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리 미노그의 특징이라면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 같은 투명한 목소리에 있다. 배우로도 인기가 있었던 카일리 미노그는 88년에 같은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제이슨 도노반과 듀엣 곡 ‘이스페셜리 포 유’를 불러 더 많은 인기를 얻는다. 이 노래는 일본의 여성 듀엣 윙크가 리메이크해서 아시아 쪽에서는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카일리 미노그의 첫 앨범 ‘카일리’ 앨범을 구입했을 때가 생각나는데, 중학교 1학년 겨울이 되었을 때 집에 서울서 고모와 사촌 형이 잠시 들렀다. 사촌 형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사줄게 뭐 갖고 싶어?라고 물어서 대뜸 카일리 미노그요, 해서 레코드 가게에 가서 집어 온 기억이 있다.

 

사촌 형은 음악에 대해서 굉장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음반의 앨범을 구입하는 게 좋다, 서울음반에서 녹음한 음악이나 수입한 음악이 음악 적으로 풍부한 음을 낸다,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다른 회사의 앨범과 비교해서 들어보면 아직도 음이 깨지지 않고 괜찮구나, 같은 생각이 든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슬슬 음악감상실에 출입을 하게 되고 거기서 카일리 미노그를 듣게 되었는데 사촌 형을 데리고 음악감상실에 갔더니 이런 어촌에도 이렇게 멋진 음악 감상실이 있다며 신기해하던 기억도 있다. 학창시절에 유리창을 박살 낼 것 같은 시끄럽고 고출력의 강력한 메탈을 듣는 가운데서도 그 중심을 잡아준 몇 개의 음악이 있었다.

 

카펜터즈가 그랬고 아바가 그랬고 카일리 미노그가 그랬다. 이렇게 신나게 노래를 부를 수가 있나, 할 정도로 카일리 미노그의 노래는 그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로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테이프를 펼치면 앞면에는 가사와 함께 뒷면에는 카일리 미노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빼곡한 그 글을 유심히 읽고 학교에 가서 거짓말을 보태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소위 음악을 하는 이이들과 음악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모여들어서 그래서? 그런데?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카일리 미노그는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를 지치지 않고 열정을 더 가지게 하는 건 아무래도 암을 이겨내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뀐 삶 때문일 것이다. 이후 반짝이고 예쁘기만 했던 카일리 미노그는 암 투병 환자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Crystallize라는 암 투병 환자를 위한 곡을 만들어 수익금 모두를 기부하기도 한다. 이제 한국의 카일이 미노그 팬들은 그녀를 민옥 이모라고 부른다.

 

이 먼 곳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노래를 들어주며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인간의 어떤 알 수 없는, 설명 불가능한 텔레파시 같은 것들이 모여서 그녀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고 죽 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민옥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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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자연적으로 하루키 에세이가 떠오르고, 하루키 에세이를 보면 연쇄적으로 대학교 1학년 여름이 떠오른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이 우리 삶을 가까스로 유지시켜 준다고 하루키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름방학에는 카메라를 하나 들고 가방에 팬티 두 장과 메탈리카 반팔 티셔츠와 하루키 에세이 한 권을 넣고 동해를 타고 하루는 포항의 청하에서, 하루는 영덕에서 하루는 울진에서 하루는 강릉에서 그렇게 며칠씩 태백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다가 서울로 가서 백남준 아트전을 보고 오는 것이다.

 

그때는 하루키에 빠져 있었고 백남준 비디오 아트를 보는 것이 나의 어떤 정신적 고갈을 막아주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집 떠나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어디 멀리 떠나가도 집에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버스를 타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서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담고 지치면 그늘막에 앉아서 빵을 씹어 먹으며 맥주를 홀짝이며 하루키 에세이를 읽었다.

 

이틀째인가 삼 일째인가 강릉 어디쯤에서 지치고 무더운 가운데 그늘에서 잠시 졸았는데 일어나 보니 에세이 빼고는 전부 도둑을 맞았다. 다행히 주머니에 넣어둔 돈은 가져가지 못했기에 그 돈으로 버스를 타고 태백까지 올라갔다. 돈이 없어 아침에 사 놓은 바게트가 고작 저녁이 되었는데 책상처럼 딱딱해서 놀랐고 그것을 잘 씹어서 먹으니 맛있어서 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위기의식 같은 것이 없었다. 그저 될 대로 되라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같잖은 것 같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도 좀 남아 있어서 지금까지 지내면서 사진 전시회도 몇 번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호오 하며 고생고생하면서 전시회 했었지,라고 기억하게 된다.

 

태양 볕에 타서 새카맣고 고픈 배를 움켜잡고 마를 대로 말라서 어딘가에 앉아서 하루키를 읽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벽돌 옮겨 볼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심해에 사는 거대 해양생물 같은 풍채를 자랑하는 아저씨였다. 소규모 벽돌공장을 하는데 일하는 사람 한 명이 없어져서 나의 몰골을 보더니 척 알아봤다며 일을 해보라는 것이다.

 

열심히 벽돌을 날랐다. 잠자리도 제공되었다. 완전 거지 같은 몰골이었는데 빨래도 할 수 있었다. 이틀 일을 하고 저녁에 공장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서 먹는데 먹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처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났다.

 

그때 지치지 않고 늘 어딘가에서 하루키를 읽었다. 그때 하루키에게서 받은 느낌은, 그 책을 읽기 위한 좋은 장소보다는 어디서든 앉아서 읽으면 책 읽기에 좋은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책을 가장 집중해서 많이 읽었던 때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그 복도의 벤치에서였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책을 읽으며 큭큭 하며 웃기도 했다.

 

하루키도 책을 읽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1968년 4월 그 휑한 방에 있던 딱딱한 메트리스 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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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다. 너바나는 정말 기존의 음악을 박살 내 버렸다. 너바나가 등장 함으로 10년 가까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마이클 잭슨의 아성이 무너졌다. 엄청난 무대가 팬과 스타의 경계를 확실히 했고 스타의 의상은 일반인들이 우러러 봐야만 했던, 굉장한 군무와 고출력 음장기기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음악, 그러니까 기성세대 기득층의 음악을 그대로 해체시켜 버린 밴드가 너바나가 아닐까 싶다.

 

커트 코베인은 정말 불운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그것도 짧게, 고뇌와 통증을 극심하게 앓다가 살다 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커트의 어린 시절은 아주 암담했다. 검색하면 많이 나오니 궁금하면 찾아보기 바람. 엄마가 19살에 커트를 낳게 된다. 커트 코베인은 9살에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이혼을 한다. 9살짜리 커트는 그때부터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생활하게 된다. 커트의 곁을 지켜 줬던 건 기타뿐이었다.

 

87년 머리가 긴 커트 코베인과 베이스의 크리스 노보셀릭이 우리도 이제 밴드를, 하면서 너바나가 만들어졌는데 커트 코베인은 밴드 이름을 당시 약이나, 본드, 권총, 박살 같은 저속하고 강한 닉 네임 말고 무정부주의적인 아름답고 세속적이지 않는 닉 네임으로 하고 싶어서 ‘열반’이라는 의미가 있는 너바나로 하게 된다. 열반은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88년 서브팝이라는 음반회사에서 첫 싱글을 발매하게 된다. 브리치라는 노래가 예상외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면서 언더에서 너바나는 확고한 자신들의 자리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실력에 비해서 서브팝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소닉유스(역시 대단한 밴드죠)의 권유로 개팬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맺게 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음악은 예술이라도 음반은 산업이기에 음반사를 잘 만나야 했다. 비치 보이스도 비틀스도 본 조비도 다 그렇게 개고생을 해서 음반사를 제대로 찾았기에 그들의 음악이 세계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음반사를 잘못 만나면 그대로 쫑 나기 십상이다. 요컨대 슈가맨의 로드리게스가 그렇다.

 

부치 빅이라는 대단한 프로듀서와 작업을 하면서 내놓은 앨범이 바로 ‘네버마인드’였다.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들어있는 악마의 앨범. 개팬레코드사는 소닉유스가 내는 앨범의 25만 장 정도의 수준으로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앨범도 그 정도 팔릴 것이라 예측했다. 처음에는 개팬의 예상대로 빌보드 144위 정도로 출발했는데 처음 찍어낸 5만 장이 순삭해버리고 이 악마의 노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엠티비에서 매일매일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바나의 그 흐느적 강한 미친 악마의 노래가 계속 남으면서 인기가 폭발적이 된다. 그러다가 92년도에 500만 장이 팔려 나가게 된다.

 

그해 커트는 코트니 러브와 결혼을 하게 된다. 코트니 러브가 누구인가. 홀의 리드 보컬이다. 홀은 ‘셀러브리티 스킨’으로 대단한 인가를 누린다. 일단 한 번 듣고 오자. 자 듣고 왔다. 코트니 러브는 홀에서 기타를 울러매고 헝클어진 머리와 붉은 립스틱, 모호한 눈으로 떠돌이 같은 이미지였다. 제니스 조플린처럼 말이다. 거의 짧은 치마의 원피스를 입고 기타를 울러매고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는데 팬티가 보이든 말든 이었다.

 

커트는 그런 코트니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서 깊은 행복감에 젖는 듯 보인다. 그리고 코트는 93년에 인 유트로 앨범을 발매하는데 또 정상에 오른다. 커트는 네버마인드로 너무 유명해져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우울증과 정서적인 불안으로 약을 하고 또 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약을 했다. 유 인트로 앨범은 그런 커트의 망가진 정신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앨범이었다.

 

이후 미국 투어를 다니며 엠티비에 자주 나오게 되었다. 엠티비는 미국에서 톱클래스, 주류 음악을 하는 음악인들이 나오는 것인데 커트는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에 대한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약을 하다 헤로인에 빠져들게 되고 세계 투어 중 로마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고 만다. 이후 헤로인을 치료하는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탈출해 시애틀의 집으로 와서 94년 4월 8일 자신의 집에서 권총 자살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아직까지 커트의 죽음을 두고 미스터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권총에는 지문이 없고 유서의 필체가 커트의 것과 다르고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문이 사람들에게 돌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는 아내인 코트니 러브가 있다는 설이 있다.

 

커트 코베인은 왜 주류에 들어가기를 극심하게 싫어했을까. 60년대부터 불던 부모 세대에게서 저항을 느낀 이들이 일명 부모 세대, 전쟁세대에게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창고 같은 데서 지내면서 자기들의 생활은 자기들이 알아서 책임지겠다며 나오는 세대가 생겼다. 그것이 뉴 제너레이션 세대인데 그 중에는 스티브 잡스도 그랬다.

 

커트 코베인 역시 친척 집을 떠돌면서 물질만을 쫓는 부모 세대들에게서 미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창고 같은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그러니까 이전 세대를 비판하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은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로 가는 것이다.

 

부모 세대처럼 살면 안 된다 이전 세대, 물질을 찬양하고 쫓는 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신의 음악을 부모 세대가 열광하는 것에 괴리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한다.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정신적으로 받은 손상은 쉽게 치유되지 못한다. 경멸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찬양하는 것에서 오는 모멸감은 대단했다. 오로지 헤로인 만이 그를 ‘무’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정말 커트 코베인은 긴 불행의 시간 속에서 아주 잠시 잠시 행복을 맛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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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김에 뜨거운 밥을 싸 먹고 그 뜨거움을 갓 끓여낸 된장찌개 한 숟가락으로 후후 불어, 같이 식혀 먹었던 것을 하루키 식으로 말하면 소확행이다. 그리고 부른 배를 잡고 방바닥의 요만큼 볕이 드는 공간에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이승환 2집을 헤드셋으로 들었던 기억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이승환 2집을 들으면 영화 필름 테이크가 뒤로 돌아가 버린다. 겨울에 썩 따뜻하지 않은 집에서 두터운 골덴바지를 입고 방바닥에 늘어진 귤 몇 개와 곧 싸락눈이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이 고흐의 그림처럼 정경을 이룬다.

 

영화음악이 영화에서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지 알 수 있다. 감독, 배우, 스토리마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영화음악이 스치면 그 장면이었어!라고 떠오르게 된다.

 

당시에는 가사가 전부 왜 이럴까. 이런 생각이 있었다. 내가 나에게 안녕을 고하고, 마음이 텅 비어 있고, 인생은 나그네 길이고 벌거숭이고, 그렇게 소리 없이 흘러만 가고. 지나고 나서 보니 가사가 참 시적이었다. 앨범 표지도 노래의 가사들과 잘 어울렸다.

 

앨범 하나를 만들어 내면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신경을 써야 하는구나. 이승환은 이후에 점점 하고 싶었던 록으로 변모해갔는데 어쩐지는 나는 록을 좋아하지만 이승환의 변심에 흥! 해버렸는데, 3년 전에 여기 어촌에 와서 공연을 할 때 2시간을 방방 뛰며 같이 무대를 즐기면서 저 사람은 정말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경탄하게 되었다.

 

 

2집에는 슬픔에 관하여,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를 잘 보면 -미처 내가 깨닫지 못했던 또 하나의 널

내 안에 감추며 내 안에 채우며 어찌 살아갈런지

하지만 이해해줘 이미 난 다른 슬픔에 길들여져

널 잊을지도 모르니

 

 

지난 사랑을 잊는 것은 새로운 사랑의 행복함이기보다는 어쩌면 새로운 슬픔이 아닐런지. 그런 생각이 늘 팽배해 있었는데 ‘슬픔에 관하여’라는 노래는 그것에 대해서 도돌이표처럼 생각을 계속하게 한다. 그랬던 이승환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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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이 앨범이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고, 가장 시끄럽고 강렬해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헤비메탈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이면서 가장 마니아적인 앨범이 아닌가 싶다.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앨범을 구입했을 때가 중학생 때인데 이 터질듯한 강력한 음악에 빠져서 교실 구석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가 없었던 중학생 시절. 선생님 몰래, 반장 몰래 창가 끝에 간들간들하게 붙어 세포가 분열되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후에는 메탈리카의 더 시끄러운 저스틱 포 올 그 앨범을 가장 많이 들었었다. 그 앨범은 레코드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군대 갈 때 누군가에게 전부 맡겼는데 제대하고 나니 연락이 안 되었다. 그래서 100장 가까이 되는 레코드판은 물 건너 가버렸다.

 

메탈리카는 작년에 한국, 아니지 2017년에 내한 공연을 했다. 그때 오프닝 무대를 베비메탈이 했다. 그때 메탈리카의 인기를 더 눌렀다고 하면 거짓말 같지만 그랬다. 메탈의 신들은, 이 강렬하고 극강에 이르는 헤비메탈이 메이저에서 내려가지 않는 이유를 베비메탈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이제 메탈삼촌들이 되어 버린 록계의 신들은 베비메탈을 정말 아낀다. 메탈리카와 함께 한 사진은 한국 공연 때지 싶다.

 

메탈리카와 함께 한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다. 74년에 데뷔한 넘볼 수 없는 메탈계의 끝판왕인 키스 형님들도 베비메탈 앞에서는 한없이 삼촌스러워진다. 몰룬 주다수 프리스티의 롭 헬포트 형님도 그렇다.

 

영국 밴드인데 터질 듯 강한 메탈을 하는 밴드 브링 미 더 호라이즌과도 함께 했다. 브링 머 더 호라이즌은 인기가 정말 좋은데 이들이 하는 메탈을 두고 이모코어라고 부르는 이도 있고 포스트하드코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런 ‘코어’가 붙는 펑크록은 어떻든 서태지가 거의 초기에 시작한 것 같다. 그때 림프 비즈킷이 하던 그런 강한 록 음악들.

 

그리고 곧 한국 상륙을 앞둔 건스 엔 로지스의 슬래쉬와도 함께 했다. 메탈리카의 원 멤버였다가 제임스와의 불화로 뛰쳐나가 메탈리카와 쌍벽을 이뤘던 메가데스의 머스테인과도 함께 했다.

 

전 세계에 아이다스 열풍을 일으켰던 콘의 조나단과도 함께 했다. 조나단은 하늘을 찌를 인기를 구사할 때 늘 아디다스 체육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래도 A.D.I.D.A.S가 있다. 체육복 아디다스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이 당시가 재미있었던 것은 아디다스 회장이 푸마 회장과 형제인데 둘의 사이가 정말 안 좋았다. 씹어먹을 정도로 서로를 경멸했는데 아디다스가 콘의 조나단 덕분에 매출이 세계적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한때 나이키를 넘볼 수준이 되었다. 푸마의 회장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느닷없이 패리스 힐튼이 깔 분홍 푸마의 체육복을 입고 온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푸마가 아디다스를 앞지르기도 하고 그런 재미있는 시기가 있었다.

 

암튼 전 세계의 메탈 삼촌들이 베비메탈을 아끼고 있는데 87년에 결성된 메탈계의 거물, 화이트 좀비의 보컬 롭 좀비는 베비메탈에게 악플을 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욕을 하고 다닌다. 야이 니 같은 그레이색이야 나이를 어쩌구 하면서. 이 정도면 메탈삼촌들이 베비메탈을 정말 아끼고 있는 것이다. 그랬던 베비메탈이 3인 체재에서 한 명이 탈퇴를 해서 메탈삼촌들의 마음이 심히 안타까울 것 같다.

 

메탈리카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정말 메탈리카가 아니었다면 메탈이 이렇게나 유행이 될 수 있었을까. 이 앨범에는 강렬하고 빠른 곡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언포기븐은 정말 처절하다. 처절의 끝을 보는 것 같다. 후에 더 언포기븐 2가 나왔을 때 팬들은 걱정이 많았는데 1만큼 좋았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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