은 멀어진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아주 짧다. 강물과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구름은 하늘에서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다. 같은 구름은 없다. 그런 풍경에 절대적인 철학적 사고가 있지는 않다. 그저 자연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은 늘 ‘음, 그래’같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 시선을 향하고 있는 곳은 가을에 성큼 접어든 아프게 물든 야외의 모습이지만 어쩌면 나는 내 마음 속, 내면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늘 그런 훈련을 해왔다.


올해도 두 달 남짓 남는 동안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올해 이전의 해보다 조금은 덜 달렸다. 10일 정도를 쉬었다. 재작년에는 이틀을 빼고 몽땅 달린 걸 보면 확실히 올해는 여러 날을 빼먹었다. 300여일 중에 10일 달리지 못한 게 대수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도 매일 조금씩 달리는 사람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가 오면 달리지 않는 대신 우산을 쓰고 평소에 달리는 거리의 반 정도를 음악을 들으며 평소 걸음걸이 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달린다고 해도 하루키처럼 대단한 러너 식의 달리기도 아니고 긴 거리를 달리지도 않는다. 달리다가 힘들면 걷고, 강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고기를 낚아 올리면 잠시 서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부부를 구경하기도 한다.


조금씩 달린다고 해도 보통 1시간 30분 정도를 달린다. 딱히 정해 놓은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런 체제가 신체에 각인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달리는 마지막에는 늘 서서히 오르막이 있는 코스를 집어넣는다. 오르막은 대체로 1킬로미터나 2킬로미터다. 그 구간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데 그때는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그 고통이 힘들면서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은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매일 달리려면 시간이 날 때 달리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고 어떻든 시간을 내야한다. 그렇다면 매일 달리고 싶은 마음이 달리기 직전에 드는 것인가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다. 매일 달리기 싫은 마음이 달리기 직전까지 유혹한다. 백가지의 달리기 싫은 이유가 옷 끄댕이를 잡아당긴다. 달려야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 밖에 안 된다. 하루키의 말처럼 몇 가지 안 되는 그 이유가 한 인간이라는 형태를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달리는 것도 10년 정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나는 비극적인 체질을 타고 났다. 한 달을 잘 관리하다가 한 끼만 제대로 먹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신체는 그렇게 나를 배신했다. 비극적인 체질을 타고 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비극적인 내 체질을 타고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나 같은 게으른 인간에게도 일종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일정한 거리를 입 닥치고 조금씩,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밥을 먹고 매일 청소를 하고 매일 배설을 하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매일 달리는 것이 망가져 가는 신체를 조금이라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달리면서, 또 달리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쓴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며 알게 된 건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에 다가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의지 이외의 것도 필요하지만 오히려 의지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의지와 같은 것이 매일 달리는 것을 하면서 상관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더 알게 되었다.


매일 달리는 일이 꼭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달리는 것이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것일 테니. 회사처럼 상사와 할당량이 있어서 그것을 채워야 하는 일이 아닌 것에서 벗어나서 나의 의지로, 수많은 이유를 물리치고 최소한 이유를 가지고 나의 의지를 움직이게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매일 조금씩 할 수 있다면 덜불행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열심히 달렸다.


 

브런치에서 공모전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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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와 엘리의 이야기는 유일하게 원작과 영화와 리메이크 영화가 모두 성공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엘리는 오스카에게 잠시만 내가 되어 달라고 한다. 상대방이 한 번 되어 보라고 한다. 엘리는 생존을 위해서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몇백 년 전부터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도 무관한데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사람은 단지 뱀이니까, 바퀴벌레니까, 그들이 인간에게 어떤 유해한 것들을 퍼트리는지 생각하기 전에 그게 바로 너 니까, 너의 모습이니까 공격을 한다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면 어떤 사람은 다리만 만지고 거대한 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코를 만지고 큰 뱀이라고 한다. 코끼리를 코끼리로 인식하지 않고 분리하여 판단을 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아이가 친구들도 다 떠난 놀이터에서 혼자 신나게 놀고 있다. 혼자지만 아이는 따분해하지 않고 지루한 표정도 없다. 아이가 혼자서 놀다가 생각났다는 듯 벤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벤치에 앉아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봐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 눈물이 여러 날 나겠지만 그 한 사람 덕분에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 존버. 존나게 버티면 어떻든 주저 안지 않을 수 있다

 

예전에 쉬웠던 버티는 것이 요즘은 쉽지 않다. 은호의 말처럼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버티는 것에 틈이 보이면 절망은 어김없이 틈으로 침투한다. 매일이 고난이고 힘듦의 연속이기에 버티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를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힘든 하루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삶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다니 끔찍하지 않니. 어느 영화에서 대사였다.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고 깊게 느껴지면 버티는 것이 어렵다. 버틸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게 두렵고 겁이 난다. 그렇게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 번 웃음을 짓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레 짜듯 짜내야 했을 것이다. 더 이상 쥐어짜낼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하얀 세상을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낮과 밤이 하얀 세상으로 불멸하는 세계 속으로 말이다

 

심심하다는 말은 생활이 안전하다는 말이다. 심심하다는 건 무료하다는 것이고 무료하다 이런 느낌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심심한 것은 테러블 한 것에 집어넣는다. 그 말은 생활이 안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건 어쩌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사력을 다해 애쓰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엘리가 버틸 수 있는 건 자신을 바라봐 주는 오스카 덕분이다. 좋아하는 오스카가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루를 견디고 있다. 원작이 나오고 시간이 엄청 흐른 후 작가는 엘리가 오스카도 뱀파이어로 만들어서 불멸하는 결말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원작의 본문 중에 - 엘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을 눈꺼풀에 대고 누른다. 몸으로 느껴지는 근심처럼 엄습해오는 여명. 그는 속삭인다. “하느님, 하느님? 전 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죠? 왜 저는...” 전부터 수없이 거듭해왔다. 이 질문을.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왜냐면 넌 죽어야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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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아 여름이 벌써 갔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특히 올여름은 빠르게 시작하여 떠들썩할 것 같았는데 빠르게 끝이 났다. 개울에 발을 담그고 흘러가는 물이 발등에 닿는 느낌이 좋아 좀 더 바지를 걷고 개울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에게 불려 들어가 버린 아이의 마음과 비슷하다. 안타깝긴 하지만 딱히 격렬하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와서 발을 담그면 된다는 생각에 하루 이틀 미루다 보면 그만 개울에 발을 담그는 시기를 놓쳐버린다. 올여름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그간의 여름을 비교해봤을 때 참 짧은 것 같고 금방 지나가 버린 것 같다. 다행스러운 건 6월 내내 바닷가에서 조깅을 좀 한 다음 홀라당 벗고 태양볕을 받으며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좀 읽었었다. 올해 이전의 여름에는 보통 7월이 되어야 몸을 바짝 태웠는데 올해는 6월 내내 태웠다는 것으로 안도감을 가진다.

근래에 인스타그램에서 하루키를 많이 검색하고 있다. 최근에 일큐팔사를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은 것으로 일큐팔사를 6번 정도 읽은 것 같다. 머리가 나빠 읽고 나면 까먹고 다시 읽을 때마다 아아, 오오, 음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하얀 새것 같다. 사람들의 하루키 사랑은 유별나다. 가장 검색이 많이 되고 하루키의 소설 보다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역시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사람들은 소설책을 예쁘게 사진 찍을 줄 안다. 아주 묘하지만 사람들이 소설 책을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면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이미 전형적인 사진이 되어 버린 소설책 인증샷도 있다. 인스타그램이 만들어 낸 하나의 문화인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커피와 맥주와 더 잘 어울린다는 무언의 합의점 같은 것이 있는지 하루키의 소설책 옆에는 커피나 맥주(캔)가 곁들인 사진이 많다. 사진도 모두 잘 찍어서 소설책을 찍어 놓은 사진일 뿐인데 드라마틱 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루키에 대해서 재미있는 점 한 가지를 말하지만 보통 소설을 이야기 할 때 소설의 주인공이나 캐릭터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한다. 완득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완득이와 똥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완득이의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완득이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와득이의 이야기에 공감을 많이 했던 사람들은 완득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먼 놈의 가난이 쪽팔릴 여유가 있냐, 나중에 더 커봐라, 그것 때문에 쪽팔려 했다는 게 더 쪽팔릴 거다,라는 똥주의 대사를 말하면서 똥주의 캐릭터는 말이야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김영하의 소설을 이야기 할 때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도 병수는 어쩌고 말이야, 라고 이야기를 한다. ‘검은꽃’에서도 맥시코로 떠난 캐릭터들에 대해서 말을 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개츠비와 데이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천명관의 ‘고래’에서도 칼잡이와 캐릭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유독 하루키만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물을 많이 마셔라, 천천히 걸어라‘는 하루키가 한 말로 유명하다. 이 대사는 ‘1973년의 핀볼‘과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말인데 캐릭터보다는 하루키가 한 말로 우리는 기억한다. 그처럼 하루키는 하나의 어떤 명사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비관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작가가 캐릭터를 뛰어 넘었기 때문에 배수진을 치고 있는 하루키 라는 작가가 캐릭터 뒤에 가려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아서 코난 도일은 홈즈라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캐릭터에 먹혀 버려서 모든 명언 뒤에는 홈즈라는 이름이 붙을 뿐,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이름은 붙지 않는다.

하루키를 인스타그램에서 며칠 동안 검색을 해보니까 참 재미있었다. 그건 일반인들 뿐 아니라 기존 소설가들도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쏟아냈고, 글로 밥을 먹는 신문기자들 역시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는 시원하게 배설하듯 다양한 기사가 있었다. 무엇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일반 개개인이 짤막하게 나마 하루키에 대한 견해를 올려놨다. 그것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위의 드라마틱 하지 않은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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