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가 손 앞에 있는데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심정은 누구나 다 안다.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닐 때 우리는 깊은 빡침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아주 잠깐 코마 상태가 되어서 나도 모르는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모든 것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겪는다. 오로지 인간이기에 느끼는 이 빡침의 세계.


조깅을 하다가 멀찍이서 보니 한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다. 평화로운 유월의 저녁.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기 전이라 저녁이 되면 아주 좋은 온도다. 격하게 움직이면 덥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주 좋을 시기와 시간이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우리는 허락받았고 사람들은 허락받은 그 시간을 즐긴다.


강변이라 보통 평일의 이 시간에 운동을 하러 사람들이 나온다. 가족단위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고, 매일 지나치는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과 나는 서로 알지만 알지 못한다. 아는 사이가 아니기에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지만 매일 비슷한 시간에 나오기 때문에 매일 스쳐 지나간다. 멀리서 보면 그 사람의 폼이 보이고 점점 다가오는 그 사람의 몸동작을 나는 한 번 쓱 훑는다. 물론 반대편의 그 사람도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무언의 연대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서로 운동복을 벗고 다른 곳에서 마주친다면 어? 하며 아는 척을 해도 생판 모르는 이보다는 인사하기가 수월 할 것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땀도 좀 식힐 겸 나는 둑 위에서 아저씨의 낚시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저씨는 다른 낚시하러 나온 아저씨들에 비해 복장이나 장비가 아마추어같이 보였다. 어쩌면 고수일지도 모른다. 고수들이 그저 대나무 낚싯대 하나를 달랑 들고 평소 복장 그대로 와서 휙휙 낚아 올린다. 아저씨의 바로 앞, 강에서는 물고기들이 나 잡아봐라 하는 양 물 위로 지구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구 튀어 올랐다. 저 정도 거리면 뜰채만 있어도 휙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낚시를 잘 모르는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바로 앞에 물고기들이 펄떡펄떡 튀어 오르면 찌를 보고 들어 올리는 낚시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역시 낚시를 모르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아저씨는 원투 낚싯대였다. 그러니까 찌 같은 건 없고 미끼를 꼽아서 저 멀리 슝 날려 보내서 물고기가 물면 딸랑이가 딸랑딸랑하면 들어 올리는 낚시를 했다. 하지만 물고기들은 바로 앞에서 펄떡펄떡 뛰고 다른 낚시꾼들은 바로바로 잡아서 올리는데 반해 아저씨는 저 멀리 맞은편의 풀숲 앞의 강에 던져 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물고기들은 계속 물 밖으로 튀어 올라서 약 올렸다. 사진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클릭을 하면 그래도 좀 더 크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저씨가 던진 낚싯대가 바닥에 계속 걸렸다. 아저씨는 초보였다. 그래서 바닥에 걸린 낚싯대가 빠지지 않자 직선으로 당기지 않고 휘어지게 잡아당겼다. 그러다가 탁 하며 줄이 끊어졌다. 아저씨는 그런 반복을 몇 번 하더니 결국 빡침이 왔다.


이제 남아있는 바늘이 몇 개 없는 것 같았다. 저렇게 서서 낚시 줄을 다시 다는 작업이 낚시하는 동안의 계속한 일이었다. 구경하는 나는 큭큭하며 재미있었지만 당사자는 얼마나 빡침이 올까. 물고기가 바로 코앞에서 잡아가라고 풀짝 거리는데 낚싯대는 바닥에 빠져서 나오지 않고 힘을 줘서 잡아당기면 줄이 끊어지고, 불행은 왜 늘 동시에 몰려오는 것일까. 아저씨는 자신도 모르는 새 빡침의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따라 나온 강아지가 놀라서 아저씨 뒤에서 앙앙 짖었다. 그러자 엄마가 두부(그냥 내가 지은 이름) 그러지 마, 빨리 가자.라고 하니 휙 엄마를 따라 아저씨를 지나쳤다.


아저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빡침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했다. 으휴 이 놈의 낚싯대, 던지기만 하면 바닥에 꽂히기나 하고, 마음 같아서는 콱 분질러 버리고 싶은 분노가 이만큼 올라올지도 모른다. 생활하면서 가장 짜증 나는 일이 반응이 없는 물건에 화를 내는 것이다. 분지르고 망가트려봐야 분명 나의 손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아 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참아도 열 받고 박살 내도 열 받는다. 나는 아저씨의 그런 모습을 보며 토닥토닥해주고 싶었다. 아마 이 빡침의 시간만큼은 낚시를 권해준 친구를 원망하지 않을까. 빡침의 세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늘 우리 곁에 있다. 그 세계를 조용하게 건너는 것도, 풍덩 빠지는 것도 본인의 일이라 참 어렵다. 그럼에도 어떻든 우리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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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모짜렐라!

줄리아를 줄리웨라 부를 때 줄리아가 혼잣말로 산타 모짜렐라 라고 할 때 웃기다. 산타 모짜렐라는 영화 말미에 산토 고르곤졸라로 바뀌고 그때에는 아마도 감동을 영화 속에 나오는 파스타만큼 먹게 된다. 줄리아의 얼굴은 페넬로페 크루저의 애기애기한 어린이 얼굴 같다.

영화는 처음부터 귀여움의 연속이다. 루카 옆에서 주세페 물고기의 입 오물오물거림은 정말 개 귀엽다. 루카는 줄리아를 통해 점점 세상을 알아간다. 줄리아가 태양계의 책을 선물로 주면서 “우주가 이젠 네 것이로다”라고 할 때 루카는 감동한다. 아니 감동을 넘어 놀란다. 그렇게 루카는 우주를 가슴에 지니게 되었으니.

영화를 보면 이탈리안의 습성도 알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둘이 쌩 내려갈 때 장기 두는 아저씨를 스친다. 그때 장기판을 돌려 버리는데 이런 모습은 하루키의 먼 북소리에 자잘하고 세세하며 재미있게 잘도 써 놨는데 딱 그런 모습이다.

루카와 알베르토는 물에 닿아 괴물이라는 것이 들통난다. 굿바이 줄리아. 줄리아를 떠나며 루카는 알베르토를 찾아간다. 강한척하는 알베르토는 누군가 내미는 손을 간절하게 잡고 싶었던 아직 아이였던 것이다.

다시 경기에 나간다는 루카의 말에 알베르토는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미쳐가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경기 마지막 비를 맞아서 괴물로 변한 알베르토, 그때 알베르토가 그물에 잡히게 되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면서 루카도 비를 맞아 괴물이 된다. 그리고 알베르토에게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알베르토가 잡았을 때 눈물이 난다.

루카의 인싸 할머니가 말한다. 끝까지 안 받아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그렇진 않을 거야. 루카는 이미 좋은 사람 찾는 법을 아는 것 같아.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두가 나를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한 사람, 그리고 내 편인 한 사람만 있으면 이 험하고 험한 세상에서 해볼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카를 보면서 느낀 건 픽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걸 못하고 커버려서 그냥 우리 하고 싶은 걸 다 하자! 그래! 하며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루카는 보면서 정말 기분 좋았고 애틋했다.

우와 나보다 훨씬 멋지게 사네. 난 아무 데도 못 가는데. 꿈만 꿀 뿐.라고 루카가 초반에 알베르토에게 말한다.  

그 꿈을 꾸는 것이 첫 시작인 것이다. 시작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조금씩 성장하면서 꿈을 이룰 수 있다. 기분 좋은 영화, 감동 먹은 영화. 루카 였다. 산토 고르곤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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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도시는 바다가 있고 나는 그런 바닷가에 살고 있다. 해초가 많은 바닷가에 사니 해초를 자주 먹는다. 하지만 바닷가에 살지 않더라도 해초가 먹고 싶으면 마트에 달려가면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 바닷가에 살아도 버섯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해초도 어릴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음식이지만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맛있게 먹게 된다. 싫은 것도 자주 접하다 보면 정이 들어 버리는 것처럼 해초의 맛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 맛이 잊힐 때쯤 또 찾게 된다. 해초도 나물만큼 맛있고 나물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이다.


이런 것들을 갯것이라 하는데 갯것은 바다가 오염이 되면 먹을 수 없다. 이런 갯것을 삶의 수단으로 삶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소설가 한창훈의 소설을 읽어보면 무척이나 재미있다. 한창훈의 소설 속에는 욕이 펄떡펄떡 살아있다. 삶에 이렇게나 밀착되고 순수하고 깨끗한 욕이 소설 ‘홍합’ 속에는 살아서 뛰고 있다. 한창훈의 소설에는 흙냄새가 가득하고 뻘에 발목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글을 참 잘 쓴다.

언젠가 인간이 점점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에 염증이 난 바다가 이제 그만 할래! 난 파업하겠어! 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면 해초는 꿈에서나 맛 볼 음식이 된다. 사람들은 전혀 바다가 오염되는 것에 관심이 1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바다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바다는 나날이 오염이 되고 있으며 바다의 오염이 심각해지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서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바다에서 나는 수많은 갯것과 해초의 맛을 보자.


해초비빔밥에는 말 그대로 해초만 넣어서 비벼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계란 프라이를 써니사이드업으로 해서 노른자를 톡 터트려 비비면 노른자의 고소한 맛과 해초의 짭조름하고 씹히는 맛이 앙상블을 이룬다. 고추장이라든가 초장 내지는 참기름도 필요 없다. 냉장고에 밑반찬이 있다면 그 정도 넣어서 같이 비벼먹는 게 적당하다.

그래도 다른 나물이 있다면 같이 넣어서 비벼 먹으면 더 맛있다. 개인적으로는 해초 맛이 많이 나는 맨 위의 비빔밥이 더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러 나물이 같이 들어간 비빔밥을 더 맛있어한다. 해초가 짭조름한 맛을 지니고 있고 나물에도 보이지는 않아도 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붉은 양념을 넣어서 비빔 필요가 없다.

이렇게 비벼 먹으면 단점이 딱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배부른지 모르고 먹게 된다는 점이다. 먹다 보면 다 먹게 되고 배가 부르지도 않다. 먹으면서 한쪽의 생각은 ‘단백질이 없고 전부 풀이니까 많이 먹어도 괜찮아, 배도 금방 꺼질 거야, 살도 안 찌겠지’ 하며 브루노 같은 놈이 계속을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한 양푼이를 먹은 다음 일어나면 배가 엄청 부르다. 앉아서 먹고 있을 때는 배가 불렀는지 모른다. 보통 반찬이 따로 되어 있는 식단으로 밥을 먹게 되면 천천히 먹게 되는데 이상하게 비빔밥은 숟가락으로 와앙 빠르게 먹어 치우게 된다. 질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계속 먹다 보면 살도 찐다. 하하하. 초식동물들 덩치를 봐라. 풀만 먹었는데 어찌 저리도 큰 덩치를 가지게 될까.

또 해초는 슴슴하고 부드러운 계란찜과도 어울린다. 이런 조합은 어떻게든 어울리고 맛있다. 슴슴한 맛과 짭조름한 맛이  단짠단짠보다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칼스버그가 없어서 아쉽다. 해초가 등장하면 항상 맥주를 시원하게 준비를 해서 마셨는데 이상하게 근래에는 맥주도 맛이 없어졌다. 왕왕 사 먹던 싸구려 와인도 맛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밥을 많이 먹게 된다. 맥주와 먹게 되면 배가 불러서 밥은 많이 먹지 않게 되어서 좋은데 맥주가 어느 날 맛이 없어져서 세 모금 정도 마시고는 버리게 된다. 하루키의 말대로 인간이란 참 제멋대로다. 특히 나 같은 인간은 너무 제멋대로다. 그래서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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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6-27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와 같은 작태들로 인해 바다 오염도 먼 이야기가 아닌듯 합니다.

교관 2021-06-28 12:09   좋아요 0 | URL
ㅠㅜ 생각만으로도 무섭네요
 


https://youtu.be/hwF5EmyCSts




음악감독인 유준상이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뮤직비디오를 찍는 내용이다. 하지만 가사도 없고 그저 허밍으로 ‘음’만 유준상 머릿속에 있어서 배우들은 당최 뭐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유준상 감독은 주문을 하는데 전혀 그런 장면이 아니라 감정은 잡히지 않고, 춥고 힘들고.


배우 소진은 결국 터지고 만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거 뭐야? 이게 뭔 뮤직비디오 촬영이야? 하는 생각이 든다.

점점 엉망진창이다.

한국어로 대사 치면 소진은 중국어로 감정 잡아 대사 치고,

서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막 한다.

오케이를 외치는 건 유준상뿐.


카메라를 보며 말을 하고 배우 이름을 그대로 영화 속에서 이름이 되어서 불리기 때문에 다큐처럼 보인다.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70 넘어까지 감독이 하고 싶다는 유준상의 작품으로, 이 영화를 보면 유준상은 머리가 참 좋다. 아니 머리도 좋은데 노력을 굉장히 하는 것 같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무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잖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어느 순간

아 그 의미가 뭔지 알겠다

싶을 때가 있잖아


영화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해서 무슨 뮤직비디오가 될까 싶은데,

마지막 이 엉성하고 난잡하고 엉망진창으로 찍은 영상으로

기가 막힌, 멋지고 아름다운 한 편의 뮤직비디오가 된다.

보고 있으면 울컥한다. 진짜.


세상은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때가 온다.


불안한 인생에 대해서 불편하지 않게 소진은 말한다.


한때야

시련, 정말 한때야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듯이

이 어둠의 긴 터널

얼마 남지 않았어


요즘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가 아닐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던,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던, 모두가 힘들어서 겨우 버티고 있으니까.

내 자식이 아프다고 해서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것처럼 견디고 버티는 것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이 힘든 시기에 내가 버텨야 한다.

비티고 견디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빛이 봄이 되어 찾아와서 내 옆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런 영화다.



다음 영화는 단편 영화 '여름, 버스'다.


https://youtu.be/-MliIE5PGrI

온전히 한 편을 다 볼 수 있다

단편 영화 ‘여름, 버스’는 마음이 청량해지는 영화다. 18분짜리 이 영화는 두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두 편이 다른 이야기인데 맞물린다. 더운 날 부산의 버스에서 일어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일들을 여름의 아침 햇살처럼 맑게 그려내고 있다.


언제나 기분 좋게 운전을 하는 버스기사는 딸이 버스를 타도 카드를 찍으라고 한다. 만원인 버스에 올라온 산모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이 없어 애가 타는 기사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과를 끝낸 기사는 회사에서 배차 시간을 바꿔 달라고 어렵게 말을 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는다. 후배는 친구가 수술을 하는데 병문안을 한 번 가야겠는데, 라는 말을 듣고 기사는 후배를 위해 그렇게 해준다. 그러면서 후배 기사의 이야기, 여름 버스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버스에 요금을 내지 않고 자꾸 타는 초등학생이 있다. 요금을 내라고 하면 유치원생이라는 녀석. 그리고 그 녀석이 앉았다가 내리면 창문에 크레파스로 물고기 낙서가 그려져 있다.


꼬마 녀석은 뒷문으로도 몰래 타고, 내리면 또 낙서가 그려져 있고. 기사는 그 낙서를 지운다고 매일 힘들다. 그러다가 꼬마 녀석이 또 몰래 탄 버스에서 요요 도토리 녀석 하며 버스를 세우니 꼬마 녀석이 하하하 웃으며 내리고 만다. 그런데 급하게 내리느라 크레파스를 두고 내린 것이다.


기사는 다음에 꼬마 녀석이 오면 크레파스를 줄 요량이었지만 다음 날에 꼬마 녀석이 오지 않는다. 꼬마를 기다리다 손님들이 출발하자는 소리에 버스는 출발하게 되고. 크레파스를 들어서 보니 거기에는 ‘온종합병원 소아청소년과‘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기사는 크레파스를 주러 병원을 찾는데, 어떻게 될까. 기사는 꼬마 녀석의 친구가 되어 버스를 온통 꼬마 녀석을 위해 꾸며주는데.


영화는 18분으로 끝나지만 컴퓨터 그래픽도 등장하며 그냥 밝고 맑고 깨끗하고 기분이 너무 좋은 영화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긴데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영화다. 지금 우리에게 뭔가가 필요한데 사실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영화는 유튜브로 풀 버전으로 볼 수 있다.



다음 영화도 독립 영화 '카메라가 꺼진 유튜버들의 실체'다. 


https://youtu.be/U47U7fLb2ig

이 단편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지금의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튜브, 아프리카 티브이, 별 풍선과 슈퍼쳇의 유혹에 이끌려 점점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요즘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


자극적인 영상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준다. 자본의 노예가 되는 순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자각하는 능력은 사라진다.


관음을 바라는 자들과 관음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터부를 보여주는 자들 사이에는 자본이라는 강이 놓여 있다.


제도와 법의 허술함을 뚫고 미성숙한 사람들은 콸콸 튼 수도꼭지의 물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이 낳은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되면 의지만 가지게 된다. 의지만 있는 존재는 좀비와 다를 바 없다. 구덩이에 쥐를 풀어 주면 좀비는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3일을 쥐를 꺼내려 한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


13분짜리 이 짤막한 단편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잘 보여준다. 반전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 단편 영화 ‘카메라가 꺼진 유튜버들의 실체’였다. 역시 유튜브로 풀 영상이 있으니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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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대신 볼꽃 같은 하늘


기시감이 드는 날이었다. 초여름, 움직여도 땀이 나지 않는 밤. 이맘때가 되면 시에서 주최하는 축제가 주말마다 온 거리를 장식하고 사람들이 몰려나와 삼삼오오 축제를 즐겼다. 시간제한을 두고 자동차의 통행을 막고 그 거리를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물든다. 사람들은 홍조를 띠고 아이를 데리고, 연인끼리, 친구들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에 스며든다.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행사에 참여하는 업체나 사람들이 오전부터 축제 준비로 분주하다.


그리고 축제 기간 중 하루는 불꽃놀이를 했다. 축제를 시작한 지는 십 년이 안 되었지만 불꽃놀이는 역사가 있다. 내가 있는 도시에서도 매년 유월이면 불꽃놀이를 했다. 아마도 70년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되었다. 어떤 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볼 때마다 옆에서 같이 보는 사람이 달랐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의 공터에 저녁을 먹은 동네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할 시간이면 모두 나와 자리를 잡았다. 이미 자리를 잡고 거하게 술이 취한 아저씨들도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삼사십 분 정도 우리는 불꽃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마법의 황홀 속으로 빠졌다. 불꽃놀이가 하는 날이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동네 통장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알려주고 동네의 빈 공터로 나와서 구경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모두가 불꽃놀이를 보는 것을 즐겼다. 맥주를 마시는 사람, 닭을 먹는 사람, 도넛을 먹는 아이들. 모두가 그날 하루는 즐거운 축제인 것이다.


아버지는 그날은 회사에서 일찍 와서 동생과 나와 함께 불꽃놀이를 꼭 봤다. 공터에 나가면 모두 삼삼오오 모여서 불꽃놀이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 8시면 하늘이 형형색색의 온갖 형태로 변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 바로 직전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에 내심 흥분했다. 동네 친구들의 아버지는 회사에서 늦게 오는 바람에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동생을 목마 태워서 불꽃놀이를 구경시켰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불꽃을 보는 꼬꼬마 동생은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런 동생을 목마를 태운 아버지 옆에는 나와 엄마가 자리를 함께 했다. 가장 이상적인 행복한 추억이다. 그런 잠깐의 행복한 시간의 추억으로 긴긴 행복하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견뎌낸다.


불꽃놀이는 사람들의 저 깊은 내면에 꼭꼭 추억으로 잘 숨어있다. 불꽃은 하늘로 피어올라한 점이 되어 무화되는 순간 수만 개의 꽃잎으로 흩어져 기억이 된다. 불꽃놀이의 불꽃은 사진을 찍어 놓지 않으면 기억이 전혀 없다. 불꽃에 대해서 아무리 기억을 하려 해도 불꽃놀이 자체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난 불꽃의 사진을 보더라도 그 불꽃이 그 불꽃이고, 이 불꽃이 이 불꽃같아서 한 번 정도 불꽃이 예쁘군. 하고 만다. 불꽃놀이를 기억하고 또 돌아오는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건 불꽃놀이를 함께 보러 가는 사람 때문이다. 대부분 가장 사랑하는 이와 동행한다. 그래서 불꽃은 기억에 없더라도 그때 불꽃놀이는 누구와 함께 갔다는 추억은 하게 된다. 허니와 클로버에서 아유의 골 때리는 아버지가 하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불꽃놀이는 말이야

불꽃의 색이나 형태는 기억하지 못해도

불꽃놀이의 날 누구와 보냈는지 만큼은

계속 생각나서 추억이 되니까

불꽃은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곁에 있는 녀석의 얼굴은 잊어버리지 않지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보는 거지



인공적인 불꽃이 없으니 하늘이 불꽃이 되었다


불꽃은 평생 불꽃놀이만 그리다 죽은 화가 야마시카 기요시의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 줄기로 끓어오르는 욕망이 꼭짓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맞이하는 순간 수십만 개의 불꽃으로 무화되어 사라지는 삶, 그것이 불꽃의 삶이다.


야마시타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세 살 무렵 고열을 앓은 다음부터 걸음걸이도 불편했다. 자연, 자라면서 이지메가 따라왔다. 소년 야마시타 기요시는 그를 괴롭히는 급우들의 물건을 숨기거나 강에 빠뜨리는 식으로 복수했다고 전해진다.


미술은 그가 유일하게 '수'를 받은 과목이었고, 수공예나 농원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낙이었다. 말 없는 친구인 꽃과 곤충을 정밀 묘사하는 동안에는 사납게 일렁이던 소년의 마음이 잔잔해졌다. 이 부분에서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나카타 상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기억을 저쪽 세계에 두고 오면서 고양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나카타 상.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에 그에 대해서 잘 나와있다. 야마시타는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우표, 포장지, 지폐, 색지 등을 잘게 찢어 붙이는 특유의 기법은 학창 시절 이미 완성됐다. 고흐에게 꿈틀거리는 필적이 있었다면 야마시타에겐 손으로 일일이 뜯어낸 종잇조각이 있었다고 한다. 손으로 찢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집중이 필요하다.


18세에 방랑을 시작한 야마시타는 밥을 얻어먹고 마을을 떠날 때면 작품을 남기곤 했다. 도시락 뚜껑, 쟁반, 밥주걱, 부채 등 검소한 서민의 살림살이가 모두 그의 화폭이었다. 1971년 7월 10일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올해 불꽃놀이는 어디로 갈까?"였다고 한다. 야마시타의 머릿속은 전부 불꽃놀이로 가득 차 있었다. 카타르시스가 곧 죽음이 되는 불꽃에 어떠한 무엇인가를 분명히 본 것이다. 야마시타는 불꽃놀이를 화폭에 옮기면서 자신이 바로 불꽃으로 투영된 것이다.



유월이면 곁에 있는 이와 불꽃놀이를 보러 강변으로 나갔는데 코로나가 이런 소박한 삶을 가져갔구나.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맞이하는 불꽃은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황홀하고 미쳐버린 것 같은, 미치고 싶지만 미쳐지지 않는, 그런 제정신이 아닌 상태와 같은 불꽃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시를 적어 보았다.



제목: 불꽃이 피어나는 시간


피융하며 집요하게 끝으로 오르는 찰나

소멸하는 삶과 새로운 세상을 만나려

태어나는 삶


세상을 만나 무화되는 그 시간

우리는 사정없이 버려지는

순간을 함께 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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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6-24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그림이 너무 예뻐요 ☺️

교관 2021-06-25 13:55   좋아요 0 | URL
검색하시면 더 많은 예쁜 불꽃의 그림이 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