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사진은 문어고 밑으로는 오징어다.

음식으로써 보자면 문어와 오징어의 큰 차이가 있다. 혹시 사진만으로 그 차이를 찾아냈을까.

사진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경험상 우리는 그 차이를 대체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 사진은 오징어 반찬이다. 정확히는 오징어 무채 썰이. 오징어든 문어든 둘 다 음식으로 정말 맛있다. 근래에 이준익의 자산어보도 나오고 해서, 자산어보를 직접 읽은 적은 없지만 소설가 한창훈의 소설이나 그의 바다 에세이(라고 해야 할지)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어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와 바닷가에서 기생하는 갯것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바다 생물은 한창훈이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경험한 생물들이며, 갯것들 역시 그렇다. 그의 에세이에서 각주로 자산어보를 달아놨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자산어보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기대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다 푹 빠져서 보게 되니까.


각설하고 음식으로서 오징어와 문어의 큰 차이를 말하자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징어는 그대로 먹을 수 있고 문어는 삶거나 데쳐서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 그저 그동안 '오징어는 회로도 먹고 했는데 문어는 회로 바로 먹지 않았다' 정도에서 좀 더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기사나 자료보다는, 식당을 하는 사장님들도 자세하게 알 수 있게 설명을 해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오징어나 문어 같은 연체류에 속하는 두족류 중에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오징어와 낙지가 있다. 오징어는 바로 회로 먹을 수 있고 낙지도 탕탕이로 그동안 우리는 먹어왔다. 그런데 문어는 생으로 먹어 본적이 거의 없다. 문어는 데쳐서 먹거나 삶아서 먹지 바로 회를 떠서 먹지는 않는다.


문어가 오징어나 낙지와 다른 점은 문어는 몸통이 거의 없다. 대가리와 대부분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보통 문어는 삶아서 다리 부분을 많이 먹는다. 그만큼 음식으로서 다리가 문어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어를 낙지처럼 다리를 탕탕 쳐서 그대로 회로 먹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나면 사람들이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문어는 낙지나 오징어와는 달리 진액이 엄청 나오는데 그 진액에는 독소가 있다. 다리라고 불리는 것이 다리의 개념보다는 촉수의 개념이다. 그래서 독소가 있는 진액으로 먹이를 잡아서 먹기도 하고 그렇겠지.


그런데 이 진액에는 세균이 가득하다. 균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균이 너무 많아서 바다에서 잡아서 회로 다리를 먹고 나면 심각하게 배탈이 나기도 한다. 문어는 죽고 나면 진액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진액을 전부 제거하고 나서는 문어를 그대로 회로 먹어도 된다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먹으려면 반드시 전문점이나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이게 왜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하냐고 하면 밀가루로 1차적 세척을 빡빡해줘야 한다. 그리고 굵은소금으로 2차적 세척을 또 빡빡해준다. 마지막으로 문어 껍데기를 전부 벗기고 다리 속살을 얇게 저며서 어쩌고 하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회로 먹을 수 있다. 그럴 바에는 늘 먹던 대로 삶아서 먹자. 그래도 맛있잖아.


주꾸미도 회로 잘 먹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보다 질겨서 그렇다고 한다. 주꾸미는 생으로 먹으면 아주 질겨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회로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조리를 해서 먹고 회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으니까 그걸 먹자.


그러고 보면 가축으로 소, 돼지, 닭, 염소, 개, 말 정도로 인간은 제한을 두었는데, 제한을 두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야생동물에서 인간의 범주 속에서 같이 공생할 수 있는 추려진 것이다. 총. 균. 쇠. 인지,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애매하지만 인간은 곰도, 표범도, 산양 등 여러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하려고 시도를 했었다. 그 시기가 정말 오래전부터 다.


곰은 힘도 좋고 잡식성이라 농사에 도움이 될 거라 키웠지만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다. 또 얼룩말도 그냥 말처럼 가축으로 하려고 했지만 결론은 사나워서 가축화가 되지 못했다. 현대사회의 동물원에서도 사육사들이 육식동물에게 사고를 당하는 일보다 얼룩말에게 물리거나 차여서 사망하거나 다치는 사고가 더 많다고 한다. 또 치타도 속도가 빠르고 이런저런 이유로 가축화하려고 했는데 치타는 교배가 아주 기이하게 이루어진다. 암컷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면 그 뒤를 수컷이 또 굉장한 속력을 내며 따라가서 교배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치타가 가족을 이루려면 어마어마한 땅을 보유해야 하는데 그것에서 실패했다. 또 산양 같은 경우는 한 번에 4미터씩 뛰어 올라서 울타리 같은 것들의 실패로 가축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동물을 가축화하려는 노력 끝에 지금의 가축으로 추려진 것이다.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음식 역시 인간이 생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근래에는 인간이 음식을 생존 그 이외의 것으로도 먹기 때문에 눈으로도 먹고 입으로도 먹어야 하는 시대에 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의 베리에이션이 많아졌다. 라면에 마요네즈를 넣어서 같이 끓여 먹으면 아주 고소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러시아에서는 한국 라면에 마요가 아예 동봉되어 있다.


또 생으로 먹으면 안 되는 음식 중에 하나가 장어라고 한다.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장어는 손질하는 사람의 손에 상처가 있어도 안 된다고 한다. 장어의 피가 눈에 탁 들어가고 큰일이 날 수 있다고 한다. 장어류에는 혈청 독이 있다. 피에 독이 있기 때문에 손에 상처로 피가 들어가면 염증이 생기고 곪을 수 있다. 또 눈에 피가 들어가면 눈이 충혈되고 붓고 타오르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우리가 먹는 붕장어나 갯장어의 회는 그래서 피를 싹 제거한 다음에 물에 빡빡 빨아서 탈수기에 돌려서 수분을 싹 말려서 먹는다. 그렇게 해서 붕장어의 회를 먹게 된다. 그런데 혹시 장어를 먹고 기름이 간혹 배탈을 나게 한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건 잘못된 보도라 한다. 장어의 지방은 불포화지방으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한다. 배탈이 나고 병원에 실려가는 대부분의 요인은 피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먹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민물장어, 흔히 뱀장어는 절대 회로 먹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구워서 먹어야 한다고 한다. 불판에 구워 먹는 게 맛있기도 하고 또 양념 같은 것을 발라서 먹기 때문에 맛이 배가 된다. 고독한 미식가도 장어구이와 장어덮밥을 맛있게 먹는다. 뱀장어의 독은 아나필락시스라고 하는데 요즘 뉴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다. 이 아나필락시스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데 반응이 나타나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 독은 단백질 독성이라 가열하면 싹 사라진다고 하니 뱀장어는 구워서 맛있게 먹자. 


장어구이를 언제 먹어 봤지? 울쟈.

삶은 문어는 기름장에 보통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이렇게 마요네즈와 와사비, 땡초를 같이 넣어서 소스를 만들어 먹으면 고소, 킁 함, 매운맛이 싹 올라오면서 문어의 맛있는 다리를 오물오물거리고 칼스버그를 한 모금하면 아주 행복하다.  

오징어는 날 것 그대로 먹을 수 있기에 이렇게 무채 썰이와 함께 밥에 올려 외암 먹으면 역시 행복하다. 이렇게 무 채 썰이에 들어가는 오징어는 늘, 항상 모자란다. 먹다 보면 오징어는 금방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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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패삼겹살이 보통 두툼한 삼겹살보다 나는 좋다. 그래서 집에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하는데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대패삼겹살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집에서는 그냥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보통 사람들이 삼겹살보다 대패삼겹살을 잘 안 찾게 되는 이유는 얇고 비계가 많아서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고 두꺼운 삼겹살에 비해 맛도 떨어진다는 이유다. 내 입맛은 어째서인지 대패삼겹살이 두터운 삼겹살보다 훨씬 맛있는데 주위에서는 내 입맛이 특이하다고 했다. 오래전에 특별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특이한 것으로 바뀌곤 한다. 생각해보면 주위에서 내가 좋아하는 전통시장 안의 돼지국밥집에는 같이 안 가려고 한다. 거기는 주로 할아버지들이 국밥을 먹고 있으며 꼬릿 한 비린내가 난다는 이유다.  


대패삼겹살은 익는 시간도 빨라서 익으면 밥에 싸서 외암 먹는 맛이 있다. 귀찮아서 쌈을 싸서 먹고 하는 걸 잘하지 않는데 대패삼겹살은 재빠르게 익어서 뜨거울 때 뜨거운 밥과 함께 먹기 좋다. 물론 내 입에는 참 맛있다. 대패삼겹살집이 성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대패삼겹살 집에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고 코로나 때문인지 최근에 대패삼겹살 집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의 시내 중심가에도 대패삼겹살 집이 생겼는데 실내가 무척 크고 럭셔리 한 고기 집 못지않게 실내 장식이 되어 있다. 저녁에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보면 늘 사람들이 가득 있다. 코로나 시대지만 가벼워진 주머니 때문에 대패삼겹살집이 호황이다. 늘 사람들이 많다. 맛있게도 먹는다. 그래, 대패 삼겹살은 맛있다니까. 


언젠가 대패삼겹살이 유행일 때 우리가 종종 가는 대패삼겹살 집도 있었다. 일 인분에 천 오백 원하는 곳이었다. 삼인분 정도만 먹어도 어느 정도 허기가 해결될 수 있었다. 밥과 함께 된장찌개를 같이 먹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간 적은 없었다. 분명 저렴한데 친구들과 함께 소주를 마시고 나오면 다른 곳에서 먹은 만큼의 돈은 나왔다. 횟집에 가서 먹으나 치킨을 먹으나 대패삼겹살 집에서 먹으나 나오는 돈은 비슷했다. 그게 참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그래도 ‘저렴한데 맛있어’가 우리를 관통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식당을 단골집으로 정해놓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들락거렸다.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가면 늘 앉는 자리에 친구들 중 누군가는 꼭 앉아서 소주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그냥 그 자리에 껴서 먹으면 된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시절에는 그런 단골집들이 꽤나 있었다. 아무 때나 쓱 들어가서 인사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마시곤 하던 곳이. 그리고 거기에 가면 친구 중에 누군가는 꼭 있었다. 제대를 하고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역에서 디제이를 하던 초등학교 동기가 레코드 카페를 열어서 그곳에 종종 갔던 적이 있었다. 앨범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친구가 레이 찰스의 탁성이나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레이 찰스의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했다. 그 친구가 맨해튼 트랜스퍼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맨해튼 트랜스퍼 멤버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면 주위에 어느새 몇몇의 손님들이 몰려와서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빠졌지만 우리가 자주 가는 곳 중에 단골 대패삼겹살집도 있었다.  


대패삼겹살은 빨리 익기 때문에 성격이 급한 나 같은 인간은 금세 집어 먹을 수 있다. 노릇할 때는 비계의 부드러운 맛이 뇌를 녹일 것 같다. 구워졌다 싶으면 빨리 집어 먹어야 대패삼겹살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구워 놓은지 시간이 좀 지나면 바싹해져서 고기 맛이 나는 썬칩처럼 되어 버린다. 그 맛도 나름대로 맛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해서 먹기도 했다. 대패삼겹살은 아무래도 쌈 같은 거 싸지 않고 익으면 바로 밥 위에 올려 간장에 빠진 양파와 같이 먹는 게 맛이 있다. 이건 이대로의 세계가 좋아, 하며 날름날름 익기가 무섭게 건져 먹었다.


단골집이라 밭에서 상추를 키우는 친구(의 어머니가 키운다)가 그 집에 갈 때는 텃밭에서 딴 상추를 들고 왔다. 직접 재배한 상추는 색감이 진하지 않고 굵지 않으며 크지도 않다. 작고 부드럽고 연녹색의 상추였다. 친구가 상추를 들고 오는 날에는 주인고 같이 앉아서 상추에 쌈을 싸 먹었다. 대패삼겹살 집에서 내주는 상추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럴 때면 주인은 우리에게 6인분 같은 5인분을 그냥 주었다. 주인은 아주머니로 넉살이 좋은 사람이었다. 고독한 미식가 – 세토우치 출장 편 두 번째 맛 집의 주인아주머니 같았다. 같이 앉아서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껴서 같이 하고 손님들의 이야기에 적절하게 참견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간섭을 싫어하는 손님들이 없을 정도로 사근사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의 대패삼겹살 집이 점점 눈에 띄게 줄어들어 거의 사라지더니 굵은 삼겹살이 테이블을 점령했다. 굵은 삼겹살을 먹게 되면 절차가 못 마땅하다. 직원이 와서 이렇게 저렇게 잘라서 알맞게 구워주는데 그것 또한 우리는 별로였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삼겹살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누군가 한 번 갈까,라고 해도 에이 하며 대체로 가지 않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고기는 이제 집에서 각자 구워 먹자, 라는 식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가 오기 전 재작년에 해운대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 거기서 대패삼겹살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생삼겹살과 가격이 같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패라는 게 이런 맛이니까 그저 한 번 먹어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대패삼겹살이 요즘 다시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돌고 도는 유행일까. 이젠 여기저기 대패삼겹살 집이 생겼지만 예전처럼 가지 않게 되었다. 대패삼겹살은 여전히 맛있지만 자주 먹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건 기호도 습성도 조금은 바꿔 놓는다. 그래도 누가 사준다면 날름 나가서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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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의 서재 광고가 참 많이 나온다. 대대적이다, 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주야장천 나온다. 마치 책을 읽지 않는 너희들아, 너희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 정도나 했어, 그러니 닥치고 들어 봐,라고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 시대에 듣는 책 읽기로 그 갈증이 해갈이 좀 된다면 괜찮은 일일까. 우리나라는 성인이 책을 일 년에 한 권 정도 본다고 몇 해전 통계가 있었다. 도대체 통계라는 건 왜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만큼 책을 읽지 않으니 책 좀 읽어라, 라는 말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출판 7위다. 어마어마하게 책을 찍어 내고 있는 나라다. 그러니까 그만큼 읽고 있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도 없는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계속, 꾸준하게 읽는다는 말이다. 요컨대 문화를 소비하는 주 축은 2, 3, 40대 직장여성이다. 그들이 월급을 받으면 읽고 싶은 책을 듬뿍 구입하여 읽고 리뷰를 올리고 인증샷을 찍는다. 그 리뷰가 알음알음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남자들 같은 경우 책보다는 다른 것에 투자하는 경우가 더 많다. 게임이 그렇고 자동차나 낚시 같은 여가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렇다면 게임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책에 투자를 하는 것보다 삶에 있어서 질이 떨어진다거나 덜 현명한 것일까.


먼저 밀러의 서재 같은 어플이 나온 이유를 광고에서 찾아보면 요즘 시대에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눈뜨는 순간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책을 들을 수 있게 만든 것이 밀러의 서재라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어플로 책을 듣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책을 읽는 사람들이 다음이 궁금한데 진짜 시간이 나지 않아서 이동 중에 듣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 그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나 원래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밀러의 서재가 생겼다고 해서 그 어플을 이용해서 책을 읽는다? 글쎄, 정말 그럴까. 물론 광고라는 게 과장이 있지만 광고에서처럼 또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출근길에 책을 들을 수 있어서 집중이 될까.


요즘 시대처럼 바빠진 시대 그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해방 전후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때에도 소공녀라든가 이상한 나라 엘리스 같은 책들이 전쟁통에서도 유통이 되었다. 책이라는 건 바쁜 시대뿐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읽을 사람들은 어떻든 악착같이, 죽기 살기로 읽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소설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바로 그 전쟁통에서도 자신의 어머니가 소설책들을 어딘가에서 구해서 읽게 해 줬기 때문이다. 대부분 까막눈에 책이라는 건 읽지 않았을, 또는 사는 게 힘들어서 책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시절에도 꾸준하게 책이 좋아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서 1, 2대 문인들이 된 작가들이 있다.


백석이 그렇고 김유정이 그렇고 김해경이 그렇고 윤동주가 그랬다. 그 외에 많은 문인들이 고통스럽게 글을 적어서 역사를 남기고 책을 펴냈다. 그 시기를 지나 6, 70년대 신문이 보급되면서 신문에 실린, 매일 연재되는 소설을 읽기 위해 사람들은 너도나도 신문을 받아보거나 잡지를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가 70년대 중후반 티브이가 보급되면서 굳이 책에서 재미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재미있는 것들이 쏟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굳이 책을 읽게 하기 위해 밀러의 서재가 나왔다는 건 좀 뭐랄까, 아무튼 그렇다. 책을 재미로 읽습니까?라고 누가 할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책은 재미로 읽는다. 책이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그래서 읽다가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사유를 하는 것이다. 책을 의무로 읽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밀러의 서재는 300만 구독자가 있고 십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투적으로 광고를 하지만 책이라는 건 원래부터 줄곧 읽던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 하루의 빡빡한 사이클 속에서 읽을 시간이 모자랄 때 책 읽어주는 어플을 이용해서 읽으면 갈증의 해소가 된다, 정도로 생각이 든다.


의문이 드는 건 하루가 정말 빠듯할 때, '책'을 '늘 '읽'는 '사'람'이 하루가 정말 밥도 못 먹을 정돌로 빡빡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나의 팔로우 대부분이 책벌레들이다. 그 속에는 가정주부가 많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도 회사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며 장을 보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어떻든 시간을 내서 한 달에 10권씩 읽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여성은 일까지 하는데 매일 조금씩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루 종일 시간이 남아도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매일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매일 약간의 페이지를 읽고, 매일 일정량의 글을 쓰고 있다. 그러기를 거의 15년째 이어가고 있다. 하루가 엄청나게 빡빡하게 돌아가도 약간의 책은 늘 읽고 있다. 하루가 빠듯하게 돌아가니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서 좋아하는 소설을 읽을 시간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 주차장까지 걸어갈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조금씩 읽는다. 이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장편소설 한 권을 한 달 내에 읽을 수 있다.


책을 늘 읽는 사람이 책을 읽지 못하는 경우는 신변이나 신변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다. 시간의 없음과는 무관하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병이 들거나 입원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럴 때 책이나 읽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기 때문에 책 따위는 보지 못한다. 그럴 때 아픈 사람을 두고 밀러의 서재로 책을 듣고 있을 수 없다. 당연하지만.


나는 읽어주는 것으로 책을 듣던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도 한 번 적었는데 그때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유튜브로 읽어주는 걸 잠들기 전에 왕왕 들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집중해서 듣게 되지 않는다. 소설은 더 그렇다. 집중해서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그렇기에 300만 명의 구독자가 있겠지만) 쉽지 않다. 읽어주는 책에 집중이 되는 경우는 자신이 쓴 소설을 소설가가 직접 읽어주는 경우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전의 김영하의 팟캐스터에서 확인을 했다. 자신이 쓴 소설이나 또는 김영하가 추천해주고 싶은 소설을 직접 읽어주면 다른 것에 신경이 분산되지 않는다.


책은 아니지만 글을 읽어주는 건 오래전부터 유명인의 입으로 계속 해왔었다. 김혜수나 이병헌이 시를 낭독하는 앨범이 판매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정확하고 감정이 실린 언어로 읽어주는 시를 듣게 되면 시에 대해서 또 다른 세계가 보인다. 그리고 여러 학교에서 크고 작은 시 낭독 대회가 열리곤 했다.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모든 학생이 시를 좋아하거나 시집을 읽고 있거나 시낭송 테이프를 듣지는 않았다. 아주 소수의, 몇 명 없는 시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시를 읽고 낭독하기를 즐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밀러의 서재 같은 어플이 취지처럼 썩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도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 위에서 의문을 가진 점인데 그건 아무래도 책을 읽게 되면 좀 똑똑해지거나 현명해져서 삶의 질이 윤택해진다는 것에 접근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좋아져서 행복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과연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에 도달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반적인 행복보다는 일반화가 아닌 부분의 덜 불행화 정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문지혁 작가도 유튜브를 통해서 세세하고 꼼꼼하게 말하고 있다.  https://youtu.be/wq5Op0plgC8


나도 책을 적게 읽는 건 아니지만 나 같은 경우를 보면 똑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 중에도 현명하고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 흘러넘친다. 내가 책을 읽게 된 건 학창 시절부터 시간이 날 때 음악 듣는 것 빼고 딱히 할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로 소설책만 읽고 있어서인지 현실적인 감각은 제로에 가깝다. 자기 개발서를 읽었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자기 개발서를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또 머리가 나빠서 읽고 나서 돌아서면 까먹는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4번 이상 읽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 빼고 세세한 것은 기억이 없다. 특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열 번도 넘게 읽었지만 그저 웃음만 나온다.


내가 매일 책을 읽는 건 습관이 되었다. 일단 습관이 되고 나면 손에 소설책이 들려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이가 처음 인형을 받아 들고 그 인형을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않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인형이 꼬질꼬질해져도 일단 손에 들려 있으면 아이만의 세상은 안정된 세계인 것이다. 이런 습관은 마치 고대시대 궁전에서 치르는 의식처럼 행해지고 있다.


또 어플로는 채워지지 않는 책 고유의 표지 디자인을 영접하는 것이다. 같은 하루키의 책이라도 시대별로, 출판사별로 디자인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손에 쥐고 보는 재미가 있다. 꼭 책의 내용을 읽지 않더라도 칩 키드가 디자인한 북커버를 손으로 들고 본다는, 일종의 성취욕을 채울 수 있다. 게다가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처럼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를 보는 재미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이런 기분 좋은 촉감과 마음에 드는 시각을 어플은 채우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책 읽어 주는 어플은 어쩐지 의무로 책을 읽어야만 하는 기분이 든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장에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다른 책과는 다르게 소설이란 답이 확고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다 읽고 난 후 느끼는 대로 수많은 생각의 결말이 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소설 속에서는 꽤나 현명한 캐릭터가 등장하니 읽으면서 그들에게 이입되어 읽는 동안 주인공들과 함께 소설 속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며 현명함에 도달할 수 있다. 시인이 시를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것인 것처럼.


나는 전자책으로도 책을 읽었고, 들려주는 것으로 책도 읽어 봤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책 읽어주는 어플 광고를 할 만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과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하게 읽어 왔다.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은 꼭 책이 아니라도 책 그 이외의 것에서 충분히 삶의 질과 양을 채울 수 있다. 그 속에는 경험을 통한 지식의 터득도 있고 현명함도 확실하게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 똑똑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상관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꼭 종이책을 선호하지는 않는데 아이패드에도 책이 잔뜩 들어있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에서 보면 좀 불편하지만 종이책을 계속 불안하게 들고 다니며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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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표층적으로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심층적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상실을 토닥여준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세진의 죽음을 부정하며 끝까지 소녀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파헤치는 현수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현수가 가지고 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슬픔, 어둠, 외로움, 무엇보다 다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나도 모르게 이입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그 기억은 나를, 나의 정신은 잠이 들면 꿈속까지 찾아와 나를 옭아맨다. 그럴 때 나는 그만 세상과 잡고 있던 끈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잡아 준다.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그만 소리 내어 울고 싶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사람은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흐르는 음악이 정말 좋다. 마지막 음악을 듣고 있으면 차분하게 이정은이 노정의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잡아줬던 마음이 느껴지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온다.


평범해 보이는 이 지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다. 누군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수많은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만큼 힘들고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나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의외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나를 모르는 타인인 경우가 있다.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말은 정말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말이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저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지금 잘하고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그러니 처음에 영화에 속을 수 있다. 악착같이 살아내느라 제대로 상처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괜찮다고 손을 내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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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무력감에 시달리는 연속의 나날을 맞이한다. 도대체 이 한 없이 떨어지는 결락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벚꽃 때문일지도 모른다. 벚꽃은 불꽃의 미학을 닮아서 만개와 동시에 무화된다. 화려할 때 꺼지는 불꽃. 삶이란 찬란하게 피어올랐다가 그대로 소멸하고 만다. 벚꽃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봄이라 아찔해서 슬프고 기쁘다. 슬프면서 기쁘니까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무기력에도 입맛은 떨어지지 않아서 같은 양의 운동을 매일 조금씩 해도 살은 쪄 버린다. 무력감이 가득한 봄날에는 밥을 비비자. 비밤밥을 해 먹으면 먹는 동안에는 맛있어서 껌뻑 죽는다. 밖에서는 벚꽃 때문에 좋아 죽고, 비빔밥을 먹을 때는 비빔밥 때문에 좋아 죽는다.


봄에는 당연하지만 봄나물이 많이 나온다. 나물을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고추장에 비벼먹는 맛이 좋다. 고추장은 외가에서 담근 매실 고추장이다. 외가 특유의 맛이 있다. 외가가 있는 곳에서 보내주는 모든 음식은 그 지역 특유의 맛이 있다. 이제 그 음식을 매년 몇 번이나 보내주던 큰 이모가 작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제 이 고추장을 마지막으로 그 특유의 맛은 추억만으로 남을 것이다. 있던 사람이 없어지면 그제야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돼지고기도 좀 구워서 잘라 넣고 고추장을 넣고 봄나물을 넣고 참기름을 넣고 땡초를 썰어 넣어서 비벼주면 된다. 이렇게 비벼 먹으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드는데 한 가지 생각은 곧 밀어 버린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맛있어서 좋아 죽기 때문에 무력감을 잊는 동시에 살찌는데? 같은 생각이 동시에 든다. 하지만 이내 뒤의 생각은 발로 밀어 버리게 된다. 어떻든 비벼 놓은 건 다 먹어야 하고, 보통 다 먹고 나면 좀 있다가 한 반 더 비벼 먹게 된다. 인생이란 참 생각처럼 가지 않는다. 가끔 영국 친구인 죠가 오면 이렇게 밥을 비벼주면 오우오우 하며 잘 먹는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작년, 올해도 왔을 텐데 코로나 이전에는 젓가락질도 한층 늘었다.  


무기력을 잊게 해 주니 비빔밥은 기력의 음식이다. 간결한데 맛은 풍부해서 우리는 가끔 반찬이 시원찮을 때 냉장고를 열어 그 안의 것들을 고추장과 함께 비벼서 먹곤 한다. 가끔 전문가들은 고추장은 모든 맛을 눌러 버리는 강력한 맛이 있기에 비빔밥으로 고추장을 많이 넣으면 고추장 맛밖에 안 난다고 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비빔밥을 우리는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에서도 고추장처럼 강력한 맛을 한 번이라도 낼 수 있다면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무기력할 때는 기력의 음식 비빔밥을 크게 와앙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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