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 정말 맛있다. 맛있는 것을 표현하라고 늘 말하는데 그냥 맛있다. 맵삭 하니 고소하니 기름 맛이 어쩌고 하는 건 그저 화면을 채우려고 하는 ‘척’ 일뿐이다. 맛있는 건 그냥 맛있는 것이다. 김치에 고기를 올려 먹는데 그럼, 맛있지. 김치는 좀 시간이 지나야 맛있기도 하지만 바로 해서 고기와 날름 먹는 맛이 좋은 게 김장김치다. 김장김치가 맛있으려면 배추의 씨알이 굵고 뭐 그래야 한다는데 그냥 맛있다. 배를 갈아 넣었던 말이다.


요즘 말만 했다면 엄청난 욕을 먹는 황교익은 사실 오래전에도 똑같았다. 똑같이 식당에 올라오는 중국산 김치를 욕했고, 양념으로 맛을 가린 치킨을 욕했다. 스탠스가 10년 전이나 또 그 이전이나 지금이나 벌어지지도 않고 좁혀지지도 않고 똑같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임지호 요리사와 박찬일 요리사, 그리고 황교익은 ‘끼니’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식재료 문화를 알리고 있었다. 그게 벌써 오래전일인데 지금은 황교익은 융단폭격을 맞고 있다. 그런 흐름을 보는 건 꽤나 재미있다.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을 하면 구경하는 쪽은 재미있어진다.  왜냐하면 자극적이지 않은 것에는 사람들은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예가 최근의 티브이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보면 된다. 역대 최강의 일반인 빌런이 등장해서 sns에서는 엄청나다. 온통 시끌시끌하다. 그런데 만약, 나는 솔로에 나오는 모든 출연자가 고학력에 좋은 직장에 예쁘고 잘생기고 바른말 고운 말만 한다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시청률은 바닥을 치게 된다. 그 피디가 예전의 ‘짝’을 연출했던 감독이다. 짝에서도 자극적인 면모 때문에 출연자의 자살로 인해 문을 닫았다. 그 콘셉트를 가지고 왔다. 세포를 찌르는 자극, 이 자극이 없으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비록 욕을 하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빌런을 없애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빌런 때문에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계속 본다.


이상한 구도지만 황교익이 있다면 등장하는 사람이 또 백종원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도 이제 사라진다. 백종원의 볼 카츠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사람들은 가맹점을 안 한다던 백 대표가 볼 카츠 가맹점을 열었다며-비록 그게 한돈의 요구로 인해 개점을 했다고 해도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그 내면에는 가맹점주들과 백 대표의 관계 이런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백종원은 정치적인 면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좋아했다. 그러나 문어발씩 어쩌고 때문에 또 싫어하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뭐 할 얘기는 많지만 이쯤에서 접고, 개인적인 뇌피셜로 말하자면 황교익과 백종원 이 두 사람은 대중을 몹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교익은 예나 지금이나 좋은 식재료를 구입해서 제대로 집에서 식사를 하자는 게 그 사람의 요지다. 하지만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지금 일 마치고 데쳐진 시금치가 되어 집으로 와서 식재료를 일일이 다듬어서 맛있는 밥을 해 먹기가 어렵다. 그래서 백종원은 비록 건강에는 조금 안 좋을지 모르나 간단하게 조리해서 맛있고 배부르게 먹어보자. 그것이 어쩌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생활의 활력이 된다고 하는 것 같다. 이 두 사람이 전부 대중을 생각한다고 나는 본다.


그 사이에 방송이 끼어들어 자극이라는 옷을 입히고 나면 사람들이 ‘나는 솔로’처럼 달려든다. 지금 이 시대에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 나온 영웅이 탄생해도, 어느 날 누군가 저 사람? 저 사람이 바로 예전의 정진수야. 그 사람이라고! 하며 양극화로 또 나뉘게 된다. 자극이다. 자극이 끼어들면 사람들은 그 자극을 받아서 당연하지만 반응하게 된다. 자극이 없으면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자극이 없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연한 것을 때때로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


김치와 고기는 당연하게도 자극적이다. 빨간 양념에 버무린 김치와 불에 지져 분자가 변형된 고기는 자극이다. 자극이 입으로 들어가는데 맛있다. 정말 맛있다. 이 자극은 이제 바다를 건너 하얗고 검고 파란 눈의 사람들을 반응하게 한다. 기네스 펠트로(귀뉏 풸트뤄,라고 발음해야 할 것만 같다)의 김치사랑을 보라. 이 붉은 양념의 자극은 이롭고 좋은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에 인기가 많다. 무엇보다 맛있다. 이 맛있다는 의미가 던지는 것에는 모든 음식에 김치는 다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단 한국의 대부분의 식당에는 김치가 기본 반찬으로 나온다. 김치는 돈가스에도 어울린다. 생선구이에도, 갈비탕에도, 돼지국밥에는 없어서는 안 되고, 피자에도 김치는 어울리고 영국에는 김치 햄버거를 판다. 심지어 김치찌개에도 김치는 따로 나온다. 김치볶음밥을 먹을 때 김치 반찬에 김치찌개를 같이 먹는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다. 김치가 다른 음식과 잘 어울리는 이유는 맛있기 때문이고 맛있는 자극 때문이다.


누군가 김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뭐야? 김치 같은 사람이라니 흥, 하며 웃겨 넘길 말이지만 생각해보면 김치 같은 사람이라면 정말 신에 가까운 사람이 아닌가. 인관관계에도 자극이 없으면 질리고 싫증을 낸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 자극 때문에 전쟁 같은 사랑을 한다. 아이가 생기면 아이의 자극으로 인해 하루가 난장판이 되기도 한다. 아이가 자극적이지 않고 고요하게 앉아만 있다면 당장 업고 병원으로 갈지도 모른다. 우리 애가 말이죠, 하면서 자극이 없어서 큰일이 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김치와 고기처럼 평소에도 우리는 자극에 매료되어 있다. 코로나 이전에 사우나에 가면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가며 피부에 자극을 준다. 그래야 좀 했군, 하는 생각이 든다. 요가를 하며 근육에 자극을 주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 일행에게 자극을 줬다. 그게 생활을 이어가게 하는 동력원이다. 앞으로 티브이에는 나는 솔로에서 처럼 엄청난 자극적인 빌런은 계속 나올 것이고, 나의 몸과 마음은 오늘 이전의 자극에 만성이 되어 있으니 더 강하고 새로운 자극을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김치에 고기를 먹는 지금은 이 자극에 매료되자. 맛있다. 정말 맛있다. 맛있으면 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페에는 No Surprises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김해경 선생을 라바짜 커피 전문점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커피가 맛있습니다.라는 말에 김해경 선생은 알았다며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띄우시는 거 맞으시죠?라고 나는 김해경 선생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김해경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에 탄 커피를 마시고 김해경 선생은 레몬이 들어간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한잔 마셨다.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가만히 듣던 김해경 선생은 고개를 미세하게 살짝 움직였다. 김해경 선생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역시 커피에 대해서 학식이 높다고 생각이 들 때 우리가 앉은자리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왔다.


내가 먼저 하루키를 알아보고 이쪽으로 안내했다. 멜빵을 하고 체크무늬의 넥타이를 하고 한껏 멋을 냈지만 핼쑥한 김해경 선생에게 하루키는 손을 내밀었다.


전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합니다. 잡은 김해경 선생의 손이 유약했고 아주 작았다.


김해경이라 하오. 모두들 나를 ‘이상’이라 부르오.


하루키는 자신의 가방에서 두부를 꺼내서 이상에게 권했다.


커피와 잘 어울릴 겁니다. 우레시노의 두부라서 꽤 부드럽고 입안에서 골고루 퍼집니다. 간장을 찍어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은 고개를 끄덕하며 두부를 한 젓가락 떠먹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하루키 씨가 나를 보자고 했소?라고 쉰 목소리의 이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렵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소설을 씁니다, 이제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만, 그래서 김해경 선생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상은 자세를 좀 더 하루키 쪽으로 당겼다.


김해경 선생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제 소설에 좀 쓰고 싶습니다.


음, 하는 쇳소리가 이상의 다문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난 또스또에쁘스끼를 좋아하오. 그 사람의 글을 아주 많이 읽었다오.라고 이상이 말했다.


저도 악령 정도는 아주 좋아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사회주의자여서 사형선고까지 받고 시베리아 유형 동안 그 자신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악령의 근본은 니힐리즘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라고 하루키가 천천히 말했다.


자멸적 궤변과 괴변이 니꼴라이 쁘레볼로또비치 스따브로낀에 있었는데 말이오. 리자, 리자는?라고 이상이 말했다.


리자가 말했습니다.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 그건 가혹하다, 너무도 가혹하다.라고 하루키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질척이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 사이를 라디오 헤드의 ‘노 서프라이즈’가 흘렀다.


하루키 씨? 나는 이미 죽었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이상이 물었다. 하루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한 번 만진 다음 이상에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모든 격렬한 싸움은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싸움터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기고, 거기서 패배합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존재고 결국은 패배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이기는 방식보다 어떻게 지느냐 하는 패배하는 방식에 따라 최종적인 가치가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하루키의 말을 듣고 마른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자신 앞에 앉아있는 일본의 한 소설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꿈을 꿨다.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https://youtu.be/u5CVsCnxyX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보면 소설을 쓰는 일은 테이블을 만드는 일과 같다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읽은 지 오래되어서 가물가물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 테이블이라는 게 내가 사용하기에 가장 편해야 남들도 그 테이블이 편한 것이다. 내가 쓴 소설의 제1의 독자가 본인인 만큼 자기가 쓴 소설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글을 타인이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밀리의 서재에서 나의 단편 소설들을 출간하자는 연락을 여름에 받고 지금까지 작업을 해서 1월에는 출간이 된다. 몇 개월 동안 다듬어서 나오게 되었다. 뭐 문제가 있지만 한 번 해봅시다,라고 하루키는 처음 출판사에서 듣고,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문제가 많은 소설을 적었다며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나도 크게 별반 다르지 않다.

 

나의 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져도 아주 떨어져 있다. 손가락에서 빛이 나고, 과거로 가거나 사람이 개구리로 변하고 그레즐리 곰과 대화를 하고 동굴에서 사는 거대한 괄태충과 싸우기도 한다. 그저 상상력 하나로 된 이야기들이다. 현실의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의 힘듦을 위로하는 소설은 없다. 전부 초현실이다. 바다가 끓어올라 물고기가 떼로 죽고, 철탑 인간이 걸어 다니기도 한다.

 

이런 현실성이 떨어지는 소설을 해보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의아했다. 하지만 아마도 나의 상상력을 좋게 봐준 것 같다. 출간된다고 하니 당장 두 가지의 일이 떠오른다. 하나는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4, 5, 6학년 때 동화 부였는데 아마 동화부 활동을 하는 내가 미웠던지, 싫었던지 담임이 존경하는 인물을 써내라고 했을 때 톰 소여의 모험의 톰 소여를 써냈다고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을 때리고 교실 뒤에서 벌을 쓰게 했다.

 

또 하나는 2016년도쯤인가, 80년대 등단해서 지역 시인으로 활동하고 병원장으로 있는 그분을 알게 되어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쓴 소설들을 가지고 와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몇 편을 프린트해갔다. 병원장은 거기에 놓고 일주일 뒤에 오라고 했다. 그래서 일주일 뒤에 찾아갔더니 나의 소설에 대한 문제를 지적해주었다.

 

초등 담임과 병원장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나의 글은 현실성이 너무 없다는 것, 감동이 없다는 것, 글에서 카프카의 냄새가 너무 난다는 것, 장난감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 너무 상상 속 이야기를 소설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장은 나에게 감동적인 글을 써보라 하며 감동적인 글을 적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는 그 병원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잘 적는 사람이 적는 게 맞다. 나처럼 현실성이 떨어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잘 적지 못하는 사람까지 거기에 동참할 필요는 없다. 존경하는 사람이 꼭 세종대왕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이어도 존경할만하면 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쓴 소설을 영화로 말하자면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것이다. 실재와 실체가 구분도 없고 초현실과 현실의 경계도 없다. 커피를 마시다가 빨간 조끼를 입은 토끼를 따라갈 뿐이다.

 

나의 문제라면 이 재미없는 소설을 적으면서 내가 너무 재미있어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미운 사람은 소설에 등장시켜 파리로 만들어 파리채로 탁 죽일 수도 있고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 일행과 만날 수도 있다. 하루키는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이 모든 걸 문학이라 한다면 요즘 시대에 문학을 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미친 짓인 것이다. 게다가 나처럼 비현실적이고 초현실 소설을 적는다는 건. 하지만 이런 시대에 문학을 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지금도 구석진 곳에서 등을 구부리고 외로움과 싸워가며 열심히 소설을 적고 있는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1-12-14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12-15 11:48   좋아요 0 | URL
그 담임샘과 병원장에게 뭔가 복수를 한 것 같아서 기분 좋네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stella.K 2021-12-14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됐네요. 축하합니다!^^

교관 2021-12-15 11:48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ㄴ니다!
 


흐린 날에도 불구하고 강물은 어디선가 날아온 빛을 받아 실루엣이 반짝였다. 그 실루엣 사이로 오리들이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하듯 줄지어 한 방향으로 떠 다녔다. ‘그대 저산 멀리 점 되어 날으는 새들같이 떠났지’ 이문세가 노래를 불렀다. 유약한 시절, 사색과 상념의 대부분은 이문세의 노래를 들으며 보냈다.


‘하얀 꽃잎 가득 너의 눈길, 잃어버린 추억 속에 쌓여 아리운 환상인 것을’ 이문세가 목이 터질 것처럼 고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이문세가 노래를 부르면 흐린 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그림이 된다. 안개꽃 추억으로 들어간 사람들과 그림자를 빼앗겨 버려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문세의 노래를 듣고 이곳으로 나와서 몸을 흔들었다. 마치 바람에 보답하는 갈대처럼 몸을 움직였다.


잿빛 구름 가득한 흐린 날이 다음날까지 지속되더니 이내 회색 비를 쏟아냈다. 권태와 단조로움을 등에 짊어지고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이가 그런 풍경에 반항이라도 하듯 고집스럽게 담배연기를 뿜어 잿빛 공간에 틈새를 만들어내지만 이내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틈새는 메꿔졌다. 오전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안개꽃 추억으로’가 흘러나왔다.


이문세가 고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내 맘을 쉬게 해 달라고, 잃어버린 추억 속에 쌓이고 싶다고 이문세는 절규하듯 노래를 불렀다. 마치 빗방울처럼 노래를 불렀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떨어져 창문에 붙는다. 창문에 붙어서 흘러내려 떨어지기 싫다. 이대로 붙어서 창 안에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언제까지고 보고 싶다. 근데, 그런데 하늘 위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등에 붙으면 점점 밑으로 흐른다. 나는 흘러내리기 싫은데 무게, 무게 때문에 계속 밑으로 밑으로 흐른다. 땅에 떨어지고 나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


이문세는 인간승리를 해냈다. 한계를 극복했다. 가끔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같은 타이틀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도전하고 정복하는 모습들. 얼굴이 톰 요크처럼 일그러질 정도로 힘듦을 참아가며 이겨내는 모습을 그동안 왕왕 봐왔다. 그들의 인간승리, 인간의 한계를 넘는 모습은 감격적이지만 티브이에 나오는 그런 일들만이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 볼 것인가.


예전에 글을 쓰기 위해 갑상선을 제거한 30대 초중반 남녀 네 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인터뷰라고 하지만 나는 인터뷰어로서는 재능이 없기에 그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 갑상선의 수술을 받았고 그 후의 생활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있던 갑상선이 없어지면 하루에 8시간씩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활동을 해도(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오후 5시 정도가 되면 몹시 피곤하다. 그 피곤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될 정도라고 한다. 등에 쌀가마니 몇 포대를 둘러 맨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거기에 눈이 몹시 탁해진다. 슬픈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주변성과 정체성에 고민을 하게 된다. 주변에 스며들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는 피곤이 덮치면, 그게 갑상선이 붙어 있을 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고 ‘나는 젊은 나이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같은 자기 비하를 하게 되며 결국 자기 멸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무너진 정신은 모래성 같아서 다시 쌓아 올리기 너무 힘들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갑상선을 제거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해준 덕분에 나는 그들의 힘듦에 아주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근래의 이문세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능력, 슈퍼맨이나 내는 그런 초능력. 이문세는 갑상선을 두 번이나 수술했다. 그 말은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체력이 바닥이 난다. 내가 조깅을 세 시간 한 것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24시간 꼬박 걸어 다닌 것처럼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에너지가 완전히 소거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문세는 공연을 해서 한 시간 이상 노래 몇 곡을 예전처럼 부른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이 사람은 노래가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그리고 그 노래를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팬들에게 얼마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도저히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의 몸으로 한계를 넘어 버린 것이다. 이문세의 팬이라면 아마도 이문세가 노래하는 그 앞에서 그만 오열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문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어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노래를 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로 초능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근래의 이문세를 보면, 보고 있으면 경외심이 든다. 산을 타고 식단 조절을 하고 맑은 공기를 찾아다니고 무엇보다 절벽 밑으로 떨어졌던 정신을 끌어올린 것은 정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한계를 넘어 버린 것이다. 이문세가 노래를 부르면 세상이 행복해진다. 비록 잿빛 하늘이 며칠 계속되는 우울한 날이라 할지라도. 그건 노래를 부르는 이문세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문세가 안개꽃 추억으로 들어가 노래를 부른다. 나 지난날처럼 그 꽃집을 찾아서 하얀 안개꽃 잎에 입맞춤하며 떨리는 그 마음으로 이문세가 노래를 부른다.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비록 빗방울이 되어 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땅으로 꺼져 사라질지라도 창에 붙어 있는 동안 이문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건 행복한 일이다. 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행복한 일은 찾으면 매일 있다. 지금 보이는 저 풍경이 잃어버린 추억 속에 쌓여 어리운 환상인 것이다.



안개꽃 추억으로https://youtu.be/RwwSvfmsA4Q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아가의 똥냄새는 향긋하다고 엄마들은 말한다. 사랑하게 되면 연인의 발 냄새도, 정수리의 냄새도 좋아하게 된다. 단 사랑이 식을수록, 사랑이라는 애매한 무형태의 크기도 줄어들면 더 이상 좋은 냄새도 향기가 아니게 된다.


잠을 잘 때 혹 안 좋은 냄새가 나면 잠드는 게 힘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경우에 그렇다. 호텔이나 펜션 같은 숙박업소에는 안 좋은 냄새가 도사리고 있지 않지만 텐트 속이나 여인숙 같은 곳에서 잠을 청할 때 가끔 냄새가 숙면을 방해하기도 한다.


친구의 자취방에 가면 나는 냄새가 있다. 베개를 하도 빨지 않아 나는 냄새, 담배를 피워대서 연기가 천장에 배어들어 나는 냄새, 설거지를 제때에 하지 않아서 나는 냄새, 제대로 빨지 않은 빨래를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나는 냄새가 전부 뒤섞여 나는 냄새가 있다. 참으로 오묘한 냄새로 한 마디로 싫다. 잠이 오지 않는다.


모텔에 가면 모텔만의 냄새가 있다. 모텔에서 냄새가 난다기보다 모텔이 지니고 있는 모텔만의 단단한 냄새가 있다. 커튼과 대형 티브이와 이인용 탁자와 욕실의 문, 그리고 일괄적인 스킨로션과 드라이기가 주는 모텔만의 색채에서 나는 냄새가 있다. 코로 맡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스며드는 그런 냄새다.


하루 동안 지내다 보면 여러 가지 냄새를 맡는다. 좋은 냄새가 있고 기분 나쁜 냄새가 있다. 요컨대 전기배선이 타는 냄새라든가 음식물 쓰레기에서 나는 냄새는 기분이 나쁘다. 그 외의 안 좋은 냄새는 기분이 나쁠 것 까지야 없어서 수용할 만한 안 좋은 냄새에 속할지도 모른다. 똥냄새는 싫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물론 점성이나 물성 내지는 양에 따라 냄새도 달라지지만 퉁 쳐서 똥이라는 것의 냄새. 안 좋기는 하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물론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정말 기분이 안 좋은 냄새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다. 그래서 부지런하지 않으면 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안 좋은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 열심히 씻고 샤워하고 뭔가를 발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입을 벌리면 옆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입에서 똥내가 난다고 하는 블록버스터급의 말을 듣게 된다.


참 묘하게도 좋은 냄새는 대체로 인공적인 냄새다. 일단 음식 냄새가 그렇다. 불에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는 냄새는 너무 좋다. 분자를 파괴하거나 변형시키는 냄새일까, 음식을 하면서 식재료의 분자가 마구 뒤틀리는 냄새는 좋다. 오전에 아파트 계단으로 퍼지는 계란 프라이 냄새, 일요일 늦은 아침에 솔솔 풍기는 짜파게티 냄새는 늦잠을 결국 포기하게 만든다. 짜파게티 냄새 정말 좋지 않습니까? 미칠 것 같아요 짜파게티 냄새는. 그리고 좋은 냄새라고 하면 향수라든가 방향제, 비누나 샴푸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냄새다.


제대를 하고 잠시 토건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늘 현장에서 일을 했다. 현장에서 하수구를 파서 파이프를 연결하는 일을 했는데 내가 직접 하지는 않고 그 일은 하청을 받은 회사에서 인부들이 했다. 나는 설계도면대로 되는지 그런 걸 체크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인부 아저씨들과 친하게 된 후로 연장을 나르고 하수구에도 직접 들어가고, 그래서 몸에서 하수구 냄새가 났다. 아후 하수구 냄새만큼 싫은 냄새도 없다. 그렇지만 내 몸에서 하수구 냄새가 난다고 나를 피한다거나 냄새가 난다고 나무라는 인부 아저씨들은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트럭 뒤에 전부 올라타서 기사식당에서 열심히 밥을 먹고 볕이 드는 곳에 앉아서 하하하 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또 오후 시간에 열심히 하수구를 팠다. 물론 아저씨들 몸에도 하수구 냄새가 났지만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수구 냄새인데 싫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끔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가 있는 날에는 회사로 출근을 해서 작업을 했다. 그때 김 과장님과 같이 점심을 먹을 때가 있었다. 김 과장님은 비빔냉면을 먹고 겁도 없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저런 업무지시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냄새에 비빔냉면과 자판기 커피와 담배냄새가 뒤섞여 악마의 고름 같은 냄새가 났다. 죽을 것 같았다. 욕이 튀어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10분 만에 두통이 찾아왔다. 김 과장 놈, 게보린이라도 사주고 말을 하던가, 양치질이라도 하고 나서 말을 하던가. 냄새로 머리를 아프게 하다니, 두통이 오는 냄새가 바로 그 냄새였다. 냄새가 사람에게 고통을 주다니. 인간이 입으로 만들어낸 이 지독한 냄새.


순간 저 김 과장의 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쟁 중에 땅 밑으로 굴을 파고 다니는 적군을 물리칠 때 이 냄새를 뿌리는 것이다. 서서히 조여 오는 두통으로 적들은 미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헤헤헤.


나는 나의 고민을 사무실에 남아서 sns에 올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격려를 해줬다. 사람들 덕분에 그 하루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너무 아팠다. 냄새의 여파가 너무 컸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두통이 심했다. 컴퓨터를 끄려는데 빨간빛이 화면에 깜빡깜빡거렸다.


그 빨간불이 계속 신경이 쓰여서 클릭을 했다. 클릭을 하니 어플이 열리면서 하나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텍스트가 보였다. 텍스터의 모양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글자꼴이었다. 아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어플에 반짝이는 텍스트를 클릭했다. 그랬더니 여자 문제에 관한 부분은 여기를, 시험 점수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여기를, 가족문제, 친구 같은 카테고리가 있었다. 나는 직장 상사 카테고리 부분을 눌러 들어갔다. 거기에는 미운 직장 상사를 보내는 카테고리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클릭, 클릭, 더블 클릭.

 

다음 날 김 과장님은 점심에 감자탕으로 통일을 했다. 반드시 감자탕이어야 한다. 감자탕 집에서 부서원들이 점심을 말없이 먹고 있다. 김 과장님도 감자탕을 먹었다. 국물을 떠먹고 마늘을 먹고 양파도 먹고 김치도 먹고 밥도 먹고 묵은지도 먹고 뼈다귀도 뜯어먹는 김 과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잘 먹는다. 점심을 다 먹은 다음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한대 피운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 과장님은 양치질을 한다. 그런데 입 냄새가 없어지지 않는다. 냄새는 사무실을 악취 속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원들은 코를 막다가 나중에는 숨을 헐떡거렸다. 김 과장님이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이 코를 막고 목을 부여잡더니 기침을 심하다가 구토를 했다. 구토물은 더한 악취가 나더니 구토물에서 어떤 생물체가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남들은 싫어하는데 자기만 좋아하는 냄새도 있다. 가령 자동차 정비소에서 나는 기름 냄새나 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작업복 냄새가 그럴지도 모른다. 기억에서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것이 후각이라고 한다. 냄새는 추억에게 신세를 지며 들러붙어있는다. 추억이 물에 불은 신문지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붙어 있는다. 그때 그 냄새, 그 향기가 나는 것 같아.


생각해보면 좋은 냄새 중에 평소에 맡을 수 있는 자연적인 냄새는 꽃향기 정도뿐이다. 꽃집에 들어가면 나는 냄새가 있고 봄이면 강변에 들에 나는 꽃냄새가 있다. 동네 곳곳에 심어 놓은 나무가 꽃을 피우는데 거기서 나는 냄새가 얼씨구 ‘봄’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린다. 그런 꽃냄새가 가득한 봄이 좋다. 봄 냄새가 나니까.



꽃은,

꽃이 피고 지는 건 인간의 삶과도 흡사하다. 피었다 싶으면 언젠가는 시들고 만다. 하지만 개화기의 처녀처럼 또 시기가 되면 반드시 그 예쁜 모습을 궁극적으로 보여준다. 좌절을 맛보았다고 해서 다시 찬란하게 빛나지 말란 법은 없다. 인생의 굴곡을 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꽃이 가득한 집에 살고 싶다. 마당이 있어서 한가득 꽃을 심어놓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해마다 바라보다가 죽고 싶다. 벌레가 일 거야, 청소는? 같은 따위의 충고는 신경 쓰기 싫다. 말을 하지 못하는 꽃이지만 매일 관리를 해준다. 알록달록 일렬로 죽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면 그 뒤의 어떤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모르고 당장 꽃을 보며 웃게 될 것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에도 꽃을 친구의 어머니께 선물한다. 꽃을 받은 어머니는 꽃에 얼굴을 묻고 옛일을 잠시 생각할 것이다. 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네가 나에게 필요하듯이. 비록 계절이 바뀌어 변심한 그처럼 시들어 나를 버릴 지라도. 꽃은 삶이기 때문에, 너는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