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HgzM5RM-JY

예고편


영화를 보다 보면 그만 영화의 인물에 이입이 되어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때는 눈물이 대책 없이 흐르기도 한다. 나는 어쩌면 그러려고 영화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수인을 보면서, 주수인의 성장을 보면서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우물 밑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영화 '소리도 없이'가 보색 대비의 재미였다면, '야구소녀'는 주수인의 컬러에 매료되는 재미에 빠지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수인을 계속 응원하게 된다. 주수인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주수인 파이팅, 야! 파이팅!!! 하게 된다. 마치 마법처럼,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파이팅을 외치게 된다.


겉으로는 야구를 표방하고 있지만 영화는 주수인의, 주수인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주수인은 99년 대통령 배 4강전에서 덕수정보산업고와 배성고의 시합에서 나온 '안향미' 선수를 기반으로 탄생된 캐릭터이다. 안향미는 구속이 130이 되지 않았는데 영화 속 주수인의 130 구속을 보면, 실제 구속이 136이었던-미국 야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한국에서 뛰고 싶어 한국으로 와서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 소속 내야수를 맡고 있는 재미교포 '제인 어' 선수와, 너클볼을 던지는 걸 보면 일본 출신으로 미국으로 진출한 너클 프린세스라고 불린 '요시다 에리' 선수를 오마주한 것 같다.

주수인은 그냥 제멋대로 탄생된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구단에서 남녀의 벽을 깨고 선수생활을 했던 실존인물을 말하고 있다. 안향미 선수는 우리나라 1호 여성 투수였다.

주수인은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이제 힘들어서 못하니 포기하렵니다,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너는 못 할 것이니 포기하라고 한다. 욕과 괴롭힘과 힐난조의 시선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에 노력에 노력을 할 뿐이다. 주수인은 좌절이 와도 그것이 좌절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발악을 계속할 수 있다. 그 발악 속에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가슴에 탁 와서 부딪히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 지점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코를 훌쩍거릴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초딩때부터 같이 야구를 한 정호가 코치에게, 수인이는 감독에게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힘들어서 나가떨어지겠지 하며 훈련을 시켰는데 지금까지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대사를 한다.

이는 실제로 안향미 선수가 유니폼을 벗을 뻔 한 사건이 있었다. 덕수정보산업고 하득갑 감독은 안향미 선수가 여자라 ‘재수 없다’는 이유로 야구부 전용버스를 타지 못하게 하고, 안향미 선수만 따돌리고 연습경기나 시합을 나가고, 심지어는 선수들에게 안향미 선수가 여자라 합숙생활이 힘들다고 적어내라고 조장하기도 했다. 부당한 처사에 격분한 안향미 선수 아버지가 교육부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부당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고 최숙현 선수가 있었던 트라이애슬론을 보면 된다. 엄청난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했다. 

감독은 원래 페미니스트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여자라서 받는 몹쓸 대우에 대해서. 그런데 영화를 촬영하면서 감독 자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주수인에게 동화가 되었다. 야구란, 특히 프로 입단이라는 건 여자건 남자건 모두에게 엄청나게 힘든 벽이라는 걸. 그래서 주수인이 점점 해내는 것을 보고 여자가 아닌 주수인의 성장을 그리게 되었다.


서러운 단어 '가난'은 주수인의 꿈을 가로막는 큰 벽이 된다. 가난한 부모는 주수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엄마는 모질게만 대한다. 아무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 아버지는 주수인의 편에서 어떻게든 뭔가를 해주려는 모습에서는 '빌리 엘리엇'의 아버지가 스치고 지나간다. 엘리엇의 발레를 위해 자존심을 버렸던 그 아버지가 쓱 지나간다. 


주수인은 쓰러지고 넘어지고 넘어져도 주저앉지는 않는다. 그래서 전국의 모든 주수인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싶은 영화다. 주수인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도 좋을 영화 '야구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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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면 그건 타인의 웃음소리다. 나에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웃음소리. 음산하면서 마치 나를 향해 깔보는 말들을 흘려보내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무라카미 류는 무의식 중에 들리는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고 했다. 히히히히, 킥킥 킥킥, 크크크크 같은 웃음소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근처에서 계속 들린다면 아마도 누구라도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꼭 나에게 하는 지랄 맞은 말 같아서.


우리는 그런 웃음을 티브이 뉴스를 통해 보기도 한다. 가해자가 법정으로 가기 위해 몸이 포승줄에 꽁꽁 묶여서 가고 있음에도 피해자들을 향해 짓는 웃음이 그렇다. '2AM: The Smiling Man'이라는 4분짜리 단편 영화를 보면 타인의 기괴하고 기묘한 웃음이 사람에게 얼마나 공포를 주는지 알 수 있다.

https://youtu.be/_u6Tt3PqIfQ




"씨발, 나는 해미를 사랑한다구요."

종수가 애타게 말을 하지만 벤은 큭큭큭큭 웃으며 대마를 피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니 안 그런 척 하지만 나 이외의 사람들은 멸시당해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웃음. 킥킥 킥킥 거리며 웃는 소리는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 내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서 기어 들어온다. 마치 벌레처럼.



종수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수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 번 터지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고 말이다. 종수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걸 알고 있다.


가진 게 없어도 재미를 위해서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배우는 해미는 재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벤과 어울리지만 종수는 낄 수 없다.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가면서 벤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우수한 DNA를 이어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종수가 가지지 못한 엄마와 웃음을 난타한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분노조절로 구치소에 간 것처럼 자신도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벤의 서랍 속에서 사라져 갔다는 것을. 유전자는 내면의 호러인 것을.


사람들은 버닝이 미스터리하고 애매해서 어렵다지만 실은 버닝은 시처럼 구체적이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모든 장면과 대사가 구체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다 나타난다.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구체성을 사람들이 찾지 못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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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2-04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닝> 강렬했던 영화! 마지막 문단 너무 소름돋네요👍

교관 2021-02-05 12:28   좋아요 2 | URL
영화 정말 좋았어요.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여서도 그런지 영화가 꼭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메타포로 꽈악 짜여진 듯 했습니다. (엄지표시)
 

동치미는 냉면처럼 겨울에 먹으면 더 맛있다. 별미다. 이상하지만 동치미는 겨울에 찾게 된다. 다른 계절에는 전혀 찾지 않게 되다가 겨울만 되면 보고 싶은 사람처럼 찾는다. 겨울이 되면 푸른 하늘의 ‘겨울바다’를 찾아서 듣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동치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팥죽이다. 단팥죽이 아니라 그냥 팥죽. 역전시장에 가면 팥죽 거리가 있다. 죽 붙어있는 팥죽 파는 가게는 온전한 가게라는 형태보다 그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고 맞은편에서 할머니가 팥죽을 퍼 담아서 내어 주는 형식이다. 전통시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팥죽은 거기에 앉아서 먹으면 맛있지만 동치미가 딸려 나오지 않기 때문에 포장을 해서 집에서 이렇게 동치미와 함께 먹는다. 이 정도의 동치미를 통에 담으면 한 번에 다 먹어 치운다. 동치미는 온전히 어른의 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당이 있던 어린 시절에는 화단 한 편에 독을 묻고 거기에 동치미를 담갔다. 그리고 겨울에 그것을 꺼내서 먹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동치미를 맛있게 먹은 기억은 없다. 또 그때는 무가 큼지막해서 젓가락으로 꼽아서 먹거나 해야 했는데 영 손이 가지 않았다.

동치미에 맛을 들인 건 대학교 때 자주 가는 닭갈비 집이 있었다. 거기 이모는 늘 닭갈비를 주문하면 동치미를 내주었는데 닭갈비보다 더 맛있었다. 시원하고 새콤하면서 와삭하고 씹는 무는 너무나 맛있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가다 보니 주인 이모와 친하게 되었다. 동치미를 여러 번 달라고 해도 싫은 내색 한 번 내지 않았다. 나는 닭갈비보다 동치미가 좋아서 동치미에 밥을 말아먹었다. 그러면 주인 이모는 나를 위해 동치미를 한 그릇 더 떠주고 밥도 더 주었다. 닭갈비 집은 한 건물의 9층에 자리했는데 9층이 닭갈비 타운이었다. 그 안에는 닭갈비 집이 10집이 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일주일에 몇 번씩 가니 그 집만 늘 북적북적거렸다. 테이블이 고작 4개밖에 안되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사람들이 많으니 조금씩 소문이 퍼져 그 집이 장사가 제일 잘 되었다. 그 덕분에 그 닭갈비만 돈을 왕창 벌어서 입지 좋은 곳으로 옮겨서 크게 닭갈비 집을 열었다. 아마도 동치미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매콤한 닭갈비의 맛을 살며시 눌러 주는 건 동치미다.


동치미는 단체 생활하는 곳에서는 잘 먹을 수 없다. 군대 같은 곳에서는 동치미를 먹을 수 없다. 오로지 집에서 조금씩 담근 동치미를 겨울에 맛보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야만 맛에 눈을 뜨는 음식 중에 하나다. 동치미는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김치와도 비슷하다. 그래서 동치미의 다른 맛을 맛보는 것 역시 좋다. 나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 그런지 죽 전문점에서 딸려 나오는 조금은 달달한 동치미의 맛도 좋다. 그래서 왕왕 가는 죽 전문점에서는 죽을 구입할 때 동치미 국물만 따로 몇천 원어치씩 사 먹기도 했다. 


겨울의 동치미의 맛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겨울의 팥죽이다.  둘 다 겨울에 먹으면 더 맛이 좋은데 겨울에 둘 다 먹으니 아주 맛있는 것이다. 팥죽을 한 숟가락 떠먹고 동치미를 떠먹는다. 시원하고 새콤한 국물이 꿀꺽 넘어간다. 그리고 무를 씹으면 동치미 국물을 가득 물고 있어서 무를 씹는 맛이 좋다. 팥죽을 입 안 가득 넣고 오물오물 먹고 동치미를 한 국자 떠먹는다. 아흐. 정말 어르신들이 목욕탕에서 탕에 들어갈 때 나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동치미는 쌉싸름한 와인과 같이 먹어도 맛있다. 동치미의 가장 별미는 국수 소면을 삶아서 동치미에 넣어서 후루룩 먹는 것이다. 곰돌이 푸우가 매일 행복할 수는 없어도 행복한 일은 매일 일어난다고 했는데 동치미에 국수 소면을 말아서 먹는 동안은 행복하다. 동치미는 내 외할머니를 늘 소환시킨다. 주글주글한 손으로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던 내 외할머니. 


내 외할머니는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외할머니와 중학생이었던 내가 한 번은 둘이서 식당에 갔다. 나는 갈비탕을 시키고 외할머니는 냉면인가, 동치미국수인가를 시켰다. 나는 그게 너무 맛있게 보여서 조금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밥그릇에 국수를 담았다. 국물도 조금 부었다. 그리고 담은 밥그릇을 자기 앞으로 당기고 큰 냉면그릇은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동치미를 와삭와삭 씹고 있으면 외할머니도 보고 싶고 생각이 난다. 동치미는 그런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 


나는 한 동안 겨울에는 동치미를 조금 큰 텀블러에 담아서 들고 다녔다. 모두가 텀블러에 커피를 잠아서 마셨는데 나는 시원한 동치미를 담아서 마셨다. 그러다가 무도 먹고 싶어서 큰 보온병으로 바꾼 다음 동치미를 이만큼 담아서 하루 종일 홀짝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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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는 하여간 재미있는 곳이다. 들어가면서부터 이미 뭘 구입할지 선택 물품이 정해져 있고 그걸 다 고르고 나면 어디 어디 코너로 가서 무엇을 구경할 것인가가 프로그래밍이 된 동선이 있다. 동선을 따라서 다니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

주차를 하고 마트에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전에는 옷 가게들이 있고 마고리엄의 장난감 공장 같은 곳이 있다. 주인이 세계를 떠돌며 모아놓은 것 같은 상품들을 파는데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물품들을 구경하느라 마트에 내려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기차나, 말처럼 생긴 코끼리나 허공을 빙빙 도는 물고기 모빌 등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끈다.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대형 마트에 서점이 다 있어서 서점에 들어가서 책 구경도 했었는데 어느 날 모든 대형마트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마트 속에서 서점이 싹 사라졌다. 대형마트는 대형 마트답게 세일을 했는데 책도 그랬다. 그래서 마트에 딸린 서점에 자주 가다 보면 앉아서 책도 읽고, 책도 저렴하게 구할 수 있고, 적립도 하고, 이래저래 괜찮았는데 싹 없어졌다. 서점 코너에는 항상 엄마를 따라온 아이가 앉아서 그림책을 보는 모습은 늘 정겨웠다.

마트로 내려가서 그로서리 쇼핑을 한다. 컵라면과 라면은 늘 탑처럼 쌓여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저 쌓여있는 라면탑을 달려가서 몸으로 무너트리고 싶다. 영화를 보면 잘도 그러는데 실제로는 그러면 안 되겠지요. 라면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수많은 종류의 라면 중에서 마음에 드는 라면을 이만큼 집어서 바구니에 넣고 싶다. 일을 마치고 밤에 가니까 초밥은 늘 세일을 한다. 그래서 먹고 싶은 연어 초밥만 한 통 담아서 넣을 수 있다. 마트 초밥은 먹을 게 못 되니 제대로 된 초밥을 먹으라는 말을 왕왕 듣는데 나는 마트 초밥도 맛있다. 제대로 된 초밥집에는 제대로 된 시간에, 제대로 거기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귀찮다. 그에 비해 맛이 썩 떨어질지 몰라도 언제나 가면 그 자리에 초밥이 있어서 쓱 건져오면 된다. 무엇보다 내 입맛에 마트 초밥도 맛있다는 것이다. 


멍게도 꽤 먹을만하다. 멍게는 집에 오면 바로 미나리와 고추장과 함께 밥에 넣어 슥삭슥삭 비벼서 먹으면 맛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고래고기 수육도 맛볼 수 있다. 마트에서 파는 고래고기 수육은 비린내가 아주 많이 나기 때문에 먹고 난 후 다른 가족의 반응이 격해질 수 있다. 양치질로는 어림도 없으니 각오를 해야 한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몇 해 전에는 물개 기름도 팔았다. 물개 기름을 숟가락으로 떠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고래나 물개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살아야 하니 몸을 보온하기 위해 기름이 가득하다. 요즘은 알약으로 영양제 형태로 나오는 모양인데 아무튼 그런 것도 팔았다. 대단히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피규어를 좋아하니까 피규어 코너를 가면 건담이나 마징가 프라모델을 비롯해서 진열되어 있는 모델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마트에서든 아이들을 붙잡기 위해 이런 피규어 장식과 파는 곳이 있지만 규모가 전부 다 다르다. 내가 돌아가면서 들리는 마트는 세 군데로 각 곳의 피규어 코너만 놓고 봤을 때 모두가 그 담당 직원 때문인지 확고하게 색이 다르다. 구입하지는 않을 테지만 지난번에 왔을 때 없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버전의 마징가 프라모델이 나오면 집었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예정에 없던 물품이므로 가격이 저렴해도 서서 아주 고민을 하게 된다.

마트에 가면 늘 구경하는 것이 어항 속 열대어다. 10시가 되면 어항에 보자기를 덮어 씌운다. 열대어들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그전에 실컷 구경을 해야 한다. 열대어들의 유영을 멍하게 보는 건 아주 평안해진다. 집에서 구피들을 키웠을 때에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느새 새벽이 되어 버린다. 열대어들은 조금 큰 녀석들보다 작은 녀석들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해주며 잘 지내보자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인간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어두워서 다 잔다고 하지만 또 그때 미워하는 서로에게 대들어 싸울지도 모른다. 

어항 속에 반드시 물고기가 없어도 된다. 그저 한들거리는 수초만 바라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다. 나는 그만큼 재미없는 인간이다. 나만큼 재미없는 인간은 재미없는 것에서 또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평소에 심심하다던가 지루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열대어를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높은 굽과 날씬한 다리를 덮은 가죽바지, 리얼 폭스의 코트가 대형마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여자였다. 하지만 수수한 화장의 여자가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1년 전에 찾았던 룸살롱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였다. 미인이라 할 만큼 예쁜 얼굴은 변함없었고 큰 키 덕분에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마트 2층의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잔했다. 나는 커피 원액을 주문했고 여자는 녹차를 마셨다. 계산은 여자가 했다. 나는 요즘도 잘 다니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이제 룸살롱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여자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매춘부에게 육체적인 사랑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욕망의 주체인 남자는 육체의 사랑에 집착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한 손님에게 그만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침에 손님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돈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의 주체는 타자였다.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주체로 보고 욕망에 맞춰 나가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님을 사랑하게 된 후, 욕망의 주체가 자신이 된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마찰이 일어났다.


그녀의 마음속에 또 다른 자아라고 하는 슈퍼에고를 느끼고 손님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손님에게 그녀를 그저 욕망의 분출구일 뿐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까지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떻든 마트라는 곳은 재미가 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가게 되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재미있는 대형마트도 언젠가부터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오면 한 시간 반 정도가 너무 쉽게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으로의 귀가가 늦어지기 일쑤다. 


오랜만에 들린 마트에서 어항 구경도 끝이 나고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서 먹고 싶은 것을 담아 왔다. 튀김과 닭발 편육을 담았다. 닭발 편육은 매콤한 맛이다. 밥과 함께 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는 맛이 좋다. 편육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고 간장에 빠진 양파를 곁들여 오물오물거리고 있으면 음음 다음에 또 들러야지, 하는 생각이 순간 든다. 


튀김은 식어도 괜찮다. 치킨과 튀김은 뜨거울 때 후후 불어서 아흐 같은 소리를 내면서 먹는 게 맛있지만 식어도 맛있는 게 튀김이다. 담아주는 간장에 겨자를 뿌려서 거기에 찍어 먹는다. 나는 튀김을 항상 김말이와 오징어튀김만 집어서 온다. 김밥 튀김을 좋아하지만 마트에는 팔지 않는다. 김밥 튀김은 조깅하면서 오는 전통시장에서만 판다. 튀김 몇 개는 그대로 먹고 몇 개는 밥 위에 올려서 먹는다.  뭐든 튀기면 맛있다. 그 맛있는 튀김을 밥과 함께 먹으니 맛있을 수밖에 없다. 작은 행복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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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2-01 12:44   좋아요 0 | URL
두부는 사진에 안 나왔을 뿐 거의 매일 밥상 위를 채우고 있어요 ㅎㅎ
 


두부를 거의 매일 먹는 나로서는 하루키의 두부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하루키는 신주쿠 술집에 굉장히 맛있는 두부를 내놓는 집이 있는데, 처음 갔을 때 너무 맛이 좋아서 한꺼번에 네모나 먹고 말았다고 한다. 간장이나 양념 같은 것은 일체 치지 않고 그냥 새하얀, 매끈매끈한 걸 꿀꺽하고 먹어치우는 것이라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말하고 있다.

두부 하면 하루키다. 그는 갓 사 온 두부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하룻밤 지난 두부를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귀찮으니까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주의가, 방부제라든가 응고제 같은 것의 주입을 초래한다고 했다. 두부 장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에 된장국에 넣으라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열심히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건데, 모두들 아침에 빵을 먹는다든가, 슈퍼에서 파는 방부제가 들어 있는 좋지 않은 두부를 사 먹거나 하니까, 두부장수 쪽에서도 의욕이 떨어져 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두부를 만드는 우수한 두부 가게가 거리에서 한 집 한 집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고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렇지만 공장 두부도 좋아한다. 손두부(어촌 시장의 손두부 집은 많이 사라졌는데 백화점에서 손두부를 만들어서 팔고 있다. 생각해보면 묘하다)를 먹을 때도 있고 공장 두부를 먹을 때도 있는데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공장 두부도 공장에서 갓 나온 두부를 먹으면 눈이 번쩍할 만큼 맛있다. 단지 전국 각지의 슈퍼와 편의점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처리를 하는 것이다.

두부는 인간이 잠들어 있는 바다에서 인간의 땅으로 온다. 맛있는 두부는 간장도 양념도 필요 없다. 갓 나온 두부는 두부 본연의 맛을 꽉 쥐고 있기 때문이다. 두부 역시 간수로 만들어진다. 간수가 중요하다. 간수를 맞추지 못하면 두부의 생명은 사라지고 만다. 두부는 두부 장수의 뒤틀어진 팔의 생명을 나눠 정당한 맛을 낸다. 오직 적요한 시간, 그제야 으스러지지 않고 두부는 근사한 언어를 지닌 채 인간의 곁으로 온다.

밥상 위에 두부가 사라진다는 건, 카메라에 의존하는 사진쟁이는 피사체로 사진을 꽉 채우고, 어설픈 그림쟁이는 여백을 두려워하고, 사색 없는 글쟁이는 수식어가 많은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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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21-01-30 12:3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니요 못 먹어 봤어요. 저는 슈퍼 같은 곳에서 파는 공장 두부도 맛있어 하구요. 손두부도 맛있어하고 특별히 가리는 건 없어서 ㅎㅎ 두부를 거의 매일 먹기 때문에 슥 집을 수 있는 곳에서 파는 두부면 들고와서 먹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