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들어오는 풍경이 천장이 아니었다. 분명 예전에는 아침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천장이었다. 천장의 기하학적 무늬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본다. 저런 무늬라면 건물의 벽면을 전부 기하학적으로 꾸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오늘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타이머가 라디오를 틀어 주었다. 이른 오전에 나오는 라디오는 고요할 것 같지만 출근 준비를 하는 청취자들 때문에 오히려 소란스럽다. 그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일어나야 하니까. 라디오는 정오가 되기 전,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오는 음악이나 멘트가 고요하고 조용하다. 적요와 잘 어울리며 커피와도 궁합이 좋다. 그런 음악이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온다. 그 시간이면 출근할 이들은 전부 출근해서 바쁜 아침 업무를 끝낸 후거나, 집에 있다면 청소를 끝냈을 시간이다. 그 시간에 듣는 라디오가 하루 중에서 가장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고 평온하다.     


 그런데 요즘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이패드의 화면이다. 예전처럼 똑바로 누워서 눈을 뜨지 않고 옆으로 누워 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아침에 죄다 똑바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데 나는 옆으로 누워서 눈을 뜬다. 눈을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이패드의 라디오가 커졌다. 일어나서 약을 하나 먹고 물을 마셨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봤다. 하루의 시작은 이렇게 변기에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밤새 소화가 된 음식 찌꺼기들을 밀어내는 것부터 하루의 시작이다.   

  

 한 아파트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인간의 배설물량은 얼마나 될까. 나는 그걸 자주 생각한다.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뱉어내지는 않는다. 모두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달력의 뒤편 같은 것이다. 아마도 한 아파트에서 나오는 인간의 찌꺼기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도시에서 나오는 배설물의 양은 상상 그 너머에 있다. 만약 하루만 정화 처리가 막히거나 고장이 나면 도시가 끔찍한 모습이 될 것이다. 그게 이틀, 한 달, 일 년이 된다면 도시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가 되지 않을까. 한 집 안에서도 배설한 다음 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않으면 큰일 난 것처럼 군다. 하물며 도시의 변기가 전부 막혀 버린다면 이건 정말 큰 일인 동시에 엄청난 일이다. 어째서 영화감독들은 재미없는 영화 말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일까. 세상의 수많은 재앙이 있지만 인간이 배설해 놓은 인간 찌꺼기가 인간을 멸망시키는 이야기는 제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재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갠다. 이불을 개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일종의 쾌락 같은 것이다. 끌과 끝을 맞추어서 제대로 개 놓으면 이상하지만, 기분이 짜릿하다.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데 이불은 끝과 끝을 맞추어서 칼처럼 개 놓는 게 좋다. 그렇게 습관이 되었다. 라디오에서 김성호의 노래가 나온다. 웃는 여잔 다 예쁘다고 김성호는 노래를 부른다. 김성호의 감성이 묻어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웃는 모습이 다 예쁠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반대가 더 많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며 웃음을 보일 때 가장 먼저 드는 건 경계다. 나에게 뭔가를 바라거나 물건이나 판매상품을 팔아버리려고 웃음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뒤에서 무방비로 들리는 타인의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은 사실 잘 없다. 웃음이 예뻐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 없이 예쁜 웃음을 짓는 사람은 정말 몇 없는 것 같다. 웃음이 어울리는 사람은 어린이들이다. 어린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웃음이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몰이해와 경악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침에 나오는데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악의는 없는 웃음이다. 나이는 60대 중후반 아주머니다. 물론 나는 저 아주머니를 모른다. 저 아주머니가 나에게 웃음을 보이는 건 아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웃음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남자들은 웃음을 잘 보이지 않는다. 웃음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나도 웃음 대신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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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 때에는 걷기보다 주로 뛰어 다닌다. 높은 곳을 보면 오르려 한다. 미끄럼틀이 있으면 어린이들은 이상하지만 미끄럼틀을 기어 올라간다. 계단으로 오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넘친다. 그날 하루에 에너지를 전부 방출해서 방전이 된 다음에야 잠이 든다. 그래서 쿨쿨 잠을 자며 중간에 깨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갈수록 뛰기보다 걷게 되고 나중에는 이 마저도 귀찮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 뛰는 사람들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 뿐이다. 일상에서 아이들처럼 뛰어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두 다리가 있으니 늘 걷게 된다.

2018년 백영옥의 말과 글에서는 ‘어디에 살 것인가’ 칼럼이 실렸다. 백영옥은 쇼핑몰을 종종 걷는다. 미세 먼지 때문이다. 이상한 건 쇼핑몰 산책은 30분만 해도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걷는 걸음걸이로 보면 공원을 걷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적게 걸었는데도 그렇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걷고 싶은 거리가 어떤 거리인가에 대한 답이 있다. 걷고 싶은 환경이 되려면 걸을 때 풍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쇼핑몰에 대형 서점이나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는 ’변화하는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계절을 바꿀 수 없으니 극장의 상영작이나, 서점의 책이라고 바꾸는 것이다. 쇼핑몰이 인테리어를 자주 리모델링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라면 백영옥은 소설가는 뉴욕의 건축과 뉴욕에서는 서울보다 더 자주 걷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걷는 것, 인간이 도심 속에서 걷는 다는 행위, 인간이 걷는 다는 것에서 사람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계절마다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자연 속에서 걷는 것과 인공적으로 바꾸어주는 거대한 쇼핑몰을 걷는 것의 차이는 걸어본 사람만이 그 차이와 변화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십 년 넘게 트레드밀이 아닌 야외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고 그날그날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고 강변도 있어서 조깅을 하거나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굳이 첩첩산골로 들어가서 자연인처럼 생활하지 않아도 쇼핑몰이 아니라 걸을 수 있을 때, 버스 두 세 코스 정도의 거리는 매일 걷는다면 걷기의 소중함과 위대함(까지는 아니지만)을 알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언젠가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전까지 실컷 달리고 싶다. 그러려면 달릴 수 있는 거리의 공간이 있는 것에 살아야 한다. 달리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고 먼곳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너무 힘들고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달리다가도 어느 날 이제 달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순간이 또 온다. 더 이상 몸이 달리는 것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때는 걸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걷지도 못하는 시기가 오면 이제 누워서 보내야만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생이라는 게 긴 것 같지만 지난 십 년을 보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 한 시간은 지루한듯 한데 일 년은 금방이다.

매일 한 두 시간씩 잘 걸어 다닌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리 보이지 않을까. 걷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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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를 최소화해서 소설 쓰며 살아가는 이모와 인간관계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엄마와 아빠를 사고로 잃은 조카의 동거 이야기


인간관계라는 건 미묘하고 어려우며 너무나 복잡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우화의 강’으로 토해낸 마종기 시인의 시에서 그 강은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실제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골이 있고 그 골에는 불순물이 잔뜩 껴 있고, 타인과의 이해관계가 끈적거리는 타액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이모와 조카의 사이도 그렇다. 


서로 친밀해질 수 없는 그 사이를 조금씩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간극을 좁혀 나가는 이야기.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아주 모호하다. 운무가 가득한 산길을 거니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짐작으로는 알 수가 없다. 


대부분 자기 방식으로 자기 방식에 의한 표현법으로 상대방을 대하지만 언제나 성공하지는 않는다. 조카는 친구에게도 제일 먼저이고 싶고, 이모에게도 제일 먼저이고 싶지만 언제나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흐른다. 


이모는 죽은 자신의 언니와 너무나 안 좋게 자매 관계를 끊어버려서 조카라도 마음을 쉽게 열 수 없다. 가족은 언제나 힘인 동시에 짐이다. 마음을 여는 존재이지만 마음을 다치게 하는 존재가 가족이다. 


조카는 고민이 많다. 둘도 없는 친구가 고등학생이 되어 일 순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애가 되고, 음악을 하고 싶어서 작사를 해서 이모에게 보여주면 바로 응답이 오지 않고 생각을 하는 모습에 고민이 많다. 왜 바로 칭찬을 하지 않지?


외향적인 성격이란 밝은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밖을 더 생각하는 성격이고 내향적인 성격이란 자신을 더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에 이모와 조카는 다가가는 영화다. 


영화는 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말한다. 그 경계가 질기기도 하고 연하기도 하다. 홧김에 시작한 불편한 동거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조금씩 타인을 통해 자신을 더 돌아보는 이야기. 자신을 보면 비로소 상대방이 보이는 이야기. 


영화는 만화 원작으로 이렇다 할 사건이나 이벤트가 없다. 그럼에도 거의 두 시간 삼십분이 넘는 시간이 지속되어서 지루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흐뭇하게 봤다. 이젠 연예인이 아니라 진정 배우가 된 각키와 조카 역의 이코이의 세대차이나는 동거 이야기 ‘위국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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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렌 코번 원작의 시리즈다. 늘 그렇듯이 보는 내내 빠져들어 아주 흥미롭다. 이 작가의 스타일을 조금 알게 되었다. 패턴이랄까 등장인물들의 비밀스러운 과거와 진실을 파헤치고픈 주인공들 그리고 자식들이 나오며 부모와 마칠을 겪는 사춘기들이라 비밀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위선을 보인다. 대체로 시리즈 대부분이 그렇다. 그런데 상상력이 대단해서 그런지 시리즈를 잘 만들어서 어떤 시리즈를 보더라도 훅 빠져든다.

이번 시리즈 역시 폴란드 시리즌데 봤던 배우들이 왕창 나오기에 같은 배우를 돌려 가면서 이 원작자의 시리즈에 나오나 싶었는데 지난번 ‘숲’ 시리즈의 뒷이야기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때 주인공의 어린 딸 카야가 고등학생이 되고 친구가 죽으면서 ‘숲’ 시리즈에서 주인공이었던 검사 아빠는 여기서는 뒤로 물러난 조력자 같은 조연으로 등장하고

학생인 딸 카아야 주인공 한 사람으로 중심에서 사건에 접근한다.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라 자식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나라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 드라마와 비슷하다. 자식들의 실수, 잘못, 비밀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다.

내가 라디오를 매일 듣는데 라디오에서는 초등생 아들이 엄마 생일 맞아 처음으로 아침에 계란 프라이를 해줬다며 행복한 사연이 소개되는 반면 스레드에서는 아들을 처음 키우는데 도대체 아들은 왜 그러냐 하도 씻지 않아서 욕실에서 몸 샤워하라고 했더니 머리 팔 다리 빼고 몸만 씻고 나오질 않나, 머리 감으라고 했더니 머리 중간에 물만 묻히고 나와서 마찰이 늘 일어난다는 이야기

그 밑에 댓글에 아들 셋 키우는 맘인데 그 시기를 지나면 반 친구들 사춘기 냄새난다며 자신에게도 날 거라며 욕실에서 한 시간 넘게 있는다며 사춘기 아들과의 마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런 문제는 당사자는 힘들고 짜증 나고 숨막히지만 자식이 있는 가정이라면 늘 거쳐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을 너무 간섭하고 감시한다고 느껴 탈선을 하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 특히 요즘처럼 청소년 도박에 빠지기 쉽고, 약물에 노출이 많은 지금은.

우리 집 애를 잘 아는데 우리 집 애는 그러지 않는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꼭 한다. 우리 애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다. 모두가 남의 탓이고 내 자식은 깨끗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시리즈 역시 6부작으로 깔끔하게 끝나고 시작은 죽음으로 출발하여 많은 등장인물의 복잡한 사건이 나오며 하나씩 떡밥의 회수가 된다. 내가 할렌 코번의 시리즈를 뒤죽박죽으로 보고 있는데 만약 이 시리즈를 먼저 보고 숲 시리즈를 봤다면 좀 망했겠지.

일부 어른들의 문제라면 유아기든 사춘기든 자신도 겪었다며 현재의 사춘기 애들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위국일기’에서 다 너를 위해서 모두에게 엄마의 죽음을 알렸다는 선생님 식이다. 자식은 부모를 속이려 들고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미스터리지만 부모 자식의 심리가 잘 표현되었다. 그게 미스터리 스릴러라서 더 재미있다. 마지막에 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5분 정도 남겨두고 거기서 반전에 반전이 나온다. 이 시리즈에도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전부 의미가 있는 캐릭터인데 초등생 어린 딸까지 마지막에 한 건 해 버리는 ‘홀드 타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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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가던 목욕탕에는 겨울에 탈의실 중간에 평상이 있고 앞에 거기에 난로가 있었다. 난로 위에는 큰 냄비 안에서 오뎅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하나에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목욕을 하고 나와서 머리에 물기가 덜 마른 채로 어른이고 아이고 발가벗고 서서 오뎅을 먹는 모습이 어쩐지 의식을 치르는 모습 같았다. 기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목욕을 나와서 오뎅을 하나씩 먹었다. 


장사가 잘 되었다. 너도나도 전부 오뎅을 먹었으니까. 당연하게도 여탕의 탈의실 모습은 모르겠지만 남탕의 모습은 꽤나 재미있다. 주로 아버지들의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드라이기로 머리는 말리지 않고 사타구니만 말리는 아저씨, 수면실(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에서 하나만 입고 잠을 자는데 그 하나가 양말인 아저씨, 등을 미는 때 미리 기계에 등만 얼마나 세게 밀었던지 등말 벌겋게 된 아저씨 등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온도차이로 생긴 수증기가 가득한 목욕탕에서 있는 힘을 다 해 아버지의 등을 밀고 있으면 아버지는 시원하지도 않으면서 아 시원하다고 하면서, 팔다리도 가는 나에게 넌지시 용기와 칭찬을 주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대 놓고 속에 있는 말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게 아버지로서 최대한 자신의 의사표현이었다. 목욕탕을 나오면 맞이하는 겨울의 공기는 아주 차갑고 몹시 상쾌했다. 새벽의 이슬 같은 느낌일까. 투게더를 양손으로 들고 집으로 오면 그때서야 저녁을 먹었다. 대략 저녁 8시 정도. 우리는 밥상에 둘러앉아서 겨울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가 오뎅탕을 끓여 왔다. 집에서 먹는 오뎅탕은 밖에서 먹는 오뎅과는 맛이 다르다. 좀 더 정돈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밖에서 먹는 오뎅보다는 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밖에서는 오뎅탕에 밥을 말아먹지 못하지만 집에서는 가능하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둔 투게더를 꺼내서 먹었다. 하드는 여름에 맛있지만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맛있었다. 겨울의 토요일 저녁은 행복했다. 밤이 되면 전부 이불을 덮고 티브이를 보았다. 아마 토요명화 같은 프로를 봤을 것이다. 겨울이니까 크리스마스 대소동을 봤다고 치자. 코미디 영환데 적당히 야한 장면이 가득한 미국미국 한 영화다. 아주 어린 줄리엣 루이스가 나온다. 줄리엣 루이스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도 그렇고, 그 옛날 로버트 드니로가 무시무시하게 나온 케이프 피어에서도 그렇고, 당차고 거센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외국 배우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재미있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게 좋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코로나가 도래하기 전 조깅을 하고 돌아오면서 포장마차에 서서 오뎅을 하나씩 사 먹었다. 특히 겨울에 먹는 오뎅은 유독 맛있었다. 이유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덧입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통 8킬로미터 정도를 조깅을 하니까 겨울에 그 정도 달리면 후끈하지만 금세 몸은 식어버리고 만다. 그때 버티고 서서 먹는 오뎅은 꿀맛이었다. 오뎅국무 역시 맛있었다. 오뎅국물은 그저 무로 시원하게 우려낸 국물이 좋다. 그 안에 게껍질이나 새우를 넣어서 우려낸 국물은 나는 별로다. 매운 국물도 별로다. 그저 무로 끓여낸 오뎅국물이 좋다. 그렇게 겨울에도 오뎅을 하나씩 먹으면 사라져 가는 어린 시절의 겨울철 오뎅 맛을 느끼려고 했다. 오뎅과 행복을 결부시켰다. 그러나 코로나 시기가 되면서 포장마차가 문을 닫았다. 조깅을 하는 활동 반경 내에 있던 오뎅 포장마차가 전부 사라졌다. 코로나 시기는 그런 분위기였다. 뭔가 바이러스가 옮겨질 것 같은 분위기는 아예 없애 버렸다.


바이러스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바이러스가 전염이 잘 되는 곳이 목욕탕이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지만 그걸 몰랐다. 감기가 걸리면 어른들은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다가 오면 낫는다고 했지만 목욕탕을 나오면 기침이 더 났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지금은 감기가 걸리면 사람들이 피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학교도 가지 않고 신경을 쓴다. 그러다 보면 날카로워지지만 어릴 때는 기침을 하면 좀 포근한 느낌이었다. 부모님은 따뜻하게 보리차를 끓여 주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래도 기침이 심하면 약을 하나 먹고 잠을 푹 자고 나면 기침이 싸그라 들었다.


요즘은 손을 자주 씻어서 그런지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오뎅도 먹지 않는다. 인공지능으로 세상은 재미있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적어도 나는 재미가 없다. 몸에서 재미라고 하는 세포들이 점점 떨어져 나간다. 일상을 공허하게 보내고 있다. 만약 바쁘게 보낸다고 해도 바쁜 일상이 공허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공허라는 공간이 있다면 나는 지금 그 어떤 상황이든 그 공간을 지나가야만 해서 중간을 지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오뎅탕으로 따뜻하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두꺼운 이불속으로 쑥 들어가 토요명화를 본다. 머리만 빼꼼 드러내놓고 더빙된 토요명화를 보고 있으면 잠이 오소소 떨어진다. 잠들지 않으려고 아버지에게 계속 질문을 한다. 재미없는 영화라도 아버지가 영화를 설명해 주면 마법처럼 재미있었다. 더불어 잠은 더 쏟아졌다. 창밖으로 휘이잉 하는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려고 화가 났지만 우리는 절대 창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잠이 쏟아진다. 잠들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티지만 결국 천사의 망치를 맞고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보던 겨울의 토요명화의 결말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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