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이라는 우울하고 불행한 모험이 지속되는 가운데 서도 그 불행을 잊게 만드는 행복 덩어리 써니의 활약을 보자. 써니는 일종의 전사, 우리 쪽의 비밀병기로 시즌 1의 갓난아기에서 벗어난 써니는 시즌 2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3에서는 3남매 중 가장 활약을 많이 한다는 느낌을 준다. 잠깐 볼까

 

운전을 하지 못하는 언니와 오빠를 위해 대형 트럭을 운전해서 올라프의 소굴에서 탈출한다. 저 작은 손으로 기어를 넣고(게다가 수동기어다) 클러치도 밟고 붕 5단으로 밟을 때 써니의 표정을 보라. 불행의 연속이지만 잊게 만든다

 

 

다음 장면은 써니가 꼬마 늑대 인간 차보로 변신했을 때다. 악의 무리들이 언니 오빠를 괴롭히려 할 때 써니가 차보로 변해 캬악 하며 덤벼드는데,,, 정말 너무 귀엽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에 나오는 남자들은 알라딘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대체로 바보거나 덜 떨어지거나 멍청하다. 올라프를 비롯해서 그의 졸병들도, 은행가인 포, 에피소드에 나오는 남자들은 전부 멍청하게 나온다. 대신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현명하고 용감하다. 우리나라 규방문화와도 흡사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바보 같은 악당들은 파시스트의 모습을 많이 보인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다오.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괴벨스의 이 파시스트적인 논리를 올라프가 보들레오 아이들의 재산을 뺏기 위해 매 회 에피소드마다 펼친다. 올라프의 파시즘에 착하고 정의롭지만 멍청한 어른들이 거기에 휩쓸린다. 그래서 아이들을 화형에 처하려고 하거나 사자 우리에 던지려고도 한다. 거짓 뉴스에 속아서 마녀사냥에 동참한다

 

파시즘에 젖은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신나게 사람을 죽인다. 늘 웃고 있어서 몰랐던 속은 썩어 문드러져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들고,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을 앞에 두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은 불면을 불러들이고 조그만 화면 속에서는 아직도 죽은 사람을 씹어대고 있다. 이 모든 게 한 문장에서 시작을 한다 그들은 변질된 공공성으로 그것이 마치 최고의 선이자 앎의 최선이라 여기고 한 문장으로 시작된 사람 죽이기는 무서울 정도로 꽃을 피운다

 

위험한 대결에서 저쪽 편이 힘을 가질 때는 우리 편은 속수무책으로 억울하게 당하거나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다. 반면에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저쪽 편은 정의를 부르짖으며 당당하게 그릇됨을 주장하고, 힘을 가진 우리 편은 저쪽 편의 부당함을 처리할 만큼 힘을 내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방법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편은 힘을 가지던, 힘을 가지지 못하던 늘 당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파시즘에 순수함으로 방어를 하는 사람이 바로 막내인 써니다. 시즌 3에서 써니는 본격적으로 적의 소굴에 남아서 스파이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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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잠을 몇 시간 못 자는 것 같다. 생각이 많으면 그렇다는데 딱히 생각이 많은 것도 아닌데 두 시간 정도 잠이 들었다가 뒤척이나 일어난다. 잠자리가 불편하면 그렇다고 하는데 일단 누우면 그대로 잠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길게 잠들지 못한다.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났다는 게 억울해서인지 물을 마시거나 요거트를 하나 마시고 다시 눕지만 그 덕에 화장실에 또 한 번 가게 된다. 하루는 거의 뜬 눈으로 보내고 다음 날 피곤에 피곤을 거듭하여 푹 자겠구나 싶어도 잠이 들면 두 시간도 못 되어서 일어난다. 일어나서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하지도 못한다. 눈이 아프고 몸이 무거워 그저 눈만 뻐끔 뜨고 고요 속에 몸을 파묻고 가만히 새벽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가만히 어둠 속의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글이 아닌 입으로 나오는 구어로 된 이야기를, 될 수 있으면 쓸데없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누구라도 좋다. 길거리의 노숙자도 좋고 강압적인 정치인도 상관없다. 그러고 나면 양수 속의 태아처럼 몸을 말고 쿨쿨 잠이 들것 같다. 이렇게 잠을 못 자는 건 필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식지 않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나는 어떤 구멍을 통해 그런 세계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근래에는 구름을 많이 찍는다. 하루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름이다. 구름은 사진가 스티글리츠가 간파한 것처럼 이퀴벨런트다. 매일 구름이 하늘에 떠 있지만 같은 구름은 없다. 늘 다르고 매일 다르고 언제나 다르다. 사람의 마음과 비슷하다. 잠이 안 올 때 구름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저 ‘구름’라는 형상이 떠오르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확고한 구름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구름을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그래야 한다. 구름을 눈으로 본다고 해서 딱히 하루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름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하루는 늘 비슷하다. 깨지기 쉽고 망가지기 쉬운 인간의 삶에 구름은 늘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늘에 떠 있으니,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열심히 볼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글을 좋아해서 인스타그램에서 주로 글에 관련된 피드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 보면 아아 작가도 아닌데 이렇게 글을 잘 적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게 된다. 어떤 면으로는 감격스럽고 감동이고 또 질투도 난다.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의 글이 있고, 마음을 교묘하게 숨기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의 글이 있다. 또 그들 대부분이 책을 많이 읽는다. 글을 잘 쓰는데 꼭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을 잘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었다.

 

 

한 달에 몇 권 정해놓고 전투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책을 매일 읽고 있지만 필사적으로 읽지는 않는다. 보통 세 권의 책을 내가 움직이는 활동 반경 내에 배치해놓고 읽는데 그 중 한 권은 여름부터 읽고 있는 책도 있다. 그건 아마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부터 시작하여 7분 정도 걸어서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읽어서 그럴 것이다. 대체로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경우는 없고 빠듯한 시간 속에 틈을 살짝 벌려 책을 좀 읽는다. 그러니까 복잡한 시스템은 단순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여름에 가장 많은 책을 읽는 것 같다. 아무래도 집 앞 바닷가에서 이른 오전에 홀라당 벗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내서 책을 보기 때문이다.

 

 

책은 참 좋지만 책이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책을 곁에 두고 있어서인지 책이 없으면 허전하다. 국물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면만 건져먹은 라면을 먹은 느낌일까. 라면은 짜게 먹어야 맛있는데 물을 이만큼 부어서 맹탕으로 먹은 느낌일까. 그 말은 평소에도 계획은 없다는 말이다. 내일 보다 오늘을 더 생각하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는가에 집중하고 더 중요하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이 지냈는데도 신기하게도 아직 대출이 없다. 대단한 성공보다 빚 없이 살고 있는 요즘의 내가 신기하다. 어쩌다 보니 살고 있는 집도, 그렇게 큰 평수의 아파트는 아니지만 가지게 되었다.

 

 

삶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지나고 나서 보니 계획은 크게 무의미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런 생각에 접어들면 마왕인 신해철을 소환하고 싶다. 그는 조금 살이 찐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제 행복해야 할까, 우리는 과연 행복을 언제 느껴야 할까

지금, 바로 지금이다

내일 행복하려고 오늘 비축한다? 일 년 뒤에 행복하겠다? 다 좆같은 말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일 년 뒤에도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개뿔도 없다

지금 당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해

 

 

까지만 기억이 난다. 물론 마왕이 대 놓고 좆같느니 어떻니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행복해야 내일도, 또 일 년 뒤에도 행복하다. 우리가 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덜 불행하다면 괜찮다. 덜 불행하게 사는 삶이 행복하지 않는 삶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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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냄새를 못 참고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빵 냄새는 허기를 불러들이고 따스함도 느끼게 해준다. 밥보다 근사하지도 않으면서 빵 하나에 근사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라는 김소연 시인의 말처럼. 빵 하나 먹는 시간은 금방 사라지지만 좋아하는 시간이다. 맬로가 체질에 그런 말이 나오던데 ‘사는 게 그런 건가? 좋았던 시간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조금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혹독하네. 혹. 독. 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지만 좋은 시간 약간을 만들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아’ 이 서럽고 강하고 유약하면서 바늘 같은 대사는 빵 하나 들고 먹는 내게 콱 와서 박힌다. 살만한 세상에서 살(내장지방) 만 가지고 살 수는 없는, 살만하지 못한 세상이 되어 버린 이 세상이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며 살찐다고 굶는, 이상하고도 기묘한 세계에서 미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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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태풍이 몰아쳐 초토화가 되었다. 엄청난 바람과 폭우에 문명이 속수무책으로 망가지고 부서지고 날아가고 사람들의 목숨이 끊어지거나 생사를 알 길이 없어졌다. 재난 앞에서 인간은 하찮은 먼지 같은 존재 밖에 안 된다

 

이 영화는 허리케인이 몰아쳐 재난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등장인물에게 잔인하게 군다. 인간이 지구에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재난 상황을 주인공 앞에 동시에 떨어트려 놓았다. 우주에서의 속수무책의 재난이었던 영화가 그래비티라면 지구에서의 재난에 재난의 재난으로 마지막 구석까지 몰리는 상황이 이 영화가 아닌가 싶다

 

허리케인이 북상하여 지상의 것들은 모두 날려버리고 지상 밑에서 부터는 점점 물이 차오른다. 제목인 ‘크롤’은 수영할 때 얼굴이 반은 물 밖, 반은 물 안으로 들어가 있는, 숨을 쉬는 상태를 말하는데 대형 태풍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들을 크롤 상태로 만든다. 정보 없이 본다면 많은 태풍 재난의 영화 중에 하나의 영화라고 생각하겠지만 영화는 이 속에 또 다른 재난, 또 다른 주인공인 악어를 풀어놨다

 

주인공에게 어드벤티지를 준다면 수영선수라는 점. 수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감과 용기 같은 것을 숨을 쉬며 흡수할 수 있다는 점 정도가 된다. 주인공 헤일리는 사이가 좋지 않은 아빠가 태풍이 북상 중인데도 집 안에서 나오지 않아 경찰의 만류를 뚫고 아빠를 찾아 집으로 가게 되고 지하실에 쓰러져 있는 아빠를 발견한다

 

집은 아빠인 데이브가 팔려고 했다가 추억이 많아서 그대로 두었고 헤일리는 수영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좌절해 버린 자괴감이 자신을 괴롭힌다. 자신 때문에 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온 헤일리는 아빠를 구해 주면서 용기를 낸다

 

정신을 잃은 아빠를 끌고 지하에서 올라오려는데 난데없이 악어가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온다.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대형 악어를 피해 다른 길로 가려는 헤일리 앞에 또 다른 악어가 등장하면서 악어가 한 마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영화는 주인공 헤일리와 데이브를 아주 혹독하고 혹독하게 구석 끝으로 내 몬다. 인간은 사실 절망 앞에 쉽게 무너질 것 같지만 절망과 일 대 일로 마주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절망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절망이 한꺼번에 닥치면 강인한 인간이라도 무릎을 꿇고 주저앉게 된다

 

허리케인 때문에 지하는 점점 물이 차오르고 집 밖에는 폭우와 거센 바람이 눈앞을 못 보게 만들고 물이 차오를수록 악어들은 유유히 인간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온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 악어가 사냥을 할때 머리를 물고 물 안으로 끌고가 빙빙 돌린다는데 그런 악어의 습성을 잘 표현했다

 

마지막에 캡처한 저 장면에서는 어어!! 하는 소리가 나올법하다. 저 장면에 긴장이 된다. 이 영화가 3시간 가까운 ‘그것 2’보다는 훨씬 심장이 오그라든다. 그것 2가 놀라게 하는 점프 스케어와 초현실적 공포라면 이 영화는 온통 긴장, 그것이다. 재난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헤일리와 데이브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 헤일리는 미국 재난 영화의 다른 주인공처럼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엑시트’처럼 재난에서 생존을 위해 빠져나가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집 안 지하에는 악어 두세 마리가, 집 밖에는 악어떼가 우글거린다. 어떤 이들이 슈퍼를 털다가 악어에게 무참히 물어 뜯기는 장면은 잘 만들었다고 본다

 

하지만 영화는 구멍이 많다. 아빠의 팔도 단번에 물어뜯어 버리고, 경찰의 몸은 능지처참 해버리는 악어가 헤일리의 팔과 다리와 몸통을 물었지만 앙 다물었다가 다시 뱉어내는, 악어들 세계에서는 해서는 안 될 대참사를 일으키고 만다. 그래서 헤일리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수영선수답게 헤엄을 치고 아빠를 구하고 마지막에 조명탄을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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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소군과 이교는 힘겹게 몇 겹에 걸쳐 입었던 옷을 더 힘겹게 벗어서 몸을 나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것에 실은 사랑은 없다. 소군과 이교는 외로웠던 것이다. 외로움에 몸서리 처질 정도로 처절하고 절박한 하루를 매일 보냈다. 두 사람에게 진실한 사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립되는 것에 겁이 났던 소군과 이교는 누가 먼저 라고 할 것 없이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면서도 이교 옆에 머무르고 싶었던 소군과 애인이 있는 그와 몸을 나누는 것에 오는 죄책감을 생각하기에는 벗어나고픈 외로움이 더 컸다. 잘 나오지 않는 수도와 겨우 들어오는 50촉 백열등과 한 사람 다리 뻗어 잘 수 있는 공간에서의 매일을 맞이하고 소멸하는 것에서 오는 공멸함과 우물 밑으로 떨어지는 결락감이 해서는 안 된다는 이성과 도덕 그 위에 있었다. 소군과 이교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이 지낸다. 황인숙 시인이 그랬지만 인생이란 고단하지 않으면 구차한 것이다. 두 사람은 구차해지지 않기 위해 절박한 고단함을 택했다. 무너질 듯하면서도 서로를 지탱해주는 건 앞에 있는 실체였다. 멀리 있는 내 사랑을 떠올리며 매일 구차해지기는 싫었던 소군과 여자들이 꺼려 하는 일을 하면서까지 손에 잡힐지 모를 그 무엇인가를 향해 구차해지지 않으려는 이교. 두 사람의 불륜적 사랑은 절박하면서 쓸쓸하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추악하고 아름다워서 애틋하고 눈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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