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면 하는 잡설이다. 영화나 티브이에 관련된 잡설이다. 늘 그렇듯이. 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글이다.

이제 그만 나와도 좋을 시리즈(라고 말하면 팬들은 욕을 하겠지만 세계관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마블을 보려면 영화, 드라마까지 전부 섭렵해야 한다. 나도 마블의 팬이라 제시카 존스 시즌 3편을 다 보고, 데어데블도 시즌 3까지, 루크 케이지 시리즈도, 아이언 피스트 시즌 2까지, 그리고 가장 화끈하고 재미있었던 퍼니셔 시즌 2까지 다 봤다) 마블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나온다. 예고편이 공개가 되었는데 보면 대사만 영어고 그냥 중국 영화다. 위에 나열한 마블의 드라마 세계관에도 중국의 무술과 음식과 문화는 계속 나온다. 샹치 예고편을 보면 전부 중국 배우들이 나온다.

https://youtu.be/Pj7CadRf82k

샹치의 아버지로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 양조위가 나온다. 이렇게 제작한 이유는 다 알겠지만 마블에서 가장 돈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시장이 중국시장이기 때문이다. 아직 본 편을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예고편만 보면 이전의 마블 영화만큼(아이언 맨이나 토르나 캡틴 아메리카) 액션이 시원시원하지 않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블에서 중국인들을 위해서 샹치를 만들었지만 정작 중국에서 미국의 마블 영화는 상영할 수 없게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사이가 좋지 않고, 마블이라는 아들은 미국이라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고 중국이라는 옆집 가족의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중국 옆집은 그 가족 이야기는 듣기 싫네 다시 가져가게. 같은 느낌?이다. 노래는 예술이지만 음반은 산업이라 자본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데 영화는 그 이해관계가 더 크고 넓고 깊다.



얼마 전에 일본 드라마 ‘방황하는 칼날’을 봤다. 아마 근래에 들어 최초로 코로나에 대해서 드러나게 만든 드라마가 아닌가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코로나를 언급하고 드라마 속 티브이 속 뉴스에서 코로나로 인해 죽은 사람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이 이야기는 히가시노 게이코의 소설로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가 되었다. 나도 소싯적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빠져서 엄청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첫 소설부터 시작해서 백야행은 읽고, 드라마를 보고, 우리나라 영화 버전을 보고 했다. 백야행은 당시에 읽으면서 와 정말 빠져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떤 소설(잘 기억은 안 나지만)은 마지막 앞뒤장 페이지가 붙어 있다. 그래서 죽 읽으면서 범인이 A라고 생각하며 뒷장을 뜯으면 범인은 A이고, 범인이 B라고 생각하며 죽 읽다가 페이지를 뜯으면 범인은 B가 되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가가 형사와 유가와 라는 물리학자를 탄생시켜 이들이 다른 소설에서도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추리 소설이니까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읽어지지는 않는다. 하루키나 오쿠다 히데오 같은 소설은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지는데 추리소설은 범인을 다 아니까 그게 쉽지 않다. 그 사실을 히가시노 게이고도 알았는지 언젠가부터는 사회문제나 과거로 왔다 갔다 하는 타임리프 형식의 나미야 잡화점의 비밀 같은 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황하는 칼날이라는 이 소설이 드라마가 되었는데 한 여중생이 남자아이들에게 납치가 되어 강간당하다가 살해되어서 강물에 던져진다. 그리고 그대로 죽고 만다. 1화에 딸의 아버지가 남자아이들 중 한 명을 잡아서 칼로 다리를 찌르니 처음에는 살려달라고 울부짖다가 나중에는 웃으며 당신의 딸,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한다. 그 장면은 미치도록 분노를 끓어오르게 한다. 마치 하찮은 뭔가를 밟았다는 듯, 이제 지나갔으니 그만 하라는 것처럼 피를 흘리며 곧 죽을 것을 알지만 이 말을 꼭 해야겠던지 심각하게 훼손되어 죽은 딸의 아버지, 주인공에게 실실 웃으며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나머지 강간 살인범 아이들을 잡으러 다닌다. 이 아이들은 잡혀도 우리나라 촉법소년 법 같은 것으로 일본에서도 사형이나 무기징역 같은 형을 받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아이들은 여자 아이를 유린하며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형사들은 방황을 한다. 도대체 진짜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진짜 범인이 정말 진짜 범인인지 우물 밑바닥처럼 애매하기만 하다. 강간하여 죽인 소년들을 잡아야 하지만 그 소년들을 직접 잡아서 죽이려는 딸의 아비저를 잡으려는 형사들과 그중 한 형사의 딜레마도 잘 나타난다.


잠시 벗어난 얘기로 배트맨의 아내였던 제니퍼 가너(이 두 사람은 오래전 마블의 영화 데어데블에서 데어데블과 일렉트라로 만났다)가 밴 애플릭과 헤어지고 나서 아이 엠 마더에서 마약 조직에게 눈앞에서 딸과 남편을 잃고 센 언니가 되어 직접 해결에 나선다. 거기서 미약하게 형을 내리는 판사들까지 직접 심판을 한다. 지금도 법이라는 게 대중의 눈높이를 전혀 따라오지 못한다. 어린아이를 때리고 똥을 먹이고 굶겨 죽여도 우리가 생각하는 형량을 판사는 선고하지 않는다.


일본 방황하는 칼날 이야기를 하는 김에 일본 방송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https://youtu.be/PUYAkrJAZBw

호카손 유튜브 영상

일본에는 마츠코 디럭스라는 연예인 중의 연예인이 있다. 보면 누군지 아는 사람이다. 엄청난 거구에 엄청난 우익으로 여장남자로 유명하다. 마츠코 디럭스는 일본에서도 수입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수필도 쓰고 예능도 하고 방송도 진행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는 방송인인데 이 사람의 특징이 한국의 케이팝을 엄청 싫어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에 한 방송에서 케이팝의 찬성과 반대가 붙었다. 반대쪽에 붙은 마츠코 디럭스는 맞은편에 앉은 케이팝 옹호(그 방송을 보면 오래전 우리나라 개그맨인데 그 사람이 아닌가 싶다)하는 곳에 케이팝은 미국을 그저 따라 했고 그게 다다. 그게 뭐냐. 같은 발언을 하면서 일어나서 소리 지르고 억 박 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굳건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마츠코 디럭스가 최근에는 왜 일본에는 블랙핑크 같은 그룹이 없냐며 일본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초등학생들이 높은 곳,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바라보며 연예인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블랙핑크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일본에는 전부 오타쿠들의 돈만 바라보고 아이돌이 되는 것 같다는 엄청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방송에 박진영을 영상으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저 영상을 보면 박진영에게 반해버린(여러 가지 면으로) 마츠코 디럭스를 볼 수 있다. 엄청나게 굳건한 벽 같은, 연예계에 있어서 우익이던 마츠코 디럭스도 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번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심은경과 한국에서 활동하는 타카하시 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했다. 그 뒤로 심은경과 타카하시 쥬리는 일본과 한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타카하시 쥬리가 소속된 로켓펀치는 새로운 노래를 발표해서 이 코로나 시기에 홍보 중이고 심은경도 일본의 7인의 비서에서 주연으로 출연을 했다. 나나오를 비롯해서 키무라 후미노, 히로세 아리스 등과 함께.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닌가. 타국의 배우를 주연으로 발탁하는 과감함과 거기서 보란 듯이 주연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심은경의 뚝심은 일반인인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하다. 심은경은 신문기자로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탔을 때 소감으로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고 있다.

타카하시 쥬리가 한국에서 열심히 활동할수록, 심은경이 일본에서 미친 연기를 펼칠수록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계속 있다. 악플을 달려면 시간을 내서 로그인을 해야 하고 일일이 조목조목 타이핑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 번 달리고 마는 선플에 비해 악플은 지속적이다. 무엇보다 아주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이 말은 행복과 불행의 차이와도 같다. 짧고 모호하고 비슷한 행복에 비해 아주 구체적이고 몹시 체계적이며 길이도 긴 불행의 모습과 흡사하다. 악플을 다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 몹시 구체적이다.


영화와 노래는 일반인이 접하는 문화의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는 예술이다. 예술에는 당연하지만 경계가 없다. 나이를 초월하고 나라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다. 거기에 일본이니 한국이니 너네 나라니 우리 나라니 같은 악플은 자기 삶을 곰팡이 피게 하는 짓일 뿐이다.



영화나 방송은 인간생활에서 떠날 수 없다. 반대로 인간은 영상과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집에 티브이도 없고 영화도 보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유튜브로 영상을 시청한다. 그리고 여러 정보나 날씨도 폰이라는 화면을 통해서 확인을 해야 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더불어 영화나 방송을 떠나서 생활하는 것도 하루 이틀 정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먹거리가 손 앞에 있는데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심정은 누구나 다 안다.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닐 때 우리는 깊은 빡침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아주 잠깐 코마 상태가 되어서 나도 모르는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모든 것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겪는다. 오로지 인간이기에 느끼는 이 빡침의 세계.


조깅을 하다가 멀찍이서 보니 한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다. 평화로운 유월의 저녁.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기 전이라 저녁이 되면 아주 좋은 온도다. 격하게 움직이면 덥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주 좋을 시기와 시간이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우리는 허락받았고 사람들은 허락받은 그 시간을 즐긴다.


강변이라 보통 평일의 이 시간에 운동을 하러 사람들이 나온다. 가족단위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고, 매일 지나치는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과 나는 서로 알지만 알지 못한다. 아는 사이가 아니기에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지만 매일 비슷한 시간에 나오기 때문에 매일 스쳐 지나간다. 멀리서 보면 그 사람의 폼이 보이고 점점 다가오는 그 사람의 몸동작을 나는 한 번 쓱 훑는다. 물론 반대편의 그 사람도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무언의 연대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서로 운동복을 벗고 다른 곳에서 마주친다면 어? 하며 아는 척을 해도 생판 모르는 이보다는 인사하기가 수월 할 것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땀도 좀 식힐 겸 나는 둑 위에서 아저씨의 낚시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저씨는 다른 낚시하러 나온 아저씨들에 비해 복장이나 장비가 아마추어같이 보였다. 어쩌면 고수일지도 모른다. 고수들이 그저 대나무 낚싯대 하나를 달랑 들고 평소 복장 그대로 와서 휙휙 낚아 올린다. 아저씨의 바로 앞, 강에서는 물고기들이 나 잡아봐라 하는 양 물 위로 지구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구 튀어 올랐다. 저 정도 거리면 뜰채만 있어도 휙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낚시를 잘 모르는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바로 앞에 물고기들이 펄떡펄떡 튀어 오르면 찌를 보고 들어 올리는 낚시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역시 낚시를 모르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아저씨는 원투 낚싯대였다. 그러니까 찌 같은 건 없고 미끼를 꼽아서 저 멀리 슝 날려 보내서 물고기가 물면 딸랑이가 딸랑딸랑하면 들어 올리는 낚시를 했다. 하지만 물고기들은 바로 앞에서 펄떡펄떡 뛰고 다른 낚시꾼들은 바로바로 잡아서 올리는데 반해 아저씨는 저 멀리 맞은편의 풀숲 앞의 강에 던져 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물고기들은 계속 물 밖으로 튀어 올라서 약 올렸다. 사진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클릭을 하면 그래도 좀 더 크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저씨가 던진 낚싯대가 바닥에 계속 걸렸다. 아저씨는 초보였다. 그래서 바닥에 걸린 낚싯대가 빠지지 않자 직선으로 당기지 않고 휘어지게 잡아당겼다. 그러다가 탁 하며 줄이 끊어졌다. 아저씨는 그런 반복을 몇 번 하더니 결국 빡침이 왔다.


이제 남아있는 바늘이 몇 개 없는 것 같았다. 저렇게 서서 낚시 줄을 다시 다는 작업이 낚시하는 동안의 계속한 일이었다. 구경하는 나는 큭큭하며 재미있었지만 당사자는 얼마나 빡침이 올까. 물고기가 바로 코앞에서 잡아가라고 풀짝 거리는데 낚싯대는 바닥에 빠져서 나오지 않고 힘을 줘서 잡아당기면 줄이 끊어지고, 불행은 왜 늘 동시에 몰려오는 것일까. 아저씨는 자신도 모르는 새 빡침의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따라 나온 강아지가 놀라서 아저씨 뒤에서 앙앙 짖었다. 그러자 엄마가 두부(그냥 내가 지은 이름) 그러지 마, 빨리 가자.라고 하니 휙 엄마를 따라 아저씨를 지나쳤다.


아저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빡침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했다. 으휴 이 놈의 낚싯대, 던지기만 하면 바닥에 꽂히기나 하고, 마음 같아서는 콱 분질러 버리고 싶은 분노가 이만큼 올라올지도 모른다. 생활하면서 가장 짜증 나는 일이 반응이 없는 물건에 화를 내는 것이다. 분지르고 망가트려봐야 분명 나의 손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아 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참아도 열 받고 박살 내도 열 받는다. 나는 아저씨의 그런 모습을 보며 토닥토닥해주고 싶었다. 아마 이 빡침의 시간만큼은 낚시를 권해준 친구를 원망하지 않을까. 빡침의 세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늘 우리 곁에 있다. 그 세계를 조용하게 건너는 것도, 풍덩 빠지는 것도 본인의 일이라 참 어렵다. 그럼에도 어떻든 우리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산타 모짜렐라!

줄리아를 줄리웨라 부를 때 줄리아가 혼잣말로 산타 모짜렐라 라고 할 때 웃기다. 산타 모짜렐라는 영화 말미에 산토 고르곤졸라로 바뀌고 그때에는 아마도 감동을 영화 속에 나오는 파스타만큼 먹게 된다. 줄리아의 얼굴은 페넬로페 크루저의 애기애기한 어린이 얼굴 같다.

영화는 처음부터 귀여움의 연속이다. 루카 옆에서 주세페 물고기의 입 오물오물거림은 정말 개 귀엽다. 루카는 줄리아를 통해 점점 세상을 알아간다. 줄리아가 태양계의 책을 선물로 주면서 “우주가 이젠 네 것이로다”라고 할 때 루카는 감동한다. 아니 감동을 넘어 놀란다. 그렇게 루카는 우주를 가슴에 지니게 되었으니.

영화를 보면 이탈리안의 습성도 알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둘이 쌩 내려갈 때 장기 두는 아저씨를 스친다. 그때 장기판을 돌려 버리는데 이런 모습은 하루키의 먼 북소리에 자잘하고 세세하며 재미있게 잘도 써 놨는데 딱 그런 모습이다.

루카와 알베르토는 물에 닿아 괴물이라는 것이 들통난다. 굿바이 줄리아. 줄리아를 떠나며 루카는 알베르토를 찾아간다. 강한척하는 알베르토는 누군가 내미는 손을 간절하게 잡고 싶었던 아직 아이였던 것이다.

다시 경기에 나간다는 루카의 말에 알베르토는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미쳐가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경기 마지막 비를 맞아서 괴물로 변한 알베르토, 그때 알베르토가 그물에 잡히게 되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면서 루카도 비를 맞아 괴물이 된다. 그리고 알베르토에게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알베르토가 잡았을 때 눈물이 난다.

루카의 인싸 할머니가 말한다. 끝까지 안 받아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그렇진 않을 거야. 루카는 이미 좋은 사람 찾는 법을 아는 것 같아.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두가 나를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한 사람, 그리고 내 편인 한 사람만 있으면 이 험하고 험한 세상에서 해볼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카를 보면서 느낀 건 픽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걸 못하고 커버려서 그냥 우리 하고 싶은 걸 다 하자! 그래! 하며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루카는 보면서 정말 기분 좋았고 애틋했다.

우와 나보다 훨씬 멋지게 사네. 난 아무 데도 못 가는데. 꿈만 꿀 뿐.라고 루카가 초반에 알베르토에게 말한다.  

그 꿈을 꾸는 것이 첫 시작인 것이다. 시작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조금씩 성장하면서 꿈을 이룰 수 있다. 기분 좋은 영화, 감동 먹은 영화. 루카 였다. 산토 고르곤졸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있는 도시는 바다가 있고 나는 그런 바닷가에 살고 있다. 해초가 많은 바닷가에 사니 해초를 자주 먹는다. 하지만 바닷가에 살지 않더라도 해초가 먹고 싶으면 마트에 달려가면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 바닷가에 살아도 버섯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해초도 어릴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음식이지만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맛있게 먹게 된다. 싫은 것도 자주 접하다 보면 정이 들어 버리는 것처럼 해초의 맛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 맛이 잊힐 때쯤 또 찾게 된다. 해초도 나물만큼 맛있고 나물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이다.


이런 것들을 갯것이라 하는데 갯것은 바다가 오염이 되면 먹을 수 없다. 이런 갯것을 삶의 수단으로 삶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소설가 한창훈의 소설을 읽어보면 무척이나 재미있다. 한창훈의 소설 속에는 욕이 펄떡펄떡 살아있다. 삶에 이렇게나 밀착되고 순수하고 깨끗한 욕이 소설 ‘홍합’ 속에는 살아서 뛰고 있다. 한창훈의 소설에는 흙냄새가 가득하고 뻘에 발목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글을 참 잘 쓴다.

언젠가 인간이 점점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에 염증이 난 바다가 이제 그만 할래! 난 파업하겠어! 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면 해초는 꿈에서나 맛 볼 음식이 된다. 사람들은 전혀 바다가 오염되는 것에 관심이 1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바다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바다는 나날이 오염이 되고 있으며 바다의 오염이 심각해지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서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바다에서 나는 수많은 갯것과 해초의 맛을 보자.


해초비빔밥에는 말 그대로 해초만 넣어서 비벼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계란 프라이를 써니사이드업으로 해서 노른자를 톡 터트려 비비면 노른자의 고소한 맛과 해초의 짭조름하고 씹히는 맛이 앙상블을 이룬다. 고추장이라든가 초장 내지는 참기름도 필요 없다. 냉장고에 밑반찬이 있다면 그 정도 넣어서 같이 비벼먹는 게 적당하다.

그래도 다른 나물이 있다면 같이 넣어서 비벼 먹으면 더 맛있다. 개인적으로는 해초 맛이 많이 나는 맨 위의 비빔밥이 더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러 나물이 같이 들어간 비빔밥을 더 맛있어한다. 해초가 짭조름한 맛을 지니고 있고 나물에도 보이지는 않아도 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붉은 양념을 넣어서 비빔 필요가 없다.

이렇게 비벼 먹으면 단점이 딱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배부른지 모르고 먹게 된다는 점이다. 먹다 보면 다 먹게 되고 배가 부르지도 않다. 먹으면서 한쪽의 생각은 ‘단백질이 없고 전부 풀이니까 많이 먹어도 괜찮아, 배도 금방 꺼질 거야, 살도 안 찌겠지’ 하며 브루노 같은 놈이 계속을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한 양푼이를 먹은 다음 일어나면 배가 엄청 부르다. 앉아서 먹고 있을 때는 배가 불렀는지 모른다. 보통 반찬이 따로 되어 있는 식단으로 밥을 먹게 되면 천천히 먹게 되는데 이상하게 비빔밥은 숟가락으로 와앙 빠르게 먹어 치우게 된다. 질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계속 먹다 보면 살도 찐다. 하하하. 초식동물들 덩치를 봐라. 풀만 먹었는데 어찌 저리도 큰 덩치를 가지게 될까.

또 해초는 슴슴하고 부드러운 계란찜과도 어울린다. 이런 조합은 어떻게든 어울리고 맛있다. 슴슴한 맛과 짭조름한 맛이  단짠단짠보다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칼스버그가 없어서 아쉽다. 해초가 등장하면 항상 맥주를 시원하게 준비를 해서 마셨는데 이상하게 근래에는 맥주도 맛이 없어졌다. 왕왕 사 먹던 싸구려 와인도 맛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밥을 많이 먹게 된다. 맥주와 먹게 되면 배가 불러서 밥은 많이 먹지 않게 되어서 좋은데 맥주가 어느 날 맛이 없어져서 세 모금 정도 마시고는 버리게 된다. 하루키의 말대로 인간이란 참 제멋대로다. 특히 나 같은 인간은 너무 제멋대로다. 그래서 별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1-06-27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와 같은 작태들로 인해 바다 오염도 먼 이야기가 아닌듯 합니다.

교관 2021-06-28 12:09   좋아요 0 | URL
ㅠㅜ 생각만으로도 무섭네요
 


https://youtu.be/hwF5EmyCSts




음악감독인 유준상이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뮤직비디오를 찍는 내용이다. 하지만 가사도 없고 그저 허밍으로 ‘음’만 유준상 머릿속에 있어서 배우들은 당최 뭐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유준상 감독은 주문을 하는데 전혀 그런 장면이 아니라 감정은 잡히지 않고, 춥고 힘들고.


배우 소진은 결국 터지고 만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거 뭐야? 이게 뭔 뮤직비디오 촬영이야? 하는 생각이 든다.

점점 엉망진창이다.

한국어로 대사 치면 소진은 중국어로 감정 잡아 대사 치고,

서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막 한다.

오케이를 외치는 건 유준상뿐.


카메라를 보며 말을 하고 배우 이름을 그대로 영화 속에서 이름이 되어서 불리기 때문에 다큐처럼 보인다.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70 넘어까지 감독이 하고 싶다는 유준상의 작품으로, 이 영화를 보면 유준상은 머리가 참 좋다. 아니 머리도 좋은데 노력을 굉장히 하는 것 같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무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잖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어느 순간

아 그 의미가 뭔지 알겠다

싶을 때가 있잖아


영화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해서 무슨 뮤직비디오가 될까 싶은데,

마지막 이 엉성하고 난잡하고 엉망진창으로 찍은 영상으로

기가 막힌, 멋지고 아름다운 한 편의 뮤직비디오가 된다.

보고 있으면 울컥한다. 진짜.


세상은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때가 온다.


불안한 인생에 대해서 불편하지 않게 소진은 말한다.


한때야

시련, 정말 한때야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듯이

이 어둠의 긴 터널

얼마 남지 않았어


요즘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가 아닐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던,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던, 모두가 힘들어서 겨우 버티고 있으니까.

내 자식이 아프다고 해서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것처럼 견디고 버티는 것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이 힘든 시기에 내가 버텨야 한다.

비티고 견디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빛이 봄이 되어 찾아와서 내 옆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런 영화다.



다음 영화는 단편 영화 '여름, 버스'다.


https://youtu.be/-MliIE5PGrI

온전히 한 편을 다 볼 수 있다

단편 영화 ‘여름, 버스’는 마음이 청량해지는 영화다. 18분짜리 이 영화는 두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두 편이 다른 이야기인데 맞물린다. 더운 날 부산의 버스에서 일어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일들을 여름의 아침 햇살처럼 맑게 그려내고 있다.


언제나 기분 좋게 운전을 하는 버스기사는 딸이 버스를 타도 카드를 찍으라고 한다. 만원인 버스에 올라온 산모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이 없어 애가 타는 기사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과를 끝낸 기사는 회사에서 배차 시간을 바꿔 달라고 어렵게 말을 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는다. 후배는 친구가 수술을 하는데 병문안을 한 번 가야겠는데, 라는 말을 듣고 기사는 후배를 위해 그렇게 해준다. 그러면서 후배 기사의 이야기, 여름 버스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버스에 요금을 내지 않고 자꾸 타는 초등학생이 있다. 요금을 내라고 하면 유치원생이라는 녀석. 그리고 그 녀석이 앉았다가 내리면 창문에 크레파스로 물고기 낙서가 그려져 있다.


꼬마 녀석은 뒷문으로도 몰래 타고, 내리면 또 낙서가 그려져 있고. 기사는 그 낙서를 지운다고 매일 힘들다. 그러다가 꼬마 녀석이 또 몰래 탄 버스에서 요요 도토리 녀석 하며 버스를 세우니 꼬마 녀석이 하하하 웃으며 내리고 만다. 그런데 급하게 내리느라 크레파스를 두고 내린 것이다.


기사는 다음에 꼬마 녀석이 오면 크레파스를 줄 요량이었지만 다음 날에 꼬마 녀석이 오지 않는다. 꼬마를 기다리다 손님들이 출발하자는 소리에 버스는 출발하게 되고. 크레파스를 들어서 보니 거기에는 ‘온종합병원 소아청소년과‘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기사는 크레파스를 주러 병원을 찾는데, 어떻게 될까. 기사는 꼬마 녀석의 친구가 되어 버스를 온통 꼬마 녀석을 위해 꾸며주는데.


영화는 18분으로 끝나지만 컴퓨터 그래픽도 등장하며 그냥 밝고 맑고 깨끗하고 기분이 너무 좋은 영화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긴데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영화다. 지금 우리에게 뭔가가 필요한데 사실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영화는 유튜브로 풀 버전으로 볼 수 있다.



다음 영화도 독립 영화 '카메라가 꺼진 유튜버들의 실체'다. 


https://youtu.be/U47U7fLb2ig

이 단편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지금의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튜브, 아프리카 티브이, 별 풍선과 슈퍼쳇의 유혹에 이끌려 점점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요즘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


자극적인 영상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준다. 자본의 노예가 되는 순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자각하는 능력은 사라진다.


관음을 바라는 자들과 관음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터부를 보여주는 자들 사이에는 자본이라는 강이 놓여 있다.


제도와 법의 허술함을 뚫고 미성숙한 사람들은 콸콸 튼 수도꼭지의 물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이 낳은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되면 의지만 가지게 된다. 의지만 있는 존재는 좀비와 다를 바 없다. 구덩이에 쥐를 풀어 주면 좀비는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3일을 쥐를 꺼내려 한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


13분짜리 이 짤막한 단편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잘 보여준다. 반전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 단편 영화 ‘카메라가 꺼진 유튜버들의 실체’였다. 역시 유튜브로 풀 영상이 있으니 감상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