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는 날이 흐리고 비가 곧 쏟아질 것 같다, 싶으면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진지하게 내리는 비는 좋다. 흩날리는 비는 옷의 어두운 부분을 적셔서 몹시 기분을 다운시키지만 우산을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진지한 비는 좋다. 비를 바라만 보는 것도 마음에 들고 우산을 쓰고 걸으며 우산 천장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도 듣기 좋다. 마치 버브의 드러머가 쉴 새 없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리듬 있게 떨어진다.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행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때 아닌 비가 쏟아진다. 옛날 민박집이라면 처마 끝에 앉아서, 펜션이라면 발코니에 앉아서 비를 바라본다. 꼭 음료를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된다. 마빈 게이의 음악이 있다면 더 좋다.



비가 오면 당연하지만 우산을 써야 한다. 우산은 별거 아닌 물품인데 비가 내리면 반드시 찾아서 들어야 하는 물품이다. 우산은 써야 하는 이유가 확실한 물건이다.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우산을 유심히 바라보면 연령대별로 들고 다니는 우산의 형태(라고 말해야 할까)가 다 다르다. 디자인이 확고하게 다른 것이다. 아직까지 남자들은 사용하는 우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지만 우산도 비를 피하는 적확한 용도만큼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하면 많아졌다.


비가 오는 날 이층의 카페에 앉아서 거리를 바라보면 컬러나 조금씩 다른 모양의 우산들이 총총걸음을 옮기고 있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움직인다. 어떤 우산은 뱅글뱅글 돌아가기도 한다. 그 우산은 비교적 다른 우산에 비해 작다. 우산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어떤 이는 비가 오면 우비를 입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우비를 입고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난다. 비가 오는 와중에 찝찝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여자들의(남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우 머리가 망가진다. 기껏 고대기로 말아 놨는데 우비를 입고 우비에 딸린 모자를 스고 약속 장소까지 가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머리에 뜩 붙어있고 땀 때문에 팔을 들 때마다 겨드랑이에 흐른 땀은 그 사람과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우산 없이 집 밖을 나왔다가 비가 오면 어쩔 수 없이 우산을 구입하게 되는데 이왕이면, 하는 마음이 든다.



노래에도 있듯이 우산은 종류도 많다. 3단 접이식, 2단 접이식, 장우산 등 여러 가지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한 우산에 대해서 블로그를 통해서 사용 후기를 적어 올리고 공구를 하고도 한다.


비는 지구가 생선 된 이후로 꾸준하게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구는, 인류는 큰일을 당하게 된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는데, 도대체 우산은 누가 만들었을까. 분명 우산을 처음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만들어진 시대의 우산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편리한 물품 전체가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냉대를 받았거나 소외당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의 우산이 되었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러다 하루키의 ‘더 스크랩’에 세상에 탄생한 첫 우산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제일 처음 우산을 쓰고 런던 거리를 걸었던 영국인에게 인생은 결코 달콤한 장미정원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조나스 한웨이라는 박애주의자로, 때는 서기 1750년의 일이다. 우산이 널리 일반에게 퍼지게 된 것은 그 후로 약 삼십 년 뒤이니, 그 삼십 년 동안 한웨이 씨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마차를 타든가, 아니면 신의 뜻대로 비를 맞고 다녀!” 하는 식의 비난 세례를 받았다. 18세기 영국에서 우산이 별로 보급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남자들 대부분이 칼을 차고 다녀서였다. 우신이란 건 상당히 우스꽝스럽고, 무엇보다 우산과 칼을 둘 다 갖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펴고 다니는 모습은 사람들 눈에는 뭔가 비열해 보였던 것이다. 19세기가 되어서 사람들은 겨우 칼을 들고 다니기를 그만두고, 대신 지팡이를 갖고 다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우산은 남자다움이라는 점에서 몇 단계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1852년에 요크셔에 사는 새뮤얼 폭스라는 남자가 요즘 사용하는 금속 뼈대의 우산을 발명하여, 둘둘 말아서 단단하게 접어 날씬한 우산 집에 넣도록 연구했다. 덕분에 그것은 칼집에 든 칼이나 지팡이라고 해도 충분히 통할 정도의 모양새가 되어, 사람들은 비로소 우산을 인정해도 좋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고작 우산 하나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역사가 있는 법이다. 제일 처음 전철에서 워크맨을 들었던 선인의 고충이 짐작된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우산 가게는 스웨인 아데니 브리그&선스(이하 브리그로 줄임)로, 이 가게는 왕실에도 조달한다.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최대한 단단하게 감긴 우산이야말로 신사의 긍지라고 믿는 적잖은 수의 영국인들이, 우산을 빨고 다림질하고 단단하게 말기 위해 매일 아침 10시가 되면 우산을 들고 브리그 문을 두드렸다. 브리그 우산은 절대 디자인을 바꾸지 않는다. 수북하게 밥을 다은 밥공기 같은 모양으로 둘이 같이 쓰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혼자 쓰면 비에 잘 젖지 않는다. 한 개의 우산을 만드는 데 브리그에서는 여덟 명에서 열 명의 직인이 세 시간을 들인다. 가장 싼 나일론 모델이 약 15,000엔이라고 하니 그 정도라면 우리도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최고급품은 14만 엔 정도.


하루키가 적어 놓은 소설 이외의 글은 읽고 있으면 어떻든 재미가 있어서 키득거리게 된다. 검색으로도 우산의 유래 같은 것을 잘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흘러 들어와 비가 오면 들고 다니게 되는 것도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우산이 귀찮아서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매일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하고 특별하게 여기기도 한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반드시 우산이 있고 우산공장에서는 비가 많이 내릴수록 룰루랄라 하며 우산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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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일단 한 번 보고 오자.

https://youtu.be/NxaGnK3A-Pc

Live Aid 1985 - Do They Know It's Christmas (Film Camera Source)


이 모습들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밴드 에이드의 라이브에서 별이 되어 버린 데이빗 보위와 조지 마이클이 서로 장난을 치는 장면도 볼 수 있었고 보노의 젊은 시절, 모튼 하켓의 조각 같은 얼굴도, 풜 뭬쾈퉤뉘로 발음해야 하는 폴 메카트니의 환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기뻐하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도. 오버스럽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모습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이들은 ‘위 아 더 월드'가 나오기 전, 84년에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슈퍼스타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당시에는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실현이 되었다. 60대부터 일기 시작한 히피 뮤직은 세상을 전쟁과 기근에서 노래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보브 딜런, 제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같은 뮤지션들은 굶어가면서 세상을 향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 명맥이 이어져 밴드 에이드까지 오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조지 마이클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죽었다. 조지 마이클이 이반이라는 것이 신문에 났을 때 세상이 들썩 거렸지만 이내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조지 마이클은 이후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이후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85년도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가 아주 청량하다. 청량하기만 하다는 느낌이다. 이반 이후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는 무 깊이가 되었던 것 같다. 깊고 그 울림이 심해 같았다. 조지 마이클은 웸 시절 잘생긴 앤드류 리즐리에게 인기를 거의 다 빼앗겼는데 개인적으로 앤드류 리즐리가 조지 마이클보다 잘 생겼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근래에 라스트 크리스마스 뮤직비디오를 보니 앤드류 리즐리가 더 잘생겼다. 조지 마이클 하면 역시 ‘페이스’를 부를 때다. 깃을 세운 가죽 재킷에 찢어진 청바지에 레이밴을 쓰고 기타를 들고 페이스를 부르는 조지 마이클. 백 잇 모오션 할 때 그 멋진 목소리.


U2의 보노는 이후 눈의 문제로 실내를 제외한 공연,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에는 늘 선글라스를 끼고 공연을 했다. 이제 유투는 돈으로 움직이는 그룹이 아니다. 유투의 보노를 움직이게 하려면 명분이 돈보다 앞서야 한다. 기근이나 전쟁의 문제로 고민이 많은 나라에 유투는 늘 공연을 하러 다녔다. 그래서 일전에 드디어 한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유투, 보노의 목소리가 한반도에 울려 퍼진 것이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제네시스의 더러머였던 필 콜린스도 라이브 에이드 라인업이었다. 필 콜린스의 딸이 릴리 콜린스다. '옥자'에도 나왔다. 이번에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주연을 맡았다. Do They Know It's Christmas 첫 시작의 가슴을 울리는 드럼 소리가 바로 전설의 필 콜린스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폴 매카트니는 몇 해전에 처음으로 한국 공연을 했다. 떼창에 역시 폴은 흡족해했다. 일본에는 다섯 번인가 공연을 했지만 한국 공연은 처음이었다. 이제 라이브 에이드에 나왔던 슈퍼스타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별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좋아하던 데이빗 보위가 별이 되었을 때 그의 노래를 하루 종일 듣기도 했다.

 

지구에서 없어진 저들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공연이 2012년 런던 올림픽의 폐막식이었다. 개막식에서 폴 매카트니가 우리나라 돈으로 10원을 받고 헤이 쥬드를 불렀다. 전 세계 1억 명이 그 노래를 실시간으로 따라 불렀다고 한다. 폐막식에서 아직 살아있었던 조지 마이클이 노래를 불렀고 흩어졌던 스파이스 걸스를 불러 모았고 죽었던 프레디 머큐리를 홀로그램으로 살려냈다. 정말이지 죽이는 공연이었다. 잠 안 자고 새벽까지 버틴 보람이 있었다. 마지막에는 존 레넌을 살려냈다.


영국은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때려 붓는다. 우리는 그래, 우리는 대중문화, 예술이 사람들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무엇이라고 생각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에티오피아를 돕기 위해 만든 노래가 밴드 에이드의 ‘두 데이 노우 잇츠 크리스마스’다.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전쟁과 기근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래의 힘을 막강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후에 이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더 뛰어난 노래 ‘위 아더 월드’가 나오게 된다. 


‘위 아더 월드'가 미국의 슈퍼스타들의 축제라면 밴드 에이드는 노르웨이, 웨일스, 아일랜드가 뭉쳐서 자존심을 걸고 만든 밴드였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빙 크로스비만큼 전 세계에 많이 울려 퍼지는 노래이기도 하다. 위의 밴드 에이드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 뭉친 모습이고, 84년에 기존 라인업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역시 일단 한 번 보고 오자.

https://youtu.be/j3fSknbR7Y4

첫 시작은 에브리타임 유 고 어웨이의 폴 영이 스타트를 끊는다. 카메카메카멜레온 컬처클럽의 보이 조지가 다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보이 조지는 여자 같은 외모와 화장으로 노래도 멋지게 잘 불러서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가슴을 울리게 하는 필 콜린스가 드럼을 두드린다. 필 콜린스의 드럼 소리에는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조지 마이클이 열창을 하고 듀란듀란의 잘생긴 버터왕자 사이먼이 노래를 하고, 지금은 전설의 꼭대기에 있는 스팅과 보노가 노래를 부른다. 


다른 버전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보다 이 뮤직비디오의 음악에는 미칠 것 같은 드럼 소리가 심장을 계속 마시지를 해준다. 다른 버전의 뮤직비디오에는 조지 마이클이 눈물을 흘리면서 끝난다. 그 버전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도 좋다. 


마지막으로 30년이 지난 후 2014년에 다시 Do They Know It's Christmas가 세상에 울려 퍼진다. 보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라인업이 바뀌었다. 새미(샘 스미스), 엘리 굴딩, 크리스 마틴(콜드 플레이), 에드 시런 등 유럽의 현존 슈퍼스타들이 왕창 뭉쳤다. 이들은 바보처럼 꾸준히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노래는 약하지만 노래의 힘은 대단하다. 모두가 소리를 내서 노래를 부를 때 불편한 진실은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https://youtu.be/-w7jyVHocTk 

Band Aid 30 - Do They Know It’s Christma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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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패션 테러는 언제부터였을까. 체육복만 입고 다니며 테러를 일삼은 지도 몇 해가 된 것 같다. 옷을 새로 구입하는 것도 귀찮고 바지도 대체로 한 번에 맞지 않아서 늘 리폼을 해야 하는데 역시 귀찮고, 그래서 대체로 체육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체육복은 실수도 없고 실패도 거의 없다. 거의 없지만 실패가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아마도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고 나서부터여서는 꽤 패션에 신경을 썼다. 휴가 나와서 보니 입을 바지가 없던 나를 보고 선배 누나(의상과)가 자신의 리폼한 반바지를 나에게 입으라고 주었다. 그걸 입었는데 잘 어울렸다. 마치 우리가 부대에서 반바지를 리폼하여 오바로크 처리한 것처럼 딱이었다. 그 청바지로 된 반바지를 입고 말년휴가를 죽 보냈다. 그때부터 대체로 바지는 여자바지를 구입해서 입었다.


남자 바지는 컬러도 마음에 들지 않고 폼이라고 하는 게 전혀 나지 않았다. 허리에서부터 지퍼 덮개 밑부분까지의 길이가 너무 길다. 여자바지는 그 길이가 짧아서 입으면 꽤나 보기가 좋은데 남자 바지는 입으면 마치 펭귄에게 바지를 입혀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나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남자 바지는 남자에게 어울리게 나온다. 하지만 나의 체형은 남자 바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바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늘 수선을 해서 입었지만 잘라내고 뭐 이러면서 바지는 바지대로 볼 품 없어지고 나는 나대로 바지와 따로 놀았다.


게다가 나는 검은색이나 흰색의 단색도 좋아하지만 컬러도 좋아한다. 알록달록도 좋고 주황색, 붉은색, 남색, 청록색이 옷에 가미되면 옷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브랜드로 치자면 비비안 웨스트 우드의 컬러를 좋아한다. 역시 나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 옷을 구입하면 대체로 남자 옷을 구입해서 입을 때보다 실패가 덜 하다. 일하는 곳 옆에는 온통 여자 옷 매장이라 사장님들에게 내가 입을 바지,라고 하면 알아서 이것저것 권유해주기도 한다.


여자 바지를 입었다는 걸 알면 좀 남자답게 입어라, 바지가 그게 뭐냐,라고 하는 고지식한 사람도 주위에 있다. 그렇게 남 옷 입는 거 보고 지적하는 사람 치고 옷 잘 입는 건 보지 못했다. 남자답게 바지를 입는 건 어떤 건지, 남자는 어떤 바지를 입어야 하는지 물어보면 대답도 잘 못한다. 그냥 그건 여자 바지니까 안 돼, 라는 식이다. 영화에서 메그니토가 왜 나쁜지 세상은 알려주지 않고 그냥 너니까, 너의 모습이니까 악으로 지정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상에는 그런 똥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충고를 거침없이 하기도 한다.


충고라는 게, 충고를 하는 사람은 충고를 받는 사람을 위해서 한다는 말(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을 꼭 하는데 반드시 듣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 충고가 어울리는 건 딱 하나, 국민이 국회의원들에게 충고를 할 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지역에서 활동하는, 80년대 초에 등단을 한 안과의사이자 시인이 나의 글을 열심히 보더니 나의 글들에서 카프카의 냄새가 너무 난다, 초현실 적인 글보다 감동이 있는 글을 써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또 나의 글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충고를 해주었다.


나는 진지하게 들었고 다시는 그 시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무한도전을 봐도 감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나빠진 루저 같은 캐릭터들이 무모한 도전을 하더니 점점 그 도전을 이겨내는 모습에서 엄청 감동을 받았다. 절대 못 할 것 같았던 사람들이 해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무한도전을 보면서 나도 절대 못 할 것 같았던 것들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세상은 온통 감동이었다. 고개만 돌리면 감동이 있는데 굳이 나까지 감동적인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글을 나는 적지 못한다.


그런데 조깅을 하면서부터, 다리 운동을 하면서부터 다리가 굵어져 바지가 거의 맞지 않고 체육복을 입고 일을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어서 줄곧 체육복 패션, 그러니까 패션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정말 추운 겨울의 날이 아니면 대체로 스랩빠를 신고 체육복을 걸쳤다. 요즘은 체육복도 꽤나 패션에 신경을 써서 나오기 때문에 무난하게 입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겨울에 코트는 입고 싶은데 바지가 없으니까 코트에 체육복을 그냥 입고 다니기도 했다.


예전에 대한민국 어머니, 아버지들이 등산복을 엄청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덕분에 등산복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해외의 잘 나가는 업체까지 한국으로 죄다 들어왔다. 그때 한 뉴스에서 해외에서도 돋보이는 한국의 패션이라고 깔보는 듯한, 안 좋은 뉘앙스로 기사에 나왔다. 한국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으로 해외의 유명한 곳은 다 다닌다고 그것이 망신스럽다는 투였다. 그때 그 기사를 보면서 기사를 쓴 기자는 아주 편협한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게 왜 이상한 것일까. 그동안 어머니, 아버지들이 얼마나 칙칙한 옷에서 벗어나고 팠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마음껏 뽐내고 싶어서 선택한 옷이 등산복인 게 왜 안 좋게 기사에 실릴 정도로 이상한 것일까. 아들 딸내미들이 엄마, 아버지 선물할 때 고민 없이 등산복을 선물할 수도 있고, 게다가 어딘가 조난을 당하면 컬러 덕분에 조난자를 찾기에도 수월하다. 칙칙한 옷을 입고 노인처럼 있는 것보다 훨씬 보기도 좋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아주 흡족해한다.


나도 체육복만으로 주야장천 다니다가 작년 초에 커피를 마시다가 체육복 바지에 쏟았다. 뜨겁고 얼룩이 지는 것보다 축축해서 앞 집 여자 옷가게서 겨자색 바지를 하나 사 입었다. 이런 바지색은 아주 마음에 든다. 가방은 전통시장에서 구입한 알록달록 오천 원짜리 가방이다. 가방에는 운동복을 넣어 다닌다. 패딩은 앙드레 김 슨생님의 옷이다. 아주 따뜻하고 편하다. 무엇보다 안 그럴 것 같은데 꽤나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이 폼이 난다. 나만의 생각이지만. 양말은 천 원짜리로 한 번에 열 켤레 구입해 놓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옷이 남들과 같으면 싫어하면서도 또 남들보다 튀면 난처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올해 이전 겨울에 길거리에 나가면 모두가 엇비슷한 롱 패딩을 걸치고 다니고, 명랑 핫도그 구입하려고 줄 서 있는데 전부 롱 패딩을 입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기도 했다. 자동차도 그런 것 같다. 남들이 타고 다니는 차와 같은 차는 싫은데 또 튀는 컬러는 난처해서 대부분 엇비슷한 컬러의 차를 구입한다. 무개성의 개성화가 일상으로 깊숙이 침투해 버렸다. 옷이 단순히 알몸뚱이를 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옷은 말보다 자신을 알리는 가장 최 일선에 위치한 무엇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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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 안에 있는 오래된 국밥집에는 대체로 어르신들이 늘 앉아서 자리를 채우고 있거나 밤이면 아버지들이 혼자서 머리를 숙여 소주와 함께 국밥을 먹는다. 요즘은 여자 먹방 유튜버 덕분에 프랜차이즈 국밥집이나 24시간 하는 국밥 잡에는 간간이 여성이 혼자 국밥을 먹기도 하지만 시장통 안에 있는 국밥집의 꼬릿 한 냄새가 나는 국밥 집에는 대체로 남자들, 나이가 있는 남자들 뿐이다.


시장이라는 곳이 정겹기도 한 곳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철수한 밤이면 무서운 곳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이 드문, 장사하는 곳도 몇 집 밖에 없고 컴컴한 전통시장의 깊숙한 곳은 적막에서 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모두 다 같이 밝다가 한꺼번에 어두워지는 마트에서의 적막에서는 알 수 없는 느낌이다.


내가 있는 바닷가에도 전통시장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오래되었다. 전통시장의 국밥집에는 젊은 남자 손님도 없다. 주로 아버지들이다. 주인은 거의 할머니에 가까운 여성이다. 관광지의 사람이 많이 몰리는 위치한 국밥집의 주인이 남자인 경우는 있지만 전통시장 안의 돼지국밥집의 주인은 보통 할머니들이다. 오랫동안 해 온 세월의 흔적을 손가락 끝에 훈장처럼 달고 있다.

돼지국밥은 (비빔밥처럼) 먹는 사람의 스타일에 따라 맛이 다 다르다. 순대를 넣는 곳도 있고, 새우젓이나 깍두기 국물, 밥을 말아먹는 사람, 국수사리를 곁들이는 사람, 술안주로 먹는 사람, 마늘 다진 양념을 넣는 사람, 맑은 국물을 그대로 먹는 사람, 다 다르기 때문에 국밥을 단지 국물을 우려내는 스타일로 맛을 가늠할 수는 없다.


전통시장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국밥집은 밤으로 가는 시간의 길목에 아버님들이 가장 많다. 저녁시간에는 숨차게 보낸 하루의 시름을 달래는 시간이다. 술잔이 오고 가고 국밥을 퍼 먹는 소리가 훈훈하게 들린다. 그런 정경 속에 끼여 국밥을 먹는 재미가 있다. 그때 문이 열리고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국밥을 먹고 있는 어르신들이 일제히 문쪽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국밥을 먹고 소주를 붓는다. 작은 공간의 테이블은 꽉 찼는데 나는 혼자 먹고 있으니 주인 할머니가 합석을 하라고 한다.


여자는 맞은편에 앉아서 물을 마신다. 눈이 마주치니 고개를 살짝 까닥인다. 여자는 레인코트 같은 옷을 입었다. 허리를 묶을 수 있는. 그래서 잘록한 허리가 돋보였다. 높지 않은 힐을 신고 있었고 색이 들어간 안경을 썼는데 들어오니 벗었다. 머리는 진한 갈색에 어깨 밑으로 내려간 긴 머리에 앞머리가 이마를 비켰고 물컵을 집어 드는 손가락에는 살이 없다. 전혀 시장의 국밥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 같다.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백도 없다. 그저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오다가 손을 빼서 문을 열었을 모양이었다.


여자는 태연하게 국밥과 소주를 주문한다. 자연스러운데 말투가 여기 말투가 아니다. 지방 사람이 아니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가방도 없이 이 저무는 시간에, 거기에다가 시장통 안에 있는 이런 허름한 국밥집에, 그리고 꼬릿 한 냄새가 나는 국밥까지, 여기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가출을 할 나이는 더더욱 아니고.


무엇보다 앞에 여자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국밥을 후루룩 먹을 수가 없었다.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으로 털어 넣었다. 여자는 휴대전화도 보지 않고 약간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큰 쟁반에 소주와 함께 국밥이 나오고, 여자는 소주병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지역 소주라서 여자가 마시던 것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국밥이 나오니 숟가락으로 국물을 살짝 떠먹어 보고는 새우젓과 마늘 양념장으로 간을 한 다음 다시 숟가락을 몇 번 국물을 떠먹는다. 음, 맛있네요.라고 했다.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일까. 혼잣말일까. 고개를 들고 말했다면 모를까 고개를 숙이고 국물을 떠먹고는 “맛있네요”라고 내뱉은 말은 도무지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이 허공을 떠다니기만 했다.


그러더니 국밥 안에 있는 밥도 한 숟가락 떠먹고 소주를 따라서 한 잔 마셨다. 이 국밥 집은 토렴 형식이라 국에 밥이 말아져 나온다. 제가 사는 곳에는 이런 맛의 국밥이 없거든요. 라며 확실하게 나에게 말을 했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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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으른 자들 중 최상 위에 있을 정도로 귀찮아하는 일은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생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돌처럼 처음 모양 그대로 가만히 있기도 한다. 보통 집에 있게 되면 돌처럼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귀찮다. 집은 그저 쉬는 곳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박힌 나는 집에 들어가면 게을러터진 인간이 되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귀찮아서 인터넷도 넣지 않았고 더불어 컴퓨터도 없다. 집에서는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흐믈렁 해져 한 번 누우면 아코디언처럼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썩 많지 않다. 매일매일, 쉬지 않고 아침에 나와서 밤에 들어온다. 그래서 아마도 집에서는 동면하는 겨울동물처럼 게을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의식의 흐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줄 안다. 매일 조깅을 하니까. 매일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니까 아주 부지런한 줄 안다. 게다가 매일 일정량의 글을 적고 매일은 아니지만 기간마다 그림을 그려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는 소리 대부분이 대단하네요, 부지런하네요, 같은 말이다. 될 수 있는 한, 버스 두 세 코스 정도의 거리는 걸어 다니며, 매일 그 시간에 와서 카페의 커피를 받아가기 때문에 일하는 점원과 인사를 하고 지낸다. 모두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대꾸는 하지 않는다. 굳이 저는 사실 아주 게으른 인간이고 모든 일을 귀찮아합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에이, 그러면 게으른 사람이 아니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으른 부분? 은 일상을 파고 들어와 정말 혀를 찰 정도로 게으르다. 


매일 조깅을 하는 건, 하루 24시간 중에 나는 거의 20시간을 앉아 있다.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렇게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거래처가 대체로 걸어서 2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어서 자주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온통 대구에 거래처가 있기에 갈 수도 없다. 전부 인터넷과 택배로 일이 이루어진다. 예전에 비해 참 많이 편해졌다. 그런 시스템을 파고들면 역시 사람들도 귀찮은 것을 피하기 위해 시스템이 점점 앉아서 모든 일처리를 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만약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지 않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의 끝은 참혹하다.  


세차도 2년 동안 하지 않아서 생명에 위협을 감수하며 핸들을 돌리고 손목시계를 빼는 게 귀찮아서 24시간 차고 있으며 기기나 카메라도 어느 순간부터 바꾸는 게 귀찮아서 쭈욱 쓰고 있으며, (이건 좀 다른 문제지만) 영화도, 책도 봤던 걸 계속 보고 있다. 또 일하는 곳의 문에 연락처도 없다. 연락 주세요, 같은 문구도 없고 불이 꺼지고 문을 닫은 다음 일 때문에 연락이 오는 건 귀찮고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문이 닫혀 있고 실내의 불이 꺼져 있다면 나는 '여기에' 없기 때문에 연락 같은 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쉬는 날도 없고, 매일 일정한 일과시간에는 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굳이 문을 닫았는데 연락을 받고 통화를 하고 다시 와야 하는 이 모든 일들이 귀찮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집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귀찮다. 집에서 해야 하고 일어나야 하는 마땅한 행위가 너무나도 귀찮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을 때가 있으며 한 자세로 꼼짝없이 있다 보면 몸이 결리고 쑤셔서 그때 자세를 바꾸기도 한다. 누가 현관문 앞에서 딩동 눌러도 나가지 않는다. 왜 그래요? 혹시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요?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 보면 그렇게 딩동 누른 사람들이 중요한 일로 온 적은 없다. 강아지들이 있었을 때에도 집에 가만히 있으면 강아지들도 돌처럼 내 옆에서 가만히 엎드려 있거나 벌러덩 드러누워 있곤 했다. 마치 우리는 애초에 서먹한 사이였던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강아지와 함께 매일 조깅을, 8년 정도 했다. 그래서 집 안에서 키우는 강아지 치고 뒷다리의 근육이 좋았다. 


매일매일 부지런을 떨며 하는 루틴의 일들은 일종의 의식의 발로 같은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그러니까 귀차니즘의 확장은 의식의 흐름 즉 무의식으로의 전환인 것 같다. 후자가 나의 모습에 가깝다. 애초에 나라고 하는 인간은 게을러터진 인간임에 분명한데 그간 지내오면서 교육이나 경험, 사회에 대한 적응과 의무, 책임 같은 것들이 해야 할 일은 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폭넓은 사회와 인간관계에 균열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도 나의 귀차니즘 때문에 웃음이 여러 번 나온다. 

때문에 집에 있게 되었을 때 비가 오면 좋다. 빗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집구석의 정적은 농도가 짙어서 정적이 이어지면 정신적인 세계까지, 영혼이 먹힐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쌓여서 사람들은 집에서 며칠씩 있게 되면 밖으로 기를 쓰고 나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빗소리가 들리면 뇌의 여러 구간에 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시원하고 좋다. 그건 여름 겨울이 따로 없다. 겨울에도 아아처럼 시원한 것이 좋다. 집에서는 책도 읽지 않는다. 책도 읽히지 않으며 음악도 거의 듣지 않는다.


나는 어쩌다가 집에 있게 되면 이토록 게으른 자의 최고봉이 되었을까.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일요일이 되면 오전에 헤드셋을 쓰고 몇 장 있는 레코드판을 열심히 들었다. 생각해보니 집에서 열심히 음악을 들었었다. 그건 꽤나 좋은 기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겨울에 거실로 떨어지는 햇살이 닿는 구역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헤드셋에서 나오는 음악을 두, 세 시간씩 들었다. 토토의 앨범도 들었고,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도 들었다. 물론 바쏘리나 판테라 같은 강한 음악도 좋아했다. 녹아내리는 치즈 같은 햇살을 받으며 앨범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 없이 게을러졌다. 일요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귀차니즘이었다. 그러다 보면 쉬이 오후가 되었다. 

하지만 음악 따위 이제 휴대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고 심지어는 라이브 공연도 모두 볼 수 있다. 정보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집구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종의 마지막 행위가 일찍이 소거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생존을 위해 밥을 차려 먹고 샤워도 한다. 밥을 차려 먹는 건 귀찮은데 먹고 난 후 설거지는 바로바로 해 버린다. 먹자마자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귀찮아서 영영 설거지는 멀어지는 이야기가 된다. 


씻는 건 정말 귀찮은데 샤워하는 건 또 좋다. 그런 것들이 몇몇 있다. 조깅 때문인지 양말의 뒤꿈치가 잘 터진다. 그러면 늘 꿰매 신는다. 양말을 꿰매는 행위는 또 귀찮아하지 않는다. 인간생활을 바람직하게 영위시키는 서적은 귀찮지만 허구로 똘똘 뭉친 소설은 또 좋아한다. 거기까지 가는 건 정말 귀찮은데 운전하는 건 좋아하며, 양치질을 해서 거품이 입 안 가득 나오는 게 좋지만 물로 헹구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40분을 양치질을 할 때도 있다. 양치질을 40분 이상 하면 입을 굳이 헹구러 가지 않아도 되는데 이거 아는 사람이 계시려나. 이 모든 게 집에 있게 되면 집약이 되어서 만사 게을러진다. 집에 화석 인간처럼 있으니 집에서는 배가 잘 고프지도 않고 배가 고파도 한 끼 정도 건너뛰면 어때, 하는 생각이 육체를 누른다.


이런 날은 약속도 잡지 않고 누군가 집에 오는 것도 싫으며 그저 가만히 벽면의 한 곳을 응시하며 보낸다. 그러다가 잠이 오면 잠든다. 마치 영화 속 전두엽을 절제해버린 엑스트라 3처럼 한 자세로 가만히 어딘가를 보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도 귀찮다. 

 


예전의 일이었다. 집에 하루 종일 있게 된 어느 날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벽 저 편에는 바람이 대단했다. 마치 오늘 모든 것을 다 엎어버리고 외설스럽게 생긴 누군가를 데리고 가 버릴 것처럼 포효하고 있다. 계절을 알 길이 없는 바람 소리였다. 벽이 없었다면 아마도 악마의 바람에 할큄을 당해 어떻게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벽을 두지 마라, 벽을 쌓지 마라. 같은 말이 있지만 실체의 '벽'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저 부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절감한다.


집구석의 정막을 깨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거실 공간에 몸을 가만히 두는 것은 개인적으로 쓸데없지만 쓸모없지는 않다. 하찮은 공간 속에서 온전한 ‘나’로써 자유한다. 노래도, 음악도, 소음도 소거된 채 텅 빈 공간 속에 오롯이 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다 정신이 어떠한 세계에 접점 하려는 순간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바람 때문인지 오토바이 소리가 기이하게 들렸다.


그날은 쉬는 날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날 일을 하러 나가서 작업을 하다가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오전에 들어와서 집에 있었을지 가물거리지만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건 꽤 낯설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근 10년 동안의 나를 돌아보면 나의 패턴은 아침 8시 정도에 눈을 뜨면 그대로 집 밖으로 나와서 바닷가의 어딘가에서 쓰고 싶은 소설을 조금 적는다.


한 시간 정도 바짝 적고 나면 오늘의 할당량은 어느 정도 채우게 된다. 그리고 사진관에 출근하여 사진 작업을 하고, 사진을 찍고, 시간의 틈을 벌려 기록이나 일상을 적는다. 무엇보다 그 사이를 잘 벌려 책을 좀 읽는다. 어떻든 이른 시간에 집에 있는 경우는 나의 문화권에는 없다. 몸이 아플 때에도 아침에는 일단 나와서 밖에서 골골 거리며 아파하다가 저녁에 집어 들어갔다.


그렇기에 그 시간에 집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다는 건 오전에 쓸 소설을 조금 쓴 다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전날 사진 작업을 받아서 아마도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 밤을 많이도 지새웠다. 밤을 지새우면 통장에 돈이 굴러들어 온다. 하지만 몸은 나락으로 자꾸 떨어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밤을 지새우는 일은 될 수 있으면 받지 않는 게 낫다.


그날은 정적 속에 내 몸과 마음은 침잠되어 가고 있었다. 먼지의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집의 공간 속에 내 몸은 그대로 ‘집’이라는 안정됨 속에 들어 있었다. 이런 자유는 속박하는 게 아니다. 존재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평소에 누릴 수 없는 자유다. 어디에나 소음이 있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소음을 소거가 가능한 곳이 집이다. 밖에서는 조깅도 하고 사진 작업을 하려면 머리도 써야 하고 손도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지만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런 것 따위 하지 않아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고 나 자신도 점점 집안의 적요에게 스며든다. 


정말 애벌레가 되어서 허리에 무리가 오면 그저 몸을 살며시 돌리는 정도로 가만히 있는다. 적요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딩동 하며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내가 사는 집은 복도식이었다. 한 층에 7집이 있고 내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가깝게 있다. 복도식 아파트의 단점은 그렇지 않은 아파트에 비해 외부인의 출입이 잦다는 것이다.


그래도 관리소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경비원들의 노고로 외부인의 출입이 많이 줄어들었다. 배달과 택배를 제외한 판매원이나 종교인의 출입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벨을 누른 사람들은 종교인들이었다. 딩동 딩동. 하지만 나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렇게 조금 누워있으면 그들은 가게 마련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포교를 하려면 한 집에만 매달리수만은 없다.


딩동 딩동.
하지만 그들은 나의 집 앞에 진드기처럼 붙어서 초인종을 눌렀다. 5분이나 서 있었다. 보통 5분씩 초인종을 누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딩동 딩동. 보통 이 정도 되면 집주인이 나와서 화를 내거나 인기척을 내며 걸쇠를 걸어둔 채 문을 열어서 필요 없으니 가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만큼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인지 계속 초인종을 누를지도 모른다.


저들은 왜 그런지 몰라도 숨죽여 누워있지만 이 집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딩동 딩동. 나는 머리를 들고 허리를 세워 인터폰 화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봤다. 여자 두 명으로 50대로 보였다. 단정한 옷차림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종교적이었다. 조금 뒤에 서 있는 여자는 양손을 앞섶에 모으고 있는데 손에는 성경책 같은 종교서적과 팜플랫을 들고 있었다.


딩동 딩동. 나는 뭐랄까. 저들에게 한 소리를 해야 할, 그만 가라고 해야 할 만한 타이밍을 놓쳤다. 무엇보다 귀찮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저들과 대치를 하게 되었다. 저들이 벨을 누를 때마다 꺼졌던 인터폰 화면이 켜지면서 저들의 얼굴이 조금은 볼록하게 크게 보였다. 단색으로 보이는 화면 속 저들의 얼굴에는 보통 인간이 가져야 할 몇 개의 감정이 빠져나가 있었다.


요컨대 배려라든가, 감정의 동요 같은 것들이 없었다. 물론 온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온화'와 '평온'이 지나쳤다. 저들이 숭배하는 종교적인 힘에 의해 아마도 몇 개의 감정은 가리거나 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들은 벨을 누르고 양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서 저들끼리 소곤소곤 거리며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앞에 선 한 여자가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저들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적요 속에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초능력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아파트에 들어오기 전에 아파트 밑에서 베란다를 보며 물색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적요 속에 몸을 말기 전에 이불을 베란다에 내놓았는데 그 장면을 봤을지도 모른다. 저들은 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소리 없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것이다.


저들은 내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저들이 집에 내가 없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저들은 그런 나의 속 마음을 간파했다.
나는 저들이 내가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더 고요하게 바라보기를 하기로 했다.


벽이 없었다면 저들과의 대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싫든 좋든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좋은 소리가 오고 가지는 못할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은 저들에 비해서 하루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내쪽에서는 손해 보는 것이다. 저들은 초인종을 누르는 간격이 기계처럼 정확했다. 거의 1분 30초 만에 초인종을 누르고 초반에 비해 많은 말을 쏟아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허를 채워줍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나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팜플랫만 드릴 테니 한 번 읽어 보세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마치 눈 앞에 상대가 있다는 것처럼 인터폰 앞으로 와서 스피커를 통해 말을 쏟아냈다. 저들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드물게 집에서 쉬는 날에 나는 저들 때문에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저들의 존재가 귀찮았다.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발바닥에 쥐가 왔다. 조금 움직였다. 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나. 나는 침을 삼켰다.


저들은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쏟아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복도에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옆 집 사람이었다. 저들은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사람 쪽으로 기계처럼 걸어갔다. 좋은 말씀이 있는데요, 라면서. 그리고 옆 집 사람은 관리실에 전화를 해서 아파트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냐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고요는 유리조각이 되었고 잠을 자야지 했던 생각도 달아나 버렸다. 그래도 내가 이겼다. 이 게으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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