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마당에 겨울이불을 빨아서 널어놓고 이불의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어항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계속 보게 된다. 이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마당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이 꽤 재미있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두꺼운 솜이불은 흠뻑 젖어서 무거웠고, 그 몸을 지탱하는 빨랫줄은 아슬아슬하지만 용케도 이불을 받치고 있었다. 빨랫줄은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얇지만 튼튼한 빨랫줄을 신뢰했고 빨랫줄은 긴 시간 온갖 빨래의 무게를 잘 견뎠다. 나는 마당에 앉아 물이 뚝뚝 떨어져 마당 위에 떨어진 물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마도 꿈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았기에 그토록 심도 있게 이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의 나는 이불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방울과 함께 마당으로 슬쩍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표백제로 깨끗하게 닦아버려 물이 다 빠진 마당의 차가운 온도에 나는 물방울과 함께 떨어져 말라 없어지는 꿈을 꾸었다. 이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에서 융해되는 내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다.


마당의 한쪽에는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는 무화과나무도 있고 내가 심어 놓은 포도나무가 올곧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자라서 거짓말처럼 철이면 몇 송이 열렸다. 생긴 건 포도라는 것을 알겠지만 맛에서는 멀어진 포도였다. 약을 뿌리거나 하지 않았기에 포도는 맛이라는 것이 빠져나가버린 포도였다. 어쩌면 포도는 원래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화단의 여러 나무들 틈바구니 속에서 적은 양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신기하게도 포도가 열렸다. 그런 포도나무도 겨울을 나고 있었다.


마당에 강아지가 있었다. 개를 자본주의보다 더 싫어했던 아버지는 개가 새끼를 낳으니 직접 수프를 끓여서 일일이 먹이곤 했다. 새끼들이 수프를 잘 먹을 수 있게 무엇을 만드는 일은 온통 아버지가 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일찍 귀가했기에 왜 그러나하고 보니 강아지들에게 먹일 고기를 준비하느라 그랬다. 덕분에 무럭무럭 자란 강아지들은 마당에 앉아 있으면 내 옆에 자석처럼 와서 붙었다. 꼬물꼬물 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한없이 귀엽게 보였다.


1월의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날이면 나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하 인간을 읽었다. 처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서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찾는 스탠리 브로더스트와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여대생 수전. 이들과 함께 산장으로 간 아들 로니를 찾아달라는 진의 의뢰를 받은 사립탐정 루 아처. 루 아처의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 ‘지하 인간’이다.


지하 인간을 읽으며 이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끔씩 쳐다봤다. 우리 집 개, 깜순이가 옆으로 와서 엎드리면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면 깜순이는 나의 손길이 마냥 좋은 듯, 그 검고 윤기 나는 털을 햇빛과 나의 손에 내어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졸음에 겨워한다. 깜순이의 새끼들은 배가 불러 서로 앙증맞게 굴러다니고 있다.


이불빨래를 너는 따뜻한 겨울의 일요일이면 마당에 앉아서 고민 없이 한두 시간씩 책을 읽었다. 불안도 없고 생각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공포와 두려움도 크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도, 깜순이도, 마당도 전부 소멸해 버렸다. 그때의 그 마당은 오로지 차가운 공기의 냄새와 입자, 그걸 덮어줄 따뜻한 햇살의 기운이 가득했던 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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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과 맹신


나는 빵돌이라 빵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는 단팥빵을 많이 좋아하는데 어린이 때에도 단팥빵을 좋아했다. 단팥빵이 맛있는 빵집은 대체로 모든 빵이 맛있는 거 같고, 단팥빵은 그 모양이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빵을 맹신하다 보면 몸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적당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좋아하는 걸 모두 다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살면서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릴 때는 엄마와 아빠가 그 대부분의 대상이며, 이성에 눈을 뜨면 그와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직장에서는 당연하지만 나의 사수, 나의 직속 선배가 회사 내에서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이끌어주는 것만으로도 이 험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 아닌 것에도 믿음이라는 묘한 풍족한 감성으로 대하며 기대게 된다. 요컨대 나 같은 경우는 ‘시’에 많이 기대는 편이다. 소설이나 시에 힘들 때에는 기대게 된다. 시에 뭐가 있기에 왜 기대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시는 꽤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치가 그렇다. 정치는 특정한 형태가 없으니 정치인이 정치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주로 정치인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치라는 건 아주 기기묘묘해서 내가 믿는 정치인이 어떤 저속한 잘못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면 비슷한 정치이념을 가진 다른 정치인을 믿으면 되는데 인간은 그게 안 된다. 그만 정치와 정치인을 동일시해서 내가 믿는 정치인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거나 내가 믿는 정치인은 그럴 리 없다며 경주마처럼 그저 앞으로 돌격만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에 우리는 집착을 한다. ‘신’을 믿게 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시간이 흐르면 믿는 종교에 폭 빠져서 맹신하게 되고 그에 따른 이해관계에 얽히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하기도 한다. 요컨대 95년 일본의 옴진리교의 사린가스 사건을 보더라도 그렇다. 사린 가스는 걸프전 이후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제조를 금지했다.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린 가스를 종교라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제조하고 뿌린 신도들은 일본에서 상위층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학창 시절에 늘 1등을 차지하며 어른들, 친구들이 모두 우러러보던 엘리트들이 사회로 나가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것 같았는데, 이 세계라는 것이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 같은 일류 엘리트가 하나의 점 같은 존재하는 것에 환멸을 느낀 마음을 뚫고 옴진리교가 파고든다. 네가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 네가 이 세계를 뒤집어야 한다, 너처럼 엘리트가 존경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이 의식을 파고들어 이들은 결국 종교에 맹신하며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맹신을 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중간 매개에 '종교'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돈이 뜯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후원을 한다고 생각을 한다. 돈을 뜯는 사람이 돈을 뜯어내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자기 합리화를 한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너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상관 마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무너질지 모른다. 또 믿었던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에 허망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믿음을 가지되 맹신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믿음에 약간의 틈을 두고 그 안에 의심을 놓아둔다. 믿음에 의심을 가지지 마라, 같은 말은 무시하고 내가 믿는 것에 의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부터도 좋은 왕은, 현명한 왕은 자신 옆에 자신을 의심하는 신하를 두는 왕이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이니기에 늘 올바른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 치우치고 망가지는 게 인간이니 그걸 지적해 줄 수 있는 신하를 둔다는 건 정말 현명한 왕이다. 그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고, 조직에서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귀의 배를 가르면 그 안에 작은 물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아귀는 뱃속에 소화가 안된 작은 물고기가 가득 있어도 계속 먹이를 잡아먹는다. 사자도 그러지 않는다. 배가 부르면 사자 앞에 토끼가 있어도 잡아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귀는 배가 차도 계속 채운다. 탐욕 때문이다. 식탐이 강하다 못해 너무 강하면 탐욕도 강하다. 탐욕이 깊어지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배가 너무 부르면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기분이 상하면서도 탐욕 때문에 숟가락을 놓을 수 없다.


단팥빵은 물론 내 기준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다. 여러 맛있는 빵들이 있지만 가격도 저렴하다. 그래서 단팥빵이 가득 있다면 아주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맹신을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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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택트는, 조디 포스터의 눈을 관통하는 우주는 그야말로 존재론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콘택트를 봤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칼 세이건도 몰랐을 때였다. 콘택트를 다시 보았고 그때서야 소름이 돋았고 조금 불편했지만 조디 포스터가 보는 우주, 그 속에 몸을 던진다고 해도 어쩌면, 정말 어쩌면 괜찮은 사멸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흘러,

알폰소 방식의 우주를 산드라 블록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았다.


그래비티를 내식으로 한 줄로 표현하면 '시야에 들어오는 감각에 대한 도취'라고 하고 싶다.


점 같은 인간이 모여 사는 거대한 행성, 헬멧에 손바닥만 하게 비칠 때 다시 오래 전의 존재론적 인식에 대해서 떠올려보았다.


나는 스톤 박사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은 적이 있었나.


인생에 있어서 1년은 간호 때문에 병실에서 난 창밖을 바라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그다음 해는 중환자실 복도에 난 작은 창밖을 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리고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다. 상황이 생각 밖으로 펼쳐지면 대체로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쥐가 뱀에 쫓겨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닌다. 그렇게 도망을 다니다가 궁지에 몰리면 발악을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고 나면 뱀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순간 쥐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죽음이 곧 나르시시즘 절정에 이르는 순간.


스톤 박사는 그 절망의 끝에서 서서히 딸의 곁으로 다가가려 한다. 경험에 대한 기준치도, 오감을 통한 감각적인 통념의 선이 허물어지려고 한다. 그때, 매트가 나타나 보드카를 들이대며, 자식을 잃는 것보다 큰 슬픔은 없지, 하지만 가기로 했으면 계속 가야 해.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살아가는 거야.


스톤은 그때 깨닫는다. 오늘 죽으면 더 이상 내일부터 죽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두 발로 땅을 밟고 서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죽음에 당당하게 악수를 청할 수 있다는 것을.


진짜로 절망에 빠지면 나 힘들다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 희망이 살을 찌울 수 있는 동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 인간은 두발로 땅을 디디고 서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염원하는 아름다운 우주에서 두 발 없이 유영하는 것보다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그래비티란 그런 것이다.

영원불멸의 우주로 살아가기보다 비록 소명이 다해서 죽어 버릴 지라도 한 인간으로 사는 게 값진 것이다.

애드 아스트라를 보면서 브래드 피트의 눈동자는 지구가 아닌가, 그리고 영화 속 아버지인 토미 리 존스의 눈동자는 우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하고 한 없이 떠도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우주에서 인간의 낙관적인 세포는 점점 소멸해가는 것 같다. 토미 리 존스의 눈동자는 광대하고 넓고 끝을 알 수 없는 고독한 우주를 닮았다.


그에 비해 브래드 피트의 눈동자는 전 우주의 고독이 주는 욕망보다 내가 잡을 수 있는 행복이 있는 지구를 닮았다. 중력이 끌어당기고 안간힘을 써야만 움직일 수 있는 지구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저항 없이 유영을 할 수 있는 멋진 우주보다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것을 기이하게도 마지막 장면 브래드 피트의 눈동자가 말을 하는 것만 같다.


제목의 뜻을 찾아보니 ‘별까지”라는 말인데 뜻은 “어려움을 뚫고 별까지”다. 여기서의 어려움은 현재 우리 인간생활 전반에 깔린 어려움과는 다른 질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 시대는 지금보다 미래이다. 그것이 멀던 가깝던 지금보다 훨씬 앞선 미래다. 영화 속 태블릿이나 우주 해적이나 우주 정거장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거기서 죽 커가고 있거나. 그런 먼 미래에도 지구에서 우주의 한 지점으로 가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간단하게 비행선에 올라 슝하고 갈 수는 없다.


브래드 피트는 참 멋있다. ‘멋있다'라는 건 배우, 진짜 배우 같다는 말이다. 피지컬이나 말투나 얼굴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그래 보인다. 정말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할 법한 사람 같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 ‘옥자’도 기획했다. 브래드 피트도 참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 알 수 없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지구가 광활한 우주보다 훨씬 낫다는 말이다.


우주로의 발걸음이 빨라진 요즘, 너도나도 우주에 대한 관심이 깊지만 영국의 윌리엄 윈저 왕세손의 말처럼 우주로 가는 것도 좋지만 자본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망가져가는 지구에게 좀 더 시선을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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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친구 녀석이 연락 와서 좀 만나자고 했다. 나는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더니 밖에서 좀 만나자는 것이다. 밖에서 만나서 뭘?라는 생각을 했지만 연락은 아주 오랜만에 온 것이고 그 녀석은 나와 어린 시절에 달동네라 불리는 한동네에서 같이 지낸 친구 녀석이었다. 그 동네는 가난이 습격한 동네로 골목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 녀석을 밖에서 만났는데 어딘가로 데리고 가더니 빈 점포가 있는 곳에서 치킨집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녀석은 타이어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벌써 십 년 정도 됐다. 직책도 어느 정도 되고 앞으로도 더 진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식당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치킨집을. 이곳에 빈 점포가 났다는 것을 알고 이래저래 나름대로 알아본 모양이다. 치킨도 여러 군데를 알아본 모양이다. 프랜차이즈로 말이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내도 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었다. 녀석에게는 아이가 셋이 있다. 그중에 둘이 초등학생이다. 곧 중학생이 된다. 그리고 담보로 구입한 아파트의 빚도 갚아야 한다. 각종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을 하다 보니 두 명이 지금처럼 벌어들이는 것으로는 뭔가가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못 한채 그대로 늙어 버릴 것만 같았다. 회사 직원들이 죄다 주식을 하면서 게 중에 누군가는 주식으로 돈을 만지게 되었다. 그래서 덥석 주식을 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손해만 봤다. 회사를 계속 다닌다고 해도 미래가 없다.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타이어 회사를 다녔다면 자영업을 해도 타이어에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같은 말을 했지만 그걸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알아본 것 중에 제일 안정적으로 보인 게 치킨이었다. 몇 달을 다니면서 봐도 이 어려운 시기에 치킨을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치킨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원들이 능력을 발휘하며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자영업을 할 때 왜 전부 식당을 하게 될까. 우리나라는 알겠지만 식당이 포화상태다. 아니, 과포화 상태다. 박찬일 요리사는 인구 7백만 홍콩에는 식당이 2만 개 정도 있는데 현지에서는 그것도 많다고 걱정을 한다고 한다. 서울에는 12만 개 정도 식당이 있다고 한다.


자영업의 종류는 굉장히 많다. 예전 같으면 전파상도 있고, 철물점도 있고, 가구점도 있지만 요즘은 그런 걸 할 수가 없어졌다. 그런 물품은 대기업 마트 같은 곳에서 대체로 저렴하게 다 판매를 한다. 또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배송까지 완벽하게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식당으로 자영업을 하게 되고 식당 중에서도 큰 기술을 요하지 않는 기름에 빠진 닭의 유혹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기름의 유혹은 먹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치킨을 만들어서 팔려는 사람들에게 까지 마수를 펼친다. 기름의 유혹은 대단하다. 다수가 소수에게 다가가 입김을 불어넣는다. 마치 그래야 한다고. 그렇게 시작해서 결과가 옳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선택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 부추긴다.


내 경우를 보면 나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왜 그런 소설을 매일 쓰고 있냐고. 현실적인 소설을 쓰라고 한다. 현실을 반영하고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을 써라고 한다. "너처럼 바다가 끓어오르고, 사람이 수분이 빠져나가 미라처럼 죽어 버리고, 어둠에서 어둠이 새끼를 낳듯 돌출하는 그런 소설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왜 오래도록 그런 소설이나 쓰고 앉아있냐, 현실적인 소설을 써"라고, 기름의 유혹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현실적인 폐부를 찌르는 멋진 소설은 나는 쓰지 못한다. 그건 잘 쓰는 소설가들이 쓰면 된다. 그리고 현실적인 소설은 내가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다. 이미 포화상태인, 잘 쓰지도 못하는, 아니 쓰기 싫은 소설은 쓰기 싫은 것이다. 소설은 어떤 순간에도 개성이다. 부동산에 치이고 직장이 힘들고 매일 숨을 쉴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적인 소설이 있는가 하면, 개와 대화를 하고 뇌파 속에 단백질을 밀어 넣는 소설도 있는 것이다.  


치킨의 유혹은 대단하다. 한 치킨 집이 탄생하면 어딘가에서 또 다른 치킨 집은 소멸된다. 치킨은 장소만 다를 뿐 늘 엇비슷한 양이 다른 장소로 배달된다. 그렇게 치킨은 순환하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 즉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늘 있으나 조직을 만든 초대 사람들은 지금은 한 명도 없고 그 자리를 세대를 거쳐 사람들이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의 한 초로의 소설가가 일본의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다며 산속에 들어가서 글만 썼다. 그 작가가 은둔 작가로 유명한 마루야마 겐지다. 마루야마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어보면 세 번째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라는 챕터가 있다. 국가는 존속할지 모르나 국민은 그 사이에서 소거되거나 소멸할 뿐이다. 어느 나라건 국가는 국민 개개인에 관심이 없다.


기름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시대의 중심에 있다. 티브이나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맞다고 하는데 나 혼자 아니라며 홀로 서서 무엇을 이뤄내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다. 그런 소수의 사람을 동경하고 또 따라 하다 보면 다수가 되고 그것 역시 기름의 유혹처럼 소수를 따라한 다수가 다 성공의 길에 오르지는 못한다. 기름의 유혹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외면할 수도 없고 매일 먹을 수도 없다. 눈으로 기름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먹어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더러운 기름은 몸속에 남아 있다가 어떠한 이벤트를 펼치게 된다.


과포화 상태의 음식점이 즐비한 이곳에서 식당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엉망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우리 현실의 민낯이라 박찬일은 말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열약한 사회 구조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게 식당이다. 차근차근? 몇 년 준비? 이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기름의 유혹에서 그건 있을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영화 ‘감기’에서처럼 정부는 국민을 버리지 않았다, 라는 통수권자의 한 마디가 꿈처럼 지나간다. 


실제 현실판 오징어 게임인 것이다. 그 속에 자본주의에서 조금 밀린 사람들이 우르르 존속되어있다. 치킨 집은 그나마 대안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치킨집은 오늘도 사라지고 오늘도 생겨난다. 오늘도 우리는 기름의 유혹에 시달리거나 현혹된다. 닭은 물에 빠진 것보다 기름에 빠진 닭이 더 맛있음은 전 세계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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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을 다지는 음식, 찜닭


우리 집에서는 오래전부터 찜닭을 왕왕해 먹었다. 그건 순전히 닭 한 마리로 온 가족이 배부르게 먹기 위함이었다. 찜닭을 하면 그 안에 여러 가지를 같이 넣어서 조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찜닭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월급날이거나 아버지가 보너스를 탄 날 정도였다.


간장으로 조려낸 찜닭에는 당면을 가득 넣어 조리해서 마치 잔치 음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당면은 늘 잡채로만 먹었고 잡채는 생일이나 큰집에 갔을 때에만 먹었기에 찜닭에 당면이 가득 들어있으면 그런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간장 양념이 오래 끓인 불에 의해 닭에 스며들면 찜닭은 진정한 맛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한 마리만으로 가족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맛있기도 하지만 찜닭은 슬픈 음식일까.


찜닭은 혀에 깊은 추억을 남겼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꽤 여러 개의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는 튼튼하기도 했고, 낡았기도 했다. 그런 다리를 건너오면서 우리는 그 사이에서 인생의 음식을 맛보았다. 음식에는 슬픔의 맛도, 기쁨의 맛도, 쓴 맛도 시린 맛도 있었다. 찜닭도 그중에 하나의 맛으로 추억 속에 자리를 잡았다.


찜닭이 밥상에 오르면 젓가락이 찜닭에 집중이 되기 때문에 다른 반찬을 그리 필요하지 않다. 된장찌개가 밥상에 오르면 계란말이와 진미채와 오이무침과 생선이 올라오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찜닭을 조리하는 것에는 어머니의 수고가 조금 덜 수고로운 것으로 현명함을 알아볼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간장 베이스에 닭을 쪄서 조리해서 먹는 건 아마도 우리나라밖에 없지 않을까. 간장이 음식의 베이스가 되는 나라는 일본인데 일본에서도 찜닭은 집에서 해 먹지 않는 것 같다. 찜닭도 유행을 타는 거 같다. 한 십 년 전에는 온 거리에 안동찜닭이 지금의 폰 가게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때가 있었다.


나의 입맛에는 집에서 해 먹는 찜닭에 길들여져서 밖에서 파는 안동찜닭은 아주 매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늘 북적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많던 찜닭 집들이 싹 사라졌다. 마치 대만 카스텔라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돼지고기나 소고기에 비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닭을 먹어야 하는데 찜닭은 들어가는 재료가 많아서 인지 다른 닭요리보다 비싸다. 그래서 그런지 안동찜닭을 먹을 바에 치킨을 먹겠다는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집에서 가끔 찜닭을 조리해서 먹으면 아주 예전에 먹던 맛은 나지 않지만 꽤나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제 학생 때처럼 간장 국물에 밥을 비벼서 먹을 만큼 위가 크지 않아서 싹싹 긁어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억의 맛이 난다. 찜닭 한 마리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결속을 다졌다. 그런 음식들이 각 가정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추억의 음식은 마음을 따뜻하게도 하지만 또 마음 저 안쪽에서부터 아프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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