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는 오래전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고민해온 고찰이에요. 가끔 우리도 정체성이나 주변성 때문에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요컨대 나는 왜 이럴까, 왜 제대로 안 되는 걸까, 또는 내 친구는 이런데 나는 왜 이런 대우를 못 받는 걸까, 하는 생각을 가끔하게 됩니다. 내 주변으로, 그러니까 내가 일하는 곳의 높은 직책이나 내가 동경하는 내 주변으로 가려는 습성을 나도 모르는 새 흡수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오래전 철학가들도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도형을 그려가면서 고찰했던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무엇때문에 살아가는가.

정치가 그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인간은 참 많은 생각과 고민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재미있는 건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처가 악처로 더 유명합니다. 그건 따지고 보면 맨날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앉아서 고민만 하고 있으니 악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하고 보면 사람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간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칭찬을 들으며 인정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성적이 잘 나오면 담임에게 인정을 받고, 친구와 의리를 지키며 인정을 받고, 군대에서 사격을 잘 하면 중대장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하는 이를 격렬하게 사랑하며 인정을 받습니다다. 엄마는 아이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의사는 환자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직원은 상사에게,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인정 받고 싶습니다.

창조적인 일을 하지만 그 속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나는 많이 봤어요. 공부를 잘해서 늘 우등생이라 좋은 회사에 들어갔지만 하는 일은 회사에서 역시 반복적인 일을 하는 모습도 많이 습니다. 그렇게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상사에게 또는 동료에게 인정을 받으면 하루를 잘 보내겠지만 대체로 그러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지옥 같은 하루를 겨우 견디고 있습니다.

닭을 팔면 좀 어떻습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닭을 먹습니다. 닭 요리를 잘 해서, 닭을 잘 튀겨서 손님들이 맛있다며 인정을 해주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못 배우고 무식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 아무도 따지지 않습니다. 지돈 내고 지가 먹는데도 너무 잘 먹었다며, 맛있게 먹었다며 주말에 가족과 오겠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이 거지 같은 현실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힘든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지만 만나는 손님은 늘 다르고 인정을 받고 있다면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본인이 그 일을 아주 좋아하고 직원들에게 꼰대 소리도 듣지 않고, 닭집에만 들어가면 모두가 밝음 웃음꽃이 피어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까.

직업에는 귀함과 천함이 없습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아요. 며칠 전 기사에 일본의 포르노 배우가 에이즈에 감염이 되어서 다른 배우들이 겁을 먹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에 누가 댓글을 달았는데, 저들은 목숨을 걸고 촬영을 하고 있구나, 존경심을 가지고 열심히 봐야겠다.라고. 세상에는 하루키 같은 일류 소설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오래 살려면 채식을 해야 하고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며 밭농사를 하는 농부들 덕분에 세상에 싱싱한 채소가 나오는 거거든요.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구가 끝장나는 날, 이 영화는 병맛인 영화다. 하지만 퀄리티가 높은 병맛인 영화다. 무엇보다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 그리고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조합으로 ‘황당한 새벽의 저주’ ‘뜨거운 녀석들’이후 사람들은 이들의 조합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속 기다렸다. 그리하여 에드가 라이트는 이 병맛의 조합으로 이 병맛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앞선 영화가 좀비였다면 이번에는 외계인이다. 이들의 구질구질한 대화 속에는 비트는 대사들이 많다.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영국의 코미디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요컨대 외계인들이 스타벅스를 만들어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거나 하는 대사들이 가득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보면 그저 어릴 때 살던 동네로 가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가 앗 하며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와 친구들은 늘, 언제나, 주야장천, 주구장창 이 병맛같은 퍼브로 간다. 영국 하면 퍼브니까. 거기 화장실에서 외계인들과 마주치게 되고 외계인들은 죽지도 않고 서서히 인간들을 아나힐레이션으로 만들려고 하는 음모에 휘말리고 마지막에는 외계인들이 이 주인공 녀석들과 대화를 섞기 싫어서 지구를 멸망시키고 마는 내용이다. 뜬금없는 반전과 뜬금없는 대화와 뜬금없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그래서 에드가 라이트의 팬이라면 취향을 저격 당하게 된다

에드가 라이트의 베이비 드라이버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화였다. 밀고 당기고의 강약과 잘 익은 떡과 같은 질감, 섹시하고 큐티하며 빛과 그늘을 잘 다뤘다. 군더더기 없고 영화 속 노래가 사람을 미치게 했다. 캐릭터는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살아있었고, 모든 리듬은 액션이 되었다. 쉴 틈 없는 음악, 정말 최고였다고 말하겠다. 에드가 라이트가 각본, 기획, 감독을 도맡아 하면 다 재미있는 것 같다. 에드가 라이트의 코르네토 3부작 중 ‘지구가 끝장나는 날’을 최고로 뽑는 사람들이 많다. 병맛인 소식이지만 로자먼드 파이크는 명예부산시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ttps://www.youtube.com/watch?v=9IrhsY-pb40

 

 

가끔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같은 타이틀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도전하고 오르고 정복하는 모습들을 말이죠.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힘듦을 참아가며 이겨내는 모습을 그동안 왕왕 봐왔었습니다. 음 뭐랄까 인간의 한계를 넘는 건 분명하긴 한데, 정말 그런 일들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일까.

예전에 글을 쓰기 위해 갑상선을 제거한 30대 초중반 남녀 네 명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 갑상선의 수술을 받았고 그 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있던 갑상선이 없어지면 하루에 8시간씩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활동을 해도 저녁 5시 정도가 되면 몹시 피곤합니다. 그 피곤이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될 정도라고 해요. 몸에 쌀가마니 몇 개를 둘러 맨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요. 그리고 눈이 몹시 탁해집니다. 슬픈 일인 것이죠.

무엇보다 주변성과 정체성에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의 주변에 스며들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는 피곤이 덮치면 그게 갑상선이 붙어 있을 때처럼 되지 않아요. 그러다 보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 하게 되고 ‘나는 왜 젊은 나이에 이럴까’ 같은 자기 비하를 하게 되며 결국 자기 멸시로 이어지게도 됩니다. 이렇게 무너진 정신은 모래성 같아서 다시 쌓아 올리기 참 힘들어요. 대체로 불가능에 가깝죠. 비록 나는 갑상선을 제거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해준 덕분에 나는 그들의 힘듦에 아주 조금은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근래에 이문세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초능력 알죠? 슈퍼맨이나 내는 그런 초능력. 이문세는 갑상선을 두 번이나 수술했어요. 그 말은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체력이 바닥이 나요. 내가 조깅을 세 시간 한 것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24시간 걸어 다닌 것처럼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에너지가 완전히 소거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이문세는 공연을 해서 한 시간 이상 노래 몇 곡을 예전처럼 불러요.

이 사람은 노래를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그리고 그 노래를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팬들에게 얼마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도저히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뛰어넘어 버린 것입니다. 이문세의 팬이라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오열을 하지 않았을까 해요. 이문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어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노래를 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로 초능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옆 나라의 나카시마 미카는 난치병이라는 이관개방증으로 노래를 더 이상 부를 수 없게 되어 좌절을 맞았습니다. 나카시마 미카는 일본에서도 독보적인 가수로 그녀가 무대에 입었던 옷은 다음 날 바로 뉴욕 컬렉션에 진열이 될 정도의 인기를 지니고 있고 무대에서는 오로지 라이브로만 노래를 부르는 가수인데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은 그녀의 인생에 좌절을 맞았다는 말이거든요. 시간이 흘러 배구선수와 결혼을 하고 사랑으로 난치병을 극복하고 몇 해 전부터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맑고 부드러운 나카시마 미카의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굵고 갈라지고 목소리만으로는 나카시마 미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소리였지만 그녀의 팬들은 그녀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그 자체에 기쁘고 환호를 했어요. 그녀는 요즘도 매일 연습을 하며 무대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녀 역시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입니다.

근래의 이문세를 보고 있으면 경외가 들어요. 산을 타고 식단 조절을 하고 맑은 공기를 찾아 다니고 무엇보다 절벽 밑으로 떨어졌던 정신을 끌어 올린것은 정말 인간의 한계를 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초능력을 지닌, 나와는 다른 어떤 능력의 인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문세가 노래를 부르면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그건 이문세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매일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매일 행복한 일은 일어난다. 곰돌이 푸가 한 말이지만 그건 제대로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오늘도 행복합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츠제럴드 마지막 이야기
.
문학의 사조가 바뀌었고 피츠제럴드의 글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헤밍웨이가 글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며 자살한 것에 비하면 피츠제럴드는 어두운 곳에서 죽을 때까지 글을 썼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피츠제럴드는 진정한 글쟁이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

젤다는 몰락한 이후 자신의 퇴락해가는 모습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만다. 상승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는 법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운 젤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이 보였고 머리카락은 힘이 없어서 더 이상 이전처럼 예쁘게 말리지도 않았다
.

늙어가고 힘 빠진 모습에서 우울해지는 여자가 어디 젤다뿐이겠는가. 사람들은 아름답게 늙어가기를 바라지만 ‘늙다’라는 동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가 ‘아름다운’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자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예쁘게 나이 먹었네, 곱게 늙었네, 같은 말을 하지 말고 ‘늙었네’와 ‘나이 들었네’를 빼고 말해야 한다
.

젤다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실력을 살려 책도 펴냈지만 출판사는 다른 곳만 쳐다볼 뿐이었다. 젤다가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과정을 피츠제럴드가 소설에 그대로 사용하고, 그 사실로 인해 젤다의 병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배신감을 받았다. 젤다의 일기와 편지들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뿐 젤다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결락과 우울함은 너무 깊고 컸다. 젤다도 자살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추앙했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면 수군거렸고 손가락 짓을 했다
.

저기 젤다가 지나가, 저 여자 매일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진탕 마시고 담배도 지폐에 불을 붙여 피웠대,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 좀 도와주지 말이야, 이젠 볼품없는 얼굴이 되었군, 남편의 글도 이젠 한물갔대 나 봐, 남편은 젤다의 퇴락해가는 이야기를 소설에 섰대, 불쌍하구먼
.

이런 수군거림을 젤다는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정신병원으로 땅만 보며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면 무섭도록 잔인해진다
.

부흥기가 있었지만 젤다가 피츠제럴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데이지처럼 톰 뷰캐넌 같은 남편을 만나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수면 위에서 평탄하게 살아갔을까. 1940년에 피츠제럴드가 죽고 정신병원을 오가던 젤다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정신병원의 화재로 인해 3월의 봄날에 그녀는 자신의 남편 곁으로 가버린다
.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그린라이트를 바라보며 데이지를 생각한다. 5년 만에 나타는 개츠비는 멋있고 유능한 갑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개츠비는 5년 만에 성공의 가도에 올랐지만 그 5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

피츠제럴드는 개츠비가 자신을 투자한 5년을 어떤 식으로 투사했을까. 무일푼이었던 인간이 5년 만에 성공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개츠비는 5년 동안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오로지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개츠비는 어떠한 부분에서는 서슴없이 행했을 일들
.

데이지를 사랑하는 자신처럼, 데이지 역시 자신을 자신만큼 사랑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개츠비. 개츠비는 5년 동안의 겪은 일들로 인해 자신의 앞을 막는 것을 광기로 밀어 버린다. 방해가 되는 것이 사람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

5년 동안 개츠비의 머릿속에는 사랑을 속삭였던 데이지의 모습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개츠비는 데이지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개츠비는 처절하게 데이지를 기다린다. 마지막 수영장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휑한 모습은 마치 어셔가의 몰락의 첫 장면을 떠올릴 만큼 황망하다
.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받은 편지와 사진을 앨범 속에 포트폴리오로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런 모든 모습을 꾸준하게 바라보는 이, 개츠비의 유일한 친구 닉 캐러웨이가 있었다. 닉은 마지막에 타이핑 한 개츠비라는 글자 위에 손글씨로 ‘위대한’을 쓴다. 그곳엔 스콧 피츠제럴드의 모습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삼포가는 길

.

 

도대체 한국 영화는 왜 미학적으로 퇴보하는가. 대사나 장면이나 씬 사이의 여백이 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영화. 인물에서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대단하다. 피고 지고하는 인생사가 온전히 온전히 묘사된다. 마음 깊이 슬퍼지는 장면들이 너무나 많다. 훌륭한 영화 - hdmi

.

 

hdmi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의 삼포 가는 길의 댓글이다. 딱 영화의 감상을 잘 요약해 놓아서 들고 왔다. 황석영의 소설을 오래전에 읽었는데 후에 영화를 봤지만 설원과 문숙의 활달한 모습만 기억에 있어서 다시 찾아본 영화 ‘삼포 가는 길’은 명작이었다

.

 

웃으며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만 살아와서 거침없이 욕을 하고 미친 것처럼 만개한 꽃과 같은 백화를 보면 마음 깊이 슬프다. 이 영화는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 백화에게는 특질이 있다

.

 

신들린 것처럼 문숙은 연기를 한다. 세련된 대사에 세련된 영상이다. 이야기를 빛나게 하는 건 문숙이다. 이 영화의 문숙을 보고 허스토리의 문숙을 보면 이상하게 슬프고 눈물이 난다. 왜 그런지는 잘 설명할 수가 없다.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그렇다

.

 

뭐 화냥년? 그래 난 화냥년이다. 화냥년이야. 더러운 년이라구. 더럽고 썩고 썩은 년이라고. 난 너희들 사내놈들한테 살이 빠지도록 팔고 사는 년이라고.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왜. 라고 울부짖는 백화의 모습에서 우리는 빠져들고 같이 무너지게 된다

.

 

익살스러운 대사도 있다. 그 대사를 잘 들어보면 백화의 애이불비를 느낄 수 있다. 

야 너 몇 살 쳐 자셨냐

흥, 화류계에서 누가 나이 따져서 언니 동생하는 줄 아나, 마신 술잔하고 사내 숫자로 셈하는 거야, 요 병신아.

농땀, 미얀미얀 재송해용. (치마를 들춰 올리며) 어때 마음에 들어? 

헤헤 지랄로. 같은 대사들

.

 

계란을 주는 장면은 참 촌스럽지만 슬픈 장면이라 백화가 받은 삶은 계란은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삶은 계란이다. 백화는 삶은 계란을 먹으며 꿋꿋하고 거칠게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욕쟁이 백화와 풋풋한 점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채

.

 

삼포 가는 길은 춥고 고되기만 하다. 발가락은 눈밭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함께 삼포로 가는 일행들이 있어 참고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고향인 삼포는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안온한 곳이 아니고 낯설기만 하고, 또다시 뜨내기의 길만이 앞에 놓일 뿐이다. 마치 하루키의 주인공들을 보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하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일상에서 밀려나버린 주인공은 나의 모습인 동시에 내 주변의 모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