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글에 집중하는데 세 시간 정도 매일 틀어 놓는 브이로그가 있다. 그저 단조로운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일 뿐인데 그 단단한 단조로움과 반복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매일 몇 시간씩 틀어 놓는다. 늘 비슷한 영상으로 편집을 할 뿐이다. 마치 일기 같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데 보고 있으면, 틀어 놓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브이로그의 주인공의 순환의 일상에서 나오는 백색소음이 작업을 하는데 집중하게 만든다.


그 소리 역시 평소에 늘 지나치며 듣는 소리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기 일쑤여서 무시했던 소음들로 듣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젖은 마음으로 내려오는 하얀 밤의 소리, 낮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어떤 밤의 소리, 그리하여 그 소리로 젖은 마음을 바짝 말릴 수 있는 소리. 시리고 하얗고 투명하게 맑고 더럽지만 사랑스러운 소리. 표현하자면 그런 백색소음들이다.


주인공은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임고생으로 비슷한 여타 브이로그와 다른 점은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사진에서처럼 항상 저 위치의 카메라가 주인공의 일상을 비쳐준다.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약간 위로 올려보는 듯한 다다미 촬영기법을 보는 것 같다.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내려다보는 시야각에 비해 약간 위로 보는 듯한 각도는 안정감을 준다.주인공은 그저 쳇바퀴 굴러가듯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을 하며 점심 먹고 오후 일과를 보내고 퇴근해서 공부를 하는, 단순한 반복의 매일을 순환한다. 고요한 물처럼 재미없을 것 같은 일상이지만 주인공은 그 속에서 작은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요컨대 금요일이면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주말 저녁을 보내는 것이 기뻐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 데이트를 하며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 대해서 행복해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조금씩 더 알아간다. 사람들도 대부분 나도 작은 것에 많이 기뻐한다고 말하지만 썩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작은 일에 기뻐하기보다, 작은 일에 분개하는 경우가 더 있는 것 같다. 김수영 시인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도 분개하는가'를 읽어보면 그 시를 이해하게 된다. 작은 일에 기뻐하는 건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 브이로그의 주인공은 그렇게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주인공이 보내는 일상 속에서 자아내는 백색소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꾸고 그 속에서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자유한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만 일탈이 길어지면 불안해하며 일상을 그리워한다. 일상에서는 일탈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주인공이 일하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다이어리에 글을 쓰는 소리, 구두 소리, 버스 소리, 하루가 저물어 가는 소리는 백색소음으로 편안하다. 그 소리는 나의 소리이며 모든 이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여름에 모든 일들이 집중이 잘 된다. 그 이유 중 하나에 매미소리가 있다. 매미소리를 집중해서 들으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매미소리가 편안하지 않고 시끄럽게 들리는 건 매미소리와 함께 다른 소음이 껴 있어서 그렇다. 시골집 앞마당 평상에 누워서 듣는 매미소리는 음악과 같다. 제목을 붙이면 ‘매미 협주곡 라장조 작품 32’ 정도 되겠다.


주인공은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데 일과 공부를 동시에 한다는 건 내입장에서는 굉장한 일이라고 본다. 나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하고 담을 쌓아서 그런지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봤다. 주인공은 일하는 모습을 제외하고 나면 영상에 넣을 것이 없다며 슬퍼하는 자막은 재미있다. 그렇게 주인공은 오늘도 조금 성장해간다.


주인공도 청춘이다. 현재 취업하지 못한 취준생들은 앞이 깜깜하다. 그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은 꿈을 꿀 수 있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과 다르다. 신해철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는데, 운전을 하고 가다가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보험회사에서 나와서 주유소까지 갈 만큼 최소한의 기름을 주유해준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일만 해라고 하는 사회구조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멈춘 청춘들이 최소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게 이 사회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할 일이다.


'목표'와 '꿈'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청춘인 주인공은 꿈을 향해 일상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까지 위로를 받는다. 미래에 대한 건강한 고민과 작은 기쁨에서 큰 만족을 느끼는 모습에서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던 강의에 초대를 해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 힘든 일상을 단단하게 보내는 모습에서 아마도 청춘들 역시 많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재미없는 일상을 통해서 성장해간다. 무엇보다 매일 경험하는 오늘은 모두가 처음이라 서툴다. 처음부터 뭐든 잘하는 사람은 없다. 코로나가 도래하고 많은 사람들이 화를 많이 낸다. 화를 낼 일이 있으면 당연하지만 화를 내야 하지만 화가 나기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주인공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놓은 상황을 받아들인다. 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일어난다는 걸 주인공은 보여준다. 


주인공이 브이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는데 나부터 위로가 된다. 위로는 실은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받는 일이 많다. 위로라는 건 일상 같은 것이다. 이 브이로그의 주인공을 보면서 일상을 보내는 근사한 방법이란 그 속에서 상상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지치지 않고 브이로그를 만들기를 바라며.


https://youtu.be/gDr96OntC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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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은 어른의 음식 같다. 아니 어른의 음식이다. 군대에서 처음 추어탕을 먹었다. 그 이전의 기억을 아무리 잡아당겨 봐도 추어탕을 먹은 기억이 없다. 군대를 가기 전에 돼지국밥도 먹고, 삼계탕도 먹었지만 추어탕을 먹으러 가지는 않았다. 집에서 추어탕을 해먹을 법도 한데 우리 집에서 추어탕 같은 건 해 먹지 않았다. 일단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추어탕을 할 만큼의 손을 가지지 못했다.


요즘 여고생들과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과 함께 가장 좋아하고 자주 먹으러 가는 음식이 마라탕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마라탕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마라탕에 대해서 여고생들은 자신만의 방법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맛이 다르기 때문에 중독이 되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추어탕에 대해서 물어보면 먹어 보지 못했거나 마라탕만큼 친근한 음식은 아니었다. 흥, 하고 만다.


입대를 하기 전에는 추어탕을 먹어보지 못했지만 군대에서 추어탕은 왕왕 나왔다. 군대에서 먹었던 추어탕은 미꾸리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고등어를 갈아서 만들었지만 맛은 추어탕과 똑같다. 근래에 들어 생각해보면 좋지 못한 미꾸리를 사용해서, 귀찮다고 깨끗하지 않게 세척해서 미꾸리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보다 고등어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고등어로 만든 추어탕도 맛이 똑같아서 산초가루를 넣어서 먹게 되면 풍미가 확 올라와서 한 그릇 더 먹게 된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추어탕을 먹어보고 맛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하고 나서 이상하게도 다른 음식처럼 찾아먹게 되지는 않았다. 보통 맛있는 음식은 찾아서 먹게 되는데 추어탕은 이상하게 눈에 힘을 주고 찾아보지 않는다. 오늘은 추어탕이 너무 먹고 싶은데? 한 그릇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묘하지만 돼지국밥은 찾아서 먹게 되는데 추어탕은 그렇지 않다.


그건 아마도 내가 사는 지역에 돼지국밥은 아주 많고 맛도 다 다르고 들어가는 고기도 달라서 찾아서 먹게 되는데 추어탕을 파는 집은 잘 없기도 하거니와 미꾸리를 사용하던, 고등어를 갈아서 만든 추어탕이던 맛이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에 안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음식 중에는 그런 음식이 있다. 짜장면은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맛은 집집마다 다 다르다. 아귀찜도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갈비탕도 그렇다. 그래서 찾아서 가게 된다. 저 집 짜장면은 내 입맛에 딱 맞아, 아 오늘 이 집 아귀찜을 먹으러 왔는데 일찍 문을 닫았군, 갈비탕 한 그릇 먹는 데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나(내가 사는 바닷가에도 이런 집이 있다. 딱 200그릇만 팔고, 들어가는 고기의 양이 엄청나다), 하며 찾아가게 먹게 되는 음식들이 있다. 


그런데 삼계탕은 또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맛이 거의 비슷하다. 특별히 맛있다는 삼계탕집을 가도 특별히 맛이 없을 것 같은 삼계탕집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에서 삼을 넣고 삶아도 삼계탕 집에서 파는 맛과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맛이 다른 음식에 비해 집집마다 맛이 비슷한 음식을 이상하게 잘 찾아가지 않게 된다. 삼계탕도 먹으면 분명 맛있지만 누군가와 만나서 삼계탕을 먹으러 가지 않는다.


파스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많이들 먹으러 가는데, 박찬일의 ‘보통날의 파스타’를 보면 본고장의 파스타 종류가 삼천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모양, 들어가는 재료, 익히는 시간에 따라, 가정집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른데 종류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래서 파스타도 맛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 김치도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르니까.


그러고 보면 라면이 나오는 식당 역시 사람들이 찾아서 가는 것 같다. 라면도 맛이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라면으로 소문난 곳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그것처럼 추어탕도 집집마다 추어탕 특유의 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거의 비슷한 맛인데 비슷하게 맛있다. 전복 추어탕이라는 것을 먹어봤는데 그냥 추어탕이었다. 그냥 맛있다. 추어탕의 그 맛이다.


아마 친구와 만나서 머 먹을래?라고 친구가 물었을 때 대뜸 추어탕이라고 대답하면 오케이! 가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뭔가 음, 그런데 말이야 왜 하필 추어탕이야? 근처에 추어탕 파는 곳이 있기는 있어?라고 할지도 모른다. 여기 유명한 돼지국밥집에는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국밥을 먹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근처에 고등학교가 2군데나 있어서 맛이 좋은 돼지국밥 집에는 거대 제조 회사원들과 고등학생이 앉아서 먹지만 추어탕 집에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먹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재래시장 반찬을 파는 곳에 국도 파는데 추어탕을 파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포장을 해와서 팔팔 끓여서 먹는다. 이렇게 먹는 추어탕의 맛은 알고 있는 그 추어탕의 맛이며 꽤나 맛있다. 사실 추어탕을 잔뜩 사놓고 매일, 일주일을 먹어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할 만큼 추어탕은 맛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어탕은 가끔 먹게 된다. 이렇게 시장에서 추어탕을 파는 날이면 포장을 해 와서 먹곤 하는데 추어탕은 다른 '탕'에 비해 약간은 괄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맛있는데 많이 찾지 않는, 막상 먹을 때는 좋은데 누군가 물어보면 먹고 싶은 음식에서 늘 소외되고 있는,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힘들어서 가정에서는 잘 안 하지만 가끔 아파트에 추어탕의 냄새가 확 퍼질 때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음식이다. 어른들의 음식이라서 그럴까. 추어탕 전문점에는 잘 가지 않지만 누군가 추어탕 사줄게,라고 하면 날름 나가서 먹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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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4-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생짜 그대로 삶아 나오는 남원식 추어탕의 비주얼이 추어탕에 대한 약간 혐오적 선입견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교관 2021-04-20 12: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먹는 거 가리지 않는 저도 그건 좀;;; 한 번 편견이 들어버리면 20대의 기네스 펠트로가 와서 아양을 떨어도 바뀌지 않을ㄹ 것 같아요 ㅎㅎ
 

근래에 음악이나 팝가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쩐지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요즘은 정말 눈이 번쩍 뜨일정도로 전문적으로 지난 팝 가수들의 근황이나 그들이 걸어온 길을 들려주는 유튜브가 많아서 나처럼 그저 예전에 들었던 것들로 썰을 푼다는 건 허구에 가까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누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이 있어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억을 일단 편집을 해버리면 그 속에 허구가 들어가게 된다.


어떻든 오늘 올릴 글을 실컷 적어 놓은 다음 다른 이야기를 올리려고 한다. 일전에 휘트니 휴스턴의 다큐 영화 ‘휘트니’를 봤다. 이 영화는 다른 다큐 영화처럼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로 들이대고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휘트니를 알고 지냈던, 휘트니와 가장 가까웠던 주위의 사람들, 가족 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휘트니의 성장과 나락을 동시에 보여준다.


다큐 영화라는 건 일반 상업영화보다 사실에 근접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고 다큐 영화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큐멘터리를 촬영을 하고 난 다음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허구가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큐영화라고 해서 모든 다큐 영화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만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뉴스도 사실을 전달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닌 경우를 우리는 그동안 허다하게 봐왔다. 뉴스라는 건 이미 1분이라도 지난 사건을 편집해서 사실을 말하기에 완전한 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휘트니'는 카메라를 따라 보는 이가 휘트니의 근 거리에서 뱅뱅 맴돌며 조금씩 휘트니를 알아간다. 근접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휘트니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 극적이기도 하고 더 안타깝기도 하다. 덜 극적이거나 덜 안타깝지 않다. 영화 속 휘트니는 더 행복해 보이고 더 불행해진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회사에서 오시는 시간에는 종종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레코드점이 있어서 밖으로 난 스피커를 통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잔뜩 들었다. 레코드점 이름은 ‘나라 레코드'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신나라 레코드를 따라 한 모양이었다.


나라 레코드점에서는 늘 팝송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스피커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거기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주인아저씨는 60대로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었고 느릿느릿 걸었다. 아직 할아버지는 아닌데 할아버지들이 입는 바둑판무늬 같은 조끼를 늘 입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팝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팝을 늘 듣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스피커에 귀를 이렇게 갖다 대고 있으면 운 좋게도 들어오라고 해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주인아저씨와는 좀 친해지게 되었다. 팝가수들의 가십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이 실린 잡지책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가구풍 전축이 유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반을 왕왕 사주었다. 덕분에 나는 최호섭이 주제가를 부르는 태권브이 앨범도 나라 레코드에서 사주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패티김의 음반도 거기서 사서 포장을 하기도 했다. 


6학년 때 선물로 받은 미니카세트에 휘트니 휴스턴의 3번째 앨범을 넣어서 들었을 때 그 기분이 미미하지만 아직도 가지고 있다. 뭔가 여기 이곳, 어촌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휘트니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대부분 몰랐지만 미국 땅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의 작은 마을의 어린 녀석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생각에 아주 우쭐했다. 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하며. 매일 헤드 셋을 끼고 휘트니의 노래를 들었다. 휘트니처럼 노래를 부르려면 도대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는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잡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니. 내가 만약 흑인이고 거리에서는 흑인은 늘 핍박당하고 놀림당하고, 커서 취직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고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 해야만 하고. 그런데 교회에 가면 작은 어린 흑인 여자아이가 영혼을 건드리는 목소리로 가스펠송을 부르는 걸 듣는다면 어떻게든 이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흑인이라면 휘트니의 노래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휘트니가 아직 살아서 노래를 부른다면 미국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인종차별 사건이 덜하지 않을까.



후에 음악 감상실에 가게 되면서 풍부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카세트테이프가 오래가지 못한다고들 했지만 그때 구입한 휘트니의 앨범을 아직도 이렇게 잘 듣고 있다. 늘어짐 하나 없이. 그랬는데 영화 '휘트니'를 보면 남편의 폭력과 마약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엉망으로 변해가는 휘트니의 모습을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도대체 가장 사랑해서 만난 사람에게 가장 심한 폭력을 당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건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에게 악마가 되기도 한다. 삶이 이렇게도 어렵다.


https://youtu.be/8_90KE0it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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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만 하고 있어.”


같은 말인데 예전과 너무 다르게 들리는 말이 ‘유지’가 아닐까 싶다. 유지만 하고 있어서 속상했던 때가 그리운 나날들의 연속이다. 요즘은 장사하는 사람들은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서 대출에, 받을 수 있는 보조금에, 발버둥을 쳐도 유지하는 게 힘든 날이 되었다. 그러다가 돌아보면 그 자리는 빈자리가 되어 있다.


어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국밥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요는 그 사람은 근래에 자꾸 살이 쪄서 큰일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국밥을 너무 좋아하는데, 일주일에 7번은 먹는데, 특히 국물을 주욱 들이켤 때 몹시 행복하다고 했다. 또 새우젓도 많이 넣어서 먹는데 주위에서 살이 쪘다고 자꾸 입을 대서 그 좋아하는 국밥을 끊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운동도 좋아해서 매일 운동을 하는데 유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우리 같은 일반인이 살이 찌고 빼는 건 운동과는 무관한 것 같다고 했다. 먹는 걸 줄이거나 끊거나 조절이 필요하다면서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만들었다. 일 마치고 힘든 건 국밥 한 그릇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릴 정도로 국밥을 먹는 동안에는 정말 행복한데 그걸 포기하고 살을 빼야 한다니, 삶이 너무 허무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운동을 이렇게 매일 하는데 유지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감한다. 나는 십 년이 넘게 비슷한 몸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유지하기 위해 정말 죽기 살기다. 그렇게 좋아하는 라면도 올해 들어 10번도 먹지 않았다. 국밥은 딱 한 번 먹었으며 짜장면은 먹지 못했다. 매일 조깅을 한 시간 반 정도 하고 밥을 먹을 때 술을 마시는데 한 잔 마신다. 한 잔을 마실 뿐이다. 한 잔을 달랑 마신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는다 나도. 고작 한 잔을 마시다니. 대학생들과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러려면 술은 왜 마셔요? 술을 마시고 취해야죠. 취하려고 마시는 게 술인데 한 잔 이라니 흥.라고 한다. 왜 안 그렇겠니. 물론 나도 대학교 다닐 때는 그랬지.


이렇게 죽기 살기로 매일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유지하는 게 어렵다. 너무 어렵다. 배는 알게 모르게 자꾸 나오며 달리는 것도 나날이 조금씩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꼭 살이 찌지 않고 유지하는 생활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넓게 보면 인생이 그렇다. 삶도, 살도 유지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져 버린 요즘이다.


태연의 노래 중에 ‘들리나요’가 있다. 가사 중에 ‘먼발치서 나 잠시라도 그대 바라볼 수 있어도 그게 사랑이죠’라는 가사가 있는데 ‘먼발치’라는 말이 나온다. 먼발치를 찾아보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온다. 황경신의 ‘밤 열한 시’를 보면 먼발치에 대해서 나와있다.


멀다는 건 두 사람 사이에 먼 거리가 있다는 것이고

발치는 발의 근처인데

먼발치는 어찌 된 말일까

게다가 한 단어라니

하고 잠에서 깨어나 문득 생각했다


라며 글은 시작된다. 먼발치는 슬프고 쓸쓸한 말이다. ‘먼’이란 눈에서 벗어난 목소리가 닿지 않는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인데, ‘발치’는 숨을 죽이는, 그림자를 밟는,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서성이는 위치다. 그래서 먼발치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가까이 있지만 만날 수 없는 불운한 숙명 같은 말이다. 예전 같지 않은 말 ‘유지’가 마치 ‘먼발치’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이제 다시는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내일 속으로 자꾸 걸어 들어가는 기분.  


“유지만 하고 있어”가 “유지만 했으면 좋겠어”로 바뀌었다. 유지라는 게 가능한 일인가. 유지를 한다는 건 증식보다 더 대단한 지금이 되었다. 먼발치처럼 가까이 있는데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 그렇지만 이 일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힘들다고 앉아서 징징 거릴 수만은 없다.

현디가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그랬다. 쓸데없는 일에 분노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화를 내야 하는 일에도 내가 참으면 되지, 라며 평화를 표방한 침묵으로 일관해버리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서 후회하거나 잠들기 전 이불을 덮고 나서야 화가 나서 이불 킥을 해버린다. 정작 화를 내야 하는 일이 닥쳤을 때 마땅히 화를 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나면 일상이 조금씩 와해된다고 느껴서 그런 자신에게 더 화가 난다. 나는 왜 화를 내야 하는 때에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막상 닥치면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고 상처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


생각해보면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것도 일상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화를 내야 할 때 내지 못한다 하여 징징 거릴 수만은 없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을 유지하는 동력은 소심함이다. 대심한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하지만 나 같은 소심한 사람은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 나의 소심함이, 그것이 이 고요한 물과 같은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인 것이다.

그래서 늘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자연을 악착같이 매일 보려고 노력한다. 문을 열고 밖에만 나가면 된다. 다리만 문 밖으로 나가면 된다. 말 그대로 소확행이다. 매일 같은 코스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된다. 오늘 들어볼 노래는 콜드 플레이의 옐로우 https://youtu.be/mRP72Ib2e9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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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세월과 무관하게 아무 때나 봐도 빠져들어 아아 참 재미있구나, 하게 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까지 봐온 수많은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모든 감독들이 아마도 오즈의 영화 속에서 영감을 얻어서 테이크, 테이크 촬영을 한 것 같다. 오즈의 영화들 중에서 세 편을 소개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안녕하세요’다. 나는 책과 영화를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책 추천해달라는 말을 들으면 아주 난감해한다. 특히 소설을 벗어난 책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난처하고, 소설이라도 '해변의 카프카' 같은 소설을 추천할 수만은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책과 영화는 여자를 소개해주는 것처럼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주위에 추천하고 다니는데 일단 본 사람들은 아주 흡족해한다. 영화가 59년도 영화인데 어째서 그런 시대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까. 컴퓨터와 휴대폰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걸 소거한 채 지금 시대에서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참 신기하다.


영화적 언어가 끊어지지 않고 장면 장면 이어지는 것 역시 신기하다. 나오는 모두가 주인공인데 특별히 더 주인공에 가까운 건 두 형제 꼬마들이다. 영화 속 어른들의 이야기가 슬며시 형제들의 장면으로 바뀌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영화는 도쿄의 중산층의 한마을 사람들의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오즈 야스지로의 언어로 풀어낸다. 하나의 소식을 한 사람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면서 베리에이션이 되면서 의심이 커져 간다. 그 장면 장면을 풀어내는 게 코믹에 가깝게 흘러간다. 그리고 두 주인공인 형제가 집에 티브이가 없어 티브이가 있는 옆집에 자꾸 놀러 가게 되고 엄마는 그 집에 가지 말라고 한다. 그 일로 엄마와 다투게 된다.


결국 형제는 엄마에게 폭발해서 이제 어른들과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도발한다. 이 과정에서 7살짜리 동생 이사무 짱의 초 귀여움이 화면을 뚫고 나온다. 어른들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한, 두 녀석은 학교에 가면서 옆집 아줌마들에게도 평소와 다르게 인사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간다. 이상하다고 느낀 아줌마는 건너 건너 말을 전하면서 이사무 짱의 엄마를 또 의심한다.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아이들에게까지 말해서 아이들이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낸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물고 하며 잔잔한 코믹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미장센이다. 중산층의 가옥이 아주 현대식이며 통일된 균형감의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30년대의 오즈의 마법사에서처럼 지금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색감으로 영상을 채웠다. 영화에 마법을 부렸다. 이런 색감은 일본의 수많은 사진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컬러풀한 서랍장이며, 녹색의 주전자며, 세련된 등과 빨강과 노랑의 빨래, 지붕의 색채는 보는 내내 기분 좋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말은 주인공 꼬마들이 티브이 안 사주는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어른들의 인사는 정말 쓸데없는 것이다, 중요한 내용은 전혀 전달하지 못한 채 아침에 보면 그저 똑같이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말이나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나 할 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생각해 보면 그런 어른끼리 하는 쓸데없는 인사 따위로 자동차를 팔아먹고, 사회의 윤활유가 된다.


이 영화에도 가장들이 정년퇴직 후 고민을 말한다. 이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의 스타일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다. 가족의 관계,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 직업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간극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과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필요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들에 대 해서 생각하게 한다.


집에 반항하느라 동생과 함께 굶고 있다가 허기가 져 집에서 몰래 밥과 물을 가져 나와서 둑에 앉아서 형제는 밥을 먹는다. 형이 반찬이 없어서 밥만 먹으니 좀 그렇지?라고 하니 이사무 짱이 반찬을 가져온다며 일어나서 둑을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경찰이 오니까 덜컥 겁을 먹고 형에게 말해서 둘 다 그대로 도망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나이의 형제의 입장과 마음과 생각을 너무 잘 표현했다.

 

이래서 너도나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무 짱의 흥! 하는 제스처가 압도적이었던, 아주 사랑스러운 영화, 그래서 깨물고 싶은 영화 ‘안녕하세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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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흑백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셋방살이의 기록’은 패망 후에 오즈가 만든 처음의 영화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오래 전의 영화는 정말 빠져 들어서 보게 된다. 무엇보다 ‘잘 만들었다’라고 느끼게 된다. 박찬욱이 그토록 칭찬한 우리나라 ‘하녀‘를 보면 박찬욱이 왜 좋아하는가, 에 접근할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60년 정도 살다가 죽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영화를 55편 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손실된 영화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기록은 33편이다. 그래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33편이나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즈 야스지로의 여러 영화를 유튜브에 가면 풀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 만세.


리메이크된 동경 가족을 좋아했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원작도 재미있게 봤을 것이다. 바람 속의 암탉, 만춘 등 몇 편을 봤는데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를 정말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셋방살이의 기록은 패망 후 어수선한 도쿄의 어디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무서운 얼굴을 한 아줌마 다네의 집에 고아로 보이는 고헤이가 들어오게 된다. 고헤이는 누군가를 따라와서 어디에도 맡아주지 않는 꼬마다. 모두가 어린이 같은 건 싫어하고 다 버리라고 한다. 주워온 남자가 다네 아줌마에게 하루만 맡아달라고 해서 재워주는데 그날 밤 오줌을 싸고 만다.


맡기 싫은 고헤이를 맡게 된 건 그전 날 잡화점 근처의 상인들이 모여 어린이 고헤이를 맡을 사람을 뽑기로 결정을 하는데 그만 다네 아줌마가 걸리고 만 것이다. 그 뽑기는 짜고 다네 아줌마가 걸리게끔 판을 짠 것이다. 재수가 없다고 느낀 다네는 하루 재워주자마자 이불에 오줌을 싼 고헤이를 무서운 얼굴로 나무란다.


그리고 저기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버리고 오려는데 고헤이가 눈치를 채고 따라온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다네 아줌마가 그렇게 싫어하던 고헤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1시간이 조금 넘는 분량에 다 집어넣었다. 


고헤이는 벼룩 같은 것에 등을 이렇게 움찔거리는데 영화 말미에는 다네 아줌마 역시 벼룩에 옮아서 둘이 같이 등을 움찔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네 아줌마가 고아인 고헤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감동스럽다. 하지만 결국에는 고헤이의 아버지가 찾으러 와서 고헤이는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고 다네는 그동안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면서 눈물을 쏟는다. 늘 무서운 얼굴의 다네 아줌마였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것이다.


다네 아줌마가 가족으로 받아들인 고헤이를 데리고 사진을 찍는 장면은 인상 깊다. 영화학도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추천한다. 패망하기 전의 영화 방식을 패망 후에도 자기만의 색깔로 고수하며 만들어낸다. 셋방살이의 기록 역시 인간의 관계, 사이, 가족 간의 거리를 오즈만의 방식으로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 몇 편을 보다 보면 다 다른데 다 통일된 흐름이 있고 다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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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트릴로지가 있듯 오즈 야스지로 삼부작으로 마지막 소개할 영화는 ‘꽁치의 맛’이다. 꽁치의 맛은 오즈 야스지로가 죽기 전에 만든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독신으로 살다가 죽은 오즈 자신의 모습을 오마주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다.


이 영화도 오즈 야스지로 영화 특유의 감각이 돋보인다. 약간 위를 보는 듯한 다다미 촬영기법, 컬러풀한 미장센, 가족과 가족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공백에 대해서 홈드라마식으로 잘 보여준다.


당시 아파트에 형형색색의 빨래가 널린 장면은 60년대 초라는 걸 여실히 무너트리며 누벨바그 장르를 여봐란듯이 보여준다. 오즈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동등하다.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자체가 없다. 초로의 주인공 히라야마의 큰아들은 결혼해서 분가했다. 아들 먼저 퇴근하면 아내가 일하고 들어오기 전에 햄을 볶아서 오믈렛을 만들어 놓는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정년을 앞두고 있다. 일찍 아내를 잃고 분가한 큰아들 내외를 빼고 딸 미치코와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히라야마의 마음속에 늘 돌처럼 꾹 누르는 것은 미치코를 마냥 옆에 두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인다. 하지만 미치코 역시 일찍 시집을 가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 사이에서 소심한 방황을 하는 히라야마. 하지만 결심을 한 뒤로 미치코를 시집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히라야마 주위에는 다양한 삶이 포진해있다. 아내를 잃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과 아직 부부가 오랫동안 같이 사는 친구가 있고, 먼저 잃은 아내를 빨리 잊고 착하고 예쁜, 젊은 여자와 재혼해서 행복해하는 또 다른 친구, 신혼이지만 신혼이라 사사건건 철없이 서로 다투고 삐지는 아들 내외, 딸이 시집을 가버리면 혼자서 외로워서 안 된다며 곁에 두고 있다가 그만 딸이 혼자서 중년의 여자가 되어버려 그것을 후회하는 어린 시절의 학교 선생님, 24살에 시집을 가면서 일을 그만둔 히라야마 회사의 여직원, 미치코가 마음에 둔 큰아들의 회사 남자 직원이 있는데 중간에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다른 여자를 만나버린 큰아들의 후배, 그리고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미치코에 대한 자신의 시선.


이 모든 것이 주인공을 저물어 가는 일 년의 가을 끝에 매달린 꽁치와 비슷하게 보인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미치코를 시집보내고 집으로 들어와 어두운 식탁에서 아 외톨이구나,라고 되뇌며 꺼져가는 밤에 눈물을 훌쩍이는 모습은 아주 정적이며 단순하게 흐른다. 어떤 영화적 테크닉도 없는데 크나큰 울림을 준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늘 그렇구나, 이별이란 그렇구나, 결국 인간은 혼자인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면은 아마도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심정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틀비틀 물을 마시며 테이블에 앉는 그 모습이 아마도 인간의 마지막 힘을 주는 모습일 것이다. 제목이 ‘꽁치의 맛’인데 꽁치가 ‘추도어’다. 가을은 일 년 중에 저물어 가는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황혼의 빛을 낸다. 가을 꽁치의 맛은 처음에는 맛있지만 끝 맛은 끝물에 잡힌 꽁치가 씁쓸한 맛을 낸다. 꽁치를 그저 보는 것으로 맛을 알 수는 없다. 꽁치는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다. 먹기 전에는 꽁치의 맛이 쓴 지, 단지 알 수 없다. 인생은 살아봐야 알 수 있다. 인생이라는 맛이 쓴 지 단지에 대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60년대에 만들었는데 지금 봐도 누구나 재미있어한다. 분명 무겁고 외로운 주제를 다루는데 오즈는 어슬렁 돌아다니며 동네를 구경하듯이 담아낸다. 그 속에 큭큭 나오는 웃음이 있고, 슬픔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애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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