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이고 거대한 회사가 있어서 외국인 기술자들 때문에 외국인들이 가족단위로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100퍼센트라고 해도 될 만큼 전부 강아지들을 키우고 있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두 번 이상 강아지들을 산책시키는 거 같다.


여름의 쉬는 날에는 바닷가에서 고등어구이처럼 태양 밑에서 몸을 이리저리 태우며 소설을 읽곤 한다. 그러다가 몸이 스리랑카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타면 일행과 함께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와 샌드위치 같은 걸 먹는 걸 좋아한다. 날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외국인들도 많이 나와서 썬텐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몸이 뚱뚱하거나 맞는 수영복 따위가 없어도 별로 개의치 않고 썬텐을 즐긴다.


한 번은 그러고 있는데 저 앞에서 개의 목줄을 놓친 외국 여성이 개를 막 부르는 거다. 하지만 개는 이미 신났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모래에 몸을 비비고 하하하 완전 신났다. 개의 입장에서는 야호다. 저 멀리 보이는 모습을 보며 외국 여성이 개를 놓쳐서 고생을 하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개가 너무 신난 나머지 주인의 손을 벗어나 나에게 막 달려오는 거다.


그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는데. 어어 하는 찰나 개가 혀를 내밀고 나에게 달려와서 신나게 몸을 털었는데 모래가 마치 산탄총알처럼 파바다다다닥 책과 나의 얼굴과 일행의 몸 여기저기에 막 튀었고, 주인이 달려와서 난처해하기에 일행이 영어로 괜찮다고 막 말했는데, 개의 주인은 독일인이더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NS를 하다 보면


글을 읽으랬더니 글자를 읽는 난독증이 왜 이렇게나 많은지. 그런 사람 대부분이 내가 읽은 책 한 권이 전부야!라고 하는 것만 같다. 그 책 한 권이 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말을 한다. 문장이 있으면 단어만 읽고 말하지 말고 문맥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근데 글밥 좀 먹었다는 사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출판사와 나이 든 한 등단시인이 나에게 감동적인 소설을 써라고 했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감동적인 소설은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거 읽으면 되는데 왜 굳이 감동과 거리가 먼 소설을 쓰는 나까지 감동적인 소설을 써야 하는가, 감동적인 소설을 원하면 세상에 나와 있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으면 된다. 그걸로 부족한가? 무엇보다 소설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데 감동이 없으면 좀 어때? 감동을 꼭 소설에서만 느껴야 하나? 감동은 주위에 실제로 널려있다. 만화에도 있고, 길거리 고양이에도 감동이 있다. 그걸 캐치하는 사람이 있고 캐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며 나와서 다시는 그 시인을 보지 않았다. 그때 예예 하며 잘 비볐으면 나는 좀 달라졌을까. 김영하 소설을 좋아해서 대부분 읽었는데 김영하 소설에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김영하 소설은 그냥 재미있었다. 읽는데 막힘없이 술술 읽혀서 좋았다. 하루키도 그렇다. 하루키 소설 속 상상의 세계가 재미있고 좋은 거지 감동을 받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경을 건드리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에서 감동을 받았다. 또 인문학 책이었던 메리 로치의 [인체 재활용]에서 아 하며 감동을 받았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걸 죽은 사람, 시체가 그걸 해내고 있었다. 요컨대 자동차 연구에 마네킹이 아닌 시체가 자동차의 엄청난 충돌, 추락에 의한 충격을 어떻게 받는지 해내고 있었다. 방탄복 연구에도 시체가 그 일을 해내고 있었고, 비행기의 추락에서도 시체가 산 사람 대신 그 역할을 해내는데 감동을 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이 찌는 건 자칫 방심하면 금방이다. 매일 조깅을 하고 매끼 식단을 조절해 가며 지내지만, 이렇게 지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한 순간 눈을 돌리면 살은 찌고 만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살은 더 쉽게 찌고, 근육 유지는 더 어렵게 된다. 그래서 운동도 고강도 운동을 더 해줘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게 쉽지 만은 않다.


지금 시대에 살을 빼는 건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시대다. 호르몬 불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는 15년 전에 입었던 옷을 아직 입고 있는데 그렇게 유지하는 게 눈물겨울 만큼 노력을 한다. 국물 음식은 거의 먹지 않으려 하고, 짜고 매운 음식도 잘 먹지 않는다. 좋아해서 매일 먹는 음식에 두부, 생양파, 피망이 있다. 그리고 아몬드 같은 견과류를 매일 몇 개씩 먹는다.


살이 찌는 건 우 리모두의 숙제다. 내가 비슷한 몸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동안 나를 따라서 조깅을 했던 몇몇이 있었다. 대부분 체중이 많이 불어서 뚱뚱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 달을 꾸준하게 하지도 못하고 전부 다 떨어져 나갔다. 조깅으로 살을 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몸이 무거운데 달리기를 하면 당연하지만 다리에 부하가 걸리고 무릎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 조깅은 살을 어느 정도 뺀 다음에 그걸 유지하기 위해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공복에 조깅을 하는데 살을 빼려고 따라왔던 사람들은 저녁밥을 먹고 나왔다. 당연하지만 조깅을 하고 나면 소화가 되고 다시 허기가 진다. 집에 가서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한다. 그러면 배달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반복을 거치면 조깅을 꾸준하게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 살이 더 찌는 것이다. 조깅으로 살을 빼는 건 무리다.라고 생각한다. 살을 뺀 다음에 조깅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살을 빼려면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조절해야 한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주위의 살이 찐 사람들의 특징은 배달음식을 자주 시켜 먹는다.


나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지 않는다. 배달어플도 없다. 음식 앞에 앉았을 때 신체는 주인에게 안 돼, 더 이상 먹지 않아도 충분해,라고 하지만 뇌가 빨리 먹으라고 서번트를 흘려보낸다. 뇌의 어느 구간에서 도파민 같은 물질을 뿜어낸다. 그러면 억제가 불가능하면서 음식을 먹게 된다. 배달음식, 열량이 너무 높고 초고칼로리 음식이다. 맛을 내야 하기 때문에 소스범벅인데 이 세계에 빠지게 되면 의지만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의지만 가지고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사십 대가 넘어가면 먹는 건 더 줄이고, 운동은 더 많이 해야 한다. 배달음식에서 멀어져야 하고 배부르게 먹지 않고 배고픈 걸 잊을 정도로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이 찌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살을 뺀다고 해도. 다이어트에 성공을 했다고 해서 20대처럼 허리가 날씬하고 근육이 탄탄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저 옷을 입었을 때 보기 좋을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만족감을 주욱 끌고 가야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이 움직이고, 더 적게 먹고 운동을 고강도로 자주 해줘야 한다. 그렇게 살기 싫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냐. 나는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여름에 맥주 시원하게 많이 마실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대신에 찐 살 때문에 불만이나 불편함을 내 앞에서 토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잘 보지는 못한다. 자연사를 하던 사고사를 당하던 사람은 다 죽는다. 전부 병원에서 죽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은 사람들 중 대다수는 집에서 눈을 감았다. 집에서 각자 죽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 죽은 집을 사거나 그 집에서 사는 걸 꺼려한다. 하지만 지금 잠을 자는 그 집이 실은 어쩌면 누군가 이전에 그 방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방 한구석에서 사람들은 죽어갔다. 가족이라면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묻겠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죽은 사람의 방에서 잠이 든다는 건 조금 꺼림칙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 이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었다. 그래서 집이 싸게 팔렸다. 같은 설정이 많다. 그렇다면 병원은 어떨까. 병원의 병실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은 아주 많다. 누군가 병실에 누워있다면 그 병실의 침대에서 누군가 이전에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원의 특색이 있어서 그 사실을 알 수도 없고, 환자는 알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병원 측에서 그런 일을 발설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누군가 죽었데?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힌다.


배달 피자는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배달피자는 비만의 원인이 된다. 여러 원인을 불러일으키는 배달음식이 많지만 내 주위에서 다른 배달 음식보다 배달피자를 시켜 먹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피자는 말 그대로 맛있다. 달고 짠맛이 적절하게 피자 속에 다 들어 있어서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너무 맛있는 것이다. 너무 맛있다는 건 맛이 너무 난다는 말이다. 맛이 너무 나는 건 피자 고유의 맛이라는 건 없다는 말이다. 정제 탄수화물의 맛에 전부 많은 양념의 맛이다. 살이 찌는 것이 사회문제에 돌입하게 되면 이런 정제 탄수화물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배달피자는 사람들에게서 외면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 같은 서민층에서 먹기 때문이다. 두 명 정도가 배달피자 한 판으로 한 끼 정도는 때울 수 있으니 서민층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민층에서 비만인들은 어릴 때부터 더 많이 나타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질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었을 때 정부가 개입을 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배달피자라고 해도 소상공인 중소기업 규모의 배달피자는 미래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대기업의 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할리우드 스타인 벤 에플릭이 던킨 도넛의 광팬이며 집에서 쉬는 동안 피자를 먹기 때문에 이 소식이 파파라치나 매체를 통해 퍼지게 되면 광고효과가 엄청날뿐더러 건강에 신경을 무척이나 쓰는 할리우드 스타들도 저 피자를 먹는군, 던킨 도넛을 먹는단 말이야,라며 사람들이 찾게 된다. 두 이야기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서 적은 건 아니다. 우리는 늘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 확신에 찬 사실이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붕괴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에 집 밥이 건강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매인 음식이 스트레스를 날려준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유튜브 먹방에서 매운 음식이 스트레스를 날려 준다며 맛있게 먹는 모습에 혹해서 먹어봐야 손해다. 그러니까 살을 빼고자 하는 사람이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매운 음식을 먹는 건 너무 안 좋은 것이다. 집 밥에서 벗어나야 한다. 집 탑 타령하는 노래, 드라마, 영상은 끊어야 한다면 끊는 게 좋다. 그놈의 집 밥, 집 밥은 전혀 건강하지 않다. 어머니의 손맛은 살이 찌기만 할 뿐이다.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푸짐하고 맛있게 음식을 만들지만 이제 어머니들도 그런 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간단하게 차리고, 배부르지 않게 먹는 습관이 서로에게 좋다. 덜 차리고 설거지 거리가 없고, 무엇보다 건강하다. 찌개 끓이고, 탕, 국 만들고, 지지고 볶은 반찬에 구운 고기에 쌀밥 한두 그릇씩은 요즘 시대에 전혀 건강하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시리즈는 1편이 제일 재미있었다. 거기서 벌레들이 군대 장갑차의 철판은 뜯지 못했다. 이 정도의 벌레들에게 지구인들이 망한다는 게 너무 말이 안 되는 거지. 물론 영화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외계 벌레들이 대책 없고, 작전 같은 거 없이 그저 지구를 침공하는 이야기는 너무 이상하다.


은하철도 999, 야마토, 하록선장을 만든 마츠모로 레이지가 예전에 슈퍼로봇 단가드 제작을 부탁받았을 때 이렇게 큰 로봇을 사람이 자판 같은 조종석에서 사람처럼 움직이게 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무리 만화지만 그런 식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스폰서인 장난감 회사가 막 머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초반에 조종사가 되는 과정과 거대한 로봇에 올라타는 그 어려움을 만화에 녹여내서 욕만 잔뜩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맞는 거 아닌가 싶다.


꿈도 희망도 없었던 전설거인 이데온의 감독 토미노는 전쟁이 나면 아이도, 여자도 다 죽는다. 총알이나 미사일이 어린이나 여성을 피해 가지 않기 때문에 만화라도 정확하게 표현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벌레들이 지구침공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고민을 해야 한다.


지구가 생겨나고 지금까지 전쟁이 끊어진 적이 없이 꾸준하게 하고 있는, 전쟁광이 인간이라는 종족이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빠르게 말살시킬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공포와 고통을 줄 수 있는지, 몇 백 년 아니 몇 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연구와 훈련을 하고 있는 종족이 인간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 외 여러 분쟁지역의 전쟁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시시때때로 한미군사훈련을 해서 북한이 바들바들한다. 팀스피리트를 처음 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인데 그때 김정일이 난리 난리 개 난리였다. 각 나라의 군인들은 전쟁이 터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나면 자국을 위해, 자국민을 위해 모두 다 쓸어버리겠다 같은 다짐 그 위의 욕망 내지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외계 벌레들이 대책 없이 지구를 침공하러 온다면 지구방위대에 전부 전멸(반이 사라지는), 궤멸(70% 이상)을 거쳐 소멸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콰이어트 플레이스 같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벌레들은 대기권을 통과하는 순간 미사일과 고성능 전투기 편대에 의해 훈련받은 대로 소멸시킨다. 그 벌레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기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


설령 첫째 날처럼 지상으로 온다고 해도, 인간들은 개개인적으로 전쟁 내지는 결투, 싸움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았다. 요즘 권아솔 유튜브에서 보여주는 한일전 길거리 격투기를 보면 얻어터지는 한이 있어도, 맞아 죽더라도 상대방에게 달려든다. 그 기세가 무섭다. 얼굴의 만이 곤죽이 되어서 피가 낭자해도, 잘 걷지 못해도 달려든다. 그럴수록 전투력은 더 달아오른다. 인간이 나약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시선을 돌려 유럽이나 미국 쪽으로 가면 개개인이 결투를 하고 싶어서 미쳐있다.


유튜브를 보면 치고받고 싸우지 않더라고 패미 반패미 싸우지, 레카들 싸우지, 전부 머리를 굴려 자기편을 만들어서 교묘하게 잘 도 싸운다. 하루도 빠짐없이 인간은 전쟁 중이다. 가족끼리도 싸우고, 건물주와 세입자가 싸운다. 사랑마저 전쟁 같은 사랑이다. 온통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벌레들이, 그것도 보지도 못하는 벌레들이 아무런 대책과 계획 없이 지구에 우르르 떨어진다 한들 인류가 타격은 입겠으나 그렇게 확 멸망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대 놓고 지구침공 영화를 만들 때에는 감독이 좀 더 고민을 해줬으면 한다. 고민이 힘들면 스폰을 왕창 받아서 두 시간 내내 터지고 찢고 박살 나고 날아가고 갈라지는 영상으로 채우든지. 그놈의 피자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트란 안 홍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린 파파야 향기, 씨클로,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상실의 시대까지 전부 재미있게 봤다.


그의 영화에는 그의 아내인 트란 누 엔케가 주인공으로 자주 나온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스무 살 무이는 그야말로 그림 속에서나 있을 법한 모습이어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씨클로에서는 나의 온 마음을 전부 끈적끈적 함으로 채웠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축축하고 남루한데 그게 너무 아름다웠다. 시인 양조위는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을 시키고 여자는 시인의 순수한 사랑 때문에 매춘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게 그 당시에 너무 충격이면서 아름다웠다. 여기서도 감독의 아내 트란 누 엔케가 너무나 아름답게 나온다.


이병헌이 나온 영화 중에 이병헌이 악역으로 가장 무섭게 보였던 영화가 트란 안 홍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였다. 이병헌이 정말 무시무시하게 나왔다. 사람들은 똥망이라지만 나는 몇 번이나 볼 정도로 좋았다. 여기에서도 트란 누 엔케는 너무나 신비하게 나왔다. 상실의 시대도 좋았지.


그리고 이번 영화 ‘프렌치 수프’ 너무나 좋았다. 영화의 모든 대사가 소설 같아서 좋았고, 20년 넘게 한 여인과 요리를 대하는 그 태도가 좋았고, 우리 인생에 나처럼 모든 순간이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는 외제니가 좋았고, 악역이 없어서 좋았고, 사랑을 표현함에 서투르지만 잘하는 요리에 녹아내서 좋았고, 모든 요리에 설탕을 사용하지 않아 좋았고, 특별함이 아닌 무심하게 요리하는 모습이 나의 어머니의 모습 같아서 좋았고, 신은 물을 만들었고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는 대사가 좋았다.


나는 여름이 좋아요, 아직도 한여름 같은데. 난 떠날 때도 여름일 거예요.


줄리엣 비노쉬가 이렇게 아름답고 예쁘게 보였던 영화가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폭염의 여름을 내가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가지고 있는 것을 열망하는 것을 보여 준, 요리 그 속을 벌리면 그 안에 사랑이 요렇게 몸을 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프렌치 수프’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kpio99 2024-08-11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영화 커뮤니티에 올리셔도 되겠어요.

교관 2024-08-12 17:03   좋아요 0 | URL
과찬이세요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