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에서 기훈이가 형에게 이지안의 안부를 묻고 박동훈은 전화가 오지 않아서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기훈이가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5분 보다가 꺼버렸다고. 가장 오빠가 12살인데 동생들을 위해 다니면서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고. 내가 티브이 속으로 들어가서 애들을 꺼내오고 싶다고. 기훈이가 기훈이 스타일로 이야기를 할 때 박동훈은 박동훈 스타일로 덤덤하게 듣는다. 그리고 기훈이가 말한다. 다음 날 다시 봤는데 보기 잘했다고, 아이들은 똑똑하게 잘 살아간다고,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고. 아이들은 다 자가 치유능력을 가지고 있더라고. 기훈이는 자신의 형과 이지안을 위해서 자신의 스타일로 그렇게 위로해준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누군가 나에게 정말 무서운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를 추천해준다. 에이 그게 뭐야?라고 하지만 일단 보고 나면 정말 무서워서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폭력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흔한 폭력이 아니다. 소외와 방치에 관한 폭력이다. 엄마에게 버려진 4남매가 도시 속에서 망가져가는 이야기다. 그것이 너무 현실적이고 덤덤하게 흘러가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나의 아저씨에서 기훈이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고 싶다.


유키는 큰 오빠 아키라에게 몇 달 전에 받은 초콜릿 과자를 먹다 남겨 놓은 것을 꺼내 먹는다. 그 장면은 그저 물 흘러가듯 지나가는데 유키가 꼭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내내 조마조마하다. 유키를 죽이지 말라고, 깨끗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유키를 죽이지 말라고, 고레에다 감독에게 빌고 또 빌었다. 당신의 다른 영화에서는 사람을, 유키 같은 아이를 죽이지는 않잖아. 인형을 좋아하던 인형 같던 유키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영영 인형이 된다. 제발 죽이지만 말라고, 하지만 영화는 나에게 말했다. 유키는 죽은 게 아니야, 비행기를 타는 것뿐이야.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너무너무 슬픈데, 미친것처럼 슬픈데, 정말 슬픈데 그 슬픔이 건조하여 슬픔으로 하여금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는다.


소외된 이들에게 쏟아진 무차별적 폭력을 온몸으로 받는 아키라와 차별로 인한 무차별적 방치를 그대로 받아들인 유키는 결국 하나의 길로 간다. 아이들을 무섭게 방치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현실 속 배고픔을 견디는 아이들은 그래도 밝기만 하다. 손톱 하나라도 놓치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데 아이들은 내일을 오늘처럼 살아간다. 방치하고 차별하는 영화 속 어른들이 죽일 만큼 밉지만 그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외롭다. 외로워서 사진을 올리고 일과를 적는다. 고독해야 하는데 고독은 소거되고 외롭기만 할 뿐이라 견디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후 아이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 기훈의 말처럼 남은 아이들은 자가 치유능력이 있다. 아이들은 나름 힘이 있다. 또 동훈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거,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다. 겸덕이 동훈에게 한 말처럼 네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 지안이 행복해지면 모두가 행복하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아이들은 불행하지만 노력해서 행복해질 것이다. 기훈의 말대로 아이들은 똑똑하니까. 더불어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역시 본인이 행복해야 주위가 행복해진다.


박해영 작가가 나의 아저씨 각본을 들고 김원석 감독을 찾아갔을 때 읽어 보니 너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시작하지 말고 코믹물 하나를 먼저 만들어서 찍고 난 다음 ‘나의 아저씨’를 연출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또 오해영’이다. 그리고 ‘나의 아저씨’가 나왔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자랑스러운 어른, 멋진 어른이고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그런 어른보다 좋은 어른으로 남자. 좋은 말, 좋은 글처럼 좋은 어른이 가장 좋으니까. 아플 때는 미쳐버릴 것처럼 아파하자. 우리에겐 다 자가 치유능력이 있으니까.


[MUSIC 02] 보석(2004), 영화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중. POLARIOD C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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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두 알씩 먹는 별거 아닌 계란을 부침개로 만들어 먹으면 똑같은 일상이 조금은 똑같지 않은 일탈 같은 기분을 준다. 하루키식으로 말하면 소확행인 것이다. 나는 하루키를 너무 좋아하지만 하루키가 만들어 낸 이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나 어딘가에서 쓰지 않는다. 이게 유행이 되어 버린 이후에는 더 말하지 않는다.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라는 말에서 주는 평온함과 아주 따뜻함이 있지만 어쩌면 그건 하루키라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세계적인 작가의 입장이라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일상의 굳건한 방어막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일상을 침범할 수 없도록 갉고 닦았다. 그렇기에 매일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우리는 작은 행복을 매일 느끼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도 엄청난 노력을. 그래야 하루키가 말하는 소확행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계란 부침개는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라기보다 ‘악착같이’ 밀가루 조금과 계란을 저어서 팔이 아플 만큼 물처럼 만들고 파를 칼질을 해서 (조금 거짓말 보태서) 죽기 살기로, 요리 같지 않지만 요리를 해야 조금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분을 맛보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관념은 금방 사라지고 빨리 끝나기 때문에 소소한 행복은 나의 인생에서, 내 일상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악착같은 행동으로, 죽기 살기로 해야 아주 작은 행복에 가까운 덜 불행한 무엇인가가 딸려 오기 때문에 그것을 길게 느끼고 길게 가져가려면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 아니라) 이를 악 물고 노력을 해서 얻은 행복이어야 한다.


소확행은 하루키가 만들어냈는데 하루키에게만 어울리는 것 같다. 매일 오전에 조깅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그 사이와 간극에서 얻는 작은 행복은 하루키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생활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꽃등심을 먹는다고 해서 진정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이 팍팍하고 반복적인 루틴을 좋아하고 적응이 이미 된 나도 지겹다고 느낄 때 계란 부침개를 만들어 먹는다. 준비가 필요하고 과정이 있어야 하고 만드는 동안 어울리는 음악도 틀어야 한다. 어떤 음악을 주로 듣냐고 하면 미트로프의 I’d Do Anything For Love다. 굉장히 강렬한 기타 러프로 시작하면서 피아노의 연주가 따라온다. 이 노래는 12분짜리 대작으로 강렬한 록 음악인데 사랑에 관한 노래다. 록 음악인데 피아노가 주가 된다. 그런데 피아노가 줄기를 이끌고 가지만 록의 다른 연주에 방해를 주지 않는다. 기타와 피아노가 이렇게도 잘 어울리는 록 음악이 있을까. 요즘 팝은 컴퓨터로 만든 음악이라는 게 느껴지지만 미트로프의 음악에는 악기들의 직접적인 연주가 다 살아있다. 그래서 음악을 크게 들으면 그 섬세한 부분까지 진지하게 연주되는 록음악의 진수를 들을 수 있다. 거기에 미트로프의 마성적인 목소리까지.


미트로프는 럭비선수였다가 노래를 하게 되었다. 미트로프 하면 재미있는 게 얼굴이 험상궂게 생겨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사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 ‘노팅힐’과 ‘러브 엑츄얼리’에 주인공들이 언급을 한다. 노팅힐에서는 줄이라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첫 날밤을 보낸 후 대화를 하면서 미트로프를 언급한다. 탑스타로 살아가는 고충에 대해서 애나가 말을 하면서 가슴도 수술해야 하고 어쩌고 하면서, 미트로프를 언급하는데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트로프에게만 대시를 받지 않으면 된다, 같은 뉘앙스였는지, 어떻든 이상한 탑스타에 미트로프가 있는 것이다. 또 러브 엑츄 얼리에서는 리암 니슨과 이제는 청년이 된 아들 토마스 생스터의 대화에서 미트로프가 언급된다. 미국에는 미트로프라는 이상한 음악을 하는 가수도 있다 같은 말을 아버지가 한다. 두 영화 모두 영국의 영화고 두 영화에서 아무튼 미트로프를 이상한 음악을 하는 이상한 가수로 언급하지만 밉지 않게 말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미트로프의 음악이 좋아서 그의 앨범을 구입해서 듣곤 했다.


미트로프의 ‘아 두 에니싱 포 러브’는 정말 좋은 노래니까 유튜브로 한 번 감상해보자. 앨범 버전(12분)이 있고 뮤직비디오 버전(7분)이 있는데 물론 노래는 앨범 버전에 좋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보면 미트로프가 야수(영화 미녀와 야수)로 분장해서 나온다. 뮤직비디오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은데 몹시 아름다운 여성이 나온다. 괴물이 된 미트로프가 그 인간 여성이 아름다워 수영 아닌 수영을 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본다. 그리고 떠나면서 목걸이 같은 걸 남긴다. 산통 깨는 얘기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바로 수갑이다. 어떻든 뮤직비디오는 아름답고 노래는 너무 좋다.


앨범 버전은 12분이니까 이 노래 한 곡이 끝나면 계란 부침개가 완성된다. 만드는 동안 퍼지는 냄새 또한 좋아 죽을 것 같다. 좋아 죽을 것 같은 냄새는 이 세상에서 보통 음식 냄새다. 그냥 먹어도 맛있다. 그냥, 술도 밥도 뭣도 없이 그저 계란 부침개만 뜯어먹는 맛이 있다.


다른 날에는 싸구려 와인과 함께 와사비를 죽죽 뿌려가며 먹는다. 이것도 참 맛있다. 와사비는 늘 느끼는 거지만 뜨거운 음식에 더 잘 어울린다. 계란만으로 부침개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고 밀가루로 약간 섞어서 같이 먹어도 맛있다. 계란 부침개는 그렇다. 그래서 먹고 있으면 조금은 일상에서 벗어난다. 만드는 동안 이상한 미트로프의 음악도 듣고(미트로프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일탈인 것이다. 이상한 미트로프 씨) 싸구려 와인 같은 술도 곁들여서 먹으니까. 냠냠


https://youtu.be/9X_ViIPA-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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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14화에 박동훈이 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정희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려고 가게 앞에 앉아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때 지안이 옆에서 십 분 동안 같이 있어준다.


그렇게 죽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이 흘러나온다. 엣 세븐틴은 제니스 이안이 17살에 겪었던 일로 예쁜 소녀들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들로 인해 열일곱 소녀가 겪어야 했던 사랑에 대한 좌절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i learned the truth at seventeen로 시작을 한다. 당시 제니스 이안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있다. 나는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아 버렸어,라며 제니스 이안은 그 특유의 쓸쓸함으로 그때 받은 사랑의 좌절을 노래한다. 깨끗하고 맑은 얼굴을 가지고 지난 사랑의, 당시에 받은 좌절을 쓸쓸하게 노래한다.


그건 마치 정희를 보는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는 정희는 혼자가 되면 더없이 쓸쓸하고 외롭다. 잠드는 것이 무섭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겁다. 사랑의 좌절이 정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누군가 정희를 안아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려 버릴 것만 같다. 그건 아마도 정희 옆에서 십 분 동안이나 같이 있어줬던 이지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니스 이안은 14살에 데뷔해서 75년에 엣 세븐틴으로 빌보드 1위에 오르고 75년 전체 히트곡 랭킹에서 19위를 차지한다.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이 밤,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을 듣는 것도 이 밤을 보내는 울림으로 좋다. 더불어 이안이라는 이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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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당길 때가 있다. 국물 있는 음식은 뜨거울 때 먹는 게 맛있기 때문에 빨리 먹에 된다. 특히 돼지국밥 같은 경우에는 고개를 들지 말고 숟가락으로 팍팍 떠먹는 게 맛있다. 그래서 탕이나 국은 밥을 말아서 후루룩 먹는 속도가 배가 불러오는 속도를 이기기 때문에 한 그릇 더 먹게 된다. 그래서 국에 밥을 말면 아주 많이 먹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어도 맛있고,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도 맛있고, 복국도 그렇고 탕은 다 맛있다. 그래서 매일 국을 한 끼 꼭 챙겨 먹는다면 나는 아마도 살이 많이 쪘을 것이다. 하지만 국이나 탕이 맛있어서 왕왕 국물이 당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미치도록 당긴다.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다. 보통은 그럴 때 라면을 끓여 먹는데 라면을 끓이면 국물을 마신다기보다 라면과 밥에 딸려오는 국물을 먹기 때문에 국물을 후루룩 마시는 느낌은 없다.


그래서 국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인다. 참으로 끓이기도 쉽고 푹 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좋다. 기본적으로 나는 미역이 좋다. 한동안은 조깅을 하고 매일 들리는 동네 빵집에는 지역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역으로 만든 미역 빵을 팔았다. 미역이 가장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다. 그래서 미역국을 끓이면 나는 엄청 먹는다. 미역국만큼은 누가 나무라더라도 먹고 싶은 만큼 먹는다. 한동안은 가자미가 들어간 미역국을 먹었는데 내 입맛에는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이 딱이다. 푹 삶긴 미역과 푹 익힌 소고기는 궁합이 잘 맞다. 아주 좋다.


예전에 친구들과 한창 횟집에서 회를 먹으러 다닐 때가 있었다. 우리의 단골 횟집도 가면 회가 나오기 전에 여러 밑반찬을 주는데 거기에 미역국도 있었다. 아이들은 먹을 게 많기 때문에 미역국 따윈 거들떠도 안 보지만 나는 늘 그 미역국 그릇을 내 앞에 당겨 놓고 밥을 한 공기 주문해서 말아서 야금야금 먹었다. 내가 미역국을 좋아해서 먹기도 하지만 한 그릇 먹고 나서 회가 나오면 내 젓가락질은 줄어들기 때문에 친구들한테는 더 좋다. 회를 좋아하지만 회가 앞에 있다고 해서 눈이 반짝이거나 돌격대처럼 돌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횟집에 딸려 나오는 미역국에 눈이 더 간다.


다른 국이 다큐멘터리 적이라면 미역국은 문학적이다. 은유가 가득하다. 누군가 태어나면 우리는 미역국을 먹는다. 생일에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들로 채워져도 미역국은 주인공 앞에 꼭 놓인다. 미역국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떨어질 수 없는 음식이다. 또 낙태를 해도 미역국이 그 앞에 놓인다. 누군가는 미역국을 웃으며 먹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먹었다. 미역국은 한국에서 인간의 탄생과 소멸을 함께 했다. 먹고 나면 몸이 따뜻해지고 온후하다. 문학적인 맛이다.


인간이 문학과 떨어져 살 수 없듯이 미역국은 우리 곁에 늘 있는 문학과 같다. 오죽하면 미역국 라면까지 나왔을까. 미역국은 다큐적이지 않다. 카프카적이다. 검은 빛깔의 색도, 맑은 국에서 우러나는 맛도, 속을 따뜻해주는 만든 이의 그 마음씨도 모든 것이 미역국 한 그릇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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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의 팬티

나의 아저씨 5화 초반에 박기훈이 박동훈에게 그런 말을 한다. 가진 것 없어도 팬티는 오만 원 이상 짜리를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 죽어서 쪽팔리지 않는다. 죽고 나면 쪽팔리는 것도 알 수 없어서 몇 천 원짜리 입고 죽으면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쪽팔리지 않아야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쪽팔리는 게 아니다, 우리 쪽팔리지 말자.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3분의 2 정도에 박동훈이 고깃집에서 그 소동이 있은 후 눈이 오는 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지금은 죽을 수 없다, 팬티가 오만 원짜리가 아니라 죽을 수 없다며 겨우 겨우 일어나서 몸을 추스른다.

죽고 난 후의 팬티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절대 아니다. 지금은 고인 된 오규원 시인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야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 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오규원 시인은 시인들의 시인으로 유명한 시가 많다. 시 '칸나'를 통해서 사랑을 이렇게 표현을 하다니 정말 놀라웠고, 시인들의 값을 매긴 메뉴판의 시로도 유명하고 시선집도 아주 유명하다. 오규원 시인은 또 괴짜다. 친구들이 먼저 가 버린 수목장 자리들 옆에 한 자리를 비워 놓고 여기가 내 자리라고 했는데 결국 그 자리에 들어갔다.


죽고 난 뒤의 모습에 왜 신경을 쓰냐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본 사람은 잘 안다. 죽고 나면 수의를 입히는데 그 과정에서 죽었을 때 입은 속옷을 벗겨내야 한다. 깨끗하고 좀 더 비싼 걸 입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절실하고 진실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 하는 사이에 죽고 말았다. 오규원 시인의 시선을 따라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의 아저씨에서 박기훈이 말한 것은 생각해 볼만하다.


나의 아저씨 극본을 쓴 박해영 작가는 아마도 시인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정확하게는 시인의 깊이 있는 시선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지안의 할머니가 달이 보고 싶어서 지안이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부분의 방바닥이 추운데도 그곳에 누워 벽에 붙은 작은 창으로 악착같이 달을 보려고 했다. 그 모습은 윤동주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산문시 ‘달을 쏘다’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달을 쏘다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너무 아름다워서 읽고 있으면 그 정경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를 쓴 곳이 일본의 감방이라고 알고 있다. 감방에 붙어 있는 저 작은 창으로 매일 몇 분 정도 보이는 달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문으로 인해 몸은 점점 행려병자처럼 되어가고 고통스럽지만 창으로 보이는 달을 보며 아름다운 것을 생각했다. 죽어가며 아름다운 것을 본 윤동주를 깊게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울렁한다. 그때 윤동주가 가물거리며 본 그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달을 지금 우리가 보는 저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안이 할머니가 그토록 보고 싶은 달이기도 하다.


나는 눈물이 없었다. 아니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꽤 오해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실 가까이 있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눈물이 잘 나오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 그 사람과의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들이 눈물을 만들어 낼 뿐이다. 책을 봐도, 영화를 봐도, 시를 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노래를 듣고 약간 글썽일 뿐 눈물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지. 그런데 2018년에 본 나의 아저씨가 굳건하던 내 눈물샘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민 손을 그만 덥석 잡았을 뿐인데 그 뒤로는 뭔가가 조금만 뭔가 싶으면 눈물이 난다. 그것이 싫지만 또 좋다.


사람들은 슬픔을 강요한다. 나는 이만큼 슬픈데 너는 왜 나만큼 슬퍼하지 않냐. 슬퍼야 하는 장소에서 마땅히 슬퍼해야 하는 건데 너는 왜 그렇지? 슬픔의 증거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강요한다. 눈물은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눈물은 그렇게 해서 흐르는 물이 아니다. 눈물은 짜다. 그래서 사람의 몸에는 바다가 하나씩 있다. 그리하여 눈물을 아무리 흘려도 계속 짠 물이 흐른다. 이렇게 짠 물이 슬플 때가 되었다고 해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좋거나 감동을 받아서 훨씬 많은 눈물을 흘린다. 음식에서도 짠맛은 적당해야 그 음식이 맛이 좋다. 기분이 너무 좋을 때 흐르는 눈물을 맛을 보라. 적당하게 짜다. 그래야 몸속에 있는 바다가 요동을 치지 않고 기쁨과 조화를 이루니까. 그래야 하니까.

달을 쏘다



 오랜만에 만난 김은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집은 요즘 보기 드물게 연탄아궁이가 있고 방바닥의 장판은 아랫목 쪽이 쭈글쭈글해 있었다. 김은 라면 하나를 끓여 왔다. 큰 냄비에 물을 잔뜩 부어 끓였다. 멋쩍게 웃으며 먹을 게 라면 하나밖에 없다며 밥을 가득 말아서 먹자고 했다. 다행히 아직 추위가 지붕을 덮지 않아서 라면을 나눠먹고 밥을 말아먹으니 땀이 났다. 겨울이 걱정되었지만 묻지 않았다. 라면은 물이 많아서 스프의 맛이 살짝 날 정도였지만 김치를 걸쳐 먹으니 어쩐지 맛있었다. 어떻든 먹어야 하고 어떻게든 먹게 된다고 김은 말했다. 다른 가족과는 떨어져 사는 모양이었다. 가족과 지낼 때도 서러운 단어 가난이 악착같이 붙어있었다. 가난에서 겨우 벗어나는가 싶더니 김은 절망의 크레바스로 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6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직장을 잃었을 때 지옥이라고 했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라면도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햇살이 싫었고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잠들 어도 거기까지 따라오는 채권자들과 눈을 뜨면 보이는 빚은 자살의 유혹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지옥이라는 건 멀쩡한 건물이지만 그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일이라는 건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중심에 김이 있었다. 김은 나에게 오천 원을 달라고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주었다. 김은 소주를 사 오겠다며 만원을 들고나갔다. 나는 현금을 털어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3장을 냄비 받침으로 썼던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라면 받침으로 썼던 책은 윤동주의 시집이었다. 십오 년 전에 내가 선물로 준 책이었다. 김은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이 책 한 권이 남았다. 김은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에게도 한잔 권했다. 책 사이에서 돈이 수줍게 비어져 나온 것을 보고 김은 고맙다며 라면 사 먹겠다고 했다. 김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호의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김은 소주를 한 병 비웠다. 가난은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불편하다. 생활이 불편한 것보다 마음이 불편하다. 새로 잡은 직장에서는 누구나 돈을 좇지 말고 돈이 따라오게 돈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라고 한다. 정말 개좆 같은 말이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건 돈이다. 돈 이외에 따라오는 이상은 돈이 깔려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자살을 결심했을 때 절에 갔는데 할머니가 엎드렸다 일어났다, 집에서는 죽어도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절에서는 옆 사람에게 질세라 절을 하는 거였다. 무엇이 할머니를 저렇게 절을 하게 하는 것일까. 절을 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돌봐달라는 할머니들은 없었다. 전부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이곳의 하늘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가면 그곳을 갈 수 있는데 내 입장이 그곳으로 갈 수 없게 만든다. 윤동주의 글이 떠올랐다. 윤동주의 '눈'을 읽으며 이렇게 맑은 사람이 그 더러운 곳에서 죽어가는 것과 지금 이 방처럼 비루하고 좁은 방에서 저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달을 쏘고 싶어 하면서 죽어가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던 윤동주의 글이 떠올라서 이를 악 물고 싶었다. 절망의 끝에 가면 통통하게 살이 찐 희망이 있다. 삶에 내 살갗을 가차 없이 갉아대는 것이다. 살면서 처절한 가난까지 경험했는데 내 감정과 정직하게 맞서는 것을 피해왔다. 내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하는 것, 그러면 삶이 내 몸으로 스며들게 된다는 걸 알아 가고 있다. 김은 그렇게 말을 하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굴에 조금 미소가 파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그 옛날 감옥에 난 창으로 보였던 그 달이었을 것이다. 겨울의 모퉁이에서 윤동주의 글을 읽고 내내 눈물들 흘렸던 그 기억들은 전부 추억에서 살고 있다. 거리가 추울까 봐 이불처럼 눈이 내린다고 한 윤동주의 글을 그동안 잊고 지냈다. 김은 꿈에서 윤동주와 조우했을 것이다. 저리도 웃고 있는 것을 보면.


- 윤동주의 달을 쏘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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