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서정시가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참 별거 아닌데 거기서 내 마음속 아주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무엇인가 때문에 저릿저릿하게 된다. 1900년대에 태어나 시인으로 살다가 1970년대에 죽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가 그렇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인의 이 시에서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융해되어 사라지는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더니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 사라지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슬프면서 아름답다.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당시 무엇 때문에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무게에 짓눌려있다가 시를 읽고 울컥했을지도 모른다.


김광섭 시인은 말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때 이 시를 썼다. 아마 코마 상태에서 그리운 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지나 유심초의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유심초의 노래를 들어보면 운율 때문에 가사가 약간 바뀐 부분이 있다. 아주 신나게 흘러가지만 이미 연약한 부분이 타격을 받은 내 마음은 신나는 리듬에도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김광섭 시인의 친구였던 김환기 화백도 이 시를 읽고 그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 제목이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이다. 점점 그리워지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김환기 화백은 점을 그렸다. 간절함이 가득해지면 점은 짙음을 더해가고 깊어진다. 김환기 화백도 몸이 너무 아팠다. 결국 몸이 너무 아파서 작업을 할 수 없었던 김환기는 수술을 받는다. 1974년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회복 중에 침대에서 떨어져 의식 불명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허무하게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은 부암동에 환기 미술관을 세우고 2004년에 죽음 후 남편이 묻힌 곳 옆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시인 이상(김해경)의 아내였다.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김광섭의 ‘저녁에’를 보고 있으면 그 깊은 세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예술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뭔가를 느끼게 된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면, 오래전 김광섭 시인과 김환기 화백이 본 그 수많은 별들을 지금 내가 보고 있다. 이 세계는 이렇게 순환하여 우리를 이어준다. 이렇게나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별이 되어 다시 만나 꽃들 피운다.


https://youtu.be/EBQzMrr3f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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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


보통 무기력하면 입맛이 없다는데 나는 무기력이 와서 등에 착 달라붙어도 밥맛은 좋기만 하다. 입맛이라는 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무기력을 느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말 그대로 무기력이다. 기력이 없다. 의욕도 없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것도 귀찮고 마음은 점점 어두워져 우물 밑바닥으로 꺼지고 싶다. 당연히 밥맛도 떨어져야 하는데 모든 것이 무기력의 조건에 다 들어가도 밥맛 만은 좋다. 무기력이 찾아오면 얼씨구 하며 맛있는 걸 찾아 먹는다.


예전에도 친구들과 삼겹살을 와구와구 먹으면서 나 무기력이야,라고 하면 친구들이 응, 그래. 한 마디 대꾸해주고 끝이다. 나에게는 옛날부터 무기력과 입맛의 부등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경우 무기력은 계절을 따라온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나 초여름에서 본격적인 폭염으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쯤에 온다. 하루나 이틀 정도 굉장하다. 무기력에 사로 잡히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못한다. 봄에 느닷없이 닥치는 무기력에서도 비빔밥으로 해결했다.


사실 봄에 오는 무기력은 무기력이라기보다 무력감이다. 무기력과 무력감은 엇비슷한데 사전적으로 찾아보면 무기력은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음'라고 나와 있고, 무력감은 '스스로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드는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느낌'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무기력과 무력감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봄에 찾아오는 무기력은 무력감에 가깝다. 말 그대로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그런 기운이 벚꽃과 함께 온 몸으로 쏟아진다.


그에 비해 여름에서 본격적은 여름으로 가는 이 길목의 하루 이틀 정도 오는 건 무기력이다. 만약 내가 회사를 다녔다면 열두 번도 더 잘렸을 것이다. 댕강댕강 잘렸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기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 짱 박혀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무기력하게 있어봐야 부장님의 찢어진 눈에서 쏘는 레이저를 받거나, 비빔국수를 먹고 믹스커피를 마신 후 한 모금의 흡연을 한 그 무시무시한 입으로 나에게 욕을 왕창 날렸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화장실에 숨어서 무기력을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짱 박히는 게 더 잘릴 이유네.


근래에도 하루 이틀 정도 무기력에 시달렸다. 조깅을 할 때 무기력은 큰 걸림돌이다. 보통 달리는 것처럼 달리면 금방 숨이 차고 몸이 농성을 한다. 다리도 무거워서 전혀 평소처럼 달리지 못한다. 그럴 때 욕심을 내고 평소처럼 달리면 심장에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엄청난 과부하가 느껴지는데 그럴 땐 걷는 수밖에 없다. 보통 무기력은 계절을 탈 때 동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을을 타고, 그때 무기력을 느끼기도 한다는데 나는 봄이거나 여름에서 좀 더 여름으로 넘어가는 기묘한 시기에 계절을 타고 무기력을 느낀다.


무기력을 좀 더 다독이기 위해 며칠 가자미 구이를 먹었다. 너무 입맛 돈다. 미칠 지경이다. 생선구이의 묘미는 잘 구워진 등을 젓가락으로 죽 떠서 입 안 가득 먹는 것이다. 그리고 맥주나 와인을 곁들어서 홀짝인다. 정말 꿀맛이다. 가자미 구이는 언제나 맛있지만 무기력할 때 먹으면 좋은 치유제가 된다. 보통은 가만히 있으면 무기력증은 지나간다. 무기력이 심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가 매년, 매 시기에 느끼는 무기력은 일종의 희구 같은 것이다. 살아있다고 보내는 신호.


그래서 무기력이 오면 무기력을 떨쳐 버리려 하기보다 내가 살아 있으니 이런 신호가 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리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혼자서 축하를 하는 것이다.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이런 기묘한 감정이 때가 되면 찾아와 주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보통 브런치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치부나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뱉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나도 결심을 하고,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예전에는 브런치에 그런 글을 몇 번 적었다. 이렇게 매일 글을 적게 된 데는 불안 때문이고 그 불안이 나를 텍스트의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시신경이 조금 망가졌기 때문에 생활에 불편함이 있다. 그리고 망가진 시신경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점점 망가져간다. 확대되고 왜곡될 뿐이지 축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 잠들기 직전까지 매일,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되는 불안에 산다. 시야가 나빠지는 게 아니라 시야가 소멸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은 마음을 둘 곳을 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이의 느닷없는 죽음(이게 나의 불안을 더 키웠다) 그리고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고 하던 녀석의 갑작스러운 자살시도는 나를 굉장한 충격에 빠트렸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처럼 태어난 김에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생활규칙을 정하고 그 반복을 매일 이어가야 한다. 거기에는 매일 요만큼 분량의 소설을 적는 것과 조깅이 있다. 심장에 건강한 무리를 매일 준다. 불안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자아가 나의 고민이며 늘 나의 자아와 싸우게 된다. 자아는 불안을 키우고 그 불안은 연쇄를 일으킨다. 중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불안과 늘 타협을 하고 고민을 한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알 수 없는 미래의 크고 작은 불안에 대한 생각은 매일 보는 생리작용과 같다.


그런 의미로 무기력이 오면 환영하지는 않지만 빨리 나가라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살아있지 않다면 이 무기력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무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한 가자미 구이를 실컷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대부분은 추억에 기인한다. 그 추억 때문에 그 음식이 맛있다. 살아있는 동안 크고 작은 불안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료처럼 여기고 평생 토닥이며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리고 맛있는 걸 먹자. 하루키는 좋은데 소확행이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매일 맛있는 걸 밥상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작지만 소중한 행복이다.


한 곳에서 15년을 있었더니 그때 왔던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와서, 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네요, 같은 말 하는데 이 자리에서 변화하되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도록 내 개인적으로는 치열하게 생존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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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7-15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느러미와 꼬리를 잘린 상태여서 그런지 가자미보다 너무 날렵한 유선형의 다른 생선처럼 보이네요.ㅎ

교관 2021-07-15 12:57   좋아요 0 | URL
맛있어요 ㅎㅎ. 맛있으면 됐죠 :) 더운데 시원한 하루 되세요
 


바다에서 멍 때리기.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거, 나는 오히려 그래서 좋다. 바다에 나오면 노인들이 늘 앉아서 바다를 보고 있다. 겨울이면 두꺼운 옷을 입고, 여름이면 얇은 옷을 입고 나와서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그런 노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노인의 뒷모습과 바다의 공통점은 오늘도 아무 일 없는 듯 보인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지루하지만 고요하다. 노인의 뒷모습에는 세계가 스며들어있다.


해가 떠 있어도 구름이 막을 만들어 빛의 투과율을 줄인다. 바다 고양이들이 장난을 치며 주차해 놓은 자동차 밑으로 삼삼오오 기어들어가 코앞까지 닥친 여름을 맞이한다. 아직 어린 바다 고양이는 뒷바퀴 위에 올라타 어미에게 야옹야옹거린다. 따뜻해요. 내 손도 따뜻한 너의 손을 덴마크식 바다가 잡는다. 바다가 내민 손을 잡으면 위로가 된다.


혼자서 양손을 맞잡고 있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작용. 연일 이어지는 고독한 바다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런 바다에 매일 나와서 등을 지고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들. 그런 바다 노인들을 바라보는 나.


세계는 변하고 있다. 호흡으로 자정작용을 하는 불꽃은 점점 꺼져서 딱딱하게 변해버린 공장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전환한다. 전환. 전환은 어느 순간 우리를 노인으로 바꿔 놓는다. 시간에게 영혼을 강탈당해버린 사람들은 껍데기만 지닌 채 허위허위 앞으로를 보낸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워라. 버어져 나오면 잘라버리고 모자라면 늘리면 된다.


노인들의 바다, 덴마크식 바다에 나오게 되면 이제 좀 숨을 쉰다. 오늘따라 유난히 맛이 좋은 커피에 감사한다. 노인들은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인양 정해 놓은 벤치에 매일 나와서 매일 비슷한 바다를 매일 비슷한 자세로 바라본다. 그들의 등에는 전환된 세계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위로가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언제든지 그 손을 잡을 수 있다. 단지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다. 용기와 호기심의 차이는 무엇일까. 주인이 외출한 집에 들어가는 건 용기일까 호기심일까.


나보다 일찍 나온 노인들은 굽은 등을 보이며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하얀 머리털과 눈썹 사이사이 하얀 털이 마치 유명 화가의 실수처럼 보인다. 노인들은 바다를 보는 것에 지루해하지 않는다. 마치 영혼이라도 빨려 들어가 버린 것처럼 진지하게 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역시 그런 노인들의 등을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등에는 외로움보다 고독보다 평온이 세계를 이루고 있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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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7-13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저녁 해질녘 바닷가를 산책하곤 합니다.
신발을 벗어 들고 바닷물에 젖어가며 걷다 보면 해가 지는데, 요 저녁 노을이 또 괜찮더군요.

교관 2021-07-14 13:03   좋아요 0 | URL
본격적인 노을의 계절입니다. 즐기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기쁨 ㅎㅎ
 

우산을 들고 있음. 비가 엄청 오는 날인데 사진에는 표가.

비가 너무 온다. 비가 내린 지 6일째. 6일 동안 비가 신나게 퍼붓고 있다. 지금 이 시간 잠시 소강상태지만 아침에도 비가 왔었고 소강이 곧 끝나고 열심히 비가 쏴아 내릴 것 같다. 6일 내내 그랬으니까. 일기예보도 정확하게 알아맞히지 못한다. 지금은 그런 시대에 접어들었다.


비가 내릴 때에도 우산을 들고 조깅코스를 걷거나 다리 밑에서 근력운동을 조금 하고 들어오니 운동복과 운동화가 젖어서 빨래를 해도 마르질 않는다. 이다지도 비가 매일 쏟아지듯 올 수 있을까. 폭우에 가까운 비가 주룩주룩 지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잠시 소강상태의 하늘을 담았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도 조깅 코스에는 꽤 사람들이 나와서 우산을 들고 걷거나 우산을 포기하고 그냥 평소처럼 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매일 나온다. 매일 나와서 매일 나(교관이)와 지나치며 무언의 연대감 같은 것을 느낀다. 달리는 사람들은 비가 오는 건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6일 동안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도로에 물이 많이 고인다. 어떻게든 고인 물을 피해 끙끙하며 걷지만 꼭 말미에 풍덩 빠지고 만다. 비가 내려 옷이나 팔이나 얼굴이 축축해지는 건 참을만한데 양말이 축축해지는 건 어떡해도 적응이 안 된다. 비가 계속 오니 인도에 물이 많이 찼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는 어김없이 물웅덩이가 생긴다. 그런데 저 앞에서 차가 조금 빠르게 오면 머리를 빨리 굴려야 한다. 물웅덩이에서 어떻게든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차가 지나가면서 물이 튀는 걸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다. 차들도 이렇게 비가 쏴아 내리면 운전이 만만치가 않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사진으로 담기지 않아서 안타깝다. 그럼에도 우산을 쓰고 걷는 아저씨.

어제는 우산을 들고 조깅코스에서 벗어나 인도에 접어들었는데 중간에 큰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운동화를 신었기에 물웅덩이에서 피하려고 끙끙거리며 뒤꿈치를 들고 가로질러서 천천히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태권도복을 입은 초등학생이 아무렇지 않게 풍덩풍덩 밟고 물웅덩이를 지나갔다. 순간 지는 듯한 이 기분.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그랬는데. 용감했을 때가 있었다. 물웅덩이 따위 겁내지 않고 풍덩풍덩 밟으며 재미있게 지나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가 많이 오면 양말이 젖는 게 너무 싫다. 발이 축축해지는 게 짜증이 난다. 운동화 안으로 물이 예고도 없이 들어와 영역을 넓혀 발이 축축해지는 게 너무 싫어졌다. 이렇게 축축한 발바닥으로 한참을 또 걸어가야 한다는 게 더 싫다.

운동화가 수중화가 되었다. 이 와중에 지렁이 크기 뭔데.

이렇게 보니 나는 싫은 게 너무도 많아진 것이다. 좋아하는 건 간단하고 몇 개 없고 포괄적인데 싫어하는 건 이렇게도 구체적이다. 6일 동안 운동화 두 켤레가 다 젖어서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또 운동화가 홀라당 다 젖었다. 라디오에서도 그러고 아는 동생도 그랬는데 여기, 이곳의 여름 날씨가 점점 동남아 지역의 날씨를 닮아가는 것 같다. 긴긴 여름의 뜨거운 날이 지속되는 게 아니라 여러 날의 우기가 반복이 되면서 비구름이 하늘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다가 잠깐씩 사라져 해가 뜨는 그런 날. 그러다가 느닷없이 소나기가 콰르르 쏟아져 모든 것을 다 젖게 만든 후 난데없이 해가 불쑥 나타나는 그런 날씨.


2년 전, 그 이전의 여름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덮치기 전에도 여름이 여름 같지 않아서 한철 장사라고 불리는 해안가의 상점들이 울상이었는데 이제 코로나가 사라지더라도 그 이전의 여름 같은 호화롭고 오래도록 뜨겁고 시원한 해변의 여름은 맞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천오백 원짜리 우산 ㅋㅋ

비가 왔다 안 왔다 하는 레인 시즌이다. 비를 좋아해도 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리게 되면 지친다. 빨래가 빨리 마르지 않기 때문에 지치고, 비가 추적추적 오면 방심하고 걷기 때문에 비가 쏴아 올 때 보다 더 젖기 때문에 지치고, 이 굽굽함 때문에 지치고, 뇌에 까지 습기가 꽉 들어차 버린 것 같아서 지친다. 비가 올 때 수동적으로 우산을 쓰고 움직이는 건 정말 너무나 싫다. 또 싫어하는 것의 열거. 좋아하는 걸 적어보자.


비가 오는 날 밖이 훤하게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홀짝 거리며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는 건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7년 동안 가던 로컬 카페가 있었지만 사라지고 없어졌다. 역시 좋아하는 건 간단하고 빨리 끝난다. 조금 길게 좋아하는 걸 적어보자.


내가 있는 바닷가에는 바다가 훤히 다 보이는 목욕탕이 있었다. 8, 9년 전에는 여름에 바닷가를 뛰고 난 다음 그 목욕탕에 가면 아주 기분이 좋다. 온탕이든, 냉탕이든 앉아서 보면 통유리 전부로 바다가 보인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5층인가 그렇고, 건물 바로 밑으로는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유리가 다 보이는 유리라고 해도 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억지로 헬기를 타고 투투투하며 남탕을 훔쳐본다면 모를까. 여탕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들은 바다가 보이는 탕에서도 한두 시간 만에 목욕을 하고 나가는데 여자들은 또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무튼 바닷가에 있는 목욕탕은 좋았다. 태양이 바짝 태워버린 몸뚱이를 씻고 냉탕에 들어가면 시원하다. 거기에 앉아서 먼바다를 보는 건 사치를 즐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운치가 있다. 비가 온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는 건 좋지만 비 속에 있는 건 싫다. 역시 싫은 것으로 마무리.


6일 동안 계속 비가 내리기 전에는 비가 쏴아 오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다가 그쳤다가 다시 내렸다가 잠시 해가 떴다가 사라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날에 조깅을 하다가 저녁에 하늘을 봤더니 노을이 노을 같았다. 이제 이 레인 시즌이 끝나면 자연은 그야말로 붉은 노을의 자태를 뽐낼 것이다. 돈이 들지 않기에 우리는 그걸 즐기기만 하면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너 자체가 먼지 행복해져야 한다. 너만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하지만 행복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돈만 많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않다.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도 행복해지지는 않다. 인간관계가 원만하다고 해도 행복하지는 않고, 사장이라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다. 이 모든 게 다 충족이 되어야 비로소 행복에 도달한다. 그러니 행복하려면 노력을 굉장히 해야 한다. 세상에 아무도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가 세상을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미칠 듯이 타오르는 붉은 노을을 보려면 노을을 보러 나가야 한다.


다른 계절에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볼 수 없다. 눈을 보려면 다시 겨울을 기다려야 하듯이 미칠 듯이 타오르는 붉은 노을을 보려면 붉은 노을이 지는 이 계절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돌아왔을 때는 실컷 본다. 바다 멍에 이어. 노을 멍도 좋다. 조깅코스에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자신만의 벤치에 앉아서 저 노을을 10분 정도 가만히 보는 것이다. 10분이라는 시간은 아주 상대적인 것으로 유튜브에서 10분은 너무 길지만 노을을 보는 10분은 그렇게 길지 않다. 금방 간다. 인생처럼.

스티븐 킹의 소설이 생각난다. 높은 풀숲에서 처럼 한 번 갇히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곳. 이런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물이다. 물이 된다면 어떤 곳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같은 쓸데없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길거리에 있는 화단에 심어 놓은 풀인데 밤에 찍으니 조명을 받아서 이렇게 보인다. 이렇게 보여도 비 때문에 촉촉하게 젖은 풀이다. 이렇게 6일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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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에서 기훈이가 형에게 이지안의 안부를 묻고 박동훈은 전화가 오지 않아서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기훈이가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5분 보다가 꺼버렸다고. 가장 오빠가 12살인데 동생들을 위해 다니면서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고. 내가 티브이 속으로 들어가서 애들을 꺼내오고 싶다고. 기훈이가 기훈이 스타일로 이야기를 할 때 박동훈은 박동훈 스타일로 덤덤하게 듣는다. 그리고 기훈이가 말한다. 다음 날 다시 봤는데 보기 잘했다고, 아이들은 똑똑하게 잘 살아간다고,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고. 아이들은 다 자가 치유능력을 가지고 있더라고. 기훈이는 자신의 형과 이지안을 위해서 자신의 스타일로 그렇게 위로해준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누군가 나에게 정말 무서운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를 추천해준다. 에이 그게 뭐야?라고 하지만 일단 보고 나면 정말 무서워서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폭력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흔한 폭력이 아니다. 소외와 방치에 관한 폭력이다. 엄마에게 버려진 4남매가 도시 속에서 망가져가는 이야기다. 그것이 너무 현실적이고 덤덤하게 흘러가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나의 아저씨에서 기훈이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고 싶다.


유키는 큰 오빠 아키라에게 몇 달 전에 받은 초콜릿 과자를 먹다 남겨 놓은 것을 꺼내 먹는다. 그 장면은 그저 물 흘러가듯 지나가는데 유키가 꼭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내내 조마조마하다. 유키를 죽이지 말라고, 깨끗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유키를 죽이지 말라고, 고레에다 감독에게 빌고 또 빌었다. 당신의 다른 영화에서는 사람을, 유키 같은 아이를 죽이지는 않잖아. 인형을 좋아하던 인형 같던 유키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영영 인형이 된다. 제발 죽이지만 말라고, 하지만 영화는 나에게 말했다. 유키는 죽은 게 아니야, 비행기를 타는 것뿐이야.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너무너무 슬픈데, 미친것처럼 슬픈데, 정말 슬픈데 그 슬픔이 건조하여 슬픔으로 하여금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는다.


소외된 이들에게 쏟아진 무차별적 폭력을 온몸으로 받는 아키라와 차별로 인한 무차별적 방치를 그대로 받아들인 유키는 결국 하나의 길로 간다. 아이들을 무섭게 방치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현실 속 배고픔을 견디는 아이들은 그래도 밝기만 하다. 손톱 하나라도 놓치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데 아이들은 내일을 오늘처럼 살아간다. 방치하고 차별하는 영화 속 어른들이 죽일 만큼 밉지만 그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외롭다. 외로워서 사진을 올리고 일과를 적는다. 고독해야 하는데 고독은 소거되고 외롭기만 할 뿐이라 견디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후 아이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 기훈의 말처럼 남은 아이들은 자가 치유능력이 있다. 아이들은 나름 힘이 있다. 또 동훈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거,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다. 겸덕이 동훈에게 한 말처럼 네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 지안이 행복해지면 모두가 행복하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아이들은 불행하지만 노력해서 행복해질 것이다. 기훈의 말대로 아이들은 똑똑하니까. 더불어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역시 본인이 행복해야 주위가 행복해진다.


박해영 작가가 나의 아저씨 각본을 들고 김원석 감독을 찾아갔을 때 읽어 보니 너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시작하지 말고 코믹물 하나를 먼저 만들어서 찍고 난 다음 ‘나의 아저씨’를 연출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또 오해영’이다. 그리고 ‘나의 아저씨’가 나왔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자랑스러운 어른, 멋진 어른이고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그런 어른보다 좋은 어른으로 남자. 좋은 말, 좋은 글처럼 좋은 어른이 가장 좋으니까. 아플 때는 미쳐버릴 것처럼 아파하자. 우리에겐 다 자가 치유능력이 있으니까.


[MUSIC 02] 보석(2004), 영화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중. POLARIOD C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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